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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 닌 외 『물결의 비밀』

손홍규

아시아냐 묻자 인간이라 답하다
–바오 닌 외 『물결의 비밀』, 아시아 2016

 

 

jrtktrk터키의 앙카라 대학 기숙사에 머물던 시절의 어느날이었다. 기숙사 계단을 오르다가 나를 부르는 게 분명한 목소리를 들었다. 아시아! 아시아! 그런 이름으로는 불려본 적이 없기에 나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킬 수밖에 없었다.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큼 새까맣고 나만큼 눈이 부리부리하며 내게 다정하던 그이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이 특별한 호명, 나를 ‘아시아’라고 불러준 그날의 음성이 이따금 떠오르기에 『물결의 비밀』은 어쩔 수 없이 내게 아시아라는 관념 혹은 실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소설적 응답의 한 형태로 다가온다. ‘아시아 베스트 컬렉션’이라는 부제가 붙었으나 여타의 ‘베스트 컬렉션’과는 다르다. 서열화에 불과한 ‘베스트’도 아니고 선택과 배제의 과정에 상업적 의도가 작용한 ‘컬렉션’도 아니다. 베트남·태국·인도·필리핀·대만·싱가포르·터키 문학 등이 한국에서 특별한 권위를 누리는 상황도 아닌데다 굳이 중국과 일본을 배제하지 않은 점도 아시아에 포괄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 작은 선집은 아시아조차 흥미를 갖지 않는 아시아의 집합이 아니던가. 

 

아홉 나라 출신 열두 작가의 단편이 실린 『물결의 비밀』에는 아시아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소설 곳곳에 아시아가 살아 꿈틀거린다. 말해질 수 없고 묘사될 수 없는 것들을 들려주고 보여준다는 점이야말로 좋은 소설의 특징임에는 분명하지만 『물결의 비밀』에는 이 외에도 무언가가 더 새겨져 있다. 지극히 아시아적이어서 스스로를 능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독특한 매력이 있다. 인도 작가 사다트 하산 만토(Saadat Hasan Manto)의 「모젤」은 고지식한 시크교도 티얼로천과 자유분방한 유대인 모젤의 사연을 다룬다. 이 소설의 가장 난해한 지점은 티얼로천이 보여준 용기에도 불구하고 왜 모젤이 그를 떠났는가다. 모젤에게 버림받은 티얼로천은 정숙한 시크교도 여인인 키르팔 카우어를 사랑하게 되지만 카우어가 과격한 이슬람교도들이 장악한 지역에 고립되었음을 알고도 구하러 가지 못한다. 그때 모젤이 나타나 그를 인도하여 카우어를 구하도록 도와주고 모젤 자신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목숨을 잃는다. 티얼로천은 터번을 벗어 모젤의 나신을 덮어주고 모젤은 죽어가면서도 그의 터번을 밀어낸다. “그러고 나서 풍만한 가슴 위로 힘없이 팔을 떨어뜨렸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모젤의 희생적인 죽음과는 어울리지 않게 관능적이다. 이 문장은 티얼로천이 터번을 풀어 모젤을 덮어주는 행위가 낭만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티얼로천은 여자가 맨몸을 드러내는 걸 수치나 치욕으로 여기는 고지식한 관념을 끝까지 고수한 셈이며 모젤은 티얼로천의 의도를 잘 알기에 죽어가면서도 터번을 거부한 것이다. 그런 뒤에 드러난 모젤의 ‘풍만한 가슴’은 모젤 그 자신인 동시에 모젤이 진정으로 티얼로천에게 바란 존재의 형식이기도 하다. 

 

왜 모젤이 티얼로천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모젤은 더이상 시크교도가 아님을 선언하는 행위야말로 위장된 용기이며 그런 방식으로는 티얼로천이 순수하게 스스로와 대면할 수 없음을 알았다. 모젤은 티얼로천을 불신했기에 떠났다. 하지만 종교적 차이 혹은 종족·인종의 차이 같은 가시적인 차이를 무화하는 사랑의 절대성을 다루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결코 시도하지 않으려는 스스로와의 대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환기한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그를 불신해서 떠났다는 해석은 불완전하다. 모젤은 머리와 수염을 깎고 터번을 벗어버린 티얼로천을 보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럴 용기가 없다고 믿었으므로. 자신을 그렇게까지 사랑한다고는 믿을 수 없었으므로. 모젤은 티얼로천이 스스로와 대면하기로 결심했다고 가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자신이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타락한 여자임을 쓸쓸하게 인정했으리라. 모젤은 티얼로천을 신뢰했기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모젤」은 겉보기와 달리 의미의 층위가 두텁다. 이러한 특징이 「모젤」만의 것은 아니다. 학살당한 영혼들과 불 위를 걷는 알프레도(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Francisco Sionil José 「불 위를 걷다」), 사랑을 나누면서 저주를 퍼붓고 웃음을 터뜨리는 지 패오와 티 너(남 까오Nam Cao 「지 패오」), 괴기스럽게 커다란 발로 정치인의 얼굴을 짓밟는 마사지사 또(찻 껍찟띠Chart Korbjitti 「발로 하는 얼굴마사지」), 늙은 아버지가 서양인의 차에 치여 큰돈을 쥐게 되길 고대하는 또안 부부(레 민 쿠에Lê Minh Khuê 「골목 풍경」)…… 그들이 지닌 두려움, 갈망, 회한, 수치, 원한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기도 하다. 

 

『물결의 비밀』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야기의 단순함과 의미의 복잡함이 이처럼 선명하게 대비되는 작품들로 이루어졌다는 데에 있다. 바오닌(Bảo Ninh)의 「물결의 비밀」은 압도적으로 그러하다. 미군의 폭격으로 제방이 무너지고 강물이 범람하자 사내는 마을로 달려간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갓 태어난 아들을 품에 안은 아내와 함께 보리수나무에 매달리게 된다. 아기가 포대에서 미끄러져 물속으로 떨어지자 아내는 지체없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사내도 뒤따라 뛰어들지만 간신히 아기만 구했을 뿐 아내는 구하지 못한다. 정신을 차린 그에게 마을 사람들이 죽은 아내는 잊고 살아남은 아기를 위해 힘을 내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기를 감싼 담요를 풀어 아빠인 그에게 보여준다. 사내는 담요로 다시 아기를 감싸면서 울음을 터뜨리며 절규한다. “내 아기!” 그리고 사내는 이렇게 덧붙인다. “내 딸은 소녀가 되었다. 딸은 물의 아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불렀다. 물에 빠진 아기를 아비가 구해낸 이야기는 마을 사람이면 누구나 알았다. 그러나 그 비밀은 아무도 몰랐다. 내 딸조차도 알 수 없었다.” 사내의 고백에 전율하지 않기란 어렵다. 사내는 아내만 구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들도 구하지 못했다. 엉뚱한 아기를 구했던 것이다. 이 소설이 전율을 넘어 숭고하기까지 한 이유는 “내 아기!”가 지닌 의미의 복잡성 때문이다. 맨 처음 절규는 엄마를 잃고 아빠와 단둘이 남겨진 아기에 대한 애틋함인 동시에 부재하는 아내에 대한 절 박한 그리움이었다. 그다음에 사내의 고백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면 이 절규가 죽은 아내와 아기 모두를 부르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가 자신의 핏줄이 아닌 아기를 키워왔다는 사실에서 이 아기가 바로 ‘내 아기’일 수밖에 없다는 고통스러운 환대의 기미마저 읽어낼 수 있다. 

 

‘내 아기!’는 죽은 아내와 아들, 이름 모를 여인, 그 여인이 남겨둔 핏줄인 지금의 딸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그 자신이기도 하다. 이처럼 단순한 호명에 복잡한 의미를 갈무리할 줄 아는 소설은 흔하지 않다. 이토록 감상적인 어조로 진술하는데도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 냉정한 소설도 흔하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 한가지 질문을 보탤 수도 있다. 낯선 사내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 아기!”라고 절규할 때 아기는 어떤 생각을 했던가. 모든 호명은 타인을 돌아보게 하려는 지시 행위이지만 호명된 자의 처지에서는 손가락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킬 수밖에 없는 자기지시적인 행위임을 아기 역시 느끼지 않았을지. 그때부터 아기의 내면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생겨난다. 아시아가 대체 뭐냐는 질문을 우문으로 만드는 건 대답을 회피함으로써가 아니라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대답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이 작지만 한없이 커다란 선집이 속삭인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6년 가을호에 수록되었습니다.

 

손홍규 / 소설가 

2016.8.3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