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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촛점 | 타이완은 어디로

 

황챵링 黃長玲

1963년 타이완 타이뻬이 출생. 타이완 졍즈(政治)대학 국제관계연구쎈터 연구원.

 

 

 

민주의 길은 아직 멀다

 

 

격렬했던 타이완 총통선거가 3월 18일 마침내 막을 내렸다. 민진당(民進黨)의 승리는 반세기 이상 계속된 국민당(國民黨)정권의 통치를 종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타이완 민주화의 신기원을 열었다. 대선(大選)을 둘러싼 이슈는 타이완 내부의 개혁과 타이완의 대외관계 두 가지였다. 전자는 흑도(黑道, 폭력조직을 포함한 불법행위자─옮긴이)와 금권정치를 뜻하는 흑금(黑金) 청산이 대표적이었고, 후자는 타이완해협 양안(兩岸)관계가 촛점이었다. 내부개혁 면에서는 장기집권하던 국민당의 후보 롄 쟌(連戰)이, 양안관계 면에서는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던 민진당의 후보 쳔 슈이뼨(陳水扁)이 가장 국민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국민당에서 탈당한 쑹 츄위(宋楚瑜)는 이 양자 사이에 위치했다. 쑹 츄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가 롄 쟌에 비해 개혁적이며 쳔 슈이뼨에 비해 양안관계를 잘 처리할 것이라 여겼다. 반면 쑹 츄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개혁의지에 의문을 표했고 양안관계에서도 롄 쟌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보았다. 선거 결과 쳔 슈이뼨은 39%, 쑹 츄위는 36%, 롄 쟌은 23%를 득표했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볼 때 쑹 츄위와 롄 쟌의 득표를 합한 60%는 양안관계 해결을 흑금 청산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으나 쑹 츄위와 쳔 슈이뼨의 득표를 합한 75%는 흑금 청산을 양안관계 해결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번 선거에서 타이완 국민들은 외부의 위협과 불확실성, 즉 타이완 독립 이슈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각종 압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정치의 부패가 이미 인내의 한계에 달했음을 표시한 것이다. 새 정부의 시책이 반드시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단언할 사람도 없지만, 적어도 정권교체가 개혁에 희망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도 없다.

국민당의 선거 패배는 즉시 타이완 정국과 사회에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먼저 국민당 주석 리 떵후이(李登輝)가 군중의 항쟁으로 물러났고 국민당 내부에서는 선거 패배 문제를 다룰 개조위원회가 성립했다. 다른 한편 쑹 츄위를 대표로 하는 친민당(親民黨)이 선거 직후 성립되었다. 대선에서 쑹 츄위의 득표율이 쳔 슈이뼨과 겨우 3%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각계에서는 친민당의 발전과 동향에 대해 상당히 주목하고 있다. 친민당 구성원과 지지자는 서로 다른 족군(族群, 출신지역별·종족별 집단─옮긴이)과 당파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현재 그들이 가진 장점과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친민당의 결성은 1993년 국민당에서 분리되어 나온 신당(新黨)에 막대한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이번 대선에서 대다수 신당 유권자들이 쑹 츄위를 지지하였고 신당이 추대한 총통 후보와 신당의 지도부가 모두 쑹 츄위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당으로서는 외성인(外省人, 대륙 출신─옮긴이)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여전히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친민당과 큰 차이가 있다. 친민당의 또다른 주요 구성원은 이번 선거와 선거 후에 국민당에서 탈당한 정치인들로 이들 가운데는 국민당 내의 원로 당원과 각 지역의 파벌 수뇌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구성원의 속성이나 사회적 이미지 등에서 이질성이 매우 큰 친민당이 앞으로 순조롭게 타이완 제2의 정당이 될 수 있을 것인지, 국민당·민진당 및 해체중에 있는 신당과 각각 어떤 관계를 정립할 것인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국민당의 선거 패배 후 타이완에 큰 영향을 끼친 두번째 현상은 국민당 통치하에서 유지되던 국가조합주의(corporatism)의 구조가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선 후 전국적 노사단체, 즉 전국총공회(全國總工會)와 전국공업총회(全國工業總會)는 각각 신임 이사장을 선출하면서 분열이 발생했다. 노동자단체의 경우 국민당이 원래 계획했던 인사가 낙선하자 국민당을 지지하는 노조가 바로 전국총공회의 탈퇴를 선포하고 따로 전국노공총회(全國勞工總會)를 결성했다. 신임 전국총공회 이사 가운데는 과거 수년 동안 이미 별도의 자주적 노조연맹─전국산업총공회(全國産業總工會)─의 설립 준비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다. 일찍이 대선 전에 쳔 슈이뼨은 자신이 당선되면 올해 5·1 노동절에 정식으로 성립을 선포할 예정인 전국산업총공회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할 것임을 노조대표들에게 약속하였다. 현행 노동조합법에서 전국적 노조단체는 단지 전국총공회 하나만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쳔 슈이뼨은 신정부 집권 후 노동조합법을 개정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럴 경우 노조의 대표권 문제는 단순히 전국산업총공회가 전국총공회와 똑같이 합법적 지위를 갖느냐는 문제뿐만 아니라, 기업별·지역별 복수노조를 허용할 것인지의 문제까지 포함하게 된다. 이번 전국총공회의 임원선출에서 나타난 분열은 사실 노동자단체 중 국민당을 지지하는 노조와 자주성이 비교적 높은 노조 간의 분열이 표면화된 데 불과한 것이다. 사용자단체의 경우 과거 많은 첨단과학기술산업 기업가들은 본래 전국공업총회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이번 분열로 그들과 전통산업 기업가 사이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졌다. 과거 타이완에서는 국가조합주의가 사회단체의 발전에 가한 제약만 부각되었을 뿐, 정책협상에서 조합주의가 갖는 효과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했다. 조합주의의 구조가 국민당의 선거 패배와 함께 점차 와해되기 시작한 현재, 앞으로 타이완의 시민사회가 어떠한 조직형태를 갖고 국가와 상호 작용할 것인지를 통해 새 정부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단체 특히 사회운동가의 지혜가 검증될 것이다.

정당과 사회단체의 재편이 가져온 도전 외에 민진당 정부는 헌정구조로 인한 문제와 양안관계를 처리해야 할 압력을 받고 있다. 타이완의 원래 헌법은 국민당이 타이완에 오기 전인 1947년 중국대륙에서 통과시킨 중화민국헌법으로 내각제 성격이 뚜렷한 헌법이었다. 그러나 국민당이 타이완에 건너온 후 쟝 졔스(蔣介石) 부자가 통치하던 시기 쟝 징꿔(蔣經國)가 행정원장을 맡았을 때 정치실권을 행사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총통이 국가 최고권력을 갖고 있었다. 현 총통 리 떵후이 취임 후 헌법이 여러 차례 개정되어 현재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총통이 입법원의 동의를 받아 행정원장을 임명하되, 행정원장은 입법원에 시정(施政)의 책임을 지는 매우 이상한 쌍수장제(雙首長制)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하에서 총통과 행정원장은 시정의 책임 귀속 면에서, 특히 총통과 행정원장이 각기 다른 정당에 속할 경우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쳔 슈이뼨은 당선 후 이미 국민당적을 지닌 현 국방장관 탕 페이(唐飛)에게 행정원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탕 페이는 국방장관 임기중 군의 ‘국가화’를 적극 추진하였고 반대당과의 관계도 원만하였기 때문에, 언론과 사회대중은 이번 인사에 대해 놀라면서도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정치적 책임의 귀속문제는 여전히 쟁점으로 남아 있다.

‘쳔·탕(陳唐)체제’의 문제는 정당정치의 운용에도 영향을 주었다. 국민당 당원 신분을 갖고 있던 탕 페이가 국민당 탈당을 거절했기 때문에, ‘쳔·탕체제’를 국민당과 민진당의 정당 합작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빚어졌다. 국민당은 민진당이 내각인선에 있어 그들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민진당은 그럴 필요가 없으며 단지 당사자의 동의만 얻으면 된다고 여기고 있다. 제도적 측면에서 ‘쳔·탕체제’가 야기한 최대의 난항은 총통과 행정원장이 서로 다른 정당에 속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쳔 슈이뼨이 ‘전민정부(全民政府)’를 적극 추구하는 상황에서 그와 탕 페이 모두 그들이 속한 정당활동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정의 책임 귀속은 이미 정당과 완전히 무관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쳔 슈이뼨은 선거 이전에 이미 당선 후 민진당 활동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며 민진당의 당직을 사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양안정책에서 그가 받고 있는 압력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 민진당은 정강에서 타이완 독립을 명백히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선거 이전부터 민진당이 타이완 독립의 강령을 개정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쳔 슈이뼨은 득표를 위해 선거 시작 전에 그가 만약 당선되면 중화민국의 총통이 될 것이지 민진당의 총통이 되지는 않을 것임을 표명함으로써, 그의 타이완 독립 입장에 대한 많은 사람의 우려를 불식하고자 했다. 나아가 당선 후 양안정책 담화에서 그는 과거 하나의 중국과 연방제를 반대했던 입장에서 탈피해, 하나의 중국과 연방제가 양안담판의 ‘전제’가 아니라면 토론의 ‘의제’로 삼을 수 있다는 매우 탄력적인 태도를 보였다. 중국은 현재까지 쳔 슈이뼨의 발언에 정면 대응을 하지 않고 단지 앞으로 그의 구체적인 언행을 지켜보겠다고 밝히고 있다. 양안정책에서 쳔 슈이뼨은 한편으로 타이완과 중국 간의 긴장관계를 필히 완화시켜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타이완의 자주성을 반드시 일정 정도 견지해야 한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만약 그가 양안의 긴장을 완화하지 못할 경우 타이완의 전도는 방향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만약 자주성을 견지하지 못할 경우 그는 지지자를 잃는 위험을 맞게 될 것이다.

현재 쳔 슈이뼨이 취하고 있는 당파를 떠난 이른바 전민내각(全民內閣)의 구성과 대륙정책의 조정 같은 조치는 민진당에 대한 유권자의 지지를 제고시킬 것인가 아니면 저하시킬 것인가? 국민당의 개조가 구체적 성과를 거둘 것인가? 친민당이 총통선거에서 쑹 츄위가 보여준 실력을 유지할 것인가? 1년 반 후 그 답이 나올 것이다. 2001년 말 타이완은 중앙과 지방의 민의대표(民意代表, 議員) 선거를 동시에 치르는데, 이 선거는 성별평등이라는 점에서 공전의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만약 민진당이 여러 해 동안 추진해온 선거제도 개혁이 그 이전에 완성된다면 그것은 타이완의 정당정치와 헌정구조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타이완의 여성단체는 오랫동안 여성의 정치참여를 추진해왔다. 기존 헌법에서는 민의대표를 선출할 때 의석의 1/10까지 여성의 당선을 보장하는 여성할당제를 규정했는데, 여성단체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여성할당제 대신 성별비례원칙을 적용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1996년 말 민진당이 맨 먼저 정당 공천 1/4 성별비례원칙을 통과시켜 각종 선거에서 ‘어느 한 성(性)’의 비례가 1/4 이상이 되도록 공천할 것을 정강에 명문화했다. 그 당시나 현재 민진당의 상황을 보았을 때 이 조항의 혜택을 받는 쪽은 여성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에 담긴 정신은 결코 일방적으로 여성 의석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별평등을 추구하는 데 있다. 만약 언젠가 여성이 타이완사회를 좌우하는 중심세력이 되었을 때 남성 또한 이 조항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민진당에서 성별비례원칙을 통과시킨 후 1997년과 1998년 개헌 당시 모든 여성단체는 헌법의 1/10 여성할당제 조항을 1/4 또는 1/3의 성별비례원칙으로 개정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개헌에서 이 부분은 모두 통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지 못했다. 1999년 말 총통선거전이 시작된 이후 쳔 슈이뼨은 여성운동 경력을 가진 뤼 슈롄(呂秀蓮)을 부총통 후보로 지명하고, 여성단체의 요구로 당선 후 내각을 구성할 때 1/4 성별비례원칙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현재까지 공표된 새 내각의 명단을 보면 쳔 슈이뼨은 자신의 약속을 지켰을 뿐 아니라 내각의 중요한 직위에 여성을 임명했다. 자원이 방대한 내정부(內政部)와 교통부, 노동 업무를 주관하는 노공위원회(勞工委員會),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진 양안관계를 처리하는 대륙위원회 및 문화업무를 주관하는 문화건설위원회 등의 장관을 모두 여성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각 구성은 타이완은 물론 아시아의 정치발전사에서 보기 드문 새로운 현상이다.

구조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진정한 발전은 지방선거에서 여성의 정치참여가 획기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1999년 3월 입법원은 지방 민의대표(縣議員, 시의원과 鄕·鎭市民代表) 선거에서 여성 당선자가 반드시 1/4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지방제도법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령은 2001년 말에 있을 지방선거부터 적용된다. 이 법령으로 인해 각 정당은 모두 자신들의 기층 여성정치인을 적극 양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2001년 이후 타이완은 여성의 정치참여 면에서 중앙의 부총통과 최소 1/4 이상의 각료를 여성이 맡고 지방의원의 최소 1/4 이상을 여성의원이 차지하게 되어, 오직 국회의원 즉 입법위원의 선거만 성별비례원칙을 실행하지 않는 분야로 남게 될 것이다. 현재 각 주요정당 중 민진당만이 공천시 1/4 성별비례원칙을 채택하고 있지만 여성단체들이 때가 되면 반드시 다른 정당에도 같은 요구를 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사실 정당의 여성공천 문제는 해당 정당이 표방하는 가치 외에 선거제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이 때문에 각계가 가장 바라는 정치개혁 중 하나가 바로 선거제도의 개혁이다. 국민당 집권시 타이완의 선거제도는 이른바 ‘다석차단일선표불가양도제’(多席次單一選票不可讓渡制, 중선거구제하의 1인1표제로 한 선거구에서 같은 정당의 후보가 얻은 득표를 서로 양도하지 못하는 제도─옮긴이)였다. 이 제도가 갖는 문제는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수가 항상 차이나고 소수당의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하며, 개별 정치인물이 왕왕 동일 정당의 후보와 가장 격렬한 경쟁을 벌여야 할 뿐 아니라 정당간의 경쟁이 자주 개별 정치인물의 대중적 이미지 경쟁으로 변질된다는 점이다. 1997년 민진당은 선거제도를 ‘단일선구양표제’(單一選區兩票制, 소선거구제하의 1인2표제—옮긴이)로 바꾸자는 개혁안을 제출했으나 국민당은 정당간 협상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새로 성립된 친민당이 선거제도 개혁안으로 역시 ‘단일선구양표제’를 취하고 있고, 친민당과 민진당의 국회의석수가 현재 이미 국민당을 초과하고 있기 때문에, 이변이 없는 한 선거제도의 개혁은 여성의 정치참여와 더불어 민진당 정부가 장차 4년 동안 가장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영역이 될 것이다.

‘단일선구양표제’하에서 전국은 몇개의 선거구로 나뉘고 선거구마다 한 명의 입법의원을 선출하게 된다. 또 입법원의 의석 중 1/2 또는 2/3는 전국의 각 선거구에서 선출하고 나머지 1/2 또는 1/3은 각 정당이 공천한 비례대표로 채워질 것이다. 유권자는 투표할 때 한 표는 자기가 속한 선거구의 후보에게 투표하고 다른 한 표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한다. 이러한 소선거구제하에서는 당선에 필요한 최저 표수가 중선거구제에 비해 훨씬 높기 때문에 매표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선거제도의 개혁이 흑금의 원인을 차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고 있다. 동시에 비례대표제의 장점은 각 정당이 경쟁의 촛점을 정책에 두게 됨으로써 약소단체 출신 인물을 공천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따라서 주목받지 못하는 이슈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학자들은 일찍이 정권교체를 민주주의체제를 공고히하는 중요한 지표로 간주하여 정권교체의 경험이 없는 민주주의는 영원히 성숙한 민주주의가 될 수 없음을 지적했다. 14년 전 민진당의 성립은 타이완의 민주화를 여는 동력이 되었고, 14년 후인 오늘날 민진당이 총통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타이완의 민주주의는 마침내 유아기를 벗어나 성장의 길로 내닫게 되었다. 민진당이 맞고 있는 도전은 매우 크고 힘든 것으로, 위에서 언급한 정당의 재편과 사회조직의 변동에서부터 헌정구조의 문제와 양안관계에 대한 압력에 이르기까지 모두 타이완의 새로운 지도자의 지혜와 능력을 검증하게 될 것이다. 타이완의 민주주의에 대해 높은 기대를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국민이 공공사무에 적극 참여하고 노동자와 자본가가 함께 경제적 성과를 향유하고, 남성과 여성이 서로 평등하게 대하고, 서로 다른 족군·연령·생활경험에 속한 사람들이 상호 존중하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에 이르기 위해서 타이완이 아직도 한참 먼길을 가야 함을 알고 있다.

[孫準植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