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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 지금, 한국소설과 ‘현실의 귀환’」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김사인 金思寅

시인, 동덕여대 문창과 교수. 시집으로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이 있음. silentin@naver.com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사실, 역사, 그리고 시」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등이 있음. renton13@hanmail.net

 

 

강경석(사회) 문학초점을 좌담형식으로 개편한 뒤 두번째 시간입니다. 문단의 원로·중진급 선배님 한분씩을 모셔서 세대간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데요, 오늘 손님은 김사인 선생님입니다. 특별히 소개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잘 알려진 시인이시고, 최근에는 해설을 곁들인 사화집 『시를 어루만지다』(도서출판b 2013)를 펴내기도 하셨고 새 시집도 준비 중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엔 뜸하시지만 예전엔 평론가로도 활약하셨지요. 자꾸만 고사를 하셔서 겨우 모셨습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우선 독자들께 인사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사인 이런 떨리는 자리에 불러주셔서 가문의 영광입니다.(웃음) 아마 『시를 어루만지다』라는 책 바람에 프리미엄이 좀 붙은 것 아닐까 합니다. 근 20년 만에 다시 참석하는 『창비』 좌담자리가 감개무량하기도 하고요.

 

강경석 개편 첫회인 지난호 문학초점을 읽어보셨을 텐데 소감 한 말씀씩 나눠보죠. 주변 반응을 전해주셔도 좋겠고요.

 

김사인 제 느낌은 이전의 서평 방식에 비해 구어체의 좌담 형식이, 더구나 한국 비평계의 두분 신예와 원로인 백낙청(白樂晴) 선생께서 화제작이나 동향에 대해 함께 짚어주시니까 읽기에 더 입체감이 있었습니다.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서도 실감이 더할 뿐 아니라 참가자 세분의 숨결 같은 것까지 잘 전해져서 개인적으로 그전보다 신선하고 좋았어요. 다만 『창비』의 다른 분야 대담에 비해 좀더 자유롭고 ‘문학적’인 좌담이 되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야 글이 아니라 입말로 이루어진다는 장점이나 개성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오늘 제가 허튼소리를 좀 하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웃음)

 

송종원 교사들이 『창비』를 많이 구독하잖아요. 중·고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친구들 중 하나에게 전해들으니, 동료 선생님이 지난호 문학초점을 펼쳐놓고 읽는 걸 봤는데 ‘재밌다, 이렇게 보니 접근하기 쉽다’고 했다 하더군요. 나아진 면이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웃음) 하지만 여전히 문제점도 보여요. 군데군데 보충 설명이 필요한 용어로 채워져 있고, 또 한 작품에 대해 뭔가 완결된 형식으로, 완결된 내용을 전달하려는 의욕도 약간 앞서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찌 보면 시나 소설이란 것도 모두 일종의 변죽을 울리는 식으로 씌어지는 거잖아요. 정답을 도출하기보다 불확정성을 인식하고 애매하고 모호한 지점에 도달하려 모험도 하고요. 앞으로 이 좌담도 그런 면을 염두에 두고 진행해도 좋을 듯해요. 다소 부정확하더라도 여유를 가지고 말을 주고받다 보면 독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틈이 생기지 않을까요.

 

김사인 예컨대 좀더 높은 자리에서 뭔가 완결된 평가를 내리려 하는 것이 비평가들의 일반적인 무의식인데, 그보다는 창작자들이 지금 애쓰고 있는 바의 복판에 내려가서 우리도 같이 앓는 것, 같이 치르고 같이 고민하는 과정이 육성을 통해 더 담길 수 있다면 좋겠어요.

 

강경석 이번호부터는 좀더 빈틈을 내서 독자들에게 여유를 제공할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다들 좋아하셨다니, 별로였던 분들은 면전이라 내색을 못하신 게 아닌지요?(웃음) 오늘은 1~3월 출간작 중에서 골라봤습니다. 소설로는 먼저 제목 외우기가 힘든 은희경(殷熙耕)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문학동네 2014, 이하 『눈송이』)와 박솔뫼의 첫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자음과모음 2014), 시집으로는 신해욱(申海旭)의 『syzygy(문학과지성사 2014)와 유병록(庾炳鹿)의 첫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창비 2014), 그리고 나기철(羅基喆) 시인의 『젤라의 꽃』(서정시학 2014)입니다. 각각 다른 성향의 시집 세권과 소설 두권, 총 다섯권입니다. 선정 자체가 평가라기보다는 본지의 다른 지면에서 다룬 작품들을 제외하는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한 것이지요.

  

은희경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164-문초-1다른모든_fmt강경석 그럼 『눈송이』에 대해 먼저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이 소설집이 저로서는 흥미로운 구석이 많았고 근래 본 소설 중에서 가장 느낌이 좋았습니다. 수록작 수준도 편차 없이 고른 것 같고요. 베이비붐 세대가 현실에서 겪는 곤혹스러움을 중심으로 그 앞뒤 세대가 어떤 난관에 봉착해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는 이야기로 보였어요. 지금으로서는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묵묵히 견뎌나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나 하는 메시지도 설득력이 있고, 연작소설처럼 연결되어 작품들이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형식적 면모도 눈에 띕니다.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이하 「독일 아이」) 같은 작품에 뜨개질 얘기가 나오는데 세대 격절(隔絶)이나 고립의 아픔을 견디는 뜨개질의 형식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근거 없는 낙관에 빠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단순한 비관에 함몰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요?

 

송종원 저 역시 좋았어요. 오랜만에 소설을 통해 감동을 받았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먹먹함이 밀려오더라고요. 일단 짚을 것은, 재현에 상당히 충실한 소설이라는 거예요. 한 시대의 실감에 접근하려면 소설읽기가 여느 통계자료를 들여다보는 일보다 유용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요즘 한국소설은 인물이 놓인 사회적 배경을 흐릿하게 둘 뿐 아니라 인물과 배경 자체가 알레고리적으로 그려지는 경향이 많았는데, 이 소설집에서는 인물들이 풍부한 맥락 속에서 상당히 생동감있게 그려지고 있어요. 인물의 삶을 구성하는 사회적·역사적 맥락이 매우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어 생생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사인 저는 잡지에 연재될 때의 『태연한 인생』(창비 2012)도 잘 봤는데, 이번 작품집에서도 은희경이 작가로서 예전보다 좀더 자유로워졌다는 느낌이 우선 좋았어요. 어설픈 체면 같은 것들을 거침없이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통이 커지고 편해졌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언어나 문장들에서도 여일하게 노력하는 ‘글꾼’의 면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요. 작가가 저와 비슷한 연배라서 더 그랬겠지만, 작품 속 화자의 시선이 갖는 세대적 위치며, 옛 세대와 자라나는 세대 양쪽을 중간에서 다 지켜보면서, 그렇지만 어떤 낙관적 전망도 가질 수 없다는 것, 어떤 회한 같은 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 이런 점이 제게는 남의 얘기 같지 않았습니다.

 

송종원 은희경 소설의 인물이라고 하면 어딘가 기가 센 느낌 내지는 명철한 이성을 가지고 냉소하며 살아가는 이를 떠올리게 되지요. 그런데 이번 소설에 그려진 인물들은 짠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많이 풍겨요.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지 못하고 스스로 그것을 잘라내는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엿보이고요. 가령 표제작 눈송이의 주인공 안나는 사랑의 대상에게 다가가는 대신에 주위를 맴돌죠. 반면 같은 대상을 대하는 루시아의 태도는 상당히 적극적이고요. 안나의 행동 배경에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루시아에 비해 빈곤한 처지가 놓여 있어요. 그래서 사랑의 욕망에서조차 적극성을 띠지 못하죠. 대신에 소소한 삶의 경험에서 빚어지는 미세한 감각들에 집중함으로써 저 욕망의 결여를 채워나갈 때는 안쓰럽고도 먹먹해집니다. 「프랑스어 초급과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삶은 도시의 중심부에 진입하지 못한 채 중심도시의 외곽, 그러니까 신도시에서 희망 없는 시간을 견디는 모습을 보여줘요. 이렇듯 자신이 놓인 계급적 위치에 대한 직관적인 자각에 의해서건 혹은 사회의 요구에 의해서건 알아서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포기하는 모습이 안타깝고 쓸쓸하고 먹먹하게 다가왔어요.

그런데 그런 인물들이 소소한 행위 또는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자신을 조금씩 회복해가죠. 이게 읽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면이 있어요. 「독일 아이」의 인물은 뜨개질하면서 허술하긴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조금씩 만드는 연습을 해나가죠.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에서는 경제적 여건 때문에 원치 않은 이민자의 삶을 살며 주눅이 들어 있는 어머니가 이국의 문화와 부딪히며 조금씩 자신의 욕망을 발언하는 과정을 겪어요. 가장 뭉클했던 작품은 「금성녀」였어요. 한 인물의 삶을 거슬러 오르는 서사 속에 한 사람의 삶을 구성했던 다양한 역사적 맥락, 그리고 그 안에서 한 개인이 겪어낸 아픔과 욕망의 좌절, 겸허한 운명에의 수긍 같은 것을 유연하게 풀어내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한 인물의 삶을 이끌어간 거대한 시간성 내지 역사적 차원을 마주한 느낌이었어요. 더불어 세대와 성별을 뛰어넘는 혈족 간의 미묘한 교감은 어딘가 인류의 삶을 지속시키는 불가해한 힘을 연상하게도 했고요.

 

왼쪽부터 강경석, 송종원, 김사인

왼쪽부터 강경석, 송종원, 김사인

 

김사인 그동안 제게 은희경은 박완서(朴婉緖) 같은 작가와 기질적으로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두분 다 굉장히 신랄하게, 때로는 얄밉다 싶을 만큼(웃음) 간결 정확하게 세태와 심리의 정곡을 후벼내지요. 그런 작가적 역량은 쉽게 얻어지지 않아요. 또 그게 은희경 소설의 중요한 재미이기도 해요. 그런데 한편 은희경을 이루고 있는 그 독보적인 강렬함과 예리함의 이면이 삶과 세계에 대한 쓰디쓴 냉소 같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봐야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한쪽에 오래 있고요.

그런데 이번 작품집을 읽으면서는 발랄함과 예리함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거나, 적어도 그것과 다른 질감, 다른 시선의 요구에 50대 후반에 접어드는 은희경의 글쓰기가 당면해 있구나 하는 느낌이 강했어요. 그건 삶과 세대적 체험의 무게에 상응하는 어떤 깊이와 폭에 대한 요구가 아닐까 싶은데요, 저는 은희경이 그걸 어떻게 감당해가는지 조마조마해하면서도 기대 속에서 책을 읽었어요. 제가 상대적으로 더 선명한 인상을 받은 작품은 제일 앞의 「눈송이」인데, 마지막을 읽기 전까지는 하이틴 소설 같구나, 소품 수채화 같구나 하는 느낌이었다가, 마지막의 안나의 오줌 얘기 대목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이 작품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는 삶의 치부나 비루함을 드러내는 데 서슴없어졌어요. 이건 작가적 자신감으로 느껴져요. 이걸 거쳐 자신을 건 문학적 승부가 가능해지는 것 아닐까요. 「독일 아이」에서는 은희경이 이루어낼 인간에 대한 중후한 통찰의 가능성 같은 것을 본 기분이었어요. 때로 뜨개질의 과도한 디테일이 부담이 된다 싶기도 했지만요.

대체로 이번 작품집은 이전만큼 날렵하고 감각적이진 않아요. 그렇지만 뭔가 삶과 세계를 무겁게 들여다보는 문학적 초식(招式)이랄까 하는 것을 체득해가는 기색이 역력하고, 그것이 이런 형태로 구현되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싶어요. 젊은 시절의 매력은 그것대로 수습하되, 힘들겠지만 은희경이 이제는 이처럼 무거운 것들을 깊이 다뤄줬으면 하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강경석 송종원 형이 말한 계급문제에 저는 좀더 관심이 가는데요. 주요 등장인물이 대체로 중산층, 위기에 빠진 부르주아랄지 추락하는 소시민 집안 출신이에요. 그래서 “더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 같은 문장도 보이죠. 특히나 한국의 중간계층은 늘 불안하잖아요. “화분 크기만큼만 뿌리를 내린다”라는 문장처럼 이 계층의 기반이 두텁지 않고 뿌리가 깊지 않지요. 그런 의미에서 은희경은 우리 사회의 중간계층을 문학적으로 대변하고 탐구하는 작가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시선에서 보면 이 작품집에는 빈곤층이 거의 등장하지 않아요. 세대로는 확실히 폭이 넓어진 건데 계층이나 계급적으로 보면 중간층에 한정된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자체가 평가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겠지요. 그런 면에서 박완서 같은 작가는 상대적으로 계급적 시야가 더 넓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쟁으로 인한 궁핍의 체험 때문이겠지요.

 

김사인 한 작가의 계층적·계급적 관계나 폭이라는 것이 작은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걸 자기가 익숙한 계층 밖의 인물이나 사건을 작품 속에 얼마나 더 등장시키느냐로만 잴 건 아니겠죠. 은희경이라는 작가를 이루는 감수성 자체가 우리나라의 50~60년대 이후의 중산층 또는 소시민 계층의 정서와 뗄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나는 보는데, 그것을 곧 작가로서의 한계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해요. 어떤 계층이든 자기 자리에서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시야를 달성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진지한 작가라면 피할 수 없는 길일 테니까요. 은희경 작품에 어떤 계층적 제약이 있다고 본다면 다루고 있는 내용이나 인물보다는 작가적 감각이나 문체의 계층성을 깊이 살펴보는 쪽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송종원 김사인 선생님이 언급하신 문체의 계급성과 딱 맞아떨어질지는 의문이지만 생각나는 게 하나 있어요. 은희경의 소설에서 서술자 뒤에 자주 비평자적 시선이 동반되는 것 같아요. 풍자와 냉소의 서사가 가능했던 이유도 이 서술자-비평자의 작동과 관련할 거예요. 이 서술자-비평자는 대개 중산층에 가까운 인물로 서사를 이끌며 그들의 세계를 평가하죠. 그런데 이번 소설에서는 서술자 뒤에 비평자가 아니라 증언자나 기록자가 동반되어 있어요. 이 서술자-증언자 역시 주로 중산층의 삶을 사는 인물들로 이야기를 이끌지만, 초점이 그 세계에 한정되기보다는 그들을 포함한 시대의 흐름으로까지 확장되는 인상이에요. 이러한 변모를 만든 건 작가의 예리한 판단과 결정의 측면도 있겠지만 동시에 풍자나 냉소 자체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동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공통감각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고 봐요.

 

강경석 풍자와 냉소를 어렵게 만드는 어떤 공통감각의 변화도 중요한 고려사항이지만 또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저는 이 작품집이 해체된 삼대 이야기 같아요. 한편의 장편소설도 아니고 완연한 연작도 아니면서 3세대에 걸친 등장인물들이 이런저런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부계(父系)로 유전하는 삼대가 아닌 거죠. 점점 따져볼 게 많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송종원 그러고 보니 근간에는 연작 비슷한 형태로 단편을 쓰는 작업이 많아진 거 같네요. 단편소설이 세계의 은밀한 지점을 시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그려내는 기능이 있다면, 은밀한 지점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세계의 지형을 보여주려는 시도가 연작 단편의 형태로 출현하는 것도 같네요.

 

강경석 오늘 다루는 두권의 작품집이 우연찮게 또 맥락이 닿는군요. 하나의 안목 속에서 체계를 잡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파편적이면서도 서로 끈을 놓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지요. 기왕 말 나온 김에 박솔뫼 소설에 대해 송종원 형이 이어주시죠.

  

박솔뫼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

 

164-문초-2그럼 무얼 부르지_fmt 송종원 ‘새로운 감수성’이란 평단에서 즐겨 쓰는 표현이지요. 사물이나 사건 혹은 세계에 대한 감각이 남다른 작품이 출현했을 때 사용하는 수사예요. 감각 방식이 다르다보니 언어의 활용도 남다를 수밖에 없죠. 박솔뫼의 첫 단편집 그럼 무얼 부르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 이건 뭐지?’ 싶을 거예요. 등장인물을 세대적으로 구분하자면 은희경의 작품에 나오는 가장 어린 축인 신도시 키드에 가까울 텐데요, 박솔뫼의 소설에 그려진 이들의 감수성과 체험이 상당히 특이한 데가 있어요. 저는 김사인 선생님 같은 ‘어른 세대’가 이 작품을 어떻게 접하셨을까 상당히 궁금했습니다.

 

김사인 박솔뫼의 감수성의 정체를 따져보기에 앞서, 이 소설집은 뭐랄까요…… 저는 아주 좋았어요. 황정은(黃貞殷) 소설집 『파씨의 입문』(창비 2011)을 처음 읽을 때 받았던 감동이나 충격에 맞먹을 만큼, 새로우면서도 그저 낯선 것만이 아니라 그 안에 충분한 정서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어요. 이런이런 줄거리다,라는 식으로 요약되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울림 같은 것으로 내겐 왔어요. 이걸 읽으면서 예컨대 앞의 은희경 소설이 의거하고 있음직한, 소설은 이런 거야 하는 우리 사회의 소설에 대한 주류적 통념, 범박하게 말하면 이른바 근대적 리얼리즘이겠지요, 그것의 의미도 박솔뫼 세대가 이루어가고 있는 이 글쓰기, 이 소설쓰기에 대비, 대조되어야 서로의 유효성과 한계랄지 의의가 생생해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정규적 표준 문어체를 벗어나는 박솔뫼의 독특한 문장은 힘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박솔뫼의 그 독특한 문장과 싱싱함이, 이미 있는 대상과 감각을 노련하고 섬세하게 묘사하고 진술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새 대상과 감각, 새 묘사와 진술을 이루어가야 할 입장에 처한 글쓰기의 절박성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귀 잘 맞는 얘기 한벌 짓기’로서의 통념적 소설쓰기를 능가하는 지점이 그에게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험과 탐구의 촉각이 살아 있어요.

또 여기서 꺼낼 얘긴지 모르겠지만, 세월호…… 누구 할 것 없이 다들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상황인데요. 선원의 윤리, 대형 동력선, 학교, 수학여행, 국가, 정부, 해경 같은 것들이야말로 대표적인 서구적 근대의 아이콘이 아닌가요. 이런 것들이 더이상—‘더이상’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 한번도’라고 해야 맞을지 모르겠지만—우리를 감당해주지 못한 것이지요. 한번도 제대로 실현돼본 적 없는 시스템인 채로 그냥 삭아버려서, 더이상 공적 소명감에 빛나는 눈빛이나 매혹과 동경의 아우라를 발산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안에 편승하고 있는 학생이나 승객이나 선원이나 선장 그 누구도 실은 진즉부터 그것들을 진심으로 믿진 않아요. 그 틀을 가지고 우리 공동체를 지탱할 수 있을까요.

다시 박솔뫼로 돌아가면, 전통적 근대소설의 요소들, 확립된 스토리라인이나 캐릭터, 사건 같은 것에 의해 구성되는 틀이 앞에서 말한 여러 근대적 제도들처럼 더이상 의미있는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지점에 이른 것은 아닐까 싶은 거지요. 세월호에 타고 있던 학생들을 포함해 80년대 이후에 출생한 세대의 실제 감수성을 박솔뫼가 대변하는 지점이 있다고 보는데, 이 감각은 더이상 근대적 형식 안으로 수렴하는 게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도 않은 일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박솔뫼의 세대는 더이상 은희경 세대 식의 회한이나 인생을 보는 눈, 또는 가족과 내 집 장만, 신도시 같은 코드로 인생을 체험하지도 설계하지도 않는 것 같거든요. 물론 옛 틀은 여전히 겉으로 그들의 환경을 이루고 있지만, 시들어가는 허울일 뿐 그게 이 세대의 감각의 정수는 아니라는 거죠. 나는 과거의 틀 안에서 앞 세대가 가져본 일 없는 어떤 시야와, 앞 세대와 다른 질감, 다른 의미의 평등이나 자유로움이 이들에 의해 구현되고 있다고, 적어도 그 가능성을 담고 있다고 느꼈어요. 박솔뫼 소설에서 보면, 하다못해 이 세대는 고양이나 쥐에 대해서조차 앞 세대가 갖는 고정관념, 위생관념에 비할 때 훨씬 자유롭게 열려 있어요. 앞 세대의 눈에는 철부지하고 우스꽝스럽고, 그동안 우리가 애써 이룬 것을 얘들이 부지하겠나 걱정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역시도 색안경을 쓰고 보는 어리석은 핍박이 될 소지가 많다고 느낍니다. 박솔뫼 소설의 감동과 세월호 충격 때문에 제가 좀 흥분한 상태인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 문제가 사실은 장편소설 논의와도 별개가 아니라고 봐요. 장편소설론, 또는 장편대망론이라는 게 북극성 같은 불변의 당위를 교시하자는 건 아니잖아요? 또 그런 식으로 압박해서 이루어질 일도 아니겠고요. 우리 현실의 중층성을 아우를 수 있는 어떤 시야를 위한 눈물겨운 노력, 분단체제, 동아시아, 세계체계를 개개인의 삶의 실감을 매개로 아우르려는 그런 안간힘과 성취가 소설로써 이루어지기를 정말 간곡히 기도하는 게 장편대망론의 본의일 텐데, 그 충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노력이 이 세대의 감각을 과연 진심으로 믿고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따져볼 여지가 없지 않아요. 이들로부터 앞 세대가 자기 틀에 포착되는 것만 자기 식으로 읽고, ‘어, 광주항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네, 의식있군’ 식으로 접근하는 건 정말 희망 없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송종원 선생님께서 이 세대의 감수성을 세월호와 관련시키시니까 확 다가오는 점이 있네요. 저는 소설의 인물들이 정신적 외상을 겪고 있다고 봤습니다. 그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삶의 열망을 모두 잃어버린 듯한 말과 행위에서 그런 게 느껴져요. 이들에게 어떤 재난의 경험 같은 게 있으리라는 추정 말이에요. 은희경 소설을 가지고 재현의 충실함에 대해 언급하는 게 자연스럽다면 박솔뫼 소설의 언어는 그러한 재현의 언어에 대한 믿음이 없는 듯합니다. 재현된 말을 통해 어떤 공통의 경험을 나눌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파괴되어 있어요. 공유할 수 없는 분노와 좌절감 혹은 무력감 같은 것을 각자가 속으로만 삭이는 상황이 그려지고 있죠. 「차가운 혀」에 등장하는 자폐적 인물이라든가, 「안 돼」에서 무기력한 삶을 이어나가는 인물에게 그런 공통점이 보이죠. 사회적 차원에서 자기 삶의 주인 됨을 경험하게 해줄 만한 사건으로부터 차단된 상황, 그러니까 주체성을 형성할 만한 사건이 없는 시대에 재난을 겪으며 정신적 외상을 입는 과정을 반복하는 상황이 보이지 않는 배경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경험의 틀을 작가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닙니다. 인물들이 삶에 대한 열정을 모두 잃고 무력한 듯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있어요. 바로 노래를 부를 때죠.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정서를 말할 때조차 작가는 그것을 노래처럼 언어화하며 적극적인 체험으로 바꾸어냅니다. 그런 소설이 바로 표제작 「그럼 무얼 부르지」예요. 제목 자체가 구어성을 극대화한 노래 같죠. ‘그렇다면 무엇을 부를까’와 ‘그럼 무얼 부르지’의 차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어요. 사건이 없는 시대에 사건을 기억하려 애쓰고 기리는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시민성 내지 정치적 주체성을 체험하게 한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 또한 새로운 면이 있어요. 과거에는 5월 광주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한 국가, 한 민족 안에서 광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강했다면, 이 소설은 먼 이국땅에서 외국인의 시선을 경유해서 광주를 바라봐요. 가령 김남주(金南柱)의 「학살 2」나 김정환(金正煥)의 「오월곡」 같은 시를 노래처럼 읽으면서 이건 광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게르니카에 대한 글이기도 하고 60년대 중남미에서 벌어졌던 대학생 학살의 이야기 같다고 읽어내는 것은 광주를 세계사와 연동한 초()국가적인 보편적 비극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도 볼 수 있죠. 광주를 직접 체험하지 못한 세대가 국경을 초월한 유대의 경험과 노래라는 어울림의 형식을 통해 광주의 사건성을 재발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강경석 두분이 중요한 말씀을 다 해주셔서 특별히 보탤 게 없네요. 저는 박솔뫼 작품의 특징이 ‘소외의 소외’라고 할 만한 어떤 국면을 예리하게 포착해서 자기 세대의 언어로 설득력있게 제시하는 데 있다고 봤습니다. ‘당신들이 보고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한편의 연극입니다’라고 청중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연극이 소외극인데, 말하자면 박솔뫼는 그것마저 낯설게 소외시켜버린다 할까요. 인생이 한편의 연극이고 우리 모두가 가엾은 배우일 뿐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그 상황에선 여전히 허구적 연극과 진짜 삶의 구분이 전제되어 있긴 합니다. 그런데 박솔뫼에겐 진짜 아무런 전제도 기댈 곳도 없는 것만 같아요. 요즘 우리가 이게 다 뭔가, 하면서 살고 있지 않나요? 주어진 현실을 낯설어하는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여겨지는 상황과 일상 곳곳에서 만나지요. 이 작가는 마치 내국인이 보지 못하는 걸 외국인이 더 잘 포착해내는 것처럼 번득이는 통찰을 보여줍니다. 송종원 형이 적절히 거론해준 「차가운 혀」나 「그럼 무얼 부르지」 같은 작품이 비근한 예죠. 이 작가가 우리 시대의 어떤 핵심적인 질문에 스스로 도달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고, 그래서 문제적인 작가임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박솔뫼 소설의 장점들이 양날의 칼인 면도 있지 않은가 싶어요. 아까 김사인 선생님 말씀처럼 우리 사회가 ‘근대성’이나 ‘근대적 서사’라고 할 것을 제대로 만들어보지도 못했는데 그것의 해체를 소설의 주제로 삼는 점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거죠. 새로운 감수성의 등장 앞에서 ‘아, 얘들이 광주항쟁도 다뤘어’ 하는 식으로 반기는 기성세대의 욕망도 엄연할 뿐 아니라 지난 것은 낡은 것이니 새로운 세대에게 다 맡기자는 대책 없는 청산주의도 공존하고 있거든요. 이 교착상태 가운데서 마땅한 길잡이도 없이 등장한 새 세대의 감수성이 앞으로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지 전적인 신뢰를 주기엔 아주 조금은 망설여지는 거죠. 말이 신뢰지 기성세대의 무책임일 수도 있으니까요. 자기 계통 안에서의 종적인 발전은 충분히 기대할 만하지만 다른 계층이나 세대를 어떻게 포용하고 함께 호흡할지, 이 작가가 어떻게 성장해갈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물론 박솔뫼라는 작가 한 사람의 몫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지요.

 

김사인 그렇죠. 작품 서지를 보면 박솔뫼가 아주 성실하게 작품을 내놓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 사회의 상황을 한두 작가, 한두 작품이 다 짊어질 수는 없죠. 사회변화가 지난 몇십년 동안 너무 급속하게 치달아서 어느 계층, 어느 세대도 이 변화의 전모를 아우르면서 감당할 수는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 내 얘기도, 이제 낡은 틀은 기각된 셈이니 입 닫고 물러앉아야 한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쓰디쓴 노릇일지라도 낡은 틀에 잠재된 선의의 최대치를 끝까지 수행하려는 태도가 요긴해요. 은희경이 탁월한 작가지만 박솔뫼에 의해 구현되는 이런 것들을 당신도 담아내보라고 한다면 적절치 않은 거지요. 은희경이 낡은 게 아니라 박솔뫼가 새로운 것이거든요. 오히려 자기 세대의 경험과 전망에 입각한 작가로서 은희경의 은희경다운 존재증명은 계속되어야 하고, 그런 가운데 우리 소설 전체가 사회의 급격한 변화나 다층성을 수용 반영하면서 큰 교직을 이루어낼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강경석 그러고 보니 같은 시대를 사는 여러 작가들의 보이지 않는 분업과 협업이 아주 근사해 보입니다. 협업으로 획득하는 총체성도 있는 거겠지요.

 

김사인 어찌 보면 현실에서 가능한 건 그쪽밖에 없는 듯도 해요.

  

나기철 시집 『젤라의 꽃』

 

164-문초-3젤라의 꽃_fmt 강경석 다음은 시집 세권인데요. 세분 중에 가장 연장이신 나기철(羅基喆) 시인의 『젤라의 꽃』부터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시집은 지난호에서 다뤘거나 오늘 다루게 될 두 사람의 젊은 시인들 작품과는 달리, 그야말로 전통적인 서정시의 작법과 감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이런 시집을 요즘 평단에선 많이 논의하지 않는 편이지요. 편향을 깨자는 취지가 한편으로 있고 또 이를 거울삼아 최근의 젊은 시단을 돌아보는 계기도 되겠습니다. 적극 추천해주신 김사인 선생님께서 먼저 한말씀 해주시면 어떨까요.

 

김사인 다섯권의 좋은 시집을 가진, 시력 삼십년이 가까운 육십대의 시인입니다. 생활터전과 창작활동의 중심이 제주인 분이어서 수도권 문단의 젊은 독자들께 낯이 좀 설지 모르겠습니다만. 나기철 시인뿐 아니라 오늘의 혹독한 서울중심주의 외곽에서 진지하게 창작을 수행하는 분들이 처처에 생각 이상으로 많다는 것을 유념하는 것은, 우리가 근시안적 무지에 발목잡히지 않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교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선 이 시집의 시들은 대다수 젊은 시인들의 요즈음 스타일과는 정반대로 굉장히 짧아요. 마치 1950년대의 김종삼(金宗三)이나 박용래(朴龍來) 시인을 연상시키죠. 작품의 길이뿐 아니라, 어떤 내용을 시쓰기로 삼는가 하는 점에서도 그분들과 닮은 반면, 젊은 시인들과 대조적이지요. 이번 시집이 나기철 시인의 이전 시집들에 비해 빼어난 것은 아니지만, 같이 놓고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강경석 말씀하신 두 선배시인과 견주자면 김종삼 시인은 리듬이 단아하지만 양풍(洋風)이 도도하다고 할까요, 해서 나기철 시인과 아주 가깝지는 않은 듯한데 박용래 시인과 연관해볼 면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시집의 3부 끝자락에 「까마귀떼」라는 시가 전형적입니다. 시인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면 박용래 시인이 썼다고 해도 넘어갈 것 같더군요. 유사한 작법을 보여주는 시인들이 많이 계시죠. 송종원 형은 어떻게 보셨나요?

 

송종원 지방 문인들이 소외되어 있고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문예지를 평단에서 관심의 대상으로 두지 않는 현상은 문제이긴 한데, 문단의 서울중심주의와 시의 성과를 따지는 일은 또 별개의 사안이겠죠. 결론적으로 말해 저에게는 이 시집이 그리 매력적이진 않았어요. 풍경이나 사건을 앞부분에 걸어두고 뒤에 가서 그에 따른 정서나 깨달음을 노래하는 작품이 많아요. 한시(漢詩)에서 많이 보아온 방식에 가깝죠. 대개의 작품 형식이 이렇게 확정적이다보니 군더더기가 들어올 필요가 없고, 그렇다보니 언어가 간명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의 언어가 간명할 때 우리가 기대하는 건 시 속에 들어선 침묵의 압력일 텐데, 그 압력이 그리 강해질 여지가 없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보다 좀더 문제적이라고 본 것은 상당히 남성중심적 언어로 씌어졌다는 거에요. 시에 등장하는 여성을 구분하면 어머니, 아내, 안젤라라는 여인의 형상이 있는데, 이들이 다 남성을 위해 복무하는 여성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모성신화적 형상에 가까운 어머니,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체하는 아내, 그리고 어머니적 역할의 수행과는 무관한 연애의 대상으로서의 여성. 이런 여성상이 과연 성정치적으로 올바른가를 물어보아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강경석 저도 사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개인적인 슬픔을 다룬 작품은 썩 매력적이지는 않다고 느끼긴 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는 않잖아요.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어요. 가령 시인이 자기 작품세계를 돌아본다거나 동시대 시단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선 자리를 가늠해본다거나 하는 게 다 넓은 의미의 비평행위죠. 그래서 시쓰기가 이미 하나의 시론(詩論)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기철 시인이 구사하는 시론은 우리 시단의 첨단을 통과해서 되돌아간 것이거나 적어도 거기에 새로운 긴장을 불어넣는 방식은 아닌 것 같아요. 그것과 싸우고 통과한 나름의 방식이 이 안에 살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은 거죠.

 

김사인 말씀드렸듯이 이 시집이 나기철의 시집들 가운데 돋보일 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또한 두분의 시읽기 방식도 나는 솔직히 좀 불만스럽군요.(웃음) 이 시집이 지금 우리가 보통 우리라고 말할 때의 한국어 생활권역의 가장 치열한 복판을 자기 몸으로 통과한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는 동의해요. 그런데 이런 시집은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건가, 시쓰기라는 형식을 통해 행하고자 하는 게 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요.

나는 나기철의 시작 태도에서 일종의 문학적 금욕주의랄까요, 염결성과 청빈 등의 고전적 덕목을 떠올리게 하는 시적 태도를 봅니다. 이것은 그것이 사물이든 상념이든 시적 대상을 대함에 있어 정중함이나 조심스러움을 잃지 않고자 하는 태도로 나타나지요. 또 시어나 표현에 있어서도, 쓰는 사람의 욕구 위주로 일방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려 하지 않지요. 이런 조심스러움은 얼마간 소극적이거나 소승적인 감각이기 쉬워서 현실의 격동을 시의 문면(文面)에서 실답게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삶과 언어를 대하는 이러한 마음가짐과 품위는 매우 귀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요. 이런 시적 감각과 소위 미래파적 감각은 서로 비춰주고 서로 버텨줘야 모두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시단은 사회 전반의 어떤 편향에 휘말려 한쪽이 과도해져 있지요. 그래서 나는 예컨대 민영(閔暎) 정희성(鄭喜成) 서정춘(徐廷春) 나기철 같은 시인들이 더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짧은 시 얘기 나온 김에 시조 얘기도 해봄직합니다. 실은 시조의 양식적 잠재력이 충분히 검증되거나, 충분한 창작상의 지양 극복을 거쳐 저렇게 변방으로 밀려난 건 아니잖아요. 우리 전통 리듬이 서양음악의 세에 밀려 지위가 추락했듯이 세에 밀려서 이렇게 된 셈이죠. 농경적 생활감각의 이유 없는 몰락과 비슷하게 말이죠. 물론 그 댓가로 오늘 우리가 도달한 이 ‘지구적 보편성’이란 게 또한 눈물겨운 것이지만, 그 속에 잠복된 고질화된 ‘서양 따라하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세계문학의 큰 마당에서 우리 몫의 창조적 기여를 할 수 없는 거지요. 기여가 없으니 자존감도 발언권도 없겠고요. 그러니 옛날 우리 것 뒤져가지고 쓸 만한 게 없나 찾아보자는 그런 말이 아니고요, 한반도 차원이든 동아시아 차원이든 좀더 길고 깊은 근원적 돌아봄 같은 것이 있어줘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런 성찰과 노력이 어떤 형태로든 행해지지 않으면 우리 문학의 세계주의, 보편주의 지향이라는 게 머지않아 정말 구제불능의 싸구려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입니다.

 

강경석 아까 박솔뫼의 감수성을 평가하실 때의 논리와 나기철 시집의 의의에 대해 설명하실 때가 겉보기엔 모순되어 보이는 것 같아 의아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근원에서는 서로 통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저 멀리 있는 관념으로부터 추출된 무엇이 아니라, 체험적 진실로부터 올라온 자연스러움에 주목해야 한다는 취지로 들립니다. 이 시인이 시를 대하는 태도는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반란, 세속적 욕망이나 생활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를 통어하는 데 핵심이 있는 것 같아요. 언어의 조탁이란 게 산사(山寺)처럼 평온한 마음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내면의 지옥을 다스리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나오는 것일 테니까요. 요즘 문학에서 욕망의 적나라한 발산이 우세한 것처럼 보인다면, 나기철 시인에겐 그걸 통제하면서 생기는 각성된 체념 같은 게 엿보인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송종원 4부의 모리셔스 여행시편이 독특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네요. 여행시편이라는 게 여행지가 주는 정서적 고양감이라든가 낯섦에 도취해서 씌어지기 쉬운데, 이 시집은 좀 달랐어요. 모리셔스와 제주라는 공간에 새겨진 실향의 역사를 차분히 중첩시켜 바라보는 시선이, 이분은 어디를 가든지 자신의 삶 혹은 몸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서의 역사적 지층을 늘 의식하고 있구나 하는 신뢰를 주었습니다.

 

 

유병록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164-문초-4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_fmt 강경석 유병록 시인의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시집은 경향으로 보면 나기철 시집과 뒤에서 다룰 신해욱 시집의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는데, 그런 한편으로 세 시인 중에서는 가장 젊은 시인의 작품입니다. 유병록을 포함한 일군의 시인들이 이전의 실험적인 언어로부터 일정하게 후퇴하고 있는 듯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인의 나이를 확인하고 약간 놀랐어요.(웃음) 장단점을 떠나 이 시집에는 조로(早老)의 결이 좀 있어요. 앞서 얘기한 나기철 시인의 언어에 비해서는 좀 늘어져 있는 편이지만, 또 황병승(黃炳承) 같은 시인의 작품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정련되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시집 후반부의 「주전자」 같은 작품이 이 시인의 시관(詩觀)을 잘 보여주는 듯해요. 주전자의 일그러진 면과 달의 형상 사이에 닮은 점이 있는데 그 속에서 가족의 모습이나 궁벽한 삶, 공동체에 대한 생각 같은 것이 보이고, 그게 아마 이 시인의 시적 원천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억지스런 실험 없이, 예리한 지적 통찰을 앞세우기보다는, 「망치」라는 시에서처럼 둔하고 평평하지만 끊임없이 두들기고 다듬어가듯 그렇게 시를 만들어나가는 시인이구나 싶어요.

 

김사인 나는 3, 4부보다는 1, 2부의 시들이 더 좋았어요. 3, 4부는 약간은 습작풍 스케치 느낌, 그리고 다소 감상적인 관념의 기미 같은 게 좀 걸렸습니다. 「지붕 위의 구두」 「흰 이야기」 같은 작품은 특히 좋았고요. 한편 김기택(金基澤) 시인이 생각났어요. 김시인이 생과 현실의 비참을 냉정하고 건조하게 각뜰 때, 무슨 냉혈인간인가 섬뜩할 때가 있는데, 유병록 시에도 동류의 섬뜩함이 있어요. 그것으로 우리 현실 이면의 어둠을 해부하고 있는 거지요. 그게 잘될 때 그의 시는 잘 잰 폭약 같은, 어둡고 팽팽한 힘을 얻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이런 시적 경로가 우리 삶과 우리 시가 당면한 어떤 허기나 갈증을 타개하는 그중 좋은 길일까 하는 의문도 떠올랐어요, 참 애를 썼구나 하는 고마운 생각도 함께요.

 

송종원 저도 앞부분의 시들이 좀더 눈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시 한편을 두고 봤을 때에도 도입부가 꽤 강렬하다는 느낌이에요. 가령 서시 「붉은 달」에서 “붉게 익어가는/토마토는 대지가 꺼내놓은 수천개의 심장” 같은 구절이나, 「완력」에서 “땅에 묻힌 자가 팔을 내밀 듯/피어나는 꽃” 또는 「두부」에서 “누군가의 살을 만지는 느낌” 같은 도입부는 때론 묵직하고 또 때론 아주 섬세한 감각의 운용을 보여줘요. 그런데 좋은 이미지로 시작한 시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다소 걸리는 부분도 있어요. 시행과 연들 사이에 설명조의 말이 끼어들어 자연스러운 시적 흐름이 정지되는 순간이 종종 있고, 또 하나는 낭만적 사고방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가령, ‘붉은 토마토’가 ‘붉은 달’을 불러오고 ‘붉은 달’이 다시 ‘붉은 심장’으로 옮아가는 이 자연스러운 연동이, 인간과 자연 혹은 사물의 조화로운 연관이 파괴된 지금의 시대상과 너무 어긋나 있지 않은지 질문하게도 합니다. 시의 전체적인 흐름과 짜임을 너무 의식하다보니 발생한 결과로 보여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 그 의식이 시적인 우연에 기대지 않고 잘 포획되지 않는 말들을 통어해가며 한편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응집력으로 작용했다고도 생각합니다. 완결성을 위해 공들인 열과 성이 느껴지는 시집임은 분명합니다.

 

강경석 「두부」 「지붕 위의 구두」 「흰 이야기」 같은 작품은 좋게 읽었지만 「북 치는 사내」 같은 경우는 문제라고 봐요. 시를 쓰기 위해 시적 상황을 제작한 경우이거나 체험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더라도 아직 그 의미를 완숙하게 소화하지 못한 경우로 보였습니다. 시인의 의도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또 그리로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절차탁마 중인 것은 분명한데, 그런 이야기가 아직 몸으로 와닿은 것은 아니지 않나 싶어요.

 

송종원 첫 시집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단단한 성과를 거뒀다는 점을 전제로 약간의 아쉬움을 보태자면, 사용하는 시어(詩語)가 낡은 면이 있어요. 가령 「입술」이란 시에 등장하는 시어를 보세요. ‘외투’ ‘생’ ‘고통’ ‘자정’ ‘기억’, 여기에 그냥 ‘바람’도 아니고 ‘바람의 외곽’까지. 시어의 그물을 던지기 이전에 시적 동기라는 게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이 그물은 늘 잡던 고기만 잡을 수밖에 없는 짜임새예요. 더불어 시어를 뽑아오는 낱말밭이 있다고도 가정한다면 이 시인은 자신의 밭에서 오래전에 시어로 승인된 낱말은 솎아낼 필요가 있어요. 또는 밭의 바깥에 있는 언어를 새롭게 파종할 필요도 있을 거고요.

 

강경석 반면에 「두부」는 체험적인 부분이 살아 있는 작품이죠. 구태의연한 낱말밭에서 어떤 단어를 취한다 하더라도, 체험에 기반한 시는 힘을 가져요. 반면에 뭔가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줄 때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합니다. 「입술」도 리듬감이 살아 있고 자연스러운 맛이 있어요. 이 시인의 감성 자체가 그런 식으로 조직돼 있는 듯합니다. 어찌 보면 구태의연한 낱말밭에 익숙해 있고 그런 시간 속에서 수련해온 시인이 아닐까 짐작이 드네요. 「어깨 위에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같은 시가 시인이 생각하는 그러한 자기 세계, 주제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고요.

 

송종원 등단작인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나 「한 양동이의 어둠을 뒤집어쓰고」 같은 시를 보면 젊은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농경사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어요. 묘하게도 그런 시에서는 차가운 도시적 예민함과는 다른 어떤 뜨거움이 느껴져요. 삶과 죽음이 건강하게 뒤엉킨 모양새가 내뿜는 뜨거움인 것도 같고 또 한편으로는 도시로부터 침탈을 받은 농경사회의 원한 같은 게 서려 있다 싶고요. 아무튼 이 독특한 에너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써내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경석 그것이 전통적인 서정시의 낱말밭을 주로 활용하게 만들고, 그런 시를 쓰게 하는 원체험의 하나일 수 있겠네요. 1980년대에 태어나 농촌체험을 갖고 있는 새로운 세대의 시인인 듯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은희경 박솔뫼를 비롯해 이렇게 경험층위가 다른 사람들이 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김사인 선배 동업자로서 시인에게 조심스러운 조언을 한마디 붙이자면, 이번 시집의 문장과 말투와 문체, 동원되는 언어와 소도구들과 비유가 시인의 농경적 성장과정이 버무려져 발효된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습득된 약간의 양풍이라는 느낌이에요. ‘그러니까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또 그렇다 해도 그건 시인만의 책임도 아니죠. 자신의 생득적인 것, 전래의 것, 구어적인 삶의 차원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해보는 그런 계기를 가지면 좋을 것 같아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온전한 자기 목소리를, 자기 기율을 세우는 모험이랄까, 그것을 미루거나 피하지 말기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어련히 잘 하겠지요마는.

 

강경석 여러 가능성이 확인되는 신예입니다. 그런 부분을 잘 감당해준다면 한국 시단의 어떤 결핍을 메워주는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제 신해욱 시집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신해욱 시집 『syzygy』

 

164-문초-5syzygy_fmt 송종원 여러모로 이채로운 시집입니다. 활용하는 언어의 폭이 남다를 뿐 아니라 시에서 흘러나오는 정서적 질감도 독특하죠. 약간 엉뚱해 보이는 면도 있고요. 특이한 건 분명한데, 그리고 읽어보면 왠지 끌리는데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되기도 합니다. 잘 해명하지 않으면 일반 독서대중에게는 난해한 시집의 일종이라는 선입견을 줄지도 모르겠어요. 이 자리를 빌려 각자가 시에 다가갔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저는 시인이 손 페티시(fetish)가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거의 모든 시편에 손, 손가락 등등이 등장하는 게 이채로웠습니다. 마치 무언가 새로운 장난감을 만지고 노는 아이가 떠오르기도 했고요.(웃음)

 

김사인 구두점을 아주 충실히 찍는 시인이더군요. 문장마다 쉼표, 마침표가 꼭 있던데 이게 우선 눈에 띄었어요. 이게 어떤 의미일지는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읽는 나로서는 용기가 생겼어요. 시인이 읽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느낌이 신선했어요. 언젠가부터 시에서 마침표나 쉼표를 안 쓰는 게 유행처럼 됐지요? 어떤 때 찍고, 어떤 때는 안 찍나, 왜 안 찍나, 제대로 된 질문 한번 없이, 쓰는 사람들도 자문하지 않고 어영부영 이삼십년이 된 셈입니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는, 그래서 터무니없는 오독은 피할 수 있겠구나 안심이 됐어요. 「문지기」나 마지막의 「未然에」를 읽으면서 시인이 쓴 뒤표지 글에 밝힌 ‘시저지’(syzygy, 삭망 혹은 연접이라는 뜻)란 난감한 제목의 까닭이 실감되었어요. 그러니까 근원이라 할 만한 것에 나아가기 위한 안간힘과 거기까지 닿지 않는 언어 사이의 안타까움과 모험 같은 것을 표현할 다른 말이 없었던 것이죠. 그러다보니 앞서 얘기한 유병록이 더 젊은 연배이긴 한데, 오히려 그가 소설에서 은희경에 가깝다면 신해욱은 박솔뫼에 가까운 게 아닌가……(웃음)

 

강경석 그 말씀에 공감합니다. 기본적으로 언어와 삶과 현실이 맺는 관계를 다루면서 그 사이에서 소통의 어려움 같은 문제를 그리고 있는데, 이건 넓은 의미의 모더니즘 시에서는 흔한 방식이죠. 그렇지만 이 시집에서는 그 나름의 어떤 절실함이 살아 있어서 시가 힘있게 느껴졌고 그런 의미에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세대 얘기도 잠깐 나왔는데, 신해욱 같은 시인이 자기 세대를 대변한다기보다는 그 일부를 차지한다 싶어요. 무거운 시도 있지만 유머러스하고 가벼운 작품들도 인상적이었어요.

 

김사인 시집의 1부를 보니 시인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체인질링」(Changeling) 같은 작품명은 영화제목 아닌가요? 이런 식의 제목이 다소 의아스러웠어요. 구두점을 성실하게 구사하는, 한글 문장이 노출되는 방식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있는 시인이 제목은 왜 이렇게 생소함을 무릅쓰는 걸까 하는 느낌이었지요. 반면 2부, 3부로 갈수록 훨씬 읽기가 수월했어요. 여성성 문제가 다뤄지는 방식에서는 오히려 낯익은 느낌까지 있을 정도로요. 그렇지만 그 수월함이 좋다고만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syzygy’라는 제목이 상징하는 모호함과 긴장이 이완될 때, 그래서 익숙한 사유의 틀에 시인이 기댈 때 시가 수월해지는 건 혹 아닌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어요. 겁먹었던 소문에 비하면 그런대로 이해와 공감이 가능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웃음) 이 시인의 산문집 『비성년열전』(현대문학 2012)에도 다루고 있는 ‘필경사 바틀비’(미국소설가 허먼 멜빌의 작품 속 인물), 요샌 바틀비를 곁들이지 않고는 문학판에 명함 내기도 어렵다고 합디다만,(웃음) 그 바틀비가 지시하는 그 ‘닿을 수 없음’과 그걸 견뎌준다는 일 등에 비추어 “부적을 붙이는 심정”이란 시인의 고백도 수긍이 됐어요. 다만 그러한 형언될 수 없음, 형언을 이룰 길조차 없음의 가려움과 기갈의 표기를 ‘syzygy’라는 영문자를 빌려 치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몹시 아팠어요.

 

송종원 신해욱과 비슷한 연배의 시인 중에 유독 시를 ‘무엇으로’ 쓸 것인지 고민하는 이들이 있죠. 이준규(李濬揆)나 조연호(趙燕湖)가 그이들이에요. 무엇으로 쓰는가라고 물으면 시를 촉발한 어떤 느낌이나 정념 혹은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기가 쉽지만, 그것 말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게 있어요. 바로 한국어예요.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하겠지만 한국어의 역사성과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쓰는 시인은 드물어요. 근대 한국어가 형성될 때 한자문맥과 영어 중심의 서구문맥이 복잡한 작용을 하지요. 그 과정에서 한자의 영역이 많이 힘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구어성은 단일한 문어로 바뀌게 되지요. 이후에 또 민족주의적 언어관에 의해 언중의 언어 속에 이미 깊숙이 들어온 외국어의 감각을 부인하는 태도가 있었고요. 이런 과정이 한국어의 현재적 형태에 개입하고 있을 텐데 저 시인들은 이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어요.

 

김사인 분명한 자각을 가지고 쓰고 있다고 보시나요?

 

송종원 그렇다고 봐요. 신해욱의 시는 한국어의 구어성을 간간이 활용해 말의 의미가 이해되기도 전에 듣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실어 나르는 느낌을 투명하게 전해요. 또한 시집의 제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외국어의 뜻이 아니라 형상이나 소리 자체를 재료로 활용하죠. ‘영물’이나 ‘부적’같이 비과학적이고 믿음의 영역과 관련한 언어를 ‘복소수’ ‘초과중력’ 같은 과학 영역의 언어와 혼합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에요. 전근대적 언어와 근대의 언어가 충돌 또는 뒤섞이면서 독특한 질감의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어요.

같은 맥락에서 이준규는 최근 시집 『네모』(문학과지성사 2014)에서 단문 형태를 무한반복하면서 미묘한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신해욱이 구어성을 실험한다면 이준규는 한국말의 문어적 특질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셈이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구어로 표현하는 감정을 문어적 차원에서 조형해냄으로써 감정에 기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이준규에게 있어요. 조연호의 한자사용도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문장을 통해 그려낸 차원의 이미지가 아니라 이 시인은 단어 자체를 이미지로 사용한다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많은 시인들이 그림처럼 ‘보는 시’를 쓰고 있다면 조연호는 말 그대로 ‘읽는 시’를 쓰는 것 같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읽으면서 문장의 논리를 따져보게 만들죠. 여하튼 세 시인이 공통적으로 한국어에서 덜 활용되는 것, 한자라든가 외국어의 적극적인 도입, 특정한 문장형식의 반복 등을 통해 한국어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중입니다.

김사인 선생님 말씀 중에 ‘근원에 다가가려는 안간힘’이란 표현에 상당히 공감이 가면서도 흥미로운데요. 근원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덧붙이자면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나를 구성할 수 있는 어떤 공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의 나와 세계를 구성한 질서와는 다른 언어적 구조를 지닌 곳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신해욱의 시는 자신을 형성한 어떤 규준에 대한 강렬한 혐오와 그것이 폐기한 세계에 대한 동경을 바탕에 깔고 있어요. 근대적 질서가 폐기한 신과 믿음의 영역에 대한 동경, 근대가 강요한 여성성과 왜소화된 주체성에 대한 반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가령 「들」을 보면 어떤 질서 속에서 내가 점점 왜소화되고 스스로 마음에 안 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데 대한 강렬한 거부감을 확인할 수 있어요.

 

김사인 방금 얘기한 그런 작품 같은 경우는 창비 근처에서 많이 본 문제의식이 아닐까 싶은데요.

 

강경석 두분 말씀 다 공감이 되는 한편으로, 좀더 해석적인 측면을 보면요, 시집 전체에서 주사위 놀이라거나 숨바꼭질 같은 이미지, 또 홍수가 난다거나 자기 손을 자기가 잡는 이런 모티프가 대체로 유년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체인질링」 같은 작품도, 마귀 들린 가짜를 버리면 집안에 진짜 아이가 돌아온다는 유럽의 설화에서 온 것이잖아요. 제목인 ‘syzygy’라는 것이 삭망인데 달의 공전주기에 의해서 발생하고, 또 공교롭게도 공전은 영어로 레볼루션(revolution)이지요. 지금까지의 삶을 리셋하고 새로 채우는 순환계의 시라고 할까요. “Reset이 불가능한”(「복고풍 이야기」) 같은 구절도 뵈고요. 자꾸만 아이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죠. 한국어에 대한 자의식도 그 과정에서 투철하게 된 게 아닌가 싶고 이 점에 시인이 아주 의식적이라고 봐요. 근원에서, 제로 베이스(zero base)에서 다시 생각하고 새로 축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인인 것 같습니다.

 

송종원syzygy’의 말뜻에 주목하는 해석이나 ‘체인질링’이란 말의 의미적 배경을 추적하는 일은 이 시집을 즐기는 것과 좀 거리가 있다고 봐요. 정해진 의미를 찾는 일이야말로 근대적 규준에 훈육된 태도에 가까울 테니까요. 저 ‘syzygy’라는 글자를 오래 들여다보며 여러가지를 상상하는 편이 더 좋은 거 같아요. y라는 자형의 반복이 s, z, g와 차례로 결합하니 마치 춤을 추는 형상처럼 보이기도 하고, ‘시지귀’라고 엉터리로 발음해보면 이 시집에 바탕에 놓인 시()와 지()와 귀()라는 세계가 충돌하는 연상을 불러오기도 하죠. 저는 ‘체인질링’이라는 제목 속에서도 체인(chain)과 링(ring)과 체인지(change)가 먼저 떠오르더라고요. 흥미롭게도 시의 본문에는 제목을 분절한 저 소리와 관련한 이미지들이 들어 있기도 합니다.

 

강경석 그렇기도 하지요. 다만, 그런 측면과 함께 해석의 측면에서도 동시에 읽히는 독해의 범위 자체가 넓은 시세계라는 거죠. 「체인질링」이 참 재밌는 작품인데, 사실 ‘체인질링’이라는 행위 자체가 마귀 들린 가짜 아기를 물에 던지는 겁니다. 당연히 물 위로 파문이 일고 동심원이 생기겠지요. 그게 링하고도 연관되겠지만 체인지(change)와도 연결되죠. 어떻게 봐도 연결이 되는 모양새인데, 해석이라는 행위에 근대적인 한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석을 완전히 거절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러니까 이쪽이냐 저쪽이냐가 아니라 두 층위를 동시에 포획하는 방식을 이 시인이 추구하고 있다고 봐야 적절치 않나 싶어요.

 

김사인 읽기에 수월하기는 2부, 3부가 나았지만 1부 시들에 호감은 더 갔어요. 2부나 그 뒤의 시들에는 한번은 보았음직한 그런 메시지들이 서사적 차원에서 드러나 있죠. 행과 행 사이에, 간격도 그렇고, 대체로 언어를 기다리고 받아앉히는 방식이, 떠오른 시상의 서술이 아니라 예컨대 시나브로 부는 바람에 풍경(風磬)이 간간이 울리는 것 같은…… 대단히 매력적이었어요. 「체인질링」이 대표적이죠. 산문적인 독법에 따르면 아무런 메시지도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언어 하나하나가 미세한 소리와 표정으로 울리고 있어요. 「주사위 던지기」도 그렇고. 「未然에」나 「메아리」에서는 언어와 시쓰기에 대한 자의식의 처절함이 드러나는 대목이 없지 않아요. 4부와 5부의 몇편들, 「산초 판자의 말씀」이나 「승차권」은 마음 설렐 정도의 사랑의 시였어요. 정말 예쁘구나, 이런 감각이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지요. 문제는 아까 얘기한 것처럼 근대적인 틀로 포착되지 못하는 어떤 지점을 향한 이 시인의, 뭐랄까 눈 뒤집히는, 피가 마르는, 그래도 닿아지지 않는—어쩌면 바로 그것을 앓는 소임이 시인 노릇의 핵심이기도 하겠지만—그런 앓기를 syzygy나 바틀비 같은 서구 기원의 틀과 말을 빌려서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이 땅에서 사유의 살림살이가 지닌 적나라한 현주소라고 생각해요. 그건 이 시인에게 책임을 물어 비난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문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걸 한국어의 영역 확장이라고 편히 넘어갈 문제도 아니라고 봅니다.

 

강경석 오늘 거론한 다섯 작가들 다 마찬가지일 텐데, 신해욱 시인을 예로 들면, 「주사위 던지기」에 나오듯이 그 애씀이 아슬아슬한 도박의 이미지를 연상시켜요.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주사위를 던지는데 그게 우리 시대의 모습이겠죠. 그 가운데 신해욱 시인은 여기 와봐라, 여기가 좋다, 주사위가 던져지는 이곳이 좋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 대목에 미묘한 감동이 있어요. 주사위 던지는 유희도 소비적이라기보다 깊이나 부피감을 느끼게 하고, 아무렇게나 던지는 게 아니라 아주 정성스러운 행위 같아요. 머리를 많이 쓰게 만들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그 이상으로 해주는 시집으로 읽었습니다.

 

김사인 마지막 시 「未然에」에서 “이런 시간은 뭐지”라는 구절, “누가 누구지”라는 말이 너무 아프게 다가와요. 박솔뫼도 그렇고 한국어로 문학적 사유를 수행하는 젊고 예민한 감각들이 처해 있는 고통의 현장이 바로 그 언저리인 것 같아요. 하기야 젊지 않다 한들, 도대체 지금이 어떤 시간인지, 우리가 대체 무얼 하는 누구인지를 아프게 묻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마는요.

 

송종원 독자들이 신해욱의 시를 가지고 놀았으면 좋겠어요. 놀다가 웃다가 울다가 엉뚱해지는…… 신해욱의 시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경험의 영역은 꽤 넓은데, 단어의 뜻과 문장의 의미에 매달리다보면 난해한 느낌에 빠져들기가 더 쉬울 거 같아요. 그보다는 낯선 단어의 모양새와 소리를 보고 들으며, 의미적 배경과 분위기가 이질적인 단어들과 충돌하며 빚는 효과를 따라가면서 말투의 미묘한 차이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신해욱 시세계에 자연스레 발을 들여놓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강경석 못 다한 얘기들은 아직 많지만 핵심적인 말씀은 그런대로 나눈 것 같고 나머지는 눈 밝은 독자들을 위해 여며두도록 하겠습니다. 일정이나 지면사정을 비롯한 여러 여건 때문에 미처 다루지 못한 좋은 작품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만난 두권의 소설집과 세권의 시집만으로도 정말 만만치 않다는 느낌이에요. 끝으로 초대손님이신 김사인 선생님부터 마무리 발언 한말씀씩 청해 듣겠습니다.

 

김사인 저로서는 좋은 공부의 기회였고 또 많이 위로받았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이 작가들의 고투 속에서 희망의 한 단서를 본 듯하다는 게 단순한 인사치레의 말만이 아닙니다. 동시에 그러면 이들의 고통의 실감을 쉬 자기 것으로 공유하기 어려운 앞 세대는 다 손놓고 있으면 되는 것인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세월호 사건 때문에 해운회사 다 없애고 학교나 수학여행 같은 제도를 다 없앨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선행 주자가 마지막까지 함께 애를 써주지 않으면 순조로운 배턴 터치가 안되는 거죠. 저도 그 앞 세대의 한명으로서 밥값을 하도록 분발하겠다는 각오를 민망함을 무릅쓰고 말미에 붙여두려 합니다.

 

송종원 마무리 발언을 대신해서 좌담에서 다루지 못한 작품 몇개를 언급할까 합니다. 지난해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은 정세랑(鄭世朗)의 『이만큼 가까이』(창비 2014)가 꽤 재미있어요. 젊은 작가의 위트 넘치는 입담과 의뭉스러우면서도 서정적인 묘사력이 우선 인상적이에요. 고독한 존재로서 청춘들이 우정과 사랑의 관계맺음을 통해 돌발적인 삶의 폭압을 견디며 성장하는 모습이 주는 감명도 만만치 않습니다. 백수린(白秀麟)의 첫 소설집 『폴링 인 폴』(문학동네 2014)은 젊은 작가로서는 드물게 우리의 내면에 작동하고 있는 식민지성을 묘파해가는 작업을 보여줍니다. 서구와의 현재적 관계맺음 속에 여전히 작용하는 제국과 식민지라는 역사적 관계의 기억이 연애서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고 주목할 만하다고 읽었어요.

 

강경석 좌담 들머리에 나온 김사인 선생님 말씀처럼 자유롭고 문학적인 좌담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장시간 수고해주신 두분께 감사드리며 이상으로 좌담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2014424일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