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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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죽음의 슬하에서 나는 본다

유홍준 시집 『저녁의 슬하』

 

 

오연경 吳姸鏡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날(生) 이미지와 사건의 시학」 「아비 없는 언어의 태몽」 등이 있음. korin2@hanmail.net

 

 

4161부모님 슬하의 불행한 가족 서사를 작품화해온 유홍준(劉烘埈) 시인은 세번째 시집에서 이렇게 묻는다. “고인의 슬하에는/무엇이 있나”(「슬하」). ‘슬하’라는 말은 연약한 생명을 의탁했던 아늑한 유년의 둥지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유홍준에게 부모님 슬하의 삶은 굴종과 희생의 나날이었다. 가부장적 권력과의 갈등이 남긴 상처는 “한 인간을 잠그고 있는 흉터”, 아무도 열지 못하는 “밀실”(「그의 흉터」, 『나는, 웃는다』)이었다. 거기서 행복이란 “죽음 곁에서/능청스러운 것/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喪家에 모인 구두들』)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잠근 채 열쇠를 움켜쥐고 들어간 밀실에만 죽음이 가득한 것이 아니었다. 애써 밀실로 끌어들일 것도 없이 광장 전체가 죽음의 슬하였으니 말이다. “저 외로운/지붕의 슬하”에도 “저 어미새의 슬하”에도, 그리고 “이 어긋난/뼈의 슬하”에도 “이 물렁한 살의 슬하”(「슬하」)에도 이쪽저쪽 가릴 것 없이 죽음의 구더기들이 삶과 함께 들끓고 있다.

『저녁의 슬하』(창비 2011)는 일몰을 배경으로 그려낸 존재들의 초상화라 할 수 있다. 대상을 일몰 앞에 놓고 바라본다는 것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속에서 저물어가는 어떤 것을 감지하는 일이다. 시인은 애 하나를 들쳐 업고 어탕국수를 끓이는 여자에게서(「버드나무집 女子」), 성대가 잘려나간 개의 눈곱에서(「저녁」), 팔 하나를 떼어 바친 귀뚜라미의 노래에서(「귀뚜라미의 노래」) ‘저녁의 기미’를 발견한다. 삶이 죽음의 슬하에 있다는 징후들. 그런데 ‘슬하’라는 말이 지닌 아늑함은 무엇인가. “발가락이 열두개나 달린 저녁이 와서 조용히 감싸”(「평상」)줄 때 ‘맨발 끝에 대롱거리는 슬리퍼 한짝’ 같은 삶은 아슬아슬하게 평온하다. 연약한 생명을 죽음의 보살핌에 맡겨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일진대, 죽음의 슬하라 해서 아늑하지 않을 것도 없고 견디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죽음의 슬하’라는 보편적 운명을 아늑하다 할 수 있을지라도, ‘부모님 슬하’라는 개인의 역사는 상처의 밀실에서 고통스럽다. 유홍준은 저 고독한 타자의 밀실을 함부로 두드리지 않는 윤리를 시종일관 ‘저’라는 지시대명사로 실천하고 있다. 이는 그의 관심이 타자 쪽으로 한참 기울어 있는 동시에, 그럼에도 한사코 타자와의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이번 시집의 첫 시 「일몰 앞에서」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시에서 그와 나는 시소 타는 사람처럼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저 일몰 끝에/발목을 내려놓은 그”는 “눈멀고 귀멀어” 아무런 소통도 할 수 없지만 “누가 먼저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 상대편은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다. 이 시소의 자세는 유홍준의 타자에 대한 윤리를 압축한다. 시소는 이쪽과 저쪽 사이에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구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무게를 지키는 마주봄의 거리로 지탱되는 기구다. 유홍준은 소통이 아니라 거리로 타자의 윤리를 실현한다.

타인의 고통스런 삶을 직시한다는 것은 “눈꺼풀 밀어버린 눈으로” 단 한번의 깜빡임도 없이 “세상을 뚫어지게 바라”(「유리창의 눈꺼풀」)보는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긴장과 단호한 결의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머리에 못이 꽂힌 고양이를 본다”(「네일 건」), “스텐그릇 안의/어머니의/계란, 자궁을 본다”(「어머니의 자궁을 보다」), “번번이 우리 집에 와서” 간질 발작을 하는 이웃집 형을 “마루 끝에 걸터앉아 오래 끝나도록 지켜보았다”(「작약」). 이처럼 유홍준에게 바라봄은 타자에 대한 의무다. 바라봄의 자리를 함부로 털고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시소 저편의 타자가 곤두박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지 말라고 해도 오고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저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유홍준은 “입술을 닫”(「십이월」)은 채 “오로지 눈빛으로만 읽”(「입술의 죽음」)겠다는 것이다.

유홍준의 바라봄은 집요하고 단단할 뿐 아니라 깊고 그윽하다. 그것은 이쪽의 긴장과 결의에서 시작되지만 저쪽을 향해 하염없이, 멍하니, 무작정 보내질 때 둥글고 순해진다.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사람을 쬐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라봄은 죽음의 슬하에서 고통을 직시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저쪽의 온기를 쬠으로써 삶을 지속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라봄은 타자에 대한 의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자의 선물을 받는 일이다. 유홍준의 시는 초기부터 죽음과의 친화를 보여왔지만, 이 세번째 시집에 이르러 죽음은 부조리한 세계의 위악적 얼굴이 아니라 “쓸쓸하고/아늑하고” “왠지 국물처럼 서러”(「푸른 가빠의 저녁」)운 삶의 얼굴이 되었다. 그가 삶의 얼굴에서 죽음을 읽고 죽음의 손으로 삶을 어루만질 때 그의 언어는 차갑지만 아늑하고, 싱겁지만 눈부시다. 세상의 모든 저녁이 그의 언어의 슬하에서 위로를 받는다.

오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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