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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공교육의 위기와 사교육
정진화 鄭鎭和
양천중학교 도덕과 교사. 강서양천교육시민연대 강사.
조기유학〓엑소더스?
지난 1월 교육부가 조기유학 전면허용 방침을 발표하자 언론은 발빠르게 조기유학의 실태와 찬반론을 싣느라고 분주했다. 그 논조는 조기유학생이 전에도 많았다, 이제 전면 허용되었다, 찬반론은 이렇다, 그리고 이왕 갈 거면 이렇게 가라고 이어지더니 결국엔 각국의 상세한 유학정보를 소개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한동안 학부모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조기유학에 대한 이야기가 한두 번씩은 도마에 오를 정도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거기서 이야기되는 조기유학 찬성론은 대강 이렇게 압축이 되는 듯하다. 예전에는 도피성 유학이었으나 요즘엔 더 질높은 교육을 받기 위해서 유학을 보낸다, 적어도 영어 한가지는 배우고 돌아오지 않겠느냐, 비용은 여기서 드는 고액과외 비용에 좀더 추가하면 못 갈 것도 없다, 자식에 대한 투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부모에게 뭐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어느 부모나 자식에게 이왕이면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게다가 나중에 사회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하버드대학의 수재 홍정욱의 『7막 7장』의 신화나 최근에 대원외고 학생이 미국 스탠포드대학에 당당히 합격하였다는 소식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동하게 하고, 그들이 선망의 대상이 된다 해도,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가 이렇게 조기유학을 선택하기에는 너무나 모험적인 측면이 많다. 우후죽순으로 난립하는 사설 유학원의 사기에 걸려들지 않고 ‘무사히’ 유학을 떠난 뒤, ‘나홀로’ 유학생활을 견디지 못해 담배와 술, 마약에 물들지 않고 부모에게 외로움을 호소하는 전화와 편지를 수없이 보낸 끝에, 이질적인 문화에 적응하여 대학에 들어갈 확률은 실제로 1/1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의 막연한 생각과는 달리, 신중히 판단하라는 교포들의 진심어린 충고는 조기유학의 위험성을 현지에서 증언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는 영어 하나라도 제대로 배우고 탈선을 방지하려면 한국인이 많은 지역을 피해야 한다는 친절한 요령까지 곁들이며 조기유학을 부추기고 있다. 세계화의 구호가 난무하고 영어공용화가 쟁점이 되는 현실에서 자국의 문화와 언어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는 국지적이고 국경에 사로잡힌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으로 치부되는 형편이다. ‘조기유학을 보내면 자식은 포기해야 한다. 얼굴만 내 자식이지 속은 외국사람이나 다름없다’는 염려가 있는데도 꼬리를 무는 조기유학의 행렬은 쉽사리 가라앉기 어려운 열병처럼 한동안 많은 학부모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것 같다.
한편 조기유학을 택하는 새로운 기류는 꼭 자식의 사회적 성공을 바라서라기보다는 더 좋은 교육환경에서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내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그들은 심지어 어디에 간들 우리나라의 학교만 하겠느냐며 이땅의 공교육에 대한 철저한 불신과 절망에서 조기유학을 결단한다고 한다. 주변에서 보면 우리나라 학교에서 공부를 무척 힘들어하거나 따돌림을 받아 친구관계가 어려워진 예민한 아이들을 2,3년 가량 외국의 학교에 보내는데 이런 경우는 꽤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자유롭고 학업부담이 적으며 교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외국의 학교생활이 상처받은 아이를 치유해주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리라. 이런 아이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전보다 더 여유있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짧은 기간이 아닌 장기적인 조기유학의 경우 그 위험성도 커지고 이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도 줄어든다. 한달에 적으면 150만원, 많게는 4,5백만원에 이르는 막대한 학비와 생활비를 몇년씩 계속해서 감당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대다수 부모들은 조기유학을 보내지 못하는 자신의 경제력에 대해 은근한 죄책감을 느낀다.
왜 이땅의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송두리째 희생해도 좋다는 강박관념을 이다지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자식을 위해 생각지도 않았던 이민을 가거나 물 설고 낯선 땅에 아이만 덜렁 조기유학을 보내 엄청난 교육비를 감당하느라 끙끙대는 것이 그렇다. 왜 우리의 부모들은 자식 사랑의 이름으로 부담스런 희생과 헌신을 대물림하는 것일까. 그 자녀들 역시 자신의 삶을 펼치기보다 자녀의 삶에 또다시 자신을 바치는 내리사랑으로 뒤를 잇는다. 그렇다면 아무도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행복한 부모가 자녀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건 진부한 경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게다가 조기유학을 통한 교육문제 해결은 결국 개인적인 선택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내 아이를 잘 봐달라고 촌지를 건네는 것처럼 도덕성이 문제되는 행위는 아니라 할지라도, 다수가 지향해나갈 사회적인 해결방식은 아닌 것이다.
물론 조기유학을 법적으로 묶어두자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인이 꿈꾸는, 공교육으로부터의 화려한 엑소더스일 수는 없다. 학교교육을 공동화시킨 채 각자 능력껏 돌파구를 찾아 해외로 달려가는 건 이 나라 학교교육의 정상화라는 모두의 과제를 외면했다는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저 식민통치의 사슬에 고통받던 일제강점기 때도 조선의 학부모들은 교육에 대한 열망으로 마을 전체가 일을 해서 기금을 마련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학부모회를 통해 학교운영에 적극 참여하였다. 교과서와 학용품 값 인하를 요구하거나 무산(無産) 아동의 수업료 면제, 체벌을 혹독히 가하는 교사 축출, 잘 가르치는 교사 초빙 등을 학부모회가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해방후 학부모회의 역할은 도리어 왜소해져, 육성회로 재정지원을 하는 데 그쳤을 뿐 학교운영의 중요한 주체로서의 몫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제 사립학교를 포함한 초·중·고 모든 학교에 구성되도록 법제화한 학교운영위원회는 학생과 학부모가 바라는 학교운영의 방향을 제시하고 감시·견제할 법적 기구로 등장하였다. 최근의 학교붕괴 논의 등 심각해진 공교육의 위기를 학교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노력으로 극복해가는 것이 진정으로 필요한 시기다.
얼마 전 KBS에서는 학교붕괴 논의를 다루며, ‘아름다운 학교 만들기’의 사례로 장승중학교를 보여준 적이 있다. 학교 여기저기에 벽보를 붙여 ‘왕살이파’ 회원을 모집하여 비만학생들을 방과후에 지도하는 선생님, 학교 도서실을 친근하게 느끼고 활발하게 드나드는 학생들, 독서왕에게 줄 상품을 후원할 주변 가게들을 찾아다니는 선생님, 학생회에서 학급대표들이 두발자유화 등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여 교칙개정에 참여하는 과정, 그리고 이 모든 변화를 이끌어가는 학교운영위원회의 활기찬 모습이 그대로 방영되었다.
그 학교의 변화는 물론 어느 한 사람이 가져온 것은 아니다. 뜻을 모아나가는 교사들, 발벗고 나서서 흩어져 있는 의견들을 모아 학교를 돕는 학부모들, 밝고 솔직한 학생들의 자치활동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학교 만들기’의 한 사례인 것이다.
지금은 억눌리고 가려졌던 교육의 여러 모순이 일제히 분출하여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관심과 고민 속에서 새로운 학교의 모습을 만들어갈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루어내느냐에 따라 다른 교육문제들도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연쇄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엄청난 사교육의 팽창, 유행처럼 번지는 조기유학, 갈수록 광범해지는 학교붕괴가 서로 연결고리를 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단초는 역시 학생·학부모·교사라는 각 교육주체가 학교 안에서 제 목소리를 내며 수렴해가는 구조를 만들고 거기에 투신하여 다양한 입장을 융합해내는 데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이자 오래 교직에 있어온 교사로서 나는 이런 어려운 실타래를 이렇게 풀기로 작정하고 실천하고 있다. 우리 아이는 학교교육 이외에 학원이나 과외로 교과학습을 보충하지 않는다. 현재의 공교육에 전적으로 아이를 맡긴다. 그러나 아이가 집에서 공부할 때 필요하면 도와준다. 그리고 학습이 경쟁을 위해서나 어쩔 수 없어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닌 즐거운 일임을 느끼도록 애쓴다. 주말이나 방학 때면 봉사활동을 하고 여행이나 캠프를 떠나 다양한 체험을 하도록 배려한다. 그리고 학부모로서 학교의 운영위원회에 참여하여 사소한 것까지 변화할 수 있도록 힘을 쓰겠다. 요컨대 학교 안팎에서 아이가 만족하고 행복해할 여건을 만드는 것이 최선의 부모노릇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또한 내 친구처럼─그 친구는 상고에 진학하여 제과점을 꿈꾸는 아이에게 고등학교 1학년 방학 내내 유럽의 빵집이란 빵집은 두루 다 돌아다니게 했다─아이가 원한다면 해외에 나가 관심있는 분야를 돌아본다거나, 해외 자원봉사 단체에 합류하여 봉사활동에 참여한다거나, 워킹 비자를 받아 일해보는 경험을 갖도록 하고 싶다.
꼭 조기유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그럴 필요도 없다. 아이가 좀더 성숙해진 다음에, 스스로 선택하여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 더 풍부하고 값진 경험으로 유도하는 길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될 때까지는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갖고 싶다. 그후에 아이는 스스로 날갯짓을 힘차게 하며 세상으로 날아갈 것이다.
가장 평범하고 소박한 이러한 꿈이 어찌하여 우리 현실에서는 그다지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그러나 한 사람이 꾸면 꿈이지만 여러 사람이 꾸면 현실이 된다는 분명한 진리 또한 잊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