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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한국이라는 서사

 

미완의 문학사라는 가능성

‘문학성’ 회의론이 감추고 드러낸 것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평론집 『리얼리티 재장전』, 공저 『개벽의 사상사』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1

 

거의 재난에 가까워진 국내정치 상황 때문인지 ‘눈 떠보니 선진국’은커녕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는 자조가 오히려 성행하는 요즘이지만 한국의 달라진 세계적 위상을 떠받치는 토대들은 그런대로 건재한 편이다. 이제는 한국이 서구문화의 일방적 수신처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새로운 문화와 가치를 전파하는 발신지가 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되곤 하는 한류 열풍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작품 대신 콘텐츠라는 용어가 범람하는 데서 보듯 그것이 ‘성공한’ 문화상품 이상은 아니라는 진단에서부터 서구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문명 전환의 잠재력을 지닌 무엇이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평가들은 다양하지만, 한영인이 넷플릭스(Netflix)의 「오징어 게임」(2021)과 「지옥」(2021)을 분석하는 자리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를 가려내는 기준 가운데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이 드러내고 있는 말기적 증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영감을 얼마나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는지 여부를 빼놓을 수 없을 것”1임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기준은 대중문화산업에 비해 자본에 대한 예속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여겨져온 ‘순수예술’ 분야에 주로 적용되어왔다. 그러나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위한 투쟁이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시야를 열어줌으로써 문화적 혁신”(한영인, 64면)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1987년 6월항쟁을 거쳐 2016년 말 이후 촛불혁명을 통과하는 중인 한국사회에서 대중문화와 순수예술이 지닌 잠재력을 변별하는 데 목을 매야 할 이유는 없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한국사회가 집합적으로 이룩하는 협동적 창조의 양상”(같은 면)이 낡은 분할선의 어느 한쪽으로 제약될 수 없음은 물론, 그 분할선 자체마저 유동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한류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2000년대 초, 한류의 발전이 한국사회가 이룩한 민주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자신의 희생 속에 국민이 쟁취한 자생적 민주주의라는 데”2에 그 원동력이 있음을 간파한 김대중의 통찰은 어느 방향에서든 아직 유효하다.

그런데 관심의 초점을 이 글의 주제인 한국문학으로 좁혀보면 대중문화 부문의 활기와는 사뭇 다른 흐름이 포착된다. 한국문학의 세계적 위상이 점진적으로 높아가는 데 비해 국내적으로는 장기침체의 늪을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는 진단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찰에는 정확한 현실인식을 훼방하는 요소들도 더러 끼어 있어 주의를 요한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한국문학’의 범주를 너무 좁게 생각하는 사고습관이 개재되어 있다. 장기침체에 허덕이는 ‘한국문학’이라는 이미지에는 그림책과 동화를 포괄하는 어린이·청소년문학이 자주 누락되고 반드시 성인독자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보기 어려운 웹소설이나 장르문학 등 ‘대중문학’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특히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2007)가 맨부커상을 수상(2016)한 이래 여러 해외 문학상 수상작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국내독자(당연히 성인독자를 포함한다)의 호응을 바탕으로 한 어린이·청소년문학 분야의 해외 진출과 문학상 수상은 그보다 더 활발했고 한국 장르문학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 또한 점차 커가고 있다. 소위 본격문학과 대중문학, 아동문학과 일반문학의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구획에서 한걸음 떨어져 나오면 조금은, 아니 어쩌면 전혀 다른 현실이 펼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의 한국문학의 침체란 한국문학 가운데서도 이른바 본격문학의, 침체 가운데서도 국내 시장실패 차원을 제한적으로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듯하다. 그런데 ‘본격문학’의 시장실패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에 이것이 지금에 와서 유독 강하게 의식되고 소환되는 특별한 조건이 따로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본적으로 영화, 드라마, 대중음악 등 여타 문화산업의 질적·양적 성장이 가져온 대비효과가 큰 몫을 차지하지만 내부 요인도 없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올수록 학계와 비평계에서 ‘문학성’에 대한 회의론들이 확산되고 있는 현상은 하나의 지표다.

문학성이란 기본적으로 주어진 작품을 문학작품으로 만들어주는 무엇, 즉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어떤 내재적 본질을 말하지만 때로 ‘탁월한’ 작품이 지니는 그 탁월함의 다양한 근거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어떻든 최근의 논란은 그런 식의 문학성이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고는 더이상 믿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 말미암는데 이 낯설지 않은 문제제기가 새삼 득세하게 된 배경에는 ‘페미니즘 리부트’와 장르문학을 포함한 대중문화의 부상이 자리하고 있다. 여성문학이나 장르문학 또는 시와 소설이 아닌 타장르의 문학적 시민권이 불안정했던 근거를 ‘문학성’에 대한 배타적 신앙에서 찾고, 그 문학성이 실은 남성 중심적으로 젠더화된 또는 문화자본을 독과점한 지식권력의 이데올로기 조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적발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6월항쟁에서 촛불혁명까지의 변화를 위한 투쟁 그리고 ‘눈 떠보니 선진국’으로 요약될 한국 자본주의의 비약적 성장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구사회의 정치·경제적 발전과정에서도 문학성이나 정전주의 해체에 관해 유사한 흐름이 나타났던 바 있기에 페미니즘이나 장르문학 논의가 주로 서구 담론들을 참조하는 현상도 일면 납득할 만하다. 다만 영미, 유럽 선진국들과는 역사적으로 다른 경로를 걸어왔고 또 걸어가는 중인 한국사회, 한국문학의 특수한 조건 또는 차이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한두가지 물음을 던져보기로 한다. 첫번째는 단연 한국문학에서 ‘문학성’에 관한 한 확고하게 자리 잡은 믿음이 있었는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2

 

요는 지금까지의 한국문학이 문학을 문학으로 만들어주는 어떤 부동의 본질을 의심 없이 혹은 약간의 의심이 없지 않았더라도 대체로는 합의해오고 있었는데 여러 상징적 사건들로 인한 집합적 각성 가운데 그 허구성이 폭로되었으므로 해체가 절실해졌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한 진단은 얼마나 합당할까. 우선 문학을 다른 담론과 구별해주는 내재적 본질 즉, 자율성 담론의 이론적 기반이 되어준 형식주의와 구조주의—약간 과장하면 신비평도 포함하는—등 문학의 문학됨을 언어현상으로 환원하는 언어모델이 한국문학의 창작과 비평 현장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며 얼마나 어떻게 활용되어왔는지 냉정히 따질 필요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과학’적 사실판단의 영역에서 형성된 언어모델의 논리를 문학적 가치판단의 근거로 슬쩍 돌려놓는 재현 불능 담론이 명맥을 이어오긴 했지만 언어모델 자체가 대학의 문예이론 커리큘럼 밖에서 비평적 규준으로 탄탄하게 작동해왔는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이론 그 자체의 내재적 합리성과 실제 비평 적용 가능성 사이의 괴리라는 일반적 특성에서 말미암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 스스로가 구조주의 이론 도입에 적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회의론자들에게 ‘문학성’ 담론의 가까운 기원으로 지목되어 비판을 받기도 하는 김현의 유명한 논리 역시 핵심은 언어모델에 대한 충실성이라기보다 문학과 사회 간의 관련 양상에 있었다. 문학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이 아니기에 누구도 억압하지 않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억압에 대한 반성을 촉진하고 가능하게 만든다는 정리3는 사실 1970, 80년대의 ‘억압적’ 현실을 의식하되 당면한 정치적 투쟁에는 직접적으로 투신하기 어려웠거나 그럴 수 없었던 많은 문학인, 지식인, 독자들의 역사적 부채의식을 덜어줌으로써 오랜 기간 적지 않은 공감대를 확보했지만 이론적으로는 체계적 발전을 기약하기 어려운 시론(試論)에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처음부터 그러한 가능성 자체를 스스로 차단한 경우였다고도 할 수 있다. 억압이라는 단어의 유난한 반복에 이미 암시되어 있듯 그것은 군부독재라는 비교적 명료한 ‘억압’의 주체를 추상화함으로써 논리구축의 필수요소로 안전하게 수렴하는, 일종의 수사적 반응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3·1운동으로 본격화한 신문학 초기부터 6월항쟁 이후 지난 30여년에 이르기까지 100년 남짓한 기간 중 어느 시기에도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합의는 안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예의 김현의 문학성 정리가 주류 담론의 근간으로 널리 각광받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1980년대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한 1990년대 특유의 흐름 이상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4 2000년대 이후 활성화된 문학과 윤리·정치 논의에서 보듯 문학에 어떤 내재적 본질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믿음은 거의 언제나 문학이 사회·역사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강력한 반론과의 긴장 안에서만 담론적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고 그 역도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분단체제라는 현실규정력 아래 민주주의 역량과 물적 토대를 키워나갈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제약이 그러한 긴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최근의 문학성 회의론은 스스로 원했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그들이 의심하고 해체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문학성’의 지위를 문학사 안에 오히려 더 튼튼히 뿌리내리게 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측면이 있다. 더 나쁜 경우에 이는 문학의 근원적 정치성·사회성에 잠심해온 한층 길고 강력한 전통과의 정면대결을 회피하고 심지어 그러한 역사를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누구라도 그러한 ‘회피’를 부담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사전 정지’ 작업을 대행해준 것이 바로 1990년대 이후의 탈민족주의와 그 귀결의 일종인 근대문학 종언론이다.5 탈민족주의는 말하자면 90년대 문학주의의 마르지 않는 무기고가 되어주었다. “2000년대 들어 국가-민족-남성-국학(아카데미즘)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문학사의 의의와 가능성 자체가 회의의 대상이 됨으로써, 민족문학사의 위상은 급격히 축소되었”고 따라서 “이제는 총체적인 구조로 통합될 수 있고, 일정한 권위를 담지할 수 있는 단일한 문학사의 이념은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6는 식의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단언이 전형으로 보여주듯 ‘국가=민족=남성=국학’의 갈등 없는 등식화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처럼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싸움은 더없이 간편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래의 ‘문학성’ 회의론은 그것이 표적으로 삼고 있는 90년대식 문학주의와 알게 모르게 제휴, 공동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좀더 세속화된 문학중심주의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교적 널리 퍼져 있는 “2014년 세월호 참사, 2015년 신경숙 표절 사태,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고발, 2017년 페미니즘 비평 담론 활성화, 2018년 페미니즘과 퀴어문학의 약진, 그리고 2019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5년 동안 문단에 있었던 변화는 ‘문학은 무엇인가’ ‘무엇이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가’와 같은 문학성에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7한다는 생각(들)은 각각의 사건이 놓인 차원과 맥락이 현저히 다르고 원인과 결과가 뒤섞이며, 문제에 대한 진단과 대응이 문학·문단의 범주를 무시로 초과할 수밖에 없는 것임에도 문학사 또는 ‘문단제도’적 횡단선을 가리키는 상징 이상으로 검토되지 않는다. 더구나 문학 안팎의 여러 징후적 사건들을 열거하는 가운데 정작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촛불혁명의 자리가 빠지곤 하는 것 역시 과제들을 자의적으로 선별하면서 전면적 대결을 회피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므로 ‘국가=민족=남성=국학’의 갈등 없는 등식화에 근거한 민족문학사의 급격한 위상 축소라는 문제도 재점검이 요청된다. 이와 관련해 손유경은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상상된 공동체’ 개념에 대한 아전인수식 수용이 민족주의 해체를 움직일 수 없는 시대조류로 둔갑시킨 핵심 근거가 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정작 앤더슨이 “한 일은 민족이 가짜라는 믿음을 퍼뜨린 것이 아니라 민족이란 역사·문화적 구성물임을 유물론적 관점에서 제시한 것”8이라는 사실을 간명하게 환기한 바 있다. 그는 이 글을 “민족주의가 특권적 지위를 점했던 시기와 그 이후를 가르는 분수령으로 이해되던 앤더슨의 자리가 이렇게 조정된다면, 민족주의 또는 탈민족주의로 통칭되는 여러 문학론과 문학사 서술의 전제들 또한 불가피하게 위치 변동을 겪게 될 것”이라면서 “우리가 넘으려던 산이 혹시 허상은 아닌지, 알고 보면 이미 넘어와 있는 건 아닌지 철저히 물어봐야 할 때”(손유경, 38면)라고 결론 맺는다. ‘민족주의자’ 앤더슨을 변호하면서도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와 그 대안서사로 등장한 민족문학론(민족주의문학론이 아니라)의 ‘민족’을 동일한 본질의 표리로 간주하곤 하는 탈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문제 삼진 않지만 그것대로 의미심장한 지적이 아닐 수 없는데, 실은 이러한 지적이 전에 없던 무엇이 아님에도 새삼 ‘신선하게’ 다가온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시대의 지적 풍토를 어딘지 맥빠진 느낌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가령 황정아는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 1983)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2009년의 글에서 “‘상상의 공동체’가 그(앤더슨—인용자)의 ‘중립적’ 논의마저 무시한 채 ‘허위성’을 가리키는 은유로 환원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맺기에 앞서 다음과 같이 쓴다.

 

민족주의와 민족국가가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한다면, 혹은 ‘이미 무너지는 산’이라고 믿는다면 더더욱 민족주의가 이룬 정치적 성취들을 온당하게 평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성취를 짚는 과정을 동반할 때에야 진정으로 무게있는 비판이 가능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산을 넘어가야 한다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런 성취보다 더 나은 것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있어야 하며 그런 믿음과 자신감은 마땅히 넘어설 것이 이루어놓은 것과의 정면 대결을 통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9

 

손유경의 문장을 조금 각색해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넘으려던 산이 혹시 허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이미 넘어와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마땅히 넘어설 것이 이루어놓은 것과의 정면 대결”(황정아)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이 자리에서 최근의 문학성 회의론들을 문제 삼는 초점이 문학의 어떤 영구적 본질을 가정하고 수호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한국문학사’ 안에서 문학의 초역사적 본질에 대한 합의가 안정적으로 이뤄진 바 없기에 그에 대한 해체 주장도 정곡을 얻기 어렵다는 데에 있음은 다시 한번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등장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도 세를 얻어가고 있는 테마 중 하나가 바로 정전 부정론 또는 해체론일 것이다. 앞서 거론했던 손유경의 논의 가운데 어쩌면 앤더슨과 민족주의 개념에 대한 환기보다 더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도 그와 관련된다. 그는 “한국현대문학사의 해체와 재구성”을 지향하며 제출된 “천정환·소영현·임태훈 외 필자들이 엮은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오혜진의 기획으로 권보드래 외 여러 필자의 글이 실린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민족문학사연구소에서 발간한 『문학사를 다시 생각한다』 등”을 읽은 뒤 느낀 ‘혼란’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기존의 한국 현대문학사를 극복과 지양의 대상으로 삼고 문학사의 재구성을 기획한 일련의 저작들을 한 챕터 한 챕터 자세히 읽으면서 우리는 문득 이 책들이 정말 무너뜨리려는 적은 누구/무엇일까 몹시 궁금해지는 경험을 했다. 즉 부수고, 새로 쓰고, 다시 쓴다는 각각의 기획이 진정으로 해체하고 싶었던 대상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인가. 임화? 백철? 조연현? 아니면 김윤식? 해체해야 할 대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픈, 다시 말해 과연 전선이 어디에 형성되어 있는지 제대로 확인하고픈 마음이 드는 시간이었다.(손유경, 27면)

 

대상 텍스트에 비판적이기보다 비교적 수용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기왕의 문학사’는 생각보다 복잡하며 이질적”이므로 “문학사‘들’로 섬세하게 분별되고 분석될 필요가 있다”(손유경, 27~28면)고 원만하게 전제한 뒤 ‘한국현대문학사’의 상한선과 하한선을 재고하거나 페미니즘적 시각의 방법론적 가능성 등을 타진하고 있는데 그 자체로도 흥미롭긴 하지만 여기서는 조금 다른 각도의 접근을 보탤 필요도 있을 듯하다. 당연히 앞에서 논의한 ‘문학성’ 문제와도 직간접으로 연동되는바, 문학의 문학됨을 둘러싼 한국문학사 특유의 긴장을 유발하는 또 하나의 그러나 중요한 조건으로 분단체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가운데에서라면 한국어문학의 정전체계가 항상적 유동성 속에 놓일 수밖에 없음은 일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부수고, 새로 쓰고, 다시 쓴다는 각각의 기획이 진정으로 해체하고 싶었던 대상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까닭은 요컨대 한국문학사가 여전히 그 ‘건설기’적 특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 근대의 나라만들기는 단계적으로 진행되어왔고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10 있다면 한반도 근대의 문학사나 정전체계 구성 또한 미완의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볼 경우 “현실의 다른 영역과 분리된 문학적 진실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현실의 변화에 따라 문학성은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라는 종류의 생각은 이제와 새삼스레 천명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게 될 뿐 아니라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전의 문학으로 돌아갈 수 없다”11는 선언의 분명한 근거가 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어쩌면 한국문학사가 진정으로 벗어나야 할 굴레는 앞서 거론한 탈민족주의 논의의 예에서 보듯 무엇이 끝나고 전혀 다른 무엇이 시작된다는 식의 단절론적 청산주의와 ‘자기 시대의 특권화’일지 모른다. 만약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볼 필요가 생겼다면—지금이 문명 전환기에 속한다는 점에서 언명 자체에는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바로 그러한 단절론적 청산주의와 자기 시대의 특권화부터 다른 각도의 접근이 요청될 것이다.

미완의 문학사 또는 건설기의 한국문학사라는 상에 대해 언급한 만큼 끝으로 한마디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예의 ‘미완’이라는 유동적 조건은 그 자체로 결함이나 후진성이 아니라 일단은 부인할 수 없이 주어진 현실이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의 중심이 될 여지를 남긴다. 제약을 가능성으로 섭수하는 것이야말로 전환다운 전환의 출발일 것이며 그럴 때 ‘자본주의 세계체제=근대’의 자식이면서 동시에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이 드러내고 있는 말기적 증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영감을”12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는 한국문학사의 건설 또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땅히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1. 한영인 「‘한류’와 협동적 창조의 가능성」,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51면.
  2. 장신기 「아시는가, 김대중이 ‘한류 개척자’였다는 사실을」, 오마이뉴스 2022.8.18에서 재인용.
  3. 김현 『한국문학의 위상』, 문학과지성사 1996(초판 1977), 28면 참조.
  4. 각도가 전혀 다른 논지이긴 하지만 조연정 또한 “2010년대가 ‘문학의 자율성’ 신화나 ‘문단=문학’이라는 한국 문학사의 전제 자체가 그 근원에서부터 흔들린 시기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최근 몇 년간 근본적으로 회의된 한국 문학의 그 익숙한 사정들은 어쩌면 1990년대 이후 견고해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조연정 「왜 문학사인가?」, 『문학과사회』 2019년 봄호, 33면.
  5. 여기에 대해서는 졸고 「비평의 로도스: ‘근대문학 종언론’에서 ‘장편소설 논쟁’까지」, 『리얼리티 재장전』, 창비 2022의 2절에 비교적 자세히 거론한 바 있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6. 이소연 「문학사라는 열병」, 『문학과사회』 2019년 가을호, 313면.
  7. 인아영 「시차(時差)와 시차 parallax: 2010년대의 문학성을 돌아보며」, 『문학과사회 하이픈』2019년 가을호, 11면.
  8. 손유경 「한국 문학사의 새로운 가능성」,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봄호, 37면.
  9. 황정아 「‘상상’의 모호한 공간: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읽기」, 『안과밖』 27호, 102면.
  10. 백낙청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 55면.
  11. 인아영, 앞의 글 13면.
  12. 한영인, 앞의 글 5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