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촛불혁명, 전환의 시작

 

민주주의는 어떤 ‘기분’인가

김금희와 황정은의 최근 소설들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저서 『개념비평의 인문학』, 역서 『패니와 애니』(공역) 『도둑맞은 세계화』,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니다

 

사실상 사망을 선고받은 권력이 문자 그대로 ‘사력’을 발휘하는 광경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살아 있는 죽은 것이라면 좀비가 아니겠는가. ‘내부자들’의 온갖 작태를 다룬 영화들이 그러했듯 ‘오컬트’로 분류된 「곡성」(2016)마저 알고 보니 다큐였던지 샤머니즘에 좀비가 결합한 장면들이 현실에서도 펼쳐지는 중이다. 좀비 상상의 역사는 유구하고 다채로워서, 자본주의체제의 맹목성과 기생성이 ‘좀비 자본주의’로 표현되는가 하면 집단적 파괴력에서 혁명의 주체를 연상하기도 했다.1) 죽었으되 삶에 기생하는 체제의 비유로도 쓰이고 죽어라 억눌려도 여전히 움직이는 저항세력의 비유이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좀비는 “거의 전적으로 종말의 이미지로 통용”2)되는 것이 특징이다. 종말의 이미지로서 그것은 무엇보다 종말이라는 것이 어떤 속성을 갖는지를, 혹은 종말 자체는 결코 종말이 아니라는 점을 일러준다.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닌데 끝이란 다른 무언가의 시작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새로운 시대가 실제로 시작되지 않고는 진작 끝났어야 마땅한 이 권력도 아직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끝났다고 생각되는 것이 살아 있는 척 남아 있듯이, 사라져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 엄연히 존재할 수도 있다. 트럼프(D. Trump)의 대선 승리가 확정된 다음날,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는 페이스북을 통해 “다음날 아침 해야 할 일”(Morning After ToDo List)이라는 리스트를 제출했다(2016.11.9). 리스트는 “민주당을 접수하여 민중에게 돌려주라. 그자들은 처참하게 우리를 실망시켜왔다”라는, 이 시점의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요청으로 시작해 ‘다수’는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았음을 잊지 말자는 다짐으로 끝난다. 미국 시민 ‘다수’는 기후변화가 실재한다고 믿고 남녀평등과 빚에 쪼들리지 않는 대학교육과 최저임금 인상과 보편적 의료보장을 지지하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데 반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마지막의 이 다짐이 절실하고 현명한 처사로 보이는 이유는, ‘이명박근혜’ 정부를 거치는 사이 집권세력을 향한 분노만큼이나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던 감정이 바로 우리 자신까지 포함하는 ‘동료 시민’에 대한 불신이었기 때문이다.

촛불광장은 정권교체를 거의 성취하고 시대교체의 과제를 분명히 한 데 더하여 우리 자신과 화해하고 동료를 향한 신뢰를 재발견하게 해준 점에서 혁명의 시간이자 치유의 시간이었다. 그간 이곳이 ‘헬조선’임을 실감케 하는 ‘갑질’이 어떠했으며 처절한 ‘각자도생’만이 유일한 선택이라는 자조는 어떠했던가. 아니 각자의 도생마저 번번이 꺾어놓는 상황이었기에 광장의 시간은 더 놀라웠고 지나온 나날들과 선명하게 구분되는 혁명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또한 새삼스런 경이로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와 연대감같이 사라진 듯 보이던 민주주의적 감정들이 ‘잠재성’의 형태로 실재해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아주 없음”이 된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3)이었던 것이다.

 

 

2. 어떻게 가만히 있었던가

 

촛불혁명은 실제로 광장에 나오거나 지켜보며 지지한 사람들을 변화시킨 동시에 그들에게 ‘이미’ 일어난 변화를 기록한 사건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나온 ‘사이다’ 발언들이 그 증거였다. 그런 점에서 D. H. 로런스(Lawrence)가 말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진정한 개별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살아가는 동안 심지어 자기 내부에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또 이해하고자 한다. 언어화된 의식을 향한 이 싸움은 예술의 전유물일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커다란 삶의 일부다. 이론을 보충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열정적인 싸움(passionate struggle)이다.4)

 

광장은 권력을 퇴진시키는 싸움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이고자 하는지, 민주주의란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고 또 이해하고자’ 하는 ‘열정적인 싸움’의 현장이었다. 그 싸움을 통해 무엇보다 우리가 누구인지와 민주주의란 무엇인지가 같은 질문임이 ‘수행적으로’ 확인되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대통령과 국회가 헌법기관이라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권력기관”5)이라 체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둘 사이의 간극은 논리가 기계적으로 작동한다고 채워지지 않는다. 국회 탄핵가결 촉구 집회에 나가며 “내가 가야지 가결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는 어느 시민의 말처럼,6) 그것은 많은 이들의 내부에서 내가 나서지 않고는 안 되겠다, 꼭 내가 나서야겠다,는 어떤 ‘기분’ 혹은 감정이 발동했기에 일어난 비약이었다.

이런 기분이 누구도 나를 대변해주지 못한다는 좌절감의 다른 이름이며 거기에 담긴 ‘대의민주주의’의 실패 혹은 그에 대한 불신이 우려스럽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촛불은 좌절 끝에 환멸하거나 좌절 자체를 유일한 비전으로 활용하는 세력에게 만사를 내맡기는 대신, 스스로를 대변하는 행위를 통해 제대로 대변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시연했다. ‘주권권력기관’으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곧 ‘민의 자치’로서 민주주의를 세우는 일이라는 인식이 촛불의 ‘열정적인 싸움’이 거둔 소중한 앎이고 이해다. 아득해 보였던 개인과 광장의 거리는 이 앎과 이해의 힘으로 일순 메워진다.

그러나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린’ 이 정권이건만 세월호에서 광장까지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고 결정적 국면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를 진작 실천해온 세월호 유가족, 생존자들과 활동가들의 지난한 싸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광장이 어떻게 가능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참사 당시조차 ‘가만히 있었던’ 쪽은 오로지 구조에 나서야 했던 권력과 일찌감치 빠져나간 책임자들이었다. 세월호에 남아 있던 어느 누구도 실은 그저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었다.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소속의 미류는 생존학생의 기억을 듣고 “‘가만히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시키는 대로만 따른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살아 나가기 위해 주어진 조건에서 온힘을 다했다. 다른 승객들도 그랬다. 구명조끼를 찾아주고 서로 입혀주고 끈을 묶어주었다. 부모와 헤어져 우는 아이를 달래며 밖으로 밀어올렸다. 손을 쓸 수가 없으니 내 발을 잡으라며 서로를 지켰고 친구를 찾으러 배 안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잘못된 지시를 그냥 따르다가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 아니다. 함께 살려던 사람들을 제각각 살아남도록 강요해 죽인 사건이다.7)

 

그렇다면 세월호가 그어놓은 ‘최전선’에 미처 나서지 못한 우리들 다수는 ‘어떻게’ 가만히 있었던가. 시간이 지나 눈물이 마른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그 부끄러움마저 잊히도록 일상에 쫓기다 무력감만 쌓인 것 같던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지내고 있었나. 진실을 향한 싸움을 ‘진정성’의 문제로 환치하며 그저 내면을 응시하는 듯 보이던 사람들의 감정에선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이렇듯 때가 되자 거리로 향하게 된 것일까. 로런스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이해하려는 싸움을 예술에만 맡겨둘 수 없다고 했지만, 특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일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식하는 작업은 이 ‘열정적 싸움’을 전업으로 삼은 작가들의 주된 소임이 된다.

김금희(金錦姬)의 단편 「조중균의 세계」8)에도 별스레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세계’를 가진 걸로 되어 있는 출판사 직원 조중균씨만 해도 “융화가 안” 된다(51면)는 이유로 “교정 교열만 담당”하며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인물이다. 많이 지적된 바지만, 고립을 자초 혹은 수용하며 “사무실에서 마치 유령, 유령처럼 보”이는(47면) 조중균씨에겐 일찍이 뉴욕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안 하고 싶습니다’를 연발하며 ‘가만히 있음’의 새 경지를 돌파한 필경사 바틀비(Bartleby)의 그림자가 뚜렷하다.9)

하지만 지금 이곳의 상황에서 일체의 업무를 거부하는 바틀비식 사보타주란 반나절도 못 버틴 해고를 초래했을 터, 이 점은 조중균씨가 규정상 안 먹어도 되는 사내식당의 점심식사를 ‘안 하고 싶다’고 했다가 점심시간 내내 식당 한구석에 서서 식사를 ‘안 하고 있음’을 증명하고서야 겨우 식대를 돌려받은 사건으로 잘 확인된다. 조중균씨의 잘못이라면 성실하고 꼼꼼하게 ‘하고 싶어한다’는, 말하자면 회사 입장에서 몹시 비효율적으로 일한 점이다. “조중균씨가 잡아낸 오류들을 보면 잡아내야 할 만하기도 했”고(55면) 심지어 그러느라 매일 야근을 하며 남들이 다 퇴근한 “사무실의 어둠을 아주 따뜻한 담요처럼 덮고 원고의 세계로 빠져들어”가는(56면) 것이 그의 ‘세계’이다. 이처럼 ‘가만히’ 업무를 수행하겠다는데도 너무 많은 박해와 맞닥뜨리는 것이어서, 조중균씨는 급기야 자신의 업무 성실도를 동료직원의 사인으로 확인받는 표까지 만들어보지만 결국엔 해고를 면치 못한다. 조중균씨가 사는 세계 역시 가만히 있으려 해도 그렇게 놓아두는 곳이 아니다.

그가 쓴 시 제목처럼 마치 ‘지나간 세계’와도 같은 조중균씨지만 그를 지켜보는 두개의 시선이 있다. 해란씨와 ‘나’는 수습기간이 끝나면 둘 중 하나만 남게 되는 신입사원이다. 대학원도 다녔고 얼마간 경력도 있는 ‘나’는 조중균씨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사무실 분위기에 쉽게 ‘융화’하는 데 비해, 이렇다 할 스펙 없이 노동현장에서의 “고난의 행군”을 거쳐 그 자리를 얻어낸, 그러나 “고생한 사람은 그렇게 딱 티가 나”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는(46~47) 소리를 듣는 해란씨가 그에게 더 공감하는 것은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해란씨가 없었더라면 ‘나’에게 조중균씨의 세계는 한줌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조중균씨의 친구 형수씨가 전하는 ‘지나간 세계’의 풍경과 대학 시절의 조중균씨를 둘러싼 ‘영웅담’은 이 둘 사이의 관계만큼이나 다분히 감상적이고 어딘지 미심쩍다. 데모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던 시를 두고 “누구든 자기 이름을 붙여 자기가 쓴 것처럼 연단에서, 광장에서, 거리에서 낭송할 수 있었”으니(67면) 자기가 썼어도 자기 시가 아니라는 주장을 무슨 최대치의 진실인 양 두고두고 간직한 조중균씨에게도, 또 이 ‘지나간 세계’를 두고 “참 슬프다고 훌쩍거”리는(68면) 해란씨에게도 온전히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그 때문에 해란씨의 시선에 ‘나’의 시선을 더하여 소설의 구도가 짜여야 했을 것이다. 조중균씨가 직무유기와 태만이라는 ‘허위사실’로 해고되고, 고생함으로써 남에게 불편을 준 해란씨도 내쳐진 다음, 예상대로 정규직이 된 ‘나’는 이제 안착과 허무를 동시에 느끼면서 “그래도 고기를 굽고 주는 대로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기는 한다(70면). ‘지나간 세계’는 정말 지나가고 만 것인가. 그러나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그것을, ‘나’는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하는 질문의 형태로 지속시킨다. “뭐가 있었는가보다는 뭐가 없었는가가 더 세세히 떠올랐”을망정 그 없음의 흔적으로 ‘나’는 그것을 기억한다.

 

거기에는 육인용 테이블이 없었다. 복수를 잊어버린 조중균씨도 없고 빈 시험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조중균씨도 없었다. 나태한 조중균씨도 없고 내 사인이 적힌 수첩도 다행히, 아주 다행히 없었다. 문장과 시와 드라마는 있지만 이름은 없는 세계, 내가 간신히 기억하는 한, 그것이 바로 조중균씨의 세계였다.(71면)

 

기억이 지속되는 한, 없는 것들의 목록에는 아마도 많은 항목이 추가될 것이다. 야근하다가 근무태만이 되는 일이 없고, 고생함으로써 남에게 불편을 주는 일이 없으며, 참사가 일어나도 머리를 다듬는 일이 없고,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는 일이 없는 세계. 있었던 것들이 다 좋아서가 아니라 없어야 좋을 것에 대한 환기로서 이 ‘지나간 세계’는 머물러 마땅한 세계가 된다.

그러니 가만히 있는 듯 보인다고 가만히 사는 건 아니며, 때로 어떤 일은 ‘가만히 있음’에서 발생한다. 김금희의 또다른 단편 「너무 한낮의 연애」가 보여주는 것이 그런 역설적 운동성이다. “어쩔 수 없이 발휘해야 했던 융통성들”(12면) 탓에 영업팀장에서 하루아침에 지하사무실의 시설관리팀 직원이 된 필용은 울분을 삼키지 못해 점심시간마다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래봤자 기껏 맥도날드에서 ‘혼밥’을 하던 그는 대학 시절 매우 독특한 연애관계에 있었던, 조중균씨만큼이나 분명한 자기 세계를 가진 양희의 공연 현수막을 보게 된다. 관계랄 것도 없다 싶은 두 사람의 연애는 정말 별일이 없기에 더 특별했는데, 이 소설이 갖는 주된 매력은 좀체 상상하기 어려운 둘의 관계를 실감나게 묘사한 데 있다.

같은 어학원 강의를 듣게 된 것을 계기로 어영부영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던 필용과 양희는 느닷없고 무덤덤한 양희의 고백으로 연애를 시작한다. 이들의 연애는 처음부터 어긋남과 무심함과 지속 불가능 위에 구축된다. 연애가 시작되었다기에 무색할 만큼 둘의 관계는 거의 변한 것이 없었고, 고백을 듣고 몹시 동요한 필용과 달리 정작 양희는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겠다는 식이다(22면). 그러니까 이 연애의 독특함은 “앞으로 펼쳐질 인생, 그 과정에서 반드시 이겨내야 할 어려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나서야 얻게 될 성취와 인정에 대해 상상하며 지냈”던 필용과, “현재라는 것만 있었”고 그마저 “지금 생생하게, 운동감 있게 펼쳐지는 상태가 아니라 안개처럼 부옇게, 분명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게 풀풀 흩어지는 것에 가까웠”던 양희의 성격 차이(15면), 더 정확히는 양희라는 인물의 그와 같은 드문 됨됨이에서 비롯했다. 미래의 더 많은 축적에 대한 기대로 굴러가는 이 ‘성과사회’에서 양희는 여전히 ‘풀풀 흩어지는’ 현재에 집중하며 관객 한 사람을 가만히 마주하는 무언극을 하고 있다.

이 소설 역시 양희의 세계에 적극적이고도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면 양희 자신의 ‘단독성’에 대한 적절한 대접이 못되었으려니와 전체적인 여운도 덜했을 것이다. 대신 끊임없이 휘둘리며 갈피를 못 잡는 필용의 마음에 양희의 ‘가만히 있음’이 어떤 생각과 의문을 지펴놓는 데 방점이 찍힌다. 마지막 공연에서 무대에 올라 양희와 마주하는 상대역으로 참여한 필용에게 이런 것들이 남는다.

 

양희야, 양희야, 너 되게 멋있어졌다. 양희야, 양희야, 너, 꿈을 이뤘구나, 하는 말들을 떠올리다가 지웠다. 안녕이라는 말도 사랑했니 하는 말도, 구해줘라는 말도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양희의 대본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필용은 가로수 밑에 서서 코를 팽 하고 풀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바뀌면 얼마나 바뀔 수 있었을까.(42면)

 

언제나 어긋나는 미래로 자신을 투사하여 정작 현재를 ‘풀풀 흩어버리는’ 쪽은 필용이었다. 그의 말대로 얼마나 바뀔 수 있을지 모를 일이나 비로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필용 자신만큼은 이미 바뀌고 있다. 던져진 질문과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42면) 사이에서 필용이 느끼는 아득함이야말로 그 징표이다.

 

 

3. 세월호와 광장 사이의 ‘진공관’

 

황정은(黃貞殷)의 중편 「웃는 남자」(『창작과비평』 2016년 겨울호)는 가난하고 고달프고 억울한 삶의 피폐함을 가장 통렬히 그릴 때조차 어떤 존중과 존엄을 담고야 마는 황정은 특유의 ‘시그너처’가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무엇보다 세월호에서 촛불광장까지의, 결코 직선이 아니었던 그 서사의 또다른 판본처럼 느껴진다. 죽음과 상실, 그리고 슬픔과 죄책감과 환멸을 거치며 배어나온 무언가가 어느 순간 뜨겁게 달아오를 것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말미의 주석에 나오다시피 이 소설은 「디디의 우산」(2010)과 단편 「웃는 남자」(2014)10)에 이어지는 작품으로, 후자와는 제목이 같을 뿐 아니라 d(단편의 ‘나’)가 연인 dd(단편에서는 디디로 지칭된다)의 죽음을 겪고 스스로를 유폐시킨 이야기의 연장인 점에서 연속성이 높다. 두 사람의 사랑과 상실, 그리고 세계와 자신을 향한 환멸이 중심을 이루는 단편과 달리 중편은 d가 유폐로부터 걸어나오는 이정이 담기지만, 실은 그 이정의 시작 또한 단편 마지막에 암시되어 있었다.

 

디디를 먹어치운 거리. 디디의 목을 부러뜨리고 머리를 터뜨린 거리. 거기엔 의미도 희망도 사랑도 없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여기는 다른가.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 여기 무엇이 있나. 벌거벗은 벽이 있고 내가 있고 의자가 있고 내 잡동사니가 있다. 나는 이것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먹고 자고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며 기묘한 욕을 내뱉는다. 공중에 대고 침을 뱉듯이. 그리고 그 침은 대개 내 눈썹과 내 턱으로 떨어지지.

내가 여기 틀어박혔다는 것을 아는 이 누구인가.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나가야 할 것이다.(185면)

 

여기서 스스로를 유폐하는 과정이나 유폐를 벗어나야 한다고 느끼는 과정 둘 다가 사실상 동일한 질문을 동력으로 삼은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디의 죽음을 떠올리며 ‘나’는 “내 잘못이 무엇인가./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뭔가 잘못되었는데…… 그 잘못에 내 잘못이 있었나. 잘못이기는 한가…… 아니다 잘못이다. 그게 잘못이 아니라면 무엇이 잘못인가. 나는 어쩌면 총체적으로, 잘못된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177면)를 묻는다. 사고가 난 순간 반사적으로 디디가 아니라 가방을 붙잡은 것을, 언젠가 버스정류장에서 쓰러진 노인을 못 본 체한 것을, 어쩌면 이런 ‘패턴’을 물려주었을지 모르는 아버지의 잘못을, 그리고 내처 스스로를 유폐한 공간마저 바깥세계와 다르지 않음을 곱씹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생각할수록 나의 삶을 생각”하고(184면) 내 잘못을 생각하며 궁극적으로 내가 어떤 인간인지 묻는 것, 이는 세월호 이후 우리들 다수가 반복했던 과정과 다르지 않다.

중편은 이런 생각과 질문을 좀더 확장된 형태로 지속한다. 소설이 시작되고 한동안은 단편에서의 분노와 환멸과 혐오가 이어진다. d의 아버지 이승근은 ‘목공소’라는 이름이 암시할지 모를 수공(手工)의 아우라가 일체 소거된 작업실에서 “정확하지 않았으며 안정적이지도 않았고 실용적이지도 아름답지도 기발하지도 심지어 기괴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만든다. 그는 “d를 때리지 않았고 아내가 만든 음식을 불평하지 않고 남김없이 먹었으며 술이나 경마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자기 목공으로 세 사람이 먹고산다는 말을 끊임없이 했다. 그것이 얼마나 신성한 일인가도.”(210면) 실제의 노동에서나 나날의 생활에서나 다름 아닌 그 신성함이야말로 이승근에게 없는 것이므로 그가 입에 올리는 먹여 살리기의 ‘신성함’은 d에게 견디기 힘든 분노를, 그리고 어디에도 “신성한 것이 없”다(211면)는 환멸을 불러일으킨다.

d의 집주인으로 “집세를 지불하는 날이 되면 문을 두드릴 테니 손만, 그러니까 문을 조금만 열고 돈을 쥔 손만 내밀면 된다고”(219면) 말하며 몸소 시범하던 김귀자 역시 먹고살기의 ‘신성함’에 갇힌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 친구들이 마당에 앉아 나누는 전쟁 이야기는 알게 모르게 d에게 스며든다. 그들은 “하루 혹은 반나절도 되지 않는 폭격으로”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라기보다는 거의 무의식적인 확신과 예감을 지닌 채 살아왔”고 따라서 “그 맴속에서…… 전쟁은 완전하게 중단된 적이 없는 것 같다”(216~17면)고 토로한다. d를 진저리치게 만든 김귀자의 그 간결한 ‘물신성’의 제스처가 어디서 연유하는지 여기서 에둘러 드러난다.

고단한 피난길에서 남의 담벼락에 달린 조롱박 하나를, 그것도 “반드시 먹으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게 다만 탐스럽게 예뻐서” 따다가 ‘도둑년’ 소리를 들었다는 김귀자의 이야기에는 먹고살기의 ‘신성함’을 다만 냉소할 수 없게 만드는 무게가 있다.

 

대낮에 내가 너무 야속하고 부끄러워서 눈물이 났어. 그때 내가 매우 놀라며 깨달았지. 내가 우는구나 부끄러운 것을 다 느끼는구나 살아서 이렇게 있구나. 그러자 이번엔 그게 기쁘고 막막해 눈물이 났다. 내가 살아야겠다 이왕에 여기까지 살았으니 끝내 살아보자는 뚜렷한 맴이 들었어…… (…) 손녀하고 딸년은 내 사는 꼴이 지저분하다고 부끄럽다지만…… 그것이 무엇이 부끄러운가? 내가 아는 부끄러운 것 중에 그런 것은 없어.(218~19면)

 

김귀자들의 전쟁 체감은 dd의 죽음이 “우리가 너무 하찮아서, 충돌 한번에 내동댕이쳐질 수 있기 때문”(281면)이었다고 느끼는 d의 감각과 그리 멀지 않다. d는 그저 귀를 기울이다 말다 하지만 그녀들 나름으로 삶의 ‘하찮음’에 저항한 이 이야기들이 d의 어딘가에 ‘잠겨 있음’의 형태로 공명을 만들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신성함과 하찮음의 교차라는 주제는 이후 d가 인연을 맺는 세운상가의 여소녀로 이어진다. 여소녀가 d와 무심한 듯 말수 적은 우정을 나누게 되는 것은 그 역시 스스로를 “남은 사람들”(231면)로 여긴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소녀가 남은 세계는 “거래는 활발하지만 사람은 드물고 빈 가게는 늘어가고, 이거 참 괴이”한 상황이다. 그가 “종국에는 거대한 창고와 단 한명의 관리자만 남지 않을까”(235면) 상상하는 대목은, 몸과 마음이 차가워진 d가 집 안의 사물들이 품은 “미적지근한 온기를 참을 수 없어”하던(209면) 도입부의 장면을 환기한다.

이승근의 목공소와 d의 방이 그렇고 세운상가와 여소녀의 수리실이 그런 것처럼, 이 소설에는 공간, 특히 공간을 채운 사물들이 매우 주의깊게 묘사되어 있다. 산만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이 묘사들은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보면 인물이 삶에 대해 갖는 감정들과 미묘하면서도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사물은 상실과 소외를 도드라지게 하지만, 때로 고립을 공유하는 동료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관계를 매개한다. 가령 여소녀가 세운상가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좀체 구하기 힘들어진 오래된 스피커와 앰프 부품들이 그와 더불어 ‘남아 있기’ 때문이다. d는 여소녀가 그를 ‘아는 사람’으로 호명해준 덕에 슬그머니 이 수리실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거기에는 여소녀와 사물들이 만드는 교감의 분위기(수리된 사물에서 나오는 음악으로도 표현된다)도 한몫을 했다. 여소녀가 마련해준 오디오를 통해 ddd의 ‘남은’ 사물들과 다시 관계를 맺게 되고 이것은 dd가 남긴 책 ‘REVOLUTION’을 매개로 박조배를 만나 광화문으로 향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사물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이 소설이 인물들의 관계를 복잡하게 펼쳐내거나 속도감 있게 사건을 풀어가지 않는 점과 관련된다. 상실과 고립이라는 압도적 ‘초기설정’으로부터 미세하고 조심스럽게, 얼핏 그저 ‘기분’과 느낌의 변화로서 나아가는 서사인 것이다. 인물들이 사물화와 삶, 하찮음과 신성함을 위태롭게 넘나들며 가까스로 자신을 지켜내는 모습은 그 내성적(內省的) 노정에 걸맞게 무엇보다 사물들에 비추어지거나 배어든다. 따라서 ‘서사(와 유기적으로 연관된 묘사)냐 (서사와는 무관한) 묘사냐’ 하는 루카치적 질문은 이 소설에서 사물의 묘사가 어떤 서사적 맥락을 갖는가 하는 방식으로 던져지기보다 묘사 자체가 어떤 서사적 맥락을 생산하는가를 살피는 방식이어야 한다. 중편 「웃는 남자」에서 사물들은 사라진 관계의 유품이자 남은 관계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작품 마지막에 등장하는 ‘진공관’은 사물의 묘사가 생산한 가늘고 연약한 맥락들의 정점을 이룬다. 하지만 거기까지 이르기 전에 물리적이고 감정적인 긴 우회를 거쳐야 한다. 우선 차벽에 막힌 광화문 주변을 말 그대로 우회하며, “세계가 곧 한번 더 망할 것”인데 “이 상황을 봐라. 얼마나 투명하고…… 얼마나 좆같냐. 그리고 그 좆같음이 눈에 보이잖아? 그냥 조용히 아닌 척하고 망해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275면)는 박조배의 ‘리셋 정서’11)가 있다. 그리고 “비상한 일이 벌어지는 때……라는 것이 따로 있을까?”를 반문하며 “망한다고?/왜 망해./내내 이어질 것이다. 더는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삶이. 거기엔 망함조차 없고…… 그냥 다만 적나라한 채 이어질 뿐”(277~78면)이라는 d의 심경도 놓여 있다.

그러나 d가 표명하거나 의식하는 감정과는 다른 층위에서, 김귀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여소녀와 인연을 맺고 박조배와 광화문으로 향한 d는 이미 유폐된 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소녀의 수리실에서 난생처음 본 진공관은 또다른 생각으로 그를 이끈다.

 

d는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얇은 유리 껍질 속 진공을 들여다보며 수일 전 박조배와 머물렀던 공간을 생각했다. 그 진공을. 그것은 넓고 어둡고 고요하게 정지해 있었으나 이 작고 사소한 진공은 흐르는 빛과 신호로 채워져 있었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연인을 잃었고 나도 연인을 잃었다. 그것이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283~84면)

 

이 대목이 너무 직접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제각각 다른 ‘하찮음’에 시달리다 어느 순간 광장의 ‘빛과 신호’에 반응한 수많은 촛불들이 직접적인 것과 동일한 종류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민주주의의 ‘기분’은 ‘나는 어떤 인간인가’를 묻는 마음의 진공을 통해 발생한 “정류와 증폭”(282면)이며 우리 모두가 중대한 ‘삶의 싸움’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촛불이 본격화하기 전에 완성된) 이 소설의 마지막, 무심코 진공관을 잡은 d에게 건네진 말은 거의 예언으로 들린다. “우습게 보지 말라고 여소녀가 말했다. 그것이 무척 뜨거우니, 조심을 하라고”.(284면)

 

 

4. 민주주의의 감정들

 

정동(情動, affect)12) 연구에 새로운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킨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는 부시(G. W. Bush) 미국 전 대통령의 이라크 선제공격론을 중심으로 위협(threat) 혹은 그것의 실재 존재 양식인 두려움(fear)이 어떻게 “정동적 사실”(affective fact)13)로서 현실을 구성하는지 분석한다. 두려움이라는 정동적 얼룩이 묻으면 실재하지 않는 대상도 실재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담 후세인(S. Hussein)이 실제로는 그럴 능력이 없지만 만일 능력이 있었더라면 공격을 했을 것이라는 “이중의 조건명제”(double conditional, 54)는 선제공격을 요구하는 ‘정동적 사실’로 작동한다. “설사 현실화되지 않는다 해도, 현실화될 수 있었다면 언제든 현실화되었을 것”(56면)이라는 희한한 자기정당화를 통해 위협은 현실에 대한 감각과 인식을 ‘오염’시킨다. 이렇게 되면 미래의 어떤 불확실한 위협이든 가정될 수 있는 한 현실이 될 수 있다. 최근 트럼프정부가 들먹인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 같은 표현 역시 이와 흡사한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같은 책에 실린 로런 벌랜트(Lauren Berlant)의 글은 감정의 현실 구성력에 관련된 또다른 사례를 보여준다. 실제로는 자기 삶을 위협하는 대상인데도 그것을 잃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애착이 있다. 이를 일컫는 ‘잔혹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는 “애착의 내용이 무엇이든 애착이라는 형식의 연속성이, 계속 살아나가고 앞으로도 세상에 존재하리라 기대하는 것이 갖는 의미의 연속성을 주체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에 생긴다.14) 더 나은 삶을 약속해주는 듯 보이지만 실은 삶의 가능성을 갉아먹고 파괴하는 이런 낙관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더 비참해지게 만드는 온갖 사태를 그저 두고보면서 익숙한 애착 체계에 편승”한다(97면). 고작 연속성에 집착하여 삶 자체를 훼손당하는 이 아이러니는 가장 절실한 순간에조차 변화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설명해준다.

얼핏 상반된 감정인 것 같아도 미래를 대하는 이런 식의 두려움과 낙관은 둘 다 우리를 나쁜 현재에 묶어둔다. 그렇다면 어떤 감정들이 나쁜 현재를 바꿈으로써 다른 미래를 도모하게 하는 것일까. 김금희와 황정은의 소설은 나날들의 하찮음을 절감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되는 마음의 움직임을 기록한다. 거기에 담긴 ‘있지 않음’과 ‘비워짐’은 세계가 어째서 이러한가를 나 스스로를 향한 질문으로 받아안았기에 생긴 ‘광장’이다. 삶의 어느 한순간도 하찮을 수 없으므로 가정된 미래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또한 (정동적 사실이든 대안적 사실이든) 온갖 ‘오염된’ 사실들 너머 진실을 ‘애착’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이런 것들이 여전히 긴 싸움의 도정에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민주주의의 감정일 것이다.

 

 

1) 이정진 「좀비의 교훈: 새로운 정치적 주체에 대한 이론적 논의에 부쳐」, 『안과밖』 제34호(2013년 상반기) 참조.

2) 같은 글 244면.

3)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너무 한낮의 연애』, 문학동네 2016, 42면.

4) D. H. Lawrence, “Foreword to Women in Love”(1919), Phoenix Ⅱ: Uncollected, Unpublished, and Other Prose Works by D. H. Lawrence (Viking 1970) 276면.

5) 탄핵 표결을 앞둔 국회광장 탄핵토크 집회에서 김제동씨가 한 발언의 일부이다.

6) 「“국민의 승리다” 국회 앞 환호성… “헌재도 거스르지 못할 것”」, 한겨레 2016.12.10.

7) 미류 「두번째 봄에 틔우는 질문」, 『창작과비평』 2016년 여름호 539면.

8) 2014년에 발표되었으며 앞서 인용한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에 실렸다.

9) 허먼 멜빌 외 『필경사 바틀비』, 한기욱 옮김, 창비 2010 참조.

10) 각각 『파씨의 입문』(창비 2012)과 『아무도 아닌』(문학동네 2016)에 실렸다.

11) 엄기호는 갑질과 불의에 대한 분노와 변화가 불가능한 데 대한 환멸이 결합되어 종말론적 파국 혹은 리셋을 유일하게 남은 대안으로 생각하는 이런 정서를 “과격한 무기력”이라 부른다. 엄기호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창비 2016, 20면.

12) 꽤 널리 통용되고 있으나 여전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 단어를 좀더 일반적인 ‘정서’로 옮겨도 충분하다는 견해도 있으나 여기서는 그대로 ‘정동’이라 옮긴다. 최근의 정동 연구들이 이론적으로는 정태적이고 범주화된 감정(emotion)과 더 신체적이고 관계적이며 생성적인 정동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지만 실제 분석에서 이런 차이가 얼마나 유지되는지 의문일 때도 많다. 이 글에서는 감정, 정동, 기분, 느낌 같은 단어들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썼음을 밝혀둔다.

13) Brian Massumi, “The Future Birth of the Affective Fact: The Political Ontology of Threat,” Affect Theory Reader, ed., Melissa Gregg and Gregory J. Seigworth (Duke UP 2010) 54면.

14) Lauren Berlant, “Cruel Optimism,” 같은 책 9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