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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학부모는 말한다

 

학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자

 

배숙자 裵淑子

전북대·원광대 영문과 강사

 

 

봄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을 보면 공연히 마음이 설렌다. 그럴 때면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 흰 손수건을 가슴에 단 코흘리개가 된다. 그때 선생님의 존재는 얼마나 컸던가! 정말 선생님은 화장실에도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년이 높아지면서 그 첫마음의 흰 종이에 우리는 어떤 그림을 그려갔던가. 그리고 전대미문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학부모들이 극심한 세대차이를 실감하게 되는 오늘날의 아이들은 또 어떠할까. 그러나 비록 그들이 지독히 일그러진 그림을 담게 되더라도, 그것이 전적으로 학교의 책임이 아닌 이상, 교사를 믿고 성원하고 싶은 것이 대다수 학부모들의 마음이리라. 그래서 ‘선생님 힘내세요’ 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단지 교사들이 그 신입생들의 첫마음을 헤아려주고, 또한 교사로서 첫발을 내딛을 때의 초발심을 잊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고 싶다.

성심성의가 통하지 않는 인간사회가 있을까? 이른바 ‘n세대’라고 불리는 요즘 아이들이 조금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이며, 가상현실에 집착하고 개성을 중시한다면서 또다른 획일성에 물들어간다 해도, 그들은 로봇이 아니다. 촌지교사·폭력교사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결코 다수는 아니다. 아무리 ‘제 자식 이기주의’가 만연한 것 같아도, 교사들의 진심을 믿고 싶어하는 학부모가 대다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교육주체들이 우리 교육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서로를 신뢰하며,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해나간다면 우리 학교의 장래도 어둡지만은 않다고 본다.

모두들 교육이 무너지고 학교가 ‘붕괴’되었다고 한다. 특히 언론이 호들갑을 떤다. 컴퓨터 연도인식 오류로 일어날 문제나, 새 밀레니엄을 맞아 수많은 사람이 영동지방으로 이동하여 교통대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식의 언론의 호들갑을 한두번 겪었는가. 물론 발생 가능한 일에 사전대비를 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대안 제시가 아닌 조급증이나 선정적 저의가 담긴 수선 피우기는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다.

교육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얘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교육문제만큼 객관적 해답을 구하기 어려운 문제도 없을 것이다. 교육이야말로 사례에 따라 운영의 묘를 살려야 하는 것 아닐까. 어느 영시개론서에 이런 얘기가 있다. 똑같은 길이라도 우마차를 몰고 가는 농부에게는 그런대로 괜찮은 길이지만, 급하게 차를 모는 운전자에게는 이가 부러질 만큼 나쁜 길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도로 사정을 묻고, 그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대답했다고 치자.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 제삼자에게는 잘못된 것일 수 있지만, 그들 각자는 자신의 얘기야말로 경험에서 우러난 정확한 정보라고 확신할 것이다. 너무 극단적인 예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모두 교육에 대해 이런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집사람 목에 병 생긴 것도 교육부장관 때문이야. 그러잖아도 잡무에 시달리는데, 수행평간가 뭔가 때문에 죽을맛이래. 현실적으로 여건도 안 갖춰놓고, 밀어붙이면 된다는 식이야. 그 많은 학생들을 어떻게 일일이 파악하냔 말야.”

“은행 직원 보기가 창피할 정도예요. 20년 넘게 근무한 선생 월급이 겨우 이 정도라니…… 구제금융 탓이니 감수한다고 해도 너무 많이 깎였어요.”

“현장 실정을 너무 몰라요. 체벌은 절대 금지하라니, 수업을 포기하라는 겁니까. 수업시간에 떠든다고 살짝 때려도 학생이 선생을 신고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수업이 되나요. 학생 지도를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아예 포기해야지요.”

새로운 입시제도를 큰 틀로 삼은 교육개혁 방안이 발표되었을 때 주위에서 흔히 듣던 말이다. 현장경험도 없는 사람이 장관이 되었으니 교육개혁이 제대로 될 리 없고, 멀잖아 그도 장관직에서 쫓겨날 것이라고들 했다. 아이들을 학업성적에 따라 줄세우기 하는 현실을 바꿔보겠다는 선의로 해석하는 친구와, 체벌금지를 비롯한 교육부 하달사항의 부당성을 강변하는 현장 교사인 친구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져 모처럼의 자리가 어색하게 파한 적도 있었다. 오히려 기득권자도 아니고 교육관료 출신도 아닌 장관만이 우리의 교육제도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설파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의 논지는 정책의 큰 줄기가 옳다고 인정되면 그 정책을 밀어주어야 하고, 세부적인 잘못은 운영의 묘를 살려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교육부장관은 그때부터 두번이나 바뀌었고, 우리 큰아이는 새로운 입시제도의 첫번째 대상자가 되었다.

교육문제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는 또하나의 어리석음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학부모로서 나는 가정교육 문제를 짚어보고 싶다. 부모의 역할이야말로 교사와 학교에 선행하는 중대한 것이고, 특히 아이의 품성을 기르는 것은 거의 대부분 부모와 가정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그들의 말투를 보면 그 부모의 생활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세살 버릇은 여든까지 가는 것이다. 매를 아끼면 아이를 버린다는 서양의 격언도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미국식 교육은 아이의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 그들의 기를 살려주고, 그러므로 매도 들지 않고, 가급적 야단치는 일도 삼가는 것이라는 오해가 일부 젊은 부모들 사이에 퍼져 있는 것 같다. 옆에서 보기에는 단지 버릇없는 아이인데도, 그 부모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미래의 아인슈타인으로 착각하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본다.

그러나 1년 반의 짧은 체재였지만 내가 본 미국의 자녀교육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은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남에게 피해가 가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을 지키고 있었다. 한 나이 든 한국 유학생의 말인즉, 식당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전부 한국 아이들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유난히 아이를 좋아하여 자녀를 넷이나 둔 어느 목사의 경우, 아이가 약속을 어겼거나 버릇없이 굴면 가차없이 벌을 가하는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을 아이들 뜻대로 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고, 아무리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깨우쳐줘야 한다. 인간에게는 이성과 더불어 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 이성으로써 본능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혜자 중심’의 교육이라는 말은 잘못 선택되었다. 지금까지 소홀히 여겨온 학생의 입장을 고려한다는 의미를 지녔더라도 그것은 어폐가 있는 말이다. 학교가 지식습득의 장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그런 곳이라면 홈스쿨링이나 싸이버학교가 그 역할을 떠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부딪치면서 모순과 화해를 경험하기도 하고, 경쟁하고 협력하는 법을 터득하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법도 배우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학교는, 그것이 지닌 수많은 모순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또 아무리 ‘썰렁한’ 곳이 되더라도 완전히 붕괴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그래서도 안될 것이다.

다시 다짐하지만 올해에는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해보려고 한다. 새해, 새천년을 맞아 우리 가족은 각자의 결심을 적은 후, 그것으로 우리의 타임캡슐을 만들었다. 내년 이맘때 타임캡슐을 개봉하여 반성하기로 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새 천년을 맞으려는 계획은, 거의 5만명이 운집하리라는 언론의 충고를 받아들여(?) 노고단에서 가는 천년의 마지막 해를 보는 것으로 바꾸었지만, 오랜만에 아이들과 눈길을 걸으며 따스한 대화도 나누고, 하산길에 쏟아질 듯한 별들을 보며 마음의 먼지를 털어낼 수 있었다.

다시 또 다짐하건대 올해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댁의 아이들, 공부 잘하죠? 얼마나 좋으세요. 든든하시겠어요. 멀잖아 신문에 인터뷰기사 나는 것 아니에요?” 다른 집 아이와 비교하여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성공이데올로기를 버리고, 더불어 함께 잘사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겠다. 나는 지금도 고등학생 시절 영어선생님이 한 말씀을 기억한다, 비록 선생님의 성함은 잊었지만. 선생님은 ‘사려깊(considerate)’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사려깊은’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셨는지 모르지만, 그 말씀이 나에겐 작지 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교사의 역할과 보람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교사는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학부모는 그것을 북돋워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