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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임재철 林載喆
『필름 컬처』 주간
영화가 만들어내는 상상적 공동체
영화 「고스트 독」
2년 전에 국내에 개봉되었던 「데드 맨」은 짐 자무시(Jim Jarmusch)의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미국 동부 출신의 회계사가 서부를 여행하면서 ‘피로 시를 쓰는’ 시인으로 변모하는 여정을 그린 이 영화는 단박에, 서부영화라는 장르의 신화, 나아가서는 미국문화의 신화의 핵심에 다가가는 작품으로 지극히 도회적이고 그런만큼 다소 경박한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하던 자무시를 재평가하게 했다.
「데드 맨」 이후 닐 영(Neil Young)과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s)의 공연을 담은 라이브 영화 「말의 해」를 만든 자무시는 최근 「고스트 독」이라는 신작을 선보였다. 「데드 맨」에 비하면 이 신작은 확실히 진지함을 결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상업영화에서 이미 익숙한 요소들로 구성된 영화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고스트 독’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흑인 킬러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는 사무라이들의 수신교본(修身敎本)인 『하까꾸레(葉隱れ)』를 낭송하면서 그들처럼 살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는 이딸리아계 갱단의 중간 보스인 루이의 청탁으로 청부살인을 맡아왔다. 고스트 독은 보스의 딸을 건드린 프랭크를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를 제거하지만,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루이의 조직은 고스트 독을 없애려 하자,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공격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확실히 플롯만으로 보자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로 그 결말을 짐작하는 데 별로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무시가 특별한 스타일적인 고안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이 낡은 이야기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장 삐에르 멜빌(Jean-Pierre Melville), 스즈끼 세이준(鈴木淸順) 등의 영화로부터의 인용, 동시대 팝음악의 잦은 사용 등이 우리의 눈길을 끌어모으긴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표면적으로 보자면 90년대에 나온 여러 갱영화 혹은 킬러영화에서 이미 물릴 정도로 많이 접했던 것들이다. 특히 퀀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의 영화들이 이러한 측면에서는 독보적인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우선 최근 자무시의 영화 제목이 죽음에의 집착을 보여준다는 데 먼저 주목해보자. 그는 전작에 문자 그대로 ‘데드 맨’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이번에도 역시 ‘고스트’라는 별로 상서롭지 않은 단어를 쓰고 있다. 영화의 앞부분에서 제일 먼저 인용되는 『하까꾸레』의 항목도 죽음에 관한 부분 즉 “사무라이의 길은 죽음에 있다”는 부분에서 시작된다. 게다가 고스트 독이 살고 있는 옥상을 처음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약간 떨어진 배경에 공동묘지가 보인다. 이쯤되면 거의 죽음에의 집착이 강박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문제는 죽음에 집착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초월적인 계기를 향해 나아가는 것 같지도 않다는 데 있다. 죽음을 향한 어떠한 엄숙성도 여기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관심은 삶·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이의 경계선을 향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쪽이라고도, 아니면 저쪽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 말이다. 고스트란 말이 원래 이승을 떠났으되 저승으로 가지 못한 존재를 가리킨다는 것은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 ‘귀신 같은 상태’에 자무시가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통념적으로 가지는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고스트 독은 자신을 고대 일본의 사무라이로 생각한다. 이것은 물론 삶과 죽음이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한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킬러이면서 동시에 사무라이가 되려면 그는 필연적으로 고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무시가 거의 사용하지 않던 랩 디졸브(lap dissolve, 숏이 바뀔 때 이미지가 중첩되는 것)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랩 디졸브는 ‘존재의 중첩’을 표현하는 데 참으로 적절한 영화적 수사법인 것이다. 이 경계선의 침범은 이 영화의 다른 캐릭터들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이를테면 루이로부터 고스트 독과의 교신이 비둘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21세기 첨단 미디어 시대를 앞두고 어떻게 그런 낡은 수단을 쓰느냐면서 기막혀 하는 갱단 수뇌들의 대화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들 또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옛날 영화나 팝음악을 통해서만 상상력을 발동할 수 있는 인물들임이 드러난다. 게다가 나이가 지긋한 쏘니가 자신은 랩 그룹 퍼블릭 에너미의 플레버 플랩의 팬이라고 내세우는 대목은 폭소를 자아낸다.
주지하다시피 짐 자무시는 씨네필(cinephile) 출신의 감독이다. 그리고 이 씨네필이란 호칭은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 감독들에게 적용가능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더이상 어떠한 특권적인 지위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은 최근 들어서는 ‘창조력의 고갈’과 다름없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확실히 삶의 굴곡을 따라갈 만한 의욕도 지구력도 없으되 그것을 과도한 영화체험으로 커버하려는 경향이 젊은 감독들에게 팽배해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리하여 과거의 영화를 인용한다는 것은 더이상 감독의 재능과는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굳이 말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미디어적인 상황의 반영으로서만 흥미를 끌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자무시가 「고스트 독」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은 씨네필에 있어 중요한 자산인 ‘영화에 대한 기억’이 사실은 존재변환을 위한 장치였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이 ‘퇴행적인 씨네필’이라는 난국을 넘어서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다른 존재가 되기를 열망해왔던가를 상기시키면서 말이다.
경계선의 함몰, 즉 고스트의 침입은 역설을 더이상 역설이 아니게 한다. 고스트 독의 일본문화에 대한 동경은 애니메이션이나 하이테크 상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하까꾸레』 혹은 『라쇼몬(羅生門)』 같은 낡은 책들에 근거한 것이다. 이처럼 존재변환이 현대적인 미디어에 의존하지 않은 채로 이루어진다는 역설적인 상황도 그의 ‘유령성’을 감안하면 결코 역설이 아니다. 오히려 정보량의 과다는 상상력의 발동을 억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지극히 시대착오적인 환경에 사는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장식하기 위해 문화상품을 전용(轉用)할 줄 안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현대적인 자질을 부여받고 있다. 요즘 자주 쓰이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마치 너무 일찍 등장한 ‘오따꾸(お宅)’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것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것은 이른바 ‘정보화사회’라는 것이 함축하는 목적론적 지향의 해체이다. 싸이버스페이스라는 것이 등장하기 전에도 우리는 문화상품을 통해 이미 상상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보화사회가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일종의 단절로 이해되는 한 그것은 또다시 폭력적인 이분법을 낳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