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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공교육의 위기와 사교육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과외금지 위헌 판결과 한국사회

 

 

지난 4월 27일 헌법재판소(헌재)는 ‘학원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의 제3조와 제22조 제1항 1호, 즉 법이 정한 특정한 경우에 속하지 않는 사람의 과외교습을 포괄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사람에 대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한다는 두 조항을 위헌 판결했다. 이 판결은 큰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 언론은 이 문제를 1면 머릿기사로 다루었고, 며칠 동안 연이어 이 판결에 대한 각계각층의 반응과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파장, 대체입법의 방향에 대한 예측기사를 실었다. ‘우리’ 모두를 예민하게 만든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 해결방안은 무엇인가?

헌재는 제3조와 제22조 제1항 1호의 위헌 여부 문제의 핵심을 아동의 교육에 대한 가족(부모)의 권리와 국가 권한의 대립으로 파악했다. 이는 헌법상 혼인과 가족생활을 보장한 제36조 제1항, 행복추구권을 보장한 제10조,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 제37조 제1항 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 제31조 제1항 간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헌법재판소는 이 대립에서 가족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런 헌재의 판결은 곧장 ‘계층적 위화감’ 또는 ‘계층적 박탈감’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빈부문제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헌법이 멈추어 선 장소인 가족이 바로 계급과 사회적 불평등이 포괄적으로 재생산되는 영역임을 뜻한다. 그리고 교육과 계급의 관계라는 교육사회학의 기본주제가 바로 과외문제의 본질임을 말해준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헌재의 판결이 과외비의 하락을 가져올지, 아니면 상승을 가져올지를 예측하거나 고액과외의 기준을 따지는 것 따위는 문제의 표피에 집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혹자는 가뜩이나 황폐해진 공교육의 운명이 핵심문제라고 지적하지만, 이 또한 그 연원은 계급문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곧장 너무 멀리 나간 것이 아니냐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만일 교육의 영역이 나름의 자율성을 가진 장치로 기능할 수 있는 여지가 넓다면 그런 말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교육과 계급 간의 관계는 지극히 밀접하며, 모두가 그것을 의식하고 행동한다.

문제를 이렇게 제기해보자. 고액과외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식에 대한 지독한 사랑의 표현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98년 한신학원 김영은 원장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를 통해 고액과외를 시킨 부모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했던 것일까? 그리고 왜 우리는 (고액)과외를 ‘망국병’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인가? 이런 감정은 업적주의(meritocracy)에 대한 강렬한 지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 업적주의적 세계관은 재능에 의한 불평등 이외에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학교 안에서 완전히 균등한 조건하에서 경쟁해야지, 누구도 과외라는 형태로 더 많은 투자를 하는 식의 불공정 경쟁행위를 저질러서는 안된다고 본다.

하지만 교육체제 자체가 형식적으로 평등한 인간을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에 배분해주는 장치인 한─구체적으로는 일류대학 졸업과 사회적 보상 간에 강한 연계가 존재하는 한─교육 안으로 계급적 불평등이 개입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업적주의의 유토피아는 실현 불가능하다. 그것은 해방후 지속적인 학교팽창의 역사와, 과외를 극히 포괄적으로 금지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의 강압적 조치 이래로 과외금지의 모든 조치가 좌초했다는 사실을 통해 입증되며, 입시제도 개혁을 비롯해 예정된 모든 대책들의 실패를 통해 입증될 터이다.

이미 언론에 보도된 사례를 중심으로 과외를 근절하려는 모든 조치가 실상 쓸모없는 것임을 살펴보자.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자, 김대중 대통령은 대체입법 등을 고민해오지 않은 교육부를 질책하며 세무조사를 비롯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고 지시했다. 세무조사를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이런 문제에 세무조사 같은 조치로 대응하는 것은 과세권의 남용이자 세무행정력의 낭비이며, 실제 효과적인 적발이 이루어지기도 난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2002년에 실시될 새로운 입시제도도 별 쓸모는 없을 것이다. 비록 등급제로 바뀐다 해도 새 입시제도에서 수학능력시험(수능)은 여전히 중요한 기준이며, 수능 문제를 계속해서 쉽게 출제한다고 해도, 그것은 학교의 교과구조와 다르기 때문에 이미 과외수요를 높인 수능의 폐단을 일부 완화시키는 조치일 뿐이다. 내신성적(내신)에 대한 중시는 내신을 위한 과외를 부르며, 그 폐단은 이미 널리 지적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 도입된 내신의 절대평가화는 학교시험이 터무니없이 쉽게 출제되게 만들었다. 특기와 적성에 입각한 대입 선발방식은 예체능 과외 수요를 높일 것이며, 학교장추천제의 확대 실시 또한 추천자격을 위한 경쟁, 예컨대 학생회 간부가 되기 위한 경쟁을 낳을 것이다. 입시에 다양한 요소를 도입하는 과정은 그 의도처럼 ‘한 줄 세우기’를 ‘여러 줄 세우기’로 바꾸기는커녕 그나마 입시에서 면제되어 있던 영역마저 경쟁의 요소로 변질시킬 위험이 큰 것이다. 대학은 대학대로 입시정책 변화로 인해 변별력이 낮아진 수능과 내신보다는 논술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려 할 텐데, 고등학교에는 논술이라는 교과가 없다. 과외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또 대학은 고교등급제를 도입할 태세이다. 학부모들이 모두 맹모를 따르게 만드는 조치가 아닌가.

한편 문제를 좀더 근본적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공교육 강화론을 제기한다. 사교육 못지않게 매력적인 공교육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예산 제약이다. 교사의 질을 높이고, 교육시설을 개선하며, 제7차 교육과정에 도입될 예정인 수준별 교육을 실시하는 것 등은 모두 예산을 크게 늘리지 않고는 실효를 거두기 어려운 일이다. 다른 하나는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공교육이 과외보다 나은 교육을 제공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과외는 이미 수준별 교육이며, 교사 1인당 학생수도 많아야 열다섯명, 적으면 1명이다. 또한 과외교사는 정규학교 교사와 달리 항상적인 경쟁상태에 있으며, 더 잘 가르치면 곧바로 더 많은 돈을 버는 상황이다. 어떤 교육이 더 경쟁력있을지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불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으며, 과외는 없앨 수도, 단속할 수도 없음을 말이다. 계급은 어떤 난관도 돌파하고 교육 안으로 스며들기 마련이며, 경제자본은 결코 벌거벗은 채로 현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문화자본으로 교육자본으로 그리고 종내는 육체의 변형을 통해서까지 관철된다. 대학입시 때 면접을 해본 교수들이면 안다. 좋은 성적과 해맑은 얼굴과 밝은 성격과 말쑥한 옷차림 그리고 말주변을 갖춘 학생을 빈곤층 자녀보다는 부유층 자녀에서 발견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이야기는 몹시 비관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를 위선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며, 국가정책에 집착하는 근시안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의당 그럴 때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가혹한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내게도 별다른 뾰족한 수는 없으며, 이미 이야기된 것들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스스로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면 과외를 근절할 수 있다는 식의 과도한 기대에서 벗어나 한결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을 터이다.

먼저 모든 종류의 과외교사들이 교육청에 등록하여 정당한 사업자가 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헌재가 판시했듯이 과외교사가 되는 것 또한 정당한 직업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는 일이다. 그러니 그들이 정당하게 소득세를 납부하는 성실한 시민으로 살게 해주어야 한다. 물론 이를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조세정의의 차원에서 응분의 처벌을 가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당연히 공교육의 강화가 필요하다. 공교육 강화가 과외를 없앨 수야 없지만, 방대한 인구가 공식적인 자격을 위해 생애 가운데 매우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학교가 의미있는 삶의 공간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공교육의 강화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이번 일이 냄비여론으로 끝나지 않고, 이를 통해 공교육 강화를 위한 예산확보에 정부가 좀더 전향적인 자세를 갖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겠다. 우리 사회는 은행이나 투자신탁회사 하나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도 수조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해왔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그만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모두가 정확히 인식하게 된다면, 공교육 예산을 대폭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교육세를 대폭 증액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민적 동의가 있어야 하고, 그렇게 확보된 예산이 제대로 쓰일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즉 학부모들의 교육행정 참여를 지금보다 크게 확장해서,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이념을 교육자치제에서 구현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의 다수 안에 왜 교육 업적주의의 꿈이 그토록 깊게 드리워져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해방후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이동의 통로가 학력으로 제한되었으며, 집합적 지위상승의 길이 막히자 이 유일한 통로를 향해 모든 사람들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그토록 오랜 세월 레드콤플렉스와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에 억압받고 어떤 종류의 진보 정당도 자리잡지 못한 것이, 바로 모든 사람이 교육이라는 개인적 적응전략에 몰두하게 하고, 우리의 교육문제를 갈수록 계급과 긴밀한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집합적인 사회적 지위향상을 향한 길을 넓혀나가는 일, 노동운동의 활성화와 진보적인 정당의 출현을 위한 선거법 개정이 교육문제의 해결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집합적 지위향상의 길을 개척하고, 이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적인 삶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가 될 때, 우리는 교육이 사람다움을 위한 것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꿈을 담은 뒤르켐(E. Durk-heim)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맺도록 하자.

“우리는 우리의 행복만큼이나 자녀의 행복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소유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현재의 소유구조가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생활에 불평등하게 입문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이런 불평등으로 인해 손해를 덜 보게 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만일 사회가 평등하다면 이런 관심은 약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