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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상욱 金尙郁
춘천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아동문학, 깊이의 심화와 넓이의 확대
김옥 『학교에 간 개돌이』, 창작과비평사1999
황선미 『나쁜 어린이 표』, 웅진출판 1999
윤기현 『보리타작 하는 날』, 사계절 1999
이상권 『똥이 어디로 갔을까』, 창작과비평사 2000
1. 아동문학이 이른바 ‘뜨고’ 있다. 그동안 오랜 시간을 묻혀 지낸 아동문학이 이제 네 활개를 치며, 이땅의 곳곳을 활보하고 있다. 예전에는 아이들조차 들추어보지 않던 창작동화가 판을 거듭하며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외국의 좋은 동화와 그림책은 그리 큰 시차 없이 곧장 서점의 진열대에서 볼 수 있다. 신문도 고답적인 태도를 버리고 아동도서의 소개에 기꺼이 면을 할애하고, 전통적인 문학출판사들도 너나없이 따로 아동문학작품을 발간하는 일에 팔을 걷어붙였다. 이딸리아의 볼로냐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아동도서전시회의 가장 주요한, 그리고 만만한 고객이 한국의 출판인들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비밀이다. 뿐만 아니다. 아동문학에 관한 출판과 기획에 관련된 공개강좌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실질적인 구매력을 갖춘 부모들도 들썩거리기는 마찬가지다. ‘동화 읽는 어른’ 모임이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어김없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실 아동문학이 ‘뜨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오래도록 권위를 누려왔던 정통 문학, ‘서구의 백인 남성’이 주도해오던 문학은 퇴조하고 그 빈자리를 변방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문학들이 서서히 잠식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여성문학, 제3세계문학, 아동문학 등이 ‘새로운 주체’라는 기치를 내세우며 소진되어가던 문학의 활로를 다시금 개척하며 서서히 중심부로의 진입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세계를 보는 인식과 자각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 변화의 핵심에는 단일한 세계에서 다원적인 세계로의 변화가 가로놓여 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아동문학의 부흥을 뒷받침하는 실질적인 힘들이 존재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부수적일 뿐 아동문학의 발전 그 자체로 곧장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동문학의 발전은 무엇보다 좋은 아동문학 작품을 통해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좋은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여건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무의미하다. 오히려 서양의 번역물들이 넘칠 대로 넘쳐나,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의 날개를 달아주어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이 빛바랜 구호로 밀려날 뿐이다. 아동문학의 진정한 발전은 좋은 우리의 작가, 좋은 우리의 작품을 떠나서는 모두 거품일 따름이다.
물론 작가가 되고자 수련을 쌓는 사람들의 수도 비할 바 없이 늘어나고 있다. 더욱이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관점으로 무장한 채, 좋은 작품을 빚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그나마 멀고 아득한 길조차 마다하지 않고 신발끈을 다시금 조여매고 나서는 것은 빛나는 작품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우리에게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살펴볼 네 편의 작품집 또한 우리네 아동문학의 지평을 한층 더 깊고 넓게 만드는 빛임은 물론이다.
2. 최근 우리 아동문학의 발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역은 아이들의 생활을 소재로 창작된 동화들이다. 이들 생활동화는 이전의 동화들처럼 그저 아이들의 곱고 순수한 눈으로 본 곱고 순수한 생활을 표현한 비현실적인 동화가 결코 아니다. 생활동화들은 아이들의 삶에 깃들인 고통과 희망, 기쁨과 슬픔을 꾸밈없이, 깊이있게 펼쳐 보임으로써 이야기 본연의 역할들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경우는 현실주의가 퇴조를 거듭하고 있는데, 동화는 오히려 그 현실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의아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듬직하기 그지없다. 생활동화는 우리 동화의 가장 튼실하고 믿음직한 가지로 성큼성큼 성장해가고 있는 것이다.
김옥의 『학교에 간 개돌이』와 황선미의 『나쁜 어린이 표』는 현단계 우리네 생활동화의 수준을 여실히 입증해 보이고 있다. 『학교에 간 개돌이』는 동화집인만큼 아이들의 생활이 다채롭게 묘사되어 있고, 『나쁜 어린이 표』는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로 학교생활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이 두 작품들은 아이들의 생활에 깊이 닻을 내려 아이들의 생각과 느낌을 충실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담아내고 있는 경험들이 서로 다른만큼,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김옥이 다양한 상상력으로 아이들의 생활을 유쾌하게 드러내는 데 반해, 황선미는 치밀한 심리묘사를 통해 아이들의 육성을 곡진하게 들려준다는 점이 다르다.
『학교에 간 개돌이』는 무엇보다 발랄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집이다. 표제작 「학교에 간 개돌이」는 주인 준우를 따라 학교에 간 강아지 개돌이의 이야기이다. 시종일관 개돌이의 시점에서 학교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이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더욱이 아주 은근하게 사용되고 있는 전라북도 지방의 사투리는 서술자인 개돌이가 갖는 시야의 협소함, 단순성과 맞물려 웃음을 자아낸다.
“어메, 뭔 개가 다 교실까지 들어온다냐? 준우 니네 개냐?”
“예.”
“그럼, 집으로 후딱 돌려보내라이?”
“너무 멀어서 혼자는 못 찾아가는디요.”
“그려도 밖에서 기다리게 허든지 혀야지. 개랑 공부할 수는 없잖여. 안 그냐?” (36〜37면)
인용된 부분은 준우와 함께 교실로 들어온 개돌이를 발견한 선생님과 준우가 주고받는 말이다. 구어를 잘 살려내고 있을 뿐 아니라, 소박한 해학을 엿볼 수 있어 작품의 맛을 한층 깊게 만들어준다. 실제 저학년 아이들에게 읽어줬을 때, 가장 재미있게 듣는 부분도 “싫당께롱. 나도 학교 가고 싶단 말여, 멍멍.”(29면) 등과 같이 개 짖는 소리가 들어가는 곳이었다. 더욱이 동네에서는 무엇이든 제일 잘하는 준우가 학교에서는 꾸중이나 듣는 아이로 상정된 것도, 꾸중을 들어도 준우는 역시 개돌이의 대장이라는 자각을 보이는 것도 공부 잘하는 아이와 공부 못하는 아이로만 아이들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이들을 보는 작가의 시각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소중한 아이」는 따돌림당하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스스로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하는 과정을 그려 보인다. 선생님과 실전화기로 주고받는 대화는 이 이야기의 절정으로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다만 글에 따르는 그림들이 일그러져 있어 다소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준다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아름다운 그림만이 아이들의 책에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장된 느낌을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심지어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 마지막 진복이를 그린 그림도 가만히 살펴보면 손이 아이의 손이라기엔 지나치게 크고 각지게 그려져 있다. 생활동화인만큼 현실에 더욱 가깝게 밀착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교에 간 개돌이』에서 가장 뛰어난 상상력을 보여준 작품은 역시 「책벌레」다. ‘행진’이란 이름의 아기 책벌레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책벌레들의 이야기이다. 이들 벌레들은 책의 글자들을 파먹으며 살아가는데, 이야기 곳곳에서 재미있는 발상들을 만날 수 있다. 다만 결말이 서둘러 제시되는 바람에 충분히 풍부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아쉽게도 방치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컨대 ‘행진’이란 아기 책벌레의 이름이 갖는 의미를 전혀 살리지 못한 것도 이야기의 길이 때문이다.
김옥의 작품집은 전반적으로 아이들 특유의 환상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강아지의 목소리, 책벌레의 이야기, 학원에 가길 싫어하는 진이의 마음, 금붕어와 함께 목욕탕을 가는 것 모두 환상적인 측면들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러나 자칫 이들 환상이 저학년들이 감당하기에는 무거운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모래 마을 아이들」처럼 주제를 선명하게 제시하려 한 경우, 그 한계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김옥은 「학교에 간 개돌이」가 지닌 유쾌한 해학과 「소중한 아이」가 지닌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이야기 구성을 거듭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학교에 간 개돌이』와 달리 황선미의 『나쁜 어린이 표』는 단일한 하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 한층 선명한 평가가 가능하다. 무엇보다 『나쁜 어린이 표』는 군더더기 없이 잘 짜여진 작품이다. 이야기의 진행이 아주 매끄럽고, 촛점을 정확하게 맞추고, 정교하게 발전단계의 분량을 조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래에 보기 드문 단정한 작품이다. 특히 1인칭 주인공인 ‘나’를 서술자로 설정함으로써 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도 돋보인다.
‘다시 갖다 놓기는 틀렸어!’
울음이 터지려고 했어요. 몸이 떨리다 못해 이빨까지 와닥와닥 부딪치는 소리가 났어요. (82면)
이야기의 절정 부분에 해당하는 이 인용은 선생님의 스티커를 몰래 가져와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의 심리를 표현한 것이다.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격렬한 묘사를 하고 있으나, 어린 건우가 느끼는 공포는 과장이 아니라 사실에 가까울 터이다. 황선미는 시종일관 어린 건우의 마음을 놓치는 법 없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건우를 지나치게 이상화한 나머지 작가의 목소리가 여과없이 제시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예컨대 “나에 대해서 왜 선생님한테 물어야 돼? 나는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엄마도 나를 알잖아?”(78면)와 같은 대화이다. 저학년의 경험을 다루는만큼 저학년의 눈으로 계속 사물과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는 작품의 도처에서 드러나는 흠이다. 적어도 1인칭 서술자를 선택할 경우 아동문학에서는 ‘제한된 서술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나쁜 어린이 표』에 등장하는 건우는 선생님이나 친구들의 마음조차 거뜬히 읽어낸다. 묘사의 중심이 되는 인물에 더욱 밀착할 필요가 있겠다.
3. 『학교에 간 개돌이』와 『나쁜 어린이 표』가 아주 가까이에서 아이들의 삶을 깊이있게 들여다보았다면, 윤기현의 『보리타작 하는 날』과 이상권의 『똥이 어디로 갔을까』는 폭을 한층 확장하여 아이들의 삶을 드러낸다. 문학 작품이 겨레의 기억을 전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동문학 작품은 겨레의 어린시절의 기억을 전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두 작품은 정확히 이 관점에 튼튼하게 뿌리박고 있다. 『보리타작 하는 날』은 시골 아이인 석이와 현이의 이야기를 연작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으며, 『똥이 어디로 갔을까』는 똥에 얽힌 이야기들을 다채롭게 풀어냄으로써 옛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이들 작품집의 경험은 당연히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낯선 것이나, 또 그만큼 소중한 것이기도 하다. 반드시 전수되어야 할 기억들인 것이다.
『보리타작 하는 날』은 이미 고전이 된 『서울로 간 허수아비』의 작가 윤기현이 15년 만에 다시 쓴 이야기이다. 그를 다시금 글쓰기로 불러낸 이야기인만큼 『보리타작 하는 날』에서는 이 이야기를 반드시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겠다는 절박함이 묻어난다.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아이들에게 정확한 시골 이미지를 전하기 위해 오랜 나날을 해남에서 칩거하며 시골의 풍정을 보고 또 보고 그려낸 김병하의 노력도 그 절박함과 짝을 이룬다. 특히 「큰 물방울, 작은 물방울」에서 글과 그림은 서로 잘 어울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흔연히 일체가 된다. 글은 그림처럼 그림은 또 글처럼, 마치 베토벤의 바이올린 쏘나타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서로를 어루만지듯 어깨를 나란히 겯고 있다.
무엇보다 『보리타작 하는 날』이 갖는 미덕은 아이들의 생활을 놀이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현이와 석이에게는 빗방울도, 보리타작도, 멱을 감는 것도, 삶의 고단함도, 저물어가는 명절의 풍정도, 심지어는 찢어질지도 모를 똥구멍도 놀이로 연결된다. 일과 놀이가 확연히 구분된 요즈음의 세태와 달리 놀이의 공간과 일의 공간이 하나로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만큼 시골에서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드물 터이다. 더욱이 놀이는 아이들에게는 생활의 전부이기도 하다. 마치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쉽게 화해를 하는 까닭이 또 싸울 수 있기 위해서이듯, 아이들이 놀이를 그만두고 집으로 들어가는 까닭도 또 놀 수 있으려면 자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리타작 하는 날』이 주는 아름다움은 자연 묘사의 아름다움이다. 윤기현은 농사일이 한창 바빠지는 초여름부터 초겨울에 이르기까지의 자연을 차례로 그려내고 있다. 잘 정돈된 언어를 통해 아름다운 시골의 풍광을 시적으로 표현해낸 것이다.
가는 비가 풀잎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텃밭의 옥수수가 커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멀리서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동네에서 수탉의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립니다. (20면)
추석 달은 서쪽으로 한참이나 기울었고, 초저녁에는 없던 달무리가 동그스름하니 원을 그리며 옅은 구름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106면)
이 인용에서도 알 수 있듯, 오랫동안 다듬어온 기량이 유감없이 빛을 발한다. 다만 지나치게 이미지를 강조한 결과 단락 구분이 전혀 되어 있지 않고, 행갈이도 마음대로 되어 있는 것이 마뜩찮다.
윤기현의 작품이 시골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늘날 동시대에 존재하는 경험세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상권의 『똥이 어디로 갔을까』는 한 세대 전의 이야기이다. 서술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빠로 설정되어 있으며, 아빠의 어린시절 똥에 얽힌 이야기들을 엮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들은 누구나 똥이나 방귀가 들어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른들은 ‘어휴, 또 그 얘기냐?’ 할 것도 아이들에게는 그저 재미있을 따름이다. 특히 저학년 아이들은 맥락과 무관하게 똥이란 단어가 들어가기만 해도 재미있어한다. 소재의 선택에서부터 『똥이 어디로 갔을까』는 흥미를 자아낸다.
뿐만 아니다. 『똥이 어디로 갔을까』에서의 똥은 낯을 찌푸리게 하는 더러운 이미지를 말끔히 씻어내고 새로운 이미지로 변신한다. 그리고 그 변신은 놀랍고 눈부시다. 마치 권정생의 「강아지 똥」이 그러하듯. 똥은 자연과 분리된 오늘날의 삶으로 미루어 보면 그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폐기물일 뿐이지만, 자연과 하나로 연결된 전통적인 삶의 양식 안에서는 폐기물이 아니라 양식이며, 거름이며, 주된 영양공급의 원천이자 약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상권은 ‘오래된 미래’를 똥을 통해 그려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작품집 『똥이 어디로 갔을까』는 잊혀져가는 구어적 전통을 살려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화롯가에 둘러앉아 긴긴 겨울밤에 듣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복원해낸 것이다.
아이고, 미칠 노릇이야. 할머니 약이라는 말을 듣자 더 안 나오는 거야.
할머니는 안방에서 어서 누라고 소리치고 말야, 어머니는 나한테 음식을 막 먹이는 거야.
그래도 안 나오네. 마렵다가도 냄비 위에 쪼그려 앉으면 쏙 들어가버려.
(59면)
구어체의 이야기가 갖는 구수함은 단순히 종결어미를 바꾼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자를 통해 정보를 획득하는 대신,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삶의 지혜를 얻는 지극히 민중적인 방식이다. 세계상 자체가 다른 것이다. 아이들 역시 힘없는 민중이기에 민중적인 관점에 튼튼히 서 있을 경우에만 구어체의 특성들은 충분히 되살아날 수 있다. 『똥이 어디로 갔을까』가 오랜 세월을 견뎌낸다면, 그 힘은 바로 이 민중적 관점의 건강함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4. 지금까지 살펴본 동화들은 한결같이 저학년동화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다. 자연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도 저학년이며, 경험의 내용도 저학년에 맞게 설정되어 있다. 아동문학의 주요한 독자인 아이들이 성장해가는 놀라운 비약들을 생각할 때, 저학년 동화가 따로 설정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서양의 어린이책들처럼 수준이 명시적으로 제시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지금껏 살펴본 작품들이 저학년에게 적합한 것인지는 거듭 되물어야 할 질문이다. 인물이 지나치게 성숙한 시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가 하면,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 자체가 고학년과 명확히 구분되지 못한 채 섞여 있기도 하다. 또한 이야기를 들려줄 욕심에 미처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경험들도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이야기들을 읽는 저학년들은 사실 글자 읽기에 급급할 뿐, 이야기를 이야기로 읽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이 또래의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질문이 바로 ‘뭘 읽었니?’라는 질문이다. 그만큼 내용 자체의 흐름을 좇아 읽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더 한층 아이들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경험·생각·느낌·취향·호오(好惡)를 가능한 한 정밀하게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네 아동문학의 지평을 한 단계 더 심화하고 확대할 수 있는 돌파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