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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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위기와 희망

 

 

한반도의 운명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북한은 지난 7월 미사일 발사실험에 이어 10월 9일 지하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보다는 덜 극적이지만, 10월 27일에는 한미FTA 4차협상이 마무리되었다. 일련의 상황전개를 접하면서 최근 본 영화에 나온 시가 생각났다. “비가 바람에게 말했습니다/너는 밀어붙여. 나는 퍼부을 테니……”

한반도에는 두개의 체제가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실패한 체제’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는 ‘교착의 체제’이다. 불완전한 국가, 불안정한 체제에서 변화와 이행은 불가피하다. 오래된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일종의 과도기이므로, 거기에는 당연히 어느정도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혼란이 그 사회가 견뎌낼 수 있는 임계수준을 넘어서는가 아닌가이다. 그래서 혼란을 견딜 수 있는 시간과 능력, 혼란을 관리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북핵문제를 둘러싼 국제적 갈등은, 한반도에 국가연합이라는 안전장치가 마련되기 전에 ‘급진적 이행’이 일어날 가능성을 좀더 높이고 있다. 중간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부시행정부가 북한을 ‘불량국가’로 간주하는 기조는 계속 유지될 것이다. 중국도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는 않지만 핵실험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북한 지도부가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핵무기가 국제적 고립을 심화하고 내파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올겨울 유례없는 추위에 내몰릴 것이다.

원하지 않더라도 전쟁과 붕괴가 ‘급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재건과 체제형성, 그리고 그에 따르는 비용과 고통은 불가피하게 ‘점진적’이다. 체제이행은 무수한 상호관계로 연결된 복합적인 씨스템의 변환과정이기 때문에 장기간의 복잡한 이해조정을 필요로 한다. 순조로운 이행을 위해서는 정교한 이해조정 장치가 요구된다. 한반도에서 무질서상태가 폭발하기 전 국가연합 같은 조정장치가 절실하지만, 현실이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대해서도 구체적이고 솔직한 논의가 이어져야 한다.

북한처럼 시장화 수준이 낮은 경우에는 시장을 형성하는 데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대국이라면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좀더 쉽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소국인 북한으로서는 그도 여의치 않다. 게다가 해외시장과 접촉함으로써 시장화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갖출 기회도 극히 제한되어 있는 여건에서 시장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과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한미FTA를 걱정하는 것도 급진적 변화의 위험성 때문이다. 남한의 개방능력이 만만치 않고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줄지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결과를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꺼번에’ 높은 수준의 시장통합을 단행하는 와중에 자원 배분·재배분이 속도를 맞춰주지 못하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번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면서 의회의 보호주의 색채가 강화됨에 따라 한미FTA 협상에서 그들의 요구는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지리멸렬한 집권세력과 파당적인 반대세력이 FTA에서만은 서로 야합하여 덜컥 미국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경우, 광범한 사회적 저항이 일어날 것이다. 혼란과 충격이 계속되고 정부가 관리능력을 상실하면, 마치 1997년 그때처럼 경제위기가 폭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나쁘고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비바람 속에서도 희망의 싹은 있고 그것이 자라면서 역사는 전진한다.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괴물처럼 다시 모습을 드러낸 분단체제는, 우리 삶에 드리워진 질곡을 더욱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갈등과 대립이야말로, 북한과 남한, 그리고 미국과 일본 모두에 있는 냉전형 세력의 숙주임이 다시 한번 분명해졌다. 이들은 전쟁을 불사하자는 주장을 입에 달고 있다. 또 북한문제가 복잡하고 어려우니 남한만의 선진화나 평화를 모색하자는 생각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 민족끼리’를 되뇌고 ‘미제국주의’를 탓한다고 해서 진보·개혁세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진보·개혁의 새로운 가치를 개척해갈 수 있는 시민사회의 각성이 소중하다. 참여연대는 북의 핵실험이 한반도 주민들을 치명적인 핵위협의 볼모로 삼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라고 즉각 비판했다. 환경운동연합은 핵무기가 북한과 남한 시민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진 못한다고 주장했으며, 녹색연합도 북한이 전에 약속한 ‘한반도비핵화선언’으로 돌아와 핵을 포기할 것을 촉구했다.

과거 소련이나 중국 모두 핵실험과 핵보유를 ‘국가 생존’의 문제로 정당화한 바 있는데, 이는 평화와 반핵을 염원하는 세계시민의 요구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제 남한의 시민사회는 “착한 핵무기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분단 극복과 평화의 문제를 대중들의 힘 아래에 두려는 발걸음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시민참여를 통해 단순한 북한 책임론과 미국 책임론을 넘어, 동아시아 시민의 책임에 의한 평화체제 건설을 힘차게 제기한다면, 미국의 도덕외교와 북한의 피포위의식의 충돌에 따른 급진적 이행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한미FTA에서도 정부관계자 몇몇이 정해놓은 ‘높은 수준의 FTA’ 원칙을 수정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협상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있는 수백명의 전문가들, 그리고 반대론과 신중론에 서 있는 시민·민중운동의 땀과 집단이성에 기대를 걸어본다. 

곡절 끝에 미국과 북한이 일단 더이상의 충돌을 멈추고 다시 6자회담의 장에 나오기로 했다. 민주당이 과반수를 차지한 미 의회에서는 북한문제에 대해 다른 목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정세의 변화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으며, 시민참여에 의한 한반도 평화체제와 통일의 오솔길이 완전히 막힌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길이 남북 민중, 특히 북녘 민중에게 꼭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시 구절이 다시 떠오른다. “그들은 정원을 마구 짓밟아/꽃들은 꺾여 쓰러지고 말았다/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꽃들의 고통을 알 것도 같다.”(프로스트 「쓰러져 있다」)

비바람 불면 꽃은 꺾이고 쓰러지고 고통을 겪는다. 죽지 않고 비바람 멈추면 꽃은 다시 활짝 핀다. 한반도 민중은 죽지 않을 것이다. 

 

이번호의 문학특집은 여름호에서 다룬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의 후속편이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우리 문학에서 가시화되고 있는 새로운 현실 읽기의 양상들을 더욱 깊이있게 점검하고자 했다. 먼저 오랜만에 문학좌담을 마련했다. 평론과 창작의 현장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영희 김영찬 박형준 이장욱이 참여한 이 좌담은 최근의 문제작들을 다양한 맥락에서 검토하며 우리 문학의 주요 논점들을 조명한다. 참여자들은 서로 다른 관점을 개진하는 가운데서도 한국문학을 둘러싼 공통의 지반을 찾아가고 있으며, ‘6·15시대의 문학’이나 민족문학론 같은 창비의 문학적 의제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논쟁을 펼친다.

좌담에 이어 개별부문에 대한 평론이 특집을 뒷받침한다. 먼저 진정석은 IMF위기와 6·15선언으로 요약되는 2000년대 안팎의 상황을 배경으로 우리 시대의 소설문학에 나타난 사회적 상상력의 변화양상을 검토한다. 최근 젊은 작가들의 정치적 무관심이나 공동체적 감각의 결여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단수(單數)의 이념을 대체한 복수(複數)의 상상력들이 어떤 지형도를 그려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글이다. 유희석은 분단체제가 서서히 잠식되어가는 오늘의 상황을 ‘통일시대’로 규정하면서 우리 작가들의 문학적 대응을 폭넓게 살핀다. 남한이라는 ‘반국(半國)’적 상상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문학적 의지를 때로는 비판적으로, 때로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글들이 소설에 집중하고 있다면, 우리 시의 가능성을 살피는 김수이의 글은 ‘노동’과 시의 관계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민중’이라는 주체의 문제를 ‘노동’이라는 행위와 사건의 문제로 대체함으로써, ‘노동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아내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임규찬의 글은 문학평론에 할애되어 있다. 최근에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평론가들과 그들의 비평담론을 둘러싼 문제점을 검토하면서 필자는 왜 ‘비평의 윤리’가 필요한지를 역설하고 있다.

특집 외에도 이번호에는 문학란에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시단은 신예시인 15인선으로 꾸몄다. 2004년 여름호를 잇는 기획인데, 다채로운 젊은 목소리들이 우리 시의 내일을 예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설란에는 전성태, 정영문, 이명랑, 윤성희, 박형서 등 저마다 다양한 개성과 색깔을 지닌 작가들을 초대했다. 이와 함께 창비신인시인상과 신인평론상 수상자들의 패기 넘치는 작품도 주목해주시길 바란다. 아쉽게도 소설부문에서는 당선작을 내지 못했지만, 더욱 역량있고 도전적인 예비작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한결같다.

이번호에서도 ‘도전인터뷰’는 뜨거운 논쟁의 장이 되었다. 세계화, 양극화, 지식혁명의 와중에서 어느 나라나 교육을 새롭게 하는 것이 국가적 과제다. 교육이 새로운 사회적 배제에 대응하여 기회의 평등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기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히 전교조를 향하게 된다. 장혜옥 전교조 위원장은 현행 교육정책의 본질과 기존 조직활동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하승수 교수는 교육현장에 밀착한 새로운 노력을 역설한다. 교원평가제에 대한 팽팽한 논쟁과 더불어 차등성과급제, 체벌, 야간자율학습, 방과후학교 등 최근 현안에 대한 밀도있는 진단이 이루어진다.

‘논단과 현장’에서는 묵직한 문제의식들이 넘친다. 박순성은 북핵실험으로 남북한 주도의 탈분단과정인 6·15시대가 도전받고 있다는 전제하에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경로를 재점검한다. 백낙청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북한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에서 좌우의 논객들을 실명 비판하며 ‘변혁적 중도주의’에 의한 한반도 선진화의 길을 모색한다. 최원식은 반민규명위 출범을 계기로 다시 수면에 떠오른 친일문제에 대해 성급한 판정이나 해결보다는 진실의 여러 측면을 침통히 사유하는 토론이 중요함을 지적한다. 빌 매키븐은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에 관한 근래의 논의들을 짚어가면서 생태위기와 그 대응책에 관한 진지한 성찰을 촉구한다.

이 계절에도 독서계에서 주목받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서적, 문학작품에 대한 촌평이 독자들의 눈길을 끌 것으로 기대한다. 아울러 올 한해 본지에 고정으로 기고해주신 촌평란의 김기택 박명규 홍성욱 선생과 계간평의 엄경희 정홍수 선생께 각별한 고마움을 전한다.

한해가 저문다. 창비는 올해 계간지 창간 40주년을 맞아 봄호(통권 131호)부터 지면을 대폭 혁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 일본어판을 새로 선보여 독자층을 동아시아로 넓혔고, 『창비주간논평』(magazine.changbi.com)을 창간해 한층 더 빠른 호흡으로 정세와 문화의 흐름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 이 모든 일이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순항하고 있어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 고마운 뜻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사업 하나하나를 더욱 단단히 다져나가 희망의 한반도를 이루는 데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

李日榮

이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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