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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위기와 기본소득

이일영

이일영

얼마 전 코로나19로 시름에 잠긴 지인들과 이런저런 걱정을 나누었다. 의료계 사정을 아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비쳤다. “코로나19를 잡는 것은 결국 시간이다. 처음 접하는 것이라 공포감이 크지만 관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만 바이러스가 또다른 변종으로 진화하는 게 걱정이다. 그러면 시간과 자원을 더 써야 한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을 자주 접하는 지인은 코로나 위기의 경제상황을 아주 어둡게 보고 있었다. “현장은 아주 심각하다. 완전히 멈춰 섰다. 사업이 무너져 벼랑 끝으로 몰리는 일이 속출할 것이다.” 그러면서 재난기본소득 논의를 비판했다. “당장 생계가 곤란한 이들이 많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업체가 무너지고 실업자가 쏟아지면 세금도 걷을 수 없다. 국채를 발행해도 사줄 데가 없을 거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야기를 서둘러 멈췄다. 자칫 정치 관련 화제로 이어지면 서로 마음을 다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미증유의 위기에 쾌도난마 해법을 찾기 쉽지 않지만, 뒤돌아서서 재난기본소득에 대한 몇가지 생각을 정리해본다.

 

첫째, 기본소득은 자유·평등을 증진하고자 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다. 위기나 전환 국면에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활발히 논의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염병, 실물경제, 금융의 복합적 위기상황이자 방역, 경제시스템 보호, 서민생계 보호를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다중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재정과 인력을 나누어 쓸 수밖에 없다. 위기가 세계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어서 정책 대응도 세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미국·유럽의 진정세가 중요한데, 장기화 가능성도 고려하고 있어야 한다. 세계적 연결을 감안하면서 방역과 금융·산업 시스템 보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코로나 위기의 복합성을 감안해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유연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의 원래 개념은,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평생 규칙적인 현금지급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기본소득이 코로나 위기에 대한 직접적 해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기본소득은 방역이나 기존 시스템 보호에 단기적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는다. 보편적 접근이 전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충분히 밝혀져 있지 않다. 기본소득론 내부에서도, 우선 낮은 수준에서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는 방식으로 시작해 결과를 살펴보자는 의견이 많다. 현존 제도를 해체하지 않고 활용하면서 부분적·점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기본소득의 실행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실행 가능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는 기존에 합의된 안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이 좋을 것 같다. 코로나 위기의 피해가 극심한 대구의 사례가 있다. 김부겸 의원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18만여명), 저소득 일용직 근로자(6만여명), 택시업 종사자(1만 5천여명)에 대한 ‘재난수당’ 형태의 지원을 주장했고, 권영진 시장은 여기에 취약계층(32만여명)에 대한 지원을 추가 요청했다. 3월 17일 통과된 추경안에는 소상공인 지원, 저소득층 지원, 특별고용 지원 등이 포함되었다. 저소득층 지원의 경우 중위소득 75% 이하 가구에 대해 최대 6개월 동안 최저생계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 안은 국회에서 합의된 것이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내놓은 안은 지방정부가 곧바로 시행하는 것이라 참고할 만하다. 서울시는 중위소득 100% 이하 가구에 30~50만원을 모바일 상품권이나 선불카드로 지급하되, 재원은 추경예산으로 확보하기로 했다. 한편 김경수 경남지사와 이재명 경기지사는 전국민에게 100만원씩을 지급하자는 재난기본소득 방안을 제기한 바 있다. 이는 보편성 원칙에 보다 충실한 안이지만 이 방안을 추진하기에는 현재의 양극화된 정치구조의 난관이 높다고 여겨진다.

 

넷째, 취약 부문에 집중 지원할 것인지 전국민에게 보편 지원할 것인지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층위의 논의가 있다. 현실에서 중요한 쟁점은 선별 가능성 문제다. 선별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경우, 현재의 사회보장 정보시스템이 복지 수급자 정보만을 관리하고 있어 차상위 계층의 광범한 사각지대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편 통합된 실시간 소득정보시스템은 없지만, 작년의 소득·재산 데이터에 입각해 선별 지급하고 내년 종합소득세·부가세를 신고할 때 정산하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한다.

 

필자는 이번 위기의 심각성과 장기화 가능성에 비하면 빈곤층에 대한 중복지원의 문제는 크지 않다고 본다. 위기에 대응하여 신속하고 집중적인 구호정책을 추진하면서, 현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를 점검하는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다. 특정 연령층을 대상으로 기본소득 적용을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청년층의 경우 보편적 현금 지급의 장단기 효과가 크다. 현재 청년정책은 광역시‧도별로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체감도가 매우 낮다. 이런 경우 정책을 보편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위기 극복에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적극 활용해야 하지만 그 논의의 한계도 함께 봐야만 한다. 대규모 산업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던 구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계와 인공지능에 의해 노동의 종말에 이른 신시대가 온 것도 아니다. 우리 눈앞에 널리 펼쳐진 것은 복잡하게 연결된 생산시스템과 거대한 불안정 노동의 세계다. 현금 지급만으로 이에 충분히 대응하기는 어렵다. 결국 핵심은 생산과 고용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있다. 지역과 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공유적 자산과 인프라를 만드는 정책·운동이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 논의되는 ‘재난기본소득’이 본래 취지의 기본소득과 여러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코로나19 위기상황에 그 아이디어 일부를 차용해 당장 시행해볼 필요는 있다. 다만 이것이 위기 대책 전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방역과 시스템 보호 대책도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이일영 / 한신대 교수, 경제학

2020.3.25.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