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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인터뷰

 

박민규,라는 문학 발전소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이방인, 법, 보편주의에 관한 물음」 「묻혀버린 질문: ‘윤리’에 관한 비평과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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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玟奎 1968년生. 소설가. 소설집 『더블』 『카스테라』,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핑퐁』 『지구영웅전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있음. ⓒ 송곳

 

‘웰컴 투 박민규 월드’라는 광고문구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박민규의 『더블』은 여러 면에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느낌이다. (‘씽글’ 아닌) ‘더블’이 주는 수적 효과와 그 독특한 디자인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이 작품집에 실린 18편의 단편이 펼친 스펙트럼의 다양함이 독자에게 ‘세계일주’와도 흡사한 경험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더블』을 읽으며 담담하고도 애잔하게 죽음의 ‘근처’를 한동안 서성인 다음, 돌아서서 비행선을 쫓고 대리운전을 뛰고 아치다리에 오르는 익숙하고도 아득한 생활전선을 함께 넘나들었다가, 곧장 지구 내부의 틈으로 뛰어들어 인간 종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아스피린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일상 속의 예외에 익숙해져가면서 짬을 내어 다른 행성에 다녀오는 한편, 상식에서 벗어난 무협의 고수들과 불멸의 싸이코패스를 만나고, 또 아득한 과거의 쓰라린 생존투쟁을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아예 어딘지 모를 곳의 무언지 모를 일을 목격하며 지금 여기의 실감을 의심한다. 일상이라면 일상이랄 수 있다, 하는 식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이 모든 경험은 분명 어떤 임계점에 근접하거나 도달해 있다. 그러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이 작품집을 통해 ‘세계의 경계’를 더듬으며 돌아보았다 할 수 있는데, 『더블』의 독서가 풍부하면서도 치열한 경험이 되는 것이 그 때문이리라.

따라서 작가 박민규와의 인터뷰는 이제와선 다소 식상하다 싶더라도 그런 다양함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워밍업을 마쳤”다는 표현(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이렇게 쓰고도 워밍업이라니, 하는 느낌으로 물은 첫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제가 워밍업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전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쓰고 싶어서 쓰게 된 인간이거든요. 소설에 대한 지식이 없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해서 지금까지 한 게 준비운동이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되게 좋아요. 이제 뭐 좀 오래 더 많이 운동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 이제는 본 플레이를 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게 기분이 좋아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거든요. 〔글을 쓸 때는〕 기계화되어야 되니까 많이 확장시키고 싶었죠. 운동을 할 때도 심폐능력이니, 근력이니, 반사신경까지 필요한 게 많잖아요. 그런 걸 다 조금씩 확장시켜둔 느낌이에요. 뭐든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있어요.”

인터뷰 덕분에 처음으로 보게 된 ‘실물’의 인상처럼 그의 답변은 겸손하면서도 실로 야심찬 에너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워밍업’이란 물론 단순한 몸풀기 같은 게 아니다. “연습이라기보다는 이해가 중요한 것 같아요. 재료에 대한 이해. 예를 들면 우리는 밀가루 가지고 국수도 만들고 전도 부치잖아요. 그런데 멕시코에 가니까 그걸로 쌈을 만들어 먹더라고요. 재료는 같은 거잖아요. 그런 거겠죠. 밀가루에 대해 이해하면 그걸로 이것도 만들 수 있고 저것도 만들 수 있고 그런 거죠”라고 부연한다. 이 대목에서 ‘다이아몬드나 석탄이 아니라 탄소’라던 D.H. 로런스의 발언을 떠올린다 해도 그리 억지는 아닐 것 같다. 로런스는 ‘자아’라는 낡은 범주가 아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이 자신의 주제라는 이야기였는데, 국수나 전이 아닌 ‘밀가루에 대한 이해’로 돌리는 박민규의 답변도 비슷한 논리가 아닐지.

예상대로 그는 『더블』의 다채로움을 장르문학입네 본격문학입네 하는 틀로 접근하는 데는 대체로 실소를 금치 못하는 듯했다. “제가 「근처」니 이런 걸 쓰면 ‘이 사람 이런 것도 쓰네’라고 하잖아요? ‘이런 것 쓴’ 사람으로서 이야기할게요. 이거 별거 아니에요. 나 이거 쓸 때 순수 했냐? 이거 쓸 땐 순수 하고 저거 쓸 땐 장르 하나? 아니거든요. 이런 거는 말 그대로 코드의 배합일 뿐이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왜 아직도 자세… 자세 좀 그만 따지고. 전국의 문창과, 국문과에서 자세 좋은 투수만 길러내요. 전부 우완 정통으로 졸업해요. 우완 정통인데 공은 존나 느려요. (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건 하지 말자는 거죠. 21세기인데.”

실제로 『더블』에서 이른바 ‘장르문학’의 요소들은 흔히 말하는 차용이나 패러디와도 다른 종류의 ‘형질 전환’을 거치는 듯하다. 작품의 다층적 구조의 일부로 재배열되거나 장르의 문법이 암암리에 맞추어놓은 초점을 벗어나면서 말이다. 『더블』의 작업을 가리켜 그는 또 “굉장히 넓은 땅이 있는데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말뚝 박는 기분”으로 설명했는데, 그의 ‘말뚝박기’가 이를테면 ‘사명’의 성격도 띤다는 사실은 다음에서 확인된다.

“뭔가 그렇게 규정짓는 울타리 같은 것을 다 허물고 싶었어요. 제가 말 타고 다니면서 말뚝 박는 느낌이라고 말한 이유가, 땅이 넓다는 거예요, 문학이라는 땅이. 우리가 배운 바이엘, 체르니뿐만 아니고 땅이란 게 굉장히 넓은 것이고, 다른 무엇보다 지금 크는 애들, 나 뒤에 글 쓰는 애들한테 그런 걸 보여줘야 할 것 같았어요. 다른 데에서도 말 타고 나가면 옛날에는 탕자 취급을 했는데 거기서 말뚝 박고 온군데 돌아다니는 것으로 책을 내고,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래도 된다, 뭔 상관이야, 이런 것을. 지금 크는 애들이 굉장히 다양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래도 되는구나, 하면서. 그게 저 나름의 역할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뭐든지 막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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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곳

‘그 뒤에 글쓰는 애들’만이 아니라 그가 이곳저곳 내달리며 박아놓은 말뚝을 확인하면서 독자들도 감각과 상상력이 확장되고 이완되는 경험을 얻게 된다. 이런 확장과 이완 자체가 어떤 ‘재분배’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중요한 기제가 아니겠는가.

그는 개별작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저한테는 그런 게 의미가 없는 게, 경기 치르고 내려왔는데 경기에 대해서 뭐라고 한다고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라는 말로 대신했다. 인터뷰를 하며 간간히 발견한 사실 중에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라는 제목이 썩 잘 어울리는 그 작품은 정확히 그 대목이 등장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The Tyger」와 의외로 직접 연관은 없었다는 게 있었다. 블레이크의 시집까지 챙겨간 차에 약간은 무색했지만 이 둘을 나란히 놓고 볼 때 박민규의 작품에 담긴 아이러니가 더욱 풍부해지리란 느낌은 여전하다. 설정도 설정이지만 박민규의 작품치고 어조가 낯설었던 「크로만, 운」을 두고 그는 “쉬운 글은 아니죠. 어느 정도, 보통 다른 것 쓸 때처럼 쓴 게 아니었으니까. 그거 좋아하는 사람 만나면 되게 반가워해요”라고 했는데 작은 궁금증이 하나 해소된 기분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역시 인상적인 작품인 「슬(膝)」에 관한 이야기다.

“「슬」의 경우, 제목을 두고 갈등을 많이 했어요. 팔꿈치 ‘주()’라는 글자가 있어요. 왜 그걸로 갈등을 많이 했냐면, ‘주’라는 말이 매우 묘하더라고요. 다른 뜻이 두가지 더 있는데, ‘고기 먹을 주’와 ‘맛있는 고기 주’. 내용 보시면 알겠지만, 바위틈 사이에 팔이 끼어서 팔꿈치를 자르게 해야 할까, 다리를 해야 할까 이걸로 굉장히 갈등했어요. 단어 의미를 보면 ‘주’가 재밌잖아요. 그런데 마지막에 눈밭을 걸어갈 풍경을 생각하니까 ‘슬’이 훨씬 와닿는 거예요. ‘고기 먹다, 맛있는 고기’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이쪽 아닐까 하다가 결정적으로 ‘슬하’라는 단어 때문에 ‘슬’로 갔어요. ‘슬하에 자식을 두다’ 할 때, 슬하. 그 단어 때문에 슬로 딱 결정이 났죠.”

「루디」에서도 이와 비슷한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루디」에 보면 성인 미하엘이 나와요. 원래 미카엘인데 발음이 너무 직접적이어서 미하엘이라고 썼는데, 미국에서는 미하엘이 아니라 마이클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미카엘에서 느낌이 너무 멀어져요. 그래서 갈등하다가 미카엘은 미하엘로 가야지, 한 거예요.”

최근 「필경사 바틀비」와 「외투」를 재미있게 읽었다는 그의 얘기를 받아 조금 거창하지만 요사이 많이 논의되는 ‘세계문학’에 관해 질문해보았다. 혹시 본인의 작품을 세계문학의 틀 안에서 생각해본 적은 없었을까?

“그런 생각은 안해요. 관심이 없어요. 이런 게, 지금 우리 좀 먹고살 만해지니까 이제는 또다른 콤플렉스를 갖게 된 게 아닐까 해요. 코즈모폴리턴이라고 하나요. 이제 또 그런 콤플렉스를 가진 것 같아요. 뭘 하든 세계적인 걸 해야만 할 것 같고, 외국을 생각해야 할 것 같고 이러는 거죠.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이를테면 멜빌이든, 고골리든 누구든, 개인의 작업을 했다는 거예요. 본인이 쓰고 싶은 걸 썼지, 이걸 써서 저 어디 들어보지도 못한 한국에서까지 자기 책이 번역돼서 읽히는, 그런 코즈모폴리턴은 환상이죠.”

사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할 말이 꽤 있는 듯했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세계적인 한국문학이 되려면, 저변이 있어야 해요. 축구를 즐기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야 그 나라가 월드컵에서 한자리 할 수 있는 거예요. 어쩌다 4강이 아니라. 사람들이 축구 이야기에 환장을 하고 난리가 나야죠. 사실 축구 안 좋아하거든요. 새벽에 프리미어리그 보지 누가 K리그 보나요. 문제는 저변이에요. 사람들이 문학을 엄청 사랑해야 돼요. 소설도 아끼고, 시도 아끼고, 이게 형성이 되고 나서 거기서 개인들의 작업이 어떤 도달점에 가 있고 거기에서 무역적인 수출로 번역이 된다면 자동으로 상품도 되고 다 된다는 거죠. 음악도 그래요. 기획해서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부에나비스따쏘셜클럽 보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계속 음악을 사랑하고 즐긴 거죠. 그 자체가 저변이 되는 거죠. 개인의 작업, 수수하게 보일 수 있는 작업들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갔을 때 도달하는 거죠. 한 작가가 한 개인으로 독자화할 때, 즉 개인화의 레벨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가는 것, 그게 곧 세계화라는 거죠.”

과연 그가 『더블』에서 행한 ‘워밍업’도 ‘개인으로 독자화’하는 부단한 과정의 일부일 것이다. 그의 전작 소설집 『카스테라』의 단편들에서는 일상/현실에서 자못 능청스럽게 환상/비현실로 이어지는 동선이 많았다면 『더블』에는 훌쩍 건너뛴 저 너머의 차원과 공간에서도 인간이란 얼마나 ‘끝까지 이런지’를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 어느 쪽이든 인간 삶에 대한 냉정한 이해와 다감한 연민이 진하게 공존한다는 점은 같지만 『더블』은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말이 올지라도 그것이 곧장 우리의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는 또하나의 무서운 진실을 일러주는 듯하다. 그에게 넌지시 세계가 대체로 여전히 ‘듀스상태’ 혹은 ‘반 집 싸움’의 상태겠느냐고 물어보았다.

5149라는 게 굉장히 상징적인데요. 주식회사를 예로 들면, 회사가 가지는 지분은 언제나 51프로거든요. 나머지를 다 준다고 해도 49프로라는 거죠. 그 49프로의 환상이라는 거죠. 사실은 51을 가진 사람 소유인 거예요. 왜 이렇게 중산층을 많이 늘리고, 대학을 늘리고 하겠냐고요. 인간들의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거든요. 중산층을 만들고 고등교육을 이수한 사람을 만드는 이유가, ‘49프로는 너희들 거야!’라는 거죠. 사실 듀스 포인트라는 건 환상이에요. 어쩌다 ‘혁명을 해야 해!’ 할 때 5050이면 될까,라는 느낌이랄까. 사실은 묘한 거잖아요. 우리 6·25 직후에 한국인의 화두가 먹고사는 거였잖아요. 지금은 경제 세계 11위 하는 2011년인데 지금 한국인한테도 먹고사는 문제인 건 매우 이상한 거죠. 우리 느낌에는 민주주의도 되고 투표권도 갖고 있고 인권도 있고 49프로의 주식을 소유한 것 같지만, 그 49프로를 말짱 환상이 아닌 현실의 49프로를 만들어가는 게 가까운 당면과제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게 문학의 역할은 아니라고 봐요.”

그렇다면 문학의 역할이란 역시 그가 “내부에서의 변화가 없이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라고 할 때의 그 ‘내부’에 관여하는 것이리라.

“예전 학생들의 민주화 이런 얘기 많이 하는데, 지금 그 세대가 실패한 이유는 내부에 있다고 봐요. 그 세대 집단 자체가 그 어떤 세대보다도 자본주의적이고 이재에 밝고 계급 신분상승에 대한 전투력이 강한 집단으로 변해왔거든요. 한국에서 모든 ‘앞 세대’의 공통점은 각오예요, 각오. 각오만으로 살았거든요. 하면 된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각오만 했지 각성을 하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저는 그게 386이 실패한 근본 원인이라고 봐요. 스스로에 대한 각성을 한 적이 없어요. 집단적으로 변한 거죠. 지금 나 사는 동네 집값 올려준다고 그러면 찍어주는 인간들이 된 거예요. 나 이 정도 벌었으니 내 애는 미국 보내야 해, 하면서 보내고. 사실은 민중이 없었던 거예요. 엄밀하게 따지자면 각성을 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제는 ‘또 싸워서 이기자’는 각오의 시대가 아니라는 거예요. 각성을 해야죠. 5149라는 비율을 뒤집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51프로와 49프로 안의 성질을 충실하게 바꿔나가자는 거죠.”

『더블』에서 ‘과학소설’의 분류에 가장 가까운 작품으로 보이는 「깊」은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장엄한 사태가 본질적 경박함을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과학적 화두 자체는 폄하하지 않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이 비슷하게 관심을 끄는 주제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최근 미토콘드리아에 ‘꽂혀 있다’고 한다. 5개월째 계속 찾아보는 중이라고. 미토콘드리아라면 대략 유전자와 관계된 것 아닌가요 운운 했지만 실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아서 인터뷰 마친 뒤 검색해보았더니, 뭐라 알아듣기 어려운 여러 설명 중에 “…하기 때문에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발전소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눈에 들어온다. 박민규가 이 세포 발전소를 가지고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빚어낼지는 감히(!) 예상하기 힘들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겠다. 박민규,라는 문학 발전소는 현재 풀가동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