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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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문학, 정치, 민주주의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지구생활자의 시

 

 

오연경 吳姸鏡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쓰는 기계의 존재론」 「김수영, 신화인가 현재인가」 등이 있음.

korin2@hanmail.net

 

 

1. ‘데모스’의 물성: 촛불과 바이러스

 

민주주의의 통치자이자 피치자를 가리키는 ‘데모스’(demos)는 근대국가 성립 이후 ‘인민’ 혹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정체에 기입되었다. 데모스는 본래 특정한 형상이 주어져 있지 않은데, 이로부터 플라톤은 분별없는 무리의 방종과 무정부 상태를 예견했지만 랑씨에르(J. Rancière)는 오히려 비(非)주체들이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양식이라는 역설적 의미를 이끌어냈다. 시와 정치 논의 이후 하나의 용례로 자리 잡은 랑씨에르의 ‘치안’과 ‘정치’의 구분법에 따르면1 민주주의는 ‘아르케’(arche)도 없고 척도도 없는 데모스의 정치, “치안 질서를 혼란에 빠트리는 하나-더의 힘”2이다. 이때 ‘하나-더의 힘’은 구성원의 양적 확대나 단순한 다양성의 증가가 아니라 그 ‘하나-더’의 타자성으로 인해 기성 체제에 불화와 불일치가 생성되는 정치적 계기를 의미한다.

이처럼 데모스가 타자들이 도래할 수 있도록 개방된 어떤 위치, 실체가 아닌 부재의 자리라고 할 때, 민주주의는 고정된 정체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셈해지지 않은 타자들을 현시하고 정치적 주체화를 재개하는 민주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민주주의의 역사는 흑인과 여성으로 참정권을 확대해왔고,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인권과 시민권 사이의 불일치를 드러내며 새로운 주체화를 요청받고 있다. 그러나 표상 불가능한 존재인 데모스가 대의민주주의의 ‘인간=시민=국민=주권’ 도식으로 들어오면서, 데모스의 형상은 모든 권력의 기원인 전능한 주권자(집합적 신체)와 ‘1인 1표’라는 대체 가능한 등가성을 가진 무력한 개인(개별적 신체)으로 분할되었다. 최근 서구 유럽에 팽배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개인적 차원의 권리, 자유경쟁, 포퓰리즘과 거의 동의어가 되어버린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3

그러나 한국의 민주주의는 서구의 상황과는 다르다. 랑씨에르도 인정했듯이 근래까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써온 한국인에게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프랑스 지식인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4 특히 지난 촛불혁명은 ‘1인 1표’ 뒤에 숨어 있던 개인이 주권자의 신성한 권력을 행사하며 집단적 신체로 물화했던 정치적 사건이었다. 당시 집회 현장에서 거대한 함성으로 반복된 헌법 제1조 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은 선거를 통해 맡겼던 대의의 자리를 회수하러 온 주권자의 명령이었다. 이는 정권 퇴진을 이루어낸 현실정치의 승리였을 뿐 아니라 개별자들의 이해관계나 사상을 넘어 민주주의의 상징적 토대인 데모스를 집단적으로 체화한 연대의 현장이었다. 거의 넉달 이상 지속된 촛불집회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집회에 참여한다’는 일상성과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5는 당사자성에 기반한 매우 높은 정치적 실재감을 선사했다. 이 실재감의 바탕에는 소비 주체나 생존 기계로 전락한 무력한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 정동으로 연결된 데모스로서의 ‘우리’가 있었다.

촛불의 연대가 고강도 고양감을 동반하며 데모스의 역량을 체감하게 했다면 이와는 전혀 다른 기제로 ‘연결된 우리’를 실감하게 한 것이 팬데믹 상황이다.6 인수공통 감염 바이러스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제도, 시스템, 사회문화 전반을 무력화하며 자연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우리의 일상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재배치되었는데, 문화적 의미를 바탕으로 짜인 기존의 행동양식은 감염 경로를 차단하기 위한 생물학적 논리를 중심으로 조정되었다. 문화적인 것을 걷어내자 새삼 드러난 것은 그것을 지탱하고 있던 물질적이고 환경적인 토대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타자들,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결망을 뚜렷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정부의 방역정책이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통제에 자유를 반납한 집단적 순종이 아니라 저 연결망에 대한 실감에서 비롯된 공동체적 배려에 기인한 것이었다.

황정아는 한국의 “고양되고 응축된 민주주의의 경험이 방역에 필요한 유대와 책임을 낳았”다고 분석하면서 인민주권의 개념을 넘어 민주주의적 집단 주체성을 표현할 “색다르고 좀더 미묘한 용어”로 ‘커먼즈의 이념으로서의 우애’를 제안한다.7 팬데믹 이후 커먼즈 논의는 우애, 돌봄, 배려, 협동 등을 바탕으로 공공성을 재구성하려는 실천적 담론으로 주목받고 있다.8 나아가 커먼즈 운동은 “근대를 구성하는 이두체제인 국가와 자본의 외부에 자율적 공동체를 구축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대안근대로 이행하려는 목적을 가진”9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팬데믹과 그것이 예고하는 기후위기는 공공성의 재구성이나 대안근대로의 이행에 있어서 훨씬 더 급진적인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정치 영역의 기준이 더이상 국민이나 국가에만 머물 수 없다는 것을, 바이러스로 인해 발이 묶인 이곳이 자연과 분리된 인간만의 공동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는 인간중심적 치안 질서를 넘어, 지금까지 셈해지지 않은 ‘하나-더’에 비인간 존재자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전환을 요청한다. 우리는 짧은 시기 동안 촛불과 바이러스를 통해 정치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의 물적 토대를 체감했고 연결성의 실감은 새로운 집단적 주체화의 잠재성으로 내재화되었다. 이제 미래를 위한 데모스의 재구성은 오랫동안 자연의 영역, 객관적인 외부세계로 제쳐두었던 것들을 포함하는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시에서 ‘지구생활자’의 새로운 감각과 함께 정치적인 것이 재배치되는 징후를 포착하여 의미화하고자 한다. 이 읽기는 촛불혁명과 팬데믹에서 얻은 연결의 감각에 의지하며 나아갈 것이다.

 

 

2. 공통세계에 대한 정치적 전회

 

세계에 대한 근대적 인식은 인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분리하는 공고한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다. 한쪽에는 전적으로 자율적인 인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기계론적 필연성에 따라 작동하는 객관적 외부세계가 있다. 이 비대칭적 분배의 논리에 따라 자연은 문명 건설을 위한 자원이거나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 배경으로 간주되었다. 근대의 시스템은 자연에 대한 이러한 특수한 관념을 가지고 지구를 점거했다. 근대 사회에서 자연은 객관적 사실의 세계라는 지위를 얻는 대신 인간세계에 참여하는 작용인으로서의 자격은 박탈당했다. 장혜령의 「죽은 꽃이 우리를 지켜본다」는 우리가 정치에 대해 사유하는 일상적 방식이 이러한 이분법에 따라 전형화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군이 이라크를 침공한 첫날이었다.

나의 정치학 선생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비통한 얼굴로 그녀는, 백 명 가까운 학생들이 앉아 있는 강의실에 들어섰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강의실의 벽시계는 멈춰 있었다. 선생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관객처럼, 학생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내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스며든 빛으로 공기의 입자가 어른거렸다. 그것은 누군가의 혼 같기도 했다.

 

이건, 누가 가져다놓은 건가요.

 

교탁 위에, 크고 붉은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나는 침묵했다.

 

어느 밤 꿈속에서 이렇게 크고 붉은 꽃을 본 적이 있었다. 가위로 그 목을 도려낸 적이 있었다. 꽃은 죽어도 죽지 않는 두려운 생명이었다. 두려움 때문에 나는 이미 죽은 꽃을 헤집어, 죽이고 또 죽였다. 가시에 찔려 두 손에서 피가 솟을 때까지.

 

선생은 장미로 손을 뻗어 향을 맡았다.

 

저는 꽃을 좋아합니다. 가난한 대학원생 시절엔 밥은 굶어도 꽃을 사곤 했는데…… 아, 아름다워.

 

강의실에 앉아 있던 스무 살들이 하나둘 킥킥거렸다. 날카롭고 빛나는 유리 조각을 전학생의 외투 주머니에 몰래 넣어두었던 유년의 교실에서처럼. 킥킥, 킥킥, 병(病)처럼 웃음이 번져가는 동안, 조용히 나는 나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혜령 「죽은 꽃이 우리를 지켜본다」 전문10

 

이 시는 연극적 연출을 통해 정치학 선생의 발언을 무대 위에 올린다. 그의 발언은 정치적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는 무의식적 관습과 감각의 배치를 보여준다. 미군의 이라크 침공은 간과할 수 없는 정치적 사건이며 정치학 선생으로서 발언의 의무를 지니는 대상이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라는 선생의 발언은 사건에 대한 정치적 판단과 함께 윤리적 민감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어딘지 자동반사적인 데가 있다. 곧이어 교탁 위에 놓인 꽃으로 시선이 옮겨가고 이번에는 꽃에 대한 선생의 반응이 이어진다. “저는 꽃을 좋아합니다. 가난한 대학원생 시절엔 밥은 굶어도 꽃을 사곤 했는데…… 아, 아름다워.”라는 발언은 그 정서적 전형성 때문만이 아니라 앞선 발언과의 대비 때문에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두 발언의 배치와 연출은 의도적인데, 그 사이에 끼워넣은 꿈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가위로 그 목을 도려낸 적이 있었다.”는 표현은 ‘꽃의 살해’를 이미지화하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죽이려 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은 ‘꽃의 살해’가 불가능한 사건임을 말해준다. 꽃은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꽃을 죽이는 행위는 윤리나 범죄의 영역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시인은 전쟁의 대규모 살육과 꽃 한송이의 죽음을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자동화된 구분과 그에 따른 관습적 반응을 폭로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관습과 감각을 학습하고 전수하는 강의실에 ‘병처럼 번지는 웃음’은 선생이 진지하게 내면화하고 있는 이분법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보여준다. 시의 제목처럼 ‘죽은 꽃’은 객체의 자리에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도 죽지 않는 두려운 생명”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근대적 이분법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브뤼노 라뚜르(Bruno Latour)는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실제로 ‘임계영역’(critical zones)에 갇혀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11 “우리 자신의 행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좁은 공간에 우리가 락다운되어 있다는 관념 자체”가 정치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동안 인간을 둘러싼 무한한 외부세계로 여겼던 지구가 사회에 관여하고 인간 행위에 반응하는 좁은 장소로 드러나면서 ‘글로벌’이라는 인식론적 망상을 일깨웠기 때문이다.12 글로벌을 인류의 공통세계로 간주해온 우리는 늘 세계가 저쪽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인간-비인간 존재자들로 연결된 이쪽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흔들리는 밤길을 걸으며 아무 별 하나를 쳐다본다. 그러나 그저 희미한 별, 빛나는 별 같은 생각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나와 별 사이의 거리를 살아 있는 것들로 채우고

나의 생각이 별까지의 거리를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아내를 지나 양을 지나 염소를 지나…… 별을 향하여 최대한 사지를 쭉 뻗은 채 최선을 다하는 생명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별은 너무나 멀다. 자꾸만 그저 희미한 별, 빛나는 별을 향하여 생각이 간다. 내가 아는 살아 있는 것이라곤 나의 아내, 어느 책에서 본 양, 어디서 읽은 염소 그리고 다시 양……

깊은 잠에 빠질 것 같다. 나와 별까지의 거리, 깜깜한 밤길이 나를 집으로 돌려세운다. 집까지의 가로등이 생명을 줄 세우는 별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현관문이 잠든 가족들을 깨우며 쾅, 하고 닫힐 때

어둠을 뚫고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마중 나올 때, 그것을 안아 들었을 때, 나의 두 발이 공중으로 조금 떠오를 때, 별을 빛나게 하는 생명에 대해 빼먹은 생각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김상혁 「아내를 지나 양을 지나 염소를 지나……」 전문13

 

김상혁의 시에서 화자는 “나와 별 사이의 거리”,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이상한 진공 상태에 대해 생각하려고 한다. 화자는 왜 “희미한 별, 빛나는 별 같은 생각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까? “희미한 별, 빛나는 별 같은 생각”은 자석처럼 자꾸 ‘나’의 생각을 그쪽으로 잡아당기고 진공청소기처럼 다른 생각의 여지를 빨아들여 없애버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화자는 “나의 생각이 별까지의 거리를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없도록” “나와 별 사이의 거리를 살아 있는 것들로 채”워보려고 한다. 가장 가까운 바로 옆의 아내로부터 시작하여 살아 있는 것들로 촘촘하게 줄을 세워 저 먼 별까지 닿아보려 하지만 화자의 생각은 두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바닥이 난다. 그나마 떠올린 양과 염소도 “어느 책에서” 읽은 게 다라면 나와 연결된 살아 있는 것이라곤 아내밖에 없는 것이다. 시의 제목이기도 한 “아내를 지나 양을 지나 염소를 지나……”에서 저 말줄임표는 생각의 비어 있는 자리를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또한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거대한 우주의 별 하나를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 단독자 대(對) 세계’라는 구도가 깔려 있는데, 이는 매우 익숙하지만 사실은 근대적 신화에 가깝기도 하다. 저 신화적 조망에서 도망쳐보려는 화자는 뜻대로 교정되지 않는 생각에 “깊은 잠에 빠질 것 같다.”고 말한다. 이 깊은 잠은 좀처럼 깨어나기 어려운 근대의 꿈, “별을 빛나게 하는 생명”은 셈하지 않고 “별까지의 거리를 한 번에 뛰어넘”으려는 꿈이다. 그러나 아내, 가족, 집, 가로등, 반려견으로 이루어진 생활세계는 “별을 향하여 최대한 사지를 쭉 뻗은 채 최선을 다하는 생명들”처럼 ‘사지를 뻗어’ 접촉하면서 실감하는 세계일 것이다. 이 시의 놀라운 전환은 현관문 닫히는 “쾅” 소리와 함께 가장 가까운 살아 있는 것들의 세계를 마주하는 순간 일어난다. 누구보다도 먼저 뛰어나온 강아지를 안아 들자 “나의 두 발이 공중으로 조금 떠오”른 것은 종차를 초월한 관계성이 나와 별 사이에 비어 있는 자리를 하나 더 채워주었기 때문은 아닐까.

“별을 빛나게 하는 생명에 대해 빼먹은 생각이 너무나 많았”다는 화자의 진술은 단순히 생명존중에 대한 깨달음이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단단히 몸에 배어 있는 세계감의 틀, 자동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과 생각하려 해도 생각되지 않는 것의 배치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생각이 별까지의 거리를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공통세계에 대한 기존의 감각을 재조정하려는, 그렇게 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망으로 채워진 가까운 세계의 실감을 회복하려는 시인의 노력일 것이다.

 

 

3. 연결된 타자성과 매개자로서 말하기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레비 브라이언트(Levi R. Bryant)는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것들에 대한 강박적인 집중을 객체들에게로 돌리고자 한다.14 근대적 틀에서 객체나 사물은 주체의 응시 또는 기호화의 대상이거나 문화적 담론의 구성물로 간주되었다.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고려는 늘 주체라는 최종 심급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브라이언트는 어떤 객체가 무엇인지는 그 객체에 대한 우리의 접근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객체는 다른 객체들과 관계를 맺는 맥락에 따라 자신의 잠재적 역능을 국소적으로 현실화하는 역동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글로벌, 지구, 자연 등으로 불러온 공통세계는 객체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들로 얽혀 있는 내재적 장인 것이다.

그러나 세계와 존재자들의 실상이 그렇다 하더라도 언어로 이루어진 시는 주체의 발화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일인칭 진술을 양식으로 삼은 시는 대상을 해석하고 표상을 씌우고 의미화하는 언어적 주체의 자리를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객체를 재현하는 대의의 자리를 물리고 객체들을 매개하는 관계적 위치에서 ‘연결된 타자성’을 현시하는 최근 시의 발화 방식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속에도 사람이 묻혔을까

이 달콤한 봉분 속에 초코로 덮인 조그만 무덤 속에

사람이

 

배스킨라빈스 언 컵을 놓고 마주 앉아

정신없이 퍼먹다 우리는

 

플라스틱 스푼을 놓는다

놓고 만다

으 갑자기 춥네

과장되게 웅크리면서 애들처럼 킥킥거리면서

 

유리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은 겨울

 

패딩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뒤뚱뒤뚱 걷는다

걷다가 빙판 위에 철퍼덕 넘어지는 한 사람

야 저거 봐봐 가리키자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너는 습관처럼 입술을 비빈다 혀로 핥는다

이 속에도 사람이 묻혔을까

 

손끝으로 무덤 가장자리를 톡톡 건드리면서 진득한 흙을 헤집으면서

 

재차 입술을 핥는다

아직 단데

사방은 온통 핑크로 장식돼 있고 우리는 너무도 멀쩡한데

 

언 것은 녹기 마련이라지만

그런 장면은 왠지 께름칙해서

왠지 서글퍼서

슬그머니 문을 나선 우리는

 

검은 발자국이 무수한 빙판 앞에 서서

이 속에도 사람이 묻혔을까

 

못 들은 척

겨울도 곧 끝이 나겠지 중얼거린다

 

천천히 걷는다

불 꺼진 간판 같은 서로의 옆얼굴을 흘깃거리면서

 

초코일까 흙일까

아니면 그냥 얼음일까

—박소란 「아이스크림」 전문15

 

박소란의 이 시에서는 생각이 진술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물, 공간, 행위, 맥락, 타자들의 우연한 개입이나 연상작용에 의해 생각이 생성되고 흐르고 도약하면서 진술이 이어진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이 속에도 사람이 묻혔을까”라고 묻게 된 것은 아이스크림의 모양이 봉분과 닮은 데서 비롯된 연상작용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스크림과는 한참 거리가 먼 “무덤”과 ‘그곳에 묻힌 사람’이 끌어당겨져 오면서 이 시의 독특한 정서가 빚어지기 시작한다. 시의 전개를 따라가다보면 달콤함, 초코로 덮임, 진득함이라는 아이스크림의 물성,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손끝으로 건드리거나 헤집는 행위가 무덤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면서 우리는 두 사물의 친연적 관계 맺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화자는 아이스크림을 정신없이 퍼먹다가 갑작스러운 추위를 느낀다. 이때 “언 컵”에서 “플라스틱 스푼”으로, 다시 ‘춥다’는 감각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저변에서 무언가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스푼을 놓게 된 것은 배가 부르거나 갑자기 추위를 느껴서일 수 있겠지만, “놓고 만다”라는 표현에는 상황적 항복과도 같은 하나의 전환이 깔려 있다. 그것은 정신없이 퍼먹던 조금 전까지의 판단정지 상태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 춥다라는 감각으로 강제된 어떤 생각 때문이다.

“유리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바깥은 겨울”이라는 다음 연의 진술이 더해지면 그 생각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맥락이 만들어진다. 겨울 날씨와 상관없이 유리 벽 안쪽은 아이스크림을 한참 퍼먹은 다음에야 추위를 느낄 만큼 따뜻한 것 같다. 안쪽의 온도와 플라스틱 스푼과 핑크색 장식은 바깥의 추운 날씨, 펭귄을 연상시키는 “패딩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뒤뚱거리는 모습, 빙판 위에 넘어지는 사람과 대비되면서 춥다는 감각 위에 으스스한 불편함을 얹어놓는다. 빙판 위에 넘어진 사람의 불행은 “야 저거 봐봐”라고 잠시 주목했다가 그가 “어디론가 사라지”면 금세 잊고 말 구경거리겠지만, 문을 나서면 나 역시 “검은 발자국이 무수한 빙판 앞에 서”게 되고 언제 넘어지고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감이 유지되고 있는 안과 바깥은 우리의 입술 위에서 포개진다. 입술을 비비고 핥는 맞은편 ‘너’의 모습은 ‘나’를 비춘 거울 같은 것인데, 우리의 입술에 즉물적으로 남아 있는 달콤함이 바깥의 상황과 연결되면서 “우리는 너무도 멀쩡한데”라는 인식으로 변이된다. “언 것은 녹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눈앞의 아이스크림에서 시작하여 유리 벽 바깥의 빙판을 지나면 말하지 않아도 더 먼 북극에까지 닿아 “왠지 께름칙”하고 “왠지 서글”픈 마음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불편함을 순간의 정서나 기분에 그치지 않고 힘겨운 생각으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생각으로, 그리하여 어떤 변화의 시작이 될 생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이 속에도 사람이 묻혔을까”라는 반복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초코와 흙과 얼음과 봉분으로 만들어진 생각의 덩어리를 점점 크게 굴리면서 “이 속”이라는 가깝고 일상적인 것에 죽음이나 희생과 같은 먼 곳의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박소란 시의 화자는 아이스크림에서 무덤을, 묻힌 사람을, 어떤 희생과 죽음을 바라봄으로써 일인칭의 시선을 세계로 확장한다. 그러나 이 시선은 섣부른 해석이나 판단을 사물들에 덮어씌우지 않고 일상의 사물과 풍경과 행동들이 어떤 맥락과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 보이도록 만드는 데까지만 가닿는다. 그렇게 화자에 의해 매개된 사물들의 자리를 짚어가다보면 읽는 사람의 내면에서 생각과 감정의 흐름이 구름처럼 조합된다. 그의 시는 우리 자신이 다른 존재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희미하게 감지하고 있던 연결감을 포착하여 우리 스스로 인식하고 느낄 수 있도록 내어놓는다. 일상의 다기한 관계망 속에서 우리의 행위와 감각과 정서를 연결하고 접속시키는 일인칭의 낮은 목소리가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지구생활자들의 동맹을 위하여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다양한 이슈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내면화한 감수성의 계발을 촉구하고 있고, 자본과 권력에 포획되기 쉬운 대중의 정동을 공명과 연대의 에너지로 전환해낼 계기를 요구하고 있다. 사실과 정의의 문제마저 이해관계나 집단의식에 따라 변질되는 시대에 ‘정치적 올바름’은 편향된 고정관념을 교정하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자칫 규범화된 경전이 되기 쉽고,16 ‘정동정치’는 우리의 일상적 정동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의 착취를 폭로하지만 정치적 권태와 무기력에 빠진 대중을 일으켜 세우기에 역부족이다.17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최근의 시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표제화하는 대신 사물들의 섬세한 연결망을 드러냄으로써, 저항적 정동정치를 펼치는 대신 은폐되어 있는 일상의 실감을 재조직함으로써 발 딛고 선 바로 이곳의 정치를 가시화하고 있다.

오늘날 국경을 초월한 팬데믹과 기후위기는 새로운 국제적 패권 다툼과 함께 국가주의로의 퇴행을 가속화하고 있다. 라뚜르는 불평등의 폭증, 탈규제 확대, 글로벌화, 국민국가 보호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를 ‘신기후체제’로 규정하면서 인류의 행성 공유라는 이데올로기가 해체되고 영토 상실과 이주 위기가 지구생활자들의 보편적 운명이 되었다고 말한다.18 그렇다면 그의 책 제목처럼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안전하게 착륙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각 노선이 막힘없이 연결된다 이렇게 늦은 밤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나라는 없을 거야 사거리를 지나다 총 맞을 일도 없잖아? 살인율이 가장 높다는 멕시코, 멕시코를 곱씹다가

 

스스로를 죽이는 나라와 타인을 가장 쉽게 죽이는 나라 중 어느 쪽이 좀더 나은 곳일까 생각하다가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지 못했다 다음 열차를 기다리며 에코백을 버렸다 원하지 않는 물건을 처치하는 데 돈을 쓰는 건 무척 아까운 일이다 게다가

 

친환경 소재 에코백은 잘 썩어 어쩌면 좋은 비료가 될 수 있고

 

질 좋은 비료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

 

빈 열차가 플랫폼을 빠르게 통과한다 달리는 열차의 소음은 시원하게 갈리는 원두 소리 같구나

 

쇠 타는 냄새

 

불합리한 구조조정에 항의하던 사람이 서울 한복판에서 칼을 휘둘렀으나 부상자는 0, 사망자는 한명뿐이었다고 한다

—정다연 「에코백」 부분19

 

정다연의 시는 글로벌 자본주의시대가 어떻게 세계 곳곳의 로컬한 삶의 고통을 연결하고 확대재생산하는지 보여준다. 아프리카와 멕시코에서 생산된 원두를 집 근처 까페에서 구입할 수 있는 세상, “할인율”과 “최저가”와 “덤”을 따지면서도 “가난한 지역사회를 살리는” “착한 소비”를 가끔 고려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면서 그들을 “너무도 쉽게 눈에 띄”게 하는 세상, 전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디서나 살아볼 수 있지만 높은 자살률과 살인범죄율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고민하게 되는 세상, “불합리한 구조조정”이 해고된 노동자 개인의 자살로 귀결되는 세상. 시인은 친구와의 일상적인 만남과 대화 곳곳에 다양한 에피소드와 사건과 생각들을 배치해 우리의 위선과 뻔뻔한 합리화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훑는다. 그러나 정말로 폭로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보이는 계산과 선택과 감각과 정서 뒤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구조, 거기에 기반한 세계의 취약함이다. 이 시에서 ‘에코백’은 기념품, 착한 소비, 지역경제 활성화, 친환경 소재 등의 알려진 의미망과 함께 찢어질 것 같은 취약함, 원하지 않는 물건, 처치하는 데 드는 돈 같은 낯선 맥락에 놓이면서 우리의 대응책이 얼마나 위태롭고 임시방편적인지를 드러낸다. “쇠 타는 냄새”가 점점 더 가까이에서 진동하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주체, 인간, 인류, 근대인이 아닌 지구생활자로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심각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20

 

보일러를 틀고 물을 끓인다

이런 생활을 지속하는 한

이곳은 영영 저곳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안전한 곳에 있으면 안전한 사람이 되겠지

이불 속 악몽을 악몽의 전부라 여기며 살겠지

하지만 기를 수 없는 것을 기르려면

 

도움닫기와 점프

뜀틀을 뛰어넘는 법은 단순한데

왜 번번이 뜀틀에 주저앉고 마는 걸까

 

겨울에서 겨울로

더 가파른 겨울로

양을 몰고 가는 상상을 한다

 

늑대의 목에 달린 방울을

미래라 부르는 사람이 되려고

—안희연 「나의 투쟁」 부분21

 

안희연의 시는 이곳으로 저곳을 옮기고 기를 수 없는 것을 기르는 인간의 생활방식이 더이상 지속될 수 없다고, 안전한 곳은 없고 악몽은 꿈속의 일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기호와 열대과일의 운명 중 무엇이 더 중요하고 급한지를 선택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이곳과 저곳이, “물속에 잠긴 사람들”과 내가 연결되는 맥락을 발견하고 모든 존재자들의 행위성을 정치화하는 전략에 의존해야 한다. 시인은 “미래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구생활자들의 미래는 늑대에 쫓겨 밀려나는 점점 더 가파른 어딘가의 피난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늑대의 목에서 울리는 방울, 바로 지금-이곳의 위기와 경고에 달려 있는 것이다. “도움닫기와 점프”로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다. 지구라는 임계영역에 격리된 우리들의 생존 비용은 ‘나의 투쟁’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투쟁을 넘어 모든 지구생활자들의 정치적 동맹으로 치러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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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랑씨에르에 따르면 ‘정치’(le politique)는 합의 또는 일치를 통해 형성되었다고 간주되는 공동체에 매순간 불일치를 가져오는 일종의 탈정체화의 과정이며, ‘치안’(la police)은 그러한 불일치의 활동을 소거하며 비가시화하는 형식으로 공동체의 유지에 기여하는 활동이다.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08 참조.
  2. 같은 책 115면.
  3.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허경 옮김, 인간사랑 2011 참조.
  4. 랑씨에르는 2008년 한국 방문 후 인터뷰에서 평범한 프랑스 지식인에게는 “텔레비전 앞에 주저앉은 슈퍼마켓 고객의 군림이나 다를 바” 없는 민주주의가 한국에서는 “국가기계로부터 분리된 집단적 힘”이 “거리를 메우는 스펙터클한 형태”로 나타났다며, 이처럼 민주주의는 맥락에 따라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들’」, 조르조 아감벤 외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김상운 외 옮김, 난장 2010, 131면.
  5. 황정아는 국회 탄핵가결 촉구 집회에 나가며 ‘내가 가야지 가결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는 어느 시민의 말을 인용하면서 내가 나서지 않고는 안 되겠다는 “어떤 ‘기분’ 혹은 감정”이 많은 이들의 내부에서 발동하여 촛불혁명의 비약이 가능했다고 분석한다. 황정아 「민주주의는 어떤 ‘기분’인가」,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56면.
  6. 이와 관련해서는 “국가에 대한 신뢰와 다른 개인들에 대한 신뢰가 맞물리며 발생한 ‘저강도’ 고양감”을 “촛불혁명의 ‘고강도’ 고양감”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다고 말한 황정아의 논의를 참조할 수 있다(황정아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 『창작과비평』 2020년 가을호 28면). 송종원 역시 코로나가 “‘연결된 존재’로서의 실감”을 일깨워줬다고 하면서, 촛불과 코로나가 “시민적 주체성에 새롭게 눈뜨게 만든 사건이었다”고 정리한다(송종원 「시인과 시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19면).
  7. 황정아, 같은 글 28~29면.
  8. 백영경은 “돌봄을 중심으로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상상하고 현 사회 재생산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로 커먼즈 운동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커먼즈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라는 자각 속에서 국가와 공적인 공간을 장악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 그 자체”를 의미한다. 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24~28면.
  9. 정남영 「대안근대로의 이행과 커먼즈 운동」, 『오늘의 문예비평』 2017년 겨울호 204면.
  10.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문학동네 2021.
  11. 라뚜르는 “인간사의 배경으로만 인식되던 육지에 대한 정의”가 ‘임계영역’의 개념 덕분에 바뀔 수 있었다고 말한다. 지구과학에서 말하는 임계영역은 대기권과 기반암 사이 몇 킬로미터에 한정된 얇은 생물막(biofilm), 식생, 토양, 지질, 지하수계 등의 근지표환경을 말한다.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8~9면.
  12. 같은 책 11면.
  13.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 현대문학 2019.
  14. 브뤼노 라뚜르,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과 함께 객체지향 철학을 개진해온 레비 브라이언트는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지 않는 평평한 존재론을 ‘객체들의 민주주의’라고 명명한다. 레비 R. 브라이언트 『객체들의 민주주의』,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1.
  15. 『있다』, 현대문학 2021.
  16. 최진석은 후지이 다케시의 논의(「정치적 올바름, 광장을 다스리다?」, 『문학3』 2017년 2호)를 경유하여 “정치적 올바름은 자칫 광장의 차이들을 권력 간의 알력으로 바꿈으로써 정치를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규범화의 유혹과 위험으로부터 늘 스스로를 경계하고 방어하도록 애써야 한다”고 말한다. 최진석 「공-동적 사건의 비평을 위하여: 문학이라는 커먼즈와 비평의 문제」,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66면.
  17. 이성혁은 인지자본주의가 정동을 조작함으로써 노동자의 감정이나 표현력 자체를 상품화하기 때문에 시의 공명을 통한 기쁨의 정동으로의 이행이 저항정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성혁 「인지자본주의의 정동정치와 시의 정치적 위상」, 『외국문학연구』 71호, 2018.
  18. 라뚜르는 2017년 미국의 빠리기후변화협약 탈퇴 선언으로 “기후 문제는 지정학적 이슈의 핵심이며 불의, 불평등의 문제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온 세상이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영토를 잃어가고 있다는 공황 상태의 감정은 엘리트 식민주의자와 피식민 경험자가 모두 공유하게 된 새로운 보편성, “못된 보편성”(wicked universality)인데, 글로벌화가 약속한 이전의 보편성이 사라지면서 지금 우리에게 유일하게 이용 가능한 것이다. “이 새로운 보편성은 지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의 공유로(즉 정치적 정동을 공유하여) 구성되어 있다.” 브뤼노 라투르, 앞의 책 20~28면.
  19.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창비 2021.
  20. 라뚜르는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에 이어 『나는 어디에 있는가?』에서 카프카(F. Kafka) 「변신」의 주인공에 빗대어 긴 격리체험 후에 얼굴에 마스크를 한 다른 존재자로 깨어난 것 같다고 고백한다. 그는 근대적 자연 관념이나 글로벌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대지’(terre)를, 근대인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대지인’(les terrestres)을 내세우면서 변신 후의 다른 존재자로서 이 ‘대지인’이 될 것을 요청한다. 이 책의 번역을 맡은 김예령은 ‘대지인’을 ‘지구생활자’로 옮기며, 이 “자연스럽지 않은 명칭”이 인간 행위자뿐 아니라 비(非)인간 행위자들을 전부 아우르기 위한 의도—‘인(人)’이나 ‘자(者)’가 아닌 미립자나 포자 등에 사용되는 ‘자(子)’—로 이해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옮긴이의 의도를 차용하여 이 글도 ‘지구생활자’라는 명칭을 선택해 전개했다. 브뤼노 라투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코로나 사태와 격리가 지구생활자들에게 주는 교훈』, 김예령 옮김, 이음 2021, 11~31면.
  21.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오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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