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멜린다 쿠퍼 『잉여로서의 생명』, 갈무리 2016

투기자본주의 시대의 투기과학

 

 

하대청 河大淸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 daecheong.ha@gmail.com

 

 

175_403스캔들을 즐기는 배우가 있듯이, 스캔들을 선호하는 과학 분야가 따로 있는 것일까? 2005년 황우석(黃禹錫) 사건에 이어 이번 국정농단 사건에 또다시 줄기세포가 등장하면서 이런 엉뚱한 생각이 잠깐 스쳤다. 권력자들에게 젊음을 되찾아주겠다고 약속한 줄기세포는 불과 10여년 전에는 국가경제를 일으키겠다고 장담했다. 경제의 활력을 되살리겠다는 그 약속은 연구부정이 밝혀지면서 결국 실현되지 않았지만, 생명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줄기세포의 약속은 이번 사건이 보여주는 것처럼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유효하다. 줄기세포의 연이은 스캔들을 현대 과학의 상업화라는 개탄할 현실이나 일탈로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이것이 혹시 어떤 징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국가경제와 생명을 ‘재생’시키겠다는 생명공학의 약속과 이 약속이 이행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판매될 수 있는 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어떤 특성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호주 시드니 대학 사회학 및 사회정책학과의 멜린다 쿠퍼(Melinda Cooper) 교수가 쓴 『잉여로서의 생명: 신자유주의 시대의 생명기술과 자본주의』(안성우 옮김)는 이런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줄기세포, 인체조직 공학, AIDS(후천성면역결핍증) 연구 등 현대 생명과학기술은 그 형태는 다양할지라도 1970년대 이후 성장해온 신자유주의 정치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저자가 보는 신자유주의 정치의 핵심은 흔히 말하는 공공영역의 민영화가 아니라 일상의 금융화다. 항상 불안해하면서 위험을 감수하는 투기적 논리가 금융자본을 넘어 일상생활로 확장되는 것이다. 저자는 푸꼬(M. Foucault)의 생명정치 이론, 맑스 정치경제학, 과학사와 과학철학 등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이런 투기적 논리가 생명과학기술의 상상과 정치에서 작동하는 방식(저자가 “신자유주의적 생명정치”라고 부르는 것)을 그려내고자 한다.

제목 ‘잉여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변형식물이든 인간배아든 ‘생명 그 자체’가 잉여가치의 생산지가 되는 현대 생명공학의 기획을 의미한다. 이 기획의 결과로 병충해에 저항성을 갖도록 유전자가 변형된 농작물이 거대 다국적기업의 소유물이 되고, 인간 제대혈에서 추출된 줄기세포가 각종 치료와 미용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생명의 다양한 형태들이 잉여가치로 사용되는 이런 현실은 지금은 소위 ‘BT(Biotechnology)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저자가 1장에서 보여주듯이 이는 1970~80년대 미국의 특정한 정치적·경제적·법적 결정의 산물이다. ‘생명공학혁명’의 탄생을 다룬 역사연구들은 이미 많이 있지만, 저자는 이 탄생을 자본주의의 축적위기 대응과 연결시킨다.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걸쳐 미국은 경제침체를 겪었고 경제성장의 한계와 생태위기를 예견하는 보고서들이 줄을 이었다. 위기가 고조되자 석유화학산업(대표적인 기업이 몬산토)과 제약산업은 규제가 강화된 환경이나 의약에서 발을 빼고 유전자변형작물 같은 생물학적 생산으로 선회했다. 80년대 레이건 행정부는 이런 위기론에 대응하기 위해 생명공학에 연구비 지원을 늘리고 공공연구비가 지원된 연구결과물의 특허획득을 허용했다.

이런 연구 지원에서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고위험투자의 등장이다. 미국 노동자들의 연금이 주식에 투자되면서 막대한 투자자금이 조성되었고 전혀 상품화되지 않은 생물특허권이 나스닥 설립으로 미래의 수익을 약속하면서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투기로 지원된 생명공학은 자본주의를 성장의 한계에서 구출해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투기적 논리로 생명공학을 지원한 것은 미국정부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이후 미 정부가 생명공학 연구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저자가 “부채 제국주의”라고 부르는 흐름 덕분이었다. 금본위제가 폐지된 이후 미국은 달러 발행국이라는 우월한 지위로 막대한 부채를 감당할 수 있었고 이것이 든든한 연구지원의 배경이었다. 세계 최대 채무국인 미국의 이런 부채는 잘 알려져 있듯이 상환되지 않고 끊임없이 갱신되었다. 채무가 이행되지 않고 상환의 약속만 계속 재생산되는 상황에서 생명공학혁명의 약속이 호출되었다. 끝없이 자기증식을 할 수 있는 생명은 한계 없이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모든 약속을 이행할 수 있을 거라 기대된 것이다. 채무의 약속도, 기술실현의 약속도 모두 투기적인 미래로 계속 이전되는 것, 이것이 저자가 보는 신자유주의시대 생명과학기술과 자본주의의 풍경이다.

저자가 이런 약속과 투기적 미래를 의심하는 이유는(저자는 이를 “자본주의적 망상”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자기파괴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위기에 직면해 생명과학기술의 약속에 투기하면서도 정작 현재의 생명을 보살피지 않고 폐기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 공중보건 지출이 축소되고 AIDS 같은 전염병이 급증했지만 다국적 제약회사는 복제약 사용허가를 외면했다(2장). 동유럽의 여성들은 보조생식술이 열어놓은 난자시장에서 자신의 난자를 매매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저개발국의 가난한 이들은 임상시험에 몸을 내맡긴다(5장). 저자가 인용한 맑스의 일갈처럼 “그토록 인색하면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은 인간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낭비적”(115면)인 것이다.

맑스 정치경제학으로 과학기술정치를 비판하는 시도가 조금은 철지난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저자의 노력은 값지고 소중하다. 생명과학이 약속하는 재생이 자본주의의 투기적 약속이라는 통찰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저자가 보는 생명정치는 너무 경직되고 일방적인 듯하다.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신자유주의시대의 생명정치는 망상을 좇아 자기파괴로 치닫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희망을 암시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장에 간략하게만 언급되었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AIDS 복제약 논쟁에서 다국적기업과 미국정부에 대항했던 지구적으로 조직된 시민들의 연대가 있었다. 이런 곳에는 저자가 보는 우울하고 파괴적인 생명정치 외에 생산적이고 역동적인 생명정치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아쉬움이 남지만 어쩌면 이런 다른 얼굴의 생명정치를 발굴하고 가꾸어나가는 것은 저자보다는 우리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