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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한반도 국토 인프라의 획기적 전환

심포지엄 ‘상생의 새 구상,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 참관기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교수, 경제학. 저서로 『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경제』 『중국 농업, 동아시아로의 압축』 『한반도경제론』(공저) 등이 있음. ilee@h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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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강의를 마치고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서울YWCA 강당으로 향했다. 그날은 세교연구소와 한국지방발전연구원이 공동으로 김석철(金錫澈) 명지대 석좌교수의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에 대한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날이었다. 1010일, 가을 한복판으로 들어선 날이었지만, 행사장 안에는 열기가 느껴졌다. 며칠 전 가제본되어 도착한 그의 신간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창비 2012) 원고를 읽고 느꼈던 저자의 열정이 행사장의 열기로 달아오른 것일까.

김석철 교수는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을 암병동 병실 바닥과 책상 위에 도면을 늘어놓고 들여다보며 생각하고 다듬었다고 한다. 책의 머리말에서 김교수는 재발된 암을 이 작업을 하면서 다시 이기고 있다고 느낀다고 썼다. 심포지엄 주제발표에 나선 김교수의 탁한 음성을 듣고서는 과연 건강이 괜찮은가 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슬라이드가 넘어가면서 김교수의 음성은 더욱 명료해지고 힘을 더해갔다. 발표자에 대한 걱정이 발표자의 열정에 대한 경탄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김교수는 나라 걱정을 절절히 쏟아냈다. 발표문 첫 대목을 인용해보자. “세계경제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2013년 대한민국 시대의지는 더 큰 경제성장이 이루어져야 가능한 경제정의, 복지, 동반성장입니다. 한반도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고 조직화할 수 있는 비상한 판을 만들어야 합니다. (…) 지방권 독립, 수도권 혁신, 북한 개발은 2013 한반도의 큰 판입니다. 세종시와 통합공항, 수도권 혁신사업과 뉴타운, 인천-원산간 동서관통운하와 두만강 하구 다국적도시에 대한 실사구시적 제안을 설명하고 대선후보들의 구상과 의지를 듣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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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측은 주요 대선후보 진영에 김교수의 원고를 보내고 심포지엄에 초청했다고 한다. 안철수(安哲秀) 후보 측에서는 박선숙(朴仙淑) 공동선거대책본부장이, 문재인(文在寅) 후보 측에서는 이용선(李庸瑄) 대외협력위원장이 참석했다. 박선숙 본부장은 김교수의 구상을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혔다고 말했다. 이어 단순한 지역개발 공약이 아니라 근본적인 전환의 기회가 왔고, 원대한 고민에 대해 선거를 떠나서 동시대인으로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용선 위원장은 박본부장의 진지한 검토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양적 성장에서 질적 발전으로 전환, 지방권 발전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에 대한 관련 전문가들의 점검이 이어졌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가장 공감대가 높은 프로젝트는 두만강 하구 다국적도시에 관한 제안이었다. 김석철 교수는 두만강 하구 다국적도시 건설을 통해 두만강 하구를 운하화하여 중국 동북3遼寧吉林黑龍江省의 중공업과 농・축산업 물류를 동해로 연결시켜 태평양을 통해 일본과 미 대륙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안건혁(安建爀)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다국적도시 건설이 북한을 설득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나진·선봉의 개발이 지지부진하여 중국에 개발권을 헐값에 넘기려는 판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으로 보았다. 심재원(沈載元) 전 현대아산 부사장은 두만강 하구 다국적도시가 유라시아 대륙을 한반도와 연결하고 사할린 가스 등 에너지 도입에 중심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시베리아 철도 및 중국 철도를 북한과 연결하는 사업은 3년 이내에 투자금 회수가 가능하고 사할린 가스 북한통과 사업은 1년 이내에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김영윤(金瑩允) 남북물류포럼 회장도 한국이 적극적으로 두만강 하구 지역개발에 나선다면 한국과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컨테이너 물류수송사업을 활성화할 수 있고 남・북・러 가스관사업도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권태선(權台仙) 한겨레 편집인도 한국이 이 사업에 적극 나설 경우 중국・러시아의 동의가 따를 것으로 보았다.

지방권 독립과 자립에 관한 김석철 교수의 구상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다. 김교수는 지방권이 독립·자립적인 단위가 되기 위해서는 지방권 전 지역을 통괄하는 독립된 행정단위가 필요하니, 세종시를 그 수도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세종시에 국회의사당을 이전하고 국립대학 통합본부, 다국적 과학교육단지, 국가상징구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방권의 중심인 광역시와 중소도시 사이에 도농복합 중간도시를 두고 농식품업을 수출산업으로 적극 육성해야 하며, 이를 위해 김해·대구·청주·무안의 네 공항을 도시화하고 대가야 지역에 지방권 통합공항을 세우자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안건혁 교수는 남한을 수도권과 지방권으로 나누고 여기에 북한을 추가하여 각기 인구 2500만의 세 권역으로 나누는 발상은 새롭고 창의적이라고 보았다. 서울과 지방권 중심도시가 중앙정부 기능을 양분한다는 것은 지방권 수도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지방권의 네트워크 형성을 위해 88고속도로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중심축으로 삼은 것도 예지가 번뜩이는 부분이라 높이 평가했다. 다만 지방권 통합공항은 수요 부족으로 경쟁력을 갖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권태선 편집인 역시 현재 지방공항이 너무 많은 상태이고 지방권 통합공항을 농축산물 수출 공항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타당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표했다.

필자 역시 세종시와 충청권을 호남-강원권을 연결하는 새로운 도시 벨트의 중심 축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다만 세종시를 새로운 국가기능을 수행하는 지방권 수도로 정하는 것은 헌법적 논의가 필요한 일이다. 국가기능을 둘로 쪼개는 일이 아니더라도 국가기능의 일부나 상당부분을 분할하는 일도 대대적인 정부조직·행정구역 개편을 수반하는 일이다. 지방권 자립을 위해 농・축산업의 대대적인 발전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또한 매우 타당하지만, 당장은 도농복합도시 건설보다는 농업생산력 기반의 붕괴를 막고 품질경쟁력을 갖춘 지속 가능한 농업 구상을 정비하는 일이 시급하다. 남부권 신공항의 필요성은 수긍할 수 있으나 항공수요와 입지에 대해서는 계속적인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지방권 자립은 한반도경제의 형성과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다. 수도권 이외의 지방권이 자생력을 가질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어야 남북의 경제적 연계도 목표와 기초를 견고히 다질 수가 있다. 광역자치경제권이 처음부터 수도권과 맞먹는 규모와 독자성을 지닌 지방권 형성을 겨냥해야 승산이 있다는 김교수의 발상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당장은 지방권 전체를 한 단위로 아우르는 사고방식보다는 발전을 위한 적정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현재의 광역자치단체 규모를 넘어서는 광역자치경제권을 형성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접근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광역시・도들의 역할 분담에 꼭 필요한 조정과정은 사라지고 오직 경쟁관계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과거 노무현정부는 지역의 산업발전과 혁신을 위해 많은 사업을 벌였지만, 그 사업권을 놓고 광역시・도 사이의 대립이 심했다. 임기말에서야 뒤늦게 광역경제권 개념이 제기되었으나 구체적인 실행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명박정부로 넘어와서는 광역 또는 초광역 개념이 제시되었지만 중앙정부 중심의 국토개발・지역발전 프로그램의 배정 단위에 국한될 뿐이었다. 현재 기형적으로 분리된 인근 시・도가 유기적으로 연계된 경제권 단위를 구축하여 인재・지식 공급과 산업발전의 선순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김석철 교수가 제기하는 수도권 혁신에 관한 문제의식은 대단히 예리하다. 그는 지금까지의 서울의 확대 과정은 큰 문제가 없었으나, 최근에는 시장과 공장의 창출보다 부동산사업에 몰두해 결과적으로는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용산·뉴타운·신도시 등이 난파해가고, 서울의 산업이 높은 지가와 임금 수준으로 중국에 밀리고 있다는 현실인식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문제는 대안이다. 세계적인 견본시장을 수도권에 불러오면 수도권이 동북아 최고의 시장도시가 될 수 있다는 제안은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뉴타운을 아파트단지의 집약으로 개발할 것이 아니라 대학을 포함하여 산업형 복합주거단지로 만들어가자는 제안도 구체적 현실에 들어오면 여러 난관에 부딪힐 것으로 예상된다. 안건혁 교수는 김교수의 구상이 도시계획 측면에서 보면 옳은 방향이지만 이는 시장이나 장관, 심지어 대통령이 나선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당 지역주민들의 이해와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권태선 편집인도 뉴타운 문제에 주민들의 단기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짚었다. 결국은 마을공동체 운동과 결합하여 주민 스스로 교육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자신의 주거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김교수의 수도권 혁신방안에서 가장 창조적인 대목은 지하공간을 적극 개발하여 ‘소프트 인더스트리’의 전진기지로 삼자는 것이다. 당장 지하에 산업 공간을 개발하는 것은 무리가 될 수도 있지만, 인프라를 지하에 구축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타당성있는 개발투자가 될 것이다. 로마는 도시의 기반시설로 상하수도망을 지하에 건설했고, 빠리의 하수도는 5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지금도 활용된다는 점을 상기해볼 수 있다. 지하공간을 도시 인프라와 산업공간이 체계적으로 집적된 ‘지하도시’로 전환하는 계획은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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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철 교수의 열정과 원대한 시야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의 평가가 이어졌다.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의 서문에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김교수의 작업을 범한반도적・동아시아적・전지구적인 안목에 기초한 국토 인프라 설계이자 ‘융합학문’ 또는 ‘사회인문학’의 훌륭한 성과로 높이 평가했다. 안건혁 교수도 과연 이 건축가의 상상력은 어디가 한계일까 생각하게 된다고 언급했다.

다른 한편으로 김교수 구상의 추진방식에서 실천 가능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안건혁 교수는 심각한 질문을 던졌다. “김석철 교수의 구상이 이토록 우리 미래의 핵심을 건드리며 기막힌 대안을 제시하고 있건만, 그가 제안한 수많은 구상은 왜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첫째, 건축과 도시계획은 일의 추진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건축가들은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건축주 한 사람만 설득하면 되지만, 스케일이 큰 국토계획을 추진하려면 수많은 관문과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도시계획은 실천될 때까지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고, 그래서 혼자의 힘으로 전 과정을 컨트롤할 수 없다. 거대한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김석철 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세종시나 신공항 같은 문제는 백년대계의 사안이며 이처럼 국가의 틀을 짜는 일은 혼자 할 수 없다. 민주적 참여가 꼭 필요하지만 뛰어난 이들이 참여해서 그들대로 역할을 다해줘야 한다.” 그러면서 다시 힘주어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 국가의 틀을 만드는 일에 참여해주시길 바란다.”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사회과학자들의 분발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석철 교수의 방대한 구상을 현실에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지방권, 수도권, 다국적도시 등에 관해 사회과학적 해명이 필요하다. 그들 제도와 조직은 어떠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제도나 조직이 이 구상의 실현 가능성을 높여줄까?

이와 관련하여 필자가 평소 주장해오던 네트워크 경제, 네트워크 국가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네트워크 개념을 도입하면 프로젝트의 규모를 적절히 설정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과도한 ‘계획’이나 ‘설계’에서 오는 실패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도시를 미리 설계·제작할 수 있다면 도시건설 비용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도시를 미리 설계·제작하기보다는 일정 수준의 설계 이후 스스로 네트워크를 형성·진화해가는 것으로 발상을 전환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수 있다. 또 프로젝트의 규모를 좀더 줄여볼 필요도 있다.

수도권과 경쟁할 수 있는 지방권을 바로 구상하기보다는 지방정부간 네트워크를 통해 광역지역경제권을 형성하는 데서 시작해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대통령 프로젝트’라 하더라도 결국은 중앙정부·지방정부·기업·민간단체가 수평적으로 협력하는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광역경제권 형성과 연결되는 새로운 산업정책・지역정책 모델을 개발하는 것이 핵심적 과제가 아닐까 싶다.

심포지엄 말미 청중 발언에서 한 참석자는 김석철 교수가 건축가이자 사상가라고 평하면서 결국은 이 구상의 실행이 문제라고 짚었다. 그러고는 우리 정치수준을 볼 때 “전망은 비관적이다”라고 침통한 어조로 말을 마쳤다. 과연 그럴까. 이번에는 좀 달라지지 않을까. 각자 더 분발해보자, 그러면 국민이 새로운 길을 함께 만들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