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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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페미니즘이 대학을 구한다

 

 

백영경 白英瓊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

 

유현미 劉賢美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수료,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전희경 全希景

여성학자,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이화여대 강사.

 

최나현 崔娜賢

부산대 대학원 여성학협동과정 석사과정.

 

 

 

백영경(白英瓊)

백영경(白英瓊)


백영경(사회) 이번호 대화는 페미니즘과 대학 개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촛불혁명을 이어나가려면 ‘페미니즘’과 ‘대학’이 굉장히 중요한데도 이 두 문제를 연결 짓는 이야기는 별로 없는 듯합니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은 페미니즘 교육의 주체이자, 논쟁과 실천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대학은 페미니즘이 개입해서 개혁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많던 여학생은 어디로 갔느냐’는 식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데, 이는 대학까지는 평등했던 여성과 남성이 사회에 진출하며 겪는 차별이 심각하다는 뜻이에요. 마치 여성들이 대학에서는 차별을 경험하지 않은 것 같지요. 실제 대학을 성평등한 공간으로 볼 수 있을까요? 대학생 가운데 여성 비율이 높아졌고 여성의 성취가 두드러지는 분야가 늘어났다고 해서 이를 곧바로 대학 내에서 남성과 여성이 평등해진 지표로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오늘 세분을 모셨습니다. 지금 대학의 시급한 개혁 과제는 무엇이고, 또 이 문제들이 어떻게 사회 개혁의 과제와 연결되는지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전희경 저는 90년대 대학에 입학해서 4학년 무렵 단과대에서 여성주의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 모임에서 반(反)성폭력 자치규약을 만드는 운동을 했고요. 대학이라는 공간이 이상적일 수 없음을 깨닫고 문제제기하면서 점점 더 분명하게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했고, 90년대 중후반 뚜렷한 흐름을 만들었던 ‘영 페미니스트’ 운동 가까이에서 다양한 페미니스트들과 만났어요. 총여학생회 선거에서 ‘참 여성’을 내건 기독교 계열 후보에 대한 반대운동 등을 벌이기도 했죠. 그런데 이른바 진보 학생운동가들 역시 ‘구리기’는 마찬가지였고요.(웃음) 학생운동의 가부장성을 비판하다가 대학 밖의 여성활동가들과 만나게 되고, 2000년에 만들어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에도 참여했어요. 그리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여성학과에 진학해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강의를 하며 예전에는 문제제기의 대상이던 교수자의 입장이 되어보니 또 새롭게 느끼는 바가 많아요. 지금은 나이 듦, 질병, 돌봄을 주제로 연구 중이며, 이 주제를 연구하는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유현미 2000년대 중반 학번인 제가 입학할 때는 이미 학생회 중심의 학생운동이 붕괴한 상태였습니다. 90년대 중후반에 거셌던 반성폭력 운동도 끝물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고요. 하지만 한편으로 장애인권, 성소수자 담론을 다루는 자치모임이나 자치언론이 활발했던 시기이도 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소수자 담론의 영향하에서 페미니즘을 접했고, 여성주의 자치언론이나 ‘난리부르스’라는 이름의 여성주의자 문화집단에서 활동했어요. 그리고 페미니즘을 학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사회학이 다른 학문보다 포괄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젠더나 페미니즘 연구는 비주류였죠. 2012년 말에 황창규(전 삼성전자 사장, 현 KT 회장)를 초빙교수로 임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그때 학과 내부의 갈등을 보며 대학과 사회학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됐습니다. 이후에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에서 상근활동을 하며 현장을 접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학교로 돌아왔을 때 학과 교수의 성희롱·갑질 인권침해 사건이 불거져 대학원생끼리 대책위원회를 조직해 2017년부터 문제제기를 하고 있어요.

 

최나현(崔娜賢)

최나현(崔娜賢)

최나현 저는 2000년대 후반 학번인데, 학부에 다닐 때 학생운동은 물론이고 페미니즘 이슈를 접할 수 있는 창구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저 역시도 별달리 관심을 갖지는 않았고요. 그런데 졸업하고 취업까지 하고 나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첫번째 직장은 이른바 남초 회사였는데, 이상하게 십년을 일해도 여성은 승진이 안 되었어요. 그리고 이십대 여성 직원의 역할은 남성인 상사가 일하다가 힘든 기색이 보이면 달려가서 안마를 하거나, 애교를 떨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곳이었죠. 두번째 직장은 여초 회사였지만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여성 직원은 월급만 오르고 승진은 안 되는, 평생 같은 자리에서 같은 업무만 하게 만드는 곳이었어요. 업무내용으로 성취를 얻기는 어려웠죠. 이게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넷페미니스트’가 되었고, 이 주제를 더 공부해보고 싶어서 부산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작년 4월 중순, 그러니까 한국사회에서 미투운동의 기운이 높아져갈 무렵에 성폭력 피해자인 친구를 돕기 위한 운동을 학내에서 펼쳤어요. 4개월간의 활동 끝에 가해자 교수의 해임 결정을 이끌어냈고요.

 

촛불 이후 대학 내 페미니즘은 활발해졌는가

백영경 90년대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의 이야기를 이어서 들어보았습니다. 각자의 시간들을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기에 앞서 최근의 변화부터 짚어보면 좋겠습니다. 촛불 이후 사회 각계의 변화가 빨라졌는데 대학에도 변화가 있었을까요? 서울대 사회학과의 현재진행형 사건을 보면 달라진 게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활발해진 미투운동을 보면 반대로 무언가 바뀐 듯도 하고요. 지금 생활하며 느끼는 대학의 분위기는 어떠한지요?

 

유현미(劉賢美)

유현미(劉賢美)

유현미 서울대 사회학과 H교수의 경우 성폭력 단일 사건은 아니었어요. 성적인 괴롭힘을 비롯해 연구나 노동 과정에서 일어난 인권침해, 착취 문제도 많았죠. 예전이라면 문제가 아니라 ‘관행’으로 인식되었을 텐데 촛불과 미투를 거치며 권력관계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서울대는 서어서문학과 A교수의 성폭력·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학생들의 운동이 활발합니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폭력과 차별, 부당한 관계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지만, 교수를 대표로 하는 기성세대도 관행으로 여겨져온 잘못에 대해 성찰하는 분위기가 생긴 것 같아요. 이러한 인식 변화를 어떻게 제도화할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한데 아직 거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희경(全希景)

전희경(全希景)

전희경 대학마다 온도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긴 시간을 두고 돌아보면 강의실 안에서 체감되는 어떤 ‘경향’은 있는 듯합니다. 저는 2000년대 초반부터 대학에서 여성학 관련 강의를 했는데, 사실 2010년대 초반까지는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 사회에서 외모관리는 기본이다’ 같은 생각들이 점점 더 절대적인 것이 되고 있었거든요. 대학 서열화가 가속화되면서 계급 차이, 생애 전망 등을 어떻게 느끼는지도 학교별로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요. 그런데 2015년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을 거치면서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실제 생활에서는 취업을 위해 옆 사람과 경쟁하더라도, 젠더 이슈에서는 ‘우리’라 부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고 할까요. 물론 그만큼 젠더의식의 성별 격차는 이제 더욱 도드라집니다. 수업시간에 만나는 여학생들은 2015년 이전에 비해 훨씬 더 화가 나 있고, 반면 남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젠더이슈를 여전히 나이브하고 간단하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어요. 때로는 이미 ‘일베문화’를 일상으로 경험한 세대로서 온몸으로(웃음) 적대감 내지 ‘짜증’을 표출하는 남학생도 있습니다.

 

백영경 어쩌면 여성학 강의를 한다는 건 강의실 안에서 투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른 강의에 비해 몇배나 더 애써서 논리를 갈고닦아야 하고요. 수업 자체가 전쟁 같아지는 현상이 요즘 더 심해졌어요.

 

최나현 제 시선에서 보자면 학교 전체 단위의 페미니스트 모임뿐만 아니라 학과 단위, 소모임 단위의 페미니스트 모임이 늘어나는 일이 신기합니다. 학부 시절만 해도 전혀 없던 일이거든요. 저는 학부에서 불문학을 전공해 엄청나게 많은 ‘언니’들이 있었는데 페미니즘을 가르쳐주는 선배는 없었어요. 요즘은 경계심을 갖고 활동을 시작한 친구들도 더 많은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도 않는 것 같아요. 물론 남학생들은 정말 고집스럽게 정체되어 있거나 혹은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해간다는 인상입니다. 특히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 댓글을 보면 가관이에요. ‘커트머리 하고 지나가는 여자는 다 패버린다’는 글도 아무렇지 않게 올라오거든요. 이런 문화가 팽배하다보니 오히려 투쟁에 깊이 참여한 여학생들이 상처를 받고 튕겨나가는 일도 빈번해요. 학교 시스템도 정체되어 있습니다. 특히 성폭력상담센터 같은 학교기관은 피해 학생 편에 서기보다는 일을 축소하고 숨기기 급급한 경우가 많거든요. 상담센터나 인권센터도 학교 당국으로부터 독립적인 기관이 아니니까요. 특히 성폭력 가해자가 교수일 경우에 피해자를 고립시키려는 시도가 더 노골적으로 벌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심지어 부산대의 경우 총장이 ‘미투운동을 지지하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음에도 교무회의에서 강의 평가에 성희롱 항목을 넣자는 안건이 부결되었어요. 그러면 이제 이 운동이 겨냥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애매해지고, 또한 제도적인 변화를 이뤄내기가 어렵다는 막막함이 생기는 거죠.

 

백영경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여학생의 의식은 높아지는데 남학생과는 격차가 생겨나고 있고, 무언가를 해보려는 시도는 대학이라는 상대를 마주하는 순간 제도적인 어려움 때문에 꺾이기 십상인 상황 같습니다. 이 어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런 어려움은 성희롱·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입은 피해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 차에서도 드러납니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종종 추행의 정도를 가리는 데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강간 여부를 지나치게 중시하다보니 ‘손 한번 잡힌 게 뭐가 문제냐’라는 가해자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조금 나은 경우에도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것만이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이렇게 성희롱·성폭력을, 그런 게 과연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순전히 성적인 문제’로 보는 시각은 피해자의 인식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최나현 피해자의 피해라면 무엇보다도 공부를 하기 어려워진 거겠죠. 피해의 기억이 있는 장소에서, 학계의 권위를 가진 교수에게 피해를 당했다면 공부를 그만둘 수밖에 없으니까요. 대학원에 진학한 건 연구자로 경력을 쌓기 위해서일 텐데, 피해자가 성폭력을 고백하는 순간 학계에 발붙이기도 힘들어지니, 성폭력도 물론 문제지만 인생 자체가 뒤틀리는 거죠. 문제를 문제화하기 힘든 게 가장 어려운 점 같습니다. 그런데 피해자를 돕는 사람들도 관련된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 역시 중요합니다. 저와 제 친구들이 대학 내 미투운동을 펼칠 때, 저를 제외한 나머지는 자신이 피해자와 연대한다는 사실 자체를 주변인에게 숨기고 철저히 익명으로 활동했어요. 제 지도교수는 페미니스트이지만, 다른 친구들의 지도교수는 그렇지 않거든요. 피해자인 친구를 지원하는 것 자체가 지도교수를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겠다고 본능적으로 판단한 것 같아요.

 

유현미 학계의 일상적 상호작용 속에 있던 불합리한 관행들과 강고한 위계관계가 개혁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의 기업화가 심화되면서, 교수-학생 관계가 이전보다 복잡해지고 경직되었다고 느낍니다. 특히 대학원생의 교수에 대한 종속성이 커진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학부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의 격차보다 학부생과 대학원생 사이의 격차가 더 크다고 봅니다. 학부생들은 교수에 대한 종속성이 낮은 만큼 발언의 자유도 상대적으로 보장되니까요. 대학원생은 교수라는 개인을 통해서만 학계의 자원에 접근할 수 있어요. 대학원생은 학문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노동이나 생계가 교수와의 관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큰 문제도 덮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변에서도 그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권하거나 응원할 수 없죠.

 

전희경 특히 성폭력 피해에서는 그런 양상이 더 심합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내부 구성원들도 ‘완전한’ 피해자이기를 요구하거든요. 그러니까 피해자가 연구나 생계를 계속하면 ‘괜찮은 거 아냐?’라고 묻고, ‘괜찮다니 피해가 없었던 거 아냐?’로 이어지죠. 다른 범죄 피해자들과는 달리 100퍼센트 피해자, 24시간 내내 피해자여만 한다는 요구가 거셉니다.

 

백영경 맞아요. 생계나 학업에 복귀하는 순간 피해를 입증하기가 더 어려워지거든요.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피해자가 그렇게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라는 근거로 이용되기도 하고, 심한 경우 피해의 진정성 자체를 의심받기도 합니다. 나아가 피해자는 그렇게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가해자는 정직에서 해임에 이르는 징계를 받는 게 부당하다는 반응까지 나와요. 대학 내에서는 역시 가해자의 입장을 배려하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 구체적인 양상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유현미 대학 내부에서 문제제기를 하기 위한 행정적 절차가 복잡합니다. 긴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 동안 피해자에 대한 지원은 전혀 없는 반면 가해자의 편의는 많이 보장돼요. “수업이 중단되면 어떡해? 교수가 의혹만으로 수업에 나오지 말라는 거야?”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사람들이 교수를 얼마나 배려하고 신경 쓰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러면 가해자는 학교의 징계절차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자기편을 모으고 자신의 입장을 강변할 수 있는 거죠. 피해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좌절하거나 포기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문제제기부터 처리 결정까지 피해자는 가해자와는 달리 매우 가혹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교수 간의 파벌 싸움이나 알력 다툼으로 치부하는 시선도 문제예요. 피해자가 사주를 받아서 누구를 골탕 먹이려고 한다는 식으로요.

 

최나현 일은 여자가 하고 교수는 남자가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여학생들이 늘 하는 말인데, 그럼에도 항상 여자들이 열심히 일한다는 게 슬프죠. 공부로는 남자 교수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갈아 넣는 노동을 더 많이 하는 거예요. 취약한 사람이 더 취약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구조랄까요. 앞서 ‘파벌’ 얘길 하셨는데, 실제로 저희 대학에는 ‘부산파’ ‘밀양파’ 같은 말이 있어요. 부산에서 나고 자란 부산대 남학생을 키워주는 게 부산파라는 식이죠. 학연과 지연을 모두 만족하는 ‘아들을 키운다’는 뜻이에요. 딸들은 부산에서 태어났든 밀양에서 태어났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러한 인맥과 파벌이 얽히고설켜 있어 정작 제일 힘이 있는 사람들은 쉽게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 학생들끼리 ‘아버지’가 누구고 ‘아들’이 누구인지를 따지고 있고, 그 와중에 여학생들은 소외되고 이의제기도 불가능하고요.

 

자원 배분과 재생산의 위기

백영경 말씀해주신 문제들이 결국 학문 ‘후속세대’의 문제, 그리고 학문의 위기와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상황을 보면 학문의 보존과 재생산을 위한 ‘후학 양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돈입니다. 하지만 재정적 지원이 대학원생의 종속성을 높이기만 할 뿐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이 돈을 누가 받는지, 그리고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누가 결정하고 평가하는지 등의 문제가 곧바로 뒤따르거든요. 이는 사회재생산의 일반적인 위기와 같은 차원의 문제입니다. 가령 돌봄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다보니 아이를 낳을 수도 기를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인데, ‘지원이 부족해서’라는 진단으로는 이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요. 후학 양성이라는 가치 자체가 대학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상황에서 지원금만으로는 후속세대의 재생산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후속세대의 재생산을 가로막고 있는 근본적인 걸림돌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는다면, 사회와 마찬가지로 대학 역시 이런 재생산의 위기는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세분은 대학 내 재생산의 위기를 어떤 식으로 체감하고 있으신지요.

 

최나현 ‘왜 공부를 해야 하지? 이제 인정도 안 해주는 세상인데……’ 대학원생이라면 이런 생각 한번쯤 하잖아요. 그래서 돈, 그러니까 자원의 문제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제 학교가 앞장서서 취업률 수치를 자랑할 뿐더러 취업에 유리하다는 ‘인기학과’ 편중도 심해지고 있잖아요. 대학이 지식을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취업을 위해 거쳐가는 공장처럼 되면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의심이 끊임없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인문학은 애초에 주어지는 자원이 적으니까 학술행사든 수업이든 모든 것에서 점점 더 뒤처지는 인상입니다. 젠더담론도 물론 마찬가지고요. 이런 한정적인 자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나날이 커질 수밖에 없을 듯해요.

 

전희경 당장 8월에 시행되는 시간강사법을 앞두고 불어오는 칼바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지난 몇년간 글쓰기 수업도 맡고 있는데, 과학이나 기술 분야가 접목되지 않으면 교육부 지원금 받기가 힘들어지면서 정규직 교수나 전임이 없는 ‘교양’ 수업들이 제일 먼저 없어질 위기예요. 그런데 이러한 정보 자체가 강사들에게는 공유되지 않기 때문에 대비할 시간도 없고, 통보만으로 ‘잘릴’ 위기에 처하는 거죠. 시간강사인 제가 그나마 이런 소식을 공식 회의를 통해 알게 되는 것 자체가 소수 전임교원들의 ‘의지’와 양식 덕분입니다. 요즘은 대학을 취업하기 위해 가는 곳쯤으로 여기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대학이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기 위한 장소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기는 했잖아요? 그런데 그조차 무너져 내린 것 같아요. 체면치레로라도 넘지 않던 선이 무너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선’을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스워집니다. 교수자 집단도 분명하게 계층화되어 있고요. 정규직 교수와 계약직 교수, 정년 보장 여부에 따른 안정성의 차이, 다양한 이름의 계약직 교수 등등. 대학 내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걸 모두 알죠. 그런데 교수자 집단 안에서도 주변화가 발생하고 불균형이 심한데 ‘누가’ 이것들을 문제화할 수 있을까요. ‘대학 개혁 문제’를 함께 논할 주체가 누구인지, 서로를 함께 논할 관계로 설정할 수 있는지부터가 문제의 일부 아닐까 싶어요.

 

유현미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지부장인 구슬아가 쓴 「대학의 구조적 관성의 역사와 연구자 공동체의 개입하는 주체사」(『역사문제연구소 회보』 2019.2)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90년대 이후 지속된 대학발 구조조정이 외형 및 재정의 유지를 넘어서는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구조만 재생산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구조의 관성’이 대학 내 모든 구성원의 불안정성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기에 정규직 교수와 비정규직 교수, 대학원생 당사자들이 연구자 주체의 자격으로 관성을 비트는 운동 역량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젠더 문제와 성폭력 사건이 개인의 힘으로 바뀌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구조적 관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젠더 문제가 끊임없이 주변화되는 것도, 남성 교수와 남성 직원의 미래가 훨씬 중요시되는 것도 어떤 개인들이 이상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이상함을 외면하고 옹호하고 지지해주는 기반이 있기 때문 같습니다. 교수를 포함한 연구자들이 외부 대상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우리 자신의 문제, 그러니까 지식의 내용이나 지식 생산의 토양에 대해 별로 고민을 안 해요. 예를 들어 사회 불평등 문제를 비판하고 계급모순을 지적하면서도, 학내 자원 배분에는 불합리한 차등을 두고 정규직 교수와 비정규직 연구자 사이의 위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처럼요. 대학이 그 이상처럼 자유롭고 평등한 지성의 공간이 되려면, 그 지식의 생산 과정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 자체가 자유롭고 평등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해요.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게, 제가 어느 학술 심포지엄에 갔는데 남자 교수들이 모여서 온갖 진보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갑자기 여자 조교한테 커피 타오라고 시키는 거예요. 대학원생들이 강연장 중앙에 앉으니까 교수 자리라고 앉지도 못하게 하고요. 이런 모습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흔한데, 이를 학생들이 끊임없이 보고 느낀다고 생각하면 사실 지식의 내용보다 지식이 공유되는 환경과 성찰적 상호작용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외부 지원이나 돈으로 외형은 유지할 수 있겠지만, ‘후속’세대가 발붙이고 살아갈 만한 평등하고 매력적인 학계 환경은 돈으로 만들 수 없으니까요.

 

구제불능 ‘진보 마초’와 남성들의 ‘약자의식’

백영경 최근에 한 원로 사회학자가 일간지 칼럼에서 “세간의 담론이 왜 버닝썬, 승리, 김학의, 장자연 같은 민망한 사건에 쏠리는”지를 물으며, 이런 일을 사소하고 “누추한 사건”이라고 표현해 물의를 일으켰죠.(중앙일보 2019.4.17) 그런데 이런 망언에 대해 남성 지식인들은 가령 세월호나 5·18 망언과 비교하면 분노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다’ ‘한국의 의식 수준이 딱 그 정도다’ 하는 이야기만 많죠. 성폭력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부족한 이유로 흔히 피해자에 대한 공감 부족을 꼽지만, 저는 ‘공감의 실패’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권력이 구조화되고 실제로 작동해온 방식에서 젠더 문제가 얼마나 핵심적인지를 보지 못하는 ‘지성의 실패’라고 봅니다. 여성의 몸을 거래하면서 이윤을 창출하고 권력을 다져온 그 양상을 보지 않고 한국사회에 대해 논할 수 있을까요. 그런 면에서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젠더 문제에 둔감한 게 아니라 권력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물론 남성 지식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수·지식인 사회에서 남성 대표성이 두드러지다보니 남성 지식인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젠더 문제가 끝없이 주변화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봐야 할까요?

 

전희경 저는 이 질문은 민주주의와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촛불 당시에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라는 표어가 있었잖아요. 그리고 미투운동이 본격화되었을 때 ‘달라진 우리는 당신의 세계를 부술 것이다’라는 슬로건이 등장했죠. 이번에 낙태죄가 헌법불합치라는 판결이 나오며 ‘이제 우리는 결코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로 이어지고 있어요. 이 흐름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정치, 나아가 현대사 전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 의미에 대한 성찰과 토론이 있어야 하겠고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대학 개혁이 이런 시대적 흐름과 ‘별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예요. 군대도 사회인데 군대에서 ‘여기는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어떤 질서를 재생산하는 것처럼 말이죠. 대학도 사회의 일부인데 페미니스트들이 추동하고 주도해온 최근의 변화들을 ‘대학 개혁과 별개’인 양 생각하는 이들을 보면, 특히 그런 생각을 갖고도 대학 개혁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황당합니다. 마초 중에서도 제일 골치 아픈 게 자기가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마초잖아요?(웃음)

 

유현미 그 사람들은 항상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거든요.(웃음) 사실 대학 개혁에 목소리를 높이는 자칭 진보 학자들이 수두룩하지만, 결국 그 아래의 담론을 보면 교육부 욕, 관료 욕, 정부 욕이에요. 학생 수가 줄어들고 이에 따라 정규직 교수 자리와 재원도 줄어들기 때문에 정부의 전면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머무르거나, 아니면 한국연구재단의 평가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는 거죠. 이러한 분노 끝에 그 지원을 받아서 어떤 지식을 어떻게 생산하겠다는 대답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사실 폭력적인 평가에 대한 거부야 당연히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지식의 유용성과 공공성은 책무성(accountability)이라는 말처럼 적절히 설명되고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증명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은 없어요. 왜냐하면 교수 자신들이 ‘약자’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대학 내 시설관리·미화 노동자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도 우리는 사학재단이나 정부에 고용된 일개 직원, 공무원이기 때문에 연대할 수 있는 힘이 없다, 권한이 없다 이렇게 나오는 것 같아요. 본인들도 구조조정의 파도에 함께 휩쓸리는 약자라고만 인식하지, 자신들의 역량을 누구와 어떻게 조직할지에 대한 고민이 약합니다.

 

전희경 편의적인 ‘상대평가’와 ‘약자의식’은 이제 시대정신이 된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시사 IN』(통권 604~606호)에서 ‘20대 남성 현상’에 대해 조사했잖아요.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읽고 나면 심란해지는 기사였어요. 20대 남성의 마음 안에 ‘내가 가장 차별받는 사람이다’ ‘내가 약자다’라는 의식이 강해서 페미니즘 같은 세계관에 대해 분노를 드러낸다는 거죠. 일상화된 ‘남 탓’이 보편적인 알리바이를 제공해준다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내가 뭘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자포자기도 흔해지는 거죠. 아까 ‘진보 마초’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자기의심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젠더이슈 나도 웬만큼은 안다’(그래서 특별히 페미니즘을 공부할 필요는 못 느낀다), ‘완벽하진 못해도 적어도 홍준표 따위보다는 훨씬 낫지’(날 도매금으로 취급하다니!)…… 그런데, 그런 식으로 상대평가하자면 ‘이명박근혜’ 시절도 일제식민지시기보다는 ‘훨씬 나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요? 자기의심이 없으니까 배움도 없고, 배움이 없으니 진보하지 않고, 진보하지 않는 진보는 사실 더이상 ‘진보’도 아니게 됩니다. 노조가 어용이면 아예 없는 것보다 더 해로운 것처럼, 진보를 자처하면서 진보하지 않는 사람은 미투를 비롯한 다양한 싸움에서 오히려 악조건입니다. 대학의 자율성을 진보적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은 대학 내 성폭력 등 젠더이슈가 제기되었을 때 ‘대학 내의 문제는 대학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 ‘대학의 자치를 믿는다’ ‘학내 문제를 형사사건화하면 안 되지 않느냐’고 근엄한 척 이야기하지만, 그런 식으로 대학 자율성을 이야기할 거면 그 자율성으로 무엇을 해낼 수 있을지 증명해야 해요. 대학이기 때문에 특별히 자율성이 좀더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자율성을 구체적으로 무엇에 쓰고 있는지, 함께 감시하고 비판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최나현 진보 마초는 의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합니다. 약자는 모든 것에 대해, 본질적으로는 나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에 대해 계속 의심하게 되는 위치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진보 마초’ ‘진보 꼰대’들은 자신에 대한 의심이 없고 확고하잖아요. 그러니 실제로는 약자가 아닌데도 ‘약자의식’을 가진 거죠. 이십대 때 학생운동하면서 약자였던 경험과 감수성으로 여전히 살아간다는 것이 문제예요.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조정하고 객관화하는 작업을 안 하는 것 같아요. 결국 사회문제, 세대 간 문제에서 고립을 자초하게 되는 거죠. 이십대 남성의 세계관과 크게 다를 바 없어요.

 

‘조직’ 문제와 대학원생노조

백영경 사실 대학 내의 문제들은 크든 작든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가 맞물려 있기도 하고, 취업 위주 교육으로의 쏠림 현상도 사실 특정 학문의 위축과 긴밀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연구재단 지원 체계에 문제점이 많지만, 세분께서는 대학의 개혁 없이 연구재단 욕만 할 상황은 아니라고 보시는 듯합니다. 대학 내에서 시급히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문제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유현미 전체 대학 가운데 약 80%가 사립입니다. 소수의 소유권, 경영권을 배타적으로 보장하는 사립대학 중심으로 편재된 고등교육 시스템의 문제도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사립대학은 정부 재원을 지원받으면서도 내부 의사결정이나 자원배분이 소수에게 독점되고 폐쇄적·위계적으로 이루어져요. 이로 인해 수많은 비리, 갑질, 폭력과 차별이 대학에서 발생하는데도 해결이 잘 안 됩니다. 지식생산 토양의 사유화가 심각해지는 거죠. 이처럼 대학이라는 기반 자체가 내부에서 이미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걸 보면, 앞서 말씀드린 ‘구조적 관성’이 이제는 견딜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 같아요. 저는 역설적으로, 대학이 수요자의 요구를 맞춰준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강사들의 교원 지위를 보장해주기 싫으니까 대형 강의와 온라인 강의를 개설해서 강의 수를 줄이는 것만 생각해요. 그러다보니 매번 수강신청 대란이 일어나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수업권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대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학생들이 소비자이고 교육서비스의 수혜자라면, 그들의 요구와 필요를 맞춰줘야 하는데 전혀 그러질 못해요. 2015년 이후 페미니즘 대중화의 흐름 속에서 페미니즘 지식에 대한 수요도 학생들 사이에서 폭증했는데, 정규직 남성 교수 중심의 대학사회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성 교수 스스로 자신의 수업에 젠더 관점을 기입해 강의를 갱신하려는 노력도 없고요. 이러한 반(反)개혁은 교수를 직업이 아니라 하나의 신분으로 여기는 습속과 결부된다고 봅니다. 최근 고려대나 중앙대의 사례처럼 강사와 학부생, 대학원생들이 연대해서 강사법을 제대로 시행하라고 요구하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저는 이 움직임이 균열의 시작인 것 같아요. 비싼 등록금 냈는데 제대로 수업도 못 받는다는 생각이 어떤 임계점을 돌파한 듯해요. 그러면서 단지 수업권의 문제가 아니라 고등교육 시스템 전반의 문제, 학문재생산 구조를 문제 삼을 수 있겠습니다.

 

전희경 그런데 학생을 비롯한 많은 대학 구성원들은 오랫동안 가만히 있어왔죠. 분노가 이미 임계점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 개별적인 ‘빡침’이 조직화되지 않으면 변화가 생기기 힘들다고 봅니다. 어떤 집단을 만들어 뜻을 모으고, 그 뜻을 바탕으로 협상을 시도하는 경험 자체가 너무 오래 단절되어 있는 게 아닐까요? 말씀하신 ‘분노’는 저도 느끼고 있지만, 그 분노가 표출될 창구가 없는 것 같습니다.

 

백영경 각각 다른 입장에서 느끼는 다양한 ‘빡침’이 이미 대학에 만연하죠.(웃음) 그럼에도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은 대학 진학률을 바탕으로 한국의 대학은 이미 수익률을 목표로 움직이는 기업으로 보입니다. 대학이 이렇게 ‘지긋지긋하다고’ 포기해버릴 수는 없겠죠. 세분께서 대학이 중요하다고 보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최나현 ‘넷페미니스트’였던 제가 변한 것도 조직화의 문제를 느꼈기 때문이에요. 온라인에서 이야기하는 건 즐겁지만 현실에서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으니까요. 더 크고 합치된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느낀 시점에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에 가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어요. 대학원에서 목소리를 낸다는 건 오히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요. 학부생 학생회도 있고 교수회도 다 있는데, 대학원은 심지어 명목상의 학생회가 있는 곳도 적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대학 개혁을 위해서는 우선 대학원 학생회부터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디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고, 단과대와 학과가 달라도 같이 대응하는 것도 가능해지고요. 그렇지만 이 필요성에 공감하는 대학원생이 많지는 않아요. 교수와 대학원생 사이가 지나치게 사적이기도 하고요. 저는 다른 단과대의 대학원생들을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힘을 모을까 하는 문제에서 시작해보고 싶어요.

 

유현미 ‘재현’과 ‘대표’의 문제가 동시에 있습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 재현인데, 우선 대학 내 여성의 현실을 드러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성차별은 어떠하고 대학원생은 어떤 노동을 하고 있으며 어떤 갈등관계에 있는지 등을 볼 수 있어야 해요. 또한 조직화된 목소리가 이들을 대표할 수 있을 때 첫걸음을 뗐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최근 여러 대학에서 일어난 총여학생회 폐지 움직임을 보면 대표의 문제는 이제 정말 심각한 것 같습니다. 총여 폐지를 주장한 학생들이 내세운 것처럼 민주주의를 단순히 다수결의 논리, 절차적 문제로만 보면 이를 뒤집을 만한 힘도 생겨나지 않는 것 같고요. 그런데 이런 절차적 민주주의의 함정을 보완하고 극복하는 게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잖아요. 함께 실천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면, 조직화와 대표 문제도 무겁게 느껴야 하겠죠. 물론 총학생회나 총여학생회 같은 학생회 모델이 지닌 한계도 역사적으로 명확하니까, 이를 넘어설 수 있는 모델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선 다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또 재현의 문제가 중요해집니다. 둘 다 빼놓을 수 없는 거죠.

 

백영경 대학원생노동조합 모델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유현미 지금 있는 대학원생노조는 전국 단위의 대표 성격이 강하죠. 대학원생이 학생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걸 알릴 필요는 있습니다. 사실 교수도 강사도 노동자잖아요. 대학에서 일어나는 지식 생산 노동은 서로의 노동을 존중하지 않으면 권리 침해가 너무 쉽게 일어나니까, 이런 일들을 방지할 수 있는 대표체가 있으면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대학원생노조가 시간강사법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TF에도 참여하고, 대학원생이 겪는 권리 침해 문제를 논의하는 협상 테이블에도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러한 조직화 모델은 충분히 실험 가능하다고 봅니다.

 

최나현 작년 미투운동 때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의 도움을 크게 받았어요. 학내에 대학원생의 권리 보호와 관련된 공식적인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도움을 요청했죠. 그제야 대학원생의 현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 같아요. 대학원생 전체를 위한 학생회는 물론이고 학과 단위 자치회도 드물게만 존재한다는 사실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저와 친구들은 대자보와 SNS를 활용하여 익명으로 활동했고, 또 학과도 모두 달랐기 때문에 저희의 생각을 학교에 공식적으로 전달할 구심점이 없었습니다. 조사와 징계 과정에서 피해자를 보호하라고 주장하거나, 인권센터의 규정이 바뀌어야 한다거나, 교수 징계를 촉구할 때처럼 결정적으로 목소리가 필요한 순간에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의 항의공문이 큰 힘이 됐어요.

 

전희경 대학원 학생회는 몰락하지만 대학원생노동조합은 부상하는 상황이 시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학생이라면 누구나 구성원이 되는 ‘학생회’ 방식이 아니라 자기 권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가입하는 ‘노동조합’ 조직이 대학에 생겨났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대표성 있는 조직이 그만큼 드물고 힘들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듯해요. 혹은 ‘대표성’이라는 것이 지금 한국사회/한국 대학에서의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많은 토론이 필요한 키워드일 수도 있습니다. ‘학생이면 당연히, 무조건, 자동적으로’ 가입되는 학생회의 유니언숍제 구조는, ‘학생사회’라는 말이 보여주듯 모종의 상상적 공동체를 가정했고, 또 그 가정을 통해 ‘우리’라는 감각 내지는 규범을 만들어내면서 시민권을 논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었습니다. 대학원생이라는 사실만으로 당연히 그 구성원이 되는 ‘학생회’가 사라졌다는 것은 대학원 사회를 ‘사회’라고 부를 만한 조건이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대학원생노조의 약진을 응원하고 기대하는 한편, 이러한 변화들을 촘촘히 진단하고 분석하는 것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요.

 

학생이냐 노동자냐,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백영경 사실 대학원생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배우는 사람, 학생으로 개념화하는 것과 노동자로 개념화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배우는 사람이라고 볼 때 선생과 학생 사이의 위계를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게 되는 것에 비해서 노동자는 평등하지 않으나 동등한 구성원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전희경 사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운동권’들한테는 ‘학생’이라는 정체성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잖아요. 교수도 우습게 알고, 학점 F 받으면 자랑스러워하고요. 그때는 “공부가 뭔데? 사회가 이 모양인데” 하는 말이 통했고, 실제로 대학생들이 사회 변화를 견인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자기를 학생이기보다는 시민으로 여기며 거리로 나오고, 그 의식에 기반해서 작은 시민사회이자 정치적 대표기구로서 ‘학생회’를 구성하고 교수와 협상을 벌였던 것과 비교해보면 지금은 조건이 많이 변화한 것 같습니다. 자신을 대학이라는 사회의 시민이라기보다는 ‘노동자’로 위치 짓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생존의 문제 혹은 이해관계의 문제로는 완전히 번역될 수 없는 정치적인 민주주의의 공간을 상상하기 힘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권’을 통해 ‘시민권’이 경험되고 실현되는 사회라고도 할 수 있고요.

 

유현미 그때와 달리 대학이 이제 진학률 70% 이상의 보편적인 경험이 된 탓도 있을 것 같아요. 취업 유예나 준비·모색 과정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비율도 높고요. 학부나 대학원이 소수의 특권 경험이나 해방구가 아니라 또다른 일반사회가 되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소외에 더 민감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대학사회에서 동등한 상호작용의 주체로서 자신의 멤버십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혹은 ‘지도제자’처럼 교수에게 소속된 종속적인 멤버십인 상태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 중 하나가 노동자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희경 정체성을 노동자로 바꾸는 순간 학교 당국이 ‘고용주’가 되잖아요. 그런데 앞서 이야기 나눈 여학생이나 젠더이슈의 주변화, 성희롱 성차별은 사실 학생 집단과 학교 집단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서도 빈번합니다. 노동자라는 이름은 학교 당국이나 교수와의 관계에서 ‘을’의 위치를 드러내는 명명이기도 하지만, 학생사회에 스스로를 기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외되기 쉬운 구조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물론 학생이 스스로에게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게 매우 유의미하고 또한 유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학생들이 ‘학생으로서’, 즉 대학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무언가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정치적 공간이 좁아지는 걸 당연하게만 볼 수 있을까요? ‘대학사회’ 내지 ‘공동체’라는 감각도 중요한데 말이죠.

 

최나현 학문적인 공동체라는 감각이 있어야 학생이라는 정체성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공동체가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는 대학사회 내의 위계가 교수와 학생이 학문적 동료가 될 가능성을 닫아버리기 때문인 듯해요. 얼마 전 논문에서 ‘교수가 시킨 일을 다 하고 나면 소진되어서 내 연구를 할 수 없다’는 인터뷰를 읽었어요. 저는 이 말에 깊이 공감했거든요. 학교에서 부여하는 업무는 명확한 마감일이 있는데 공부는 그렇지 않으니까, 밀려오는 행정 업무를 우선시하다보면 그게 생활의 중심이 되고 공부는 ‘시간 남으면 하는’ 게 돼버립니다. 학생이라는 정체성이 불가능해진다는 건 이런 뜻이에요. 가끔 토론도 하는 민주적인 공동체는 꿈꾸기도 힘들고 교수와 학생 사이에 상사와 부하직원이라는 관리-피관리의 관계가 먼저 설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라는 말에 더 크게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공동체가 ‘같이 공부를 하는 입장’이라는 걸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제가 지금 공과대학에 다니는 여성 대학원생에게 가서 “우리는 동지야, 나는 너와 처지가 같아. 힘을 합치자”라고 하면 쉽게 수긍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유현미 노동이라면 어떤 노동인지, 그래서 어떤 가치를 생산하는지를 따져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관계를 드러내 보이는 것도 중요한 문제일 테고요. 대학 행정업무에 대학원생이 기여하는 점에 대한 적절한 인정도 중요하지만, 분업과 협업으로 이뤄진 현재의 연구물 생산방식에 ‘노동’ 개념을 어떻게 기입할지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대학원생노조에서도 교수, 강사, 대학원생이 모두 기여하는 ‘연구노동’의 개념화를 고민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조라는 모델은 어쨌든 대학 본부나 정부 같은 사용자를 전제한 뒤 그들과 협상해서 성과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정치공동체로 공통감각을 형성하는 최종심급이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러 자치모임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가 속한 학과는 자치회의 역사가 긴데, 그 덕분에 갑질 교수한테 문제제기를 하는 게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모임들이 있어야 투쟁의 경험도 축적되고 전수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티페미니스트와 강의실문화

백영경 대학에서는 강의실이라는 공간이 무엇보다 중요할 텐데, 그 안에서 남학생들의 공격만 문제는 아니에요. 페미니즘적인 정답을 강요하는 압박 자체가 교육의 장에서는 해가 되죠. 그렇다고 혐오발언을 허용하자는 건 아니지만, 본인이 가지는 의문이나 혼란은 자유롭게 터놓을 수 있는 강의실문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전희경 지금 상대평가 제도는 그런 문화 형성에 방해가 되죠. 그런데 제가 두 학기에 걸쳐서 절대평가를 해봤더니 확실히 어떤 변화가 느껴졌습니다. 적어도 ‘덜 초조하다’는 느낌이랄까요. 서로를 ‘내 위’ 아니면 ‘내 밑’으로 보게 하는 상대평가 제도 속에서는, 학점 포기자가 아닌 한 ‘사회’라는 것을 만들어낼 수 없어요. 사실 저는 모든 학부 수업은 교양 수업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요. 지적인 공감 능력을 발휘할 시민을 길러내는 게 대학의 사회적 역할이니까 그 많은 사회적 자본이 투입되는 것이겠고요. 그러한 사회적 자본의 투입 속에서 유지되는 특수한 장으로서의 대학이 있어요. 그 장에서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경험, 시민행동을 위한 언어와 대화의 능력이 길러질 필요가 있습니다.

 

최나현 대학이 중요한 이유는 대학에서 소중한 경험을 할 기회가 많기 때문일 텐데, 지금의 경쟁상황은 그런 경험을 점점 더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배움의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소망은 있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갑갑해져요. 성폭력 교수가 진행하는 강의실에 수업 전에 가서 이 교수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왜 수업을 거부해야 하는지 얘기하면 돌아오는 대답이 ‘지금 수업권을 침해하고 있으니 나가라’는 거예요. 이런 게 ‘주류’의 마음일 텐데 그들과 무언가 공동체를 꾸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막막한 마음부터 생기는 거죠. 그리고 무언가를 알리기 위해 SNS도 하고 학교에 대자보도 붙이면 돌아오는 반응이 주로 ‘그거 할 시간에 자소서라도 한장 더 쓰지’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사고가 취업과 경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죠.

 

전희경 2000년대 말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대학 내 페미니즘이 고사해간다는 우려가 커졌죠. 이게 몇몇 학교의 문제가 아니고 대세가 되었다는 공포와 좌절이 있었는데, 그후 메갈리아나 미투운동을 거치며 크고 작은 문제제기와 싸움들을 벌이는 여성들이 늘어났고, 그에 발맞춰서 페미니즘 책도 많이 출간되고 세미나와 모임도 많아졌어요. 논쟁도 활발해졌고요. 그러니까 페미니즘이 ‘취업과 경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대학사회에 정의에 대한 감각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추동력을 떠올려봤을 때, 진보는 특정 콘텐츠가 아니라 진보하려는 동력이잖아요. 성평등 역시 ‘성평등 매뉴얼’이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성평등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싸워나가는 그 동력이 성평등을 진전시킵니다. 몇년 전에 ‘서울시는 모든 것을 골고루 나누어야 한다는 구시대적 발상을 멈춰라’라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강남구 곳곳에 나붙은 적이 있어요. 그걸 보면서 평등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후진’ 이야기가 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최저선이 사라졌다고 할까요. ‘같이 잘 살아야지, 거짓말하면 안 되지, 갑질하면 안 되지’ 이런 말이 더이상 당연하지 않고, 그런 행태를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상징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거 할 시간에 자소서 쓰겠다’는 말이 부끄러움 없이 튀어나올 수 있는 거죠. 민주주의의 최저선이 무너진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서로를 가해자/피해자 아니면 경쟁자 관계 둘 중 하나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구도를 벗어나 서로를 다르게 생각하는 감각을 추동하는 게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을 흔히 물결(wave)로 표현하는데, 페미니스트들이 아무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장에서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파동이 생긴다는 생각도 합니다. 대학에서 펼쳐지는 그 물결에 저 역시 물장구 한번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이에요.

 

유현미 온라인에서 엄청나게 살벌한 이야기를 하거나 테러 협박을 하는 사람들도 막상 만나보면 너무 유약한 경우가 많아요. 성폭력 가해자인 교수도 무섭기보다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 때가 있고요. 대학이 지닌 인프라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대학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포기하는 순간 이런 사람들이 그 인프라를 독식하기 때문이에요. 요즘 출판계에서 페미니즘이 인기이고 대중 강연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는데, 이는 물론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한편으로는 활용 가능한 인프라를 전혀 쓰지 못하기 때문에 대학 밖에서 이런 열풍이 생기는 것 아닐까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대학에서 페미니즘 페다고지의 역할이 중요하죠. 체계적이고 축적된 지식의 형태로 페미니즘을 접할 수 있고, 직접 마주 보고 토론하는 장이 열리는 셈이니까요. 이 토론이 꼭 ‘키보드 배틀’처럼 누가 이겨야 하는 싸움이 아니라 조정될 수 있는, 서로에게 열린 공간임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페다고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저희 대책위에는 많은 남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학생이나 여성들만 주로 성폭력 사건 처리 과정의 ‘전담자’였던 관행에서 벗어난 것인데요. 대책위 활동을 하며 남학생들도 젠더 감수성을 갱신할 수 있었고, 저도 그런 남학생들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테러는 90년대에도 있었고 2000년대에도 있었는데, 그런 테러에 여유롭게 대응하는 전략과 고민을 나누는 것도 페다고지의 역할 같아요.

 

왼쪽부터 백영경 유현미 전희경 최나현 © 김준연

왼쪽부터 백영경 유현미 전희경 최나현 © 김준연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면

백영경 대학과 페미니즘 주제만으로도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이제는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대학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도 이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만, 대학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끝내면 긴 이야기의 끝이 너무 암담할 것 같습니다.(웃음)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대학에 거는 기대나 희망이 있다면 나누어보았으면 합니다.

 

최나현 페미니스트들에게 던져지는 수많은 공격이 있습니다. 그런 공격은 ‘우리의 학습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식의 무관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자기 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자기가 믿는 걸 한번 내뱉어보는 경험을 하는 게 페미니즘이 관통하는 정서 같아요. 작년에 저희가 익명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학생을 무작정 만나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관심 자체는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너희의 정체를 알아야 지지할 수 있겠다’는 마음, 피해자의 완전무결함을 원하는 마음이 읽혀서 분노하기도 했죠. 그런데 어느날 그 학생이 실명으로 학교에 대자보를 붙였더라고요. 나중에 들으니 자신이 미투운동을 지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혹시나 잘못돼서 취업을 못할까봐’ 무척 걱정했다고 하더라고요. 엄청난 용기를 낸 거죠. 본인으로서는 대자보를 쓰기 전에 저희 얼굴이라도 한번 보는 것이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 맥락을 알고 나니 그가 겪었을 두려움이 이해되기도 했고, 이전에 느꼈던 아쉬운 마음이 미안함으로 바뀌더라고요. 대학 안에 이런 용기와 미안함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그걸 위해서는 이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작은 모임들이 늘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강제로 모임을 만들 수는 없지만, 그런 모임을 어떻게 지원할지는 다양한 주체들이 함께 고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유현미 몇달 전, 서울대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도서관 난방이 중단된 사건이 화제였습니다. 학생들 고시·취업 준비와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파업을 비난하거나 연대하지 못하겠다는 여론이 있었어요. 어떤 학생들은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 밤샘 토론을 했고, 결국 총학생회가 파업을 지지하고 연대하겠다는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이로 인해 노조의 목소리가 힘을 얻어 본부와의 협상 타결도 빠르게 이뤄졌고 파업도 끝날 수 있었죠. 입장이 다른 학생을 적으로만 상정했다면 이끌어낼 수 없었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역량을 기르는 데 페미니즘이 주요한 인식적·실천적 자원이 되고 있다고 봅니다. 경희대에서 젠더 강의를 한 적 있는데, 그때 만난 학생들이 학내 시간강사 문제, 교양과목 통폐합 문제, 비정규 노동 차별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며 페미니즘이 구조적 관성에 찌든 대학의 유일한 희망, 핵심적 해방구라고 느꼈어요. 대학이 다른 세계를 체험시키는 곳이라면, 여러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것 같아요. 취업이 안 되면 어떡하지 고민하는 학생에게 ‘어차피 현재와 같은 체제에서 대부분은 취업이 잘 안 돼. 그 판에 매달리기보다 아예 판 자체를 새로 우리에게 유리하게 짜보는 건 어떨까? 세상이 변하는데 그 움직임에 함께하지 못하면 그게 도태되는 거야’라고 말해버리는 거죠. 구조적 어려움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함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는 거예요.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 질서’와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보여주고요. 그런 사람 사이의 끈이 생겨날 때 피해자가 아니라도, 투사가 아니라도 대안적 사회를 모색하는 시민으로서 세상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전략이 개발될 것 같아요.이런 게 축적되고 전수되는 공간이 대학이면 좋겠습니다.

 

전희경 제가 대학이 중요한 장이고 대학에 대해 함께 토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데는 세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번째는 그곳에서 페미니스트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몇년간 대중강연을 할 때 “여기 왜 오셨어요?”라고 수강 동기를 물으면 “실제 페미니스트를 만나보고 싶어서”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페미니스트가 이렇게 많았구나 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요. 그러니까 온라인에서는 너무 많아 보이는 페미니스트가 실재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대학이 중요해요. 온라인 운동의 중요성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페미니스트를 만나서 생기는 현실감각의 중요성이 다시 환기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대학에서 수행되는 수업과 모임은 그 최소한의 접촉점을 마련해줍니다. 두번째는 상대적으로 대학이 여전히 언어가 중요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수업에서도 그렇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언어와 논리를 개발하고 싶은 욕구가 민주주의에서 굉장히 중요하죠. 공부하는 시민을 만들고 궤변을 간파하는 능력을 쌓을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학 공간, 특히 강의실이 중요해요. 세번째로 대학에서는 크든 작든 ‘조직’으로 싸워보는 경험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페미니즘은 “여성도 개인”이라며 싸워왔지만, 누구도 집단적으로 세력화하지 않은 채 ‘개인’이 될 수는 없어요. 내가 가진 불안과 나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모이고 토론하고 움직이는 경험이 가능한 곳이 그나마 대학입니다. 이때 생기는 공동체의 경험이 민주주의를 논하는 토양이 되고, 또한 이런 논의가 가능한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계속 질문하게 하죠.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말은, 한국 민주주의가 완성 직전이고 이제 성평등만 ‘추가’하면 된다는 게 아니라 성평등을 통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이 가능해진다는 뜻일 겁니다. 기존의 대학, 기존의 교육, 기존의 개혁이 무엇인지를 자꾸 다시 물어보게 하는 추동력을 지닌 곳이 대학 아닐까요?

 

백영경 의미있는 질문이 지속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대학이 있고, 반면에 오랫동안 이런 질문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공간으로서 대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공간에 정의라는 감각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마음을 실제로 불러일으키는 페미니즘의 역할이 있고요. 대학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는 대학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좌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내 현장의 질문을 성실하게 풀어나감으로써 대학이 바뀔 수 있다는 용기도 얻었습니다. 긴 시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4.20.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