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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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더 나은 삶을 위한 문해력



이충일


“아이 한명을 위해 세상의 모든 기술을 총동원하겠다”(맥스 벤틸라, 구글 수석엔지니어)던 장엄한 선언이 2021년 설립 8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한때 디지털 교육혁명의 아이콘으로 추앙받았던 ‘알트 스쿨’(Alt School)의 얘기다. 실리콘밸리의 막대한 자본과 구글의 최고 기술력이 손을 잡았지만, 정작 교육의 본질을 놓치고 만 결과는 참담했다. 이후 그들이 놓친 것에 관한 다양한 보고서가 제출됐는데, 그중에서도 또래 협력을 통한 배움과 책을 통해 얻는 문해력의 중요성은 거의 빠짐없이 강조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실패가 미래교육의 방향성을 고지해준 셈이다.


2022년 교육부가 ‘디지털 인재양성 종합방안 기본계획’을 발표했을 때, 내가 느낀 거부감의 상당 부분은 그러한 성찰이 부재하거나 부정당하는 것에 기인했다. ‘AI 디지털교과서 도입 계획’(2023)은 검증되지 않은 실험에 착수했고, 학교현장은 ‘AI디지털·에듀테크’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명확한 목표 없이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고, 선도 학교와 교사를 양산하는 과정은 흡사 실리콘밸리의 실험을 떠올리게 했다. 이러한 기술이 궁극적으로 우리 아이들의 삶에 어떤 해결책이 될 것인지에 대한 뚜렷한 확신도 없이 말이다.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의 현주소는 그 허점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가짜뉴스와 확증편향 등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환기한다면 비판(evaluate)과 윤리(ethics)의 문해력이 우선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활용(access)과 생성(create)을 중심으로,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우선으로 운영되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기와 정보를 활용하는 능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기술을 사용할 때 어떻게 인간답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한층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곱씹어야 한다는 얘기다. 미디어생태학자 닐 포스트먼(Neil Postman)의 말마따나 “교육의 문제는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서사가 없기 때문”이니 말이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고 변화의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 무엇보다 AI시대의 필연적 과업으로써 ‘사유의 힘’을 강조하고 있는데 ‘독서’가 그 유력한 선택지로 보인다. 2026년 1월에 열린 ‘독서국가 선포식 및 추진위원회 출범식’은 독서를 국가의 핵심 정책사업으로 삼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이라 할 수 있다.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학교·학급별 독서 유치원, 독서 중점 초등학교, 독서학기제를 운영하고, 독서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고교학점제 수강신청이나 진학까지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AI시대 독서교육을 국가 핵심 전략으로 격상” ‘독서국가’ 선포」, 교육언론창 2026.01.23). 문해력의 결여가 우리 삶에 심각한 오류를 일으키고 있으니 독서가 필요하다는 진단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독서가 필요하다는 선언 그자체가 아니다. 훼손된 독서교육의 현주소를 직시하기 위한 성찰과 예리한 질문이 뒤따라야 한다. 최근 방영된 EBS 특별기획 「다시, 읽기로」(2025.12.20)는 AI를 활용한 ‘가짜 독서’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틈입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디지털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독서가 구원투수로 등판하더라도, 독서의 본질을 필사적으로 되묻지 않는다면 오히려 ‘가짜 독서’를 부추기는 방화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재확인시킨다. 독서가 입시경쟁과 연결되면서 효율성·생산성·실용성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이것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 없는 한, 읽기는 AI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것이 자명해 보인다. 국가적 차원에서 실행된 체계적인 독서 데이터가 개인의 경쟁력을 증명하는 스펙의 연료로 쓰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독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을 설명하는 다양한 경로가 있겠으나, 교육현장은 문해력으로부터 답을 찾는 것이 가장 유효해 보인다. 유네스코와 교육부 자료 등을 참고하여 문해력의 층위를 간단하게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사전적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을 읽어내는 능력,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의견인지를 판단하는 비판적 읽기 능력, 복잡한 논리를 추적하고 통찰하는 고차원적인 언어능력. 그러니까 문해력은 단순히 글자를 읽고 뜻을 해독하는 수준을 넘어, 텍스트 너머의 맥락을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통찰하는 능력까지 포괄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문해력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게 사실이다. 언어 중심의 문해력이 사유의 깊이로 이어질 것이라는 인과성을 인정하더라도, 이것이 ‘삶의 깊이’로 전이될 것이라는 확신은 모호하기 때문이다. 앞서 거론한 반면교사의 사례를 보더라도 문해력과 삶은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문해력의 위기는 삶의 위기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AI 개발 현장에서 ‘공감’이 핵심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는 기사를 통해 흥미로운 사실을 접한 적이 있다. AI가 한국어의 정서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가수 god의 노래 가사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어머님께」)를 테스트해보면, 예전에는 ‘어머니는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등의 엉뚱한 대답을 내놨다지만 지금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 등 맥락적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대답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수조개의 언어 데이터를 기반으로 추론해낸 결과일 뿐이다. 결핍이 없는 존재가 결핍의 정서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정교한 흉내, 즉 ‘가짜 공감’인 것이다. 


공감은 인간이 거의 유일하게 ‘진짜’를 발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타자의 세계를 상상하고 수용하는 공감 능력이야말로 인간 고유의 문해력인 셈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공감(compassion)은 ‘함께’(com) ‘느끼다’(passion)라는 뜻으로 주로 정서적 층위로 규정되지만, 문해력으로 접근한다면 ‘인지적’ 공감 역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일찍이 심리학자 대니엘 골먼(Daniel Goleman)은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는지 이해하고 그들의 시각을 파악하는 능력”을 인지적 공감으로 정의한 바 있다(『SQ 사회지능』, 웅진지식하우스 2006). 타자를 향한 정확한 이해와 깨달음을 토대로 그들의 감정을 느끼고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과정, 이것을 문해력의 핵심 가치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


대부분이 인정하듯 우리 사회는 공감 반경이 매우 협소한 상황이다. 진영·세대·젠더 갈등과 혐오가 임계점을 넘었고, 디지털 알고리즘은 이러한 현상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한다. 선택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 안에서만 공감대가 형성되는, 일종의 ‘공감 양극화’가 고착화되고 있다. 내 편에는 과잉 공감을 표하고, 반대편에는 극단적인 비난을 표출한다. 공감이 타자를 이해하는 창(窓)이 아니라 내 편을 확인하는 인증인 셈이다. 이러한 문제가 청소년들에게 더욱 극심할 것이라는 예측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어적 문해력이 떨어지는 일부 아이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최근 교육부에서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계획과 함께 독서토론을 거론했을 때, 교육현장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앞섰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지금의 교실 환경은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기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자칫 낙인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팽배해 있다. 피아가 분명해진 상황도 비관적이긴 마찬가지이다.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토론을 통해 나의 삶을 성찰하는 지점에 가닿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는 우리 교실의 공감 지대는 지나치게 협소하고 위태롭다. 


공감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문해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복잡한 텍스트를 잘 이해하는 것을 넘어 타자의 삶을 읽어내는 서사적 문해력, 한번도 승인한 적 없는 불편한 세계가 진한 감동으로 육박하는 서사적 조우, 이러한 것들이 독서의 본질적 가치로 우뚝 섰을 때 더 나은 삶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이충일 /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화성 마산초 교장

2026.3.10.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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