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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

 

백낙청 白樂晴

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문학평론집 이외의 저서로 『흔들리는 분단체제』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 『21세기의 한반도 구상』(공저) 등이 있음.  paiknc@snu.ac.kr

 

 

* 본고의 바탕이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사망 25주년이 된 작년 11월 호주 월롱공대학(University of Wollongong)에서 열린 ‘박정희시대: 25년 뒤의 재평가’(The Park Era: A Reassessment After Twenty-five Years)라는 국제학술회의에서의 기조연설문이다.(기조연설자는 두 명이었는데 경제분야를 주로 다룬 첫날은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2수석비서관이 맡았고 정치·사회·문화 분야에 치중한 둘째날이 내 차례였다.) 사전에 준비한 ‘How to Think About the Park Chung Hee Era’라는 제목의 원고가 회의자료로 배포되었지만, 실제 구두발표는 전날의 토의내용을 감안해서 약간 보완했으며 그후 이 발표에 가깝게 수정하고 몇개의 각주를 추가한 글을 2005년 2월 창비 홈페이지 영문판에 올린 바 있다(www.changbi.com/english/related/related22.asp). 본고는 주로 후자의 내용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지만 국내독자를 위한 글임을 의식해서 원문에 집착하지 않고 첨삭했다. 이 자리를 빌려 국제학술회의를 주관하고 필자를 초청해준 월롱공대학(당시. 현 호주국립대)의 김형아 박사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국제학술회의 ‘박정희시대: 25년 뒤의 재평가’ 주최측에서 나를 기조연설자의 한 사람으로 초청한 것은 아마도 박정희(朴正熙)시대에 대한 첫날 기조연설의 매우 긍정적인 평가와 균형을 맞출 비판적 내용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발표가 실제로 그런 비판을 담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른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강력한 최고경영자(CEO)로서 박정희가 지녔던 여러 장점에 대한 오원철(吳源哲) 전 청와대 수석 등 여러 사람의 주장 대부분을 나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다만 하나의 나라는 결코 기업체나 공장이 아니며 전혀 다른 차원의 고려도 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영어로 What to think가 아니라 How to think about the Park Chung Hee Era―라는 제목은 전문성은 물론 최소한의 교양독서조차 부족한 나의 고민을 반영한다. 제대로 된 평가를 하고 결론을 내리기보다 이 과제에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를 주로 생각해보려는 취지이다.

박정희시대가 박정희 개인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 박정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그 시대에 대한 평가를 크게 좌우함은 불가피한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한국에서 박정희에 대한 반응은 찬반대립이 뚜렷하며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박정희시대를 직접 겪은 사람들이 아직껏 많이 생존하여 활동하고 있는바, 그중에는 박정희의 통치에 직접 가담했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 통치의 덕을 보았고 상당한 기득권을 갖게 된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박정희 치하에서 고문과 투옥, 재산이나 기타 권익의 박탈을 겪은 희생자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을 함께 겪었거나 심지어 가까운 사람을 영영 잃어버린 가족과 친지 들도 있다.

그 어느 한쪽도 객관적 재평가의 최적임자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4반세기 뒤의 평가가 최대한으로 객관적일 필요가 있다고는 해도, 동시에 이런 살아있는 육성들에 귀기울이지 않은 어떠한 학문적 평가도 온전한 객관성을 자랑할 수 없다. 특히 피해자들의 육성을 들을 필요성이 절실한데, 이들의 육성은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억압되었던데다가 우여곡절 끝에 가청권(可聽圈)에 들어온 경우에도 학자들이 좋아하는 ‘객관적 자료’에 편입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적 희생과 고난을 근대화 과정에서 어차피 불가피한 ‘부수적 손상’(collateral damage)쯤으로 여기는 태도는 피해자들의 인간적 분노를 야기함은 물론, 학문적 작업의 수준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십상이다. 최근 들어 과거의 어두운 진실들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이를 외면했던 역사적 평가들의 객관성 자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개인적으로 나는 박정희독재의 피해를 특별히 심하게 입은 경우는 아니다. 다만 대학교수로서나 문학평론가로서, 또 잡지편집자이자 출판인으로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박정희시대의 탄압을 직접 경험하거나 근거리에서 목격한 바 있다.1 이를 근거로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 성취가 좁은 의미의 인권과 민주적 가치의 영역에 국한될 성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주화 자체가 경제발전에 대한 장기적 기여를 포함한다고 믿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더 논하기로 한다.

그러나 대체로 박정희 개인이나 박정희시대의 업적으로 거론되는 경제분야에 대해 민주화진영이 소홀한 면모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민주화운동은 노동자의 권리와 공해억제를 주장하고 부정부패, 정경유착 등 각종 천민자본주의적 행태를 규탄하는 데 앞장서기는 했지만, 한국경제를 어떻게 발전시킬지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제안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반정부인사들은 주로 인권탄압을 이유로 박정희의 산업화 추진방식에 반대했으며, 특히 문인들의 경우에는 농촌의 전통적 생활양식을 함부로 파괴하는 데 대한 반발이 추가로 작용하기도 했다. 급속한 공업화와 새마을운동 같은 농촌개조를 통해 전래의 농촌생활을 파괴하는 것을 비판한 일은 물론 뜻있는 작업이었지만, 그것이 우리가 자본주의적 근대에 실제로 어떻게 적응할지, 아니 박정희식 근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서조차 충분한 답은 못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맑스주의와 종속이론의 영향을 받은 급진적 분파들은 대규모의 외자도입에 의존하는 수출주도형 성장의 모델을 배격하고 좀더 ‘내포적인’(문자 그대로 자급자족형은 아니지만) 발전노선을 제창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상황과 한국의 세계체제 내 위치가 실제로 열어놓은 가능성들에 대한 인식 면에서 개방형 모델이 더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국제회의의 첫날 토론에서 이 ‘한국식 고도성장 모델’의 창안자를 누구로 볼 것인가에 관해 논란이 벌어졌는데, 경제성장의 단계론을 주장한 로스토우(W. W. Rostow)로부터 박정희 휘하의 이런저런 인물들이 거론됐지만 어느 한 사람으로 중론이 모이지는 못했다. 어디까지나 문외한의 견해지만 나 자신은 이와 관련해서도 박정희의 ‘지적 재산권’을 인정하는 데 인색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의 개념이야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었으나, 실제 성과를 좌우하는 요인은 수출전략과 다른 전략들의 특정한 배합―정치적 탄압과 사회적 획일화를 포함해서―이었으며 경제성장을 추진하면서 이 ‘한국식’ 배합을 그때그때의 결정을 통해 만들어나간 주역이 박정희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배합이 고속성장뿐 아니라 역사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최선의 것이었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실제로 그것이 ‘재평가’ 작업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동시에 경제분야에서 박정희의 상당한 공로를 인정하더라도 그를 반대했던 민주화진영의 약점을 과장해서는 안되리라는 점 또한 강조하고 싶다. 1971년의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金大中) 후보는 ‘대중경제’를 주창했는바, 비록 미흡하기는 했지만 일단 새로운 가능성 모색의 시발점으로 삼을 정도의 강령은 되었고 그 내용은 오히려 5·16 직후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을 상기시키는 바가 많았다. 김대중이 박정희 못지않게 실용주의적이고 신축자재한 정치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만일 당선되었을 경우 그 또한 이 강령을 수정하여 그나름의 수출주도성장 정책을 성안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본다. 물론 과연 그랬을지, 그리고 이런 ‘김대중식’ 배합이 대중의 권익을 얼마나 더 보호했을지는 하나의 추측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민주화세력이 당시나 그후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경제가 박정희시대에 이룩한 괄목할 성과에 대해, 그리고 전제적이며 포악하기까지 했지만 유능하고 그나름으로 헌신적이기도 했던 ‘주식회사 한국’의 CEO 박정희에 대해 충분한 인정을 안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점을 인정해준다고 적절한 재평가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를 두고 독재와 인권유린은 잘못한 것이지만 경제를 발전시킨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식의 평가는 너무나 상투화된 일반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안이한 ‘균형잡기’를 넘어, 상반된 양면을 어떻게 종합할 것이며 각각에 어떤 비중을 두고, 그러한 양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상호연관되어 있는가를 명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나 자신은 그런 작업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다만 강조할 점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이 각자가 추구하는 현재적 과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며, 따라서 스스로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를 밝혀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취지에서 내가 우리 시대의 현안이라 생각하는 것을―엄밀한 논증을 시도함이 없이―열거해보려고 한다.

먼저, 나는 경제발전 그 자체를 문제삼는 생태주의적 발상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현싯점에서 한국경제가 일정한 성장동력을 유지하는 것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경제성장 또는 산업화 자체가 악(惡)이라면 박정희시대를 평가하는 일은 간단해진다. 이에 따르면 그의 독재정치도 못된 짓이었지만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더욱 큰 범죄행위가 되는 것이다. 물론 박정희식 경제성장에는 인권탄압 말고도 수많은 범죄적 결과가 따랐다. 굳이 박정희식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틀 안에서 성장을 하고 경쟁력을 추구하는 한, 일정한 환경파괴와 인간성의 훼손이 불가피하다는 원칙적인 비판도 맞다고 본다. 그러나 진정한 현안은 이런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유지하면서 그 현실을 바꾸는 일이라고 할 때, 발전 자체가 곧 파괴라는 공식으로 매사를 재단하는 가운데서 어떤 책임있는 해답이 나올지가 의심스럽다.

이런 상황에 대해 나 자신이나 창비의 여러 동료들이 주장해온 것이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대응책이다.2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것이 성장동력을 중시하더라도 부자나라 따라잡기를 지상목표로 삼고 최대한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방어적 성장을 꾀하는 전략이다. “세계화의 대세에 승복하는 건 아니지만 당장에 경쟁력을 잃으면 대안을 찾을 여지도 없이 짓밟히고 말 테니까 그걸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쟁력을 확보해야겠다, 뭐 이런 식의 좀더 수세적인 자세랄까 방어적인 경쟁력 노선”3을 택하자는 것이다. 한번 낙오하면 항구적인 약자로 전락하기 일쑤고 약자는 강자로부터 사람대접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존 세계체제의 현실에서 우리가 애써 쟁취한 그나마의 민주적 가치를 보존하고 한반도의 분단체제극복 과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근대극복의 노력들과 슬기롭게 일치하는 ‘적응’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럴 경우, 박정희시대에 이룩된 경제성장에 대해 일정한 평가를 해줌과 동시에, 그의 경제전략 중 어떤 것이 아직도 유효한 것이고 그런 것들이 박정희가 침해한 민주주의·민족화해 등의 목표와 어떻게 결합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탐구할 필요가 절실해진다.

동시에 나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환경친화적인 새로운 경제모델을 창출하는 일이 우리의 현안으로 닥쳐 있다고 믿는다. 지구 전역에 걸쳐 환경파괴가 박정희시대에 비해 훨씬 더 급박한 수위에 달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특히 거대한 중국의 고속성장으로 환경파괴는 전혀 새로운, 아마도 말기국면에 들어섰다고 하겠다. 일본의 선례를 남한이 후발주자에 맞게 재생한 패턴에 따라 중국의 경제성장이 진행된다면―‘중국식 사회주의’의 구호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될 위험이 다분한데―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지구는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 한국은 물론 인류 전체의 장래를 위해서도 우리는 박정희시대나 이후의 어느 시기와도 근본적으로 다르되 생태계의 이름으로 경제발전 자체를 외면하지는 않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안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안들을 염두에 두고 나는 박정희를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로 규정한 바 있다.4 독재만 하고 경제성장을 못 이룬 독재자가 많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에서와 같은 극적인 성장을 이룩한 일은 더욱이나 드물다는 점에서, 어쨌든 유공자는 유공자라고 본 것이다.5

그러나 박정희식 개발은 이중의 의미로 지속불가능했다. 첫째, 브룬틀란 보고서(Brundtland Report)가 말하는 ‘미래세대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능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재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형태의 발전’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논란의 소지가 많고 해석도 다양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든간에 군사주의 문화와 대대적인 환경파괴에 근거한 박정희식 경제개발이 보고서가 말하는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과 상치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둘째로, 그런 차원의 논의 이전에, 박정희식 개발은 훨씬 좁은 의미로, 즉 이런 개발정책 자체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의미로 ‘지속불가능’이었다.

일본과 달리 문민통치의 강력한 전통을 지녔고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만만찮은 한국사회에서 군부독재를 항구적으로 지속한다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6 따라서 박정희 개인의 불미스러운 이력―일제시대의 친일행위에서 해방 직후의 남로당 활동, 뒤이은 군대내 공산주의 동료들에 대한 배반,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군사쿠데타(그중 두번째는 첫번째 쿠데타 이후 자기 스스로 제정한 헌법을 파괴하는 정변이었다) 등등―을 차치하고도, 그의 권력은 원천적으로 불안한 것이었고 경제적인 성과를 올림으로써 보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경제면에서의 성공이 김영작(金榮作) 교수가 첫날 발표에서 지적했듯이 그의 권력을 도리어 잠식하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다.7 박정희가 내세운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그 핵심내용인즉 ‘우리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보세’라는 것으로서 실은 걸인의 철학에 다름아닌데,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면서 다른 종류의 욕구가 대두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8

‘반공’ 또한 일방적으로 유리한 자산만은 아니었다. 박정희는 아마도 그의 좌익 전력에 따른 미국측의 불신을 달래기 위해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로 삼았을 터인데, 통일국가이자 단일민족으로서의 오랜 역사를 지닌 분단국에서 ‘반공’은 곧 국민들의 통일열망을 거스르는 노선이라는 약점이 따랐던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의 통치기간 중 가장 아낌없이 범국민적인 환영을 받은 결정이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이었다는 사실도 이 점을 반증한다. 물론 박정희가 취한 다음 조치는 이 공동성명을 이용하여 10월유신을 선포하는 일이었고, 이로써 그의 집권 전반기(이른바 제3공화국)의 상대적으로 절제된 권위주의는 국가 전체가 권력자 한 사람의 개인 영지처럼 되어버린 후반기(유신체제)로 옮겨갔던 것이다.

어쨌든 세계정세가 뒷받침하는 동안은 반공과 경제성장의 결합이 박정희정권을 지탱하는 데 효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비록 동서냉전이 완전히 끝난 것은 박정희가 사망하고도 10년이 더 지난 뒤지만, 미·중관계(그리고 뒤이어 중·일관계)의 개선으로 1970년대에 이미 동북아시아에서의 이념적 대치상태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유신헌법 선포는 이런 대세를 거스른 정권방어적 조치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로써 박정희의 대통령직과 ‘최고경영자’ 지위에 대해 선거를 통해 도전하는 일이 봉쇄되고 경제 또한 최소한 1970년대 중반까지는 고속성장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그러한 방어조치가 한동안은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박정희시대 말기의 수년간 국내의 점증하는 저항과 갈등은 끊일 바 몰랐고 미국과의 마찰도 날로 심해졌다. 그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역사가 말해주는 바이다.

박정희식 경제발전이 지속불가능한 것이기는 했어도 오늘날 우리가 그때 이룩된 경제성장과 자본축적을 토대로 좀더 지속가능한―또는 조금이라도 덜 지속불가능한―발전을 논할 수 있게 된 점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민주화운동 세력의 정확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민주적인 권리와 제도를 확보하는 데 공헌했다는 점을 빼고 저들이 한 일이라고는―일부 박정희 지지자들이 주장하듯이―돌이나 던지고 구호나 외친 것이 전부였던가?

한 국가의 경제발전이 18년으로 끝나지 않으려면―아니, ‘개발독재’의 유형에 명백히 들어가는 전두환(全斗煥)의 폭압통치기간을 포함해서 25년으로 잡더라도―그 발전을 다소나마 더 지속가능하게 만든 정치적 비판자들의 경제적인 공헌 또한 인정해야 옳다. 한국의 환경운동이 ‘공해문제연구’의 이름으로 조심스럽게 출발하던 1970년대만 해도 산업공해를 들먹이는 것은 곧 ‘용공’ 혐의를 뒤집어쓰는 일이었다. 최소한의 노동자 권리나 정경유착의 폐해를 언급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위험했으며, 긴급조치 아래서는―마지막 제9호는 1975년에 선포되어 박정희 집권기간 내내 존속했으니 ‘긴급’조치라기보다 항상적인 조치였던 셈인데―긴급조치 위반사실을 발설하는 것 자체가 긴급조치 위반이 되었다. 이런 사태가 아무런 도전 없이 지속되었더라면 민주주의가 성취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경제발전 자체가 실제보다도 훨씬 덜 지속가능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민주개혁 없는 경제개발의 추구는 여러 ‘현실사회주의’ 나라들에서처럼 결국 경제의 장기적 침체와 쇠퇴를 낳거나, 이란의 이슬람혁명에서처럼 원리주의적인 신정(神政)체제로 귀결하기 십상인 것이다.9

그러므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계승한 세력은 지난 4반세기에 걸친 한국경제의 성취에도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긍지를 지녀 마땅하며, 동시에 이 과정에서 박정희가 세운 그나름의 공적을 인정하는 데 인색할 이유도 없다. 이는 오늘날 당면한 개혁과제에 위협이 될뿐더러 진정으로 지속가능한―또는 내 식의 표현으로는 ‘생명지속적인’10―패러다임을 창안해야 하는 더 큰 과업에도 장애가 되는 ‘박정희 향수’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물론 나는 ‘박정희 향수’의 이름으로 박정희시대에 대한 모든 긍정적인 평가를 배격하는 것은 아니며, 오늘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봉쇄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늘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건간에 제2의 박정희가 해결책이 못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의 세계는 박정희시대와는 너무나 달라졌으며, 동시에 우리를 옥죄는 정치·경제·사회적인 문제들의 상당수가 바로 박정희시대의 유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니, 박정희에 대한 향수야말로 박정희시대 최악의 유산에 속한다. 즉 기본적인 제반 권리에 대한 무관심, 인간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무감각,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해결 방식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잘 살아보세’라는 걸인의 철학 이상의 어떠한 개인적 또는 공동체적 철학에 대한 무지 등을 고스란히 내장하고 있는 것이 ‘박정희 향수’인 것이다. 이런 유산들은 박정희시대에 대한 적절한 판단이 이루어지고 박정희 또한 그의 정당한 몫을 인정받기까지는 그 병적인 작용을 멈추지 않으리라 본다.

박정희의 정당한 몫이 정확히 어떤 것이며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인 대목을 차지하는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나보다 식견이 많은 분들에게 맡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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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래의 기조연설에서는 이른바 subject position 즉 ‘주체가 처한 위치’를 밝히면서 논술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조금 더 자세히 서술했으나 국내독자를 위해 그럴 이유는 없으리라 본다.
  2. 이에 대해서는 졸고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호; 「21세기 한국과 한반도의 발전전략을 위해」, 백낙청 외 지음 『21세기의 한반도 구상』(창비 2004) 참조. 물론 이런 수세적 경쟁력 노선이나 이중과제론에 대해 ‘좀더 지적으로 교묘한 논리’일 뿐 그 본질은 부국강병주의나 개발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도 나온 바 있다. 예컨대 좌담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녹색평론』 2004년 9~10월호 참조(모든 참석자들이 동일한 견해는 아니지만). 이중과제론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별도로, 실행의 과정에서 이중과제론이 평범한 근대적응주의와 다를 바 없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라면 이는 누구나 수긍할 터이며, 그 위험을 함께 경계하고 대응하는 공동의 과제를 떠안게 된다.
  3. 좌담 「동북아시대 한국사회의 중·장기 전략과 단기적 과제」, 『창작과비평』 2003년 겨울호 60면의 필자 발언.
  4. 졸고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 『중앙일보』 2004.8.12, 35면 ‘중앙시평’.
  5. 이 칼럼에서는 이런 평가를 하면서도 다음 두 가지 토를 달았는데 정작 기조연설에서는 그 점을 짚을 겨를이 없었다. “물론 ‘한 세대 안에 국민소득 100달러에서 1만달러로’라는 ‘한강의 기적’엔 여러가지 다른 요소가 작용했다. 우선 그것은 오늘날 국민소득 100달러 또는 200달러인 어느 후진국이 문득 고속성장을 시작하는 상황처럼 기적적인 것은 아니었다. 해방후의 갑작스러운 국토분단으로 그나마 돌아가던 한반도 경제에 일시적인 마비상태가 왔고 이렇게 엎친 데에 전쟁으로 인한 대대적인 파괴가 덮쳐 한국사회의 빈곤이 극에 달했던 것이다. ‘단군 이래 대물림해온 가난’은 아니었으며 도약의 저력을 충분히 내장한 사회였다./더구나 박정희가 한반도에서 지속불가능한 발전을 창안한 것도 아니다. 국권박탈과 인권탄압을 겸하면서 드디어는 항구적 전쟁체제로까지 나아감으로써 도저히 지속할 수 없는 개발을 수행한 선구적 모델로 일제 식민지 당국이 있었다. 박정희는 이 모델을 그가 설정한 항구적 냉전체제와 남북대결체제에 맞게 적용하고 발전시켰는데, 이것도 공로라면 공로가 아닐 수 없다.”(같은 글)
  6. 한국인들의 민주적 열망을 간명하게 설명해주는 영문자료로는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W. W. Norton1997), 제7장 ‘The Virtues II: The Democratic Movement, 1960~1996’(국역본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김동노 외 옮김, 창작과비평사 2001)가 있다.
  7. 당일 회의자료집 중 Kim Young-Jak, “The Structural Characteristics of Park Jung-Hee’s Governing Ideas” 참조.(물론 김영작 교수의 박정희 평가는 나하고 많이 다르다.)
  8. ‘걸인의 철학’(thephilosophy of a beggar)이라는 표현에 대해 회의장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적지 않은 논란이 벌어졌다. 김영작 교수는 박정희의 철학을 이런 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는바, 나는 박정희 자신의 인생관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그는 물론 거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야심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선택한 새마을운동의 구호가 대표하는 철학을 지목한 것이라고 답했다. 한경구(韓景九) 교수의 반론은 좀더 기발하다면 기발한 것이었다. 즉, 거지는 무언가 공것을 바라는 사람이므로 일해서 먹고살려는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과 구별해야 하며, 따라서 ‘걸인의 철학’ 운운은 새마을운동에 가담한 수많은 가난한 이들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자의 철학’이라고 표현을 바꾸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정녕 덜 모욕적이었을까? 한경구가 정의한 ‘걸인의 심리’와 내가 말하는 ‘걸인의 철학’을 구별해줄 필요는 분명히 있겠지만, 새마을운동의 구호에 대한 이런 성격규정을 숙고해볼 필요는 있으리라는 것이 나의 답변이었다. 다만 지금 와서 한마디 덧붙인다면,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걸인의 철학에 물든 사람이 거기서 탈피하는 일이 그렇게 간단치는 않다는 점이다. ‘우리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처럼 살아보세’라는 소망이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사람처럼 살아보세’로 진화할 뿐, ‘잘 사는 것’의 참뜻에 대한 성찰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에서 실감할 때가 많다.
  9. 한국에서 신정체제의 성립이란 상상하기 힘들지만, 나의 취지는 왕년의 이란왕정이 독재체제의 경제개발계획이 지속되지 못한 또하나의 사례임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10. 주2에 언급한 「21세기 한국과 한반도의 발전전략을 위해」 21~23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