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오션 브엉 『기쁨의 황제』, 인플루엔셜 2025
지금, 가장 미국적인 삶
윤수진 尹秀眞
영문학자, 경북대 영어교육과 교수
sujinyoun@knu.ac.kr
『기쁨의 황제』(The Emperor of Gladness , 2025, 한국어판 아밀 옮김)는 지금 미국에서 가장 평범하고 어쩌면 진부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놓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다루는 인물들은 내세울 만한 성취나 뚜렷한 미래의 희망 없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을 근근이 이어나간다. 미국 농촌지역 소도시에 남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에서 빈곤과 중독, 질병과 노쇠는 예외가 아닌 삶의 조건이자 일상이며, 패스트푸드점이나 창고, 공장과 같은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하며 변두리 마을에서 수십년을 살아가는 삶은 시간이 멈춘 듯 고여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 소설이 이러한 삶의 상태를 ‘벗어나야 할 상황’이나 ‘극복의 대상’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떠남과 탈출, 개선과 상승을 향해 나아가는 전형적인 미국 서사—프런티어 신화, 아메리칸 드림, 성공과 자기계발의 이야기—는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기쁨의 황제』가 응시하는 것은 ‘미국적’ 서사의 중심에 놓일 자격을 갖추지 못한, 지금껏 미국 서사가 지나친, 그곳에 남아 머물며 살아가는 가장 평범한 미국인들의 현재이다.
소설의 배경인 코네티컷의 가상 소도시 이스트 글래드니스는 이러한 삶의 조건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공간이다. 한때 산업이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만 남은 이 작은 마을에서는 “모든 집 거실에서 기적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기차가 이 동네에 서는 일은 없다.”(14면) 발전과 변화가 비껴간 쇠락한 공간에 남은 것은 빈곤층과 이민자, 노인들이며 이 소설의 인물들 또한 실패와 상실의 흔적을 몸에 지닌 채 등장한다. 난방도 켜지 못한 채 살아가는 중년여성 모린, 가족의 치료비와 보석금을 위해 저임금 노동을 감내하는 이민자 청년 러시아와 자폐 성향의 소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약물의존 상태에 놓인 난민 2세 하이, 2차대전의 트라우마 속에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독거노인 그라지나까지,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 무너진 상태에 가깝다. 그러나 소설은 이들을 고립된 개인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일터인 패스트푸드 식당 홈마켓의 주방과 낡은 주거공간, 소도시의 제한된 동선 안에서 이들은 서로를 감지하고 의지하며, 아무것도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오늘 하루를 견디게 하는 최소한의 돌봄을 주고받는다.
변화도 발전도, 극적인 사건이나 해결의 서사도 없는 『기쁨의 황제』 속 삶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소설이 되기 어려운 종류의 이야기다. 반복되는 노동과 출구 없는 소진의 시간이 이어질 뿐이다. 그럼에도 오션 브엉(Ocean Vuong)은 특유의 생생한 시적 언어와 그 삶을 살아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핍진성과 진정성으로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를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문학적 사건으로 만든다. 코네티컷 소도시에서의 성장, 베트남 이민자이자 노동 빈곤층이었던 가정환경, 10대 시절부터 이어진 저임금 노동의 경험 등 브엉의 자전적 배경은 소설 장면들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으며, 작품에 단단한 현실감을 부여한다. 특히 패스트푸드 식당과 돼지 도축장에서의 노동 장면에 드러나는 감각의 밀도와 잔혹함은 이 이야기가 상상이나 관념이 아닌 몸의 기억에서 유래함을 분명히 한다.
『기쁨의 황제』는 이 지점에서 미국문학에서 오랫동안 희미해졌던 노동계급 소설의 계보를 되살린다. 브엉이 제시하는 21세기 미국의 노동소설은 전통적인 제조업이나 백인 남성 중심의 노동이 아니라, 인종・이주・퀴어 경험으로 재구성된 저임금 서비스 노동을 서사의 토대로 삼는다. 닭장처럼 좁은 주방에서 장시간 몸을 맞대며 움직이는 노동의 육체성과 물질성이 집요하게 묘사되며, 몸의 마모, 통증과 약물의존은 노동의 부수적 결과가 아니라 핵심적인 경험으로 제시된다. 소설은 구조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지만, 화학적으로 가공된 인스턴트 음식을 ‘할머니의 맛’으로 포장해 판매하는 패스트푸드 산업은 자유와 풍요의 언어 뒤에 숨은 착취의 구조를 드러내면서 미국이라는 기만적 유토피아의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나아가 소설의 마지막에 인간처럼 비명을 지르는 돼지떼는 이러한 체계 안에서 끊임없이 노동하며 서서히 소모되어가는 노동자의 몸에 대한 은유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소설은 월터 벤 마이클스(Walter Benn Michaels)가 제기한 현대 미국소설 비판에 대한 뒤늦은 응답으로 읽힐 수 있다. 마이클스는 1980~90년대 이후 미국문학이 불평등과 계급의 문제를 회피한 채 인종이나 이민, 홀로코스트 등으로 대변되는 정체성과 개인 서사에 몰두해왔다고 진단하며, 자본주의의 구조적 실패를 사유하는 새로운 미국소설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토니 모리슨의 노벨상 수상과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인들에게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자기위안을 제공했고, 그 결과 불평등의 문제를 다시 물어야 할 문학적 긴급성은 망각되었다는 것이다(“Going Boom,” Book Forum, 2009년 2/3월호). 소설의 시간적 배경을 2009년으로 명확히 제시하며 현 대통령이 오바마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환기하는 『기쁨의 황제』의 서사적 장치는 이와 같이 국가적 희망의 기운이 절정에 달한 순간에도 버려지고 잊혀진 채 남겨진 존재들을 반어적으로 가시화한다.
“밀레니얼세대를 위한 위대한 미국소설”이라는 한 매체의 평가처럼 이 소설은 미국문학이 무엇을 ‘미국적 삶’으로 간주해왔는가라는 질문을 21세기에 다시 던지며 미국소설의 역사에 문제적으로 개입한다. 소설의 서두를 여는 이스트 글래드니스의 지리적 공간에 대한 긴 묘사와 작품 전반에서 지속적으로 소환되는 『제5도살장』의 존재감은 이러한 문학사적 개입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19세기 미국문학이 광활하고 웅장한 자연풍경을 통해 형상화했던 ‘미국성’은 이 소설에서 쇠락하고 소진된 현대 미국의 일상적 공간으로 대체되며, 포스트모던 문학의 냉소적 아이러니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진심과 서툴지만 단념하지 않는 돌봄의 감각으로 채워진다. 『기쁨의 황제』는 이렇게 미국문학의 익숙한 좌표들을 미세하게 이동시키며, 지금 이 순간 가장 미국적인 삶이 어디에 있는지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다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