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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워릭 앤더슨 『서양과학은 없다』, 이음 2025
근대세계의 탈식민화를 위한 과학기술학
노승미 盧昇美
한림대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
malang.roh@gmail.com
과학기술 발전이 민족중흥과 맞물려 있던 주변부에서 성장한 과학사회학 연구자로서, 지금 한껏 하이프(hype)되어 있는 AI 빅테크들이 국가경쟁력이자 안보의 주축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보며 느끼는 숨막힘이 있다. 역시나 ‘소버린 AI’(Sovereign AI, 외국 빅테크에 의존하지 않는 자국 중심의 AI 구축 및 운영)라는 거대한 기술정책이 작동하고, 인공지능과 관련된 전문가들의 과도한 예견도 거리낌없이 미디어를 채운다. AI에 대한 비판은 물론 윤리와 규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AI 기술을 통한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과녁은 이미 지상과제가 되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역사를 통과하면서 공통점 없던 대륙들이 ‘주변부’라는 호명으로 묶이며 겪는 영원한 결핍의 딜레마가 이 시점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위기이지만 구원이며, 저항하지만 종속되는 패턴의 드라마 속에 서구 과학기술은 언제나 그 중추에 존재한다. 저항하기 위해서, 혹은 경쟁하기 위해서 서양의 과학기술은 다시금 주변부 국가들의 민족주의적 존재론과 결합한다. 여기서 과학기술학(STS)자들은 다시 이중의 과제에 직면한다. 한편으로 테크노사이언스라는 제국의 광범위한 지적 헤게모니와 인식규범을 비식민화하고 과학적 행위능력을 분산시키는 과제이고(138면),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만의 특별한 근대성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존재론적 정치에서 과학학을 분리해야 하는 과제다(66면).
20세기를 지나며 식민지였던 지역들은 다시 냉전의 정책과 직결된 도구 주의적 관심으로 미국의 지역학이 만들어내는 엄격한 지정학적 공간 좌표에 따라 나뉘어졌다. 그 방향을 거스르고자 하는 탈식민주의 이론들이 지적 비식민화를 위한 장치를 제공했으나 과학이라는 주제는 탈식민주의적 역사연구에서도 드물게만 언급될 뿐이다. 과학은 언제나 ‘장소 없음의 관점’(the view form nowhere, 131면)을 통해 자신의 글로벌한 힘의 벡터를 비가시화하고, 그러한 족적에서 혼종되고 오염된 것들을 삭제한다. 하지만 테크노사이언스가 가진 권력의 벡터장은 상업화된 과학기술, 지식재산권 독점을 통해 글로벌 밸류체인을 식민화하는 패권 등의 형태로 선명히 드러난다. 순수 서양과학의 규제적 감각은 마치 ‘귀신성’(ghostliness, 13면)처럼 주변부 대륙과 그곳의 지식인들에게 들러붙지만, 탈식민주의적 과학기술학의 접근은 그런 귀신성을 가시화하고 서구 과학지식의 권위를 불안정화하며 대안적인 지식들의 존재론에 상대성의 시공간 좌표를 부여하고자 도전한다.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의 대표자라 해도 무리가 없을 워릭 앤더슨(Warwick Anderson)의 이 책은 근대세계를 만들어온 동력이자 여전히 끝나지 않은 식민주의의 심연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이라는 해상도 높은 렌즈를 제공하는 기획이다.
이 책을 읽으며, 오로지 수학적인 자연과학의 사고모형을 통해 이론의 자기정위(定位)를 구축한 서구 근대과학에서 통용된 인식론의 편향이 그 나머지 지식에 가한 폭력성을 거듭 생각한다. 그 폭력성은 정밀과학의 제국주의적 전파를 마치 오염시킬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하고, 또한 그 단층적 흐름에 지역의 국지적 힘들은 어떤 영향조차 미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듯 20세기 말 지식생산의 독점적 주권을 주장하거나 패권주의적 전제를 세우는 거대서사들에 대한 과학학의 도전이 확산되었고, 1990년대 초부터 일본, 대만, 한국에서 과학기술학 연구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앤더슨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85면), 혹은 ‘두터운 트랜스지역주의’(148면)라는 논점을 영어권 과학기술학에 끌고 들어와 그 자체로 새로운 논점을 구성한다. 근대세계를 만든 주요 동력이었던 식민주의를 테크노사이언스의 내부에서 인식하게 만드는 비판정신이자 방법으로서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이란, 식민주의가 만들어온 세계에 대한 사유를 벼리는 강력한 장치다. 즉, 이 책에서 앤더슨이 설명하는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은 과학·기술·의학의 식민주의적 전제와 구조를 설명하는 관점이며, 나아가 보편적 지식의 주제를 서구에 동일시하는 지식장의 통합된 좌표계를 탈주하면서 접촉하게 되는 지역화의 대안적 이론들을 생산하는 힘이다.
탈식민주의 이론은 줄곧 기존 지식체계로 쉽게 번역되지 않는 비주류 문헌들을 생산한다. 이런 지적 행위 자체는 전지구적인 유럽중심주의의 보편성 주장을 기능장애에 빠지도록 만들면서 새로운 수행성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서구식 지적 습성에 길들여진 기성 지식인들은 탈식민주의의 윤리적 타당성에 동감하면서도 여전히 낡은 질문을 던진다. “탈식민주의가 특수하고 환원불가능한 지식을 주장하기 위한 어떤 특정한 장소와 연결될 때, 그것이 지식과 장소를 묶어 하나의 특성을 만들어내는 존재론을 옹호”(65면)하게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혹은 “더 일반적인 틀이 없으면 우리는 지역사들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 것”(33면)아닌가 하는 질문들 말이다. 앤더슨의 글쓰기는 이런 염려들 사이에서 길을 뚫는다. 다만 저자가 닦아주는 것은 좁고 구부러진 길이라, 자칫 지식의 보편성 혹은 그 반대로 근본주의적 존재론을 주장하고 싶은 열망들로 인해 미끄러져버리기 쉬운 어떤 길이다. 그의 제자이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지역 과학사와 과학기술학 연구자인 이종식 카이스트 교수를 통해 편역된 이 책에서 앤더슨은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을 단일한 이론이나 통합적 방법론으로 소개하지 않고, 탈식민주의적인 것은 “느낌적인 느낌”(194면)이라고 말한다. 사실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를 ‘횡설수설’(ramblings)이라고 표현했다는데, 이 자기풍자의 농담마저도 보편적 지식의 주제와 방법론을 서구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이들에게 던지는 돌직구로 느껴진다. 해상도가 높은 안경을 쓰면 처음엔 어지럽지만 곧 익숙해진다. 어쩌면 저자의 횡설수설은 우리를 식민화해온 당위성을 미끄러지게 하는 효과를 가리키는 은유이자, 식민화된 세계에 대해 질문하는 다층적 존재들을 한데 섞지 않고 드러내는 방법이다. 때로 글쓰기는 그 자체로 방법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퀴어링,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 등 여러 이론의 이름들이 서로를 변주하고 교차하면서 더 깊고 복잡한 이론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런 이론들은 곧 투쟁의 장을 마련하는 정치의 수단이 된다. 식민주의로 구축된 세계에서 인식론적 합리성의 헤게모니는 말할 것도 없고 자본주의와 군사화의 중추를 장악한 테크노사이언스에 대항하기 위해 지역의 존재론과 방법을 다시 쓰는 과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겁다. 더불어 모든 지식을 확률빈도분포의 정규성을 통해 학습하는 AI는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조우로부터 위치지어지는 모든 지식을 자꾸만 납작하게 만든다. 대략 90퍼센트 이상이 영어 데이터로 학습된 생성형 AI는 미국과 문화적으로 가까운 지역일수록 더욱 인간처럼 느껴진다고 하는데, 이런 AI는 향후 주변부를 비롯한 전세계 젊은 세대 교육에 활용될 비중이 가장 높다. 보편적으로 정제된 지식과 손쉬운 확실성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현시점에서, 작은 책이 비추고자 하는 좁은 길에 대한 ‘느낌적인 느낌’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