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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기형도와 1980년대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현재 미국 블루밍턴 소재 인디애너대학 영문과 방문연구원. 주요 평론으로 「보들레르와 근대」 「李箱과 식민지근대」 「최근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관하여」 등이 있음. jatw19@netian.com

 

 

1. 시대와 작품의 경계

 

어느 시대든 저변에 꿈틀거리는 뭇사람들의 기세는 어떤 틀에도 딱 맞지 않게 마련이지만, 그런 기세가 가르는 데 일조하는 시대의 경계도 십년이나 백년 단위로 정확히 나눠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1979년 10월 26일의 총성에서 시작해 1987년 6월 10일 시민들의 함성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는 80년대는 함성의 열기로써 5·17 내란을 사법적으로 단죄한 싯점에 주목할 경우 1993년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비로소 막을 내린다는 말도 가능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 철폐부터 1990년 10월 3일의 공식 통독과 이듬해 소련연방 해체가 국내에 연쇄적으로 끼친 여파를 고려하면 어떨까? 그 충격이 뒤흔든 남한 지식계의 숱한 환멸과 탈주 그리고 도리없는 희망까지를 기억한다면, 어떤 면에서 90년대는 80년대와의 단절이기는커녕 그 연장이었다는 판정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단적으로 신경숙의 『외딴방』과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올해 제3회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방현석의 중편 「존재의 형식」처럼 80년대의 참모습을 증언한 작품은 90년 이후에야 제대로 씌어지지 않았던가.

이런 맥락에서, 모든 작품이 읽혀지기를 기다리는 텍스트라기보다는 독자의 열성이 따라야만 온전한 향유가 가능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주된 근거도 지난 시간을 현재 삶의 일부로 만드는–그로써 있음직한 미래를 예감케 하는–그 ‘힘’에 있다고 본다. 1960년 3월 13일 경기도 연평리에서 태어나 1989년 3월 7일 새벽에 종로2가 부근 심야극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기형도(奇亨度) 시의 현재적 의의도 그런 힘에서 나온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런데 작가의 여린 속살을 작품을 통해 더듬지 않고서는, 역으로 역사의 냉엄한 진실을 외면하고서는 비평의 객관성이나 사심없음도 말짱 빈말임은 누구나 원칙적으로 인정할 수 있겠지만,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로 등단한 기형도는 좀 특별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시대와 개인의 삼투(渗透)적 진실이라든가 ‘기형도 현상’이라고 부를 만한, 사후에 쏟아진 요절문인에 대한 뜨거운 각광 때문만이 아니다. 80년대 문학에 관한 논의가 간간이 이어지는 근래에도 기형도는 80년대의 시인으로 화제가 되지 않는 듯하고, 타계한 후 쏟아진 비평들을 읽노라면 다분히 세기말적 수사로 분칠된 인상만 남는 것이다. 그럴수록 대중의 관심을 자상하게 분별해볼 필요가 있겠고 작품보다 대중적 인기를 앞세운 비평가의 평가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지만, 중요한 점은 역시 그의 시가 오늘의 현실에 살아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2. 80년대의무거움과 비가

 

1980년대를 주름잡은 ‘젊은 시인들’을 헤아릴라치면 고인이 된 해남 출신의 김남주와 노동자시인 박노해가 먼저 떠오른다. 변혁의 전위로서 시를 무기로 삼았으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는 놈인가 구차한 삶을 떠나/밤별이 곱다고 노래할 수 없는 놈인가”(「가엾은 리얼리스트」)라고 나지막이 속내를 실토한 김남주와 프레스에 잘려진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묻고 또 묻는”(「손 무덤」) 현실을 ‘노동자의 몸’으로 절규한 박노해의 시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90년대 들어 『인간의 시간』(1996)으로 한층 빛을 발한 백무산이나 『인부수첩』(1986) 『우리들의 사랑가』(1991)로 알려진 노동자시인 김해화 또한 80년대 시인이다. 빠진 이름이 더 많음은 말할 것 없고 필자의 독서 부족도 부끄럽지만, 당시 시단에 첫선을 보인 몇몇 얼굴만 떠올려도 최근에 『무언가 찾아올 적엔』을 상재한 하종오를 비롯하여 김사인, 김정환, 김용택, 윤재철, 황지우, 박영근, 곽재구, 최두석, 고(故) 고정희 등이 있으니, 어느덧 문단의 중진이 되어버린 이들의 면면은 그때가 빈곤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풍요라고 딱 부러지게 단정하기도 주저된다. “7,80년대의 민중시는 실제로 반성할 대목이 많다. 과연 그 시들 가운데서 좋은 시로 우리 문학사에 남아 독자의 사랑을 받을 시가 몇편이나 될까”1라는 자책이 격류의 세월을 작품으로 올곧게 버틴 신경림 시인의 입에서 나온 것임을 곱씹어보면 더욱이나 그러하다. 80년대 시단이 (신경림 본인이 같은 글에서 그 역사적·사회적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전제를 단) 일제시대 카프 시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작품들을 생산한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그 시절의 어떤 시인이 후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호언하기 힘든 것은, 소위 예술성과 민중성의 변증법적 성취를 규명하는 것이 그만큼 까다롭고 다른 한편 ‘독자의 사랑’이라는 것이 문학시장에서의 성공과 일치하지 않는 예도 많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공식 지면으로 겨우 5년 남짓 활동한 기형도의 사후 대중적 이미지가2 그의 시세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주, 즉 절망과 고독, 회한, 사랑과 희망 상실, 죽음의 예감 등에서 형성되고 증폭된다는 것은 짚어봐야 할 문제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모더니즘’과 친연성이 강한 특질들이다. 동시에 세기말 담론으로 묶을 수 있는 그것은 그를 다룬 평자들이 한결같이 화두로 내세운 일종의 개념적 지표이기도 하다. 기형도에 대한 가능한 가장 피상적인 이해로서 퇴폐적이라는 비판을 상정하면서 그의 시세계가 열어놓은 새로운 지평을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3으로 집약한 김현의 비평적 조사(弔辭)야말로 매너리즘의 진원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 하는 기준 자체가 시를 읽을 때 본질적인 판단기준은 물론 아니고 망자에 대한 절절한 추모의 염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이후 성행한(죽음이라는 단어가 감초 역할을 하는) 기형도 비평의 상투성은 사실상 그의 조사가 조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따지고 들어가면 그런 매너리즘은 기형도 자신의 시들에서 시작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도저한 부정’이라는 언설조차 시시하게 만드는 작품을 기형도 스스로가 꺼져가는 체온으로 품었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病」 전문

 

1979년에 기록된 이같은 참경(慘景)이 절절할수록 오히려 우리는 죽음이네 절망이네 하는 비평적 언사의 무기력함을 새삼 확인한다. 그러기에 필자는 5주기 추모문집의 16수, 미발표시 20수를 포함해 도합 97편이 실린 전집을 관통하는 기형도 특유의 감수성에 주목하면서 그런 감수성이 8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만나면서 빚어낸 작품다운 작품을 우선하여 논하고자 한다.

기형도가 불과 스무살 나이에 「병(病)」과 같은 시를 남긴 데는 자전적 맥락이 강한 듯하다. 아버지의 중풍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체험한 고아원 생활과 가난의 쓰라림은 단편소설 「영하의 바람」(1979)에 짙게 담겨 있는데, 삶의 바닥모를 고통을 실존적으로 응시하는 지식인의 고뇌는 단편 「겨울의 끝」이나 「환상일지」 등에서도 여실하다. 하지만 당대 현실과 시인 정서의 시적인 균형은 역시 그의 내밀한 가정사를 엿볼 수 있는 7편의 「겨울 판화(版畵)」 연작시를 비롯해 「위험한 가계(家系)·1969」 「폭풍의 언덕」 등에서 제대로 유지된다. 1960,70년대의 일상적 풍경일 뿐만 아니라 80년대 들어 계급적 각성으로 타도하자고 한 배고픔과 빈곤의 현실이 ‘가족시편’에서는 한 개인의–그 자신 일기에 “외로움을 타개해나가는 속에서 스스로 슬기를 얻어나가는 과정”(『기형도 전집』 328면)이라고 적은–내면적 성숙의 일부로 다뤄지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그 변혁의 시대에서 인간적 자존심을 짓밟는 불평등을 타파하는 데 무수한 시들이 복무했고, 그중에는 지금까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도 있다. 그럼에도 신경림 시인이 「시인이란 무엇인가」에서 적시한 대로, 살아가는 민중의 구체적인 애환보다는 이상(理想)적 추상에 빠지면서 현실의 아픔을 감상적으로 소비한 작품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당장 하루하루가 힘에 겨운 독자들의 반응도 그쪽으로 더 쏠렸던 듯하다. 이제 와서 좀더 나은 세계를 꿈꾼 시절의 열망을 폄훼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치적 폭압의 그늘에서 서러운 일상을 견디는 진정으로 생동하는 인간다움을 실감케 하는 작품이 드물었음은 엄연한 사실이고, 세기가 바뀐 이 순간에도 꿈다운 꿈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주기 위해 지난 연대의 문학이 안고 있는 한계에 눈감을 수는 없겠다는 뜻이다.

그 점에서도 기형도의 (가장(家長)의 병마나 실직과 함께 찾아오게 마련인) 궁핍의 체험이 한 개인의 가정사로만 한정되지 않는, 80년대를 지배한 ‘공적 정서’의 일부임은 강조되어야 하겠다. 빈한하고 찢겨진 가계를 시화(詩化)하는 작가의 자세가 절망과 고독을 통과하면서 극기(克己)적 사유에 가까워진다는 사실도 내밀한 정서의 공적 성격을 놓치지 않을 때 확실해진다. 아버지가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진 가정에서 일어날 법한 생존의 몸부림을 여린 심성의 눈으로 포착한 「위험한 가계(家系)·1969」(1986)도 그런 사실을 확인해주는 수작이다. 독자의 마음을 아릿하게 하는, 일기처럼 써내려간 일상의 절박함은 80년대의 여느 노동시나 현장시 못지않거니와, 헐벗은 마음이지만 인간적 자긍심을 지켜나가고 또 그런 자긍심을 통해 마침내 희망을 배우면서 온전한 가족공동체, 한 개인의 자기다워지는 길이 모색되는 것이다. 그 당시 성행한 전투적 이념시들의 생경함을 벗어버린 가족시편의 감동은 거기서 느껴진다. 일찍이 김관식 시인이 「병상록(病床錄)」 같은 시에서 선비의 결곡한 음성으로 배고픔의 설움을 견디는 정신의 승리에 대해 노래했지만, 기형도도 그 못지않게 가난의 일상을 다른 무엇으로 관념화하지 않으면서 생활의 기억에 충실하다. 「위험한 가계(家系)·1969」의 마지막 대목에서 맞는 극적인 반전–“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이 독자에게 삶의 불꽃 같은 환희를 안겨주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동시에 지적함직한 것은, 상장(賞狀)을 강물에 띄워보내며 설움을 삼킨 한 소년의 그같은 환희가 ‘공적 정서’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시인 개인의 내밀한 체험을 떠나서는 실감하기 힘든 자기성숙의 과정이라는 사실이다.“아주 먼 옛날/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그 시절, 내 유년”의 살가웠던 기억을 아스라이 되살린 「엄마 걱정」이나 「귀가(歸家)」 「도로시를 위하여」 등은 유년의 지워지지 않는, 감상(感傷)이 배어 있을 수밖에 없는 흔적들이 성인이 된 시인의 마음을 지켜주는 현재임을 말해준다. 그 점에서도 생의 절망과 슬픔을 비의적인 언어의 성(城)으로 쌓아올렸다고 평가받는 기형도의 작품에서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은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그 시절”의 진실에 온몸을 맡기면서 감상과 죽음의 유혹을 뿌리친 노래들임을 상기해야 하겠다. 붉어진 눈시울에는 감상과 연민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차라리 인간적이라 하겠지만, 절절한 비원(悲願)으로써 만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만이 인간 서정의 보편적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전문

 

「빈집」(1989)이 단순한 감상과 애상의 산물이 될 수 없는 것은, 한 인간이 지켜내고자 애쓰는 ‘아름다운 영혼’이 시에 숨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인이 잃었다고 하는 사랑은 특정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나 동경으로 국한되지 않는, 어떤 면에서는 ‘님’의 상실에 더 가까운 시대적 인상마저 준다. 어쩌면 6·10항쟁으로 기억되는 민주주의의 승리가 혁혁할수록 그 승리의 뒤안길에서 상처입은 마음을 기록하는 시가 더 절박했는지도 모른다. 호명되는 짧았던 밤들과 겨울안개들, 촛불들, 흰 종이들, 눈물들이 환기하는 것은 문학청년의 열망이다. 그 불면(不眠)의 열망은 탄식과 절망으로 끝나는 듯한 마지막 2행에서도 잠들지 않고 독자의 가슴으로 번진다. 꿈들을 못내 떠나보내면서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마침내 읽는이의 것으로 만드는 ‘애상’의 역설적인 힘이 반복되는 영탄(詠嘆)에 스며 있는 것이다. 90년대 도시문화의 신세대적 감수성으로 추앙받은 시인의 작품들, 가령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하재봉의 「비디오/천국」(1990) 등과 기형도를 구분케 하는 것도 독자로 하여금 애상을 안고 넘어서게 하는 바로 그런 열망과 사랑의 진정성이다.4

물론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1·3·6이나 「대숲의 떨림처럼」 「대숲을 보며」같이 세기말에 유행병처럼 번진 소비문화의 풍조를 내부고발자의 시각으로 신랄하게 풍자하면서도 한가닥 ‘성숙의 염원’을 독자의 가슴 깊이 묻는 유하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1)는 지금 읽어도 새롭다. 이후 나온 그의 『세상의 모든 저녁』(1993)이나 『천일馬화』(2000)도 ‘가벼움’이 풍미하는 시대를 가볍게 떨치는 검객으로서의 자태를 뽐낸다. 다른 한편 이런 점을 흔쾌히 인정해도,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구현하는 ‘비개인성의 경지’를 지향하는 기형도의 시적 면모는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평가할 만한 무게를 지닌다. 지금도 기형도는 수많은 독자의 감상을 자극하면서 그런 감상의 극복을 지향하는 개인의 꿈을 비창(悲愴)으로 일깨움으로써 여러 동료작가들에게 풍요로운 영감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3. ‘기형도 현상’과 시대의 진실

 

하지만 기형도 시의 성격을 좀더 엄밀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은 물론, 절망과 죽음의 수사적 미학화(美學化)라고 규정할 만한 기형도 담론까지 비평대상에 넣어야 하리라 본다. 그의 시를 분석하면서 언어의 성(城)이니 뭐니 하면서 온갖 논리를 끌어들이면서 평자들이 지금껏 기형도를 기린 것은 삶의 환멸과 불행의식,사(死)의 예찬에 불과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격동의 시대와 마주선 고뇌를 담은 작품을 엄밀하게 읽는 대신 생의 패배의식을 이런저런 이론이나 분석으로 포장하는 데 치우친 것이다.5 90년대에 일어난 ‘기형도 현상’의 상당부분이 거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거대담론이 무너진 90년대의 들뜬 분위기에 편승한 평단의 태만이 명백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으로 포괄되면서 작가에게 알게모르게 창작방향을 ‘지시한’ 노동시, 현장시, 민중시 등이 시단을 장악한 80년대에 기형도가 남긴,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어느 범주에도 잘 들지 않는 작품을 평자들은 세기말적 언설로 치장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탈이념의 썰물이 사회 전반을 휩쓴 90년대의 지적 풍토에서 ‘기형도 현상’은 시인 자신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점도 없지 않다. 아니, 전체적으로 기형도 시 자체가 80년대의 빛과 어둠 모두를 행복한 시적 균형으로 아우르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징표는 무엇보다 설익은 양식화된 언어와 대상에 스며들어 호흡하지 못하는 수사에서 감지된다. 그런 예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비유를 멋지게 조련할수록 생경함이 묻어나는 초기작 「제대병(除隊兵)」(1982)도 그렇지만,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 떠 있다”(「白夜」, 1985)라든가 “어두운 차창 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 나무들”(「鳥致院」, 1986),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植木際」, 1987), “나는/외투 깊숙이 의문부호 몇 개를 구겨넣고/바람의 철망을 찢으며 걸었다”(「겨울, 우리들의 都市」, 1981)“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비가 2–붉은 달」, 1982) 등은 멋스러움을 위해 언어를 남용한 예다.6 그런 남용 때문에 멋스러움이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못하고, 특이하게 채색된 듯한 이국적 정경(情景)들도 80년대의 현장과 겉돌고 어딘가 낯익게 양식화된 매너리즘에 가깝다는 느낌을 강하게 남긴다.7

환멸의 서정과 멋스러움의 남용, 이국적 정경 등이 80년대에 대한 반발로서의–현실사회주의의 파탄이라는 세계정세가 힘을 실어준–탈이념과 소비주의 풍조와 어울린다는 것은 두말 할 것 없는바, 기형도가 누린 대중적 인기도 상당부분 90년대의 (일부) 정서와 맞아떨어지는 시에서 나온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밋빛 인생」, 1987)거나 “나는 불행하다/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진눈깨비」, 1988),“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1988),“個人으로 살기에는 너무도 힘겨운 世上”(「거리에서」, 1981) 등과 같은 탄식과 자조, 자학의 편린 들을 화려한 자기부정의 수사로 부풀린 시들이야말로 ‘기형도 현상’의 내발적 원인임이 한층 분명해진다.

기형도 시의 그런 문제는 「가을 무덤–祭亡妹歌」 「노을」 「전문가(專門家)」 「질투는 나의 힘」 「홀린 사람」 「가을에」 등 그 자신의 좀더 잘된 작품과 비교할 때 더 뚜렷하다. 요컨대 전집에서 눈에 두드러지는 양식화된 표현과 과도한 영탄조, 지적 관념어 및 비유의 남발,8 시대적 배경과 따로 노는 이국적 정조 등이 시에 끼치는 영향은 개별 시의 구체적 맥락을 두고 판단해야 할 사안이지만, 불행의식에서 발원하여 시세계에 독특한 낭만성을 부여한 자기부정과 수사적 언어구사만으로는 시대를 넘어서는 수명을 얻기 어렵다고 본다. 슬픔이 힘이 되지 못하는, 관념의 편린을 담은 시편들은 교과서적인 비유와 수사법을 반복하면서 정신주의적 자학의 굴레를 벗지 못한 결과다.

그러나 그같은 반복과 굴레를 떨치면서 드높은 기상(氣像)에 다다른 그의 최상 작품은 태작과는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또한 대중의 사랑이란 지난 삶의 진실과 힘이 오늘에도 퇴색하지 않았음을 증언하는, 작품이 작품으로서 살아 있기에 이름없는 민중이 주는 선물이며, 그런 선물의 선사는 한 시대의 정신적 유산이 전수되는 특유의 방식이기도 함을 ‘기형도 현상’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보통시민으로 80년대를 살아간 기형도의 인간적인 모습도 좀더 자세히 살펴봄직한데,9 그럴 때 툭하면 꼬리표처럼 붙여지는 소시민의 전망 부재라는–그런 언설 자체가 시대의 한계인 면이 없지 않은–비판도 어떤 면에서는 80년대의 현장에 충실하고자 한 기자(記者)로서의 시인에 대한 왜곡에 해당한다. 그것은 독재나 불의에 항거하는 전위의 용맹함은 아니었지만, 소시민의 비굴함도 아니었다.80년대의 때가 그의 작품에 너무도 안 묻었다는 사실, 주로 80년대 민족문학진영에서 활발하게 실험된 전통양식들, 가령 마당극, 굿시, 판소리가락, 담시 등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사려깊게 검토해볼 일이다. 그런 그의 작품에 ‘민중적 체취’가 배어 있다면 정확히 어떤 흥취를 독자에게 전달하는가는 뒤에서 살펴볼 참이다. 먼저 염두에 둘 것은, 현실의 속살을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자의 토로에 가까운 목소리를 시대의 현실을 앞세워 깎아내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대학 시절」) 털어놓는 대학생활을 거친 독자라면 왜 그런 폄훼가 위험한가를 잘 알 것이다.

1989년에 유작(遺作)으로 발표된 「입 속의 검은 잎」을 대할 때 실감하는 것도 주어진 시대의 어둠을 끈질기게 반추하는 시인의 자세다. 합당한 예를 받지 못한 죽음들에 숨죽였던 8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강렬하게 환기하는 이 시에는 기형도가 일선 기자로서 첨예하게 인식했음이 분명한 80년대의 사회현실이 표면으로 드러나거나 고발되지는 않는다. 따지고 보면 기형도를 두고 문단의 한쪽에서는 열광적으로 반응한 반면 다른 쪽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한 것도10 그런 ‘드러나지 않음’과도 상관있을 듯한데, 「입 속의 검은 잎」에서 확인하는 것도 그런 침묵의 어색함과 죽음의 미학을 완성한 모더니스트로 평가하는 기형도 담론의 맹목이다.11

횡설수설처럼 논리의 가닥이 끊기듯 이어지면서 개인의 내면에 똬리를 튼 시대의 어둠을 드러내는 「입 속의 검은 잎」은 이렇게 시작한다.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이 첫 4행은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는 진술로 이어진다.“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시인에게서 지식인의 무기력을 상기하는 것은 ‘터진 그 일’ 때문이다. 안개가 자욱한 벌판, 검은 잎들로 덮인 땅바닥,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튀어나오는 흰 연기 등이 환기하는 묘한 초현실적 분위기에 80년대의 맥락이 실리는 것이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터진 ‘그 일’은 무엇인가.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는 말은 그 일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14~19행까지 묘사되는, ‘그’의 의문사와 장례식 행렬 및 침묵으로 암시되는 긴장을 80년대 변혁운동의 좌절과 희망이라는 자장으로 끌어들이고픈 유혹이 생기지만, 유혹이 강한 만큼 시 ‘바깥의 문맥’이라는 것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설혹 80년대라는 맥락에서 ‘그 일’이 가리키는 것이 80년 5월 광주의 비극이고 그런 비극에서 초래된 정신적 외상으로 인해 방황하는 청춘의 미로가 시의 내용이라고 해도, 광주에서 터진 ‘그 일’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내용을 끝까지 정독한다 하더라도 ‘광주’는 암시로 그칠 뿐 그 참혹했던 비극을 발설하지는 않는다. 택시 운전사는 장례식의 행렬을 이끄는 저승사자이고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는 ‘그 일’로 신문에 나고 얼마 후 사망한 인물임이 밝혀지지만, 또 화자인 나는 “어디서/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며 떨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80년 광주 및 이후의 어지러운 정치상황을 언표하는 시는 아니다. 오히려 그같은 ‘언표’에 관한한 명백한 역사적 사건을 은유적 침묵으로 감싸는 것이 기형도 고유의 화법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러나 그 화법은 난해한 예술언어의 양식적 실험이나 웅변으로서의 침묵 따위로는 온전히 설명 안되는 것이다. 그 나름의 현실인식이 없이는 형식실험의 파격도 공허해지기 십상일 터인데, 관건은 역시 시대의 비극을 입에 담기가 힘들수록 깊고 맑아지는 시인의 시적 양심이다.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라는, 역사를 증언하는 세치 혀의 무서움에 대한 시인의 정직한 자기고백이야말로 「잎 속의 검은 잎」을 시로서 살아 있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훌륭한 시의 조건에 시대의 정신상황에 대한 증언까지 포함된다면, 그 증언의 가치는 여타의 산문적 필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의 정곡을 찌르는 한에서만 유효할 것이다. 그리고 그 증언으로서의 가치가 표현의 기발함이나 시어의 조탁(彫琢)에만 있지 않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기형도가 드러낸, ‘현장’의 외곽을 맴도는 과정에서 직설과 구호로는 다 채워지지 않던 당대의 진실은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그런 ‘망자의 혀’를 통해 시대를 증언하기에 삶의 애상과 절망을 노래하면서도 결코 그에 굴하지 않은 기형도의 면모가 부각된다. 6·10항쟁 이후 내면의 암투와 분열로 얼룩진 80년대 종반 지식인 세계와 원대한 사상들이 그 왜소한 실체를 드러낸 90년대의 무수한 (자기)배반을 의식하면서 기형도를 읽을 때, 우리는 그의 낭만적 서정도 자기를 지키는 힘겨운 노력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시대와 정면으로 마주하기 힘들수록 집단주의에 몸을 숨긴 그 시절에 그는 실존적 고독이나 지적 초연함 등과도 다른 ‘홀로 살아 있음’을 거듭 다짐한 것이다.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비가 2–붉은 달」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을 신뢰하는 “위대한 혼자”는 민중들의 밑바닥 생활현장일수록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할진대, 생활과 유리된 이념이나 사상만으로는 결코 살아질 수 없는 삶의 좌절과 환희를 구가하는 시는 시간의 숨과 고독에 대한 신뢰에서 싹튼다. 생활과 겉도는 설익은 사상들이 ‘남루한 옷으로 떠돈’ 그 시절의 아픔과 진실을 비가(悲歌)에 값하는 격정과 열정으로 달래고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모색이 개성을 사칭하는 감수성의 허세를 떨치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시의 기도

 

“밤 1시. 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일까.” 1982년 9월 25일자 「참회록–일기 초」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것은 우문(愚問)이다. 구원할 수 ‘있다’ 혹은 ‘없다’의 구분은 이미 시에 기능이나 효용의 틀을 뒤집어 씌운다. 따라서 어떠한 예술장르가 최초에 성립되었을 때 본연적으로 갖는 기능이란 두말할 필요 없이 ‘있음’에 귀착한다. 따라서 이러한 질문은 그 질문이 던져져야 하는 상황과의 투쟁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미 ‘시’의 왜소화, 편협화, 무기력화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일 것이다.”(『기형도 전집』 331면) 80년대의 맹목적 집단심리와 관념을 부리는 지식인의 이기적 허상을 예리하게 풍자한 「홀린 사람」이나 전체주의 통제의 그늘이 얼마나 기만적인 빛으로 가장하고 있는가를 우의적으로 그린 「전문가(專門家)」 및 저항과 실천의 참뜻을 묻는 「소리의 뼈」도 예술을 변혁운동에 동원하는 시대일수록 잊기 쉬운 참다운 ‘있음’과 시의 무기력화·왜소화에 대한 성찰의 산물이다. 참신앙이란 무엇보다 생활에 충실해야 함을 보여주는 한편 그런 충실한 삶이 충만한 만큼이나 세인들의 힐난을 감수해야 하는 가시밭길임을 암시하는 「우리 동네 목사님」 역시 ‘질문이 던져져야 하는 상황’과 씨름한 흔적이다.

그가 누구 못지않게 80년대라는 주어진 시대를 철저하게 살았고 또 방황했음은 시작(詩作) 싯점이 1981년 9월 8일로 명시된 「노을」에서도 알 수 있다.“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가는 日常의 恐怖/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그대여”라는 반문만큼 5·18 이후 침묵에 빠져든 지식인 사회에서 통절하게 요구되는 것도 없었을 것이다.“勝負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뒤흔”든다는 인식은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가는 착각을 때때로 불러일으키는 지금도 확고해야 하리라 본다. 기형도의 이런 시를 문학도(文學徒) 개인의 내밀하고도 절절한 심경고백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80년대의 역사적 문맥에 놓고 읽어야 함은 앞서 시사한 바 있지만, 개인과 사회라는 두 개념도 한 뜨거운 개성이 문득 자신의 동시대적 삶에 입문하는 하나의 접점으로 수렴되지 않는 한 독립적 범주로서 온전할 수 없는 것이다.

장강(長江)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릴케 풍의 비가를 떠올리는, 정신적 싸움의 드높은 고양을 삶의 향유로 노래한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1985)도 시인의 그같은 접점이 어떻게 한데 모아지는가를 실감케 한다. 판에 박힌 민중시나 순수시와는 전혀 다른 가락과 개성을 거침없이 뿜어낸 기형도의 절창 중 하나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삶의 등가물로서 제시된 고드름과 시인의 정신 사이에는 어떤 기계적인 유비도 성립하기 힘든 열정적인 조응이 살아숨쉬고 있다.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라고 묻는 고고한 기백은 (시대와의 불화라는) 천형을 짊어진 시인의 운명을 생각나게 한다. 그런 운명의 비감어린 낭만화는 보들레르나 랭보 등의 시에서 탁월한 표현을 획득한, 군중의 시대에서 개인의 자존(自尊)을 표현하는 최상의 발성법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축복과 천형을 대립시키는 발상은 더이상 새롭지 않다. 하지만 그 대립과정에서 터져나오는 윤리적 열정만은 기형도 특유의 것이다. 한 개인 고유의 비원이기에 보편적인 비감(悲感)을 획득하는 순간에 도달하는 시인의 사유도 윤리적 열정에서 가지를 치며 자라난다. 창조적 사유와 긴장관계를 이루는 그같은 열정은 낭만성을 포괄하는 서정적 격조의 드높음을 동반하는바, 시인의 방황은 관념의 성좌를 헤매는 지적 유희와 양립할 수 없다. 또한 권태와 무관심이 근대인에게 최대의 형벌이라면, 오직 더 넓고 깊은 삶의 향유만이 그런 형벌에 굴하지 않는 길일 것이다. 그 향유는 역설적으로 최고도의 극기(克己)를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떠도는 자의 발걸음을 수직으로 지상을 향하는 고드름과 대비하면서 시인은 재차 묻는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는 인간 기형도가 숨죽이며 지향한 시인상(詩人像)이기도 하리라는 심증도 우리는 지상의 삶을 축복하는 자의 천형을 극기로써 받아들이려는 싸움에서 확인한다.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을 염려하는 섬세한 영혼의 고뇌에서도 삶의 긍정은 치열하게 살아 있다. 물론 그런 긍정과 믿음을 회의하게 하는, 허무와 절망으로 가득 찬 냉엄한 현실은 이 작품에도 줄곧 배경을 이룬다. 하지만 ‘나의 죽음들’ 이후에도 계속될 ‘정신의 싸움’을 암시하는 3연은 절망이 빚어낸 피안으로의 회귀와도 다른 고뇌의 흔적들로 채워진다. 이어 마지막 연은 이렇게 끝난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해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구차한 삶을 떠나/밤별이 곱다고 노래”(김남주 「가엾은 리얼리스트」)하는 일이 힘들었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고드름과 같은 예사로운 일상에 이처럼 거침없이 대담한 비유와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도 드물 것이다. 대담무쌍한 기상(奇想)도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삶을 내버려둘 수 없다는 정열과 어우러진 시의 기도(祈禱)는 80년대 젊은이들의 고민과 희열에 열렬한 낭만성과 진정성을 부여한다.“몹쓸 어둠이 걷히”기를 기다리는 인내는 “나 또한 얼마만큼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라는 물음을 낳거니와,80년대 시단에서 시대의 어두움을 응시하면서 이토록 교교(皎皎)한 힘의 수사학으로 독자의 심금을 울린 시는 결코 흔치 않다.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은 죽음을 비웃는 해탈도 아니며, 그렇다고 생활을 방기하는 풍자도 아닌, 문자 그대로 삶을 갈구하는 사나운 영혼의 시다.

그런 기형도가 노동의 현장을 담은 시를 남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게 씌어진 시가 노동시나 현장시의 상투성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다. 진정으로 당대의 시인임으로 해서 후대에도 살아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딱히 기형도의 시만은 아닐 터인데, 본고에서 「병(病)」을 맨 앞에 다룬 데 이어 초기작에 속하는 「폐광촌(廢鑛村)」(1981)을 마지막으로 논하는 것도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낳은 작품들이야말로 오늘의 현실에 살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병(病)」에서 「폐광촌(廢鑛村)」으로 옮겨가는 논리적 수순은 시대적 삶을 의식하는 논술상의 계산이라기보다는 망자(亡者) 기형도의 때이른 죽음을 기억하는 산 자의 논리인 동시에 그의 생과 작품 자체가 요구하는 비판적 읽기인 것이다.

 

쉽사리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우리는 젖은 이마 몇 개 불빛으로 분별하였다.

밤은 기나긴 정적의 숯으로 우리를 속이려 들었지만

탐조등으로 빗발을 쑤시면

언제든지 두서너 개 은칼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후에 빗물을 털어버린 시간이

허기의 바람을 펄럭이며 다가오고

우리는 낄낄거리며

쉽사리 틈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잔등에

시뻘건 불의 구멍을 뚫곤 하였다.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성을 띠면서 때론 ‘민중’으로 등치되기도 한 80년대의 광산촌과 광부들의 노동은 실상과는 무관하게 혁명의 거처로 해석되기도 했다. 민중을 관념적으로 상정하면서 그 분노를 시화(詩化)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인용 대목도 손색이 없달 수는 없다. 노동현장의 실감은 실감대로 되살려지는 과정에서 그 시적 흥취와 “아직도 지켜야 할 것”에 대한 염원이 시어의 불필요한 추상성과 장식적 수사를 떨치면서 광부와 같은 노동자에게까지 전해지는가 하고 묻는다면, 유보를 두어야 할 대목이–가령 박노해의 「지문을 부른다」와 함께 읽으면 더욱–눈에 띄기 때문이다. 앞서 기형도의 이국적 정조를 언급했지만, 비유에 탐닉하는 도시감성의 어떤 ‘고급한 편향’은 충분히 가시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두번째 연의 첫마디 “누군가 불타는 머리 끝에서 물방울 몇 알을 훅훅 털며/낮은 소리로 군가를 불렀다. 후렴처럼/누군가 불더미에 무연탄 한 삽을 끼얹었고”로 옮겨가면 그같은 편향도 얼마간 누그러진다. 기형도가 탐닉한 장식적 멋과 수사(修辭)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한다고 해도, 삶으로서의 노동을 구현하는 시 자체를 외면해서는 곤란하다.“아아, 고인 채 부릅뜬 몇 개 물의 눈들이/빛나며 또 사라져갔다”는 대목에서도 광부들의 절망과 희망은 다같이 아련하지 않은가.

 

우리도 한때는 아름다운 불씨였다.

적막이 어둠보다 더욱 짙은 공포임을

흰 뼈만 남은 驛舍까지도 알고 있었다.

깊은 잠 한가운데 폭풍이 일어 우리가 식은땀을 꺼낼 때마다

어둠의 깃 한쪽을 허물고

예리하게 잘린 철로의 허리가 하얗게 일어섰다. 그럴 때면

밤의 절벽에 이마를 깨뜨리면서

우리는 지게의 멜빵을 달았다. 애초부터

우리에게 화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적막, 공포, 식은땀, 철로의 허리, 밤의 절벽 등이 비유적으로 환기하는 것은 노동현장의 팽팽한 기운이다. 지난 연대의 일부 문단에서는 이것이 과연 광부들의 노동에 대한 정확한 사실적 재현인가 하는 논쟁부터 벌어졌겠지만, 그런 정확성 여부도 「폐광촌(廢鑛村)」이 한편의 시로서 던지는 시적 울림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지식인의 눈에 비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는 이같은 시적 재현이 기여하는 바가 궁극적으로 무엇이냐는 것인데, 화덕의 불씨를 살리는 시적 재현은 광부들의 가쁜 일상을 환기하는 효과를 낳는다. 노동은 오직 삶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곧이어 바람으로 불려갈 석탄에 삽날을 꽂으며 이제는/각자의 생을 퍼담아야 할 차례”임이 강조되는 것이다.

 

역사를 걸어나올 때

무개화차 위에서 타는 불꽃을

잠 깬 등뒤로 얼른 우리는 빼앗았다.

아아, 그곳에는

아직도 남겨져야 할 것이 있었다.

폐광촌 역사에는

아직도 쿵쿵 타올라야 할 것이 있었다.

 

‘불씨’에 대한 집념은 미래의 것, ‘우리의 것’으로 남아 있다. 광부들의 노동을 혁명의지를 담보하는 어떤 추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기형도는 현실적 노동의 “아름다운 불씨”를 되살려놓으면서 폐광촌에 남겨져야 할 것에 대한 다짐의 여운을 남긴다. 산업화 과정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노동자들의 가슴에서 “아직도 쿵쿵 타올라야 할 것이 있”다면 이는 그들만의 불꽃은 아닐 것이며, 그리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나아가 이 시가 지식인의 관념적 말놀음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산업역군들의 현장에서 타올라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시적 성취의 엄밀한 평가로 깊어져야 마땅하다. 표현을 달리해보면, 기형도의 당대성은 80년대 풀뿌리민중의 체취 및 연대의식을 달라진 시대에 맞게 새로운 활력으로 되살림으로써만 온전히 확인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는 풀이도 가능하다.

 

 

5. 80년대를 위하여

 

한 시대의 시작과 끝을 정의하는 일, 나아가 불의를 바로잡는 민중의 보이지 않는 저력을 인식하는 일이 결코 연표에만 근거할 수 없음은 서두에서도 언급했다. 그런데 생활인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자칫 숫자놀음에 그칠 수 있는 시대구분 논의 못지않게, 유산의 알맹이를 새롭게 이어받고 갈망하는 슬기가 아닐까 한다. 어떤 면에서는 70년대의 본질적 연속이면서 민중의 자각에서 질적인 도약을 이룩해낸 80년대 문학의 경우도 그런 슬기를 각별히 요구한다. 현 싯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을 들먹이면서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그때 현안으로 제기된 문제가 우리 시대의 첨예한 쟁점으로 형태를 달리한 채 이월된 데 있을 것이다. 분단이 그러하고 외세가 그러하고 자유와 평등이 여전히 그러하지 않은가. 물론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시대상이 있는 법이고, 80년대를 거치면서 이룩한 민족민주운동의 진전도 실로 눈부셨다. 눈부신 만큼 민족문학이라는 간판에 맞지 않는 작품은 묵살되거나 왜곡된 경우도 없지 않았다. 80년대 민족문학 또는 민중문학 진영의 평자들이 기형도를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을뿐더러 반대편에 선 논자들 역시 그 실제 시적 성취에 밝지 못했음은 한 요절시인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보면 90년대의 ‘기형도 붐’도 유산의 알맹이를 찾아 계승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80년대의 모든 진지한 변혁의 고투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풍조에 더 가까웠고, 기형도의 시적 한계가 그런 이데올로기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최상 작품에 주목하면서도 비판을 생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장르의 예술이든 후대 사람들의 지성스런 되살림을 통해서 연명되는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80년대 자체가 기형도의 진가를 가린 데 일말의 책임이 있고, 어둡고도 밝았던 시대의 생채기로 인해 그의 시세계가 한계를 안고 있다면 그리고 기존 비평들이 그 복합적인 공과를 온당하게 규명하고 평가하는 데 미흡했다면, 그의 작품을 당시의 문맥으로 돌려보냄으로써 그 생명을 되살리는 읽기는 독자의 계속되는 과제로 남는다. 비단 기형도를 재평가하는 데 국한되지 않는 그런 시읽기는 우리로 하여금 지난날은 물론, 앞으로의 삶에서도 무엇을 버리고 취할 것인가까지 성찰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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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경림 시집 『뿔』(창작과비평사 2002)에 수록된 산문 「시인이란 무엇인가」 참조.
  2. 시 인용은 『기형도 전집』(문학과지성사 1999)에 근거한다. 첫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은 그의 사후에 세상에 선보였다. 이후 『기형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살림 1990), 여러 평문과 기형도 관련 글을 모아놓은 기형도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솔 1994)가 연이어 나왔다.
  3. 김현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입 속의 검은 잎』 해설) 참조. 기형도 시를 두고 퇴폐적이라는 비판을 상정하는 대목은 당시 문단의 ‘대세’인 현실주의 문학의 도식성을 겨냥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김현이 기형도의 시세계를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으로 정의한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같은 현실주의의 기계적 반동(反動)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4. 그러나 시에서 그런 진정성을 ‘측정’하는 것만큼 위태로운 비평행위가 또 있을까? 위태롭기 때문에 한마디 더 한다면, 「빈집」에는 가령 최영미의 「선운사에서」와 같은, 그 울림이 딱히 여성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잘빠진 연애시의 절제된 서정하고도 사뭇 다른 비감의 밀도가 있다.
  5. 단적인 사례 하나만 들어보자.“기형도에게 죽음은 의미의 종말이 아니라 의미의 시원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기형도 시의 미학적 장소가 그의 작품들에 있지 않고 그의 시들과 그의 죽음 사이에 가로놓여져 있음을 알려준다. 죽음과 더불어 그의 시가 태어났으니 죽음이 없는 한 그의 시도 없는 것이다. 기형도 시의 핵자 혹은 중심은 그의 시 바깥에 있다. 혹은 그것은 그의 ‘영원히 닫힌 빈방’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빈방과 바깥의 ‘공중’ 사이에 있다. 이런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정과리 「죽음 옆의 삶, 삶 안의 죽음–『기형도 전집』에 부쳐」, 『문학과사회』 1999년여름호 781면) 기형도에 대한 비평가적 애정을 가지고 시인 이성복이 그에게 끼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적시한다든가(같은 글 787면) 하는 미덕도 있는 글이지만, 이런 진술들의 반복은 말장난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6. 실제 시력(詩歷)이 10년에 불과한 기형도의 시를 과연 초·중·후기로 나눌 수 있으며 그 ‘발전양상’의 단층이 어떻게 갈라지는가 하는 점은 좀더 검토해봐야 할 과제다. 다만, 위에서 인용한 시 대목들의 창작년도가 말해주듯이 기형도는 ‘발전’의 단계가 뚜렷하지 않은 조숙한 면모를 아울러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7. 문맥에서 떼어내어 논증하는 것은 가급적 피해야겠지만, “왜 우리는 세상에 이 크나큰 빈 箱子 속에 툭/툭 採集되어야 했을까”(「거리에서」),“그런데 지금까지 내 생을 스푼질해온 것은 무엇이었을까”(「雨中의 나이」) 등이 그러하다.
  8. 이 점은 여러 논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가령 정과리, 앞의 글 789~91면 참조.
  9. 그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동료문인들이 애틋한 추모글을 남겼는데, 최근의 것으로는 하재봉 「죽음을 예감했던 마지막 시 ‘빈집’」(『시인세계』2003년 여름호)이 있다.
  10. 완전히 침묵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다만, 『한국현대대표시선 III』(창작과비평사 1993)에는 「안개」와 「조치원」이 실렸는데, 그에 대한 이해에서 시대적 편향 같은 것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 두 편의 시에서 군부독재의 상징적 비유를 읽어내는 것이 그러한데(같은 책 217면), 시의 선택과 평가가 80년대 시대상황을 앞세운 소재적 잣대로 좌우된다는 느낌이다.
  11. 여기서도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오생근 「삶의 어둠과 영원한 청춘의 죽음–기형도의 시」(『동서문학』 2001년 여름호)는 일독에 값하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