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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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우리 비평담론의 사회성을 찾아서

 

리얼리즘과 함께 사라진 것들

운동으로서의 ‘총체성’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역서로 『도둑맞은 세계화』 『쿠바의 헤밍웨이』 『종속국가 일본』(공역)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리얼리즘이라는 교착

 

기본개념들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사회적 변화를 그려내는 연구분야가 있다. 개념사로 지칭되는 이 방법을 적용하여 한국문학사를 재구성한다면 빠뜨릴 수 없는 기본개념의 하나가 ‘리얼리즘’이다. 근대문학이 시작된 이래 리얼리즘의 이름만큼 줄곧 그 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예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 개념의 역사 자체가, 서로 다른 의미들의 치열한 부딪힘이나, 이른바 경험공간과 기대지평1) 사이의 예리한 간극,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당파성의 불가피한 표출 같은 극적인 요소로 풍부하다. 이런 특성은 다소간 지금도 이어지지만, 극적인 역사에 으레 동반되는 ‘영욕’의 파란만장함을 완성하듯, 오늘날 문학의 의미장에서 리얼리즘은 초라하고 낡은 시대착오를 지시하며 겨우 다른 이름들의 신선함을 증명해줄 배경으로 소환되는 형편이다.

리얼리즘이 문학적 사유를 밀고 나가고 때로 비약하게 하는 현재적 개념으로는 거의 사라진 것 아닌가 싶은 이즈음, 뜻밖에도 몇몇 문예지에 이 개념의 복권 가능성을 조심스레 검토하고 요청하는 글이 실렸다. 뜻밖이라고는 했지만 그럴 조짐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이미 문학과 정치를 둘러싼 논의라든가 현실의 귀환을 감지한 비평적 분석들에 그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일말의 반추가 있었고, 거기에 분명히 발화되지 않은 흔적으로서 리얼리즘의 자리가 이미 마련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오늘의문예비평』은 ‘다시 리얼리즘이다!’라는 담대한(?) 제목의 특집으로 각기 초점을 달리한 세편의 글을 실었는데, 이 중 조정환(曺貞煥)의 글2) 서두에서 리얼리즘을 둘러싼 쟁점을 리얼한 것 혹은 리얼리티에 대한 정의의 문제라고 정리한 점은 시사적이다. 아마도 리얼리즘을 ‘다시’ 논할 수 있는 근거도 사라지지 않는 리얼리티의 엄연함에 있을 것이다. 『자음과모음』 의 특집은 ‘하나이면서 여럿인, 리얼(리즘)’이라는 다소 조심스러운 제목이지만 역시 리얼리즘의 문제를 제기했다. 여기서 권성우(權晟右)는 “리얼리즘은 단지 가능한 소설 양식 중의 하나가 아니라, 여전히 문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미학적 태도에 해당한다”3)라고 역설한다.

이 두 계간지에서 리얼리즘을 실제비평 차원에서 논한 최원식(崔元植)과 권성우의 글은 공교롭게도 모두 한국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담은 김원일(金源一)의 『아들의 아버지』(문학과지성사 2013)와 조갑상(曺甲相)의 『밤의 눈』(산지니 2012)을 다루었다. 최원식은 “루카치식() 정통 리얼리즘에서 한걸음 비켜나 있”으면서도 잊고 있던 소설의 힘을 강렬하게 일깨운 두 작품을 상세히 읽으며 “‘형식의 앙가주망’이란 급진적 차원”의 개척을 촉구한다.4) 권성우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역사적 소재들에 늘 “새로운 관점이 형성될 수 있으며 아직까지 제대로 소설로 형상화되지 않은 신선한 소재들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자”5)라고 강조한다. 두 글은 리얼리즘을 환기함으로써 작품이 구현한 미덕을 적극적으로 설명한 반면, 그 미덕을 토대로 리얼리즘을 재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하지는 않은 듯하다. 실상 리얼리즘‘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두 잡지의 특집은 리얼리즘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수용하고 들어가는 인상이어서, 갱신 방안을 제시하는 순간에도6) 일정한 패배주의의 기색이 묻어난다.

이런 판단에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논의가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이 글 또한 리얼리즘론을 전면적으로 검토하여 분명한 개선안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심지어 지금 필요한 문학론의 갱신이 리얼리즘론으로 수렴될 수 있는지 여부에도 준비된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대신 리얼리즘이 조장하고 수행한 일련의 미학적 지향과 운동이 마땅히 이어져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런 이어짐이 그 여전한 이름으로 수행되기에 리얼리즘론은 좀체 돌파구를 만들기 어려운 상태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런 교착상태에서 조금이나마 운신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이 글은 리얼리즘이라는 무겁고 둔한 덩어리에서 ‘총체성’이라는 한가지 세부를 비틀어 떼어내보기로 했다.

 

 

2. 총체성이라 쓰고 전체주의라 읽는다

 

정작 ‘세부’가 되기에 총체성 또한 꽤나 둔중한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리얼리즘의 교착에 총체성의 부피야말로 무엇보다 큰 책임이 있는지 모른다. 일찍이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론자인 리오따르( J. F. Lyotard)가 콕 집어 “총체성과의 전쟁”(a war on totality)을 선포한 바 있거니와,7) 지난 몇십년간 이 개념을 둘러싸고 비판에 비판이 거듭된 나머지 이미 거기 드리운 ‘암운’은 걷어내기 힘들고 평판은 돌이킬 수 없이 손상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총체성 비판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지적대로 거의 ‘시대정신’에 가깝다고 하겠는데,8) 그것이 ‘시대정신’인 한 이를 반복 재생산하는 쪽에서는 구태여 그때그때 스스로를 정당화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사실상 시비를 ‘초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먼저 총체성에 부여되어온 부정성의 세목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제임슨의 요약을 참고하면, 먼저 지적 권위라는 면에서 총체성은 총체적 앎이 가능한 어떤 특권화된 주체를 가리키고, 사회적 관계 면에서는 차이와 분화의 억압을, 정치라는 면에서는 다원적 사회운동과 대비되는 일당(一黨)정치를, 철학 면에서는 타자와 자연을 억압하는 헤겔(G. W. F. Hegel)식 사유를, 미학 면에서는 유기적 통일체로서의 작품을, 윤리와 정신분석 면에서는 중심화된 주체와 단일한 삶의 기획을 의미하게 되었다.9) 이 다양한 ‘죄목’에 담긴 공통점을 더 간단히 추릴 때 결국 총체성은 중심이 있고 단일하며 차이를 억압하는 유기적 전체이고, 이는 곧 전체주의라는 등식이 나온다. ‘전체주의’라는 딱지는 대체로 향후의 어떤 진전된 논의나 재고도 불필요함을 확증하는 역할을 하므로, 일단 전체주의와 결합하는 순간 총체성은 절대 피해야 할 위험목록의 윗자리에 간단히 등극한다.

이런 비판이 하나의 공식처럼 널리 통용되었음은 리얼리즘의 쇄신을 요청하는 글에서조차 확인된다. “과거의 리얼리즘이 현실의 다양한 측면을 ‘총체성’이라는 개념을 기준으로 환원시켜왔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으며 지금도 “총체성의 이름으로 억압되었던 것들은 귀환하지 못한 채 산발적으로 다시 억압되었다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진단한 장성규(張成奎)의 진술이 그러하다.10) 사정이 실제로 그러하다면 리얼리즘을 새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셈이고 그 쇄신의 요구는 더구나 무모한 노릇이 된다.

일찍이 ‘항상 역사화하라’(Always historicize!)는 구호를 내세웠던 제임슨은 총체성과의 전쟁 역시 역사적으로 이해할 필요를 제기하면서 이 ‘시대정신’이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맑스주의의 운명, 특히 프랑스 맑스주의의 운명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1990년대 이후 일어난 문학장의 변화를 돌이켜볼 때 이 점은 한국의 상황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됨직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역사화 기제를 약간 다른 방식으로 또 한번 가동하여, 총체성 비판이 현재 시점에서 어떤 역사적 활동을 수행하는가 하는 질문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은 곧 총체성 개념의 여전한 필요성이란 문제와 이어져 있는데, 이 개념을 ‘시대정신’의 수준보다 조금이라도 더 진지하게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맑스주의 전통에서 총체성을 두고 줄기차게 다른 해석을 제시해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총체성과의 전쟁에서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종종 ‘악의 축’ 역할을 떠맡게 되는 루카치(G. Lukács)의 총체성 개념부터가 그렇다. 그에게 리얼리즘이란 ‘총체성을 향한 열정’(passion for totality)11)에 다름 아니었음은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지만, 루카치를 습관적으로 전체주의적 총체성의 대변자로 처분하기에 앞서 그의 총체성이 전체에 대한 어떤 실정적(實定的, positive) 제시를 함축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감안해야 한다. 예컨대 그의 미학에서 총체성과 특권적 관계에 있는 장편소설이 정작 총체성보다는 “총체성을 가로막는 조건과 계기”를 드러내며 “부정적인 방식으로 〔서사시에서 가능했던〕 ‘긍정적 총체성’을 환기”할 따름이라거나,12) 그에게 총체성이란 앎의 형태가 아니라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데올로기 전략을 탈신비화하는 “방법론적 기준”(methodological standard)이며 알뛰쎄르(L. Althusser)적 ‘부재원인’에 다름 아니었다는13) 주장들은 간단히 무시할 수 없는 일관성을 담고 있다. 이런 해석으로 볼 때 루카치가 장편소설과 현실 사이에 이른바 투명한 반영이라는 상동관계를 설정했다는 통념 또한 성립하기 힘들다. 그의 총체성 개념은 차라리 습관적 인식의 직접성을 교란하는 “‘낯설게 하기’를 내포”14)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물게 비평가로서 맑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제임슨 자신의 총체성 해석도 참고할 만하다. “총체성은 그것으로 끝이 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것으로 시작되는 무언가”15)라는 주장은 위의 루카치 해석과도 공명하는 대목이지만, 여기서 제임슨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애초에 “총체적 체제를 구성하면서 총체화하는” 쪽은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것이다.16) 그러니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에 대고 총체성 개념을 폐기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제임슨에게 자본주의는 총체화하는 체제이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총체성을 은폐하면서 유지되는 체제이므로, 비평에서도 총체성 개념은 그같은 이중성을 모두 감당해내야 한다. 그로부터 “물신화와 파편화의 극복”이되 “차이들을 삭제해버림으로써가 아니라, 근본적 차이를 사상하지 않으면서 파편들을 단일한 정신적 행위 안으로 결합해낼 수 있는 개념적 혹은 미학적 긴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극복으로서의 총체성이라는 주장17)이 나온다. 다시 말해 총체적 체제라는 것과 더불어 (물신화와 파편화의 형태로 은폐되는) 그 체제의 총체화 과정에도 동시에 대응하는 것이 총체성 개념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른바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재현이 원칙적으로 전체주의적 단순논리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현실의 총체성이 갖는 복합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 점은 총체성 개념의 구현이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 될 수 있고 나아가 어쩌면 그것의 ‘불가능’을 말할 근거로 작용할 소지도 있다. 총체성의 이런 양면은 맑스주의 전통과 이어진 지젝(S. Žižek)의 설명에서 더 분명히 확인된다. 그는 맑스주의에서 총체성은 “이상(理)이 아니라 비판적 개념이며, 어떤 현상을 그 총체성에 둔다는 것은 전체의 숨겨진 조화를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체제 안에 그것의 모든 ‘증상들’, 그 적대와 불일치들을 뗄 수 없는 내적 일부로 포함한다는 의미”18)라고 설명한다. 여기서도 총체성 개념의 ‘비전체주의적’ 성격은 체제의 속성으로부터 비롯하고 있다. 그런데 지젝에게서는 통상적인 전체라는 것 자체가 사실상 완결될 수 없는 구조라는 점이 강조된다. 총체성에 관한 한 루카치보다 한층 의혹의 대상이며 전체주의라는 혐의의 상징이 되어버린 헤겔의 총체성 개념을 지젝은 다음과 같이 옹호한다.

 

헤겔적 총체성은 정의상 “자기모순적”이고 적대를 포함하며 일관성을 갖지 않는다. ‘진리’(the True)인 ‘전체’(the Whole)는 전체에 그 증상들, 곧 그것의 비진리성을 드러내는 의도치 않은 결과들을 더한 것이다. 맑스에게 자본주의의 ‘총체성’은 위기를 불가결한 계기로서 포함하고 프로이트에게 인간 주체의 ‘총체성’은 주체의 공식적 이미지에서는 ‘억압된’ 지표로서의 병리적 증상들을 포함한다. 여기에 깔린 전제는 전체란 결코 진짜 전체가 아니라는 것, 전체에 대한 모든 개념은 무언가를 빠뜨리고 있으며 변증법적 노력은 이 과잉을 포함하고 그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 헤겔적 총체성의 공간이란 바로 (‘추상적’) 전체와 전체에 의해 발생했으나 그것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세부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공간이다.19)

 

이 대목에서 우선 제임슨이 ‘체제가 만들어낸 은폐’로 설명한 요소가 ‘체제의 불능’이라는 차원으로 이동한 변화가 눈에 띈다. 물론 이때 불능은 ‘변증법적 노력’이 발생하는 조건이며 전체와 전체 아닌 것의 상호작용으로서의 총체성이 가동되는 조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체’가 진짜 전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 ‘전체에 대한 개념’이 늘 무언가를 빠뜨리고 있다는 사실이 동일한 층위에 놓인 점이다. 이것은 현실을 상징체계로 파악하는 라깡주의의 일반적 태도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그럼으로써 체제의 불능이 체제 인식 혹은 체제 재현의 불가능성으로 단번에 옮아갈 소지도 생긴다. 총체성이 전체주의의 혐의를 벗는 댓가로 스스로의 무능을 자인하는 형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3. 불가능과의 접속

 

불가능에 관한 한, 파편화 극복이 매우 복잡한 절차를 요구한다는 제임슨의 지적에 이미 단서가 주어져 있다. 실제로 ‘포스트모던’ 시대를 의미있는 단절로 강조하는 그의 설명은 총체성이 불가능해졌다는 진단에 근접할 때가 많다. 자본주의체제가 너무 거대하고 복잡하고 파편화된 나머지 그것이 여전히 총체적 체제임이 분명하더라도 그에 대한 총체적 재현은 극히 힘들어졌다는 식이다. 가령 총체성 재현의 핵심적인 매개로 ‘알레고리’를 제시할 때도 일정한 모호함이 나타난다. 제임슨은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이나 맑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 알레고리를 예로 들어 알레고리가 환원론이기는커녕 해석의 지평을 열어주는 매개가 된다는 설명을 내놓은 바 있다.20) 마찬가지 맥락에서 그는 “포스트모더니티에서 보편과 특수는 알레고리로서야 비로소 서로 연관된 것으로 이해”되며 “하나의 체계가 자신의 보편적 요소를 제거하기를 원해서 더이상 하나의 체계로 인식될 수 없을 때 (…) 그〔보편과 특수 사이의〕 연관은 언제나 알레고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같은 “알레고리는 또한 불완전한 재현, 혹은 재현의 실패,” 곧 “충만한 재현이 언제나 필연적으로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부연하는 것이다.21)

그렇다면 총체성 개념은 ‘분명 안되겠지만 시도는 해야 한다’는 비장한 윤리적 제스쳐에 불과한가. 그런 바에야 처음부터 한계를 인정하고 물러나는 편이 깔끔하지 않을까? 최근의 비평에서 자주 마주치는 불가능의 언술들, 특히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재현’이라는 진단에 이런 질문이 내포한 곤경이 단적으로 압축되어 있거니와, 논의를 폐쇄하고 해석을 종결짓는다는 점에서 불가능의 선언은 또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발전할 조짐마저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총체성 개념이 여전히 필요함을 입증하는 일은 해석을 바로잡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작업을 요구한다. 총체성이 불가능의 차원에 접속될 때 거기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을까? 불가능을 한켠에 포함하는 총체성이 비평적 수행성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불가능성’으로 뭉뚱그려진 수사의 모호함을 걷어내고 거기에 연루된 차이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동안 ‘재현 불가능성’의 상징으로 거론되곤 했던 ‘아우슈비츠’를 논한 아감벤(G. Agamben)의 한 대목을 통해 이 점을 살펴보자.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사건들 하나하나를 열거하고 묘사할 수 있다 해도 우리가 진실로 이해하고자 할 때 그 사건들은 독특하게 불투명한 것으로 남는다”라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렇듯 “사실적인 요소들을 초과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현실, 그런 것이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라고 말한다. 이 아포리아는 “역사적 인식 자체의 아포리아”로서 “사실과 진실 사이의, 입증과 이해 사이의 비()일치”에 다름 아니다.22) 여기서 이미 한가지 종류의 불가능성이 등장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사실적 차원이 아닌, 진실과 이해에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너무 많이 너무 빨리 이해하고 싶어하면서 섣불리 모든 것에 설명을 내놓거나, 반대로 이해를 거부하고 값싼 신비화를 도모하는 것은 이 아포리아를 제대로 밀고 나가는 자세가 아니다. 가령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증언을 심판( judgement)과 혼동하는 것은 ‘섣부른 설명’에 해당한다. 아감벤에게 법적 범주로서의 심판은 정의를 바로잡는 것도 진리를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아우슈비츠에 관한 법적 절차는 마땅히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 절차는 아우슈비츠의 문제가 해결되고 극복되었다는 잘못된 생각을 유포할 우려가 있다. 다른 한편 ‘값싼 신비화’에 해당하는 예는 아우슈비츠를 두고 ‘말할 수 없다’(unsayable)거나 ‘이해할 수 없다’(incomprehensible)고 말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왜 말할 수 없는가? 왜 몰살에 신비의 위엄을 부여하는가?”를 반문하면서, 말할 수 없음과 이해할 수 없음은 신의 속성으로 묘사되어오던 것이므로 의도가 어떠하든 이런 발상은 아우슈비츠를 침묵으로 경배하며 그것의 ‘영광’에 기여하는 태도라고 선을 긋는다.

하지만 아감벤 자신도 진실과 이해의 불가능성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여기서 아감벤이 반대하는 것은 이해 불가능성 자체가 아니다.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정확히 말하면 이해 불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이해작업을 종결짓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우리가 진실로 이해하고자 할 때’라는 앞의 인용구절이 갖는 의미가 여기서 드러난다. 섣부른 설명과 값싼 신비화는 각기 명시적이고 암묵적으로 불가능성을 부인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불가능성이 비로소 나타나는 순간은 바로 ‘진실로 이해하고자 할 때’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차이가 생존자의 증언이 본질적으로 ‘누락’을 포함한다는 설명에도 유지된다. ‘살아남은’ 사람들로서 이들은 ‘진정한’ 혹은 ‘완벽한’ 증인인 죽은 이들을 대리하는 유사증인들(pseudo-witnesses)이며 그들의 증언은 빠져 있는 증언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시에 죽은 이들의 증언이란 애초에 존재하거나 성립하지 않으므로 ‘대리’라는 규정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죽은 이들〕의 이름으로 증언하는 사람은 증언하기의 불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증언해야 하는”23) 셈이다. 이 대목은 엄밀히 말해 생존자의 증언 자체가 불가능하다거나 그 증언이 지시하는 내용이 곧 증언의 불가능에 관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생존자의) 증언이 (죽은 이들의 증언하기의) 불가능성에서 발생한다는 것, 다시 말해 불가능성에 토대를 두고 증언의 가능성이 생긴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감벤의 논의를 재현이라는 견지로 번역해본다면, 재현에 내재된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스스로의 불가능성을 거듭 되뇌는 ‘자기반영적’ 재현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비평에서 불가능성이라는 범주가 널리 유행한 데는 불가능으로서의 ‘실재’(the Real)를 말한 정신분석담론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담론의 영향은 위기와 파국과 재앙을 말하는 비평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여기서는 어떤 돌연하고 섬뜩한 파편이나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심연처럼 상징계로서의 현실에 맞추어 넣기가 불가능한 것들이야말로 핵심적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총체성이 아니라 총체성이 깨어지는 지점에 진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 범주의 도입이 현실에 대한 한층 치밀한 탐구로 이어지는 대신, 현실 너머를 암시해줄 외상적인 이미지를 발견하고 재현하는 데 골몰하게 만드는 순간 ‘실재주의’라고 이름붙일 만한 어떤 비평적 안이함이 생겨난다.24)

실재는 상징계로서의 현실과 그에 대한 인식에 기입될 수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상징계 바깥이나 너머에 “또다른 중심”으로 존재하는 “더 깊고 더 진정한 핵 혹은 블랙홀” 같은 것이 아니다. 지젝에 따르면 그렇듯 실재가 재현이 미치지 못하는 외상적인 ‘물자체’라는 생각이야말로 실재를 가리는 “궁극적인 유혹”이나 “궁극적인 베일”이다.25) 라깡적 실재의 일관된 규정은, 그것이 상징계로서의 현실이 내포하는 빈곳일 뿐이지만, 그것에 의지하여 상징계가 일관성을 유지하고 그것과의 조우를 피하려는 시도를 통해 상징계가 작동한다는 점에서 상징계 자체를 성립시키는 공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의 불가능성이란 곧 상징계가 노정하는 불가능성이며, 실재의 재현이란 상징계의 불가능성 혹은 공백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공백이 말 그대로 어떤 빈 자리나 심연 혹은 독특한 외양을 띤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기입하기 위해서는 상징계가 작동하지 않는 자리를 찾아내어 그 작동 불가능을 재현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시, 작동하지 않는 자리란 단순히 일시적 장애나 지엽적 오류가 아니라 ‘상징계’ 자체의 구조라는 차원에서 발생한 것이어야 한다. 실재란 실재 개념의 속성을 연상시키는 현실의 단편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그 한계까지 사유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 총체성이 전제되어야만 총체성이 깨어지는 지점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총체성은 완결된 것으로 성립하기가 분명 불가능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이 불가능 자체가 총체성을 통해, 더 정확히 말하면 총체성을 포착하려는 사유의 효과로 비로소 나타난다.

 

 

4. 이것이 전부인가를 묻는 일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이 사라진다 한들 문학에서 현실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탐구가 사라질 리는 없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문학읽기, 곧 비평이 자기 할 바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 리얼리즘과 더불어 사라지고 있지 않은지, 그런 사라지는 것들을 되살리기 위해 그 이름의 힘을 간직해야 하지 않을지 살피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 점검의 하나로 리얼리즘을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였던 총체성 개념을 다루어보았다. 앞의 논의에 비추어 총체성 개념의 여전한 필요성이 무엇일지 정리하는 것으로 끝맺으려 한다.

먼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적 인식을 교란하는 부재원인으로서의 총체성은 실상 포스트모더니즘이 수행하는 총체성과의 전쟁에도 언제나 이미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 이론의 전개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을 스스로 부인할 이유는 없다는 의미에서, 총체성 개념은 다른 무엇에 앞서 이론적 자의식의 차원과 관련되어 있다. 맑스주의 전통이라는 면에서 총체성 개념의 근거는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다른 어떤 체제에 비할 수 없는 규모로 총체화하는 체제이면서 동시에 총체적 인식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든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이 개념의 필요성은 자본주의를 체제로서 사유할 필요성과 연결되어 있으며, “체제라는 것이 없다면 체제적 변화를 환기하는 것이 불필요하고 부적절”26)해진다는 의미에서 “미학적 생산이나 이론적 분석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행동의 전제조건 중 하나”27)라고 할 수 있다. 총체성 개념이 체제 바깥에 대한 정치적 사유와 행동의 전제라면 그것은 다시 비평적 판단의 엄밀성과도 이어진다. 제임슨은 “모든 것이 체제를 복제하는 반면 체제 안의 미세한 변화와 변주야말로 어떤 것을 전복이나 재전유로 만들어준다”라고 보는 태도를 “모더니즘의 논리”로 지적한 바 있다.28) 총체성 개념은 일단 전복 자체가 안된다고 전제해둔 다음 한결 기준이 낮은 전복성의 인정을 남발하는 비평적 판단의 느슨함을 경계하고, 어떤 것이 진짜 바깥을 넘보는 전복성인가에 관한 탐문을 지속하게 해준다. 그럴 때 총체화하는 이 체제가 봉합할 수 없는 내적 균열과 공백을 품고 있어서 결코 완결된 총체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총체성 개념을 폐기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 불가능성을 온전히 드러내고 보존하며 이를 다른 가능성의 실마리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총체성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총체성이야말로 불가능성과 어떤 특권적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름마저 거창한 이 총체성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체제라는 거대 단위를 사유할 때만 등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마주치는 그때그때의, 하나하나의 문제적 현실에 총체성은 어떻게 개입되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증언’ 이야기를 기억해보자. 죽은 이들의 불가능한 증언이 현실에 기입되는 순간은 바로 살아 있는 이들의 증언이 이어지는 동안이다. 그리고 이 증언은 지금 우리에게 ‘진실로 이해하고자 하는’ 질문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끝내 남김없이 답할 수 없으리란 걸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전부인가. 지금까지 보고 말한 것이 현실의 전부이며 진실의 전부인가.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지금 말할 수 있고 또 말하지 못하는 전부이며, 우리가 지금 할 수 있고 또 하지 못하는 전부인가. 이 물음을 가능한 모든 방향에서 가능한 오래 지속하기, 이것이 총체성 개념의 존재양식이며 사라져서는 안될 리얼리즘의 ‘운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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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은 흔히 개념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는 코젤렉(R. Koselleck)이 역사적 변화를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메타역사적’ 범주로 제시한 것이다.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나간 미래』, 한철 옮김, 문학동네 1998, 394~99면 참조. 여기서는 리얼리즘 개념에서 실제로 경험된 바와 기대된 바 사이의 차이를 가리킨다.

2) 조정환 「내재적 리얼리즘: 리얼리즘의 폐허에서 생각하는 대안리얼리즘의 잠재력」, 『오늘의문예비평』 2014년 봄호.

3) 권성우 「리얼리즘의 품격과 아름다움」, 『자음과모음』 2014년 봄호 175면.

4) 최원식 「사실의 힘, 진실의 법정: 『아들의 아버지』와 『밤의 눈』」, 『오늘의문예비평』 2014년 봄호 63~64, 78면.

5) 권성우, 앞의 글 192면.

6) 그와 같은 갱신의 방안은 『오늘의문예비평』의 경우 ‘내재성의 리얼리즘’(조정환) 혹은 ‘포스트-리얼리즘’(장성규 「포스트-리얼리즘을 위한 세개의 논점」)이라는 용어로 제시되고 『자음과모음』에서는 ‘네이션을 넘은 공통적인 것의 상상’(허희 「이국異國과 이국二國」)으로 요약된다.

7) Jean-François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Manchester: Manchester UP 1984, 82면.

8) Fredric Jameson, Valencies of the Dialectic, New York: Verso 2010, 210면 참조.

9) 같은 면 참조.

10) 장성규, 앞의 글 56~57면 참조.

11) 이 표현은 네그리(A. Negri)의 Marx beyond Marx: Lessons on the Grundisse (Autonomedia 1991)에 나온다. 총체성 해석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서 이 대목을 인용해둔다. “우리는 여기서〔Grundrisse〕 총체성을 향한 열정을 볼 수 있지만 획일적인 의미가 전혀 아니라 연속과 비약의 다원성(multiplicity)이라는 형태의 총체성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복수성(plurality)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양한 주체성을 갖는 역학이며 어디 하나 닫혀 있는 데가 없다.”(13면)

12) 김경식 「루카치 장편소설론의 역사성과 현재성」, 『창작과비평』 2013년 여름호 336~37면.

13) Fredric Jameson, The Political Unconscious: Narrative as a Socially Symbolic Act, London: Methuen 1981, 52~53면.

14) Jameson, Valencies of the Dialectic, 206면 참조.

15) 같은 책 15면.

16) 같은 책 286면.

17) 프레드릭 제임슨 『문화적 맑스주의와 제임슨: 세계 지성 16인과의 대화』, 신현욱 옮김, 창비 2014, 65면.

18) Slavoj Žižek, Living in the End Times, New York: Verso 2010, 154면.

19) Žižek, Less Than Nothing: Hegel and the Shadow of Dialectical Materialism, New York: Verso 2012, 523면.

20) Jameson, The Political Unconscious, 31~33면 참조.

21) 제임슨 『문화적 맑스주의와 제임슨』 278~79면. 인터뷰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제임슨이 탈구조주의적 입장에 맞서 자기 견해를 펼쳐야 하는 방어적 위치에 있을 때가 많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22) Giorgio Agamben, Remnants of Auschwitz: The Witness and the Archive, trans. Daniel heller-Roazen, New York: Zone books 2002, 12면. 이어지는 대목은 이 책의 1장 ‘증인’(The Witness)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23) 같은 책 34면.

24) 이 점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졸고 「실재와 현실, 그리고 ‘실재주의’ 비평」, 『크리티카』 6호, 올 2013 참조.

25)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 Cambridge, M.A.: MIT Press 2003, 67면.

26) Jameson, Valencies of the Dialectic, 299면.

27) 제임슨 『문화적 맑스주의와 제임슨』 77~78면.

28) Jameson, Valencies of the Dialectic, 359면. 모더니즘의 논리가 이러하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는 전복이라는 발상마저 무효화하고 파편화 자체를 다원성이라는 견지에서 찬양하는 식이라고 하겠다. 물론 제임슨 자신의 입장 또한 체제의 복제와 체제를 넘은 유토피아를 선명하게 가를 수 있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변증법적인 대립물의 통일’에 근거한 분석을 요구하는 쪽이다.

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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