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한용운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 출생. 본관은 청주.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이며 득도(得度) 때의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
1896년~7년 의병에 참가하였다가 실패하여 몸을 피해 고향을 떠남.
1899년 블라디보스또끄로 건너갔으나 박해를 받고 곧 돌아와 정처없이 전전.
1905년 1월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 득도(得到), 전영제사(全永濟師)에게 수계(受戒).
1907년 4월 강원도 건봉사(乾鳳寺)에서 수선안거(首先安倨)--최초의 선(禪)수업---를 성취.
1909~10년 7월 강원도 표훈사(表訓寺) 불교 강사(講師)에 취임. 승려 취처(娶妻) 문제에 관한 건의서를 두 차례 당국에 제출하여 불교계에 물의를 일으킨『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 범어산에서 조선임제종종무원(朝鮮臨濟宗宗務院)을 설치하여 3월 관장(管長)에 취임. 한일합방 이듬해 8월 만주로 건너가 독립지사들과 만나 운동의 방향을 논의.
1914년 4월 『불교대전(佛敎大典)』을 범어사에서 발행. 8월 조선불교회 회장 취임.
1918 년 9월 월간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이때부터 더욱 문학 창작에 힘을 기울여 「조선청년과 수양」「고통과 쾌락」「고학생」「천연(遷延)의 해(害)」「훼예(毁譽)」「무용(無用)의 영심(榮心)」등 많은 글을 『유심(惟心)』에 발표.
1919년 3·1운동 주동자로서 손병희를 포섭하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3월 1일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하여 연설하고 거사 후 피검.
1921년 가을, 감형되어 출옥.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총재에 취임.
1926년 5월 15일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발행. 5월 20일 시집『님의 침묵』을 간행.
1928~29년 1월 수필 「천하명기 황진이」를 『별건곤』지에 발표. 다음해 11월 광주학생의거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고 민중회의를 개최.
1935~36년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후회(後悔)」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신문 폐간으로 중단.
1939년 회갑을 맞음. 11월 『삼국지』를 번역하여 조선일보에 연재.
1940년 5월 수필 「명사십리」가 『반도산하』에 수록. 창씨개명을 맹렬히 반대.
1944년 6월 29일 중풍으로 심우장에서 입적(入寂). 유해는 미아리 화장터에서 다비를 거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