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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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3·1운동의 현재성: 100주년에 부쳐

 

3·1운동, 한국 근현대에서 다시 묻다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명예교수. 저서 『실사구시의 한국학』 『이조시대 서사시』 『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편서 『이조한문단편집』(공편) 『신편 백호전집』 등이 있음. lim1767@skku.edu

 

 

1. 3·1운동으로 향한 나의 문제의식

 

한국인의 근대정신은 3·1운동으로 깨어났다. 해서 비록 그 소기의 정치적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이를 계기로 한국의 근대문화가 창출될 수 있었다. 그 일환으로 이 땅에 신문학도 피어났다. 이것이 3·1에 대한 나의 기본 관점이다.

나는 우리의 고전을 붙들고 있으면서 한문학을 전공으로 하는 자이다. 그럼에도 3·1에 파고들지는 못했어도 학문의 길에 들어서 어언 50년이 된 지금까지 그것은 나의 관심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거기에 관련한 견해를 기회가 닿을 적이면 표명해왔고 나름으로 학적 탐구를 해보기도 하였다. 일찍이 한국문학사 인식의 시론으로서 「신문학운동과 민족현실의 발견」1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3·1 당시 각성된 신지식층의 의식이 신문학운동으로 발양되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3·1의 힘을 받아 세워진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로서 발간된 『독립신문』 지상에 실린 시편들을 ‘항일 민족시’라는 명목으로 소개했다. 한낱 자료 발굴에 그치지 않고 앞의 주장을 보완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2

다음 「1919년 동아시아, 3·1운동과 5·4운동」3에서는 한반도의 3·1과 중국 대륙에서 발발한 5·4의 역사적 동시성과 함께 양자 공히 정치적으로 반제 민족주의 운동이자 신문학운동으로서 문화혁명적인 성격을 띠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3·1에 대한 시야를 동아시아 차원으로 넓혀 사고하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3·1은 한국 근대의 본격적인 출발 지점이다. 그렇기에 이 지점은 한국 근현대가 안고 있는 대립 갈등의 발원처이기도 하다. 3·1은 문자 그대로 거족적이어서 혁명적 영향력을 폭넓게 불러올 수 있었다. 하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후로는 명실상부한 거족적인 움직임은 재현되지 못했다. 일제 지배하에서는 불가능했으니 말할 나위 없다고 하겠거니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환희조차 민족 통일적으로 다함께 만세를 부르며 어울려 춤추지 못하는 상황이 앞에 닥치고 말았다. 남북의 공간적 분리가 좌우의 이념적 갈등과 혼합되어서 마침내 분단체제로 고질화되고 장기화하다가, 촛불에 이르러 비로소 결정적인 제동이 걸리게 된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에서 남북분단까지 이어진 한민족의 삶에서 외적 요인이 결정력을 행사해온 것은 엄중한 사실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내적인 요인과 생리가 부단히 작용해왔다. 우리로서는 이 측면을 먼저 성찰하고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3·1의 거족적 함성이 잦아들 무렵에 벌써 좌우의 사상 대립이 발생하여 차츰차츰 악성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48년과 1949년, 한반도상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개의 상호 배타적인 국가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양자는 서로 이념을 달리한 만큼 각기 내세우는 정통성의 근거가 달랐다. 주지하다시피 남쪽의 대한민국은 정통성을 3·1에서 찾아 법통을 임시정부에 대었다. 반면 북쪽의 조선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이 영도한 ‘항일 혁명투쟁’을 전면에 내세웠다. 3·1에 대해 좌파에서 북조선으로 이어진 일관된 논리는 3·1을 중시하면서도 실패의 요인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춰서 비판적인 쪽으로 기울었다. 이처럼 남과 북의 3·1에 대한 인식론은 각도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데 양자 공히 분단의 논법인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

3·1을 자기 정통성의 근거로 삼고 있는 남쪽 역시 3·1을 대하는 눈은 대체로 선명치 못하고 애매하다. 왜 그럴까? 대한민국을 주도한 인물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임시정부 쪽과는 입장이나 노선이 맞지 않았던데다가 이후로도 당초의 대미 의존적 성격을 탈각하지 못한 때문이다. 최근 박근혜정권이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분으로 무리하게 3·1의 평가절하를 도모했던 것도 우파 이념이 대미 의존적으로 극단화된 양상이 아니었던가 싶다.

올해는 3·1 백돌을 맞는 해다. 이 지점에서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념이 나의 뇌리를 맴돌고 있다. 거기에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에 당면해서 체감하게 된 사태가 3·1로 눈을 돌려서 다시 묻도록 만든 것 같다. 하나의 학적 주체로서 지금까지 3·1에 관심하여 사고하고 발언했던 것도 기실 한반도의 분단현실에 저항하고 남북에 각기 통행하는 주류 논리를 비판하려는 취지를 나름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남한사회에서 뜨겁게 타오른 ‘촛불’, 그로 인해 개시된 제반 상황을 체험하며 더욱 절실해진 소회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에 타오른 ‘촛불’은 앞서 3·1이 제기한바 미완의 과제를 완수해야 한다는 민족사적 사명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위로 19세기에 상승일로에 있었던 민중운동이 여기 와서 일대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후로 4·19와 6월항쟁 같은 여러 고비를 거쳐서 오늘의 ‘촛불’에 이르러는 민족사적 과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드디어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한국운동사의 역동적인 진화과정을 살펴본 다음, 3·1을 둘러싼 근현대의 쟁점에 대해 짚어보려고 한다. 민주를 지향한 운동사를 종관하는 인식의 틀에서 3·1의 위상을 잡고 그 구도에서 3·1의 역사적 의미를 해석하려는 취지이다.

 

 

2. 운동사의 진화과정에서 3·1 돌아보기

 

여기서는 중국 근대 민국혁명의 아버지인 쑨 원(孫文)이 한국의 3·1에 대해 평가하고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발언으로 논의의 단초를 잡아보자.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3·1 직후에 유림의 뜻을 모은 문건을 빠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몰래 출국해서 상하이로 나갔다가, 김규식이 한국을 대표하여 빠리로 벌써 떠났기 때문에 문건을 영역해서 송부하고 자신은 상하이에 남아 임시정부의 수립 활동에 합류하게 된다. 이에 김창숙은 남행하여 광저우(廣州)로 가서 쑨 원을 만난 것이다. 쑨 원이 한국의 김창숙을 접견해서 발한 제일성은 “대저 10년이 못되어 이같은 대혁명이 일어난 예는 동서고금의 역사에 드문 일입니다”라는 말이었다.4 그후에 또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이 한국 임시정부의 전사 자격으로 쑨 원을 찾아간다. 신규식은 앞서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해혁명 당시 투쟁대열에 동참하였고 중국국민당 인사들과도 친교를 폭넓게 가졌다. 쑨 원은 신규식을 접견하자 ‘우리의 노(老)동지’라고 반기면서 “북벌을 완수한 후에 응당 한국의 독립운동을 전력해서 돕겠다”는 약속의 말을 한다.5 시점이 전자는 1919년 7월이고 후자는 1921년 10월 초이다.

그 무렵 중국은 쑨 원이 주도한 신해혁명(1911)이 낡아빠진 구체제를 전복하는 데까지는 일단 성공했으나 대륙 전역이 혼란의 수렁에 빠진 상태였다. 군벌이 각처에서 할거, 수도 베이징도 수구·매판적 군벌세력이 장악해 있었다. 해서 쑨 원은 남쪽 바닷가로 밀려난 상태였다. 그가 신규식에게 한국의 독립을 적극 돕겠다면서 ‘북벌을 완수한 후’라고 단서를 붙인 것은 이 때문이다. 쑨 원 자신 북벌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유지는 계승되어 중화민국의 통일 대업이 성사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겠다는 약속의 말 또한 망각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정부 당국의 지원에 힘입어 중국 역내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쑨 원의 3·1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주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지 십년도 못된 처지의 국민들이, 그것도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적인 무단정치 아래서 거족적으로 일어난 일은 사실상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런 운동이 한반도에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것이 첫번째 던지는 질문이다.

3·1이 식민지 피압박민족으로서 자주독립의 의사를 표명한 행위였음은 물론이다. 일본제국과 그 지배하에 놓인 한민족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그런데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식민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전 지구를 석권하기에 이른 20세기에 3·1은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3·1은 근대적인 것이고 이전의 역사운동과는 변별성이 뚜렷한 것이다. 운동형태상에서도 현저히 다름이 있다. 이 점을 특히 주목하려 한다.

3·1의 운동형태는 항용 ‘3·1만세’ 혹은 ‘만세시위’라고 불러왔듯 대중시위 방식을 구사한 것이었다. 수도 서울에서 시작, 팔도의 곳곳으로 만세의 함성이 퍼져나가서 해외의 동포사회로까지 메아리가 울렸다. 뿐 아니라, “3·1운동은 불길을 중국으로 옮겼다”고 제삼자가 표현한 그대로 그 파장은 중국대륙에 미쳤다.6 다름 아닌 5·4운동이다. 이렇듯 거족적으로 각계각층의 남녀노소가 총궐기하였지만 그 대표부는 사회 지도층과 종교계 인사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앞장서 끌고 나간 동력은 다른 어디가 아니고 학생집단에서 나왔다. 동경 유학생의 2·8 선언은 3·1의 선성이었던바 이 경우는 전적으로 학생운동이었다. 요컨대 3·1은 근대적 지식의 세례를 받고 신교육을 이수한 지식인 학생들이 주도한 것이었으며, 그 운동방식은 비폭력적 시위로 출발한 것이었다.

이런 3·1에 대해 던져진 질문의 해답은 두단계로 구분지어 구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는 3·1에 직접적 계기로 닿는 단계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서 만나는 3·1의 원천을 이룬 단계이다. 양자의 구획선은 전래의 중국 중심 세계가 해체되고 경장이 불가피해진 1894년이다.

1894년 이후 외세의 침탈로 인한 위기가 심각하게 다가오면서 구국과 개혁이 절실히 요망되었다. 의병투쟁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이 자못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에 주권을 상실, 피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근대에 들어서자마자 난파를 당한 꼴이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경술국치(1910)를 당하고서 일으킨 반응은 어떠했던가. 어떤 이는 통한의 심경으로 망명의 길을 택했고 어떤 이는 실의와 좌절로 빠져들었으며, 혹 어떤 이는 일제에 아부하여 출세와 안락을 노리기도 했다. 그런 중에 대다수는 생존을 위한 활동을 꾸려갔는데 상당수가 공사립의 각종 학교를 다니는가 하면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일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었기에 이쪽에도 응당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비록 식민지 경영자가 베푼 교육제도로서 민족 차별적이었고 이런저런 제약이 따랐지만, 그래도 거기에 교육열·향학열을 발휘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한국인 특유의 기질이 그때도 발휘된 것처럼 보이는데, 불가피한 근대에 적응하기 위한 기초체력을 향상하는 방도였다고 할까. 3·1의 주력군은 바로 이 향학열로 충원이 되고 역량이 북돋워진 것이다. 직전의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이 무위로 돌아간 듯 보였으나 소멸되지 않고 저류하였던데다가 1910년대에 성장한 학생들이 전면에 나서서 운동을 끌고 나갔다. 그것이 곧 3·1이다.

그 이전의 단계는 임술민란(1862)에서 발동하여 동학농민전쟁(1894)에 도착한 19세기의 민중운동이다. 농민들이 자신이 당한 억울함과 부당함을 호소하고 항의하여 집단시위를 벌인 것이 상승, 민란으로 발전하고 드디어는 전쟁의 상태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3·1과는 역사적 과제가 달랐고 운동의 주체 또한 달랐다. 그렇지만 대중시위라는 면에서는 유사성이 없지 않다. 개개의 인간이 모여서 공감하고 동의하는 주장을 세워들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외치고 시위를 벌인 운동형태가 우리 역사상에서는 일찍이 19세기 농민저항의 과정에서 최초로 출현하였다. 민요(民擾)라는 것이다.

민요란 민이 일으킨 소요라는 뜻이다. 백성들이 집회를 열어 합의된 주장을 관철하려는 목적으로 벌이는 행위를 관의 입장에서 불손하게 본 표현이다. 하여 민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탄압을 받게 될 때 순순히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거세게 항거하면 민란이 된다. 민의 모임인 민회(民會)는 민란으로 발전하는 지름길이 되었다. 19세기로 넘어서기 직전, 황해도 곡산부사로 부임하는 길의 정약용 앞에 12개조의 요구 사항을 들고 나타났던 이계심(李啓心)은 사료상에서 처음 만나는 민요 형태 농민저항의 지도자이다. 임술민란 당시 진주에서 민란 지도자인 유계춘(柳繼春)을 두고 안핵사로 내려왔던 중앙의 관인은 “향회(鄕會)·이회(里會)는 그의 능사다”라고 하였다. “이회다 도회다 하는 것은 난민들이 떼로 모여 일을 꾸미는 짓”이라고 본 터였다.7

민회는 민란의 출발점이 되어서 관에 매우 불온하게 비쳤음을 짐작게 한다. 민회는 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주장을 도출하는 일종의 공론장이다. 공론이라면 현대사회에 못지않게 조선사회에서도 중시된 것이었다. “공론이란 천하 국가의 원기(元氣)입니다”8라고 건국 당초부터 강조한 터였다. 그 공론은 누가 세우고 어디서 잡아나갔던가? 어디까지나 조정의 공론이요 사대부의 공론이었다. 민의 공론장이란 조선조의 체재에서는 있을 수도 허용될 수도 없었음이 물론이다. 민회-공론장은 실로 19세기 역사의 무대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었다.

1893년의 보은집회는 교조신원을 요구사항으로 내건 대회였지만 동학농민전쟁의 전야제였다. 이 대회의 현장에서 누군가 발언하기를 “우리는 한자 한치의 무기도 들지 않았으니 곧 민회입니다”라고 전제한 다음, “여러 나라에도 민회가 있답니다. 조정의 정령(政領)이 민과 국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회의하여 토론한다고 합니다”라고 말한다.9 자칭 민회라면서 비폭력임을 강조하고 다른 나라에도 있는 일이라고 한다. 아마도 의회 같은 것을 상정한 듯하다. 나라의 정사에 잘못이 있으면 나서서 회의하고 토론한다는 말에는 직접민주주의의 취지가 담긴 듯 여겨지기도 한다.

근대 이전의 농업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빈발했던 농민저항운동은 군도(群盜) 형태로 진행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민요 형태가 출현하였다. 유명한 홍길동·임꺽정은 바로 군도 형태의 농민저항운동에서 영웅으로 부각된 존재다. 군도 형태는 무장항쟁이라는 점에서 적극적이지만 농민이 자기 삶의 현장을 이탈함으로 해서 영향력의 확장에는 한계가 있다. 노동자가 작업장을 떠나 있는 상황에 견주어볼 수 있다. 민회-민요는 합법적인 방법으로서 잠재적 영향력이 무한했다. 당시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필자는 『홍길동전』을 읽으면서 군도 형태의 농민저항에 착안하였고 후일 정약용의 「탕론(蕩論)」과 「원목(原牧)」에 담긴 민주적 사상을 분석하면서 그런 민주적 정치사상을 떠올릴 수 있었던 현실적 근거로서 민회-민요에 내포된 의미를 발견하였다. 방금 호명했던 이계심을 보고 정약용은 “너야말로 관장인 내가 천냥을 주고라도 사야 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자기주장을 당당히 들고 나서는 한 백성의 행동에서 정치의 주체가 될 가능성을 내다본 것이다.10

동학농민전쟁은 19세기의 역사변화를 추동한 민요 형태 농민저항의 정점이자 종점이었다. 그리고 크게 달라진 환경에서 변모된 운동방식으로 3·1이 발발한 것이다. 중간의 1894~1919년은 과도기로서 새로운 형태의 운동을 양성한 기간이었던 셈이다. 한국운동사의 형태적 진화과정에서 3·1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3·1의 운동 모델은 이어져 4·19, 그리고 6월항쟁에 이른다.

다음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운동주체와 함께 운동방식에서 놀라운 변형이 일어난다. 21세기형 운동방식인 ‘촛불시위’이다. 21세기형은 같은 대중시위라도 양상이 크게 다르다. 종전에는 학생이 주동이 된 이른바 ‘데모’였다. 비록 비폭력의 집회와 시위로 출발했더라도 진압봉과 최루탄, 물대포의 폭력적 공격에 함성과 돌멩이, 화염병으로 맞섬에 따라 상황은 에스컬레이터 현상이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2008년 서울의 하늘을 뜨겁게 달군 ‘촛불집회’는 데모현장에 난무했던 최루탄과 돌멩이는 사라지고 일반 시민들이 너나없이 자유롭게 모여들어, 엄마들이 유모차를 밀고 나오는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이는 2016년에서 2017년으로 이어진 거대한 ‘촛불시위’의 예행연습이었던 셈이다. 2016~17년의 ‘촛불’로 와서는 학생운동의 틀을 크게 파탈하여 3·1의 거족적인 형국을 부활한 일면도 있다.

 

 

3. 3·1의 혁명적 의미, 이후 좌우 통합을 위한 사상운동

 

쑨 원은 3·1을 대혁명으로 보았다. 그 당시나 후일에 한국인의 언급에서도 3·1을 혁명이라고 한 표현이 종종 나오는데, 1944년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는 ‘3·1대혁명’이라는 문구가 바로 들어가 있다. 3·1을 가리켜 혁명, 그것도 대혁명이라고 강조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 글에서 두번째 던지는 질문이다.

3·1은 운동에 그친 것이냐, 혁명으로 나아갔느냐? 이 문제는 근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라 있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깊이 따져보진 않았지만 3·1이 과연 혁명일지 선뜻 공감을 못하고 있었다. 당시 분들이 혁명이라고 지칭했던 것은 뚜렷한 개념이 있어서가 아니고 수사적 표현이겠거니 정도로 여겼다. 그러다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문서들을 접하면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3·1의 정치적 지향: 민국혁명

필자가 먼저 우연히 접하게 된 자료11가 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일정 기간의 회의록 사본이다. 의정원은 지금 국회에 해당하는 기구로, 임시정부가 성립하는 제도적 기초였다. 임시정부가 선 그해 1919년 8월 18일의 개원식부터 이듬해 3월 3일까지에 열린 의정원의 회의 실황을 기록한 문건이다. 이를 해방 직후에 누군가 베껴놓은 70면의 소책자 형태이다. 1974년 국회도서관에서 펴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라는 책이 있다. 이는 대한민국 국회가 공간한 문헌으로, 임시의정원의 관련서류를 모두 수합·정리한 것이다. 이 국가적인 공식 문헌에 해당 기간의 기록은 아주 소략한 형편이다.12 본 자료는 분량이 많지 않으나 마침 헌법을 심의하는 기간이어서 국가 민족의 중대사를 놓고 설왕설래하는 경위가 생생히 드러난다. 본 자료에서 구황실을 대우하는 문제에 국한해 거론하려 한다.

군주제로부터 근대국가로 전환하는 길목에서 부딪치기 마련인 쟁점은 제왕의 존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이다. 이웃의 중국을 보면 신해혁명으로 청황제 체제가 전복되었음에도 복벽(復辟, 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름)운동이 고개를 들어 혁명 이후의 중국을 혼란 상태로 빠뜨리는 반작용을 하였다.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뒷날에 일본 침략군의 꼭두각시가 되어 허위의 만주국 황제로 이용당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일본의 경우 근대국가로 변신하면서 막부(幕府) 권력은 타도되었지만 잠자는 천황을 일으켜서 군국주의가 천황제와 결탁하게 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반면에 한국의 경우는 주권 상실과 동시에 융희황제(순종)가 퇴위하고 나자 군주제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복벽운동이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로되 거기에 호응이 전혀 없었던 까닭이다. 이런 현상도 한국적 특성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된 데는 물론 이런저런 원인을 들어볼 수 있겠으나, 요는 대한제국의 종막에 있었다. 오백년을 이어온 구제도의 틀이 해체됨으로 해서 구제도로 향한 회고적 정서가 해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임시정부 헌법의 모체가 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이었다. 이 헌장은 1919년 4월 11일에, 임시헌법은 동년 9월 11일에 공포된 것이다. 본 자료는 임시헌법을 심의·제정하는 기간의 회의 기록이다. 임시헌장의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며, 제8조에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이라는 조문이 들어가 있다. 제1조는 별다른 이론 없이 통과된다. 국체를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데에는 이미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나 “구황실을 우대함”이라는 조문으로 와서는 다툼이 거세게 일어난다. 여운형은 “혁명은 철저해야” 한다는 논리로 황실 보호를 반대했으며, 안창호는 “황실도 자급자족함이 옳다” 하여 황실의 인간들도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조완구가 황실 우대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본 조항은 일단 8:6으로 통과된다. 그러고도 김태연이 재차 “황실 우대안 삭제를 동의(動議)”해서 토론이 재개되는바 역시 또 조완구가 버텨서 이 동의는 9:10으로 부결이 된다. 이처럼 반발을 거친 끝에 “대한민국은 황실을 우대함”이라는 조항이 그대로 임시헌법 제7조에 들어간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황실 우대 반대론이 당일 회의장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조완구가 황실 우대를 고집스럽게 주장한 논점은 세가지다. 하나는 “우리 민족통일에 한 방침”이 되리라 함이요, 다른 하나는 “이 조항을 빼버린 결과 인민의 반항을 살까 두렵다” 함이며, 끝으로 “우리의 전 황실은 주권을 적에게 빼앗긴 것”이라는 정상참작론이었다. 군주제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충(忠)이라는 윤리는 내비치지도 않은 것이다. 다만 현실적 필요성을 역설한 일종의 전략적인 고려였다. 임시정부가 추구한 민주공화제 국가는 전통적인 군주제를 철저히 부정하는 입장이었기에, 황실의 존재에 대해서도 강하게 배격하는 태도였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임시정부 건립의 한 주역은 3·1의 성격을 규정지어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의 발인(發軔, 발동)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라고 한다.13 ‘민족혁명의 발인’이란 3·1 독립선언서의 첫머리에 나오는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아(我) 민족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는 바로 그 뜻이다. ‘신천지 개벽’이란 앞으로 실현하려는 국가 사회의 성격을 표명한 대목인데 그야말로 새세상을 열겠다는 발본적 혁신의 이상을 그려내고 있다. 곧 3·1의 시위는 독립선언이 거족적인 지지와 호응을 받은 뚜렷한 증거였고, 거기에 의거해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이 임시정부가 바야흐로 실천해야 할 과업을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력으로써 이족(異族, 일본을 가리킴) 전제(專制)를 전복하며, 5천년 군주정치의 구각(舊殼, 낡은 껍데기)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며 사회의 계급을 소멸하는 제일보의 착수이었다.

 

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 ② 5천년 군주정치의 틀을 깨뜨리기 ③ 계급이 소멸된 평등사회 만들기 이 세 과제를 제시하면서 민족의 자주적 노력으로 성취해나가야 한다고 기본방향을 천명한 것이다. 민족·민주의 혁명적 의지가 더없이 확고하다. 당시 역사의 개념으로는 ‘민국혁명’ 그것이다. 요컨대 3·1의 운동방향은 민족국가·민주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민국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3·1은 민국혁명이라는 그 정치적 목적지로 보면 미완의 혁명이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말하면 피식민지라는 제약은 따랐어도 신문학의 발전이 증명하듯 혁명성을 구현해가고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 또한 다시 생각하면 3·1로 해서 민족해방투쟁이 활발해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런 제반 동향으로 미루어 3·1운동은 혁명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 미완의 혁명인 3·1은 말을 바꾸면 ‘진행형 혁명’이다. ‘촛불’ 또한 이와 유사한 성격이 아닌가 한다.

 

좌우의 대립구도를 극복하는 문제: 홍명희와 조소앙

이 글은 첫머리에서 3·1 이후로 거족적인 움직임은 재현되지 못한 사실을 한국 근현대의 최대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3·1 직후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상이 성행하면서 좌우의 대립구도가 확대, 고착되기에 이른 때문이다. 민국혁명이 임시정부를 출범시켰지만 그것은 실현된 것이 아니었고 겨우 첫걸음을 뗀 정도였다. 게다가 이내 좌우대립으로 인한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3·1의 기운으로 발흥했던 신문학 또한 마찬가지로 좌파적 계급문학이 등장함에 따라 좌우로 편이 갈라졌다. 좌우의 대립 갈등은 곧 좌우의 통합이라는 기본과제를 불러오게 된다.

피식민지에서의 대립은 적전 분열이나 다름없다. 좌우대립이 확대 발전하는 데 상응해서 이를 극복하고 통일을 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당위성을 갖는 급선무로 제출된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운동의 실천적 노력과 사상적 모색이 여러모로 진전되었다. 여기서는 안에서 신간회운동을 주도한 홍명희(洪命憙, 1888~1968)의 중도주의, 밖에서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조소앙(趙素昻, 1887~1969)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주목하려고 한다. 통일을 위한 사상운동의 두 사례이다.

홍명희와 조소앙은 이런저런 상동점과 상이점이 있어서 흥미롭게 대비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한살 차이로 왕조 말엽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살다가, 해방 이후 분단이 내전을 불러온 국면에서 한분은 월북하고, 다른 한분은 납북당해, 이후 두분 모두 북에서 여생을 마치게 된다. 두분 다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 한문을 공부하여 교양의 기초를 쌓은 다음에 근대적인 지식과 사상을 폭넓게 섭취하였다. 같은 무렵 일본으로 유학, 근대학교를 다니다가 조국이 주권을 상실한 1910년대에 중국의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뛰어든다. 이 시절에 홍명희와 조소앙은 만나 함께 모임을 갖기도 했다.14 3·1 당시 한분은 안에, 다른 한분은 밖에 있었는데 그 이후로도 한분은 안에서, 다른 한분은 밖에서 활동을 이어간다. 홍명희는 기본적으로 문학인으로서 필요에 따라 정치운동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으며, 조소앙은 정치가로서 문학적 글쓰기도 즐겨 한 편이었다. 사상적으로 보면 홍명희는 좌파적이면서 민족주의 색채를 띠었고 조소앙은 민족주의의 체취가 농후하면서 사회주의 논리를 수용하고 있었다.

이 두분으로 향한 시선이 남쪽에서는 가로막혀 있었다. 분단 현실에서 북쪽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 문학을 전공하는 처지이기에, 홍명희와 그의 『임꺽정』은 일찍이 관심권에 들어와 있었다. 조소앙에 대해서는 민족의 훌륭한 지도자라는 정도로 막연히 알고 있다가, 최근에야 『소앙선생문집』을 접해보고 지금 이 자리에서 홍명희와 함께 거론하는 것이다.

홍명희는 해외에서 풍상을 겪다가 1918년 돌아와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다. 그리고 체포당해 1년 6개월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는 초기 사회주의자로서 그 이론에 정통했다고 한다. 1927년 2월에 창립한 신간회는 그가 최초의 제안자이고 사실상의 주도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신간회의 사명」이라는 논설을 『현대평론』 1927년 1월호에 기고한다.

 

대체 신간회의 나갈 길은 민족운동만으로 보면 가장 왼편 길이나 사회주의 운동까지 겸치어 생각하면 중간 길이 될 것이다. 중간 길이라고 반드시 평탄한 길이란 법이 없을 뿐 아니라 이 중간 길은 도리어 갈래가 많을 것도 같다.

 

신간회가 추구할 노선은 민족운동으로 보면 좌편향이지만 사회주의운동까지 아울러 보면 ‘중간 길’이라고 한다. 그가 제창한 중간 길은 좌우의 대립을 지양한 중도주의라고 규정지을 수 있겠다. 그는 이 중간 길은 평탄하지 않고 도리어 험난한 도정임을 전망하고 있다.

왜 중간 길인가? 그는 이르기를 “우리의 민족적 운동은 바른 길로 바르게 나가도 구경(究竟) 성공은 많이 국제적 관계”에 달려 있음을 전제하면서도 “국제적 과정이 아무리 우리에게 유리하더라도 우리의 노력이 아니면 성공은 가망이 없고 또 설혹 노력이 없는 성공이 있다 하여도 그것이 우리에게 탐탁지 못할 것임은 정한 일”임을 분명히 한다. ‘바른 길로 바르게 나가는’, 즉 정도의 중간 길을 잡아서 노력을 다해야 성사를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중간 길을 잡아서 매진하려면 ‘과학적 조직’과 ‘단체적 행동’이 지속되어야만 하는바 이것이 곧 신간회의 사명이다.

신간회의 사명을 표명한 이 논설은 2면에 그치는 짧은 글이지만 그의 심모원려가 압축된 내용이다. 가까운 근심으로 말하면 신간회는 내부의 분란과 외부의 방해공작으로 해체되는 운명을 맞게 된 일이다. 멀리 내다본 사려로 말하면 일본 군국주의가 패망하고 국제적 관계가 유리하게 된 지점에서 그 절호의 기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기껏 분단으로 귀착된 일이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신간회운동이 무위로 돌아간 사태는 우선 그 자신에게 심각한 상처였다. 이후 그는 칩거상태로 들어가서 오직 『임꺽정』의 집필에 전념한다. 『임꺽정』은 신간회운동을 벌이면서 동시에 신문 연재를 시작한 것이었다. 역사소설 『임꺽정』은 사회주의 이념을 민족문학의 방향으로 통합한 데서 이루어진 우리 근대문학의 위대한 성취이다. 그에 있어서 신간회운동이 정치적 표현형식이라면 『임꺽정』은 문학적 표현형식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15

홍명희가 주장한 중간 길은 원론적 차원에서 제시된 데 그쳤다. 손에 잡히는 설명이 부족했던 것은, 말을 아끼는 그 자신의 성격에다가 검열을 의식한 탓도 있겠으나, 운동의 실천과정에서 방향을 잡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닐까 한다. 결국 신간회운동은 일제의 억압 아래서 중도반단이 되어 그의 중간 길은 구체화될 도리가 없었다. 반면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실현할 바탕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시종 의론의 형태로 개진되었다.

조소앙은 1918년 말경에는 중국 동북지역의 길림(吉林)에 가 있었다. 그곳에서 여준(呂準)·김좌진(金佐鎭) 등 독립지사들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고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라고 하는 것임)를 작성해서 발표했다. 그리고 1919년 초에는 국내의 비밀 연락원이 3·1독립선언서의 초고를 휴대해 와서 소식을 알게 된다. 3·1 직후 상하이에 대표로 오라는 전보를 받고 역사적인 임시정부 수립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벅찬 광경을 “우리는 의정원을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다시 임시헌장을 만드는 데 세 밤을 뜬눈으로 새웠으나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자전(自傳)」에서는 “「10조 헌장」 등 중요문자를 손수 초했다”고 술회하였다. 「임시정부헌장」은 조소앙이 기초한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1945년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의 주요 문건들은 대개 그의 손에서 작성되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볼 수 있다.

앞서 중요하게 거론하고 인용했던 「대한민국 건국강령」 또한 조소앙이 1941년에 작성한 것이다. 이 문건은 국회도서관 공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에 수록되어 있고 『소앙선생문집』에서 친필 초안이 확인된다. 임정은 중국의 충칭(重慶)에 가 있었다. 당시 정세는 일본 군국주의가 중국 전역에서 태평양으로 전선을 무리하게 확장해 일본의 패망이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비로소 눈에 들어온 광복의 그날, 우리는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이냐? 이에 구상한 것이 다름 아닌 「건국강령」이었다. 임시정부 『관보』 제72호에 이 문건의 전문이 게재되었다고 한다. 문건은 총강(總綱)과 복국(復國, 광복의 방법)·건국의 3부로 구성된바 앞서 원용했던 문장은 총강의 제5조에서 취한 것인데 제7조를 들어본다. 이 조항은 총강 전체의 결론이다.

 

임시정부는 이상에 거(據)하여 혁명적 삼균제도로써 복국과 건국과의 각 계단을 통하여 일관한 최고 공리(公理)인 정치·경제·교육의 균등과 독립·민주·균치(均治, 삼균정치)의 3종 방식을 동시 실시할 것임.

 

광복의 그날이 왔을 때 우리는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이냐? 이 과제에 ‘혁명적 삼균제도’가 전 과정을 통관하는 ‘최고의 공리’라고 한다. 가장 보편적인 원리원칙임을 뜻한다. 정치의 균등, 경제의 균등, 교육의 균등이 그의 주의주장인 삼균이다. 독립한 민주국가로서 진정으로 ‘균치’가 실현되는 세상이 오면 실로 ‘신천지의 개벽’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조소앙이 삼균주의를 착상한 것은 「자전」에 의하면 1926년 일이다. 이해에 그는 한국유일독립촉성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삼균제도」라는 글을 지었다. 국내에서 신간회운동이 일어난 그즈음이다. 이후로 그는 임시정부의 활동에서도, 귀국하여 벌인 정치활동에서도 오로지 삼균주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전심전력하였다. 스스로 자기 생애를 요약하여 “실천은 삼균을 행함에 있었다”고 한 말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삼균주의가 역사적 연원이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분명치 않다. 필자가 보기로 그의 삼균주의는 정약용의 「원정(原政)」에 표명된 정치학에 통한다. 공자가 일찍이 세운 “정치란 정(正)이다”라는 명제를 균(均)으로 해석한 것이 정약용의 정치학이다. 무릇 정치의 원리는 균분·균형·공평에 있다고 설파한 것이다.16 조소앙이 삼균주의를 사고할 당시 정약용의 저술을 접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요컨대 삼균주의는 조소앙의 독창적 사상으로 악성화돼가는 좌우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고민한 결과일 것이다. 자신의 독서 및 사상적 편력에서 얻어진 바가 응당 없지 않을 텐데 그는 자기의 사상을 “물질과 정신의 통일, 동서양의 융회”라고 밝히기도 했다.17 특히 쑨 원의 삼민주의의 영향이 드리워 있고 공산혁명을 강행하는 소련의 현실이 반면교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조소앙은 삼균주의를 임시정부의 기본 정신으로 못 박아서 「건국강령」으로 삼도록 하였다. 삼균주의가 근본이라면 「건국강령」은 그 실천 방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과연 그의 의도대로 실현될 수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던 것은 해방 이후의 실제 상황이 역력히 보여준다. 해방 이전의 임정 내에서도 삼균주의가 두루 지지를 받았느냐 하면 실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삼균주의 자체는 추상도가 높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별로 쟁점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토지제도 문제에 당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건국강령」의 제3조에서 “토지제도는 국유로 확정할 것”이라 규정하고 있다. 국유란 사유에 반대되는 공유의 개념이다. 이르기를 “국유의 범주는 우리 거룩한 조상들이 지극히 공평하게 나눠주었던 법을 준수하여 후세의 사유 겸병(兼倂)의 폐단을 혁파해야 한다”고 한다. 의정원 회의의 진행 과정에서 이 문제가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이로 미루어 삼균제도는 사실상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더구나 해방 이후 미군정하에서 임시정부 자체가 인정을 받지 못해 개인 자격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으며, 남한의 단독정부에 조소앙은 불참하였으니 그의 삼균제도는 발붙일 틈조차 없었다. 오직 그 자신이 삼균주의는 ‘최고의 공리’라는 신념을 접지 않고 발분하여 그것을 실천할 정당을 결성한다거나 대중선전을 하는 등 전심전력하였다. 그러다가 그 육신이 납북을 당함에 따라 삼균주의는 실종되고 말았다.

 

 

4. 한국 근현대가 3·1에 진 채무

 

1차대전의 종결이 본격적인 의미의 20세기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던바 동아시아의 20세기는 한반도의 3·1이 중국대륙의 5·4에 연동됨으로 해서 개시되었다.

세계대전의 포화가 멈추자 지구촌 사람들은 ‘인류의 신기원’ ‘해방의 신기운’이 왔다고 환호하였다. 그런데 ‘신기원’과 ‘신기운’이 과연 동아시아에, 한반도에 도래하였던가. 신기운이 미쳐서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지만 피식민지 억압의 상태에서 풀려나지 못하였다. 그 이후 오늘에 이르는 역사까지 되짚어보자면 1945년 2차대전의 종결로 해방의 날을 맞았는데 한반도상에는 분단의 장벽이 들어섰고 체제를 달리하는 두개의 국가가 수립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대립갈등하는 구도가 바뀌지 않고 있다.

1989년 지구적인 냉전체제가 해체되는 외적 상황변화에도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세계사적 변화의 기운이 한반도라고 비껴갈 수만은 없었다.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 김대중정부의 6·15선언, 노무현정부의 10·4선언으로 남북·좌우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진로를 역전시키려던 것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수구·반공주의이고, 여기에 제동을 건 것이 ‘촛불혁명’이다.

이 대목에서 홍명희의 발언을 다시 떠올려보자. “성공은 많이 국제적 관계에 달려 있지만” 국제적 상황이 아무리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더라도 “우리의 노력이 아니면 성공은 가망이 없고 또 설혹 노력이 없는 성공이 있다 하여도 그것이 우리에게 탐탁지 못할 것이다.” 2차대전의 종결, 냉전체제의 해체라는 유리한 국면이 도래하였음에도 그 호기를 제대로 살려낼 우리의 주체적 능력이 부족했던 것 아닌가. 이 점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3·1 이후로 형성된 좌우의 대립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고 그것은 핵심 요인이다. 한국 근현대가 3·1에 진 채무이다. 이 채무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본고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다. 앞서 두 질문과 달리 이 질문은 험난했던 과거사의 질곡으로서 답은 미래사에 속하는 일이다. 곧 우리의 현재적 채무이다. 그렇기에 참으로 난제 중의 난제이다.

그런데 최근 운동사의 진화과정에서 놀라운 전기를 이룩한 ‘촛불혁명’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드디어 가시화된 것이다. 지금 ‘촛불’의 뚜렷한 성과라면 역시 남북관계의 진전이다. 당초에 3·1의 목적지가 민족·민주국가의 수립에 있었던 터이므로, 이는 우리 근현대가 3·1에 갚아야 할 채무의 일순위이다. 여기에 우리로서 유의할 점이 있다. 남북의 대립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을 도모하는 과제이다. 주적 개념으로 상대를 원수처럼 대하거나 아니면 강 건너 불처럼 바라보는 상태에서는 의식하지 못했던 사안이다. 백주년을 앞에 두고 3·1을 기리고 높이는 담론들이 언론매체에 차고 넘친다. 매우 반갑다. 그런데 여기에도 따져볼 점이 없지 않다. 대부분의 언설들을 살펴보면 북의 존재를 괄호 치고,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더러는 남북관계와 아울러 북미관계가 발전하는 상황변화를 반기면서도 남북의 평화공존으로 만족하며 거기에 사고를 멈추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3·1 찬양론은 북의 존재를 배제하는 논리로 직진하는 지름길이 되고 있다. 분단의 남쪽에 수립되었던 국가는 자기 정체성의 근거를 3·1에 댔던 사실을 서두에서 언급했다. 말하자면 3·1에 근거한 남한 정통론은 북조선을 부인하는 논리로 이용되어온 셈이다. 이러한 분단의 논리를 극복하는 일이 선결 과제이다. 본고에서 3·1 이후 좌우 통합을 위한 사상운동에 각별히 역점을 두었던 것은 바로 이 문제점을 심각하게 본 때문이다.

홍명희는 신간회운동을 일으키면서 ‘정도의 중간 길’을 들고나왔다. 그의 중도주의는 편가르기를 하지 말자는 절충론이 아니며, 진정 ‘바른 길’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옳고 바른 길을 찾아서 바르게 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 길은 조소앙의 방식으로는 삼균주의이다. 삼균주의는 3·1의 ‘민국혁명’을 완수하려는 의도에서 창출된 것이자 좌우로 분열된 독립운동 진영을 화합하려는 통일전선론이기도 했다.

삼균제도가 임정의 의정원 회의에서 쟁점이 되었던 사안은 토지 국유론이었다. 조소앙의 「건국강령」 친필 초고를 보면 끝에 ‘자본주의 소멸’ ‘계급해소’ ‘도시 농촌 농공(農工) 통일’ 등의 글자가 잡다하게 적혀 있다. ‘자본주의 소멸’에 우선 시선이 닿는데 ‘소멸’이란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 문제는 자본주의인데, 그 자신 문장으로 만들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에 대한 생각은 고민 수준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본주의는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고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삼균주의와 자본주의는 궁합이 맞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완전히 부정했을까. 그는 토지 국유제 문제로 공격을 받았을 때 사유재산은 보호하고 토지는 국유로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농공의 통일’을 사고한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의 머릿속에 잠복된 ‘자본주의 소멸’은 자본주의를 애당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장차 극복할 방도, 그것이 사라지는 단계를 사고했던 것 같다. 민족혁명과 함께 민주혁명을 염원한 것이 그의 삼균주의이다.

오늘의 촛불혁명이 21세기를 열어가자면 한국 근현대가 3·1에 진 채무를 갚는 데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또한 3·1의 최종 목적지가 ‘신천지의 개벽’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촛불혁명과도 일맥상통하는 길이다. 물론 20세기와 21세기는 시대 상황이 크게 다르고 따라서 해결해야 할 과제 또한 크게 다르다. 지금의 촛불시대를 열어가는 ‘바른 길’을 찾아가는 데 3·1 이후로 제기된 좌우 통합을 위한 사상운동은 요긴한 참조사항이고 풍부한 지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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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졸고 「신문학운동과 민족현실의 발견」, 『창작과비평』 1973년 봄호; 『한국문학사의 시각』, 창작과비평사 1984.
  2. 졸고 「抗日民族詩: 上海版 『獨立新聞』 所載」, 『대동문화연구』 14집(1981); 『한국문학사의 시각』 수록. 이 논문에서 “역외(域外)에서의 문학이 일제의 압박이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견제를 받으면서 전개된 역내(域內)의 문학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었던 것”(『한국문학사의 시각』 315면)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3. 졸고 「1919년 동아시아, 3·1운동과 5·4운동: 동아시아 근대 읽기의 방법론적 서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이 3·1운동 90주년에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의 발제문으로 『대동문화연구』 66집(2009)에 수록했고 이를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창비 2014)에 수정 후 게재하였다.
  4. 김창숙이 쑨 원을 만난 경위는 그의 자전적 기록인 「躄翁七十三年回想記」(『心山遺稿』 318면, 한국사료총서 18집, 국사편찬위원회 1973)에 나와 있다.
  5. 『孫中山年譜長編』(陳錫祺 엮음, 中華書局 2003, 1382~83면)에 쑨 원이 신규식을 회견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한국 쪽 기록으로는 신규식의 사위인 민석린(민필호)이 남긴 「中國護法政府訪問記·孫大總統會見記」(『韓國魂 曁兒目淚』, 睨觀先生記念會 엮음, 臺灣 1955)가 있다. 필자는 이 사실을 중시해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아시아, 세계관적 전환과 동아시아 인식」(『대동문화연구』 50집(2005);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에서 거론한 바 있다.
  6. 아사히신문 취재반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 백영서·김항 옮김, 창비 2008, 126면. 3·1이 5·4에 미친 영향관계에 대해 필자는 「1919년 동아시아, 3·1운동과 5·4운동」에서 다루었다.
  7. 「晉州按覈使査啓跋辭」, 『壬戌錄』, 한국사료총서 8집(1958), 22~24면.
  8. 태조 때 간관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 나오는 말. 『태조실록』 2권, 9년 9월 을묘.
  9. 보은집회 당시 선무사로 내려왔던 어윤중(魚允中)이 현장을 전하는 보고문서에 나오는 말. 『東學亂記錄』 상, 한국사료총서 10집(1959), 123면.
  10. 이 단락에서 서술한 내용은 필자가 줄곧 관심을 두어왔던 문제이다. 여기에 처음 착안하기는 「홍길동전의 신고찰」(『창작과비평』 1976년 겨울호 및 1977년 봄호; 『한국문학사의 시각』)에서이며, 내 나름으로 학적 사고를 발전시킨 것은 「丁若鏞의 민주적 정치사상의 이론적·현실적 근저」(벽사 이우성교수 정년퇴직 기념논총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창작과비평사 1990; 『실사구시의 한국학』, 창작과비평사 2000)로 와서다. 이후로도 더러 언급하였는데 최근에는 「한국문학을 사고하는 하나의 길: 민중운동·공론장·정의」(『한국고전문학연구』 54권, 2018)에서 논의를 다소 진전시켰다.
  11. 이 자료는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존경각 소장의 『史料集』이라는 묶음에 들어 있는 것이다. 전체 12책의 사본으로 ‘사료집’이라는 명칭도 도서정리자가 붙인 가제이다. 4책까지는 한일관계사를 위주로 한 독립운동 관련자료이며, 5책이 본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록 사본이다. 6~12책은 야담 및 한문소설류에다 잡다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모아 베껴둔 분이 누군지 쉽게 확인이 되지 않았다. 여러종의 야담 기록이 진암(震庵) 이보상(李輔相)이 지은 것이어서, 이보상 아니면 그와 관련된 누군가가 기록해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12. 윤병석(尹炳奭)은 “1931년 이전의 의사록류는 『독립신문』 등에서 전재한 것이므로 (…) 제2차 사료”임을 밝히고 있는데, 1932년 윤봉길 의사의 거사 직후 임시정부에 보관되었던 서류가 일제에 탈취당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大韓民國 臨時政府 議政院 文書』, 解題 22~23면, 국회도서관 1774.
  13. 「大韓民國 建國綱領·總綱」, 같은 책 21면.
  14. 조소앙의 「年譜」에 1913년 “北京을 거쳐 上海로 망명함. 申奎植·朴殷植·洪命憙 등과 同濟社를 개조하여 朴達學院을 창립하고 혁명청년을 훈련시킴”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삼균학회 엮음 『素昻先生文集』 下, 횃불사 1979, 487면.
  15. 관련 논의로 졸고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 그 현실주의의 민족문학적 성격」(『임꺽정』(개정판, 전10권) 해설, 사계절 2008)과 「민족문학의 개념과 그 사적 전개」(『새 민족문학사강좌』 1권 총론, 창비 2009;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참고.
  16. 졸고 「다산의 민주적 정치사상, 법치와 예치」, 유네스코·남양주시 공동주관 ‘다산 정약용 해배 200주년 기념 국제 심포지엄: 지속 가능한 발전, 정약용에게 길을 묻다’(2018.4.5~6) 기조 발제문.
  17. 조소앙은 「자전」에서 자기의 사상을 요약하여 “신라시대에 가장 힘을 발휘했던 ‘화랑’으로 본체를 삼고 易學과 변증법으로 방법을 삼다. 理氣로 내닫고 性相에 노닐며 물질과 정신을 통일하고 동서양을 융회하였다. 실천은 삼균을 행함에 있고 마음이 노닐기는 三空에 있다. 용감히 한국의 주류사상을 짊어진 것이다”라고 한다. 참고로 원문도 함께 제시해둔다. “以新羅時代最有力之‘花郞’ 爲體, 以易學與辨證法爲方法. 馳騁理氣, 傲遊性相, 統一物心, 融會東西. 在實行爲‘三均’, 在遊心爲‘三空’. 勇敢負擔韓國之主潮思想焉.”(삼균학회 엮음, 앞의 책 156~58면)

임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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