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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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10년대 한국문학을 위하여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

201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들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최근 저서로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백낙청 회화록』(전5권)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우리시대’가 정확히 언제를 말하는지는 정하기 나름이다. 한국어는 더러 ‘나’라고 할 자리에 ‘우리’라고 쓰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필자 개인이 살아온 ‘우리’ 시대는 오늘날 많은 독자에게 먼 옛날 ‘남의 시대’로 느껴질 법하다. 하지만 실제로 419 이후의 한국문학, 특히 민족문학운동이 다시 전개된 1970년대 이래의 문학은 여전히 ‘우리시대의 문학’인 면이 없지 않다. 범위를 더 좁힌다면 19876월항쟁 이후의 20여년이 더욱 분명하게 ‘우리시대’가 될 것이고 이 시기의 문학은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도 ‘우리시대의 한국문학’으로서 별다른 거리감을 안 주지 싶다.

문학의 활력과 빈곤을 논하면서도 대략 이런 다양한 의미의 ‘우리시대 한국문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 동시에 새로운 10년대로 넘어가는 2010년의 시점에서 구체적인 성찰은 2000년대의 문학에 집중되는 것이 당연하다.

 

2. 1970년대 이래 민족문학론이 한국문학의 빈곤보다 활력과 가능성을 강조한 것이 빈곤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외국문학 특히 서양문학의 선진성을 일방적으로 신봉하고 홍보하면서 우리 문학의 낙후성을 과장하여 더욱 조장하기도 하는 풍조에 맞서, 비록 가난하나마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문학이 있고 더구나 ‘제3세계적 인식’이라는 진정으로 선진적인 시각을 확보함으로써 우리의 문학 또한 세계문학의 선두대열에 합류할 수 있음을 상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3.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적 시야는 중요하다. 요즘은 ‘제3세계’라는 말을 잘 안 쓰지만, 서구중심적인 세계의 문학시장이 설정한 ‘보편성’의 잣대를 맹종하지 않되 세계적인 잣대 자체의 수정을 실현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성에 육박하는 세계문학에 동참할 필요성이 절실하다(이런 의미의 세계문학운동에 관해서는 졸고 「세계화와 문학—세계문학, 국민/민족문학, 지역문학」, 『안과밖』 2010년 하반기호;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닌 국내의 세계문학 논의를 모은 책으로 김영유희석 엮음, 창비담론총서 4 『세계문학론』 〔근간〕 참조).

내가 문학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에 주체적인 창작을 수행하면서도 세계적인 시야를 유난히 강조한 이가 김수영(金洙暎)이다. 그는 신동엽의 「아니오」 같은 시에 “세계적 발언을 할 줄 아는 지성이 숨쉬고 있”다고 칭찬하면서 동시에 신동엽 시인이 “50년대에 모더니즘의 해독을 너무 안 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라는 말로 폐쇄적인 민족주의로 흐를 가능성을 경계했다(「참여시의 정리」, 『창작과비평』 1967년 겨울호 636면). 다시 말해 모더니즘이라는 세계적 흐름에 접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 ‘해독’을 말할 만큼 모더니즘과 거리를 두는 입장이었기에, 김수영은 그의 사후에 본격화된 민족문학론에도 두고두고 하나의 길잡이가 되었다.

 

4. 2000년대의 한국문학으로 눈을 돌리면 우선 시단의 활력이 눈에 띈다. 이른바 선진국들에 비해 시집이 많이 나오고 잘 팔린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시의 높은 수준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좋은 시를 쓰는 데 고무적인 조건임은 분명하다. 시집의 발간 부수나 판매량이 한국에서도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또는 일본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수준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중적 관심과 애정 속에서 2000년대의 한국시단은 『만인보』 30권을 완간한 원로시인 고은(高銀)에서부터 중진・중견과 신예에 이르는 수많은 시인들이 괄목할 활약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5. 그중에는 대중의 폭넓은 이해를 일부러 외면하는 듯한 시쓰기를 해온 이른바 ‘미래파’ 시인들의 중요한 몫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이들의 시가 다 훌륭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일종의 인정투쟁을 위해 그들의 성과를 통째로 긍정하는, 게다가 더러 현학적이고 자폐적이기도 한 비평담론이 독자를 시 자체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최근에 읽은 김소연의 『눈물이라는 뼈』(문학과지성사 2009)와 신해욱의 『생물성』(문학과지성사 2009)이 좋은 예지만, 재능있고 진지한 시인들이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난해한 시를 써내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은근한 감동을 준다. 비평담론은 여전히 외국의 이론에 잔뜩 꼭지를 잡힌 경우가 허다하다 해도, 시인들은 ‘모더니즘의 해독’을 입을 대로 입으면서 자기만의 언어를 발성하는 경우가 거듭 발견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 중 누가 얼마나 성공했고 그 언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가려내는 비평작업은 앞으로 더 정밀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미래파’ 시인들의 활약이 가져온 한가지 부수적 효과는 그들과 성향을 달리하는 시인이나 독자들의 감수성과 맛썰미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익숙한 언어와 나른한 서정으로 독자의 감성에 호소하면서 지성을 잠들게 하는 시들이야 예전부터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그러한 경각심이 ‘미래파’ 시를 읽고 시달리기도 하면서 더욱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시집들 가운데 예컨대 농촌시에 해당하는 작품이 많은 고영민의 『공손한 손』(창비 2009)이나 정치적 저항의 전통을 이어가는 이영광의 『아픈 천국』(창비 2010)을 보면 2000년대의 새로운 시와 시적 담론에 의해 단련된 언어가 한층 빛을 발하고 있다.

 

6. 우리 비평계에 활력을 더해준 문학의 정치성 논의가 시를 중심으로 촉발된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하다. 지속적인 논의에 시동을 건 이가 시인이기도 했다(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참조). 물론 그 배경에는 2008년의 촛불시위가 있었고, 뒤이어 2009년 초에 ‘용산참사’가 일어나면서 논의에 절실성을 더해주었다.

비평담론에서는 정치성 논의 이전에 ‘문학과 윤리’라는 주제가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두가지 측면을 동시에 지닌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곧, 한편으로는 사회현실에 눈을 돌리는 것 자체를 냉소하던 한때의 문단풍조에서 점차 벗어나는 과정이었는가 하면, 동시에 문학의 정치성 문제와의 정면대결을 여전히 미룬 채 변죽만 울려대는 형국이기도 했다. ‘윤리’가 선악의 분별을 절대시하는 자세일 경우 외부로부터 문학에 부과되는 일종의 질곡이 되고, 진정한 정치도 부당하게 제약하기 쉽다. 반면에 이런 통상적인 의미의 윤리 내지 도덕(morality, morals)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문학의 진정한 윤리임을 강조하는 데 머물 경우 그것은 구체적인 정치현실과 무관한 또하나의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을 발하는 것밖에 안된다. 이런 ‘문학의 윤리’는 레비나스(E. Levinas)의 ‘타자의 윤리학’이나 데리다(J. Derrida)의 ‘환대의 철학’을 원용하여 그 권위를 강화하기도 한다.

여기서 내가 레비나스나 데리다의 철학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경우건 우리 문단의 윤리 논의에서건 서양의 개념을 근거로 윤리와 도덕을 구별하다 보면 원래 동아시아 전통에서 말하던 도덕, 즉 도(道)와 ‘도의 힘’으로서의 덕(德)에 대한 사유가 실종되고 만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문학의 정치성 논의도 구체적인 정치현실에 대한 관심을 그러한 도덕을 사유하는 경지로까지 끌고가지 못할 때 또 한번의 추상화나 편협한 정치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으리라 본다.

 

7. 아무튼 시인의 개인적 실감에서 출발하여 랑씨에르를 적절히 참고한 진은영(陳恩英)의 문제제기 이래 활발한 논의가 뒤따랐고 앞으로 더욱 알찬 논의를 벌일 바탕이 마련되었다. 새로운 진전의 하나는 정치행위—적어도 문학이 문제삼을 만한 차원의 정치행위—에 따르는 ‘보편성’ 문제가 대두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비평동인지 『크리티카』 4(올 2010)은 ‘문학, 정치, 보편성’이라는 특집을 마련했는데 특집의 소개말에 해당하는 김성호(金成鎬)의 「문학의 정치와 정치적 보편성」은 우리 문단의 랑씨에르 활용이 여전히 미학주의, 전문가주의에 치우쳐 있음을 비판한다. “랑씨에르는 바로 이러한 경향의 문학적・비평적 실천에 ‘정치’의 이름을 선사함으로써 그것으로 하여금 ‘탈정치적’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에 아무런 변화도 강요하지 않는,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거나 ‘현장에 밀착’되어 있거나 혹은 ‘구체적으로 반체제적인’ 어떤 행위도 문학인들에게 요구하지 않는 고마운 존재로 등장했다”(17면)는 것이다. “‘문학의 정치’라는 주제 역시 보편성에 관한 물음, 즉 문학이 꼭꼭 닫힌 기존 질서 내부에 열어놓는 자유의 공간이 보편성의 차원을 함축하고 있는지, 어떤 성질의 보편성을 어떤 방식으로 지향하고 있는지에 관한 물음을 피해갈 수 없다.”(27면)

글의 성격상 이 물음에 대한 논자 자신의 답이 나와 있지 않은 점이 아쉽다면 아쉽다. 이 물음을 오늘날 흔히 보편성의 전형적 사례로 언급되는 ‘인권’과 관련해서 발전시킨 것이 같은 특집에 실린 황정아(黃靜雅)의 「인권의 보편성과 정치성」이다. 그는 현존하는 대표적 인권담론들을 비판한 뒤, 용산사태를 두고 ‘아우슈비츠’ 운운하는 일부 문인들의 반응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용산에서 뒤늦게나마 발견한 ‘사람’이 권리의 기입과 현실 사이의 불일치를 구성해내는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잔혹한 국가 폭력에 의해 권리 없음의 현실을 강요당한 희생자로만 보이게 만든다”(같은 책 108면)는 것이다. “랑씨에르에 따르면 인권은 이렇듯 특정 주체에 할당된 권리가 아니라 주어진 전체 공동체에서 자리를 갖지 못한 자들이 권리 박탈에 대항하여 무언가를 할 때 갖게 되는 권리이고 따라서 그가 말하는 인권의 ‘주체’는 곧 정치적 ‘주체화 과정’에 다름 아니다”(105면)라는 것이 황정아의 지적이다. 그런데 ‘보편성’ 또한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보편화 과정에 다름아닌 것이라면, 그것은 문학이 열어놓는 공간에서 ‘보편성의 차원’을 인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레닌의 유명한 문구대로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 입각한 정치행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8. 진은영 자신은 문학의 정치성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 자기보다 훨씬 전에 김수영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음을 논술했다.(한 진지한 시인의 고뇌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여기서 랑씨에르가 말하는 ‘감각적인 것(또는 감성적 경험)의 자율성’을 모더니즘에서 흔히 말하는 ‘예술의 자율성’과 달리 보아야 하고 “삶과 정치가 실험되지 않는 한 문학은 실험될 수 없다”(「감각적인 것의 분배」 84면)는 그의 애초 주장이 한층 힘을 얻는다.

다른 한편 ‘삶과 정치의 실험’이 문학의 진정한 새로움에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갖고 ‘진지한 고뇌’를 1970년대부터 진행해온 한국평단의 다른 흐름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학에서의 현실인식과 문학인의 정치적 실천을 강조하면서도 예술성을 희생하는 정치주의를 경계하고 ‘현실재현’에의 과도한 집착을 넘어서는 길을 모색해온 리얼리즘론은, 모더니즘의 극복이 김수영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인식과 더불어 이러한 극복의 작업이 김수영에서 한발 더 나가 민중의 현실에 한층 밀착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했다(예컨대 졸고 「역사적 인간과 시적 인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 창작과비평사 1978, 187~93면 참조).

그 점에서 류준필(柳浚弼)이 내 리얼리즘 논의의 궤적을 자상하게 되짚으면서 여러가지 오해를 풀어준 것은 개인적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백낙청 리얼리즘론의 문제성과 현재성」,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그는 한국의 리얼리즘 논의를 제대로 발전시키면 랑씨에르보다 “근대예술의 전개과정에 대해 훨씬 원만한 이해가 가능”(같은 글 384면, 원문은 졸고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29면)하리라는 나의 주장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랑씨에르의 예술체제론이 한국평단의 리얼리즘론에 의해 충분히 수렴 가능한 반면 후자의 문학론 중 핵심적인 사항을 놓치는 바 있다는 논쟁적인 문제제기는 “역시, 마구 가거나 너무 가서는 잘 갈 수가 없다”(류준필, 앞의 글 384~85면)는 경구적 발언으로 넘겨버릴 뿐 더 검토하지 않는다.

 

9. 진은영에게 리얼리즘 논의까지 거들어달라는 것은 무리한 주문일 게다. 하지만 문학과 정치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 방식에 애초부터 논의의 폭을 제약하는 면은 없었을까.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감각적인 것의 분배」 69면)는 그의 고백이 후속 논자들의 생산적 토론을 끌어내는 진솔함과 날카로움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여기서 언급되는 ‘사회참여’는 어디까지나 글쓰기가 본업인 시인의 관점에서 파악된 것이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사회참여’는 쉬운데 ‘참여시’는 어렵다는 시인의 고뇌는 창조적인 정치행위가 창조적인 글쓰기보다 본질상 쉬워서가 아니라, 시인이 시를 쓸 때는 글쓰기의 온전한 주인으로 임하는 데 반해 사회활동・정치행위의 영역에서 시인은 남이 차려놓은 판에 객(客)으로 끼어드는 것만으로도 ‘참여’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자기 나름으로 수행하여 거기에 꼭 맞는 행위를 찾아내고 실행하는 것이—지도적인 위치에 서느냐 마느냐와 무관하게—정치영역에서 온전한 주인이 되는 길이라면 그 길을 제대로 걷는 일은 시를 제대로 쓰기만큼이나 지난한 과제일 것이다.

 

10. 정치는 어차피 싸움이다. 사회를 통합하고 적대세력과 화해하는 정치적 노력 역시 그나름의 싸움인 것이다. 문학의 정치성 논의가 리얼리즘 논의로 번지게 마련인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주의적 재현 자체보다도 “역사의 싸움에 임한 동지와 동지 사이에 수행되는 일종의 전황점검(戰況點檢)”에 이바지하는 재현의 신빙성이 중요해지고 나아가 “그것 자체로서 동지와 동지간의 사랑을 전달하고 굳히는 기능”(졸고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 99면)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싸움을 단지 남들과의 싸움으로만 이해하면 정치는 레토릭(수사학)을 낳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시가 나온다는 낭만주의적 공식에 귀착한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시 자체에 정치성이 내재하고 정치 또한 개개인의 자기수련을 포함하는 ‘주체화 과정’이라면, 문학과 정치 모두가 남들과의 싸움이자 자신과의 싸움이 아닐 수 없다.

 

11. 문학의 정치성 논의가 확장되는 또하나의 영역이 소설에서의 정치성 문제다. 김영찬(金永贊)은 최근의 논의에서 “정치와의 관계가 문제시되는 바로 그 ‘문학’의 범주에서 ‘소설’이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지금 한국소설에 정치는 없다”고 비판한다(「문학 뒤에 오는 것」, 『문예중앙』 2010년 가을호 378면 및 379면). 그의 말대로 한국소설이 “근대적 노블(novel)에 요구되는 자질 자체를 애당초 그 자신의 유전자로 갖고 있지 않은”(374면) 문학인지는 따져볼 일이고, 소설의 정치성 논의가 없다는 주장도 다소 과장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시를 중심으로 전개된 논의가 소설 분야로 충분히 번져가지 못한 것은 분명한데, 한기욱(韓基煜)의 「문학의 새로움과 소설의 정치성—황정은 김사과 박민규의 사랑이야기」(『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는 그런 아쉬움을 달래줄 좋은 출발이 아닌가 한다.

구체적 작품논의의 적확성 여부를 논할 자리는 아니다. 어쨌든 가장 사적인 연애의 영역에서 정치성을 읽어내는 발상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페미니즘의 명제에 비춰서도 적절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의 관계를 랑씨에르의 ‘치안’과 ‘정치’ 구분을 끌어와 새롭게 조명한다. 곧, 양자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인데, 이는 리얼리즘 개념의 재조명인 동시에 문학의 정치성 논의 중 랑씨에르 학설을 편의적으로 이용하는 일부 논자들에 대한 김성호 등의 비판을 다른 각도로 제기한 셈이다.

 

12. 한기욱이 ‘시대의 성격’ 및 그에 따른 시대구분 문제를 끌어들인 것도 ‘정치성’ 논의의 구체화를 위해 중요한 전진이다. 그는 일찍이 ‘615시대의 문학’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가 좀더 유연한 ‘615시대론’으로 자기수정을 한 바 있는데(「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3절 ‘문학과 시대적 과제’), 이번에는 97년체제론, ‘속물시대’ ‘냉소주의시대’론 등의 지나친 단순화를 비판하면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상황의 변화나 2008년의 촛불시위에 나타난 우리시대의 다른 측면을 함께 고려할 것을 강조한다. 그 자신 1997IMF구제금융사태의 획기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이를 김종엽 등이 주장하는 87년체제론(김종엽 엮음, 창비담론총서 287년체제론』, 창비 2009)의 틀 안에서 설명 가능한 새 국면으로 파악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나도 공감하는 입장인데, 강조하고 싶은 점은 87년체제론이—어떤 시대구분론이든 당연히 그래야 하듯이—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정확히 자리매기는 데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곧, 우리가 지금 87년체제 속에 살고 있다는 말은, 이명박시대가 ‘선진화시대’가 아닐뿐더러 김대중・노무현 시대에 시작된 ‘신자유주의시대’의 심화에 불과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미 생명력이 다한 87년체제의 말기증상을 대표하는 혼란기이며, 1987년에 그랬던 것처럼 범국민적 역량을—물론 6월항쟁과는 다른 방식이라야겠지만—또 한번 결집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작품읽기에 적용하고 안하는 것이 어떤 비평적 의미를 지닐까? 이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다뤄보기는 어렵지만, 단순히 ‘반신자유주의’ 노선에 따른 현실고발의 문학보다 이 시대의 삶을 훨씬 혼란스럽고 때로는 엽기적인 것으로 그리되 1997년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615공동선언을 만들어내고 이명박시대 벽두에 촛불군중의 축제적 시위를 선보인 한국사회의 생명력이 간과되지 않는 한층 고차원의 작품을 선호하게 되리라는 점을 지적할 수는 있겠다.

 

13. 장편소설로 눈을 돌리면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빈곤이 좀더 실감되는 듯하다. 훌륭한 단편을 곧잘 써내다가도 장편을 시도하면 이름값을 못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는 아마도 오랫동안 한국 소설문학의 예술적 성취가 단편소설에 집중되었던 탓일 게다.

2000년대 들어 장편소설의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그중에는 상업적으로 성공함과 동시에 평단의 상찬 대상이 된 예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른바 ‘주례사 비평’의 혐의가 뚜렷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비평가의 긍정적 평가가 세계적인 시야를 결함으로써 실질적인 과찬으로 귀결하는 수가 허다하다. 국내용으로나 통할 법한 작품에 대한 국내에서의 상대평가가 마치 세계시장에서 우수성을 주장할 만한 절대평가처럼 표현되는 것이다.

물론 당장에 번역해서 외국의 독자들로부터 얼마나 평가받을 것인가, 즉 서구중심적인 현존 세계시장의 당일 시세로 어떤 ‘절대치’를 갖는지를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독자나 비평가가 자기 나름으로 생각하는 세계문학의 성격과 그 중요 작품들, 바람직한 진로 등을 머릿속에 갖고서 작품평가를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4. 나 자신 2000년대 한국문학의 활력을 보여주는 뛰어난 소설이며 세계시장에 내놓음직한 많지 않은 문제작의 하나라 생각하는 신경숙(申京淑)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 이하 『엄마』)는 한국의 출판시장에서 보기 드문 대형 베스트쎌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일반독자들의 열띤 호응에 비해 평단의 반응은 엇갈렸다. 실제로 (과찬을 포함한) 긍정적 평가에 비해 부정적인 비평이 더 많지 않았나 싶다. 독자의 감상(感傷)을 자극하는 대중소설에 불과하다거나 전통적 모성을 신비화하는 불건전한 문학이라고 비판한 몇몇 사례에 대해서는 유희석(柳熙錫)의 「‘엄마’의 시대적 진실을 찾아서—『엄마를 부탁해』론」(『창작과비평』 2009년 여름호)이 비교적 잘 정리했다고 보기에 여기서는 따로 논하지 않는다.

 

15. 이 작품의 진가를 비평의 언어로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유희석처럼 부당한 평가를 반박하면서 엄마 박소녀를 통해 시대적 진실을 읽어내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긴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의 절절한 실감을 직접 느끼는 일인데, 『엄마』의 작중현실이 ‘자기 일처럼’ 느껴지는 기본적인 원인은 엄마를 비롯한 여러 인물이 딱히 자기 주변에 아는 사람들을 닮았다기보다—개인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엄마』라는 개별 작품을 읽는 도중에만 만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개별자로 형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엄마』뿐 아니라 다른 훌륭한 소설에 두루 해당하는 이야기일 테지만, 아무튼 이런 개별자를 개별자로 대하며 나의 관념을 덧씌우지 않는 읽기야말로 ‘타자의 윤리학’을 이행하고 낯선이(1’étranger)를 ‘환대’하는 길이 아닐까.

 

16. 따라서 엄마 박소녀가 과연 현존하는 한국 노인여성의 몇 퍼센트를 대표할 수 있느냐는 것은 핵심을 비껴간 질문이다. 전혀 다른 유형의 어머니와 모녀관계가 김애란의 「칼자국」이나 권여선의 「가을이 오면」 「K가의 사람들」 등에서 확인된다는 것을 두고 현실성의 우열을 다툴 일도 아니다. 이들 단편은 모두가 빼어난 소설적 성취를 이루었기에 각기 그나름의 진실성을 지니며, 바로 그렇게 때문에 같은 작가의 작품이면서도 「가을이 오면」과 「K가의 사람들」의 어머니는 상이한 개별자들이다. 다른 한편 정지아의 최근 단편 「목욕가는 날」(『문학사상』 20108월호)에 그려진 모녀관계는 『엄마』의 큰딸과 어머니 관계와 정서적으로 상통하는 바 많은데, 이때도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를 뿐 작중 인물이나 상황 자체의 우열이 문제될 까닭이 없다.

 

17. 박소녀가 ‘신화화된 모성’ 또는 ‘가부장사회의 전형적인 여성’에 부합하지 않는 점들은 유희석 등 여러 평자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제4장 ‘또다른 여인’에서 가족 그 누구도 모르던 그녀 삶의 일면—이은규라는 남자와의 기이한 인연—이 밝혀지기 전에도 그녀가 주어진 삶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었고 딸들에게 다른 세상을 열어주기 위해 반항도 불사했음이 드러난다. 더구나 “부엌이 감옥 같을 때는 장독대에 나가 못생긴 독 뚜껑을 하나 골라서 담벼락을 향해 힘껏 내던졌단다”(『엄마』 74면)라고 큰딸에게 말해준 경우가 그렇듯이, 엄마의 이런 면모는 그녀의 실종으로 새롭게 떠올랐을 뿐이지 실종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떠오를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이은규와의 관계는 그런 엄마로서도 또다른 차원의 일탈인 셈인데 그 정확한 성격을 제대로 감지하려면 그야말로 이 관계의 유일무이한 개별성을 존중하는 읽기가 필요하다. 박소녀 자신은 혼령이 되어 떠돌며 그를 찾았을 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당신에게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신은 내 인생의 동무였네. (…) 우리 자식들은 우리를 이해 못할 거요. 당신과 나를 이해하느니 전쟁통에 수십만명의 사람이 죽은 일을 더 잘 이해할 거요.”(231면) 물론 ‘인생의 동무’도 완벽한 성격규정은 아니다. “당신은 내게 죄였고 행복”(234면)이었다는 그녀의 고백이 뒤따르기도 하는데, 이 또한 아무도 모르게 그를 만나곤 한 것이 죄라는 통상적인 의미보다 불안할 때마다 그를 찾아가고 그에게 의존했으면서도 “당신이 내게 다가오는 것 같으면 몰인정하게 굴었네. () 참 나쁜 일이었네”(같은 면)라는 뉘우침에 무게를 두어야 할 발언이다. 혼령이 ‘나는 당신을 좋아했소’ 또는 ‘나는 당신이 좋았소’가 아니라 “나는 당신이 있어 좋았소”(236면)라고 말하는 것은 더없이 적확한 표현이다.

 

18. 『엄마』가 지니는 흡인력의 일부는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10면)라는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해서 마치 추리소설처럼 긴박하게 끌고 가는 솜씨에서 나온다. 잃어버린 엄마를 찾을 수 있을지, 엄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은 독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인데, 그런 궁금증을 따라가는 가운데 실종 이전의 엄마의 삶과 가족들 사이에 일어난 갖가지 일들이 핍진하게 전해지기 때문에 작품의 긴장은 더욱 팽팽해지며, 오로지 독자의 궁금증을 돋우기 위해 무리한 설정을 마다않는 통속문학과 구별된다.

그런데 이런 사실주의적 핍진성과 더불어 초현실적이라 의심되는 요소가 새가 된 영가(靈駕)가 등장하는 제4장 이전에도 끼어든다. 엄마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이 하나같이 그녀가 맨발에 파란 슬리퍼를 신고 있는데 슬리퍼가 발등을 파고 들어가 상처가 나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종 당시 엄마는 베이지색 쌘들을 신고 있었고, 게다가 엄마가 나타났다는 장소는 그녀가 도저히 혼자서 찾아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모두가 아들이나 딸이 살았던 장소들이고 파란 슬리퍼는 옛날에 아들에게 서류를 갖다주려고 집에서 신던 신발 그대로 생전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의 모습이다. 이런 사실은 가족들의 애를 더욱 태우고 독자의 흥미를 배가한다. 이곳저곳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하는 엄마의 행적은 그녀가 이미 영가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엄마가 결국 세상을 떴음이 제4장에서 확인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영가 스스로 “지난여름 지하철 서울역에 혼자 남겨졌을 때 내겐 세살 적 일만 기억났네.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나는 걸을 수밖에 없었네”(253면)라고 하여 실제로 한동안 모든 것을 잊고 걸어다녔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영가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태어난 친정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가 파란 슬리퍼에 움푹 파인 내 발등을 들여다보네”(254면)라는 말로 파란 슬리퍼가 영가의 고단했던 삶을 상징하는 징표처럼 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그나름의 호소력이 있는 설정으로, 이 디테일 자체는 사실주의와 비사실주의 기법의 적절한 배합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19. 그러나 인물과 사건 및 장소의 사실주의적 형상화가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에 초현실적 요소를 끌어들이는 일이 완전히 성공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어색한 디테일 중 하나는 죽은 엄마가 새가 되어 이곳저곳을 다닌다는 설정이다. 불교의 전통적 개념으로는 새의 몸이라도 받으면 이미 중음신(中陰身)을 면한 것임을 유희석도 지적한 바 있지만(유희석, 앞의 글 282면), “이미 저쪽 세상 사람인가?” 하는 고모의 탄식에 영가는 “아직은 아니요. 이렇게 떠돌고 있소”라는 혼잣말로 답한다(247면). 아직 중음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가는 새보다 훨씬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데 굳이 통념을 거슬러가며 새가 되어 날아다닐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설정은 본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제4장 끝머리에 엄마의 엄마를 찾아가 안기는 결말은 감동적이고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254면)이라는 최종 문장은 ‘엄마’에 대한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깨뜨린다. 그러나 이때 엄마 품에 안기는 엄마는 누구이고 이 장면을 지켜보는 엄마는 어디에 어떤 상태로 있는가? ‘새가 된 엄마’라는 설정이 없었다면 이런 쓸데없는 질문이 독자의 머리를 어지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20.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런 기법상의 문제점은 실상 작가 스스로 끝내 풀지 못한 이 작품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작가가 이런 구조적 문제를 안고 씨름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엄마』가 편안하게 독자의 감성만 자극하는 통속문학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될 법하다.

4장에서 초현실의 세계로 시야를 넓힘으로써 소설은 1, 2, 3장의 숱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또다른 여인’을 독자에게 공개한다. 그리고 이 여인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고 마지막까지 절절히 회상하던 시골집에서 나가버리는 여인이다. “잘 있어요…… 난 이제 이 집에서 나갈라요.”(253면) 하지만 이 ‘또다른 여인’의 존재가 현실세계에 남겨진 식구들에게는 전달되지 않는다. 엄마를 잃어버린 뒤의 온갖 깨우침과 인식의 확장 속에 이 결정적 진실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상식의 차원에서도 그들은 엄마를 찾지도 못하고 사망을 확인하지도 못한 견디기 힘든 처지로 남겨진다. 『엄마』는 박소녀 이야기일 뿐 아니라 그를 잃은 식구들의 이야기로 이미 독자의 마음속에 풍요롭게 자리잡았는데 이들의 그런 곤경을 어찌해야 하는가?

잡지연재본은 제4장으로 끝났지만 작가가 “고심 끝에”(‘작가의 말’, 『엄마』 297면) 에필로그 ‘장미 묵주’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이 난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에필로그가 큰딸 지헌이 미켈란젤로 피에타상의 성모에게 엄마를 부탁하는 것으로 끝맺는 데 대한 평자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해설을 쓴 정홍수(鄭弘樹)는 “우리는 지금 또 하나의 압도적인 피에타상 앞에 서 있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덧붙이랴. 엄마는 이처럼 스스로 피에타상이 됨으로써 영원한 귀환에 이른다”(「피에타, 그 영원한 귀환」, 『엄마』 294면)라고 공감한 반면, 유희석은 “엄마의 초인적 일생을 회고하며 피에타상의 후광을 입히려는 시도는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국 모성의 신화화 또는 이상화에 일조할 공산이 크다”(유희석, 앞의 글 281면)고 비판했다.

 

21. 나 자신도 엄마와 피에타상의 동일시는 이제까지 공들여 그려낸 엄마의 그 누구와도 다른 개별자적 삶을 단순화한다는 생각이다. 결말의 이런 문제점 역시 4장까지의 이야기가 남긴 ‘난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에필로그에서 만나는 큰오빠 형철이나 지헌의 모습은 그야말로 ‘애도’를 제대로 못해 ‘우울증’에 빠진 모습이다. 그중 형철은 “감사함을 아는 분의 일생이 불행하기만 했을 리 없다”(272면)는 인식에 도달하면서 오랜만에 남매가 엄마 얘기를 평화롭게 나눈다. 그러다가 지헌은 다시 “왜 엄마가 다시는 못 돌아올 사람처럼 말하는 거야!”(273면)라고 오빠에게 대드는데, 이런 그녀가 엄마가 다시는 못 돌아올 사람임을 인정하고 피에타상에 ‘엄마를 부탁’하는 것이 에필로그의 결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헌이 엄마를 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좋게 말하면 엄마의 실종이 항구화된 상태에서 드디어 애도를 완성하고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이에 관해 최원식(崔元植)의 논평이 주목할 만하다. “딸이 ‘엄마’를 버리기 전에 ‘엄마’가 먼저 딸을 비롯한 가족을 버렸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 상호부정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 더이상 ‘엄마’ 식의 가족은 유지되기 어렵다는 추세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적극적으로는 그런 가족형태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판단이 내재한다고 볼 수도 있다. 희생 위에 구축된 ‘엄마’의 삶은 물론이고, ‘엄마’에 의존한 딸의 삶 또한 진정한 자유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도시를 구할 묘약은?」, 『인천세계도시인문학대회 발표논문집』, 인천학연구원 2009, 180면)

난제를 완벽하게 풀지는 못했지만 에필로그가 필요하긴 필요했던 셈이다.

 

22. 애도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신경숙의 새 장편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문학동네 2010, 이하 전화벨)의 출간을 계기로 『엄마』를 포함한 신경숙의 여러 작품을 ‘애도’라는 주제로 읽어낸 평론이 신형철(申亨澈)의 「누구도 너무 많이 애도할 수는 없다—신경숙의 소설과 애도의 윤리학」(『문학동네』 2010년 가을호)이다. 신경숙 문학과 『엄마』에 대해 예리한 통찰을 담은 글이지만, 『엄마』를 너무 애도 중심으로 읽은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 자신이 상실의 슬픔보다 자기 어머니와 오랜만에 여러 날을 함께 보낸 “행복감”(‘작가의 말’ 296면)으로 이 소설을 쓰게 됐다고 말하는 것도 감안할 점이거니와, 충분한 애도가 불가능하게 돼 있는 『엄마』의 구조적 문제가 간과되기 십상인 것이다.

또다른 문제점은 ‘애도’ 주제를 축으로 『전화벨』을 『엄마』와 동렬에 놓음으로써 전자에 대한 비판이 후자로 연동될 부담을 안는다는 것이다. 실은 신형철 자신이 양자를 완전히 동렬에 두고 있지는 않다. 서사가 애도의 윤리학에 도달하기 위해 더 물어야 할 것으로 “첫째, 애도 작업은 주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둘째, 그 주체를 위해 공동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전화벨』은 뭔가를 더 물어야 하는 그 순간 멈춘 것은 아닌가 한다”(신형철, 앞의 글 95면)고 꼬집는다. 그런데 ‘애도’라는 말로 흔히 포착되지 않는 이런 기준을 적용한다면 『전화벨』은 『엄마』와 정반대로 너무도 애도의 ‘깊은 슬픔’에 젖어든 탓에 그 애도에 독자를 끌어들이는 일조차 여의치 않았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예컨대 기왕에 876월항쟁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젊은이들을 등장시켰다면 1987년은 도대체 어떤 시기였고 2010년의 시점에서 지난 4반세기의 역사를 어떻게 볼지에 대한 고민을 우회적으로라도 투영했어야지, 소설 쓰는 사람이 그런 것까지 알랴 하는 식이라면 이는 작가적 상상력의 행사를 지나치게 국한하는 태도일 것이다.

 

23. 2000년대 한국소설의 활력을 논하자면 아직도 장편에 비해 한국작가들의 예술적 공력이 더 집중적으로 발휘되는 단편문학의 풍성한 성취도 논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부득이 이를 제외하고 장편만을 말하더라도 2000년대의 성취가 초라한 것만은 아니다. 2000년대 초에 나온 황석영의 『손님』(창비 2001)이 우리시대의 뜻깊은 성과임은 (내 나름의 비판적 견해와 함께) 밝힌 바 있거니와(졸고 「황석영의 장편소설 『손님』」,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최근에 많은 각광을 받은 황정은의 『의 그림자』(민음사 2010)나 독자들의 호의적 반응에 비해 평단이 별로 주목하지 않은 김려령의 『우아한 거짓말』(창비 2009) 등은 모두 근래 내가 읽은 뛰어난 소설들이다. 박민규(朴玟奎)의 경우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출판 2003), 『지구영웅전설』(문학동네 2003) 그리고 『핑퐁』(창비 2006)이 모두 문제작들인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 2009, 이하 『파반느』)는 더욱 원숙한 경지에 이른 걸작이라 생각된다.

 

24. 그런데 평단의 반응은 다소 무덤덤한 편이다. 애당초 박민규의 작업에 냉담한 평자들이야 굳이 말할 것 없지만 그의 다른 작품에 찬사를 보내던 평자들도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적어도 본격적으로 그 성취를 논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예컨대 박상준(朴商準)은 박민규 소설 전반에 대한 적극적이고 설득력이 높은 평가와 함께 『파반느』의 “빛나는 상상력의 성취”(「한없이 초라한 인류에게 주는 박민규의 영가」, 『크리티카』 4집, 145면)를 지적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논의는 매우 소략하다. 한기욱 역시 “이 소설의 사랑이야기는 실로 용감한 예술적 시도이며 그 성과도 만만찮다”(「문학의 새로움과 소설의 정치성」 410면)라는 찬사를 보내지만 좀더 자상한 분석이 아쉽다. 게다가 그의 분석은 소설의 마지막 ‘Writers cut’에서 이루어지는 반전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듯한데, 이 결말은 뒤에 따로 논할 것이다.

 

25. 본고에서 본격적인 『파반느』론을 펼칠 지면은 없다. 게다가 『엄마』처럼 『파반느』도 직접 읽지 않은 이에게 작품이 주는 감동과 행복감을 전달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작품을 과소평가하게 만들 수 있는 요소도 『엄마』만큼이나 많다. 대중적 통속문학에 가깝다는 유사한 혐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한 젊은 남녀의 애닯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인데다, 저자의 서정적이고 향수어린 회고조 문체가 돋보이는 것도 그렇다. 동시에 때로 장황해지기도 하는 세상과 인생에 대한 화자 및 작중인물의 단호한 비판들이 오히려 정치적 정답주의를 가미했다는 혐의마저 살 수 있으며, 막판의 독특한 반전 역시 단순한 재주자랑이나 심지어 혼란 조성으로 읽힐 우려가 없지 않다.

 

26.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파반느』 9면)로 시작하는 첫 장면은 그야말로 영화로 찍음직한 낭만적인 설경 속에 무슨 연유인지 어렵사리 해후한 두 청춘남녀의 애절한 사랑을 소개한다. 이때 작품의 진가를 확인하는 한가지 방법은 영화로는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작가의 운산과 소설적 형상화 작업이 얼마나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길일 듯하다. 물론 영화를 잘 만들었을 때 설경의 아름다움이라든가 음악이 흐르는 외딴 찻집의 분위기 같은 것이 소설보다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목을 영화화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갑자기 그녀는 고개를 숙였고, 두 손을 들어 스스로의 얼굴을 손바닥 깊이 파묻었다. 그런 자세로 우는 성인을 본 적이 없어서일까, 우는구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어린아이와 같은 그녀... 어릴 때부터의... 그녀, 태어나기도 전의 그녀... 앞으로 늙어갈 그녀... 그런 그녀의 존재 하나하나가 갑자기 내린 눈처럼 그 자리에 쌓여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혹은 그녀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울지 않았고, 잠시 울음을 참았을 뿐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들썩이던 그녀의 어깨만이 그날 그 자리에서 잠시 울었을 뿐이었다. 눈물 없는 얼굴을 들어 그녀는 나를 보았고, 나를 향해... 혹은 내 어깨 너머의 말없는 어둠을 향해 힘없이 속삭였다.

 

안아줘요.원문은 분홍색 활인용자

 

주변의 나무처럼 차가운 그녀의 몸을 나는 힘껏 껴안았다. 그녀를... 아니... 그 속의 그녀와, 그 속의 그녀... 또 그 속의 나이테처럼 굳어 있는 모든 그녀들을 나는 안아주고 싶었다. 몹시도 뜨거운 무언가가 밀착된 가슴을 통해 흘러가고 흘러드는 느낌이었다. (30~31면)

 

물론 이것이 소설로서 잘된 대목인지는 작품 전체의 맥락 속에서 판단할 일이다. 예컨대 “나이테처럼 굳어 있는 모든 그녀들”이라는 표현이 실제로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 그녀의 우는(또는 울음을 참는) 자세가 사랑이 만개하기 시작하던 날 “전... 너무 못생겼어요”(178면)라고 흐느끼던 때의 자세와 어떤 울림으로 연결되는지 등을 따져야 한다. 아무튼 영화에서 이런 대목을 그대로 전하려면 내레이션으로 처리하는 길밖에 없을 텐데 너무 장황하고 수다스럽게 느껴질 게 뻔하다. 물론 유능한 감독은 영화만이 거둘 수 있는 효과를 동원하여 영화로서 성공적인 장면을 만들어낼 테지만.

이 장면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사연과 곡절을 서술한 끝에 마침내 345면에 가서야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라는 첫 문장으로 되돌아오는 것도 장편소설만이 구사할 수 있는 수법이다. 영화에서도 이야기 한 중간에 시작해서 플래시백을 통해 점차 내용을 알려주는 기법이야 흔하지만, 영화라면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오래 감춰두기가 힘들다. 더욱 불가능한 것은 이 장면에서 작가가 일부러 감춰두는 결정적인 요소를 영화가 감추는 일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그녀’가 지독하게 못생긴 여자라는 사실을 카메라가 피해가면서 자연스럽게 서사를 진행할 방도는 없는 것이다.

 

27. 그녀와의 첫 만남은 제3장에서야 이루어지는데 이 장면 또한 영화로는 형상화하기 어려운 성질이다. 아니, 소설도 이 소설만이 전해주는 독특한 경험이다. “순간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82면)로 시작되는 화자의 서술은 “아! 누군지 알겠다, 나도 첨에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니까. 걘... 정말 너무하지”(84면)라는 친구의 반응과 결코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첫눈에 반하기’와도 다르다. 그 자신도 깊이 상처받은 인간인데다 또 하나의 상처받은 인간 요한의 방조와 적지 않은 우연, 그리고 그때마다 드러나는 두 사람의 진실됨이 작용해서 점차 사랑을 싹틔워가는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덧붙일 것은 요한을 포함한 세 사람이 모두 고도의 지성과 풍부한 교양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한국소설에서 이만한 지성인들을 이만큼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그려낸 경우도 드물 듯싶다.

 

28. “아마도 이것은 못생긴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다룬 최초의 소설이 될 것입니다”(‘작가의 말’ 416면)라고 박민규 스스로 말하듯이 『파반느』는 매우 독창적인 시도, 한기욱의 말대로 “용감한 예술적 시도”임이 분명하다. 동시에 그것은 단순히 기발하고 도전적인 소재를 개척한 것이 아니고, 박민규가 그의 소설들을 통해 일관되게 표출해온 도저한 반체제적 사고를 한걸음 더 밀고 나간 것이다.

 

세상을 망치는 게 독재자들인 줄 알아? 아냐, 바로 저 넘쳐나는 바보들이야.(155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고... 결국 그게 평범한 여자들의 삶인 거야. 남자도 마찬가지야.

그게 인간이야. (…)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多數, 多數決의 오식인 인용자)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

너나, 나나... 인간은 다 그래.(174면)

 

요한의 이런 발언은 그것만이라면 특별히 새로울 것 없는 냉소적 독설일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또 이런 말도 하는 사람이다.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되는 거라구.”(164면) “현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아,라는 말은 나는 그 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어—라는 말과 같은 것이야.”(226~27면)

더 중요한 것은, 실제 작중사건들이 요한의 냉소주의를 거듭 수정하곤 한다는 사실이다. “그게 인간이야”라는 단정적 발언을 들었을 때도 화자는 “정리되지 않은 여러 개의 창을, 간단한 하나의 창으로 다듬는 능력을 요한은 갖고 있었다”(124면)고 탄복하지만, 이튿날 숙취에서 깨어나면서 “이게 인간일까”(125면)라고 중얼거리고 바로 그날 회사에 나가 충동적으로 “저랑 친구 하지 않을래요?”(128면)라고 그녀에게 말을 건다.

 

29. 삶의 가능성에 대한 이런 믿음이 있기에 그는 한때 자신감을 잃고 잠적했던 그녀를 어렵게 찾아내어 소설 첫 장면의 감동적인 해후를 성사시킨다. 그리고 이 만남 후 돌아가다가 눈길의 버스 사고로 빈사상태에 빠졌던 그는, 그를 ‘분실’한 뒤 결국 독일로 가버린 그녀를 겨우 수소문해서 13년 만에 사랑을 되살리게 된다. 이때 서먹하게 헤어질 뻔했는데, 가다가 되돌아와 “또다시 이렇게 헤어지진 말아요”라고 먼저 말하는 것은 그녀다(381면). 그리하여 소설 첫 장면에서 둘이 꿈꾸었던 융프라우로의 여행을 함께하는 ‘해피 엔딩’마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요약하면 터무니없이 낭만적인 판타지로 들리지만 실제 작중진행은 사실주의적 개연성에도 큰 무리가 없을 만큼 그 형상화가 정교하고 핍진하다. 다만 걸리는 것은 그렇다 해도 너무 달콤한 결말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실제로 요한 등 세 사람은 “전 지구인이 열광한 해피 엔딩”이라는 포스터가 붙은 영화 ‘백 투 더 퓨처’를 보고 나와서 하나같이 우울했고 “그래서 문득 지구인에서 제외된 느낌을 나는 받아야 했다.”(165면) 더구나 요한은 둘의 사랑을 축복하면서도 “열쇠를 쥔 것은 너나 그녀가 아니야. 바로 세상이지”(219면)라고 경고했었다. 마지막 장 ‘해피 엔딩’은 이런 요인들을 제대로 수용하고 이겨낸 것인가.

 

30.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내놓는 것이 부록처럼 추가된 Writers cut의 첫 토막 ‘요한의 이야기’다. 여기서 밝혀지는 사실은 작중의 화자 ‘나’는 그날 교통사고로 결국 죽었고 그의 이야기는 요한이 가상적 화자를 내세워 써낸 것이며 요한은 이 소설을 자신의 아내가 된 ‘그녀’에게 읽게 한다는 것이다. 이 반전이 사실에 부합한다는 점은 뒤따르는 ‘그녀의 이야기’가 인증한다. 말하자면 화자의 회상과 그것을 회고하는 화자의 그후의 삶을 결합한 전체 이야기가 액자소설의 액자 안으로 배치되어버린 것이다.

 

31. 이처럼 액자소설로 변하면서 여러가지 미묘한 효과가 발생하기도 한다. 본이야기 중 개연성이 다소 떨어지는 대목이었던 요한의 자살 시도나 “변두리에서 일어난 소소한 교통사고가 신문을 장식할 리 없었던 시절”(352면)이었다는 이유로 그녀가 그가 당한 사고를 몰랐으리라는 설정은 요한이 화자의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꾸며낸 사항들임이 밝혀진다. 요한이 요한답지 않게 소설을 너무 잘 썼다는 의문은 원래 소설가 지망생은 작중화자가 아니라 요한이었다는 그녀의 지적으로 해명된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소설의 첫 장면을 마감하는 “그것이 내가 본/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33면)는 문장이 겹겹의 울림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곧, 처음 읽을 때는 궁금증과 막연한 애틋함을 자아내는 정도다가, 그것이 화자가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마지막’이었음을 알고는 과연 그렇게 끝날지 궁금해하던 독자가 마침내 행복한 만남으로 끝나는 걸 보는 기쁨을 느꼈는데, 결국 그것이 화자에게 문자 그대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첫 장면이 바로 그 자리에 배치될 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음도 확인된다. 요한이 쓴 픽션이 아니고 ‘그녀’와 ‘그’가 함께 경험한 마지막 순간이 그때였던 것이다.

 

32. 그런데 Writers cut은 ‘그리고, 그의 이야기’라는 마지막 토막에서 또 한번의 뒤집기를 선사한다. ‘해피 엔딩’의 화자가 다시 등장하여 하산할 산악열차를 기다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액자 속의 인물들이 액자 바깥으로 걸어나온 셈이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액자의 사실적 권위가 확인되었고 추가된 ‘그의 이야기’에는 그에게만 들리는 “작은 여자아이의 웃음소리”(411면) 같은 신비스러운 요소가 뒤섞이기 때문에 완전한 재반전은 아니다. 두 개의 대등한 결말을 제시하면서 이른바 진실의 불가지성 또는 불확정성(undecidability)을 내세우는 장치도 아니다. 바로 ‘그’가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살아 있는 이야기를 꼭 써보고 싶었던 거야”(397면)라는 요한의 염원을 작가가 한껏 지지하고 있을 뿐이다. 액자 안의 행복한 결말에 비현실적 측면이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이런 행복을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현실’을 유일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며, “와와 하지 마시고 예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작가의 말’, 418면)라는 호소와 함께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는 그나름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33. 세계적인 시야에서 볼 때 한국문학의 빈곤은 여전히 엄연한 현실이다. 이 점을 외면하는 것도, 과장하는 것도 빈곤을 존속시키는 데 일조할 뿐이다. 게다가 현학적이고 자기탐닉적인 비평언어의 난무는 그 자체로 빈곤의 증상인 동시에 그나마 있는 활력을 흩뜨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단편적으로 살펴본 비평과 창작에서의 활력이 쉽사리 사그라들지는 않을 것이며, 특히 한국사회가 87년체제를 드디어 넘어설 정치적・도덕적 역량을 보여준다면 문학에서도 새로운 도약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전지구적 차원에서는 시장에 의한 문학의 황폐화가 한동안 오히려 가속화할 추세라고 할 때, 2010년대에 한국문학이 세계문학 및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한 소중한 거점으로 자리잡게 되리라는 예상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

백낙청白樂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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