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강영숙 姜英淑

1967년 강원 춘천 출생.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흔들리다』 『날마다 축제』 『아령 하는 밤』 『회색문헌』, 장편소설 『리나』 『라이팅 클럽』 등이 있음. grolites@gmail.com

 

 

 

두고 온 것

 

 

민수는 차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운전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패딩 파카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호텔 정문 앞으로 걸어가는 지연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귀마개가 달린 모자를 쓰고 부츠를 신은 채 호텔로 걸어가는 지연의 뒷모습은 모처럼 가볍고 평화로워 보였다. 빨리 와봐. 지연이 손짓했고 민수는 차에서 나가 양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체에 잔뜩 힘을 준 채 보폭을 조절하며 걸었다. 몇발짝 가지 않아 지연이 다시 몸을 돌려 민수를 보며 말했다. 여기 진짜 우리가 왔던 호텔 맞네! 민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여기가 맞는다고 고개를 여러번 끄덕이며 웃었다.

차 밖으로 나온 민수는 무심코 계곡 위쪽을 보았다. 흰 겨울빛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더기로, 허공 아래를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민수는 또 한번, 흰빛을 뚫고 허공을 밟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지연을 본 것만 같았다. 민수는 지연의 동그란 어깨를 잡았고, 지연은 민수의 귀에 입술을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며 목덜미로 감겨들었다. 지금까지 겨우 참고 꼭꼭 뭉쳐두었던 것들이 계곡의 겨울빛에 녹아, 눈앞에서 다 흩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민수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어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착시였고 지연은 지금 여기에 민수와 함께 있지 않았다.

차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민수는 긴장한 표정으로 차 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트렁크 문을 열고 바퀴를 닦을 걸레를 꺼내 앞바퀴 쪽으로 갔다. 바닥에 밀착한 타이어에 묻은 피가 단단하게 언 길바닥으로 스미는 중이었다. 걸레도 검고 타이어도 검어, 정확히 어느 부분에 피가 묻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민수는 길바닥의 눈 속으로 점차 피가 스미는 것을 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텔로 오는 오르막길에서 민수는 뭔가를 치고는 잠깐 멈췄다가 다시 출발했다. 민수는 차도에 죽은 동물이 그대로 버려져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고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자동차 옆면과 앞창에까지 피가 튀었고 민수는 그것을 보고 놀라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동차가 미끄러질 것 같아서 민수는 차에서 내려 뭘 치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H호텔은 보수공사를 하다가 중단했다. 자연경관이 뛰어난 북한산 자락에 연해 있어 색다른 분위기를 자랑하던 호텔은 빛이 바랜 아이보리 색 천막을 건물 외관에 뒤집어쓴 모양새로 가건물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몇개월 전 그때처럼 호텔 정문은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큼지막하게 쓴 안내 표지판을 단 채, 녹이 슨 두꺼운 체인을 친친 감고 있었다. 철문 너머의 경사가 있는 호텔 진입로도 길 양편에 쌓아놓은 원목 자재들과 철근들로 봉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정문 왼편의 경비초소에는 사람이 있었다. 민수는 아크릴 외벽을 톡톡 두드렸다. 경비는 마스크를 쓴 채 고개도 내밀지 않고 못 들어간다며 손부터 내저었다. 민수가 한번 더 창을 두드리자 경비가 네모난 창을 위로 밀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에요? 민수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막 호텔 문 앞에서 크게 회전해 정차하려는 마을버스를 돌아봤다. 냉기 섞인 바람이 흙먼지를 일으켰다. 좀 들어가도 되죠? 민수가 따지듯 말한 순간 캡슐처럼 단단해 보이던 초소 문이 열리고 경비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몸이 아주 작은 노인이었다. 호텔 안 해요. 순간 민수는 흥분해서 어깨에 멘 가방을 한쪽 허벅지 위에 올리고 호텔 위탁운영업체에서 받은 공문을 꺼내 경비에게 내밀었다.

몇개월 전에 왔을 때도 경비는 씨도 안 먹힌다는 듯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위탁업체의 명함만 내밀고는 초소 문을 닫아버렸다. 여기에다가 공문을 보내봐요. 그러면 열어줄지도 모르지. 민수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틈틈이 동료들 눈치를 보며 위탁운영업체에 보낼 공문을 썼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호텔 방문이 이루어질까. 또 방문이 이루어진다 한들 뭘 할 수 있을까. 민수는 밤마다 먼지 속을 헤집는 기분이었다.

공문은 멋지게 쓸 수는 없었고 솔직하게 쓰는 쪽을 택했다. 와이프가 아프다. 연애할 때 갔던 H호텔에 다시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가지 못했다. 귀사가 위탁받아 관리하는 H호텔이 보수공사 중이라고 들었는데, 그렇더라도 한번 가보고 싶다. 호텔이 없어진 것이 아니어서 나한텐 정말 다행이다. 객실 사진을 몇장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 방문을 허락해준다면 평생 감사함을 잊지 않겠다. 죽은 목숨 살리는 셈 치고 따위의 표현까지는 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적어도 감상적이고 유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민수는 우체국에 가 등기우편으로 공문을 발송하고는 다이어리에 영수증을 끼워두었다.

얼마 전 민수는 지연을 신경정신과 병동에 입원시켰다. 이번이 두번째였다. 첫 입원 후 집에서 쉬는 동안 지연은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하나도 먹지 않고 변기에 버렸다. 민수는 지연이 살려고 그런다고 생각해 오히려 위로했고 약을 먹지 말고 그냥 버텨보자고 말했다. 약을 먹으면 계속 잤고 약을 먹지 않으면 들떠 있었다. 민수는 약을 먹었을 때의 지연이 더 참기 어려웠다. 약을 먹으면 행동이 몹시 굼뜨고 반응이 느리고 말할 수 없이 느긋해졌다. 깊은 밤 지연이 잠들었을 때 민수는 어떤 증상이 일어나나 궁금해 지연이 복용하는 약을 먹어보았다. 너무 적은 양을 먹어서인지 민수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지연은 아직 덜 망가졌고, 여러모로 괜찮은 상태였는지도 몰랐다.

지연은 길을 가다 넘어진 게 아니었다. 피를 지혈하고 머리를 꿰매면 낫는 것도 아니었다. 민수는 결코 사용하고 싶지 않은 단어지만 지연이 미쳤고,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민수는 4주간의 격리병동 입원 후에 지연이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이고, 그러고 나면 또 아무 일도 없는 일상이 계속되리라고 믿는 것만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여기며 혼자서 시간을 보냈다.

멀쩡하게 회사에 잘 다니던 지연이 이상해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눈앞에 흰개미 같은 것이 떠다닌다고 호소했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누군가 칼을 들고 와 갑자기 자신을 찌를 거라며 움켜쥔 손을 놓지 않고 집에 가자고 졸랐다. 한밤중에 누군가 자신의 이메일 계정을 해킹하고 있다며 머리를 질끈 묶고 밤새 눈을 부릅뜨고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던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 훨씬 전, 아파트 단지에서 담배를 피우는 고등학생들을 붙들고 서서 흡연이 사람한테 얼마나 나쁜지 아느냐며,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민수는 그냥 웃어넘겼다. 그런 일들이 혹시 초기 증세였다면, 그걸 몰라본 게 자신의 죄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체념했다.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걸 병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어서였다.

민수에게 지연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지연이 신경정신과 격리병동의 대리석 벽 같은 무거운 문 너머로 들어갈 때, 머리를 하나로 묶은 지연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가볍고 단순해 보였다. 문이 닫히고 보호자는 나가달라는 말을 듣는 순간 민수는 왜 모든 고통은 내 몫인가, 도대체 삶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이러나, 눈알이 터질 듯 울었다.

지연이 입원하고 난 다음날부터 하루에 한차례, 병원에서 메시지가 왔다. 최지연 환자께서는 약도 잘 드시고 식사도 잘하고 계시니 가족들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지연의 사진을 함께 보내주지 않은 것은 고통에 시달릴 가족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로 느껴졌다. 민수는 당분간 지연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지연은 어디가 조금 아플 뿐이지 정신이상은 아니라는 믿음이 문자 메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무너지곤 했다.

어떤 일이든 시간이 가고 나면 최초 충격의 파장은 줄어드는 법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지연은 당직 근무가 있다며 사무실에 출근했다. 옷차림도 멀쩡했고 무엇 하나 특이할 것이 없는 날 중 하루였다. 민수는 여느 일요일처럼 셔츠 다림질을 하고 맥주나 마시면서 한국시리즈나 볼 생각이었다. 회사로 간 지연은 옆방의 동료가 자신을 수시로 감시한다며 유리 칸으로 막힌 방 창에 스프레이 풀을 뿌리고 신문지를 붙였다. 민수는 다음날 지연의 회사로 달려가 그 신문지를 떼어내느라 몇시간씩 물을 뿌리고 유리창을 닦아야 했다. 몇주 후 지연은 다시 동료 한 사람을 처벌해달라고 쓴 피켓을 들고 회사 내의 사무실과 화장실을 샅샅이 돌았다. 자신을 협박하는 것은 물론 전 사원의 개인정보를 모두 다 해킹한다며 그 동료가 쓰는 랩톱도 박살 냈다. 그 직원의 남편이 민수를 찾아와, 빚이 많아 와이프가 회사를 그만두면 안 된다고 울며 사정했다. 그래서 민수는 그 직원이 지연의 주장대로 진짜 그런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날 민수는 회삿돈으로는 볼펜 색깔 하나도 마음대로 정해 살 수 없는 직장인들의 애환을 얘기하느라 처음 만난 사람과 새벽 네시까지 술을 마셨다. 지연의 일은 시간을 들여 토론할 거리도 되지 못했고 너무 빠르게, 거침없이 정리됐다. 회사의 경영진은 맑은 수조 안을 더럽히는 물고기 한마리를 뜰채로 건지듯 간단히 지연을 건져냈다. 민수는 그날 장모에게 전화를 걸어 지연이 많이 아프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걔가 왜 그러는 거야, 같이 사는 자네는 알 거 아냐. 장모가 울며 말했을 때 민수는 당신들 유전자 탓을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른 것들은 다 참을 수 있었지만 단 하나의 일만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됐다. 지연은 거래처 부장이라는 사람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상대는 잘생겼다거나 무슨 특별한 포스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배 나오고 늙은 중년의 회사원 그 자체의 이미지였다. 민수가 묻자 그 부장이라는 사람은 너무 황당하다며 어떤 업무 연관성도 없고 어디서 스쳐 지나가며 만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일축했다. 지연은 그 남자에게 수십통의 이메일과 꽃바구니, 케이크를 보냈고 직장에 찾아가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민수는 지연을 정신병원에까지 넣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지연을 미친 것으로 해버리면 최소한 배신은 당하지 않으리란 걸 계산했던 게 사실이었다.

마을버스 운전기사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허리를 좌우로 동그랗게 돌리며 맨손체조를 하고 커다란 소리로 기합을 토해냈다. 민수는 운전기사와 조금 떨어진 채 난간에 기대서서 여전히 계곡 쪽을 보고 있었다. 계곡 위에서 흰 가루 같은 겨울빛이 흩뿌리듯 계속 떨어져 내렸다. 마을버스 운전기사가 운전석에 타고 차가 움직였다. 그때도 막 떠나려는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지연과 같이 호텔 위쪽에서부터 숨 가쁘게 뛰어 내려왔었다. 민수는 십오년 전, 호텔에서 밤을 함께 보낸 경험이 지연과 자신을 완전하게 결속시켰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결속의 고리는 약해졌고 이제는 어디에 기대야 할지조차도 잘 알 수 없었다. 민수는 마른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북한산 자락의 H호텔까지 오게 된 것은 지연 때문이었다. 사랑을 나눌 장소를 고를 때 지연이 이 호텔 이름을 꺼냈다. 지연의 가족은 겨울이면 모두 이 호텔에 몰려와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북한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으로 새해를 맞이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연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가장 유쾌한 기억이었을 테지만, 민수가 결혼할 무렵 지연의 가족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늦도록 해가 지지 않던 어느 초여름밤, 지연과 민수는 택시를 타고 이곳에 왔다. 지연이 밀레니엄이라는 버터처럼 부드러운 단어를 아무 말에나 붙여 남발할 때였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호텔에서 찍은 한국영화 한편을 봤다. 함께 잤던 방이 영화촬영이 이루어진 방과 호수가 같은 게 틀림없다며, 영화 내용과 관계없이 신나게 떠들며 좋아했다. 사실 호텔방의 구조라는 건 크게 보면 다 똑같을 텐데,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가는 각도와 하우스키퍼가 끌고 다니던 트레이까지 똑같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그후에도 한두번 정도는 더 이곳에 왔었다. 무엇보다 특이했던 것은 그 영화가 흑백이라는 사실이었다. 칠십년대도 아닌 이천년대에 흑백으로 영화를 만든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그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민수의 기억에 남아 있던 이 호텔도 늘 모노톤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면 현관이 있고 침대 프레임의 머리 쪽은 벽에 붙어 놓여 있고 침대 오른쪽과 왼쪽 모두 아주 큰 창이 달려 있었다. 오른쪽 창 아래로는 키가 큰 나무의 꼭대기와 주차된 차들이 내려다보이고 왼쪽으로는 북한산 계곡이 보였다. 하늘도, 침대도, 커튼도, 지연도 모두 다 희디흰 실루엣으로 뭉쳐져 눈이 부셨다. 다음날 눈을 떠 오른쪽 창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긴 주방 모자를 쓴 호텔 셰프들이 뒷짐을 진 채, 점심이라도 하러 가는지 한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키 큰 나무 꼭대기 위를 오가며 시끄럽게 우는 새들은 온종일이라도 그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호텔을 감싸고 있던 초여름의 녹음이었고 밝고 따뜻한 기운이었다.

이제 호텔 안 해요. 못 들어가. 호텔을 안 하다니, 늘 똑같은 반응에 민수는 미칠 것 같았다. 호텔은 지연을 위한 마지막 처방이 될 수 있었다. 아니 어르신, 그냥 건물 좀 보고 나오겠다는데 왜 못 들어갑니까. 제가 답신으로 받은 공문도 보셨잖습니까. 제가 여기 얼마나 오래 서 있었던 줄 아세요? 전화 걸고 커피 마시고 어르신 할 일 다 하실 동안 저는 여기 이렇게 꼼짝도 안 하고 서 있었다니까요. 경비원이 나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위탁업체가 교체됐어요. 이 공문은 휴지가 됐네! 민수는 아랫입술을 물고 한숨을 내뱉으며 먼 곳을 쳐다봤다. 철문 너머로 보이는 호텔 진입로에는 그사이 그늘이 생겼고, 두명의 등산객이 스틱을 하나씩 든 채 등산로를 오르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돌아보며 멍청한 놈이라고 욕을 하는 것 같았고 순간 민수는 모멸감을 느꼈다. 발밑에 죽은 비둘기 한마리가 보였다. 민수는 아무 책임도 없는 경비원을 붙들고 화를 내는 자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어져, 죽은 비둘기를 발로 툭툭 찼다.

한참 동안을 호텔 앞을 벗어나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민수는 보폭을 무리하게 벌리며 계곡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곡 진입로의 경사와 호텔 진입로 경사는 엇비슷하게 높아졌다. 그러나 한참을 올라가도 호텔은 쉽사리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찌를 듯 무성한 나뭇가지가 덤불을 이룬 채 계곡 진입로 양편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반대인 계곡 쪽은 물이 마르긴 했지만, 경사가 꽤 깊어 보였고 마른 갈대가 무성했다. 등산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민수는 발을 헛디디고 무릎이 꺾이며 자주 넘어졌다.

민수는 적당한 높이의 바위 위에서 발뒤축을 올리고 호텔을 건너다봤다. 호텔 주변의 숲은 거칠게 파헤쳐졌고 건물 외관을 따라 둘러친 철제 가드와 한가닥씩 찢어진 듯 나풀거리는 희미한 색의 방수 커튼, 곳곳에 기대 세워놓은 원목더미로 인해 품위라고는 없어 보였다. 한겨울이어서 삭막한 탓도 있겠지만 호텔은 도무지 옛날의 그 장소가 아니었다. 순간, 언뜻 흰색 방수 커튼 사이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민수는 성급하게 바위 앞쪽으로 뛰어갔다. 이봐요. 이봐요. 민수는 소리를 쳤다. 흥분한 탓에 시야가 불분명해져 확실하게 무엇을 봤다고 단정하기도 어려웠다.

언젠가 민수는 높은 직급을 주겠다며 현장직 근무를 제안했던 한 봉제공장 사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공장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로 반파되었는데, 아무도 시설 보수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종업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공장은 가동을 멈췄다. 그때 민수는 절망할 때가 아니라며 사장을 위로했다. 지금이 그때와 가장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미 망가진 것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자신을 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민수는 여전히 호텔을 포기할 수 없었다.

호텔이 보이는 반대쪽 계곡의 경사진 바위 위에 앉아 있던 민수는 순간 벌떡 일어났다. 계곡과 호텔 사이에 쳐진 쇠창살을 잡고 움직이는 듯한 사람이 또 보여서였다. 이번엔 옅푸른 빛을 띤 방역복을 입고 있었는데 호텔 건물 안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봐, 여기요. 민수는 소리쳤다. 등산복을 입은 세명의 등산객이 계곡 진입로를 오르며 민수를 쳐다봤다. 양손을 허리 뒤로하고 희끗희끗한 머리 위에는 귀마개를 한 채로, 요즘 젊은것들은 정말 머저리 같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민수는 가래침을 뱉고 숨을 골랐다.

계곡에서 호텔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호텔과 등산로를 가르는 담벼락이 있고, 담벼락에 달린 자물쇠가 보였다. 민수는 자물쇠를 가볍게 흔들어봤다. 뭔가 밟고 올라갈 것만 있다면 간단히 담을 넘을 수도 있을 것처럼 문은 비교적 만만해 보였다. 자물쇠가 달리지 않은 반대쪽의 문 이음새가 허술해 보였다. 민수가 왼손 손바닥으로 몇차례 치자, 녹슨 경첩이 떨어지며 문이 열렸다.

뭉개진 케이크처럼 금이 가버린 땅은 오랜 부식으로 온통 다 회색이었다. 트럭 한대와 승용차 한대가 지붕이 내려앉은 채 호텔 앞 주차장에 방치되어 있고 녹슨 건설자재들이 군데군데 흉물스럽게 엉켜 있었다. 주변의 나무도 거의 베어버린 것 같았다. 새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연회용 흰색 팔걸이의자들을 켜켜이 쌓아놓은 곳 주변에는 풀이 난 자국조차도 없었다. 민수는 호텔이 지연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수는 방수 커튼 틈새를 두 손으로 활짝 열어젖힌 뒤 건물로 다가갔다. 건물 전체를 뱅뱅 돌아 현관을 찾았지만, 문이 열려 있을 리가 없었다. 벽 모서리를 여러차례 돌아, 호텔로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은 철문 하나를 찾았다. 철문은 안에 있는 공기를 일순간에 뱉어내듯 팡 소리를 내며 열렸다. 1층 복도와 연결되는 문이었다. 그래도 뭔가 심하게 썩고 고인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건물 안은 상태가 나쁘지 않아 1층 중앙 로비는 그대로였다. 중앙 계단을 중심으로 호텔 로비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던 기억이 났다. 민수는 휴대폰 랜턴을 켰다. 어떻게 될지 몰라 소형 똑딱이 카메라도 준비해왔지만, 촬영이 가능할지는 알 수 없었다. 중앙 계단 바로 앞이 카운터여서 민수는 방을 잡고 지연은 카운터 건너편의 베이커리에서 빵을 샀었다. 오빠 호두파이 먹을래. 지연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베이커리가 있던 자리는 아예 폐가구를 잔뜩 쌓아놓고 적재장처럼 쓰고 있었다. 베이커리 옆에 있던 칵테일바 자리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유리 장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총천연색으로 썩어가는 중이었다.

다행히 2층으로 오르는 중앙 계단에는 적재물이 많지 않았다. 빈 화분이 겹쳐진 채 놓여 있고 호텔 상징으로 보이는 바람 빠진 광고용 배너가 계단 난간에 걸려 있었다. 동그란 모양의 벽시계 추는 분리된 채 나뒹굴었고 스피치용 연설대 몇개가 보였다. 2층 계단 천장은 일부분이 내려앉아 이음새가 터졌고, 석면 같아 보이는 물질이 아래로 흘러내릴 듯 허공에 붙어 흔들렸다.

한 층을 더 올라가야 했다. 영화에 나온 호텔 객실도, 지연과 묵었던 곳도 305호였다고 민수는 기억했다. 바닥은 우툴두툴하게 흙먼지가 쌓여 있고 계단 벽에 붙은 그림도 먼지를 뒤집어써 형체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3F라고 적힌 글자를 본 민수는 피난 대피도가 붙은 철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문고리가 빠져 없어지고 구멍이 난 상태라 한 손으로 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간신히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파도처럼 일렁이는 복도 바닥이 먼저 보였다.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민수는 빛이 드는 쪽으로 움직였다. 깨진 격자창으로 바깥이 내다보였다. 군데군데 구멍이 난 복도 바닥 위로 피복이 벗겨진 전선들이 미역처럼 쌓여 있는 게 보였다. 민수는 방 호수를 하나씩 확인하며 천천히 복도를 지났다.

305호는 중앙에서 왼쪽에 위치한 홀수 번호의 방 중 하나였다. 왼쪽 복도 한가운데 벽에 매달린, 줄이 끊어진 옛날식 전화기가 보였다. 민수는 수화기를 얼굴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프론트 데스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좁은 복도 바닥의 어느 구간에는 상한 혈관 같은 파이프가 드러나 있고 바둑알처럼 굵은 흙은 민수의 신발에 밟혀 빠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민수는 301호 문을 열었다. 호텔 이용 안내문이 바람에 날려 민수의 발밑에 떨어졌다. 침대에서 즐기는 H호텔의 굿모닝 조식 서비스! 신선한 빵, 유기농 샐러드, 에그프라이, 감자튀김, 오렌지주스, 커피. 민수는 메뉴를 읽다가 침을 삼켰다. 어디선가 진한 커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파티, 생일모임, 연회 환영, 각종 드레스 대여. 민수는 종이를 구겨 구석으로 던졌다. 303호는 방이 좀 컸다. 민수는 원형 유리 테이블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북한산 계곡 쪽을 올려다보았다. 지연이 앞의 의자에 와 앉을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침대 옆에 붙은 콘솔에서 전자시계 알람이 울렸고 민수는 놀라서 방에서 즉각 뛰쳐나왔다.

305호는 복도 끝에 있었다. 민수는 선뜻 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마에서 땀이 나고 숨이 찼다. 언젠가부터 절망적인 기분이 되면 자리에 주저앉게 됐다. 민수는 벽에 기대고 앉아 상체를 빼고 벽 쪽창 너머로 호텔 마당을 내다보았다. 순간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현기증이 일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시선을 복도로 옮긴 순간이었다. 복도 끝 카펫 틈에 낀 동그란 쥐똥과 죽은 쥐가 보였다. 민수는 무심코 이대리의 전화번호를 길게 눌렀다. 더는 상사도 아닌 사람의 전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이대리는 민수보다 겨우 세살 아래였는데, 미끄러운 낙지처럼 유연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어서 화가 났다. 민수는 자신이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게 이대리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확신했다.

영업부 부장이 중국 출장에 들고 가야 할 패딩 점퍼 샘플을 민수가 잃어버린 것부터가 악몽의 시작이었다. 민수는 이대리를 도와 안산 봉제공장에 출장을 갔다. 신산업단지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공장 주변은 삭막했다. 자재부에서 내려준 샘플 제작 지시서와 다르게 단추는 메탈이 아닌 플라스틱이 달려 있고 지퍼도 지정한 YKK가 아닌 다른 업체의 것이 부착되어 있었다. 이 상태라면 영업부 부장이 먼저 비행기를 타고, 샘플은 해외특별 배송업체를 통해 뒤따라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대리는 평온한 얼굴로 계속해서 휴대폰만 내려다보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공장 직원들과 같이 탁구를 쳤다. 공장 한쪽에 있는 창고 건물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탁자 위에 모여 선 채로 자기들끼리 밥을 먹고 있었다. 민수는 산책하듯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한 동남아 남자에게 커피믹스를 얻어 마셨다.

광택이 나는 친츠 가공을 한, 면 재질 점퍼 샘플 두장의 제작을 끝내고 나온 시각은 밤 열한시였다. 샘플을 비닐로 꽁꽁 싸고 그 위에 또 부직포로 포장을 했다. 인근 공영주차장에 세워둔 이대리의 차로 가 뒷좌석에 샘플을 싣고 로데오거리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오늘 과장님이 안 나오셨으면 일이 안 끝났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과장님 대박! 민수는 젊은 친구들한테 꼰대 소리 듣기 싫어 웬만하면 잔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꼭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너 싸이코라고 소문났어. 표정이 잠깐 굳기는 했지만 이대리는 그 말을 듣고도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과장님, 제가 똑똑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론 더 잘할게요. 사내놈이 두 손으로 하트를 그리지 않나 볼에 바람을 넣지 않나, 애교는 끝이 없었다. 이대리가 전화를 받으러 나가고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들이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미친 듯이 자기들 얼굴 사진을 찍어대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민수는 얼굴을 돌려 차도 건너편 2층의 코인노래방을 올려다봤다. 작은 박스 속에 든 사람들이 형광색 벌레처럼 몸을 움직이며 춤을 추었다.

그후에 생긴 일들은 슬로모션처럼 느렸다. 이대리와 함께 간 맥줏집은 갈색 조명이 인상적인 데 비해 천장이 몹시 낮아 몇차례 머리를 부딪친 것도 같았다.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다가 머리를 옆허리까지 꺾으며 웃었다. 한쪽에서는 일어서서 노래를 불렀고 미지근한 액체가 공중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민수는 오랜만에 웃었다. 이대리가 얼굴을 잡고 자꾸만 뽀뽀를 했는데 민수는 그것도 싫지 않아서 내내 속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민수는 이대리처럼 살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 민수는 우유병을 문 남자 아기 인형을 안고 잠에서 깨어났다. 생전 처음 보는 인형이었다. 들고 나갔던 가방은 배터리가 방전된 휴대폰을 앞쪽 포켓에 넣은 채 얌전히 거실 소파에 놓여 있었다. 늘 전화를 받는 총무팀 직원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커지며 이대리를 바꿔줬다. 샘플을 내가 가져갔다니. 아침에 직접 회사로 가지고 나오겠다고 택시에 싣고 갔다니 민수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민수가 새벽 세시경에 간 술집 소재는 사당동이었고 업체명은 영어로 적혀 있어, 뭘 하는 집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민수는 사당동으로 갔다. 대니 친구분 아니세요? 어제 대니랑 같이 오셨잖아요. 보관 중인 분실물은 없다고 했다. 대니요? 저는 우리 이대리랑 왔는데. 민수는 바깥으로 나와 이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니가 누구야? 내가 어젯밤 대니랑 이 집에 왔었다는데. 이대리는 그냥 웃기만 했다.

업무 태만과 창의력 부족이라는 것을 이유로 민수는 지난주에 파면당했다. 민수의 자리로 올라간 건 이대리였다. 피해의식은 저 혼자 몸을 부풀렸다. 불안감이 엄습해오면 민수는 이대리의 전화번호를 노려보곤 했다. 싸이코 자식. 민수는 간단한 인사말을 적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발로 유리창을 세게 찼다. 발 앞축이 유리에 닿는 순간 핑핑 소리를 내며 신발이 튕겨나갔다. 민수는 발이 아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민수가 기억하고 있는 305호와 실제 305호의 구조는 전혀 달랐다. 모노톤의 희고 깨끗한 호텔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동그란 스틸 문고리를 손으로 잡아 돌리고 현관으로 들어선 순간 민수는 지금껏 상상해왔던 것과 전혀 다른 호텔을 보고 말았다. 호텔은 영화 속의 305호와도 또 달랐다. 공통점은 단 하나도 없었다.

벽의 한쪽 면만 북한산 쪽에 연해 창이 나 있었다. 벽지는 끝부분이 다 동그랗게 말려 접착면이 떨어진 채로 고약한 곰팡냄새를 풍겼다. 곰팡이가 심한 부분은 벽지가 줄줄이 벗겨져 바닥을 향해 늘어진 채였다. 티브이는 반이 쪼개진 채 브라운관 벽에 붙어 덜렁거리고, 매트리스는 침대 프레임 위에 가로놓여 있고 베란다 쪽으로 나가는 문도 박살이 난 채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그대로 솟아 있었다. 벽 쪽에 붙어 있는 재투성이 2인용 소파는 병든 동물처럼 식식거리며 숨을 쉬었다. 민수가 기억하는 한, 티브이와 소형 냉장고 옆에 놓아둔 협탁 위에는 흰색 양초가 하나 놓여 있었고, 벽에는 꽃을 그린 유화가 걸려 있었다. 비록 강한 세척제 냄새가 났지만 깨끗한 물컵, 흰 타월, 흰 커튼도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반쯤 열린 화장실 문을 열었다. 변기는 깨지지 않고 말짱했지만, 타일은 죽죽 그어진 얼룩과 녹투성이였다. 그에 비해 온전한 상반신 거울은 신기할 정도로 깨끗한 상태로 벽에 붙어 있었다. 민수는 워커를 신은 채 욕조 안으로 들어가 욕조 구멍을 내려다봤다. 순간 뱀의 머리가 욕조 구멍에서 올라와 머리를 내미는 동시에 민수의 정강이를 물었다. 민수는 한쪽 발로 욕조 구멍을 막느라 순간적으로 발에 세게 힘을 주었다. 민수가 발을 떼면 뱀은 아주 빠르게 욕조 구멍에서 튀어나와 여러차례 민수의 정강이를 물었다. 민수는 한 손으로 물린 정강이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민수는 욕조 바닥에 가만히 쪼그려 앉았다.

매트리스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은 어떨까 상상했다. 매트리스의 먼지를 털고 아홉시 방향쯤에 가 있는 위치를 발로 조금씩 차며 침대 프레임 안에 들어갈 때까지 움직였다. 풀썩거리는 먼지 입자가 어두운 방 안을 마음껏 떠도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그때 전화기가 반짝거렸다. 이대리가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동영상 하나 보냅니다. 심심할 때 보세요. 과장님이나 선배님이라고 부르더니 이제는 호칭도 없이 할 말만 하는 싸가지 없는 화법이어서 민수는 입술에 바람을 넣었다 뺐다 하며 다시 흥분했다. 대니가 누구냐 대니가. 너냐? 니 친구냐. 도대체 니들은 뭐냐. 싸가지 없는 새끼. 민수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했다. 지연이 병원에 간 이후로 민수의 혼잣말은 비약적으로 늘었다. 대답이라도 하듯 벽에 붙은 소파가 퓌익 소리를 냈다. 동영상은 볼수록 이상했다.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네온 조명 불빛 아래에서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갑자기 푸른 바다가 나왔고, 출렁거렸고, 해안가 안쪽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화면이 해안가 끝에 떨어진 뭔가를 향해 다가가다가 동영상은 멈췄다.

민수는 방 안을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다 무심코 현관 옆에 붙은 버튼을 눌렀다. 놀랍게도 불이 켜졌고 더럽고 먼지투성이인 방 안이 훨씬 더 잘 보였다. 지연을 데리고 왔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방이었지만 민수에게는 이제 무척 익숙하고 편하기까지 했다. 민수는 더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텔레비전 옆 화장대 거울에 붉은색 페인트로 써서 붙인 글자가 보였다. 영문 글자 OK 사이에 숫자 2가 있었다. 민수는 오투케이라고 발음해보았다. 오투케이, 오투케이!

매트리스 위에 비스듬히 상체를 기댄 민수는 시커멓게 때가 탄 천장이 아래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아 순간 머리를 감쌌다. 일시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증상이었다. 갑자기 북한산 계곡도 호텔 쪽으로 무너질 듯 위태롭게 보였다. 방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게 확실하니까 복도 오른편에 있는 방들을 다시 찾아봐야 한다고 민수는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멈추고 고꾸라지고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지연을 지금의 자리로 온전히 데려올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쪽으로 가면 된다! 내가 지연에게 넘어가면 된다! 그러면 된다! 민수는 눈을 감았다가 떴고 다시 감았다. 그냥 잠이 들면 추울 것 같아서 현관 쪽으로 가 옷장 문을 밀었다. 오른쪽 칸 바닥에는 쥐똥과 낡은 실내화 한켤레, 썩은 걸레가 놓여 있었고 왼쪽 칸 행거에는 이불은 없고 옷 두벌이 걸려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수는 그게 뭔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부직포를 뜯어냈다. 비닐 포장은 더 단단해서 뜯기가 쉽지 않았다. 민수는 신경질적으로 비닐을 찢은 뒤 안에 든 옷을 확인했다. 안산에서 없어진 점퍼 샘플 두장이었다. 민수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매트리스 위로 옷을 던져버렸다. 왜 샘플 두장이 이곳에 있는지, 이 호텔에 언제 또 왔었던 것인지 민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민수는 완전히 탈진해 매트리스 위에 그대로 누웠다. 비닐에 담긴 샘플 옷 두장을 배 위에 이불처럼 덮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찾았어, 샘플을 찾았어. 민수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민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강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댐 하류 쪽, 강 유역이 확연히 좁아진 지점에 있는 스케이트장 인근에는 주택도 없었고 은색의 가건물 창고들이나 풍력발전기 날개만 보였다. 산이 높아 종일 해가 들지 않는 곳이었지만 강이 깊어 빙질이 좋았다. 강어귀는 얼음이 조금씩 녹아 있기도 했지만 사람이 빠질 만큼 위험하지는 않았다.

낚시꾼들은 꽝꽝 언 얼음 위에 가스버너를 켜놓은 채 빙판 위의 점처럼 박혀 있었다. 어느새 주변은 극지처럼 급속도로 차가워졌고 더할 수 없이 환해졌다. 환해지고 난 뒤에는 곧바로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민수는 털 스웨터 안에 토끼를 숨긴 채 스케이트를 타는 친구를 따라 꽝꽝 언 강바닥을 미친 듯이 달렸다. 골반이 시원해지고 숨이 가빠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저쪽 강어귀까지 갔다가 다시 이쪽 강어귀를 돌아 저쪽 강어귀로 갔다. 친구가 스케이트장 중앙의 얼음낚시 구멍이 많은 쪽으로 달렸고 민수도 계속 따라갔다. 얼마쯤 가다가 달리던 친구가 멈춰 섰다. 그리고 친구는 반대쪽으로 달아나고 그가 놓친 토끼가 얼음판 위를 뛰는 게 보였다.

민수는 전속력으로 달려 친구가 멈춰 섰던 낚시구멍 앞으로 가 섰다. 분홍색 시체가 물 아래 잠겨 있었다. 몸은 강물 안에 누운 채로 얼어 있고 얼굴은 강 표면 쪽으로 밀려 떠오르려는 중이었다. 전혀 무섭지 않았다. 민수는 고요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갑자기 까마귀 소리라도 들려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호수 뒤의 산들도 여전히 고요하고 꽝꽝 언 얼음 속도 고요했다. 풍경은 겨울에 갇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민수는 상체를 숙인 채 무릎에 양손을 얹고 분홍색 시신을 들여다봤다. 분홍색 얼굴은 몹시 낯이 익었고 약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민수는 시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순간 분홍색 시신이 낚시구멍에서 약간 밀려나 얼굴의 반쯤이 얼음장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분홍색 시신은 깊은 얼음장 아래 차가운 강물 속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민수는 분홍 시신의 얼굴을 보려고 무릎을 얼음판에 댄 채 낚시구멍에 머리를 넣었다. 민수는 분홍색 시신의 얼굴을 보았고 머릿속이 아주 시원해졌다고 느낀 순간 낚시구멍에서 머리를 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