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창비주간논평

어떤 ‘코로나 서사’를 쓸 것인가

황정아

황정아

‘바이러스처럼 퍼진다’는 것이 정녕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지 무섭도록 실감하는 이 시간을 거치고 나면 이 비유를 아무렇지 않게 쓰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훗날 이 시간이 어떻게 기억되는가에 따라 ‘바이러스’를 둘러싼 의미의 자장은 달라질지 모른다. 질병관리본부의 브리핑에 귀를 기울이고 긴급재난문자를 들여다보면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세와 경로를 확인하는 나날들은 공동의 경험이 대개 그렇듯 이런저런 의미를 축적하며 자체의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돌이켜보면 2015년의 메르스 유행도 어떤 서사로 기억된다.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메르스 서사’는 우왕좌왕한 대처, 안전해야 할 곳에서 드러난 위험, 무능할 뿐 아니라 무감각한 지도자, 가족과 제대로 이별도 못한 격리상태에서의 안타까운 죽음 같은 대목들이 실패라는 주제어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당시라고 헌신적인 방역관계자와 의료진, 전문가와 봉사자들이 없었을까마는 그들의 노고는 페이지의 한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그런 점에서 메르스 서사는 다행히 종말서사는 아닐지언정 숱한 재난서사의 양식과 닮았다. 재난영화의 장르적 문법과 달리 문학의 재난서사는 감당도 납득도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인물들의 고립과 단절, 그리고 끝은 났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결말 같은 장치를 통해 끝까지 독자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2020년의 ‘코로나 서사’가 전에 없던 불안에서 출발한 까닭에는 일정하게 메르스 서사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더욱 퍼져 있는 바이러스의 여전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서사의 중심 플롯은 실패가 아니며 그 장르가 재난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해지고 있다.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내놓지는 못해도 수많은 전문가와 담당자들이 책임 있게 사태를 대면하면서 더 나은 해결책을 위해 분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진자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일선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는 이들에 대한 감사가 그 어떤 감정보다 크게 작동하는 한, 그리고 무지와 부주의와 무책임으로 감염을 확대한 이들을 엄중히 비판할망정 혐오와 차별의 대상으로 돌리지 않는 한, 이 서사 자체가 방역을 오히려 교란하는 온갖 부질없는 공격에 잠식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별도로 코로나 서사의 바람직한 완성을 위해서는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사태들을 차분히 직시하게 되었다’라는 문장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것 가운데는 ‘물질의 귀환’으로 불릴 만한 사태도 포함된다. 먹을 수 있는 물이 어디에나 널려 있지 않게 되면서 정수나 생수의 모습으로 자기존재를 드러내듯이, 편히 숨 쉴 수 없게 되면서 공기가 미세먼지와 호흡기 질환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듯이, 이제 바이러스 역시 마스크를 가시적 매개로 삼아 매순간 감지하고 방어해야 할 존재로 부상했다. 아무래도 좋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자연적인’ 물질 같은 건 거의 사라졌다. 인간 활동을 뒷받침하는 자원이나 배경, 대상이나 도구라는 종속적 쓰임새를 거부한 ‘물질’들은 다소간 난폭하게 우리 삶에 귀환하여 행동 하나하나에 즉각적인 결과를 되돌려준다. 이 사태는 물론 우리가 사는 세계 또는 우리가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이 어떤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물질의 귀환은 어떤 면에서 ‘로컬’의 귀환이기도 하다. 신종 질환들의 전파가 지구화와 무관하지 않은 반면, 제아무리 글로벌하게 생각하고 글로벌하게 구매 또는 판매하며 글로벌하게 여행하더라도, 물질적으로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몸이 현존하는 장소에서 앓아눕는다(또는 현존하기로 되어 있는 장소로 이송된다). 전세계와 네트워크를 이룬다 한들 물질적으로 나는 여전히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삶의 ‘로컬’한 장소를 공유하는 이들의 신체적이고 감정적인 상태에 무심할 수 없다. 내 이웃과 나는 말하자면 감염 가능성으로 이어져 있기에 내 이웃이 현재 무엇에 ‘감염’되어 있는지가 곧 내 삶을 바꿀 것이다. 여기서 ‘이웃’이라는 범주가 인간 이웃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제는 분명해졌다. 동물의 집단감염은 인간의 집단감염의 전조이자 연장이며 코로나19가 확인해주었듯이 인-수 감염과 인-인 감염의 경계도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지금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유행이 (바라건대 조만간) 끝나리라 확신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이번이 전염병의 마지막 사례가 아니리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것이 어째서 마지막이 아닌지, 또 어떻게 기후변화나 지구화가 낳은 위기와 무관하지 않은지는 이미 여러차례 지적된 바 있다. 이 상황을 또다시 겪을 수 있다는 말은 현재 코로나로 인해 발생하는 물질적 결과들을 잠재적인 상수로 예상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런 사태가 발생할 때 적절한 대비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 것과 별개로, 우리의 일상 자체가 그 잠재성에 맞추어 조율되어야 한다. 반드시 지금 권고받는 정도의 격리와 자제까지는 아니라도 우리는 어쩌면 모든 방면에서 조금 덜 활동하고 덜 발산하며 심지어 덜 생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데이비드 하비가 말한 대로 확대재생산이 아닌 단순재생산의 삶으로 질서있게 물러나야 하는 게 아닐까. 성장과 발전을 향한 열망이 정녕 인간의 본능이라면 이제 그것은 물질세계를 질주하는 대신, 멈춰 서서 바로 그 물질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데 발휘되어야 한다. 어쩌면 ‘신천지’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 다른 종류의 감염서사가 간절함을 일러주는 또다른 증거인지 모른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20.3.4.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