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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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관 張沃錧

1955년 경북 선산 출생.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황금 연못』 『바퀴소리를 듣는다』 『하늘 우물』 등이 있음. og-jang@hanmail.net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은빛 수레바퀴 밤새 하늘을 굴러다닌다는 전월사(轉月寺), 동짓달 북향의 골짜기는 옴팍해서 달빛 담기에 맞춤한 옹배기랍니다

 

도시 인근 흔히 보는 이 암자 주인은 올해 갑년을 맞은 비구니, 법명이 달풀〔月草〕이라 하시는군요 여섯살 나이로 경주 함월산(含月山)에서 계를 받았다는데요

 

먹물옷 말고는 딴 맘 딴 옷 가져보지 못한 채 다 늙은 사람의 심정이사 뒷산 오리나무나 짐작할 뿐 제 잇속이나 셈하는 복장 시커먼 도둑이 알 바 아니겠지요 그러나 인연 닿은 곳마다 굳이 달을 갖다붙이는 여자의 마음은 알듯 말듯 하구요

 

낯모르는 사람이 내미는 찐빵 이천원어치에 빗장지른 마음 덜컥 열어젖히는 혼자 사는 늙은이, 해 짧고 달 긴 동짓달 속사정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서두 휘영청 초저녁에 뜬 달이 한잠 자고 나와 봐도 그 자리, 다시 깨어 봐도 그 자리,

도무지 눈꺼풀 없는 밤이라는군요

 

그런 밤이사 얼음조각 머금은 듯 차고 시린 달이 어둑새벽까지 띠살문 밝혀서 안 그래도 가난한 우리 스님의 몸이 더욱 말라붙었겠구요 뒷산 솔숲 소쩍새 목쉰 소리에 마당 가슴팍 찬 우물도 덩달아 깊어졌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조금 아는 것이어서 세상의 일을 어찌 이루 다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장지문 바로 건너 대웅전 마루 아래 뱀 소굴이 숨어 있다는데요 법당이든 부엌이든 심지어 하루는 늦은 밤 티브이 위에 똬리 틀고 혀 날름대고 있더라는 이야기

 

생각건대 달풀 우거진 보름달 속에는 수천수만 실뱀들 똬리 틀고 있는 건 아닐는지 그 달빛,

얼키설키 뒤엉켜 뭉쳤던 은빛 실뱀들 오리오리 풀려 날이면 밤마다 마룻장 아래 모여드는 건 아닐는지 그래서 늦은 밤 법당 안이 이따금 해바라기처럼 환해졌던 것인가

 

이리 몸 섞고 저리 몸 뒤엉켜 겨울잠 자는 뱀들이 뿜어내는 에너지 동짓달 덩두렷이 보름달로 굴러가고,

어떤 못된 뱀은 아궁이 통해 불 꺼진 몸속으로 자꾸 파고들고, 그때마다 처마를 받든 두리기둥은 화들짝 뿌리가 굵어졌겠지요

 

그예 날 저물어 기어코 잡는 손길 뿌리치고 일어서다 보니 아뿔싸, 기왓골 타고 굴러온 달. 달풀 스님 목에 얹힌 달덩이에 혓바닥이

두,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려

 

 

 

공기 예찬

 

 

시인은 공기 도둑이라는 말도 있지만1

공기 한줌 거저 얻어서

온종일 넌출넌출 즐거움이 넝쿨로 뻗어간다

물이나 햇빛이나 공기 따위를

런닝구처럼 사고 팔 수는 없겠지만

눈썹 펴고 건네는 인사조차 이웃간에 거저 얻기 힘든 터에

허구한 날 지나다니면서도 몰랐던

동네 카센터

이야기 나누던 손님 기다리게 해놓고 모터 돌리고 호스 연결해 낡은 자전거 앞 타이어에 탱탱하게 공기 채우고 시키지 않은 뒷바퀴까지 빵빵하게 공기 채워주는데

삯이 얼마냐 물었더니

옥수수 잇바디 씨익, 그냥 가시란다

햐, 공짜! 공으로 얻은 공기 채운 마음

공처럼 둥글어져서

푸들푸들 가로수가 강아지처럼 마냥 까부는데

페달 밟으니 바퀴 버팅기고 있던 살대가 모조리 지워지고

동그라미 두 개만 떠오른다

비눗방울처럼 안팎이 두루 한겹 공기로 채워진

무게 없는 것들

발목 잡는 삶의 수고와 중력 벗어나

구름과 나와 자전거는 이미 한 형제가 되었으니

텅텅 속 비운 지구가

공기 품은 민들레 홀씨처럼 한껏

위로 위로

공중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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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 시인 만젤쉬땀(O. Mandel’shtam)의 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