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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1세기 한반도와 새로운 공동체

 

유럽의 시간: 새로운 공동체를 찾아서

 

 

이호영李鎬英

고려대 사회학과 강사.

 

 

1. 유럽의 정체성?

 

지난 1990년대에 유럽의 사회과학자들은─그들의 정치가들과 마찬가지로─유럽통합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를 밝혀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논쟁이 무르익은 요즘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유럽이란 무엇인가, 또 유럽이 지향해야 할 사회적 모델은 무엇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비록 회원국마다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비준되긴 했지만, 1992년에 조인된 마스트리히트(Mastricht)조약은 유럽의 통합을 대세로 바꾸어놓았고, 1999년 1월 마침내 유럽은 실질적인 화폐통합의 제1단계에 돌입하였다. 왜 유럽은 자신들의 발명품인 국민국가모델을 버리고, 공동체로의 통합을 선택했을까? 마스트리히트조약 이후의 유럽에서 국가는 어떤 지위를 갖는 것일까?

유럽 밖에 있는 우리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우리가 유럽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대 유럽이 지닌 특권적 지위는 단지 유럽인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만은 아니다.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가 유럽과 문명 그리고 세계를 등식화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소한 산업화된, 유럽 밖의 여러 나라들에서 유럽을 생각할 때, 유럽은 그 지리적 경계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국한되지 않는다. 분명 유럽은 사고체계·가치체계와 뗄 수 없는 개념이며, 20세기 내내 근대화를 목표로 했던 많은 사회에 긍정적 의미에서든 부정적 의미에서는 하나의 모델로서 기능해왔다. 그러나 유럽은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구성부분을 지니며, 이러한 다양성이야말로 유럽문화의 풍요로움을 설명하는 진정한 요소이다. 발레리(P. Valéry)가 말했던 그리스의 민주주의, 로마법, 기독교라는 유럽문화의 3대 구성원리도 그것의 순수한 원형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나라와 지방에 남아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과의 결합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고대 그리스문화의 상속자로서의 서유럽이라는 관점은 사실상 중세를 부정하고자 했던 계몽의 시대가 만들어낸 발명품이며, 언제나 이질적·이교적인 요소와 자신을 분리하려 했던, 유럽의 보수적 세계관이 항상 지지해온 관점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유럽’을 말할 때 갖게 되는 모호함과 의미의 다중성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특별히 ‘경계’─상징적이든 물리적이든─에 주목하는 까닭은 바로 유럽의 경계가 늘 분명치 않았다는 데 있는데, 이는 유럽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담론이 당대의 세력관계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의 싯점에서 유럽의 정체성을 정의하려면, 한편으로 지금 진행중인 유럽통합 과정에서 나타나는 경향들을 고려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과거의 유럽이 발전해온 경로들을 사회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구성해야 한다. 엘리아스(N. Elias) 식으로 말하면 유럽(문명)은 상호의존적인 복수의 동력들이 만들어낸 구성물이지, 합목적적인 필연성에 의해 발전해온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전후의 유럽통합에 관한 논의에 앞서 지난 2세기 동안 지배적인 정치적 공동체의 모델로 존재해온 국민국가의 성과와 한계를 짚어보려 한다. 이러한 작업은 유럽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과거인 국민국가의 경험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는 물음에 간접적인 대답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2. 민족적 정체성과 근대적 국민국가의 탄생

 

국민국가모델의 기본전제인 1민족 1국가의 원칙은 국경을 정하는 것으로 집약될 수 있다. 국경은─너무 어이없게도─그 땅에 누가 먼저 살고 있었나(ancienneté)라는 기준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영토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다. 가장 최근의 코소보전쟁이 그 예다. 그런데 지리적 국경이 정해진다고 해도 이것이 반드시 정치적·문화적 국경과 일치하지 않았고, 이 어긋남을 강제적으로 일치시키려는 의식적 노력이 거의 모든 근대적 국민국가에서 진행된 것이 사실이다.

국민국가가 탄생시킨 민족적 시민권(citizenship)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새로운 의미의 권리는 민족의 내부와 외부에서 개인의 경계를 이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세에 귀족과 성직자를 포함한 식자층에게 국경, 즉 외부적 경계는 상징적인 것이었을 뿐이며, 진정한 귀속은 신분제상의 지배계급이라는 사실에 의거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분제의 타파와 함께 역사 속에서 국가와 민족, 시민권의 완벽한 일치를 최초로 이루어낸 프랑스혁명의 여명기에 국민국가는 이미 내부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국민국가의 논리는 시민과 비시민, 즉 외국인 사이에 새로운 전선을 그음으로써 비로소 정당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이 주창한 사해동포주의적 원칙은 정치적 연합에의 귀속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시민권 사상 그 자체에 의해 부정된 것이다.1 시민권은 탄생하자마자 제한될 운명에 처했는데, 그 까닭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시민권을 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외국인·여성·어린이가 소극적 시민이라는 범주로 분류되었고, 적극적 시민은 세금을 납부하고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성인 남자─따라서 빈민은 제외된다─로 한정되었다. 1795년의 ‘신선언’은 자연권에서 억압에 대한 저항권을 삭제함으로써, 그리고 시민의 의무 중에서 법과 사적 소유를 존중할 의무를 강조함으로써 모든 인간에게 자연권과 자유, 번영과 안전을 추구할 권리를 인정한 처음의 인권선언(1789)으로부터 후퇴하게 된다. 이로써 계몽과 합리주의에 근거한 근대적 국민국가는 사회의 통합을 확보해줄 상징적 조치들, 즉 국기·국가 같은 상징물의 발명과 역사의 재서술을 통해 공화적 원칙을 속류화시키는 성상(聖像)들로 둘러싸인 영토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세계화 혹은 지역화로 인한 국민국가의 약화뿐만 아니라 국민국가 자체에 내재한 억압적 요소들에 대해 주목하고, 이 모델 역시 역사 속에서 상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특히 정치제도와 경제행위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이 하나의 영토 안에서 일치하는 경계를 가지고 작동한다는 민족주의적 사고는 이미 시장의 전지구적 규모의 확장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라는 흐름에 의해 부정되었고, 이 와중에서 문화와 정치, 경제는 서로 다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동질성을 전제로 하는 국민국가 내에서 지역적·사회적 불평등이 지속된 것도 국민국가모델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세기 이래로 가장 매혹적인 슬로건이 된, 루쏘식의 ‘나누어질 수도, 양도될 수도 없는’ 주권 개념은 국가 안팎에서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3. 탈민족국가적 정체성: 유럽공동체에서 유럽연합으로

 

많은 경우 간과되지만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20여년간은 유럽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이때에 비로소 유럽은 완전히 국민국가들로 나누어졌으며, 베르싸이유조약(1919)에 따라 ‘국가’가 정해진 영토 안팎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받은 유일한 정치조직으로 국제관계 속에서 자리를 잡았다. 1914년 이전의 대륙통합 논의가 단순한 경제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전쟁은─바로 그 전쟁 수행을 위해─경제 영역을 국가가 장악하고 주도해나가는 씨스템을 대륙 전역에 파급시킴으로써 이후의 통합 논의를 정치적 결정의 문제와 불가분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역할이 강화된 국가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쟁피해 배상문제의 협상과 재건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 과정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1917년 볼셰비끼혁명이 성공하자 그때까지도 제국의 치하에 있던 동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사회주의혁명을 통한 독립과 근대화의 길을 현실적 대안으로 고려하게 되었고, 1929년 대공황을 전후한 영국·프랑스 등에서도 계급갈등이 점차 심화되었다. 이것을 커다란 위협으로 느낀 서유럽 정부들은 서둘러 자국의 국민을 체제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정책들─예를 들면 프랑스의 1930년 사회보장법 개혁─을 발표함과 동시에 새로운 국제관계의 틀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나 파시즘은 이른바 윌슨 독트린에 입각한 국제연맹이 추구했던, 아슬아슬한 민족간의 세력균형의 꿈을 좌절시키고 말았다.

2차대전 종전 이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유럽인들은 민족(지상)주의의 자기파괴적 본성에 대해 자각하면서, 전쟁의 위협을 최소화하는 것이 유럽의 번영을 위한 선결과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은 불가피하게 국민국가모델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다. 좀더 커다란 맥락에서 보면, 두 전쟁은 유럽이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문명화의 과제를 더이상 지탱할 수 없음을 선고한 것이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계몽주의에 근거한 과학과 합리성의 신화가 이카로스의 날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근대 지식체계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문명의 포교자로서 유럽이 주장해온 보편주의가 상대화될 운명에 처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전후 유럽의 통합에 가장 강력한 동력을 부여한 것은 미국이 추진한 마샬플랜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유럽의 경제회복은 소련과 동유럽 및 유럽 내의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을 수 있는 방편이자 거대한 시장을 창출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2 한편 전후 서유럽의 평화적 재건은 프랑스와 독일 관계의 정상화와 뗄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었다. 1951년 빠리조약(프랑스·독일·벨기에·룩셈부르크·네덜란드·이딸리아 참여)을 통해 만들어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는 전쟁 수행이 목적이 될 수도 있는 석탄과 철강의 생산을 유럽 차원의 기구로 하여금 감독하게 함으로써 전후 독일에 취해진 석탄과 철강의 생산금지 조치를 실질적으로 해제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57년의 로마조약으로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핵에너지공동체(EURATOM)가 만들어졌고, 이로써 유럽공동체(EC)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 조약들이 주권을 침해할 수 있는 연방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이유로 참가를 거부했다. 대신 영국은 EC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여섯 나라(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스위스·오스트리아·포르투갈)와 함께 1960년 스톡홀름협정을 체결하여 유럽자유무역지대(EFTA)를 결성한다. 그러나 이 조직은 바로 이들이 선호했던 정부간주의(intergovernmentalism)의 취약성 때문에 EC에 비해 비효율적으로 운영되었고, 결국 영국·덴마크·아일랜드를 필두로(1973)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잇따라 EC에 가입함으로써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현재 EFTA에 남아 있는 초기 회원은 노르웨이와 스위스뿐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통합의 초기 목적, 즉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는 점차 희미해지고, 대신 유럽단일시장의 건설을 위한 다른 차원들이 중요성을 갖기 시작했다. 좀더 많은 나라가 참여하는 확장된 EC에서, 따라서 더욱 이질적인 요소들이 많아진 EC에서 회원국들은 공동체의 순조로운 작동을 위해 좀더 많은 힘을 EC에 실어줄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프랑스혁명 당시 권력의 근저를 뒤흔든 근본적 변화보다는 훨씬 더 느리고 평화적인 것이었지만, 주권의 이양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국제관계에서 나타난 다른 모든 조직과는 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전세계적인 규모에서 탈규제화 및 자본이동의 자유화가 진행되면서, 유럽의 행보는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1973년의 세계적 경제위기와 그로 인한 브레턴우즈(Bretton Woods)체제의 몰락은 유럽경제공동체(EEC)에도 커다란 타격을 가져왔다. 위기 앞에서 회원국들은 자국의 이해를 앞세우며 유럽통합 프로젝트에 명백히 적대적인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위기는 역으로 단순한 공동시장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통합의 장애물이라고 인식된 국경을 좀더 빨리 없애려는 시도를 낳게 되었다. 이후 공동체법에 관한 토론이 활발해지고 특히, 유럽통화제도의 설립 문제가 논제에 올랐다. 1979년 발족된 유럽통화체제(EMS)는 환율조정장치를 통해 각국의 환율변동폭을 제한하고, 공동체 내의 통화안정을 도모하고자 설립되었다. 이렇게 해서 브레턴우즈체제의 붕괴로 인한 손실을 최소한 EC 안에서 보전받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EMS는 마르크화의 불안정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정환율제를 지키려는 강대국들의 노력은 결국 유럽통합 자체를 EMS의 성패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된다.

EC의 경제통화연맹(EMU)과 정치연합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1992년의 마스트리히트조약은 유럽통합의 역사에서 질적인 비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로써 EC는 더 많은 주권의 이양을 전제로 한 유럽연합(EU)으로의 전환을 선언하고, 결정과 실행의 수단을 보유한 하나의 정치체(political entity)로 도약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을 수행하게 된다. 이를 위해 유럽의회의 권한 강화는 필수적이었고, 공동외교안보정책(CFSP), 유럽 차원의 사회정책의 개발을 준비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마스트리히트조약은 또한 유럽시민권을 현실화시켰다. 각 회원국의 국민은 자동적으로 유럽시민이 되었고, 유럽 영토 내에서의 거주·노동의 자유와 해당국 국민과 동등한 사회보장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통합된 유럽 안에서 시민권은 드디어 두 세기 만에 국적으로부터 분리되어 더 광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더 많은’ 통합은 이제까지 각국이 전담해온 사회정책 부문을 EU가 일부 떠맡지 않을 수 없는 조건으로 작용했다. 1989년 12월에 채택된 ‘사회헌장’은─영국을 제외한 당시 회원국 모두가 서명했다─유럽단일시장을 조절하고 제어할 사회적 기본권에 대한 요구를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 헌장은 선언적인 의미를 가질 뿐 강제력이 없는 것이었다. 나라마다 내용 및 적용 범위와 방식이 판이한 사회보장제도를 조율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EU가 표방하는 ‘보충성의 원칙’(principle of subsidiarity)은─그 정의 자체가 애매하기 짝이 없지만─회원국들의 상이한 입장과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개별국가들이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일만 집행위원회가 맡아서 한다고 정하고 있는데, 이는 특히 사회적 차원에서 유럽의 공조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유럽(Social Europe)을 말하는 사람들은 사회정책에 대한 기본 입장에서 유럽 내부의 차이보다 유럽과 미국(혹은 일본) 사이의 차이가 더욱 크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일국적 차원과 유럽 차원의 사회정책 사이에 일관성을 부여하려 하고 있다.3 이런 경향을 일부 수용하여 EU는 암스테르담조약 137조를 통해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에 대한 투쟁을 주요과제 중의 하나로 명시했다. 특히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어떠한 사회적 권리도 가질 수 없는 ‘비시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통합 기제를 공동체 전체의 틀 안에 마련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EU의 성격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첫째, 마스트리히트조약 이후의 유럽은 분명 사회통합에 한걸음 다가서고 있지만, 그 의미는 사회학적이라기보다는 경제학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회원국들은 화폐통합시 이른바 수렴(convergence)의 원칙하에서 물가상승률, 예산적자폭 및 정부부채 제한 등의 기준을 반드시 지키도록 요구받았는데, 주어진 의사일정하에서 이러한 경향은 사회복지의 축소라는 결과를 낳고 있다. 둘째, EU가 초국가적(supranational) 성격을 가져야 하는지, 혹은 탈국가적(postnational) 성격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전자의 경우 EU는 민족국가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작은 국가를 대신할 (미국처럼) 큰 국가(superstate)를 의미하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 그것은 전혀 새로운 형식의 정치적·문화적 공동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앞서 지적한 합의의 부재로 인해 유럽시민권은 이제 유럽 내에 이중의 의미의 타자를 생산하게 되었다.4 이제 외국국적을 가진 거주민들은 그 국가 안에서, 그리고 유럽 안에서 이중의 외국인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넷째, 이제까지 민족적 정체성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어온 문화적 정체성이 과연 유럽 차원에서 새로운 정체성의 중요한 축으로 전화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아무도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다양성 속의 통일이라는 구호는, 이미 11개의 언어를 공식어로 채택하고 있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민족들로 구성된 유럽이 과연 문화적 동질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그런 시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국민국가가 배제했던 소수민족의 정체성과 지역적 정체성의 문제를 정치와 문화의 두 영역에서 동시에 제기하였다. 이 문제들은 1989년 이후, 동유럽의 서진(西進)─서유럽의 동진(東進)?─이라는 역사적 변화로 말미암아 더욱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4. 유럽의 경계, 유럽의 한계

 

앞서 보았듯이 유럽이 단지 자유무역지대이기를 그치고 정치적 공동체로 도약하려 할 때마다, 또 새로운 국가들에 문호를 개방하려 할 때마다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확장’과 ‘심화’ 사이의 긴장은 특히 동유럽 사회주의체제의 몰락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5 사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을 때, 당혹스러웠던 것은 크렘린만은 아니었다. 대다수 EU 회원국 정부들도 이 잊혀진 반쪽의 유럽의 ‘때 이른’ 귀환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내비쳤다. 이들은 독일의 통일로 인해 EU 내에 너무 거대한 중심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989년 이후의 일련의 사건들은 유럽의 동방정책이 얼마나 내용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편입되기를 기대하는 동유럽국가들에게 EU에의 가입은 우선 올라타고 봐야 할 열차의 승차권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수십년간 초국가적 체제에 편입되어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과 경제적 자립의 근거를 빼앗긴 경험을 갖고 있는 이들 국가로서는 EU 가입이 또다른 종속을 의미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이전과 같은 의미의 자립이 불가능해졌다는 현실적 고려하에서 동유럽국가들은─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서둘러 새로운 국제조직으로의 편입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이런 노력은 1999년 동유럽 3개국(체코·헝가리·폴란드)의 나토 가입으로 현실화되었고 이미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해체로 세력이 약화된 러시아는 코앞에까지 파고든 미국의 안보우산에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동유럽과 서유럽의 통합은 두 지역의 경제적 격차로 인해 일방적인 관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동유럽과 서유럽은 지역 대 지역으로 통합될 수 없었고, 결국 쌍무(bilateral)관계에 입각한 협상테이블에서 동유럽 각국이 받은 대접은 박대에 가까운 것이었다.6 한편 1990년대 EU 자체도 수많은 과제와 개혁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동유럽과의 협상 문제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된 측면이 있다. 1992년의 마스트리히트조약으로부터 1997년의 암스테르담조약, 1999년 유로화의 출범에 이르기까지 EU의 의사일정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여전히 회원국들 사이의 입장 차이가 이전의 합의들을 무화시킬 수 있을 만한 압력으로 작용했으며, 특히 유럽경제의 전반적 침체로 말미암아 일국 내의 사회문제들─특히 실업·이민 문제, 사회복지의 감소 등─이 유럽화하는 경향을 띠었다. 이런 상황은 회원국들로 하여금 동유럽 국가들과의 협상에서 한발 물러서는 입장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EU 가입을 위한 일차적 협상대상국을 형성하는 이른바 ‘중동부 유럽국가’(CEEC)라는 명칭은 단순히 동유럽이라고 말할 때 포함시킬 수밖에 없는 러시아 및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들을 명시적으로 배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7 사실상 20세기 초반까지 중동부 유럽은 독일문화권으로 인식되었고 쏘비에뜨 성립 이후에는 사회주의권으로 분류되어 이해되었을 뿐, 그 자체의 특수성은 무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1945년 이후 유럽의 한 부분이 서구 지식인들의 뇌리에서 점점 사라져간 현실은 바로 유럽 자체의 정체성의 위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유럽의 동쪽 부분은 바로 억압된 서유럽 그 자체였으며 그것 없이는 결코 서유럽도 정의될 수 없었던 거대한 타자를 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냉전은, 또 그것이 만든 동·서유럽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EC의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따라서 CEEC가 EU 가입을 원하는 순간 다시 한번 유럽의 동쪽 경계는 불분명한 것으로 변했고, 새로운 경계를 정하는 일은 유럽의 재정의를 요구하게 되었다. 혹자는 동·서유럽의 경계가 이미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의 분열 시대부터 존재해온 것으로 간주하지만, 최소한 20세기 이전까지는 그 경계가 무척 유연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지난해 베를린장벽 붕괴 1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동유럽 사람들은 ‘서구의 물가와 동구의 임금’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현실을 표현했다. 사실 지난 10년의 역사는 서구와 동구의 만남이 결코 새로운 미래를 위한 합류가 아닌 불평등의 심화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동유럽의 실업률은 가히 살인적인 수준에 이르렀으며, 장밋빛 미래를 보장한다던 시장은 여전히 서유럽 출신의 자본가 혹은 사회주의정권 아래서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던 노멘끌라뚜라들의 손에 장악되었을 뿐이다. 국영기업의 사영화가 외국자본에 의한 새로운 독점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제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5. 새로운 사회계약을 위해

 

어떤 학자는 사람들이 EU를 통해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보려 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8 미국은 EU를 세계에서 가장 큰 구매력을 갖춘 시장이자 신자유주의적 전략을 수행하는 파트너로 보고 있고, 동유럽은 EU가 수행하는 지역정책의 수혜자가 되길 바라며, 제3세계에서는 미국과 유럽의 세력균형이 현재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경제의 논리를 견제할 안전장치가 되어주리라 기대한다. 어떻게 EU는 이런 어긋나는 기대들 속에서 줄타기를 할 것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EU가 어떤 형태의 조직이 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많은 사람들은 1989년 이후의 변화가 비가역적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전지구적 규모의 자본주의의 승리가 이 변화의 주된 내용이며 이것을 통제할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자본에 ‘인간의 얼굴’을 부여하는 데 성공하는 듯했던 노동조합과, 시민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정치의 차원에서 시장을 조절하던 국가는 이제 세계화의 구호에 밀려 박물관 속의 유물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1980년대 이래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 속에서 추진된 공기업의 민영화 및 사기업들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EU 내에도 불완전고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기업들이 비싼(!) 세금을 피해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져서 노동조합의 교섭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부르디외를 비롯한 유럽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WTO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성향의 국제기구들이 제멋대로 의사일정을 진행하고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지난 200년간의 계급투쟁의 산물인 사회적 권리(acquis sociaux)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어놓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유럽 시민운동·노동운동의 연대가 꼭 필요한 싯점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9 또한 EU 15개 회원국 중 11개국에서 좌파가 집권하고 있건만, 정부관료들은 시민들의 이러한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더이상 민족주의냐 세계화냐가 아니고, 지향하는 사회가 어떤 종류의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사회적 유럽은 이미 존재하는 합의의 틀을 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합의의 틀을 모색하는 데서 발전의 동력을 구해야 한다. 그것은 당연히 일국 내부의 불평등을 EU로 이전시키거나, 내부의 국경을 없애고 외부에 대해 더 강력한 성채를 쌓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계약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긴 투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국가와 시장의 관계, 정치와 문화의 관계, 그리고 이들이 사회적인 것(the social)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오래된 논쟁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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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 Schnapper, La Communauté des citoyens: Sur l’idée moderne de la nation, Paris: Gallimard 1994.
  2. 볼딴스끼는 한 논문에서 마샬플랜이 유럽에 도입한 것은 단순한 기금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영씨스템 및 생산성 우선주의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단지 기업문화만 바뀐 것이 아니고, 교육과 종교, 노동조직 모두가 변화를 겪은 것이다. L. Boltanski, “America, America…: le plan Marshall et l’importation du management,” Actes de la recherche en sciences sociales, 38호, 1981, 19〜41면.
  3. O. Quintin, B. Favarel-Dapas, L’Europe sociale: Enjeux et réalités, Paris: La Documentation française 1999, 14〜15면.
  4. E. Balibar, “Une citoyenneté européenne est-elle possible?” B. Theret (ed.), L’Etat, la finance et le social, Paris: La Decouverte 1995, 534〜52면.
  5. 유럽통합의 역사에는 네 번의 확장이 있었다. 원래 회원국 6개로 출발하여 1973년에는 영국·아일랜드·덴마크가, 1981년 그리스가, 1986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1995년에 오스트리아·핀란드·스웨덴이 새로운 가입국이 되었다. 이로써 EU는 4억 8천만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 이른바 ‘코펜하겐 기준’에 따르면 EU의 가입조건은 유럽적 정체성, 민주적인 정치체제, 개방형 시장경제, 공동체법과 합의의 준수 등인데, 터키의 가입을 둘러싸고 이 조건들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사실상 오래 전부터 가입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터키가 이슬람국가라는 것이 유럽적 정체성과 위배되는가의 여부를 놓고 유럽 안팎에서 유럽이 지향하는 바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6. EU의 일차 협상대상국은 원래 6개국(폴란드·헝가리·슬로베니아·에스또니아·체코·키프로스)이었으나 차별화정책이 비판을 받자 작년 12월 이후 EU 집행위원회는 협상을 원하는 12개국(라뜨비아·리뚜아니아·불가리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몰타 포함) 모두와 동시에 협상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7. I.B. Neumann, Uses of Other: The East in European Identity Formation, Minneapolis: Minnesota University Press 1999, 특히 제5장 참조.
  8. F. Wehrle, “La construction européenne au risque des nationalismes est-européens,” Revue de l’Institut de Sociologie, Université libre de Bruxelles 1995, 424면.
  9. P. Bourdieu, “Pour un mouvement sociale européen,” Le Monde diplomatique 1999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