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국악을 모르는 정책이 국악을 바꾸려 한다: 단기성과에 길들여진 문화정책
윤중강
K컬처는 개념인가, 프레임인가
‘K컬처’(K-Culture)라는 말은 2010년대 들어 등장했다. 한류를 개별 장르가 아닌 총합 브랜드로 묶기 위해, 행정·마케팅·외교 담론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다. 그러나 K컬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생긴 말이 아니다. 현상을 관리하고 포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에 가깝다. 그래서 K컬처는 ‘개념’이라기보다 ‘프레임’이다.
K컬처는 미학적 공통분모로 묶인 개념이 아니고, 역사적 연속성으로 정의되는 개념도 아니다. 문화개념이기보다 유통개념이다. ‘한국문화 전체’를 말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글로벌 유통에 적합한 요소만을 선택한다. 이 선택의 기준은 명확하다. 즉시성, 가시성, 설명 가능성, 그리고 성과다. 이 프레임 안에서 문화는 설명될 수 있어야 하고, 빠르게 반응해야 하며, 단기간에 성과로 환산되어야 한다. 문제는 이 프레임이 모든 문화를 동일한 시간 감각으로 다룬다는 데 있다.
전통을 과거로 보는 시각
문화정책 담론에서 반복되는 가장 근본적인 오판은 전통을 ‘시간의 과거형’으로만 보는 시각이다. 이 인식 안에서 전통은 언제나 ‘이미 있었던 것’이며, 현재는 그것을 활용하거나 변형해야 할 장(場)으로 설정된다. 전통을 과거로 전제하는 순간, 정책은 필연적으로 ‘보존’ 아니면 ‘가공(변형)’이라는 이분법 속으로 들어간다. 이 시각 자체가 정책 실패를 예정한다.
전통을 활용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활용이 언제나 ‘현재 바깥에 있는 것’을 끌어오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전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 ‘내재적 발전 원리’를 생각할 수 없고, 그 결과 가장 쉽게 선택되는 방식이 융합이다. 융합이 제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국악 자체를 모르는 융합 안에서 국악은 늘 샘플링된 모습으로만 존재한다.
문화부(문화체육관광부)가 말하는 발전은 ‘서구적 직선적 시간’에 매몰되어 있다. 국악의 시간은 숙성되는 시간이며, 이를 기다려주지 못하는 정책은 문화적 조급증에 불과하다.
K컬처 속의 국악: 작품이 아닌 상품
작품이 아닌 유행이자 상품으로서의 ‘이날치’는 대표적인 예다. 지금도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를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가. 같은 방식으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고 싶은가. 그러면 성공한다고 믿는가. K컬처 담론 속에서 국악은 늘 ‘원천 소스’가 된다. 그러나 원천 소스란 가공되기 전의 상태를 전제로 한다. 국악은 미완의 재료가 아니다. 국악은 완결된 미학 결과다.
국악 자체의 리듬, 시간, 호흡은 사라지고 샘플링 가능한 소리만 남는다. 그 샘플링된 소리가 얼마만큼 생명을 가지며, 얼마만큼 지속될까. 문화부는 계속해서 국악인에게 상품을 요구한다.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에게 상품을 만들라고 한다. 옷으로 치면, 고급 맞춤복인 오뜨꾸뛰르(Haute Couture)가 될 작품을 만들고 싶은데, 잘 팔리는 기성복인 쁘레따뽀르테(Prêt-à-Porter)를 만들라고 요구받는 셈이다.
문화부에게 묻는다. 국악을 존귀한 대상으로 생각하는가. 정체(正體)를 모르기에 정체(停滯)로 보일 뿐이다. 국악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니 국악이 늘 정체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국악정책의 모든 실패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국악은 지금도 생성 중이다
왜 국악만 현재를 증명해야 하는가. 국악은 지금도 생성 중인 문화다. 지금도 변주 중인 언어다. 국악은 ‘급진적 개혁’의 산물이 아니다. 국악은 ‘점진적 변혁’의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의 국악을 유지해왔다. 국악을 김치로 생각해보자. 국악에도 발효의 미학이 있다.
그런데 왜 국악은 늘 현재를 증명해야 하는가. 클래식은 ‘현대화된 클래식’이라 불리지 않는다. 재즈 역시 ‘동시대적 재해석’을 증명하려 하거나 강요받지 않는다. 왜 오직 국악만이, 지금 여기에서 연주되고 있음에도 늘 과거에 속한 존재로 전제되는가. 그래서 국악은 스스로 말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다른 장르의 문법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현재성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하기에 이제 폐기해야 할 정책언어들이 많다. ‘국악의 현대적 활용’ ‘전통음악의 대중화 및 글로벌 확장’ ‘국악 콘텐츠화’ 등. 이 언어들은 늘 국악을 소비 가능한 대상으로만 환원한다.
한국의 전통음악은 은근과 끈기의 미학 그 자체다. 국악은 늘 이 범주 속에 존재해왔다. 이제는 이 은근과 끈기의 미학을 세계에 설명해야 한다. 국악을 바꾸기 전에 국악을 대하는 태도부터 바꿔야 한다. 2026년 6월 5일은 지정 이후 두번째 맞는 ‘국악의 날’이다. 그날 국악인들이 할 일은 무엇일까. ‘국악 존엄 선언’을 해야 한다.
국악 존엄 선언: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아라
첫째, 국악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국악을 ‘재료’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국악은 재료(material)가 아니라 우주(cosmos)이며, 수단(means)이 아니라 목적(end-in-itself)이다. 국악은 성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도달해야 할 예술적 목적지이다.
둘째, 국악을 상술(商術)로 격하시키지 말아야 한다. 국악이 장사의 언어로 호출되는 순간, 예술은 길을 잃는다. 재주 부려 파는 기술을 버리고, 변치 않는 상도(常道)를 지켜라. 국악은 상품(commodity)이 아니라 작품(masterpiece)이며, 산업(industry)이 아니라 정신(spirit)이다. 수치와 효율, 조회수와 알고리즘으로는 국악의 깊이를 측정할 수 없다.
셋째, 국악은 유물(relic)이 아니라 유동체(fluidity)다. 이 단순한 구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 국악은 박제된 이미지로 전락한다. 국악은 박물관에 있지 않다. 국악은 지금도 숙성되고 있는 생명력이다. 찰나의 유행 대신, 소리 뒤에 숨겨진 깊은 심연(abyss)을 보아야 한다.
넷째, 줄기에 화려한 ‘융합’의 장식을 단다고 꽃이 피지 않는다. 뿌리를 보지 않는 믿음은 착각이다. 본질을 훼손하는 행정은 문화의 생태계를 병들게 한다. 성과와 수치, 효율 중심의 정책 언어로는 국악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뿌리에 물을 주는 일, 그것이 국악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다섯째, 국악은 소스가 아니라 존재다. 베토벤을 힙합의 소스로만 쓰지 않듯, 수제천(壽齊天)과 종묘제례악을 소비의 대상으로 격하시키지 마라. 국악은 이미 그 자체로 정점에 도달한 예술적 존재다. 국악을 덧붙일 대상이 아니라, 마주해야 할 세계이다.
윤중강 / 국악평론가
2026.2.3.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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