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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대전환의 한국사회,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이행기를 감당하는 지혜

『창작과비평』 200호 기념 심포지엄 토론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평론집 『리얼리티 재장전』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지난 4월 14일, 『창작과비평』 200호 기념 심포지엄에서 유재건 조효제 백영경 황정아의 발제에 이어 종합토론이 진행되었다. 이남주 『창작과비평』 편집주간의 사회로 진행된 토론에는 대구대 김용휘 교수, 시인이기도 한 서울과학기술대 나희덕 교수, 서울대 주병기 교수가 지정토론자로 참여했다. 첫 테이프를 끊은 김용휘는 유재건의 발표가 맑스 『자본론』의 ‘본원적 축적’ 개념을 새롭게 환기한 데 먼저 주목했다. 그는 산업혁명 이전 자영농들에게서 그 일단을 보이기도 했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과 그것을 재건하려는 맑스의 전망이 오늘날 대전환이라는 과제 앞에 선 우리에게 어떤 함의를 지니며 어떤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가와 같은 묵직한 물음을 던지며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97)나 질비오 게젤(Silvio Gesell, 1862~1930),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다. 유재건이 집중 검토하고 있는 맑스와 월러스틴도 흥미롭지만 약탈적 성격을 더해가고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대해 발본적 사유를 전개하려면 시장이냐 국가냐 하는 대립보다 민(民)의 영역의 확충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지역자치와 결부되거니와, 순환성·상호성·다원성을 토대로 지역 중심의 자립경제를 도모해야 한다는 나까무라 히사시(中村尚司)의 논의 등도 그 예다. 시장, 국가, 민의 조화를 중심에 두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직접민주주의 정치로서의 주민자치라는 전망은 실제로 통과되진 못했지만 문재인정부 시절 국회에서 발의되었던 주민자치법에서도 맹아를 보인 바 있다.

아울러 그는 압축성장한 한국이 압축소멸 위기에 처했다는 조효제의 진단에도 공감을 표하며 지금 여기에서 실천 가능한 이행의 로드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에 남한의 현실에만 착목할 것이 아니라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차원의 전환론으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 현실에 밀착하여 대전환을 논한다면 남북통합 과정을 누락하고는 구체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백영경의 돌봄사회로의 전환 논의에서는 돌봄소득이라는 개념과 발상이 흥미롭지만 이상주의적인 일면이 있지 않은가 의문을 표했다. 돌봄소득이 단순한 보상의 의미로 한정되지 않고 노동시간의 축소 등과 결부되어야 하는 문제라면 결국 보편적 기본소득 논의로 나아가야 하지 않는가 하는 취지였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들이 대개 서구의 탈식민, 탈성장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한국의 생명사상에서 개념을 끌어올 때 더욱 풍부한 논의가 가능해질 수 있으리라는 의견도 덧붙였다. 가령 돌봄이라는 용어도 ‘살림’이라는 용어로 대체해볼 것을 제안했는데, 돌봄노동의 제공자는 시혜적이 되고 수용자는 대상화되고 마는 돌봄 개념에 비해 서로를 살리는 호혜적 경제 개념으로서의 살림이 성장이냐 탈성장이냐 하는 이분법적 악순환에 빠지곤 하는 안티운동으로서의 탈성장론 등에 비해 한결 원만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을 본래의 결대로 모시고 공경하는 살림의 문화운동이 기존 시민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도 참조가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돌봄을 사회의 중심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말을 모심과 살림을 사회의 중심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말로 바꾸면 좀더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두번째 지정토론을 맡은 나희덕은 유재건의 발표에 등장하는 1:19:80이라는 사회적 부(富)의 분포 문제와 관련해 먼저 질의했다. 지난 2년간 상위 1%의 부자가 하위 99%가 벌어들인 소득의 2배 이상을 벌었다는 최근의 언론보도를 인용하며 어쩌면 발표자인 유재건이 상정한 19%의 중간층이 이미 양극 분해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19%와 80%의 연대를 말하는 유재건의 구상이 어떻게 유효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자연스레 나올 수밖에 없다. 조효제의 발표에 관해서는 사회생태 전환에 있어 이행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착목했다. 그러면서 현 정부의 후꾸시마 오염수 방류에 관한 입장이나 원전 선호 정책 등에서 알 수 있듯 생태전환이라는 근본 문제가 정권의 이해득실에 종속되어 퇴행하는 현 상황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를 물었고, 아울러 위기가 오기 전에 태어난 이행기 세대와 위기 속에 태어날 미래세대를 구분하는 발표자의 시각이 임박한 위기의 중대함에 비해 안일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백영경의 돌봄사회론에 대해서는 앞서 토론한 김용휘에 이어 돌봄이라는 용어 문제를 먼저 거론했다. 돌봄은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사이의 위계가 이미 전제된 개념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돌봄소득이라는 발상이 역시 흥미로운데 실제로 검토되고 또 실험되고 있다면 구체적 사례들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와 함께 돌봄소득 개념의 한계나 난점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설명을 요청했다.

나아가 황정아의 발표에 대한 논평을 이어가면서는 발표문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한 루프적 서사의 문제를 먼저 짚었다. 그것이 얼핏 보기엔 선형적 근대서사에 대한 대안서사의 일종처럼 보이지만 실은 ‘대안 없음’ 혹은 미래 상실의 사태를 반복하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 발표자의 기본입장이라면 토론자 나희덕은 정반대의 의문을 제기한다. 말하자면 현재는 역사적 전망과 대안이 없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어떻게 제대로 살아가고 또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정지아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관한 황정아의 논의가 미래 상실을 말하는 서사들의 마땅한 대안이라기보다 오히려 전통적 리얼리즘의 반복이 아니냐는 요지였다. 물론 정지아의 해당 장편이 익숙한 서사적 시간성을 해체하는 미덕과 함께 지역 또는 장소성에 대해 각별히 주목하고 있다는 면에서 좋은 작품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지만, 발표문에 원용된 아미타브 고시의 『육두구의 저주』 등에서 말하는 서사와는 거리가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고시가 근대성이 지워버린 비인간의 목소리들을 본연의 장소로 되돌려놓는 이야기의 힘에 관해 강조한 데 비해 정지아의 작품은 여전히 인간중심의 서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게임서사나 SF 등 최근 주목받고 있는 서사 유형에 대한 발표자의 입장을 묻기도 했다.

마지막 토론자로 나선 주병기는 점증하는 위기 속에서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자들조차 자본주의 경제의 가치체계가 지나치게 단선적이라는 문제의식을 폭넓게 공유하고 있다고 전제하며 논의를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는 연평균 6% 이상으로 급속히 성장해왔는데 이 과정에서 지구 자원을 황폐화하며 글로벌 분업체계와 공급망 질서가 형성되어왔고 절제의 미덕 없이 과소비와 낭비를 부추기는 경제 패러다임이 만들어졌다. 유한한 지구 자원이 이러한 소비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의문인데, 우리가 경제성장의 척도로 사용하는 국내총생산(GDP)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와 서비스만을 포함하므로 경제성장이란 달리 말해 자급자족과 비시장적 경제활동을 시장경제활동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GDP에는 고된 노동 가운데 상실되는 인간존엄, 온갖 차별이 만들어내는 분노, 아름다운 자연과 생명, 깨끗한 물과 공기, 존경과 신뢰, 사회적 연대의 가치 등이 누락되거니와 21세기 글로벌 계급질서를 청산하고 글로벌 민주주의 문제와 기후위기 해결, 자본주의 대전환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가치법일 수밖에 없다고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병기는 네명의 발표자가 자본주의의 전환, 민주주의, 새로운 가치체계에 의한 사회적 연대의 복원 등을 논의한 데 공감을 표하며 새로운 보상체계, 평등한 조세정책, 분권화된 시스템에 의한 시장의 통제가 중요함을 지적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이러한 변화들을 아울러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점차 자본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것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에 대한 과세 문제에서 보듯 자본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나가기 위해서는 국가 간 협력이 필수인데 글로벌 거버넌스, 국가 간 민주주의가 여기서 관건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황정아의 서사론을 거론하며 어쩌면 문학에서 말하는 선형적 서사의 한계라는 것이 경제학이라는 ‘스토리텔링’의 한계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황정아가 인용한 고시의 발언, 즉 “지구에서 실제로 고갈된 것은 지구의 자원이 아니라 (…) 의미”라는 문장이 일러주듯이 소비자이자 시민으로서 자연생태계의 가치를 인식하지 않으면 그 가치를 존중하는 질서나 경제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지정토론을 마무리하며 사회자가 적절히 압축했듯 대단히 폭넓은 논의가 오가는 가운데서도 ‘가치의 재배치’라는 공통의 의제가 도출되었으며 이것이 자본주의 대전환 또는 이행의 구상에서 필수적이라는 공감대 또한 이루어졌다. 청중토의로 넘어가기 전에 지정토론에 대한 발표자들의 간단한 응답이 있었다. 유재건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대전환에 관한 큰 틀에서의 토론이 국지적 논의보다 중요해진 시기임을 강조하며, 복합위기가 거론되고 있는 한국사회를 대상으로 할 때에도 그 퇴행적 측면만을 볼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그리고 1:19:80이라는 계층 구분에 대한 나희덕의 문제제기에 대해 덧붙이기를, 일국 단위에서가 아니라 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 현재의 한국인 다수가 19%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세계사적 역할이 요청된다고 역설했다.

조효제는 현재 한국사회의 담론지형 가운데서 이른바 전환론이 여전히 소수라는 점을 먼저 환기했다. 그 소수의 전환론 중 다수를 차지하는 논리가 오히려 근대적이고 선형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에 가급적이면 거기서 덜 다루어진 주제에 집중해보자는 것이 이번 발표의 의도였다고 밝혔다. 위로부터의 선형적 이행 로드맵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 있는 반면 아래로부터의, 그러니까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이행기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비선형적 차원에 대한 문제의식은 희박하지 않았는지가 골자인 셈이다.

백영경은 최근 들어 돌봄담론이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그것을 말하는 것만으로 대전환을 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너무 빨리 자리 잡아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피력하며 자신의 발표 취지가 현재까지의 돌봄담론에 대한 비판적 개입임을 강조했다. 구체적 노동부터 가치 개념까지 포함하는 돌봄 개념의 포괄성이 외려 토론의 구체성을 희석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며, 전환을 말하면서도 복지의 확대 같은 좁은 방안으로 결론지어지곤 하는 현재의 돌봄담론으로 대안을 논하기는 어렵다는 점도 덧붙였다. 돌봄 논의를 사회와 생태의 관계나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성장주의적 가치 등을 모두 재점검하는 과정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황정아는 나희덕의 문제제기에 답변하며 삶과 죽음을 개인적으로 수긍하고 배우는 차원과 집단적 미래 상실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 다르다고 전제하고, 발표에서 예로 들었던 게임서사 등이 전자를 말하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우회적으로 후자를 강조하는 방식일 수 있음을 지적했다. 아미타브 고시의 논의에 대해서도 부연했는데 비인간이라는 주제가 더욱 부각될 필요는 있지만 비인간의 활력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실은 문학이 오래도록 해온 역할이며 기존의 문학이 모두 인간중심주의의 산물인 듯 말하는 것은 단순논리라는 요지였다.

청중토론은 일본의 사이또오 코오헤이(齋藤幸平)를 소개하며 조효제의 논의와 비교한 독문학자 정치창의 논평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날 심포지엄 자리에서 분단체제에 관한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한 점, 그리고 우리 농경사회가 보유하고 있던 가치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우리 문학계나 지식계에 만연한 농업에 대한 무관심이 우려스럽다는 점을 덧붙였다. 인문학자 정혜정은 서구 자본주의 발전사에서 부르주아계급이 탄생한 경로와 한국사회의 경우가 크게 다르다는 점을 환기하면서 1:19:80이라는 계층 구분에 대해 실제로 19%의 중간층이 80% 하층과의 연대보다 1% 상층을 지향하는 쪽으로 이미 기운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피력했다. 아울러 조효제의 발표에 활용된 서구적 개념들이 동학을 위시한 고유 사상의 언어로도 대체 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백낙청은 조효제의 발표에서 선형성 논의가 단순화되지 않고 선형적 정책 추진과 비선형적 노력이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 중요했다고 평가하면서 지금 이 시기가 이행기임을 천명한 점에도 공감을 표했다. 유재건의 발표에 관해서는 토론과정에서 1:19:80의 비율에 대한 의문이 많이 제기되었지만 20:80의 대립 대신 1:19:80으로 표현한 것 자체가 불평등의 심화과정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현 자본주의체제에서 19%의 중간층 없이는 1%의 독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분이 유의미하다고 짚었다. 특히 자본주의가 이미 형성된 자유농민층을 해체하면서 발생했다는 점을 맑스의 본원적 축적론을 통해 주목한 것이 주효했으며 영문학의 고전작품들을 통해서도 그러한 과정을 엿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고대에서 봉건제로 또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주류서사 가운데 지워지곤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자작농의 세계라는 측면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성도 제기했다. 조선시대만 해도 자작농 중심의 질서였고 또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나 신경숙의 『아버지에게 갔었어』(창비 2021) 같은 작품이 그리고 있는 것도 아직까지 남아 있는 자작농의 세계라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서구보다 자작농을 훨씬 중요시해온 한국사회에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탐구할 필요도 있다는 제언이었다.

종합토론은 유재건과 조효제의 간략한 부연으로 마무리되었다. 먼저 유재건은 맑스가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자영농에 대해 그 해방적 성격을 보지 않았는가 추정한다면서 원시공산제의 고차원적 회복을 말하는 사이또오 코오헤이나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생각이 『자본론』의 실상과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조효제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행기가 언제부터인지를 구체화했다. 자본주의 차원에서는 20세기 말부터 심화되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기후-생태 위기 차원에서는 1992년 기후변화국제협약이 나왔을 때부터 우리가 이행기에 접어들었음이 명확해졌다고 말했다. 더불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일견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듯한 담론과 실천들을 적절히 배합해 이 시기를 지혜롭게 건너가야 할 과업이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첫 발표자였던 유재건이 결론에서 월러스틴을 빌려 말하듯 자본주의에 종말이 찾아오더라도 그것이 대재앙이나 최후심판의 날 같은 것이 아닌 한, 과거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성립과정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체제로의 이행 역시 기나긴 과정이 될 것이며 그러한 혼돈 가운데서는 인간의 집단적 실천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심포지엄의 발표와 토론 가운데서 만약 모종의 합의가 가능했다면 그 또한 인간의 집단적 실천이 지닌 중요성에 대한 공감에 근거할 것이다. 15세기 말의 유럽에서 붕괴하는 봉건체제 이후가 무엇일지 알지 못했듯 우리도 이다음이 무엇일지 장담할 수 없지만 그럴 때일수록 지금 무엇을 할 것인지 물음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