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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학부모는 말한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하여
박유희 朴兪姬
인간교육실현 학부모연대 운영위원장
1996년부터 3년 동안 어느 중학교 학교운영위원장 일을 맡았던 나는, 그 일에 대한 관심의 연장으로 현재 ‘인간교육실현 학부모연대’(학부모연대)라는 교육시민운동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둘째아이가 D중학교에 입학한 지난 1996년이 되어서야 우리 아이들의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학부모 노릇을 시작한 지 9년째 되던 해의 일이었다.
김영삼정부가 교육개혁의 기치를 내건 지도 1년이 지난 그해, 정부는 전국의 모든 공립 초·중등학교에 의무적으로 학교운영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학교운영의 전반을 민주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장치로 이미 1년 동안의 시범학교 운영을 거친 뒤였는데, 일선학교 교장선생님들은 그때까지도 이 제도의 도입이 막무가내식이라며 거부감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을 것이라는 피해의식이 가장 컸을 것이다.
학부모들은 어떠했는가? 교장을 포함한 교사위원, 학부모위원, 지역위원으로 구성되는 학교운영위원회가 생기면 학부모대표도 학교운영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당당히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동안 학부모가 학교에서 받아온 대우를 생각해보면 무리가 아니었다. 사실 학부모가 학교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기구는 해방 이후 수십년 동안 있어왔다. 그러나 그 본래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학교측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재정적 후원을 할 수 있는 소수의 학부모들에게만 참여의 길이 열려 있었다.
“학교운영위원회 제도는 갑작스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귀중한 실험무대가 학교현장에서 펼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제도를 망치지 않고 잘 키워내는 것이 지금 학부모 노릇을 하는 우리들이 해내야 할 시대적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학부모연대’의 후원회원으로 여러 해 동안 활동하면서 이 제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도입되었는지 알고 있던 나는 학부모들 앞에서 학부모위원 선거에 입후보한 소감을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이 해보라’는 뜻이었는지, 나는 학부모위원에 당선되었고 위원장까지 맡게 되었다. 즉시 실천한 일이 학부모위원 다섯명이 직접 학교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도서실’이라는 팻말이 달린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도서실임을 보여주는 기물은 하나도 없고 방 한가운데 흰 커튼만 둘러쳐져 있었다. 커튼 안에는 두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고, 안내하던 선생님이 그곳은 여교사 휴게실로 쓰인다고 했다. 교실 다른 한쪽의 어설픈 병풍 뒤에는 몇명의 여학생이 예절교육 시간이라며 한복 차림으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어서 들여다본 가사실습실. 아무리 10여년 전 개교 당시에 만들어진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값싸고 질낮은 물건으로 간신히 시늉만 낸 시설임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꺼멓게 썩어 바스러져가는 싱크대 몸체하며 우글우글 모여 있다가 흩어져 도망가던 바퀴벌레들을 직접 보고 나니, 실습한 음식에는 입도 대기 싫다는 아이들의 불평이 이해가 되었다. 거칠거칠한 콘크리트 바닥을 그대로 드러낸 무용실에선 아이들이 어떤 부상을 입을지 뻔했고, 정수기는 교무실에만 딱 한 대 놓여 있었다. 그외에도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형편없는 학교시설에 어이가 없었다. 그것이 21세기로 넘어가는 우리의 교육현장이었다. 학교는 그 모양인데도 전임 교장은 예산을 남겨 교육청에 반납하는 선행을 하고 더 높은 자리로 영전했다고 신문에까지 났었다.
다섯명의 학부모위원들은 충격을 받았다. 모두 학교를 처음 둘러보았으며, 이러한 학교의 실상을 전체 학부모들이 다함께 알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신임 교장선생님께 소감을 말하고 학부모총회 때 ‘학교 돌아보기’ 시간을 갖도록 해주기를 청했다. 총회에는 개교 이래 처음으로 수백명의 학부모가 참석했고, 학교의 모든 시설이 학부모에게 공개되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우리가 무엇을 도와야 하는가. 무엇이라도 해서 학교를 바꿔야 한다. 지금 당장.” 학부모들은 학교운영위원회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해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돕겠다는 의지로 충만했다. 학부모위원을 대표로 하는 학부모회는 학부모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가운데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았고, 학교운영위원회는 학부모회 활동을 검토하여 승인하고 학교측은 협조방안을 내놓았다.
학부모들이 학교 가사실습실을 고쳐보려고 바자회를 한다는 소문이 나자, 이를 전해들은 지역의 한 정치인이 교육청을 다그쳤다. “당신들은 뭘 하고 학부모들이 나서는가. 당장 예산을 지원해서 가사실습실을 고쳐주라.”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적지 않은 예산이 지원되어 그해 여름방학 동안에 학교의 가사실습실은 스테인리스로 된 최신형 설비를 갖추고 새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학부모들은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쉬운 일을 왜 그동안은 꿈도 못 꾼 것일까. 학교를 그 지경으로 방치하고 있다가 정치인의 입김으로 행동에 나선 교육청도, 자기 덕에 학교가 좋아진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소문을 내는 정치인도, 고생한 학부모들을 허탈하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교육청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교사들은 교육청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일만 없어도 훨씬 수월할 것이라고 한다. 교육청은 각 단위학교들의 필요를 부지런히 살피고, 주어진 예산을 신속 정확하게 투입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관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교육자치시대에 걸맞은 교육청은 학교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적극 지원해주는 써비스 기능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해야 하는 것이다.
가사실습실을 고치기 위해 눈물겹게 마련한 기금은 고스란히 학부모들 수중에 남게 되었다. 학부모회는 지체 않고 기금사용 문제를 학교운영위원회 안건으로 올렸다. 학생들이 위생적인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각 층마다 정수기를 설치하고, 무용실 바닥에 푹신한 바닥재를 깔고 탁구대를 몇조 들여놓았다. 전 교실에 커튼을 달고, 낡은 스피커는 새것으로 갈고, 양쪽 벽에 선풍기를 설치했다. 방송실에 CD음반을 확보하고, 엉망이던 방송기자재를 교체했다. 음악실에는 제대로 된 오디오기기를 설치했다. 그것만으로도 학교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엄청나게 큰돈이 드는 일도 아니었다. 학부모들이 마련한 기금이 적소에 사용되도록 하고 그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하여 다함께 공유했을 뿐이다. 학부모들은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다음해에는 아이들에게 도서관을 찾아주자는 포부를 품었다. ‘내 아이’에 대한 관심만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는 무관심한 학부모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뚜렷한 목적이 제시되고 그것이 공동의 이익과 선을 추구하는 일이라는 믿음이 생기자 수고를 아끼지 않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여하는 마음이 다 같은 것은 아니었다. 위원 각자가 속해 있는 배경에 따라서 회의에 임하는 태도는 달랐다. 특히 교사위원들은 어느 단체 소속이고 학교에서의 보직이 무엇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임했다. 회의 진행방식이나 용어사용 등 형식적인 문제로 현안을 심의하는 데 오히려 방해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위원장으로서 그것은 대단히 난처한 일이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단위학교의 운영과 관련된 사항을 심의하는 곳이다. 따라서 단위학교의 특성을 잘 살려내기 위해서는 위원들이 학교의 형편과 구성원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1990년도부터 관련을 맺어온 ‘학부모연대’로부터 나는 학교운영위원회 활동을 수행해내는 데 필요한 많은 정보와 조언을 받았다. 내가 선뜻 새로 시작되는 제도에서 위원장직을 맡게 된 것도 이런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해 활동을 한 후, 내가 직접 현장에서 체험한 내용을 많은 분들과 공유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단위학교의 문제뿐만 아니라 교육문제 전반에 관한 관심이 생긴데다가 그것들이 결코 우리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학부모연대’ 회원들과 자주 만나는 것은 물론이고, 교육시민운동에 몸담은 여러 분야의 인사들과 교육현안을 위해 연대하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최근 몇년 동안 교육계의 커다란 변화가 요구되었고, 이로 인해 정치권의 이해와 협조를 받아 풀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이 점점 많아짐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정치적 지위와 역량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교육계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온 ‘교원정년 문제’가 정치적인 협상과정에 있을 때 학부모 단체의 입장을 전달하려고 국회를 방문해 국회의원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교사들의 이익단체에서 보내온 수북이 쌓인 전송용지를 가리키며 ‘저 열화와 같은 민의’를 어떻게 무시하겠느냐는 반응이었다. 주도면밀하게 움직이는 이익단체의 조직적인 대응은 ‘무시 못할 민의’이고, 몇명의 학부모들이 대표라고 찾아와 전달하는 ‘민의’는 실체조차 파악이 안되는 가벼운 일로 보는 것이 정치인들의 시각이었다. 일반 학부모들이 건전한 민주시민운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부모들이 모이면 주로 자녀교육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동네 학원 고르는 문제에서부터 학교 배정문제, 급식문제, 입시제도의 불합리함, 학교폭력, 담임교사 이야기 등. 그러나 대부분의 대화들이 공중에서 떠돌다가 서로 헤어지면 그뿐이다. 학부모들이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내놓는 이야기들 중에는 교육정책의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내용이 많다. 이를 정리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는 한편, 제도가 제 방향을 찾아가도록 감시하는 기능을 시민운동 영역에서 해낼 수 있다. 많은 일반 학부모들이 시민운동에 관심을 갖고 힘을 모아 성숙한 시민의식을 발휘한다면 우리의 교육개혁이 정치와 사회의 개혁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