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AI 시대의 출판, 새로운 협업이 필요하다
한기호
코로나19 팬데믹 3년은 인간의 생활 리듬을 크게 바꿔놓았지만 책의 매출은 그런대로 안정세를 유지했다. 아동·청소년의 경우에는 오히려 매출이 상승한 출판사가 많았다. 하지만 챗GPT 등장 이후 3년, 출판계의 매출 이익은 크게 감소했다. AI가 정보세계를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출판시장 자체가 출렁거렸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2026년 1분기, 단 3개월 동안 겪을 변화가 지난 3년의 변화보다 더 격렬할 수도 있다. 올해 여름이면 향후 출판 시장의 미래에 대한 가늠이 대략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정보화사회’라는 개념을 제창한 문명학자인 우메사오 타다오(梅棹忠夫)는 정보를 ‘하늘에 떠 있는 별’에 비유했다. 우리는 평소에 하늘의 별을 보지 않는다. 일부러 특별한 장소에서 누군가가 특정 별을 언급하며 일일이 의미를 부여해야만 비로소 가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하는 정보가 바로 그렇다. AI로 인해 정보의 가치가 0으로 수렴한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노웨어(Know-Where)’ 즉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 검색만 하면 알 수 있는 시대에 단순한 정보의 나열은 더이상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이제는 검색조차 필요하지 않다. AI에게 질문하면 바로 달콤한 목소리의 대답을 들을 수 있다. 바야흐로 ‘검색’의 시대에서 ‘질문’의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AI에게 질문해 정확한 답을 얻지 못하면 다시 질문하면 된다. 물론 그 답이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거짓 정보)인지 여부는 직접 판단해야 한다. AI가 날로 진화하고 있어 언젠가는 정확하게 대답할 것으로 추측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이런 변화는 책 생태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책은 크게 픽션과 논픽션으로 나뉜다. 논픽션은 정보를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벽두에 블록버스터는 논픽션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 몇년 동안 논픽션 분야에서 대형 베스트셀러는 자취를 감췄다. 과거의 블록버스터마저 수명이 다해 스테디셀러 목록에서도 사라지고 있다. 이러다가는 책 생태계가 소멸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심각하게 대두하고 있다. 책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출판사의 규모의 경제가 어려워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 논픽션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 AI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판단력과 통합력과 공감력도 없다. AI의 로직이나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감정에 무조건 호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위로를 줄 수는 있을지언정, 인간과 진정한 공감을 한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앞으로 논픽션은 질문력, 판단력, 통합력, 공감력 등을 키우는 방향으로 기획되어야 마땅하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는 이런 능력을 키우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앞으로 논픽션은 인간만의 능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AI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지식은 경쟁력이 없다. 결국 득도 수준의 오랜 신체적 훈련(경험)을 통해 형성된, 인간 고유의 통찰과 지혜(지성)를 담은 책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AI가 발달할수록 인간다움이 더 절실해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위기가 아니라 엄청난 기회다. 이제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능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에 비해 국내 출판시장에서 문학은 상대적으로 약진하고 있다. 2024년 10월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시작된 ‘문학 특수’는 2025년까지 이어졌다. 세계문학의 고전들이 다양하게 읽히기 시작했다. 웹소설과 웹툰까지 범위를 넓히면 힐링과 로맨스판타지가 결합한 한국소설들이 해외 독자들에게 깊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의 텍스트힙 분위기에 힘입어 시집의 반응도 점점 고조되고 있다.
덕분에 국내 에이전트들은 저작권의 수입보다 수출에 주력하기 시작했고, 문학출판사들 역시 잘 다듬은 IP(Intellectual Property, 지식재산권) 하나로 수십억원의 선인세 확보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있다. 나아가 IP를 게임이나 영상과 결합하면 매출이 폭증할 수도 있다. 이제 우리 문학은 5000만 한국인이 아니라 80억 세계인을 겨냥해 작품을 생산해낼 필요가 있다. 단순한 구조의 소설이되 캐릭터가 확실하며 강력한 스토리텔링의 작품을 확보해 초기 독자의 지지를 받아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런 작품을 어떻게 생산해내야 할까!
일본의 코단샤(株式会社講談社)는 문예1팀(순문학)·문예2팀(엔터테인먼트의 왕도)·문예3팀(엔터테인먼트의 최첨단) 간의 경계를 허물고 감각과 인력의 일체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보이스러브(BL) 작가였던 나기라 유(凪良 ゆう)의 소설 『그대 별처럼』(汝、星のごとく, 2022)을 순문학으로 포장해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것이 2023년이었다. 그해 코단샤가 내건 새로운 슬로건 ‘Inspire Impossible Stories’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면 독자를 사로잡을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런 작품을 생산하려면 고도의 협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AI의 등장 이후, 출판노동의 가치는 마치 ‘0’으로 수렴하는 듯 위태롭다. 글의 생산은 차치하더라도 번역·편집·교열·디자인 등의 노동에 대한 존중이 크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로 말미암아 1인출판이나 소규모출판의 비율이 매우 높아지고 있어서 ‘Inspire Impossible Stories’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볼 수 있다. 어쩌다 운에 의해 유망한 상품이 출현하는 것으로 규모의 경제는 불가능하다. 책은 저자(작가)의 노력으로 생산되는 것이지만 탁월한 기획자와 실력있는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협력이 없으면 최적의 상품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출판계는 의미있는 분야별 토론그룹이 거의 모두 해체되어버렸다. 3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책만사(책을 만드는 사람들)나 여편클(여성편집인클럽) 같은 조직이 형해화되어 친목모임 수준으로 전락했다. 출판교육 시스템도 거의 붕괴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정책은 방향타를 완전히 잘못 잡아서 출판의 진흥이 아니라 쇠퇴에 헌신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앞으로 출판의 단순한 업무야 AI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출판의 근원적인 가능성을 키우는 시스템은 만들어지기가 쉽지 않다.
AI는 창의적인 스토리텔링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다. AI의 알고리즘으로 그럴 듯한 소설을 흉내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문학이 아니다. 오로지 인간의 직관이 직조하는 서사만이 인간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AI 커뮤니티의 한 전문가(AI 스토리텔링 디렉터 ‘생각’)는 “AI 시대의 직관은 더이상 신비로운 영감”이 아니라 “패턴 인식과 맥락 이해가 결합한, 데이터 기반의 판단력”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판단력은 AI의 도움을 받을 줄 아는 다양한 경험의 소유자들이 협력을 통해서만 만들어낼 수 있다. 이질적인 상상력이 결합해야 하는 협력은 협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협업과 통찰이 사라진 지금, 한국출판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술결정론자들은 기술이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고 큰소리쳤지만 인류 역사상 인간이 기술에 종속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인간은 언제나 기술을 이용해 한단계 진전시켜왔다. 이번에도 출판인들은 그런 일을 반드시 해낼 것이라 확신한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2026.1.27.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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