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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임우기 『유역문예론』, 솔출판사 2022

새 옛날의 원시반본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netk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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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화, 미술에 관한 평론들을 모은 책이지만 펼치는 순간 유가의 귀신론에서 고조선 단군신화를 비롯한 북방 샤머니즘과 동학의 개벽담론을 종횡으로 누비는 저자의 독특한 문명적 사유가 900여면의 방대한 분량에 걸쳐 자못 활달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서구 또는 근대적 의미의 분과학문적 체질에 깊숙이 젖은 오늘날의 지식사회에서 얼마나 반향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세계사에서 사라졌고 개별 민족사에서조차 잊혔지만, 민족의 무의식에 남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끼치는 옛 문명의 신화”(32면)나 수운 최제우 이래의 한반도 개벽사상과 같은 정신사적 유산들을 한물간 민족주의적 우상처럼 취급하는 낡은 통념이 여전히 그리고 완강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개벽담론에 민족주의·국수주의 성향의 ‘종교’사상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도 큰 제약이다. 그것은 19세기 이래의 서구적 근대화라는 외인과 그에 대응하는 개벽담론 내부의 분화가 상호작용한 결과이지만 동서 종교 관념의 근본적 차이에서도 비롯한다. 바울신학에서와 같이 신앙적 원체험과 믿음의 선포로부터 신학적 사유와 사상적 체계화가 뒤따르는 기독교적 종교 관념이 종교 일반의 상을 과잉대표함으로써 불교나 동학처럼 사유와 각성이 신앙을 견인하는 동아시아 고유의 맥락은 사상(捨象)되곤 했던 것이다.

임우기의 『유역문예론』은 오히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관점”(33면)을 수립하기 위해 “조선 정신의 잃어버린 근원을 찾아 자주적 문예 정신의 기틀을 마련하고, 그 ‘거대한 뿌리’ 위에서 동서양의 정신들을 차별 없이 원융회통(圓融會通)하는 문예학을 탐구”(54면)한다고 역설한다. 그가 말하는 유역(流域)문예란 “‘지리 및 기후 차원만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역사·언어·생활·문화의 전통’을 간직하고 이어온 일군의 토착 주민이나 부족의 공동체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전 지구적 차원의 개념”(46면)으로 “각 유역이 지닌 고유한 주체성의 인식과 함께 문화적 원심력과 구심력을 이해하는 가운데, 각 유역이 안고 있는 지리·환경·생활·문화·역사 등에서 저마다 주민들의 공동체적 삶과 생태 상태를 존중하여 고유한 문화예술성을 살리고 유역들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평등한 교류를 꾀하는 것”(55면)이다. 따라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민족/국민국가를 전제하곤 하는 지역(local/regional)문예 개념과는 다른 스케일을 보여주며 그러한 분할선이 한층 유연했던 상고시대의 문화적 원형(archetype)이 자연스러운 관심사로 떠오른다. 이것이 종래의 문예이론으로서 신화비평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로서의 지구적 현실/근대를 극복대상으로 명확히 설정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디까지나 문예비평집이다. 아무리 독창적이고 빈틈없는 논리를 펼친다 한들 구체적인 작품분석과 평가를 통해 그 효용을 입증하지 못하면 그대로 자격미달이 된다는 뜻이다. 그의 유역문예론은 특히 시론에서 남다른 통찰을 보여주는데 본격 시론에 해당하는 글들을 묶은 2부뿐 아니라 담론 중심의 1부에서도 백석과 신동엽이 남긴 시를 예거하는 대목에서 많은 영감을 선사한다. “아득한 녯날에 나는 떠났다/扶餘부여와 肅愼숙신을 勃海발해를 女眞여진을 遼요를 金금을,/興安嶺흥안령을 陰山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34면 재인용)로 시작하는 「북방에서」(1941)의 해명하기 어려운 열거에서 그는 “백석이 서울이나 동경 같은 근대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북방 고향”으로 귀향하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의미를 새긴다. 그것은 단순 복고나 근대 문명 이전의 원시적 삶에 대한 낭만적 향수가 아니라 “원시의 화해로웠던 생명의 고른 상태로, 문명 단계를 거쳐서 창조적으로 환원하는, 새롭게 순환하는 그런 질서”(325면)로의 회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 4연의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녯날이 비롯하는때”의 ‘새 옛날’이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시간의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항상 더불어 있는 원시성”(326면)이라 해명되기에 이른다. 물론 “우럴으는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는 작품 마지막 행의 고독한 선언을 감안할 때 백석 자신이 “근대적 이성(理性者)을 넘어 ‘최령자(最靈者, 가장 신령한 존재—인용자)’로”(37면) 돌아갔다는 해석에는 재고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문명 이전이 아니라 “문명 단계를 거쳐서 창조적으로 환원”한다는 데에 “새 녯날”의 핵심이 놓여 있다는 통찰만큼은 백석 시 이해의 새 지평을 열어주기에 충분하다.

『유역문예론』은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錦江)』(1967)의 분석에서도 설득력 있는 논의를 제공한다. 특히 동학의 2차, 3차 교조신원(敎祖伸寃)운동 장면을 그린 14장에서 쏟아지는 눈송이가 억만쌍의 맑은 눈동자로 환유하는 대목을 짚어 “이 ‘눈’의 심오한 상징에 의해 동학농민혁명은 좌절의 역사에서 ‘한울’을 모신 마음으로 옮겨가게”(406면) 된다고 적시한 것은 깊고 날카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문명 단계를 ‘거친’ 창조적 환원으로서의 원시반본이라는 테제는 이 신동엽론에서 더욱 요령을 얻고 있는바, 저자가 적절히 인용한 「시인정신론」(1961)에서 보듯 “시인은 차수성 세계(次數性, 유사 이래의 문명역사 전체를 뜻함—인용자)에 맞서 싸워야 하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고 ‘돌아오는 씨’를 거두는 귀수성(歸數性, 제자리로 돌아옴—인용자) 세계가 도래하도록 해야”(420면) 하는 존재이다. 요컨대 “대서사시 『금강』은 차수성 세계에서 싸움을 통해 귀수성 세계를 실현하고 이를 통한 ‘다시 개벽’을 이룬 원수성의 세계의 도래를 염원하는, 시간의 순환, 선회(旋回) 구조를 가지고”(420면) 있으므로 이는 차수성 세계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문명세계 이전으로 돌아감이 아니라 그러한 문명세계와의 싸움을 거친 이후 도래하는 “새 녯날”에 다름 아닌 것이다.

때로 원시반본의 담론적 틀이 승한 탓에 『금강』 14장의 한 대목인 “그날 하늘을 깨고/들려온 우주의 소리, 「비창(悲愴)」/그건 지상의 표정이었을까,/그는 그해 죽었다.”(410면 재인용)의 “그”를 차이꼽스끼 자신이 아니라 은폐된 초월적 존재로 풀이하거나 김수영의 「공자의 생활난」(1945) 같은 작품이 “유가의 인식론과 함께 음양론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466면)고 파악하는 등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도 없지는 않다. 그러다보니 담론적 긴박이 적절히 통제되어 작품 자체의 다양한 표정들이 살아나는 윤중호론(「非근대인의 시론」)이 상대적으로 더 자연스러운 감동을 주는데 일단 이 글은 대상작품을 선(選)하는 안목부터 신뢰감을 준다. 인용된 작품을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윤중호 시세계의 요체를 접한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자본주의 근대 또는 서구 물질문명(과 과학사상)에 대한 단순 대립항으로서의 귀신론이나 북방 샤머니즘, 한반도 개벽사상이 아니라 서구 물질문명을 통과한 ‘새 옛날’로서의 그것을 대담한 스케일로 논리화하면서 구체적 작품을 통해 비평적 성과를 냈다는 점에서 『유역문예론』의 문제의식은 ‘어느 방외인 문학평론가’의 서재 밖에서 좀더 널리 검증되고 깊이 심화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