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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19세기말 유럽과 나
변화, 지속 그리고 반복
육영수 陸榮洙
중앙대 사학과 교수.
* 이 글은 1999년 12월 ‘문화사학회’에서 발표한 초고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토론에 참가해 비판과 제안을 아끼지 않았던 회원들에게 감사한다. 또 수정된 원고를 읽고 흥미로운 지적들을 해준 중앙대의 고부응·김누리·장영준 교수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1. 시간의 역사
봄이 오고 있다. 작년에 왔던 봄이 아니라 새 천년, 새로운 세기의 첫 봄이 오는 것이다. 지난해, 그러니까 20세기 마지막 해의 끄트머리를 장식하던 흥분과 불안감은 태평양 피지섬에서 서울 광화문까지의 함성과 불꽃놀이와 함께 스러졌다. 세번째의 밀레니엄과 21세기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는지를 둘러싸고 역사가들이 신문과 권위있는 학회지 등에서 펼친 논쟁1도 이제는 과거지사가 되었다. 여하튼 서양의 기독교 중심적인 시간관념에서 파생되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간은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부터 시간의 변화에 대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했을까? 사람들은 언제부터 세대·희년(禧年)·세기·밀레니엄 같은 용어를 차용하며 시간의 흐름을 분절적으로 파악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시간을 정확히 측정·예측·엄수하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매이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년 전부터의 일이다.
오늘날 동서양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양력의 기준이 된 그레고리 책력이 유럽에 도입된 것은 1582년이었다. 그러나 시간의 제도적인 도입과 그것이 보통사람들 사이에 파급되어 시간관념의 기준으로 정착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교황과 가톨릭의 권위에 반발한 신교도들은 200년 후에야 그레고리 책력을 수용했다. 영국은 왕의 재위년도를 공문서에 기록하던 오랜 관습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1752년에 이르러서야 그레고리 책력을 채택했다. 프랑스인들은 18세기 중반까지도 본인의 정확한 나이를 계산하지 못하고 대충 열살 단위로 추정했다.2 유럽인들은 18세기 중엽 이후에야 일직선상의 세속적인 진보를 역설하던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시간의 흐름을 실질적인 문명의 변화와 연관시켜 사고하는 습관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역사적 흐름을 100년 단위로 끊어 인식하는 경향 역시 최근의 산물이다. 이전까지는 막연한 시간의 단위로 사용되던 ‘세기’라는 용어의 역사성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말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있던 『메르뀌르 갈랑』(Mercure Galant)지는 1699년 12월초에 처음으로 ‘다음 세기는 1700년에 시작되는가 아니면 1701년에 시작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뜨거운 지상논쟁을 벌였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에게 점차 널리 인식되기 시작한 ‘세기’는 1789년 프랑스혁명을 기점으로 표준적인 시간측정의 도구로 정착되었다. 시간을 10진법 기준으로 계산하던 혁명책력의 영향을 받고3 기억하기 쉬운 단위를 선호하는 보통사람들의 기호에 부응해 세기가 시간의 새로운 주연으로 부각된 것이다. 또한 우연히도 미국독립 100주년(1876)과 프랑스혁명 100주년(1889) 같은 기념행사가 19세기에 집중되어 거행됨에 따라 세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퍼졌다. 19세기 중반 이후 활발했던 시계의 보급도 시간관념의 변화를 촉진했다.4 그 연장선상에서 19세기말 유럽을 특정적으로 지칭하는 고유명사인 ‘세기말’이란 단어도 탄생했다. 굳이 족보를 따져 말하자면, 요즘 우리들의 요란스런 시간관념은 기껏해야 한 세기밖에 나이를 먹지 않은 현대적인 산물인 것이다.
필자가 이 글에 적용하려는 시간개념은 ‘역사적 시간’이다. ‘역사적 시간’이란 어렵고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 같은 사건이나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발생한 공간과 시간에 따라,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에 따라 그 역사적 의의가 다르다는 인식이다.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은 셀 수 없는 과거의 편린들을 오늘 나의 관점으로 선택·여과·해석하는 작업이다. 홍수처럼 넘치는 과거의 바다에 어떤 크기의 그물을 던져 어떤 모양의 과거를 잡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나의 가치관에 달려 있다. 에꼬(U. Echo)의 예언처럼, 개인이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 과거사건을 읽고 세계를 해석하는 ‘각자의 역사’ 시대가 21세기에는 정말 도래할지도 모른다.5
이 글은 19세기말 유럽·유럽인들이 겪었던 특이한 경험들이 21세기를 맞은 한국·한국인들이 반추해볼 만한 거울이 될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낯선 시간을 살았던 낯선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를 추적해봄으로써 오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문제의 뿌리와 그 해결의 갈래를 가늠해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은 세기말 유럽의 본질이 새로운 미학적·예술적 운동(가)의 출현에 있다고 보는 기존의 연구경향6을 따르는 대신, 세기말을 세기말답게 만든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환경에 대한 역사적 컨텍스트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일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는다. 이런 의도로 이 글에서 묘사된 유럽은 당시의 유일하고 보편적인 풍경화가 아니라 내 멋대로 재구성해본 ‘또 하나의 유럽’에 불과하다. 죽은 과거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역사가의 작업이 때로 즐거울 수도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자기 입맛대로’(à la carte) 과거를 요리하고 싶은 욕망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이다.
2. 19세기말 유럽의 이중변주곡
세기말 유럽인들은 어떤 환경과 질서 속에서 살았을까? 그때 그곳에서는 우리가 기억할 만한 무슨 특별한 일들이 일어났을까? 이런 의문들을 해소하기 위해 19세기 후반 영국·프랑스·독일제국의 기본적인 정치·사회·경제적 구조와 성격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영국의 세기말은 자유주의 위기의 시기(1875〜1914)이며 동시에 통치자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의 이름에서 비롯된 빅토리아 시대의 말기에 해당한다. 일찍이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을 경험하고 맬서스·벤섬·밀 등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정치사상가들을 배출한 영국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본고장이었다. 특히 19세기는 중산층에서 출발하여 노동자계층까지 참정권을 확장시킨 세 차례의 선거법개정(1832·1867·1884)을 위시하여, 자유로운 무역을 방해하는 곡물법의 폐지(1846), 사상과 지식의 자유로운 전파를 억제하던 인지세의 폐지(1855〜61), 노조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조합법 제정(1871) 등 일련의 개혁조치들이 꼬리를 문 자유주의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1875년에 시작된 경제공황을 고비로 자유경쟁에 입각한 신념이 흔들렸고,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영국의 막강했던 자신감도 후발주자인 독일·프랑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세기말의 프랑스는 정치적 불안감이 지속되던 시기였다. ‘빠리꼬뮨’이라는 피비린내나는 내란을 진압하고 힘겹게 탄생한 제3공화국 정부는 좌우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했다. 1888년 국방장관에 임명된 불랑제(G. Boulanger) 장군은 자신의 카리스마와 군의 개혁정책으로 얻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정부에 도전했다. 쿠데타음모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쏠렸던 국민의 지지와 기대감은 허약한 공화주의와 의회주의에 대한 반감의 다른 표현이었다. 몇년 뒤 파나마운하 건설회사가 정부의 고위관료들에게 재정적 원조를 요청하며 뇌물을 제공한 파나마운하사건(1892)이 터지자 공화국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한층 심화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태인 출신 드레퓌스(A. Dreyfus) 대위의 간첩행위 여부를 둘러싼 이른바 드레퓌스사건7이 1895년에 폭로되자 프랑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으로 빠졌다. 1894〜1906년에 10명의 수상과 12명의 국방장관이 교체될 정도로 세기말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의 절정기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세기말이 정치·경제적으로 어두운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면, 이 시기의 독일제국은 겉으로는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지하듯이, 프로이쎈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O. Bismarck)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여러 독일의 영방들을 통일하여 카이저를 수반으로 하는 독일제국을 1871년에 출범시켰다. 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로 이웃나라를 위협할 정도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독일제국은 빌헬름 2세의 친정체제가 출범한 1888년 이후 세기말적인 정치불안과 군사적 위협에 시달린다. 통일이 안겨준 잠시 동안의 도취에서 깨어난 국민들은 제국의 통치구조와 사회적 질서가 너무나 권위주의적이며 임시방편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세기말 유럽은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부활의 시기였다. 1880년대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제국주의’라는 용어는 1900년까지는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올랐고 (…) 서구의 당대 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운동”이 되었다.8 신대륙과의 노예·설탕·커피 무역을 중심으로 한 17〜18세기의 ‘비공식 제국주의’(informal imperialism)와는 달리, 19세기 후반의 제국주의는 유럽국가가 비유럽국가를 노골적으로 정복·통치·착취하는 ‘공식적 제국주의’(formal imperialism) 혹은 ‘신제국주의’(new imperialism)의 형태로 나타났다.
부르주아 체제와 가치관의 위기로서의 세기말
앞에서 간략히 살펴본 것처럼, 정치적 불안정과 정서적 불안감이 19세기말의 영국·프랑스·독일제국을 공통적으로 지배했다. 당시의 시대적 기상도를 규정하던 용어인 ‘세기말’과 ‘데까당스’(décadence)가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기말이 불안함, 불확정성, 생활수준의 하락 등을 함축한 당시의 유행어였다면,9 데까당스는 물질적·육체적 타락과 도덕적·문화적 퇴폐를 총체적으로 고발하는 고유명사처럼 애용되었다. 두 용어가 비판하고 야유하려는 궁극적 대상은 세기말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이 숭배한 자유방임주의·경쟁주의적인 사회의 질서와 물질주의·진보주의적 가치관에 다름아니었다.
부르주아 체제에 대한 반발은 우선 자유주의의 쇠퇴로 표출되었다. 영국의 경우, 1875년 이후의 지속적인 경제불황 상태에서 해외시장에 과도하게 투자한 금융·무역업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적극적 간여를 요청함에 따라 자유방임 정책의 기조가 흔들렸다. 이에 따라 기회의 균등과 적극적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10가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등장했다. 2류국가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새로운 제국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보어전쟁(1899〜1902)의 막다른 골목으로 영국을 내몰았다. 왕당파, 보나빠르뜨파, 기회주의적 공화주의자 등이 득세했던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도 자유주의의 입지는 좁았다. 드레퓌스사건의 열기 속에서 정부는 한편으로는 교회세력과 ‘마지막 종교전쟁’을 치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내의 국가로 법률 위에 군림하려는 군부세력의 도전을 견제해야만 했다. 독일제국에서는 자유주의적 전통이 원래 미약했지만 세기말로 갈수록 그 영향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통일을 위해 자유주의자들과도 마지못해 협력했던 비스마르크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 그들과 결별했다. 1879년 이후 독일의 중산층 자유주의자들은 권위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의 광기 속에서 숨죽여 지내야 했다.
세기말 유럽에서 자유주의가 전반적으로 후퇴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회주의는 이 시기에 부활과 성장을 기록했다. 영국의 경우, 1830년대 오웬주의자들의 활약 이후 잠복기에 들어갔던 사회주의세력이 1880년대에 고개를 내밀었다. 사회민주연맹의 창립(1880)과 페이비언협회의 결성(1884)은 신조합주의(New Unionism)의 성공으로 이어졌다.11 빠리꼬뮨을 경험했던 프랑스 국민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과 경계심은 높았다. 그러나, 비록 단일단체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1890년대초까지 약 50여명의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 진출했고, 1898년에는 사회주의자들이 획득한 총 득표수가 약 75만 표에 이르렀다. 또한 조레스(J. Jaurès) 같은 훌륭한 지도자의 등장은 세기말 프랑스 사회주의의 입지를 체제 내부에서 더욱 강화했다. 독일의 경우, 1878년 제정된 반사회주의 법률로 시련을 겪던 사회주의자들은 1890년 이 법이 폐지된 지 채 4주도 지나지 않아 국민투표에서 150만 표를 획득하면서 연방하원의 35석을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그 결과 독일사회민주당(SPD)은 1903년 연방 하원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획득했다.12
한편, 부르주아체제의 위기는 부르주아적 가치관에 대한 염증을 동반했다. 영국의 경우, 산업혁명이 약속한 물질적 향상과 진보주의적 낙관주의에 대한 환멸이 세기말에 움텄다. 변화와 혁신, 새로운 것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던 경향에서 탈피해, 이제는 그것들과 반대되는 가치관인 지속과 보존, 오래된 것 등을 영국적인 삶의 진정한 핵심으로 추구하는 움직임이 태동한 것이다.13 산업혁명과 모더니즘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푸르고 푸른 고향의 잔디’에 대한 강렬한 향수는 ‘옛 영국’(Old England) 찾기운동으로 나타났다. 도회지가 부유한 영국의 표상이었다면, 농촌과 전원은 평온과 안정의 요람으로서 ‘즐거운 영국’(Merrie England)의 모델이었다. 시인 키플링(R. Kipling) 같은 식민주의자는 영국이 식민지개척에 열중한 것은 국내에서 잃어버린 시골을 해외에서 되찾기 위한 열정 때문이라고 설명할 정도로,14 당시 영국인들의 반산업적이며 반도회지적인 갈증은 강했다.
같은 맥락에서,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도시의 진정한 정체성을 중세적 기원에서 찾았다. 얼마나 근대화·산업화되어 살기 편한 도시가 되었는가의 기준이 아니라, 얼마나 중세적이며 전원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도시의 가치를 평가했다. 1889년 11권의 책으로 출간된 ‘역사의 도시들’(Historic Towns)이라는 씨리즈에 대한 독자들의 높은 호응도 이런 경향의 반영이었다. 아울러 19세기 후반 고딕양식의 복고적 유행도 모더니즘에 대한 세기말적 반발로 읽을 수 있다. 복고풍 건축물들이 풍기는 소박하고 전원적이며 아늑한 느낌을 당대 영국인들은 그리워한 것이다. 오래된 건축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보존주의운동으로 연결되는데, 보존주의자들이 되살리려고 한 것은 과거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스타일 자체라기보다는 사라진 시대의 정취와 정신이었다.15
노동과 근검절약 같은 부르주아적 가치관에 대한 세기말 유럽인들의 반발은 집시와 집시문화에 대한 낭만적인 관심으로도 표출되었다. 산업혁명이 이룩한 것은 ‘벽돌과 회반죽의 문명’(a brick-and-mortar civilization)16에 불과하다는 회한은 모든 문명적 이기(利器)를 거부하는 집시들의 생활양식에 대한 호기심과 부러움을 낳았다. “물질적인 향상과 아주 거짓된 세련미의 시대에 (…) 사람들이 부러워해 마지않는 물질문명의 안락함을 철학적인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집시들은 “자연과 가깝게 접촉하면서 단순한 삶을 영위”하는 집단으로 묘사되었다.17 방랑과 게으름, 성적 자유로움 등으로 상징되는 집시문화는 근면과 노동, 절제와 도덕적 엄숙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세기말 부르주아적 가치관에 대한 건강한 대안처럼 보였다. 집시들은 더이상 사회적 부랑자가 아니라 ‘고귀한 야만인’으로 승격된 것이다. 심지어는 신선한 공기와 시골의 정취에 굶주린 영국신사들이 돈을 주고 대상(隊商)을 고용해서 집시처럼 떠도는 휴가형태가 1880〜90년대에 유행했다.18 1875년 이후 왕성해진 집시문화에 대한 본격적이며 학문적인 연구는 1888년 영국에서 집시구비(口碑)학회의 창설로 결집되었다.
산업혁명의 열매인 물질적 향상과 도시화 등에 대한 당대인들의 거북스러움은 영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경우, 부르주아 가치관에 대한 반발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미학적 운동으로 꽃피었다. 산업화와 근대화의 기둥이었던 경험적 실증주의와 과학적인 사물관찰을 거부하고 실체를 생성·유동성·불확정성으로 파악하는 새로운 시각이 세기말에 ‘현대적 예술’의 탄생을 선언했다.19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물의 본질은 때로는 언어적 상징성으로, 때로는 빛의 반사적 인상으로, 때로는 무의식 세계의 투영을 통해 더 잘 드러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상징주의·인상파·초현실주의 등의 예술적 유파가 형성되었다. 부르주아지의 획일성과 통속적인 딜레땅뜨에 맞서 첨단을 앞장서서 실험적으로 추구하는 예술적 ‘아방가르드 운동’이 세기말 빠리를 예술과 보헤미안의 수도로 만들었던 것이다.
독일제국의 경우, 외양적인 평온함과 달리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욕구불만이 팽배했다. 통일된 조국의 힘과 영광에 대한 독일국민들의 자부심은 천박한 세속주의에 침식당하는 제국의 문화에 대한 환멸감으로 상쇄되었다. 영국적인 산업주의와 프랑스적인 실증주의에 눌려 독일의 고귀한 정신유산이 질식당하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진정한 독일적 가치관의 계승자라고 자부하던 융커계층과 중산층(Mittelstand)은 자유주의와 대중정치의 영향력으로 촉진된 평균화된 속물주의에 특히 분노했다. 그 결과 도시화와 물질주의 및 실용적인 ‘문명’을 단호히 배척하고, 추상적이고 비실용적인 ‘문화’에 집착하는 ‘문화적 염세주의’가 1890년대를 전후한 독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20 독일의 지식인과 부르주아지는 제국의 권위주의적 정치에 맞서는 대신, 문화적인 수양 쌓기에 병적으로 집착한 것이다.
‘민속적 민족주의’(völkischer Nationalismus)는 문화적 염세주의가 정치운동과 손잡고 빚어낸 괴물이었다. 언어와 혈통의 순수성에의 집착, 외국인과 외국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 진보와 모더니즘에 대한 비이성적인 반감, 시골생활의 이상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변종 민족주의가 세기말 독일에서 고개를 내민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농부와 농촌을 “민족의 생식세포”로 추앙하는 “피와 토지의 이데올로기”로 변신할 위험을 민속적 민족주의는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21 세기말 독일제국이 경험한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불협화음은 산업화와 부르주아 가치관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의 이데올로기’(Ideology of Resentment)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민속적 민족주의의 출현은 동시에 독일제국이 걸어갈 ‘특수한 길’(Sonderweg)22과 그 종착역인 나찌주의의 출현을 예고하는 리허설이기도 했다.
세기말 유럽에서 부르주아 가치관에 대한 혐오와 저항은 사상사적으로도 폭발하였다. 당시의 이런 시대정신을 가장 예민하게 대변한 인물이 니체(F. Nietzsche)와 프로이트(S. Freud)였다. ‘신의 사망’을 선언한 니체가 바란 것은 기독교에 대한 세속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신의 존재가 상징했던 객관적 가치기준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신이라는 보편적이며 외부에서 주어진 가치관의 종말은 계몽주의에 의존해 발전해온 현상유지적인 부르주아지 문명의 종말이나 다름없었다. 신의 부재에 따른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니체는 물질적 안락함과 표준적인 도덕기준에 안주하는 ‘교양속물들’을 거부했다. 그 대신, 그는 대지와 육체의 본능에 충실하며 세상을 ‘위험하게 사는’ 주체적인 새로운 인간형의 도래를 갈구했다.
니체가 가치관의 전도(顚倒)를 역설했다면,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부르주아적 인간 개념에 도전했다. ‘정신분석’이란 새 용어와 분야를 1896년에 개척한 그는 19세기와 20세기가 갈리는 접점인 1900년에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을 발표했다. 이 저서에서 그는 현실세계에서 금지되고 억압되어 의식의 수면 밑에 잠재해 있던 소망들을 표현하는 꿈이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王道)’임을 증명했다. 성적 충동과 공격본능같이 무의식적인 리비도(libido)도 인간성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임을 보여줌으로써, 프로이트는 부르주아지의 도덕적 가식과 성적인 엄숙주의를 야유했다. 그때까지 감추어야 할 저급한 욕망으로 취급되던 것들을 인간의 본질로 당당히 편입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와 인간은 원숭이의 후손에 불과하다는 다윈의 뒤를 이어, 인간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세번째의 혁명적인 충격”을 인류에게 안겨준 것이다.23
‘좋은 시절’로서의 세기말
19세기말 유럽을 지칭하는 또다른 단어가 ‘좋은 시절’(la belle époque)이다. ‘세기말’과 ‘데까당스’란 용어가 어둡고 칙칙한 무채색으로 당시 유럽을 스케치했다면, ‘좋은 시절’은 밝고 활기에 넘치는 무지개 빛깔로 세기말 유럽을 채색했다. 프랑스─프로이쎈 전쟁이 끝난 1871년에서 1차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 사이의 40여년은 ‘유럽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기간’으로 꼽힌다. 특히 1880〜90년대에 성장한 세대는 지난 100년 동안의 혁명·반란 등을 직접 목도하지 않고 곱게 자라난 행운의 세대였다. ‘좋은 시절’은 또한 더 많은 수의 유럽 남성들이 참정권 확대를 통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유럽에서 대중정치의 서막을 여는 시기이기도 했다.
‘좋은 시절’에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변화들 중 하나는 이전에는 일부 계층에만 한정되었던 근대화·산업화의 혜택을 이제는 좀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 구호의 하나인 ‘평등의 공화국’이 세기말에 이르러 바야흐로 성취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아름다운 변화들 중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레저활동의 대중화였다. 상류층의 특권으로 제한되었던 등산·여행·골프·자전거타기 등이 ‘신사회계층’이라 불리는 중류층과 ‘노동귀족’들에게도 전파되었다. 그 결과 더 많은 생산을 위한 재충전으로서의 휴식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순전히 재미 자체를 목적으로 즐기는 이른바 ‘레저계층’24이 세기말 유럽에 나타났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노는 것도 일상적 삶의 중요한 일부라는 생각이 당당히 자리잡은 것이다.
세기말을 풍미한 레저활동 중에서도 으뜸은 여행이었다. 세기말은 흔히 인류역사상 “호기심과 유람여행의 전성기”로 기록된다.25 철도여행의 보급으로 이전에는 100시간 걸리던 빠리에서 리용까지의 여행이 10시간으로 단축되었다. 덕분에 이전에는 종교적 순례나 질병 치료 같은 피치 못할 필요에 의해서만 행해지던 여행이 이제는 특별한 목적 없이 무작정 떠나는 것으로 개념이 바뀌었다. 프랑스의 경우 특히 여름 바캉스가 유행병처럼 번져, 한 일간지는 “경제적 이유로 빠리를 떠날 수 없는 사람만이 빠리에 머문다”고 선언할 정도였다.26 관광객이 증가함에 따라 2만여명의 회원을 가진 프랑스여행클럽이 1895년에 창립되었다.
여가활동을 중시하는 세기말적 분위기 속에서 ‘게으름의 권리’가 당대인들의 최대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이전에는 물질적 향상과 인류문명의 진보, 도덕적 해방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간주되던 노동이 세기말에 이르러서는 과로·탈진감·안전사고 등을 유발하는 원흉으로 지목된 것이다.27 불과 50년 전인 1848년 혁명의 주요 구호 중 하나가 일할 권리의 보장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더 짧은 노동시간, 작업장 안팎에서의 더 좋은 조건 등이 세기말 노동운동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근대화와 산업화에 역행하는 최대의 적으로 간주된 게으름에 대한 재평가는 분명히 세기말 유럽이 목도한 진기한 경험의 하나였다. 이를 반영하듯, 1880년 빠리에서 『게으름의 권리』(Right to Idleness), 1894년 『8시간 노동』(Eight Hours for Work)이라는 책이 유럽에서 출판되어 당대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세기말의 왕성한 관광욕구와 여흥의 추구는 새로운 고용관계를 촉진했다. 몇몇 사업체들은 피고용인들에게 무급휴가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극히 일부지만 봉 마셰(Bon Marché) 같은 회사는 유급휴가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휴가는 ‘신나는 놀이’가 아니라 ‘끔직한 실업’을 의미했다.28 19세기 후반까지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자들은 목구멍에 풀칠을 하기 위해 하루 14〜15시간의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루 10시간 노동제는 1900년을 전후하여 도입되었고, (프랑스의 경우) 1906년에야 1주일에 하루의 휴식을 정한 법률이 겨우 통과되었으며, 1919년에 가서야 8시간 노동제가 채택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레저와 ‘게으름의 권리’가 진정한 공민권으로 발전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예외적인 특권에 속했던 휴가가 세기말을 기점으로 차츰 더 많은 이들에게 확대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세기말 유럽을 ‘좋은 시절’로 만든 또다른 요인은 자전거의 출현이었다. 이 시기 자전거는 진보와 기계문명의 대중적 상징으로 유럽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1860〜70년대만 하더라도 소유주가 직접세를 내야 했을 만큼 부자들만의 전유물이던 자전거는 기술향상에 힘입어 세기말 무렵에는 대부분의 중산층은 물론 일부 노동계층도 즐길 수 있는 레저기구로 각광받았다. 이전에는 승마를 통해 특권층만 만끽한 모험과 스피드의 쾌락을 보통사람에게도 제공해준 자전거는 신분적 차별을 뛰어넘는 해방감 그 자체였다. 자전거는 특히 여성들에게 또다른 종류의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육체를 옥죄는 코르쎗을 벗어던지고 피임기술의 대중화로 원치 않는 임신의 공포로부터도 자유로워진 세기말 유럽여성들은 자전거의 출현을 환영했다. 자전거는 이전까지 남성만이 독점하던 육체의 유연함과 균형감은 물론 공간의 지배를 통한 정복감과 독립심을 여성에게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1896년 여권주의자들의 모임에서 “평등주의적이며 (성적) 차이를 없애주는 자전거”를 위해 건배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29 자전거에 대한 세기말의 열풍은 유명한 ‘뚜르 드 프랑스’ 경주를 1903년에 출범시키면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자전거경기만이 세기말에 유행한 것은 아니었다. 축구·등산·골프·잔디테니스 등 여러 운동들이 주로 영국에서 발전하여 세기말 전후로 유럽대륙에 보급되었다. 1875년 이후 영국 대부분의 산업도시에 축구클럽이 결성되어 특히 노동자계층을 단결시키고 그들의 여가활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독일에서는 특히 체조가 정부에 의해 장려되었다.
그러면 19세기 막바지 유럽에서 스포츠에 대한 당대인들의 관심이 유별나고 일부 나라에서는 이를 장려한 까닭이 무엇일까? 물질적 이익과 별 관련이 없는 운동 자체에 몰두한 것은, 산업사회가 조장하는 유용성과 안락함에 안주해 나약하고 나태해진 육체와 정신을 되돌아보는 세기말적 경계심의 발로였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배경하에 프랑스의 꾸베르땡(Pierre de Coubertin) 백작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구성하여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을 부활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스포츠를 통해 자립적이며 도덕적인 인간형을 양성함으로써 세기말 유럽을 지배하던 ‘도구적 근대성’을 견제하려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의도였는지도 모른다.30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운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아마추어리즘과 스포츠맨십에 대한 각별한 강조가 심미주의 및 예술지상주의운동과 함께 세기말에 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좋은 시절’의 날줄과 씨줄을 형성한 레저생활과 스포츠의 대중화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독특한 현상을 잉태했다. 첫째, 산업화로 인한 대량생산에 힘입어 계층의 차이를 뛰어넘는 ‘물질적 소비와 취미생활의 민주화’가 대체로 달성됨에 따라 문화행위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31 휴양지에서 주말 보내기, 자전거 유람 등이 보편적인 여가활동으로 행해지자, 이전의 신분사회가 제공해주던 ‘사회적 체면’에 여전히 향수를 느낀 사람들은 자신을 타인과 차별화하는 수단으로 ‘문화’에 더욱 의존했다. “문화적 활동이 사회적 진급을 위한 통로나 휘장(徽章)”의 효용을 가지기 때문에 세기말 유럽에서 ‘문화숭배’ 현상이 가속화된 것이다.32 중·상층들이 느끼는 문화적 허기를 채워주기 위해 독일에서는 1870〜96년에 극장 숫자가 200개에서 600개로 3배나 증가했다. 연주회와 오페라 관람, 극장과 박물관 등을 통해 물질적 평균화만으로는 좁힐 수 없는 ‘문화적 거리 두기’를 세기말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은 모색했던 것이다.
‘좋은 시절’이 생산한 두번째 부산물은 ‘과시적인 소비’의 성행이었다. 순전히 물질적 부와 사회적 신분의 과시를 목적으로 하는,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소비패턴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 형태가 바로 비정상적인 골프 붐이었다. “사회적·경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아웃싸이더들을 제외하고자 고안된 클럽의 회원들이 광활하고 비싸게 건설·유지되는 부동산의 한 자락에서 게임하는” 골프의 매력은 세기말 ‘신흥부자’들을 “갑작스런 계시”처럼 사로잡았다.33 자신들의 생활을 모방하며 건방지게 ‘기어오르는’ 중하류층들에게 그들의 한계를 가르쳐주는 과시적인 운동으로서의 골프의 진가를 신흥부자들은 발견한 것이다. 그 결과 세기말 유럽에서는 골프장이 경쟁적으로 건설되었다. 영국 요크셔의 경우, 1889년 이전에는 2개에 불과하던 골프장이 1890〜95년에 무려 29개로 증가했다.
다른 한편, 온통 핑크빛으로 채색된 ‘좋은 시절’이 과장된 측면도 다분히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1차대전을 통해 전례 없는 문명의 파괴력과 야만성을 경험한 유럽인들은 세기말을 전후로 한 수십년의 기간을 낭만적으로 추억해서 ‘좋은 시절’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좋은 시절은 실재했던 현실이라기보다는 전쟁의 상처와 상실감에 낙담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난 유럽인들이 소망적으로 그려낸 가상현실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세기말 유럽에서 일단의 부르주아지와 중하류층들이 레저와 여행을 실제로 즐겼다 해도, 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과도한 노동과 열악한 주거환경의 희생자였다. 소유주가 직접세를 내야 할 만큼 사치품이던 자전거의 가격은 1893년에도 공장노동자의 1655시간 노동임금에 맞먹었고, 자동차의 새 타이어 가격은 1500프랑 이상이었다. 19세기말의 ‘신나는 신세계’로 인도해주던 자전거와 자동차는 많은 사람들로서는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하던 애물단지였던 것이다.
‘실업’(unemployment)이라는 용어가 일자리의 상실 또는 직장에서의 쫓겨남이라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 1880년대부터였음34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본격적인 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주기적인 경제적 불황에 따른 대규모의 실업사태가 세기말 무렵을 전후하여 가속화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기말은 많은 당대인들에게 결코 좋은 시절이 아니었다. 오히려 생산자의 권익에 못 미치는 소비생활과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여전히 시달려야만 했던 ‘나쁜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참정권의 획득으로 법적으로는 좁혀진 신분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심화된 경제적 격차와 문화적 차별화 때문에 중하류층들은 심각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제비가 한 마리 날아왔다고 세상 전체에서 봄의 축제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다.
3. ‘세기말’ 유럽과 나: 새로운 세기를 위하여
우리는 앞에서 19세기말 유럽이 연주했던 달콤하고도 우울한 이중변주곡을 들어보았다.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체제와 가치관이 위협받던 우울하고 데까당스한 시기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향상과 레저활동으로 대표되던 좋은 시절이었다. 단조와 장조, 느린 블루스와 빠른 깡깡(cancan)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의 계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일부 신흥부자들만이 만끽한 그들만의 축제였으며 천박한 문화숭배와 과시적 소비로 얼룩진, 반쪽의 깨어진 거울이었다.
이런 세기말 유럽의 모습이 너무 일방적이고 도식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영국·프랑스·독일제국에 한정해 스케치한 그림이 19세기말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풍경화가 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짜르 니꼴라이 2세 치하의 러시아인들은 19세기말에도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사이의 갈등을 겪기는커녕 절대주의적 전제정치의 사슬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1861년의 공식적인 농노제 폐지에도 불구하고 1900년경 러시아 전체 인구의 3/4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실질적으로는 봉건적인 멍에 아래 신음해야만 했다. 또한 높은 재산권의 제한 때문에 모스끄바와 쌍뜨 뻬쩨르부르끄 같은 대도시에서조차 참정권을 가진 시민들은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35 두마(Duma)와 같은 형식적인 의회나마 러시아인들이 가지게 된 것도 1905년 혁명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에 관한 한, ‘부르주아 체제와 가치관의 위기’와 ‘좋은 시절’이라는 두 개의 명제로 관찰해본 세기말은 허울좋은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이다.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적인 구분 틀에 딱 부합하지 않는 현상들은 영국·프랑스·독일제국 내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세기말 유럽에서 선보인 대중언론매체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인쇄된 대중매체는 19세기 중반부터 선보였지만, 그것의 막강한 영향력은 세기말에야 과시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1863년에 창간된 『작은 신문』(Petit Journal)은 다른 일간지의 1/2이나 1/4에 불과한 가격으로 사람들을 유혹했다. 대중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사를 발굴하고, 컬러로 제작된 일요일판 부록을 발행함으로써, 1881년에는 80만명, 1894년에는 1백만명의 독자를 확보했다. 영국의 경우, 전국지와 지방지의 긴밀한 네트워크 덕분에 1870〜80년대에는 즉흥적이며 전국적인 규모의 정치토론이 가능했다. “정치인의 연설은 그 다음날이면 모든 중산층 가정의 아침 식탁에 올랐다”는 표현은 과장된 것이라고 해도, 대중매체를 이용해서 정치인들이 펼친 공개적 토론의 한마당인 ‘정강발표’(platform)는 후기 빅토리아 정치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잡았다.36
저렴한 대중신문의 등장과 보급은 중요한 변화를 동반했다. 이제는 의회를 대신해서 언론이 대중들의 여론 형성과 정보 및 의견 교환의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담당했다. 다수의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독자층에 기반을 둔 언론은 권력의 감시자 역할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취향과 세계관 형성에도 무시 못할 영향력을 행사했다. 입법부·행정부·사법부에 이은 ‘제4권력기관’으로서의 언론이 세기말 유럽에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황색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현상도 이 무렵에 고개를 내밀었다. 더 많은 독자의 확보를 위한 신문사들의 경쟁심은 때로는 살인이나 성적 스캔들 같은 비정상적이며 흥미 위주의 사건 취재를 부추겼다. 독자의 감성과 말초신경에 호소하여 판매부수를 올리려는 언론의 상술은 여론을 등에 업은 ‘다수의 횡포’를 행사하기도 했다. 언론의 이런 이중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드레퓌스사건이었다. “〔에밀 졸라가 군부의 권위주의에 의해 희생된 드레퓌스의 무죄를 변호한 선언문을 게재한〕 『여명』(L’Aurore)이 없었다면 드레퓌스는 감옥에서 석방되지 못했을 테지만, 〔드레퓌스가 독일에 조국의 군사기밀을 팔아넘긴 배반자라는 근거 없는 기사를 최초로 게재한〕 『자유발언』(La Libre Parole)이 없었다면 그는 애초부터 감옥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37은 19세기말을 전후해 급성장한 대중언론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명쾌하게 꼬집은 것이다.
그렇다면 19세기말 유럽의 야누스적 모습이 21세기초 나의 고단한 일상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객관적인 사실탐구의 허구성이 논의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는 나에게 세기말 유럽은 감히 어떤 역사적 교훈을 전달하려고 하는가? 세기말 유럽의 경험들이 전해주는 역사적 의미를 나는 어떻게 독자들과 함께 곱씹어볼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세기말 유럽을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다간 니체의 흉내를 내면서 이 글을 맺으려 한다. 어쩌면 그는 생애의 마지막 10여년간을 정신병원에서 허비한 것이 아니라, 19세기말의 모순과 어지러움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침묵 속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견디다가 정확히 1900년에 삶을 마감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예언한 대로 ‘죽어서 다시 태어난’ 니체야말로 19세기말과 20세기말을 되새기면서 21세기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건너야 할 다리이기도 하다.
다시 산에서 내려온 짜라투스트라 가라사대, “역사는 때로는 변화하고 때로는 지속되며 마침내는 반복되니, 이는 모두 개인이 바라보기 나름이니라.” 그러면 과연 어떤 변화, 지속, 반복적 현상을 세기말 유럽과 오늘 우리 현실의 틈새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를 고찰해보고 그 역사적인 의의를 아울러 전망해보자.
변화. 자유주의가 쇠퇴하고 사회주의가 합법적으로 팽창하던 19세기말 유럽과 비교하면, 동구권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역사의 종말’이 선언된 20세기말의 현상을 나는 ‘변화’라고 부른다. 19세기말의 사회주의를 20세기말의 사회주의와 구별짓는 가장 현저한 차이는 구원에 대한 각기 다른 태도이다. 전자가 인간관계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메시아적이며 유토피아적인 구원의 가능성을 신봉했다면, 후자는 계몽주의적 이성이 성숙한 결과로서의 점진적이며 부분적인 사회적 개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38 무너진 사회주의의 잿더미 속에서 이전 세기와는 다른 종류의 사회주의가 21세기에는 부활할 수 있을까? 새 세기의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종말을 증언해야만 하는 체제의 이데올로기가 더이상 아닐 수도 있다. 그 대신 자유주의의 경쟁원리와 이기주의, 자본주의의 자연파괴와 황금만능주의를 견제·비판하는 도덕적인 외침이 될 것이다. 공동체적 삶의 고귀함을 강조하는 21세기의 사회주의는 ‘유럽을 어슬렁거리던 유령’ 신세였던 19세기의 사회주의와 독재와 폐쇄성으로 경직되었던 20세기의 쏘비에뜨 사회주의와는 차별화되어야 한다. ‘내일의 사회주의’는 인간관계의 연대감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생태주의에서 그 존재이유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39
지속. 19세기말에 제4의 권력기관으로 성장한 언론매체의 영향력이 20세기말을 거쳐 21세기의 벽두까지 이어지는 것을 나는 ‘지속’이라고 부른다. 비판적 여론 형성의 광장이면서 동시에 황색저널리즘을 조장했던 대중매체가 인터넷과 디지털통신이라는 ‘제5의 권력기관’으로 계승되고 있다. 세기말의 대중언론과 마찬가지로 대중전자매체는 어떤 순기능과 역기능을 21세기에 담당할 것인가. 시공간의 제한을 초월해 쌍방향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인터넷은 전세계의 네티즌들이 단결해서 자신들의 의견을 신속히 전달하도록 도와준다. 인종과 국경의 인위적 장막을 허물고 고유의 전자주소로 연결된 새로운 형태의 압력단체가 인터넷에 의해 등장한 것이다. 또한 즉각적인 여론조사를 가능케 하는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이 옛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행해진 직접민주주의의 부활을 가져올 것이라는 성급한 기대감도 있다. 개인은 전자우편을 이용해 특정 이슈에 대한 자신의 취향과 선호도를 관련 정치인과 사회단체에 직접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제5의 권력기관’이 가지는 역기능에 대한 경계심을 늦출 수는 없다. 나의 침실과 사무실은 물론 골목마다 침투한 인터넷의 거미줄은 익명의 싸이버테러와 음란한 싸이버]스를 조장한다. 사생활 침해와 전자식 황색저널리즘이라는 부정적인 부산물이 생성된 것이다. 또한 내가 밤새 헤매고 다닌 인터넷 정보바다의 항로를 꼼꼼히 추적해낼 수 있는 중앙의 써버컴퓨터에 의해 나의 안팎이 샅샅이 노출될 위험이 있다. 푸꼬(M. Foucault)가 염려한 것처럼,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일망(一望) 감시시설’(panopticon)은 나의 반항적인 행동과 불손한 생각까지도 철저히 감시하여 처벌할 수 있다.40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경고한 ‘큰 형님’(Big Brother)이 이제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결합된 모습으로 위장하여 내 책상 앞에 능청스럽게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반복. 19세기말을 전후로 유럽을 휩쓴 제국주의의 광풍이 20세기말을 전후로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는 것을 나는 ‘반복’이라고 부른다. 19세기말의 ‘신제국주의’가 유럽중심적이고 무력을 동반한 군함외교(gun-boat diplomacy)에 기반을 두었다면, 20세기말의 ‘새롭고 새로운 제국주의’는 미국중심의 자유무역형 제국주의(free-trade imperialism)를 표방한다. 이런 외양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1백년의 주기를 두고 재등장한 제국주의는 여전히 서양인의 비서양인에 대한 과학적·기술적·문화적 우월감이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에서 공통적으로 파생한 결과이다. ‘동양적 가치관’에 대한 서양인들의 경외감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체제에 굴복한 ‘아시아의 용들’에 대한 연민과 비웃음으로 바뀌고 있다. 정보독점과 미국식 영어 사용의 확장을 무기로 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는 전세계를 무대로 뻗어나가고 있다. 이처럼 눈에 잘 띄지 않고 교묘한 21세기형 제국주의를 견제할 어떤 세력이 21세기 언제쯤에 출현할 것인가.
19세기말 유럽을 사로잡은 레저·스포츠의 열풍과 문화숭배가 20세기말 한국에서 되살아나는 현상을 나는 ‘격세(隔世)적 반복’이라고 부른다. 콘도에서 주말 보내기, 자연을 오염시키는 골프장 건설 붐, 문화쎈터에서 사교춤 배우기 등 1백년 전 유럽에서 유행한 일들이 이땅에서 지금 되풀이되고 있다. 19세기말 유럽의 ‘좋은 시절’이 대부분의 노동자계층을 제외한 부르주아지의 배타적인 축제였다면, 20세기말 한국에서 일찍 터뜨린 샴페인은 천민자본주의가 부추긴 벼락부자들의 놀음이 혹시 아닐까. 서울올림픽 이후 우후죽순처럼 개최된 호화로운 엑스포와 문화이벤트는 이땅의 ‘교양속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무력감에 대한 보상심리로 만들어낸 도피처일 수도 있다. 마치 19세기말 유럽의 지식인과 부르주아지가 몰두한 ‘문화적 염세주의’가 그랬듯이. 빛좋은 개살구 같은 이런 행사들은 신흥중진국으로 겨우 발돋움한 한국이 개발도상국들에 보내는 근거 없는 우월감과 선진국들에 품은 질낮은 열등감의 또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마치 1백년 전 유럽의 부르주아지가 상류층의 귀족적 삶을 모방하며 노동자들의 일상을 경멸했듯이. 가진 것이라고는 돈과 시간밖에 없다는 ‘참을 수 없는 존재’들의 향연은 언제쯤 이땅에서 사라질 것인가. 건강한 가치관과 물질적인 청빈함으로 무장한 진정한 시민계급의 성장이야말로 새로운 세기에 우리가 반드시 성취해야 할 숙제이다.
시장에서의 그의 가르침을 외면한 군중들을 뒤로 하고 짜라투스트라는 다시 깊은 산속으로 향했다. 석양 무렵 그의 긴 그림자는 절망과 축복의 빛깔로 번쩍였다. “저녁을 향해 가는 길은 새로운 아침을 향해 가는 길”41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기말은 또다른 삶의 새로운 시작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세기말은 “도달해야 할 시간의 종착역이 아니라 우리가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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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하순, 「21세기는 어느 해에 시작하는가」, 『역사학보』 161(1999); 주명철, 「새천년준비위원장께」, 『교수신문』 1999.12.27.↩
- E. Weber, Apocalypses: Prophesies, Cults, and Millennial Beliefs through the Ages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99), 12〜13면↩
- 1793년 혁명정부는 반기독교운동의 일환으로 1주일을 7일이 아닌 10일로 하는 혁명책력을 발표했다. 혁명책력에서 세기적 산술법의 역사적 기원을 찾는 프랑스 역사가는 Daniel Milo이다.↩
- 같은 책, 14〜16면.↩
- 움베르또 에꼬 외, 문지영·박채환 옮김, 『시간의 종말: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네 가지 논의』(끌리오 1999), 248면.↩
- 예를 들면, M. Berman,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The Experience of Modernity (New York: Penguin Books 1982); R. Shattuck, The Banquet Years: The Origins of the Avant-Garde in France, 1885 to World War I (New York: Vintage Books 1955) 등을 보라. 주로 예술가들이 책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미 지성사의 고전이 된 C.E. Schorske의 Fin-de-Siècle Vienna (New York: Vintage Books 1980)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이에 대해서는 니꼴라스 할라즈, 황의방 옮김, 『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사건과 에밀 졸라』(한길사 1998) 참조↩
- E.J. Hobsbawm, The Age of Empire, 1875〜1914 (London: Weidenfeld & Nicolson 1987), 60면. 제국주의의 어원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통치권(imperium)을 행사한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1883년에 사망한 맑스의 저작에서는 이 용어가 등장하지 않았다.↩
- 예를 들면, 아내의 몸을 팔아 삶을 영위하는 남편이 재판정에서 자신을 ‘세기말의 남편’에 불과하다고 항변했다는 기사가 프랑스의 한 일간지(Gazette des Tribunaux, 1892.11.5)에 게재되었다. E. Weber, France Fin de Siècle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86), 9면 참조↩
- 시장 자유의 극대화, 국가 간섭의 최소화, 국가 사이의 경계를 허물자는 글로벌리즘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1980〜90년대의 ‘신자유주의’와 이름은 같지만 정반대되는 개념임에 유의해야 한다. 홉슨(J.A. Hobson)과 그린(T.H. Green)의 이론에 근거한 19세기말 유럽의 ‘신자유주의’가 제3의 길에 가까운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와 유사하다면, 하이에크(F. Hayek) 이론에 뿌리를 두고 레이거노믹스의 근거가 되었던 최근의 ‘신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방임주의의 부활이라고 불러야 더 정확하다. 개념의 혼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 박지향, 『영국사』(까치 1997), 429면↩
- P. Hayes, “France and Germany: Belle Epoque and Kaiserzeit,” P. Hayes, ed., Themes in Modern European History, 1890〜1945 (London: Routledge 1992), 33〜36면.↩
- M. Wiener, English Culture and the Decline of the Industrial Spirit, 1850〜1980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81), 44면.↩
- 같은 책, 56면.↩
- 이런 의도로 최초의 보존주의 압력단체인 고건축보호협회가 사회주의 사상가이며 예술가인 모리스(W. Morris)의 주도로 1877년에 설립되어 20세기까지 이어졌다. 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전기(傳記)로는 E.P. Thompson, William Morris: Romantic to Revolutionary (Stanford: Stanford Univ. Press 1988) 참조↩
- 영국 계관시인 오스틴(A. Austin)의 작품집 The Garden that I Love (1894)에서 나오는 표현↩
- 1875년 런던에서 발행된 『영국집시들의 방언』(The Dialect of the English Gypsies)이란 책의 일부. G. Behlmer, “The Gypsy Problem in Victorian England,” Victorian Studies (1985년 겨울호), 239면에서 재인용.↩
- 같은 글, 237〜38면↩
- Weber, 앞의 책, 148, 153면↩
- F. Stern, The Politics of Cultural Despair: A Study in the Rise of the Germanic Ideology (Berkeley: California Univ. Press 1974), xvi〜xxii면. 독일에서의 ‘문명’(Zivilisation)과 ‘문화’(Kultur) 개념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유희수 옮김, 『문명화과정: 매너의 역사』(신서원 1995), 33〜75면 참조.↩
- M. Hughes, Nationalism and Society: Germany 1800〜1945 (London: Edward Arnold 1988), 143〜44면.↩
- 독일이 처한 ‘특수한 길’의 비역사적인 허구성을 반박한 최근의 대표적인 주장으로는 D. Blackbourn & G. Eley, The Peculiarities of German History: Bourgeois Society and Politics in Nineteenth-Century Germany (Oxford: Oxford Univ. Press 1984) 참조.↩
- 리차드 아피냐네시, 김오성 옮김, 『프로이트: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가』 (이두 1995), 100면.↩
- 이 용어는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T. Veblen의 저서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An Economic Study of Institution (1899)에서 유래했다.↩
- Weber, 앞의 책, 177면.↩
- Fin de Siècle지의 1897년 8월 8일 기사내용 중 일부. 같은 책, 190〜91면에서 재인용.↩
- 같은 책, 241면.↩
- 같은 책, 191면.↩
- 같은 책, 203면.↩
- 같은 책, 230〜31면↩
- 이와 유사한 견해로는 Hobsbawm, 앞의 책, 220〜21면; Blackbourn & Eley, 앞의 책, 214〜16면 참조.↩
- Weber, 앞의 책, 151면.↩
- Hobsbawm, 앞의 책, 183면.↩
- K.O. Morgan, ed., 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Britain (Oxford: Oxford Univ. Press 1986), 486면.↩
- Hayes, “Russia and Austria-Hungary: Empires under Pressure,” Hayes, ed., 앞의 책, 60면.↩
- Morgan, ed., 앞의 책, 498면.↩
- J.D. Bredin, The Affair: The Case of Alfred Dreyfus, tr. J. Mehlman (New York: George Braziller 1986).↩
- M. Jay, Fin-de-Siècle Socialism and Other Essays (New York: Routledge 1988), 11〜13면.↩
- 사회주의의 역사적인 기원과 변천과정 및 전망에 대한 필자의 좀더 구체적인 견해는 졸고 「유토피아 사회주의」, 김영한 엮음, 『서양의 지적 운동 II』(지식산업사 1998), 참조.↩
- 미셸 푸꼬,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감옥의 역사』(나남 1994), 특히 289〜329면 참조. ‘판옵티콘’으로 불리는 전방위 감시체제는 영국의 공리주의자 벤섬이 고안했던 현대적 감옥이다. 이 용어는 권력(감시자)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고 은밀하여 피감시자가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섣불리 저항할 수도 없는 물샐틈없는 권력의 톱니바퀴를 일컫는 말로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 Nietzsche, Thus Spoke Zarathustra: A Book For Everyone and No One, tr. R.J. Hollingdale (New York: Penguin Books 1983), 10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