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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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21세기, 통권 111호, 창간 35주년

 

 

작년초에 ‘새 밀레니엄이며 21세기’라고 온통 떠들썩했었는데 이번 새해에는 2001년이 ‘진짜’ 21세기며 심지어 ‘진짜’  밀레니엄이라는 소리가 자자했다.

적어도 21세기로 말하면 2001년이 그 첫해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창비에서는 그런 숫자놀이를 떠나 일찍부터 올해를 또 한차례 쇄신의 해로 잡고 있었다. 창간 35주년을 맞는데다 통권 111호로 시작되는 해이기에 더욱 그랬다. 또 이 모든 기념일정을 넘어, 분단체제의 현실 자체가 쇄신 없는 자에게는 몰락과 불행만을 안겨주는 변혁의 시국에 이미 접어들었다.

이런 다짐의 표현으로 잡지의 겉모습에도 약간의 변화를 가했다. 하지만 남들처럼 확 바꾸지는 않고 어찌 보면 창간호의 디자인에 오히려 가까워진 느낌조차 주는 것도 우리 나름의 또다른 다짐의 표현이다. 결코 시류에 영합하지 않으면서, 늘 새롭되 늘 한결같음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의 다짐인 것이다. 이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임은 물론이다.

편집진의 보강작업도 일정한 연속성을 전제로 이루어졌다. 디지털창비(www.changbi.com)에 실은 편집인의 신년사를 통해 이미 알렸듯이 그간 자문위원으로 활약해온 서양사학자 유재건 교수와 영문학자이며 문학평론가인 한기욱 교수가 편집위원으로 가세했고, 자문위원으로는 소광섭(물리학 교수이며 계간 『과학사상』 편집위원), 이욱연(중문학자), 나희덕(시인) 세 분이 새로 참여하게 되었다.

잡지 꾸밈새의 변화 중에 특기할 것은 ‘독자의 편지’를 앞자리에 끌어냄으로써 독자들의 직접 참여를 확대하기로 한 점이다. 첫 시도인지라 아주 흡족한 결과는 못되지만 지난호의 문학 특집과 의료사태 점검에 대한 후속토론, 경인여대 사태에 대한 속보 등을 만날 수 있어 그런대로 뜻있는 출발을 했다고 본다. 앞으로 저명한 필자분들도 ‘독자의 편지’란에서 만나뵈었으면 한다.

그러나 끊임없는 고민이자 연구거리는 책의 몸통에 해당하는 기고문들을 어떤 내용, 어떤 모양새로 채워가냐는 것이다. 근년에는 일반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짧은 글들을 많이 싣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촌평, 문화평, 현장통신 등 짤막짤막한 읽을거리가 많아졌을뿐더러 이들 갈래에서 새로운 수준을 보여주는 성과도 있었지 싶다. 반면에 창비 특유의 뚝심 같은 것이 줄어들고 때로는 종합월간지처럼 어수선해졌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번호의 경우는 창간 35주년의 선물 삼아 단편을 여섯 편이나 실은데다 친근한 읽을거리도 많아 항목수가 그 어느 때 못지않다. 하지만 상당한 지면을 갖고서 할말을 하는 무게있는 논문들도 몇편 실었다. 짧은 글은 되도록 짧게, 길게 쓸 이유가 있을 때는 충분히 길게—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구도인데, 그 둘의 아름다운 조화는 역시 계속 추구하는 목표로 남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면의 내용을 통한 쇄신일 터이다. 21세기 벽두 편집진의 노력은 뭐니뭐니 해도 ‘21세기, 어떤 시대인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특집에 집중되었다. 물론 대답도 단도직입적인 것이 나올 물음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가운데서만 제대로 된 대응책도 나올 테니만큼 창비 나름의 문제제기를 시도한 것이다.

최원식 교수의 글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루기보다 고은·황석영·황지우의 최근 역작 하나씩을 비평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통일시대’가 실제로 어떤 시대인지, 우리 문학은 이를 얼마나 감당하고 있는지, 이런 한국문학이 ‘고전시대’에 진입했는지 또는 그 이전인지 등을 독자가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김상환 교수의 「테크놀로지 시대의 동도서기론」은 맑스, 하이데거, 데리다 등의 발본적 근대비판이 ‘동도(東道)’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환기하기 마련이지만, ‘서기(西器)’의 근원과 실상을 그들 못지않게 깊이 사유함으로써 스스로 동도도 서도도 아닌 ‘유령 같은’ 그 무엇이 될 때만 뜻있는 새 길을 열 수 있는 것이 우리 시대임을 설파한다. 경제학자 유철규 교수의 글은 ‘세계화’라는 목전의 현실에 주목하는 시대인식에서 출발하여 그 기본논리가 무엇이고 한국경제에 어떤 식으로 관철되고 있는지를 분석하면서, ‘국민참여경제’라는 대안 모색을 우리가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다.

21세기 이런 다양한 측면과 시간대를 상호 연결지어 좀더 포괄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특집 첫머리의 「다시 지혜의 시대를 위하여」이다. 특히 세계체제 차원의 ‘근대’ 및 그 최신 국면으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와 한반도의 ‘통일시대’ 간의 상관관계를 살피면서, 동아시아 차원의 다양한 시간대도 일별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견해이고 그 설득력 여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나, 실천상의 개별 ‘시간표’들을 배려하는 이런 총괄적인 시각의 확립이 창비 편집진이 추구하는 과제인 것이 사실이다.

특집 속의 문학평론 외에도 이번호에서는 문학의 비중이 크다. 박상륭·이혜경·공선옥·전성태·하성란·권지예 등 여섯 분이 절제된 단편을 써주었고 정양 선생을 비롯한 여덟 시인이 귀한 작품을 주셨다. 게다가 한기욱, 하정일 두 분의 무게있는 평론이 실렸는데, 특히 ‘대중문화 속의 소설과 영화’를 함께 다룬 한기욱씨의 논문은 이진경씨의 따르꼬프스끼 작품론, 그리고 애니메이션에 관한 문화평과도 이어져 흥미를 더할 것이다. 서평, 촌평 형태로 나가는 평론들에도 주목해주시기 바란다.

그밖에 많은 읽을거리를 다 소개할 겨를은 없다. 다만 여러 호에 걸쳐 지속되는 교육현장에 관한 통신들이 이번에도 계속되면서, 이정우 교수의 예리한 교육개혁비판 논문이 더욱 실감나게 읽히리라 본다. 또한, 지난호의 ‘의료대란과 의료개혁’ 기획은 자유게시판의 활발한 토론과 이번호 독자 편지를 통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거니와, 지난번의 ‘집중점검’에서 소홀했다고 할 대안의학에 대한 검토가 이번에 서구의 대안의학에 관한 방건웅씨의 검토를 통해 보완되고 있음도 반가운 일이다.

 

창비가 지향하는 바를 앞에도 좀 말했는데 이런 것들이 하나같이 요즘 시류에는 안 맞는 게 아닌가 싶다. 확 바뀌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옛날의 확실한 지지기반을 움켜쥐고 버티지도 않는다는 것부터가 이중의 부담일 수 있다. 게다가 문학을 버리고 좀더 대중성있는 분야를 찾아나서지 않음은 물론, ‘문학중심지’이되 여러 분야의 담론이 소통하면서 사회의 공론을 형성하는 마당을 지향하는 것도 전문지식이나 매니아적 취향 위주로 점차 파편화되어가는 대세를 거스르는 꼴이다.

이런 때일수록 창비라는 공론(公論)·정론(正論)의 장 하나만이라도 지켜내기 위해 우리 자신의 각오가 새로워져야겠지만 독자 여러분의 특별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함을 말씀드리고 싶다. 창비에 대해 흔히들 두가지 오해가 있는 듯한데, ‘요즘에도 창비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라는 냉소적 반응이 그 하나이고, ‘창비는 이제 자리가 잡혔으니 안 도와줘도 되지 않나?’라는 과분한 신뢰가 다른 하나이다. 현실로 말하면, 창비는 이른바 선진국 지식인들이 듣고 깜짝 놀라며 부러워하는 부수를 여전히 자랑하는 계간지인 동시에, 정기독자는 계속 늘어나지만 서점판매는 위축되는 ‘선진국적’ 추세에 시달리는 실정이기도 하다. 우리 문화의 세계적 자랑거리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도 뜻있는 분들이 구체적으로 밀어주실 싯점인 것이다. 방법은 역시 정기구독을 늘려주시는 게 첫째지만, 서점을 통한 보급도 직접간접으로 도와주시고, 내용에 대한 질정과 격려도 많이 보내주시기 바란다.

새해를 맞아, 그리고 새로운 세기를 맞아 독자 여러분의 뜻하시는 일이 형통하기를 빌며 이만 줄인다.

[白樂晴]

백낙청白樂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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