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특집 | 재난과 고립을 넘어, 전환의 상상으로

 

삶의 전환을 꿈꾸는 돌봄의 상상력

황정은과 이주혜 소설을 중심으로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 등이 있음.

cyndi89@naver.com

 

 

1. 어떤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코로나19 발생 이후 벌써 일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는 ‘팬데믹 시대’라는 명명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대규모 감염병의 확산과 장기화는 우리 삶의 패턴을 이전과는 다른 층위로 바꾸어놓았다. 팬데믹 현실은 전세계적인 위기 상황을 환기하는 동시에 구체적으로 우리 사회에 산적한 문제들의 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바이러스 질병과 직접적으로 연동되는 기후위기와 재난의 상황은 사회, 경제, 교육, 의료의 각 분야에서 그동안 축적되어온 불평등의 현실과 체제의 모순을 연속적인 맥락에서 성찰하게 한다. 위기와 재난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딛고 나가는 전환적 과제의 엄중함도 알려준다. 황정아의 말대로 지금 이 시기야말로 ‘대안’의 존재가 어느새 현실이 되는, “사유의 실험과 삶의 실험 사이의 거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가치’를 둘러싼 판단이 최전선이” 된 시대이다.1

팬데믹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감당해야 하는 재난·재해의 현실은 최근 문학의 직접적 질료가 되고 있다. 특히 페미니즘의 사유와 청년의 문제를 다룬 일련의 문학 작품과 비평들은 다양한 정치적 현안에 접속하여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각종 사회 모순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2 시민적 열망에 제대로 호응하지 못하는 답답한 정치현실은 기존의 정치질서를 벗어나 청년 스스로 정치적 주체로 서는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3 얼마 전 발생한 청년 노동자 고(故) 이선호씨의 평택항 사망사고 역시 제대로 시행될 조건을 갖추지 못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문제를 심각하게 환기한다. “우리가 살려고 직장에 가는 것이지 죽으려고 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4라는 외침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더이상 늦추어서는 안 되는 긴급한 실천의 모색을 요구한다. 이렇듯 위기의 국면은 단순한 정상화나 회복의 담론에서 멈출 수 없는, 근본적 변혁 운동을 필요로 한다.

지금 우리 시대의 문학작품에서 이러한 체제전환의 상상력과 연결되는 여러가지 중요한 고리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여성과 가족의 이야기는 청년 문제, 성적 불평등, 돌봄의 이슈를 연결하는 중요한 서사적 자원으로 주목을 요한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은 김현미의 말대로 “가족, 노동, 돌봄의 의미를 구성해 온 한국 사회의 젠더 불평등체제의 위기”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는 재난의 위기가 보편적 인간활동이어야 할 돌봄을 여성에게 전가함으로써 “기존의 젠더 체계의 불평등성을 지속하고 강화”하며, 역설적으로 재난과 위기의 회복, 정상화 모델 역시 “젠더 불평등을 전제하거나 그것에 의존하여 기획되고 있는 또 하나의 젠더 불평등체제”를 핵심으로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5 체제전환의 사유 없이는 변화 역시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백영경의 논의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본주의체제와 성장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체제전환의 원리’로서 ‘돌봄’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6은 돌봄노동의 영역을 기존의 여성운동이 다뤄온 가사노동이나 사람 돌봄노동에 국한시키지 않는 개념적 확장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변하지 않는 것과의 지속적인 대결을 통해 이루어갈 근본적 전환의 과정, 그리고 새로운 가치를 재발견하고 구축하는 문제는 문학의 영역에서 구체적인 현실을 포착하는 것으로 재현된다.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황정은의 『연년세세』(창비 2020)와 이주혜의 『자두』(창비 2020)는 젠더 불평등의 현실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적 상상력을 타진하고 있어서 의미가 크다. 이 소설들은 견고한 기존 가부장적 제도의 일상과 폭력의 문제를 주시하면서 이를 돌파하는 계기를 찾아내고자 한다. 더불어 작품들에서 탐색되는 돌봄과 연대의 가능성 역시 가족 내부의 모순을 해소하는 것에만 제한되지 않고 사회를 바꾸려는 개방적인 삶의 실천과 전환의 원리로서 사유된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2. 가족서사와 ‘촛불의 시간’: 황정은 『연년세세』

 

황정은의 『연년세세』는 전쟁과 분단에서 현재에 이르는 역사적 시공간에 놓인 여성과 가족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탐구한 연작 서사이다. 동시대 개인들의 문제를 주로 다루어온 황정은 소설로서는 드물게 역사적 이야기로 시공간을 확장했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더불어 세월호참사와 촛불혁명을 관통하는 한국사회의 중요한 변화들을 의식한다는 점에서 전작인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2014)와 『디디의 우산』(창비 2019)의 주제의식과 연동해서 읽게 만든다. 『계속해보겠습니다』가 사회적 빈곤과 차별의 상황을 감당하며 유대를 맺고 성장하는 인물들의 변화를 보여준다면 『디디의 우산』은 촛불혁명의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질문하며 공동체의 억압과 연대의 가능성 문제를 세심하게 탐구한다. 이 소설들이 보여준 시대적 변혁의 상상력에 대한 탐구는 『연년세세』에서도 이어진다.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여성과 소수자의 삶에 반복되고 축적되어온 역사적 ‘상처’와 ‘억압’의 문제로 시선을 심화한다.

전쟁과 분단을 겪은 어머니 ‘이순일’ 세대의 삶을 자식 세대의 삶과 교차하며 고찰하는 『연년세세』의 서사적 시도는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창비 2020)가 보여주는 가족 이야기와 비교해도 흥미롭다.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중공업 노동자 이진오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 백여년의 노동운동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철도원 삼대』는 그 역사적 상상력을 촉발하는 현재적 시점으로 광장에 선 노동자 시민의 목소리를 부각한다. 『연년세세』에 포착된 부모 세대인 이순일의 삶 역시 자식 세대인 한영진, 한세진, 한만수의 시선에 의해 현재적으로 조명되고 해석된다. 특히 한세진은 ‘촛불광장’이 열어놓은 변혁의 상상력을 비판적으로 타진하는 시민으로서 이 연작소설의 현재성을 감당한다.

‘연년세세’라는 소설의 제목은 대를 이어 축적·반복되어온 불평등한 성별체제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소설에 아로새겨진 역사 속 여성들의 삶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어머니 없는 아이들”7이라는 어느 페미니스트의 통렬한 전언을 떠오르게 한다. 소설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가부장제의 역사 속에서 거듭 여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폭력’의 일상이다. 이 폭력은 아이들을 집어던지는 부모의 충격적인 모습으로 소설에 재현된다. “날아서 눈더미에 박힌 적이 있”(「무명(無名)」 87면)는 이순일의 유년기 기억은 세대를 넘어 다른 가정에서 성장한 하미영의 기억 속에서도 유사한 양상으로 재현된다. 품에 안은 아기를 몇번 어르다가 던지는 어머니, 그것을 방치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지닌 하미영은 가족폭력의 트라우마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이렇듯 세대를 건너가며 반복되고 확장되는 가부장적 관습과 폭력으로 인물들이 겪는 상처는 첫머리에 놓인 「파묘(破墓)」를 시작으로 연작 전편에 무겁게 드리워진다.

「파묘」는 연작 전체를 가로지르는 시대 상황을 압축하면서도 개별 작품으로서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준다. 황정은 소설의 고유한 시적 상징, 생략과 암시의 화법이 장면마다 섬세하게 새겨져 있으며, 가족관계나 성별 구분에 묻히지 않도록 등장인물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는 방식은 역사 속에 ‘망실된 이름’을 복원하려는 시도와 연결된다. 어린 시절 보호자가 되어준 조부의 묘를 돌보던 이순일이 자신의 세대에서 그 일을 끝내려는 ‘파묘’의 과정은 동행하는 딸 한세진의 시선을 통해 한층 입체적으로 부조된다. 가족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한세진의 독립적 위치는 이순일과 한영진이 여성으로서 겪는 삶의 곤경과 갈등을 다각도에서 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해준다. 한세진은 “집 구석구석에 쌓이고 있는 엄마의 피로와”(22면) 언니 한영진의 고된 노동의 시간을 이해하면서도 그들의 세계와 동화되기를 거절하는 주체적인 인물이다. 한세진이 어머니의 성묘 과정에 동행했던 것도 “엄마에게는 거기가 친정일 것”(17면)임을 깊은 마음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파묘」의 한세진과 달리 「하고 싶은 말」의 한영진은 그에게 가족의 경제를 부양하는 장녀의 삶을 기대해온 어머니를 향한 깊은 원망을 지니고 있다. 이순일이 감당해온 희생과 헌신의 삶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여 한영진에게 고스란히 세습된다. 장녀에게 경제적 부양의 짐을 지우면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81면)라고 강조했던 이순일은 아들 한만수가 자기 뜻대로 뉴질랜드에 가서 살게 놓아둔다. “왜 나를 당신의 밥상 앞에 붙들어두었는가”(83면)라는 한영진의 원망은 칠십대에 들어선 이순일이 다시 한영진의 아이들을 돌보느라 아프고 늙어간다는 사실을 알기에 차마 겉으로 발화될 수 없다. 한영진은 “수십년 살림으로 손이 굳고 곱았는데도 뜨거운 것에 닿으면 여전히 뜨”(「무명」 141면)거운 이순일의 고된 삶을 알면서도 “내 거를./쓰겠다 말겠다 말도 없이 가져가서, 망가뜨리고, 버리”(140면)는 어머니의 무심함에 대한 원망을 버리지 못한다.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138면)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142면)

 

「무명」에서 이순일의 고된 삶은 망각 속에 묻힌 수많은 ‘순자’들(순일, 은일, 순자 등등)의 삶을 대변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조부와 살다가 고모네 집 식모살이를 하던 중 한중언과 결혼하게 된 이순일은 독일로 가서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줄곧 순자로 불렸던 그녀는 결혼하면서 자기 이름이 순일인 것을 알게 된다. 이순일이 지닌 자책과 죄의식은 자기도 모르게 자식 세대에게 물려주게 된 ‘나쁜’ 세계에 대한 자각과 연결되어 있다. 딸 역시 자신의 삶에 여전히 어머니의 돌봄과 희생적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원망을 내뱉지 못한다. 이들은 가족 내 돌봄노동과 여성의 삶이 지닌 모순이 단순히 소통과 사랑을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소설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서 덮고 지나가기 쉬운 돌봄과 희생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직시한다.

그런데 이렇듯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는 가부장제 관습에 대한 치밀하고 날카로운 해부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파묘」 「하고 싶은 말」과 구별되는 「무명」의 증언적 특성에 대해서는 비평적으로 좀더 따져볼 여지가 있다. 「무명」은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는 여성의 삶에 가해진 폭력과 수난의 현실을 숨 가쁜 연대기의 기록으로 압축해 보이는데, 이 과정에서 인물을 조명하는 객관적 시선의 장치가 자리할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8 이순일이 겪은 고난과 억압은 한영진을 비롯한 자식들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압도적 과거로서, ‘말할 수 없는’ 세계로 닫혀 있다. 그 점에서 정홍수의 해석처럼 이순일의 ‘파묘’는 이미 오래전 마음속에서 완수된 과거의 행위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9 이순일이 겪어온 억압적 노동이 내면적 회상에 의해 재현되는 방식은 고유한 역사적 해석을 끌어내기보다는 종래의 고통받고 수난을 겪어온 여성 기록으로 일반화되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아쉬움은 이어지는 한세진의 서사에 그려지는 이모할머니 윤부경과 그 자손인 노먼, 제이미의 삶에 대한 형상화에도 일정한 한계로 작동한다.

그리하여 『연년세세』의 현재성은 「다가오는 것들」을 이끄는 한세진의 몫이 된다. 이순일과 한영진이 감당해온 돌봄과 노동의 삶을 바탕으로 한세진이 감각하는 실질적인 삶의 전환적 순간들을 타진하려는 시도는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한기욱이 짚은 것처럼 『디디의 우산』이 남긴, “페미니즘 운동과 촛불혁명이 어떻게 만나야 서로의 혁명적 잠재력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가”10라는 과제는 『연년세세』를 통해 직접적으로 탐구되고 있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디디의 우산』의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가 보여준 혁명에 대한 상상력의 유보적 성격을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디디의 우산』의 “파도가 가고 남은 자리에 이 식탁이 남는 광경”(315면)에는 강경석이 말했듯이 “고양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발산하는 데서 보듯 여전히 진행 중인, 그래서 아직은 그 한계가 지어지지 않은”11 촛불혁명의 가능성이 담겨 있다. 그러나 ‘촛불의 시간’을 진행형으로 볼 것인가, 과거형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내적 갈등은 『디디의 우산』에서 그러했듯이 『연년세세』에서도 여전히 회의적이고 흔들리는 시간으로 저장되어 있는 듯하다. “헌법재판소의 탄핵판결로 혁명이 도래했다거나 완성되었다는 ‘사람들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그 자체로 필요하면서도 그것만으로 촛불혁명에 충분히 부응한다고 말하기 어렵다”12라는 백낙청의 논평은 『디디의 우산』을 넘어 『연년세세』에 더욱 필요한 문제제기로 되돌아온다.

작품에서 ‘촛불의 시간’에 대한 사유는 한세진의 직접적인 목소리보다는 주변 인물들의 발언을 통해 경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뉴질랜드에서 ‘모범적’ 노동자로 살고 있는 동생 한만수, 뉴욕 북페스티벌에서 만난 교민, 이모할머니 윤부경의 아들 노먼과 그의 딸 제이미 등 「다가오는 것들」이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있는 ‘바깥’의 시선은 ‘내부’의 혁명 감각을 반성하고 회의하는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 여성이 살아온 차별의 역사를 ‘촛불혁명’을 포함한 역사적 변화에 결부하려는 소설의 성찰적 시선은 ‘양공주’라 불리며 타국에서 차별을 견뎌온 윤부경(안나) 가족의 삶을 부각한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이 소수자의 삶을 누락하고 있다는 발언 자체만으로 윤부경 가족과 하미영 등 소외되고 상처받는 소수자의 삶이 온전히 재현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무명」의 서사에 작동하는 한계이기도 하다.

뉴욕의 북페스티벌에 초대된 한세진은 현장토론에서 던져진 어떤 이의 질문에 당황한다. 그는 “한시간 반을 여기 앉아 당신들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국인 입양아, 한국의 입양아 수출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다. 당신들은 한시간 반 동안 그것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165면)라고 말한다. 순간적으로 느낀 당혹감에 대해 한세진은 하미영에게 “평생 잊지 못할 부끄러운 질문을 받았고, 무지를 사과했다고”(179면) 고백하지만, 실상 “한국의 민주화와 국가 폭력과 IMF 이후 노동의 비정규직화가 한국의 창작자들에게 미친 영향, 2016년의 촛불집회와 광장의 경험과 대통령 탄핵은 각자의 장르, 혹은 개별 작업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164면)에 대한 고민과 ‘한국의 입양아’ 문제는 별개의 층위에 놓인 이야기가 아니다. 거대 역사와 구별되는 부문적 주제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이를 풀기 위해서는 ‘부끄러움’에서 나아가는 그 이상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나쁜 걸 나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인데 애를 써야 하고, 애쓸수록 형편없이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168면)라는 하미영의 방어적인 비관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유로 임하는 ‘촛불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부끄러움과 고민은 지나간 혁명이 아닌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혁명에 대한 자각을 통해 출구를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과정은 소설이 말하듯이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182면) 살아가는 한복판에서 비로소 다시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3. ‘관계적 노동’으로서의 돌봄과 자기발견: 이주혜 『자두』

 

코로나19 이후의 상황이 구체화한 사회적 돌봄의 위기는 가사노동과 비생산노동으로 묶여 있는 여성 주체의 돌봄의 문제를 전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의료현실과 연동된 간병 문제는 가족 내 불평등한 성별체제와 연결되어 사회구조적인 모순을 드러냈다. 이주혜의 『자두』는 시아버지를 간병하고 돌보는 이야기와 여성의 자기발견 서사를 긴장감 있게 결합한 수작으로서 ‘관계적 노동’으로의 돌봄에 대한 폭넓은 소설적 성찰을 펼친다. 이 소설은 코로나19가 야기한 직접적인 상황에 한정되지 않고 가족과 사회에서 그동안 축적되어온 여러 돌봄 위기 상황을 다각도로 바라보게 해준다.13

소설의 서두는 프리랜서 번역가인 ‘나’가 맡은 책 이야기로 시작한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3월 봄밤에 두 여성 시인이 돌이키기 싫었을 지난날의 상실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사실”(17면)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지만 끝내 실패했던 어느 여름의 이야기”(20면)로 연결되는 이 작품은 두 여성의 만남과 유대, 그리고 불합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결단이라는 일견 친숙한 서사적 방향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적 각성 구조의 서사를 직접적으로 차용한 이 소설에 깃들여진 시대성은 팬데믹 이후 더욱 민감해진 돌봄 위기의 상황, 그리고 가족 간에 강요되는 감정적 친밀성, 인간의 존엄사를 둘러싼 철학적 질문 등의 폭넓은 주제로 연계된다.

주인공의 회상 속에서 1994년의 폭염을 떠올리게 하는 어느 무더운 여름의 간병기는 담도암 환자인 시아버지의 입원과 병간호를 계기로 가부장적 가족구조의 실체를 발견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14 여성 화자가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가부장적 제도의 단단한 습속이 폭로되는 서사 방식은 이 소설뿐 아니라 강화길을 비롯한 최근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다루어지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치매 간병 문제를 통해 가족 간 돌봄노동의 지난한 과정과 감정적 고통을 다룬 작품으로 박완서의 「해산바가지」(1985)도 떠올려볼 수 있다. 여기에 이주혜의 『자두』는 핵가족 시대의 가족 돌봄과 의료현실이라는 시대성을 더하며 직업의 세계로 분류된 돌봄노동의 현주소에 대해서도 꼼꼼한 묘사를 적어 넣는다.

소설은 프리랜서 번역가의 임금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당 8만원’이 간병도우미의 입장에서는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간병도우미인데도 남성과 여성이 차별되는 현실을 실감나게 전달한다. 의료환경이 달라졌지만 가족이 아닌 ‘간병’도우미의 노동에도 암암리에 감정적 헌신과 돌봄이 끊임없이 요구되고, 일상생활을 함께하는 가족에게는 더욱이 당연한 의무처럼 돌봄노동이 놓여지는 상황이 날카롭게 제기된다. “무엇이 강제이고 무엇이 자발인지를 모호하게 만드는 관계적 노동으로서의 돌봄 노동”15이 야기하는 곤경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인 화자의 관계에서 도드라지게 체감된다.

비교적 자유롭고 평등하게 결혼생활을 유지해왔다고 믿는 ‘나’는 시아버지의 간병 과정에서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구습과 기만적 언사들을 자각하게 된다. 평소에 “이제 너를 며느리가 아니라 딸로 대할 것이다”(27면)라며 “로맨스그레이의 현신”(28면)과도 같이 다정한 모습을 보였던 시아버지는 병이 진행되어가면서 의식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평소 품었던 속마음을 드러낸다. “저 애가 우리 집에 시집와서 지금껏 뭐 한 일이 있나? 박사님과 결혼하면서 열쇠 세개를 해왔나? 애를 낳았나? 저 애 때문에 우리 집 귀한 손이 끊겼다.”(100면) 그동안 아이를 낳는 문제, 시부모를 모시는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생각한 ‘나’는 그것이 모두 결정적 계기를 유보해두고 지연되어온 것이었을 뿐임을 확인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가부장제 관습의 기만에 대한 폭로는 인간의 존엄한 죽음에 대한 고민을 깊이 파고드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의 극적 흐름을 만드는 시아버지의 일시적인 ‘섬망’ 증세는 취약한 생명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면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환기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불면, 뇌 기능 장애, 주의력 저하, 환시, 환청으로 압축되는 섬망은 의학적 증세를 넘어서 이제야말로 삶과 죽음을 가르는 본격적인 간병의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의사보다도 빨리 시아버지의 섬망 증세를 눈치채는 간병도우미 황영옥은 이 혼란스러운 간병의 과정에서 혈연가족주의로부터 철저히 소외되는 주인공과의 연대감을 형성하며 그녀의 편이 되어준다. 섬망으로 인해 젊은 날 사랑과 관련된 ‘자두’의 기억과 현재가 뒤섞이는 혼란을 겪고 있는 시아버지에게 황영옥은 “죽어요…… 죽어요……”(77면)라는 섬뜩한 말을 되뇐다. 물론 이는 이후에 황영옥의 독백 형태로 자식들 보는 앞에서 좋은 날 편안하게 환자가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으로 밝혀지지만, 시아버지에게 그것이 온전하게 소통될 리는 없다. ‘죽어’라는 말은 영옥의 사연을 모르는 시아버지나 그를 간호하는 ‘나’에게 늙고 병들고 사위어가는 생명에 대한 모욕과 멸시로 들릴 따름이다. 결국 시아버지는 영옥의 주문을 새기기라도 한 듯 자신의 소변을 받아내는 ‘나’ 앞에서 모욕과 수치를 느끼며 “죽어라…… 죽어…… 콱……”(113면)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이 장면은 죽음의 공포와 불안 앞에서 하염없이 나약해진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무참”(같은 곳)한 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마음에도 어느새 스며든 대사를 환자의 입으로 듣게 되는 그 섬뜩한 순간은 사건이 지나간 후에도 “깨끗이 지우는 게 불가능한 어떤 감정”(115면)으로 남게 된다. 온갖 상처와 혼란의 사건들을 통과하여 맞게 된 시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아버님, 잘 가요. 다정했던 기억만 간직할게요”(120면)라는 화자의 애도는 사실 그 자신의 마음에 숨은 기만과 허위를 응시한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갔던”(114면) 시아버지를 간병했던 한달의 체험은 ‘나’로 하여금 자신이 간과해왔던 결혼생활의 이면을 보게 했다. 효도의 의무와 죄책감을 관습적으로 나누려는 남편, 장례식장에서도 가부장적 강요를 습관적으로 되풀이하는 친척들은 애도의 시간마저도 방해한다. 한때는 꿈과 욕망을 지녔던 청춘이었으며 이후에는 자식을 태양처럼 알고 뒷바라지하며 쉼 없이 살아온 한 연약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결국 그녀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이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 새로운 출발을 꿈꾸는 서사의 전환은 단순한 제도적 탈출로만 한정할 수 없다.

이혼 후 떠난 북해도 여행에서 ‘나’는 혼돈과 고립의 한복판에서 자신에게 유대와 위로를 선사했던 영옥에게 안부엽서를 띄운다. “영옥씨, 아침에 잘 일어나고 있나요?”(133면)라는 인사는 죽음의 과정을 둘러싼 인간의 나약한 마음과 기만적 허울을 들여다본 자들이 나눌 수 있는 연대의 말로 읽힌다. 그것은 혈연가족주의의 폭력을 겪은 이들이 나눈 공감이기도 하지만, 환자의 보호자와 간병도우미였던 각자의 위치를 넘어 병과 고독 앞에서 취약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생명 존재로서의 인간을 마주한 과정에서 얻게 된 유대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돌봄의 상상력은 간병과 가족의 문제를 넘어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시선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이란 정말로 옆에 있어주는 것, 곁을 지키는 일”(32면)이라는 소설 초반의 전언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의지하고 돌보는 행위가 취약한 개체로서의 생명 존재를 겸허하게 돌아보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거치면서 비로소 그 두께를 획득하게 된다. 어떤 존재든 생명체로 살아가는 동안 노쇠와 질병과 고독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돌봄의 행위는 그 취약함을 인정하는 가운데 서로를 돌보는 촘촘한 사회적 장치와 연결망을 필요로 하는 공동의 작업일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돌봄의 상상력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가 모색하는 새로운 출발은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전환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4.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연년세세』와 『자두』가 펼치는 여성과 가족의 이야기는 팬데믹 이후 한층 심화된 젠더 불평등의 문제를 핵심으로 지금 우리의 삶이 필요로 하는 근본적인 전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돌봄이 중심이 되는 사회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며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며, “이때 변화란 대전환의 일부가 아니라 그 자체가 대전환이다”16라는 전언이 간곡하게 다가온다. 사회 변화를 위해서는 다양한 종류의 의제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 우선되듯이 문학작품을 대할 때 역시 여성과 가족의 서사 안에 담긴 생명, 노동, 돌봄의 다양한 이슈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고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전쟁과 분단을 겪은 어머니 이순일 세대의 삶을 응시하는 『연년세세』의 소설적 시도는 촛불의 시간을 매개로 하여 현재적인 관점에서 근대와 여성의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역사 속 여성의 삶에서 돌봄과 연대를 어렵게 하는 불합리한 삶의 조건들을 차근히 묘파하는 이 작품에서 시민의 상상력과 당사자의 목소리는 매우 중요한 소설적 자원인 동시에 또다른 차원의 과제를 풀어나갈 필요를 보여준다. 『자두』 역시 변화한 가족현실에서도 여전히 공고한 관습과 차별로 남아 있는 가부장 습속의 면면을 민감하게 묘파한다. 이 작품이 열어 보이는 돌봄의 사회적 시야는 병과 고립, 노년과 죽음,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는 발본적 차원으로 우리의 사유를 이끌어간다. 가족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가족을 넘어서는 공동체로서의 돌봄에 대한 상상력을 통해 두 작품이 벌이고 있는 기투는 지금 우리 문학이 필요로 하는 전환적 상상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연년세세』에서 이순일과 한영진 모녀의 고단한 일생을 무겁게 누르던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라는 말은 한세진에게서 “그 일 하고 싶지 않아”(「무명」 108면)라는 분명한 답변으로 전환된다. 그렇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 과연 ‘하고 싶은 일’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최근 청년현실을 다룬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당사자의 목소리를 강화한 일인칭 에세이적 서술 방식을 통해 일과 노동, 예술과 노동에 대한 다양한 사유를 전개한다. 여기에는 청년들의 삶을 제약하는 능력주의 담론의 부당함, 그리고 자기 성취 및 계발의 담론으로 포장된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짙게 배어 있다.17 이 과정에서 청년의 노동현실을 그려내고 이를 분석하는 일부 작품과 비평은 우리 다 같이 불행한 노동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식의 모호한 연대와 위로로 종종 수렴되기도 한다.18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삶의 부당함을 토로하는 이러한 서사적 발화에서 결정적으로 누락되는 것은 어떤 종류의 노동에든 자신이 실현하는 보람과 성취의 욕구가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욕구의 동력이 한편으로는 체제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힘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지닌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평등한 노동의 세계를 다루는 문학적 방식에서도 돌봄의 전환적 상상력이 새롭게 개입될 여지는 없을까. 자기치유의 서사가 내면적 독백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차원으로 공유될 수 있는 돌봄의 전환적 상상력이 필요한 때이다.

재난과 재해가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의 삶에 직격탄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진정한 돌봄의 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본주의체제에서 돌봄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성장의 원리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으며 이와 관련한 논의는 지속적인 모색과 토론의 장을 필요로 한다. 여성과 가족을 다루는 서사에서 돌봄은 모성의 분열적 경험을 포함하여 여성의 본질적 가치로 규정되곤 하는 관계성과 보살핌, 배려의 경험을 어떻게 사회화하고 공동적 가치로 이끌어낼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한다. 돌봄노동이 이상화 혹은 권력화되는 문제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의 방식 등 여러 각도의 주제 역시 우리의 문학적 사유를 자극할 수 있다. 돌봄과 연대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이상주의적인 출구가 아니라 시작하는 상상력이 되어야 하며, 완결된 정답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닌, 나날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움직임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삶으로의 전환을 꿈꾸는 혁명의 불길은 지금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다.

 

 

--

  1. 황정아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창비 2021, 20면 참조.
  2. 문학비평에서도 팬데믹 상황으로 심화된 사회적 돌봄의 위기 현상, 가부장제 가족구조의 억압, 성적 불평등과 폭력의 문제, 성소수자와 차별의 이슈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비평적 해석이 집중되고 있으며, 청년현실 논의도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3. 한 예로 청소년인권 활동가인 공현은 “정치를 냉소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도 정치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로 이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누군가를 지지하고 투표를 하는 것보다도 더 큰 힘을 지니는 정치행위인 것 같”다고 말한다. 공현·김주온·이길보라·이진혁 대화 「청년, 한국사회를 말하다」,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91면 참조.
  4. 「애끓는 故이선호씨 부친 “살려고 일하지 죽으려고 일하나”」, 연합뉴스 2021.5.13.
  5. 김현미 「코로나 시대의 ‘젠더 위기’와 생태주의 사회적 재생산의 미래」, 『젠더와문화』 13(2), 2020.12, 42~43면 참조.
  6. 백영경 「탈성장 전환의 요구와 돌봄이라는 화두」,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창비 2021, 52면 참조. 인용은 63면.
  7.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2020, 53면.
  8. 「무명」에서 드러나는 이순일의 연대기를 “한 여성이 현대사를 통과하면서 체험한 시대의 질감을 냄새와 맛, 촉감 등의 구체적인 몸의 감각을 경유하여 정교하게 재생하는”(전기화) 성취로 읽거나, 딸들의 이야기와 달리 “직접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입체성을 지니게”(오연경) 되는 것으로 읽는 의견도 가능하다.(김태선·오연경·전기화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384~85면 참조) 그러나 여성과 소수자의 삶을 역사적인 시공간에서 압축하여 다룰 때 당사자의 발화 자체가 핍진함을 넘어 어떤 문학적 재현의 성취를 이루는지는 좀더 살펴져야 할 문제이다.
  9. 정홍수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순일의 서사가 딸들의 이야기를 넘어 한만수의 세계와 쉽게 만나지 못하는 지점을 세심하게 짚고 있다. 정홍수 「다가오는 것들, 그리고 ‘광장’이라는 신기루: 황정은 『연년세세』/김혜진 『너라는 생활』」, 『문학과사회』 2020년 겨울호 350면 참조.
  10. 한기욱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디디의 우산』을 읽고」,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4면.
  11. 강경석 「혁명의 재배치」,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22면.
  12. 백낙청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 320면.
  13. 선우은실 역시 이 작품이 “소설이 구현하는 ‘가부장제와 여성 젠더’의 층위는 ‘전염병적 위기의식’이라는 현재적 공통감각 위에서 담도암이라는 병으로 인한 죽음과 그것 가까이에 있는 여성 서사로 독해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선우은실 「세계적 위기의 공통감각 위에서 읽는 질병 시대의 여성 서사」, 『작가들』 2020년 가을호 139면 참조.
  14. 여기서 주인공의 내적 회상에 작동하는 ‘1994년’과 현재의 연결이 “탈냉전에서 비롯한 ‘자유화’ ‘민주화’와의 새로운 결합을 통해 스스로를 ‘버전업’함으로써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가부장제의 시대성을 보여준다는 해석을 유용하게 참고할 수 있다. 강경석, 『자두』 해설 142면 참조.
  15. 김현미, 앞의 글 59면.
  16. 백영경, 앞의 글 64면.
  17. 최근 소설에 나타난 노동의 문제설정 방식에 대한 비평적 검토로는 다음 글을 참고할 수 있다. 한영인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김미정 「노동-자본의 뫼비우스 띠와 2010년대 후반 한국소설의 일·노동」, 『여성문학연구』 52, 2021.4.
  18. 이 부분은 일부 청년현실을 다룬 작품과 비평에 작동하는 위로와 연민의 서사가 돌봄의 영역에서도 ‘자기돌봄’의 문제로만 집중되어 돌봄 논의를 소진시키고 있음을 염두에 둔 서술이다.

백지연

저자의 다른 계간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