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구중서 『문화의 힘, 사람의 길』, 창비 2025
체온을 가진 고전들에 관한 보고서
김형수 金炯洙
시인, 소설가
millemi@hanmail.net
우리가 가진 창의력의 고향은 추상적 세계가 아니라 육신을 기른 대지의 문화이다. 구중서 산문집 『문화의 힘, 사람의 길』은 내가 근래에 읽은 책 중에서 이를 가장 명료하게 구현한 문화사적 저술이었다. 장르가 에세이라는 점은 이야기가 담고 있는 현실의 원형을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하는 장치일 것이다. 위대한—그러나 그의 생시에는 그렇게 평가받지 못했을 수도 있는—예술가 한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수많은 미학적 양식이 함께 움직인다는 걸 우리는 이 책에서처럼 직접 대면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다. 모든 형태의 문화유산이 파손되기 쉽지만, 체온을 가진 고전들은 특히 그렇다. 생명의 흔적과 숨결을 보존하는 건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까닭이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지식인이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들, 즉 존재와 존재 사이의 결속력을 만들며 공동선의 거점이 될 연민과 연대감을 제공하는 문화가 어떻게 해서 개인의 성숙만 아니라 사회적 성숙의 근거가 되는가를 깨닫게 하는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첫 글 「문화의 힘으로 살아가는 나라」에서 칸트의 산책 이야기로 시작된 인간과 대지의 관계는 자연스레 저자가 걸어온 길을 엿보게 한다. 그는 경기도 광주 일대의 유교문화를 토대로, 또 이후 서양의 가톨릭과 조선의 실학 정신을 만나며 리얼리즘이라는 하나의 태도를 구축하고, 그를 통해 이 책에서 신라 향가에서 현대시조를 거쳐서 한강의 소설까지를 섭렵한다. 이 책이 다른 문화사 개론과 다른 점은 개괄적 서술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과 사건들 속에서 내용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가령 첫 글에서 언급된 16대조 묘 앞에서 시제 지내던 집안의 서당 이야기가 이후 글에서 가사문학의 상징인 「면앙정가」(俛仰亭歌)의 송순(宋純)과 더불어, 식영정·소쇄원이 있는 담양에서 송순과 사제관계를 형성한 송강(松江) 정철(鄭澈) 같은 후학의 이야기로 연결되는(「하늘과 땅 사이」) 흐름은 저자의 눈길이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한 시대의 정신사가 치열한 세계의 복판을 가로지르는 실천적 지성에 있음을 알려준다.
연대순이나 작가별로 틀 잡혀 쓰이지 않은 각각의 모자이크 원고들이 그러나 일목요연한 통시적 민족문화사를 구성하는 이유는 저자의 확고한 가치관에 있다. ‘지금 여기’라는 관점, 리얼리즘 정신, 그리고 문화적 가치의 추구야말로 이 책의 일관된 주제를 이룬다. 저자는 고대 시가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도 자신이 존재 자체로 영원에 참여하는 장(場)이라 할 ‘지금 여기’의 숨결을 놓치지 않는다. 현대세계를 설명할 때도 “9·11 테러의 희생자가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인한 미국인 사망자 수와 비슷”하고, “2020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은 미국인은 2차대전의 미군 전사자 수보다 더 많다”(「지금 여기의 문학으로」 101면)는 사실을 상기하는 힘은 리얼리즘 정신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저자의 덕담이 독자에게 닿을 때는 “지금 내가 선 자리의 삶은 무엇인가. 현실과 역사 안에서의 의미는 무엇인가”(「문화의 힘으로 살아가는 나라」 22면) 하는 질문으로 바뀐다.
개인의 내면에서 샘솟은 마음이 자아와 대지의 관계를 재구성하며 사회를 하나의 생명체로 만드는 것이 문화이다. 오늘날 세계에선 한때 뜨거운 열정을 불렀던 정치적 해방과 자유, 평등, 민주주의의 가치들도 ‘삶의 질’을 추구하는 단계로 옮겨가고, ‘발전’이라는 말도 경제성장을 뜻하던 차원에서 ‘문화적 성숙’을 의미하는 쪽으로 빠르게 수정되는 중이다. 이때 필요한 창조적 자질은 각자의 문화 원형에 대한 감수성에서 습득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한동안 문화의 원형에 대한 감성을 파괴당하고 망각했으며 전승하려는 노력도 그간에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천민성과 몰가치의 극복을 우리의 최우선 과제로 올려놓으며, 정치나 경제의 하위영역이던 문화를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실천을 담는 형식이자 목적으로 전환하는 태도는 매우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최근 한국문학과 한국사상에 대한 부각과 자부가 새롭게 피어나는 가운데서도 의미있게 견지해야 할 태도일 것이다
삶의 환희와 고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한다. 나는 1985년에 출판사에 취직하여 운 좋게 양성우 시집 『5월제』(청사 1986)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발문 필자가 구중서였다. 사려 깊은 문화를 체득한 인격체를 만나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원고를 받으러 가서 차를 마시면서 들었던 나지막하고 느린 음성이 잊히지 않는다. 그로부터 물경 40년 가까이 선생의 그림자는 내가 고향 뒷산처럼 지나다니던 산그늘이었다. 문화적 관용이 넉넉하던 시절이라 나는 거리에서 그를 마주치고 인사 올리기를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실에 ‘不憂國非詩也’(나라를 걱정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라는 액자가 걸려 있어서 서예를 하시는구나, 또 낙관에 찍힌 글씨가 광산(廣山)이어서 호가 ‘너른뫼’인가보다 하는 따위를 나는 누구에게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막연한 느낌 하나로, 일상의 깊은 곳에 감춰진 심미적 이상을 나는 알 수 없지만 의지해왔다
오랜 세월 속에 쌓인 느낌을 명확히 하는 일은 책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전통이나 현대를 그 자체로 환영해야 하는 건 아닐 터이다. 고전도 권위도 어떤 것은 분명히 억압적인 성격을 갖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한국의 문사들에게 전해오는 동서양의 ‘클래식’이라 할 만한 문화적 표정의 내면을 확인하는 과정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그간 풍문으로 들었던 한국문단의 숱한 전설의 원본을 증언하고 있으니, 가령 구상이라는 시인이 전후세대의 좌우 양쪽에서 존중받는 이유를 알 수 있었고, 1960년대 명동 시절의 박봉우 천상병 신동문 이야기를 눈물 흘리며 읽었다. 여기에는 내가 문학을 갈망하면서 꿈꾸었던 인간의 온기와 사랑과 절망에 관한 오리지널리티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남몰래 세계를 잃어가는 노년의 슬픔을 엿보았다고 할까? 이건 가슴이 아파서 꺼내기 망설여지지만, 아주 가까운 과거가 정말로 우리에게 ‘낯선 대륙’이 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노인 한명이 사망하는 것은, 한개의 도서관이 불태워져 없어지는 것과도 같다.” 누가 했는지도 모르는 이 말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을 쳤다. 신경림이라는 거대 도서관이 사라진 자리에서 저자가 울고 서 있다는 고독이, 특히나 「신경림 시인을 보내며」라는 추도문을 읽으며 엄습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