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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혜주 丁惠珠
1963년 전남 광주 출생. 1988년 『노동문학』에 ‘한백’이라는 필명으로 「동지와 함께」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강·섬·배
스무살 시절 나는 강물에 살짝 발을 디뎌보고 물이 너무 차갑다고 울음을 터트리는 계집애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땅의 흙과 풀꽃들, 그 숨결을 닮아 쉼없이 흐르는 물줄기처럼 후미진 황톳길을 돌아 산야를 보듬고 막힘없는 물살로 시퍼렇게 굽이쳐, 이윽고 바다에 이르고 싶었다.
나는 강가에 서 있다. 강물은 검게 굽이치고, 바람은 내 짧은 머리칼을 갈가리 날린다. 잿빛 뼈대를 드러낸 활엽수림 사이로 새떼들이 날아오르고, 잡풀들은 메마른 몸을 뒤척인다. 부서진 것들이 가슴속에서 모래알처럼 서걱댄다.
강가 솔숲 사이로 난 오솔길에는 흰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 인기척에 놀란 새들이 푸드득 날아오를 때마다 훤칠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키큰 소나무들. 솔숲을 지나면서 강물은 조금씩 물길이 휘어든다. 굽이도는 물길은 아득히 끝없이 이어진다. 그 물길을 거슬러올라가면 어느 골짜기엔가 시린 물방울을 머금은 잔빙을 만날 수 있을까. 서른살의 강. 스물네살의 강. 열일곱살의 강…… 강은 거꾸로 거슬러 흐르며 추억들을 삶으로 다시 띄워 보낸다. 나는 순백의 눈을 밟으며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올라간다.
갑자기 길이 뚝 끊긴다. 강기슭에 잇대어 있던 솔숲은 조금씩 강심을 향해 돌출하여 작은 곶을 이루며 끝나고 있다. 아니, 솔숲이 돌출한 것이 아니라 물길이 솔숲을 버리고 저 혼자 굽이도는 것이다. 길이 끊기고, 한정없이 물길을 거슬러올라가보리라던 내 희망도 끊겼다. 내가 선 자리는 작은 곶, 강 한가운데 섬처럼 떠 있다.
길이 끝나버린 강기슭에는 낡은 조각배 한 척이 누워 있다. 틀어지고 빛이 바랜 몸체, 바람에 삐꺽거리는 뼈마디…… 조각배의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고, 물웅덩이에는 살얼음이 박혀 있다. 그 얼음 속에 추억처럼, 빨간 단풍잎 한 장이 결빙되어 있다. 썩어서 흙에 스며들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추위로 얼어붙어버린 것일까. 단풍잎의 색깔은 너무나 붉고 선명해서, 마치 조각배의 심장 같다.
금탑가든
어스름이 가든의 윤곽선을 수묵화처럼 지우며 빈 들녘으로 빠르게 내려앉고 있었다. 금탑가든은 먹빛이 번져가는 대숲을 배경으로 검푸른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조경공사를 마무리짓지 못한 탓인지 가든의 정원은 황량해 보인다. 어둠이 흥건히 고인 주차장에는 금탑가든의 상호가 찍힌 승합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문득 어스름 속으로 잦아들던 가든이 소스라치듯 깨어난다. 이층 거실이 하얗게 밝아지고, 지붕 위 네온탑과 건물의 윤곽선을 두른 전구들이 순식간에 색색깔의 불빛을 켜든다. 가든의 문이 열리더니 초로의 여인이 마당으로 걸어나온다.
“오메! 추운디 뭘라고 허구헌 날 밖으로만 싸돈당가?”
마당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자 여인은 걱정스런 기색으로 다가온다. 마당에 놓아기르는 날짐승들을 거두려는 참인지 쌀겨가 든 오가리를 들고 있다.
“밥 묵어야제? 혼자 밥 묵기도 징했는디, 고모가 있은께 그래도 낫구만.”
닭장 앞에 서서 구구구, 모이를 흩뿌리며 올케언니는 한숨을 내쉰다.
“오빠는 오늘도 늦을란갑서. 밤낮 부동산업자다, 시청 공무원이다, 만나믄 술타령이제. 그나저나 땅이나 빨리 팔려야 쓸 것인디, 가든이라고는 가물에 콩 나데끼 손님 구경도 못 허겄고 은행 빚은 쫄리고…… 땅 깔고 앉아 있으믄 뭐 헐 것이여! 땅 거지가 따로 없제.”
드ᄃᆞᆯ강 일대가 유원지로 개발되면서 사촌오빠들이 수십억대의 땅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은 몇년 전부터 듣고 있었다. 15년 전인가 젖소를 길렀다가 망한 뒤로 버려둔 초지가 갑자기 금값으로 치솟은 것은, 마이카 붐으로 인근 도시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늘어난 행락객 때문이라고 했다.
“원래는 저그 갈대밭 건너편에 5층짜리 모텔을 지슬라고 했제. 근디 아이엠에프 맞아서 은행대출은 안되고, 그나마 빚으로 지은 가든까정 손님이 뚝 끊어지니 워쩔 것이여. 땅을 팔라고 내놨는디, 아! 나서는 작자마다 값을 삼분지 일로 내려치니 기가 막힐 노릇이제. 방애실 자리도 새 집 안 지슬라믄 헐기라도 해야 쓸 것인디, 아조 구신 나오게 생겼고……”
주방에 들어가서도 구구절절 이어지는 올케의 푸념을 나는 말없이 듣고만 있다.
낮에 손님을 치렀는지 올케가 차린 밥상에는 제법 반찬이 걸다. 붕어찜, 홍어회, 파김치와 동치미, 물미역에 호박전, 메추리알이 놓여 있다. 식탁 위 가스레인지에는 꿩탕이 든 뚝배기까지. 하지만 나는 겨우 호박전 한개를 집어서 꾹꾹 되새김질하듯 씹고 있다. 그나마 명치에 걸려서 내려가지 않는다.
“워째, 손님들이 먹다 남은 것 줘서 그런가아?”
동치미 국물만 마시는 나를 보고 올케는 미안한 기색이 된다.
“아뇨. 속이 안 좋아서……”
나는 도리어 올케에게 미안해진다. 이곳에 온 첫날 사촌오빠는 닭을 잡아주었다. 솔잎칡닭이라고 우리 집 명물이어야. 토종닭에다 깨끗이 씻은 솔잎하고 칡을 압력솥에 같이 넣고 한 20분 푹 곤 것이여. 살코기를 찢어서 기름소금에 찍어 먹는데, 육질이 쫄깃하고 향긋한 것이 신선했다. 맛나제? 젤로 큰 놈으로 잡았은께 많이 묵소. 오빠 내외가 번갈아가며 권하는 바람에 다리 두 쪽을 다 먹은 나는 속이 더부룩해서 한밤중에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토해내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몇개 되도 않는디, 무담시 손에 찬물 묻힐 것 없어.”
설거지할 그릇들을 챙기면서 올케는 내게 손사래를 친다. 환갑을 바라보는 올케언니에게 시누이 대접이라니. 행주로 상을 훔치다 말고 나는 설거지하는 올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희끗희끗해진 귀밑머리,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얼굴, 허리 아래로 투덕투덕 불거진 뱃살, 올케의 몸을 휩쓸고 간 세월의 흔적들.
나는 올케의 새색싯적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아홉살 땐가 어느 해 여름에 사촌오빠네 부부는 서울 우리 집으로 신혼여행을 왔었다. 그들은 장판을 들추면 빈대가 기어나오는 우리 집 뒷방에서 사나흘간 머물렀다. 한여름이었는데 새색시는 초록색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입고 땀을 뻘뻘 흘렸다. 화장이 들뜬 얼굴색은 어찌 그리 검은지, 검은 피부 때문에 원색의 한복이 더 촌스럽고 칙칙해 보였다. 오빠는 아버지에게 형들이 자기 앞으로 된 땅을 떼먹고 주지 않는다며 형제들을 싸잡아서 욕했다. 부조 들어온 돈이 빈다면서 자기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그 옆에서 별로 예쁘지도 않은 색시는 촌스러운 한복을 입고 한쪽 무릎을 세운 채 그린 듯이 앉아 있었다. 사흘 내내 오빠는 색시를 놔두고 혼자 휭하니 나가서 밤늦게 술냄새를 풍기며 돌아오곤 했다. 나는 색시가 너무나 가여웠다.
이십년도 훨씬 더 넘은 그 기억이 지금도 선명한 것은 아마 당시 그녀의 모습이 아홉살 소녀의 결혼에 대한 관념을 여지없이 배반한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신부는 웨딩드레스처럼 하얗고, 신혼여행은 핑크빛이어야 한다는…… 내가 이곳에 처음 도착하던 날 올케는 나를 바라보며, 오메! 그때는 애기였는디, 참 세월 빠르요잉 했다. 내가 올케의, 여자로서의 인생의 첫 장면을 기억하듯이, 올케 역시 까만 눈동자를 말똥거리던 말라깽이 소녀를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커피 한잔 마셔야제?”
올케가 가스레인지에 물주전자를 올려놓으며 나를 돌아본다. 올케의 얼굴 어디에도 옛날 그 가엾은 새색시의 흔적은 없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녀의 인생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이 집의 물건은 대부분이 새것이다. 이층 거실에는 500리터짜리 냉장고와 29인치 텔레비전과 백만원대의 오디오가 놓여 있다. 아침마다 고급 캐주얼복에 최고급 지프차를 몰고 나가는 오빠의 모습은 지방유지로서의 품격마저 엿보인다. 오빠는 집과 가전제품을 새로 개비한 마당에 마누라까지 갈고 싶어하지 않을까. ‘방애실떡’에서 ‘가든떡’으로 호칭이 바뀐 올케,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런 경제적 실권도 없이 한식집의 주방아줌마로 늙어갈 여생은 아닌지.
“남편이 징허게 이해심도 많고 자상헌갑서. 몇날 며칠 혼자 여행도 허고 얼마나 좋을까아잉!”
물 묻은 손을 행주에 닦으며 올케는 정말 부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씁쓸하게 웃기만 한다.
내가 묵고 있는 방은 금탑가든의 아홉개 방 중에서 가장 귀퉁이에 있는 작은 방이다. 둥근 갓을 씌운 백열등과 천장에 매달린 환풍기, 가스레인지가 연결된 큰 식탁, 카운터로 연결된 인터폰과 방석 몇개. 내가 온 뒤로 가져다놓은 이불 한 채를 빼면, 연인들이 분위기있는 식사와 밀회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방이다.
온종일 보일러를 넣어둔 방안은 따뜻하고 건조하다. 커피잔을 식탁 위에 놓고 나는 창문을 연다. 창호지를 바른 격자무늬 덧창을 열면 통유리창 너머로 넘실대는 어둠. 시골의 밤은 초저녁에도 칠흑처럼 정밀하다. 해가 지면 나는 대책없이 방에 들어앉아야 한다. 창문 쪽으로 밀어붙여놓은 식탁에 걸터앉아서 나는 오래도록 창밖의 어둠을 응시한다. 창에 비친 내 얼굴과 창 저편의 어둠, 그리고 어둠속에 깜박이는 몇낱 불빛들…… 불빛들은 가깝게도 멀게도 보인다. 가까운 불빛은 강 한가운데 솔밭유원지의 노점이 밝힌 등불이다. 먼 불빛은 강 건너편 방죽 너머 들판 끝자락에 점점이 엎드린 마을의 불빛. 아스라이 뜬 인가의 불빛들이 하나둘 사위다가 이윽고 다 잦아들면 사방은 먹물을 뿌린 듯이 캄캄하고 소리만이 가득하다. 빈 들녘을 달리는 칼바람 소리, 뼈를 가는 듯한 물소리, 뒤란에 뒤척이는 대숲 소리, 먼 산의 솔바람 소리…… 그리고 정적. 바닥 없는 정적 속에 자울다가 문득 눈을 뜨면 다시 물소리가 되살아난다.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댄다. 창가를 서성이다 돌아서는 차디찬 달빛, 어둠속에 뜬 내 얼굴이 산산이 부서진다. 문득 발치에 뭔가가 거치적거린다. 검은 컴퓨터 가방. 이 방에 들어온 첫날 식탁 밑에 밀어넣고 나서 한번도 꺼내보지 않은 그것. 집을 나올 때마다 가장 먼저 챙겨들고 나오는 건 그 노트북 컴퓨터였다. 여자가 집 나갈 때 애를 끼고 나가는 것과 애를 팽개쳐두고 나가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하시더라는 시어머니. 그 말을 전하면서 남편은 말했다. 넌 애 대신 컴퓨터를 끼고 가는 여자지! 나는 입술을 지그시 물며 컴퓨터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녹슨 밥주발처럼 식탁 위에 덩그러니 올라앉은 컴퓨터는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다. 운이 좋으시네요. 다행히 하드는 손상이 안됐어요. 액정화면만 갈면 되겠어요. 나는 컴퓨터의 몸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왼쪽 모서리가 찌그러진 상처투성이 내 컴퓨터.
문득 잠이 깼다. 방안이 환하게 밝다. 하지만 아침은 아니었다. 흐트러진 내 숨소리. 바람이 몹시 부는지 유리창이 덜컹거린다. 어디선가 자명종 소리 같은 신호음이 울린다. 인터폰이다. 벽에 붙은 송수화기를 들자 오빠의 음성이다. 작은아버지 전화여. 카운타로 돌려놨은께 받아봐라. 방문을 열자 복도의 어둠이 왈칵 몰려든다. 신발을 찾아 신고 카운터로 가서 송수화기를 들자 끙, 하는 앓는 듯한 아버지의 습관적인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낮에 전화했더니 없더구나.”
“………”
“우산리 선산에는 가봤냐?”
우산리! 순간 현기증처럼 스치는 선연한 주홍빛. 낮은 토담 위로 드리운 저 유월의 석류꽃……
“날마다 밖에 나간담서 거그도 안 가보고 뭐했냐?”
“………”
“할머니한테 꼭 가봐야 쓴다. 내가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해야. 자꼬 어머니가 보인다 마다. 할머니가 너를 젤로 이뻐 안 했냐? 항차 봄 되믄 어머니를 한번 뵈러 가야 쓰겄다.”
아버지는 뒤숭숭한 꿈자리 끝에 내가 이미 여러번 들은 이야기를 또 꺼내신다. 몇년 전 할머니 묘를 이장할 때 보니 묫자리에 물이 들어서 탈골이 안되었더라, 머리카락과 한쪽 볼이 시커멓게 썩지 않고 있어서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내가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한 것 같다…… 아버지는 어쩌면 지금의 내 처지가 조상 봉제사를 잘 모시지 못한 탓이라고 여기시는 걸까.
“올 시제는 일가친척 다 불러서 정식으로 모셔야겄다. 아랫것들한테만 맡겨논께 영판 마음이 안 놓인다 마다. 긍께 너도 할머니한테 꼭 가봐야 써.”
당부조이던 아버지의 음성이 갑자기 버럭 커졌다.
“뭣 났다고 전화헌디 옆에서 고시랑고시랑해쌓는가?”
다음 순간 수화기 너머로 어린애처럼 팩 토라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손은 핏줄이 아니간디? 우리 엄마, 아버지 산소도 가봐야제!”
“허, 참! 니 엄마가 저러고 노망기가 심해진다 마다. 인자는 뭐든지 나하고 똑같이 헐라고만 하니……”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는 사이에도 엄마의 고시랑거리는 소리는 희미하게 이어진다.
“동신 가믄 우리 학교에도 가봐야제. 거그 현관에 내가 쓴 붓글씨가 걸렸어야. 아는 것이 힘이다. 지·덕·체……”
“아이고! 자네 저리 좀 가소, 저리 가!”
“그래. 나 갈라요! 영산포 우리 고모 집 가서 살란께 나 보내주쇼!”
수화기 너머로 생생하게 들려오는 두 양주의 말다툼을 나는 입술을 지그시 문 채 듣고 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도 그것은 내게 잔잔한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불을 켜야지. 카운터의 전원 스위치가 어디 있더라. 하지만 내 손이 전원 스위치를 더듬어 찾기도 전에 다시 목청을 가다듬은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 참에 우산리 가믄 선산지기 송가한테 말 좀 전해라. 봄 되믄 내가 한번 갈 것인게, 멧등에 잣나무 가지도 치고 봉분의 흙도 두둑하게 덮어두라고. 비석에 먹물도 바래기는 했겄다마는, 그것은 내가 가서 쓸 것인게 내비두고. 설쇠믄 할머니 제앙날도 곧 돌아온께, 니가 간 김에……”
귀가 어두우신 아버지는 일방적으로 같은 말을 몇번이고 되풀이 당부하신다. 나는 어둠속에 서서 아버지의 당부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예, 예, 형식적인 대답을 하고 있다. 문득 아버지의 음성이 낮고 긴한 어조가 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귀상이한테는 니가 소설 쓰는디 취재헐라고 며칠 묵는다고 말해뒀다.”
“………”
무언가 더 덧붙이고 싶으신 듯 몇초간의 망설임 끝에 아버지는 전화를 그냥 끊으셨다. 어둠의 심부로 한없이 빨려드는 듯한 신호음. 나는 둔기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다. 아버지가 입안으로 삼킨 말은 무엇이었을까. 혹여라도 이혼했단 말은 하지 말어. 아버지는 내가 너무 솔직할까봐 염려스러우신 거다. 하긴 아버지에게 자식들은 말년에 남은 유일한 자부심이니까. 그 많은 재산 다 날렸어도 자식복 하나는 있어서, 자식들이 전부 혼자서 대학 공부하고 시집 장가 가서 잘살고 있다는 자랑. 내 이혼은 아버지의 그런 자부심에 상처를 입힌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가 내 여행에 대해서 둘러대신 명분이 소설 취재라는 건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휴양차 왔다든지, 달리 둘러댈 이유도 없지는 않았을 텐데……
복도는 검은 물속처럼 캄캄하다. 나는 어느 물고기의 창자 속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할딱이는 아가미로 새어드는 차디찬 달빛, 물살에 찢긴 갈대밭 위로 몸을 누이는 바람소리.
드ᄃᆞᆯ강
나는 날마다 강가에 나와 강물을 바라본다. 강물은 얼어붙어 있다. 얼어붙은 강은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고, 등골까지 이른 차디찬 한기로 내 영혼을 마비시킨다. 잎을 벗어버린 나무들은 강물을 빨아들이기를 거부한 채 잠들어 있다. 풀린 날도 강물은 마치 고여 있는 것 같다. 바람이 불면 종종 거슬러 흐른다는 느낌마저 든다. 맑은 날이면 강물은 무너져내리는 햇살에 사금파리 같은 잔물결로 반짝인다. 강물은 밝은 파랑이 되고 마른 풀들은 반짝이고 수면을 건너온 바람은 갈댓잎 끝에서 누워 잔다. 하지만 대부분 날은 흐리고 해는 얼음에 갇힌 꽃처럼 창백하다. 노을도 없이 해가 지고 땅거미가 스멀거리면 강물은 어슴푸레하게 풀어진다. 빛과 어둠 사이에 발이 들린 날짐승들이 부산해진다. 먹물처럼 검어지는 강물, 엷은 달빛이 강물에 녹아든다. 어둠이 깃들이면 그제서야 물소리가 들린다.
이 강의 이름은 드ᄃᆞᆯ강이다. 지도에 나오는 공식 이름은 지석천(砥石川).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모두 드ᄃᆞᆯ강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온 후 처음 이삼일 동안 나는 낯선 두려움 때문에 다리 위에만 서 있었다. 2차선의 아스팔트 차도와 벽돌색 잔돌이 박인 인도를 양옆에 갖춘 지석교는 상당히 높아서, 다리 위에 서면 드ᄃᆞᆯ강 일대의 낮은 구릉과 산자락에 안긴 마을 들, 드넓은 평야를 가로지르는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온종일 다리 난간에 기대어 강물을 굽어보았다.
사나흘 후에야 나는 다리를 건너서 강기슭으로 내려갔다. 강 둔치의 비탈진 자투리땅에 흔적처럼 남아 있는 채마밭을 가로지르고 잡목림과 갈대밭을 지나 강기슭에 이르자 시린 물소리가 들렸다. 발 아래 잦아드는 잔물결, 물결에 씻겨 하얗게 뿌리를 드러낸 갈대와 마른 풀의 잔해들이 발치까지 밀려왔다. 몸 전체를 강물 위로 비스듬히 기울인 채 여윈 가지들을 수면에 드리운 버드나무, 물에 씻겨 백골처럼 드러난 버드나무 밑둥치에 앉아 나는 쓰러진 갈대밭과 갈대밭에서 날아오르는 검은 새떼들을 바라보았다.
지리에 익숙해지자 나는 차츰 용기가 생겨서 제법 멀리까지 걷기 시작했다. 새벽 서리에 반짝이는 풀덤불을 밟고 나가서 온종일 강가를 거닐다가, 저물어 어둑해지면 검누른 갈대밭에 무너지는 긴 그림자를 끌고 돌아오곤 한다. 내 바짓단에는 늘 강가의 젖은 모래흙과 마른 풀의 잔해가 묻어 있다.
강기슭을 따라 걷다가 지치면 나는 솔밭유원지의 평상에서 다리 쉼을 하곤 한다. 솔밭 사이로 어지럽게 들어선 식당들은 비수기라서 대부분 문을 닫았다. 눈석임물을 뒤집어쓴 노점의 평상들만이 강물 위로 반쯤 몸을 드리우고 있을 뿐이다. 평상 끝에 앉으면 바로 발 아래 강물이 넘실거리고, 내 몸은 아스라한 어지러움으로 강물에 떠 있다. 바람이 불면 평상 기둥에 설치해놓은 선풍기의 날개가 저 혼자 빙글빙글 돌아가고, 색색깔의 꼬마전구를 매단 전깃줄도 덩달아 흔들린다. 나부끼는 건 깃발도 바람도 아니고 마음이라던 누군가의 말, 내 마음에도 물살이 인다.
물새가 강물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순간이면 강 한가운데 드리운 구름다리의 물그림자도 놀란 듯 푸드덕 출렁인다. 물그림자의 부드럽게 풀어진 윤곽선이며 일렁이는 물무늬는 실제의 구름다리보다 훨씬 더 고혹적이다. 세월의 깃을 털며 조용히 삭아가고 있는 구름다리…… 어느 날인가 나는 구름다리에 이끌려 철조망이 쳐진 입구까지 다가간 적이 있었다. ‘이 구름다리는 노후되어 추락 등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통행이 매우 위험하여 폐쇄하고 출입을 금지하오니 통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녹슬고 글자가 희미해진 통행금지 표지판 옆으로 날카롭고 촘촘한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던 다리일까. 언제 폐쇄되었을까. 나는 머뭇머뭇 다리를 살펴보았다. 다리는 굵은 로프와 철선으로 버티게 되어 있는데 상판에는 나무판자를 가로로 댔다. 거미줄이 무성한 난간, 이가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나무판자, 허공에 가까스로 걸린 외줄기 밧줄! 문득 귓속에 무언가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울음은 이내 사라졌지만, 나는 홀린 것처럼 구름다리 주변을 오랫동안 서성거렸다.
나는 오늘 강을 끼고 하얗게 뻗어 있는 방죽길을 따라 강물을 거슬러오른다. 방죽길에는 키큰 미루나무들이 까치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다. 하늘의 푸르름을 온통 들이마시기라도 할 듯 올곧게 뻗어오른 나무들, 햇살이 방죽길 저 끝에서 눈부신 소용돌이를 그리며 흩날리고 있다. 문득 어디선가 푸르른 내음이 불어온다. 푸르른 내음은 휘어도는 강의 저 위쪽 상류로부터 불어온다. 새잎이 향기로운 아카시아숲, 파문처럼 잇따라 퍼져오는 등꽃의 향기, 바람이 불면 잎사귀들이 파도치며 뒤집히던 담쟁이덩굴…… 이 물줄기를 거슬러올라가면 흰 블라우스에 푸르죽죽 풀물이 든 단발머리 소녀를 만날 수 있을까. 한번도 가보지 못한 거리와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생이 미지의 호기심이고 무한한 동경이던 그때, 그 꽃시절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면…… 문득 차갑고 아픈 바람이 불어왔다. 눈앞을 막아서는 덤불숲. 가시딸기가 우거진 덤불숲은 괴괴함이 감돈다. 그 끝에 보이는 무덤 하나.
방죽길 건너편은 강변 국도다. 나는 이제 국도의 갓길을 따라 물줄기를 거슬러올라간다. 강과 비슷한 높이에서 시작된 국도는 점점 높아지면서 강과 멀어지고 갓길의 폭도 좁아진다. 강과 내가 걷는 갓길 사이에는 활엽수림이 빽빽이 들어차고,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검푸른 강물이 보인다. 가끔씩 대형트럭들이 옷깃이라도 챌 듯 무서운 속도로 옆을 지나친다. 트럭들을 피해 나는 갓길과 비탈진 활엽수림 사이에 설치된 노란 안전석 위로 올라선다. 안전석 위를 두 걸음 걷고 한 걸음 건너뛰며 걷는다.
드ᄃᆞᆯ강 유래 비석을 발견한 것은 구름다리 조금 못 미쳐서였다. 무궁화 무늬가 돋을새김된 타원형의 화강암을 떠받친 검은 판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어 있었다. ‘이 강은 예부터 명경지수와 같이 깨끗하여 나주인의 유일한 식수원과 농업용수로 이용하기 위해 고려 말엽 인근 주민들의 천신만고의 역사로 보를 축조하였으나 홍수의 범람으로 붕괴되어 실의에 노심초사하던 중 당시 고을 수령의 현몽에 백발도사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이 곱고 효성이 지극한 처녀를 제물로 수장 보를 쌓은 후부터는 홍수와 재해의 피해를 면하고 혜택을 누려오면서 한많은 드ᄃᆞᆯ 처녀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드ᄃᆞᆯ강이라 불리어오고 있어 지금도 비가 올 때나 강물이 보에 넘칠 때는 애처로운 드ᄃᆞᆯ처녀의 애곡이 들린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드ᄃᆞᆯ강. ‘드ᄃᆞ다’는 ‘디디다’의 옛말, ‘드ᄃᆞᆯ처녀’는 밑에 고여서 딛고 서는 처녀라는 뜻일까.
문득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귀신이야기 해주끄나? 정전이 된 날 밤 나를 놀리려고 으스스 목청을 낮추던 그녀. 우리 고향에 드ᄃᆞᆯ강이라고 강이 하나 있는디, 해마다 사람을 하나씩 잡아묵어야. 처녀도 잡아묵고 총각도 잡아묵고. 비가 많이 온 날 한밤중에 가만히 들으믄 강물이 드ᄃᆞᆯ드ᄃᆞᆯ 운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안 무섭냐? 묻다가 제풀에 까르르 웃어버리던 그녀.
널 만나야 해! 널 찾아내겠어! 때마침 국도 끝에서 올라오는 버스를 향해 내 마음은 급류처럼 쏟아진다. 한순간 버스가 날카로운 경보음을 울리며 나를 스쳐간다. 나는 안전석에 주저앉고 만다. 안전석에 주저앉아서 전설이 새겨진 비석을 그저 망연히 바라볼 뿐이다. 전설은 이 강물과 비옥한 농토에 깃들인 인간의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모든 노동의 결실을 순식간에 휩쓸어버리는 강물의 범람과 그에 맞선 인간들의 투쟁, 처녀 수장이라는 제의적 절차. 공동체의 구원은 마음이 곱고 효성이 지극한 처녀, 가장 순정한 영혼을 희생양으로 필요로 했던 것일까. 나는 강물을 바라본다. 몇천년간 고운 모래와 생생한 흙을 실어 날랐을 유구한 물줄기, 순식간에 개인의 운명을 덮쳐와서 휘감아가는 잔혹한 범람…… 그러나 오늘 강물은 겉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깊은 슬픔을 봉인한 채 고요히 흐르고 있다.
강물은 구름다리를 지나면서 조금씩 왼쪽으로 휘어돌아간다. 아득히 상류로 이어지는 물줄기. 나는 몰래 물줄기를 당겨본다. 점점 좁아지던 갓길은 구름다리를 지나면서부터는 아예 없어져버린다. 물길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안전석 위로 올라서서 서투른 어름사니가 되어야 한다. 국도는 일직선으로 달리고 물줄기는 왼쪽으로 점점 더 굽어든다. 강물이 활등처럼 휘어져 들어간 곳, 국도와 강물이 완전히 갈라지는 지점은 ‘장미나무집’이라는 음식점이다. 장미나무집 마당 앞으로 강기슭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나 있다. 그 소슬한 오솔길은 물안개가 감도는 듯 아련하게 떠 있다. 시야 밖으로 가물거리는 아실한 소실점. 그 길을 따라가면 무언가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내 회한과 그리움의 뿌리께…… 하지만 나는 오솔길 들머리에 짓다 만 호텔 근처에서 머뭇거린다. 내장공사 직전에 공사를 중단한 듯 휑 뚫린 구멍들이 괴기스러운 호텔. 야영을 해도 좋을 만큼 넓은 주차장에는 부탄가스통과 깨진 유리병, 불에 그을린 시커먼 흉터들이 군데군데 나 있다. 저만치 주차장 끝에 버려진 검은 승용차. 나는 그만 용기를 잃고 만다. 그래. 오늘은 너무 멀리 왔어.
강물을 거슬러오르는 것을 포기한 나는 다시 ‘장미나무집’으로 돌아온다. ‘장미나무집’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셔터가 내려진 입구에 눈석임물로 얼룩진 커피자판기가 서 있었다. 으스스 끼치는 한기에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자 컵이 뚝 떨어졌다. 하지만 커핏물은 내려오지 않는다. 나는 빈 컵을 들고 헛일인 줄 알면서도 장미나무집의 셔터 문을 서너 번 두드린다. 화단에 눈이 간 것은 그 순간이었다. 밑둥치를 짚으로 감싼 장미묘목들. 제법 줄기가 굵은 묘목들은 누런 발톱 같은 가시와 빨갛게 잘 여문 열매들을 매달고 있었다. 가시줄기 사이에 아직 떨어지지 않은 시든 꽃송이가 바람을 타고 있었다. 검붉게 말라붙은 꽃잎 몇장……
그해 오월의 장미를 기억한다. 선인장만큼이나 날카로운 가시가 돋은, 학생들의 집회를 막기 위해서 그들이 광장에 심었던 가시장미. 학생들은 장미를 뽑았고, 그들은 다시 장미를 심었다. 학생들이 다시 장미를 뽑아서 정원에 옮겨 심자, 그들은 밤새 장미를 다시 광장에 옮겨 심었다. 생채기처럼 움푹움푹 흙이 팬 광장, 몇차례나 뽑히고 옮겨 심어지는 동안 꺾이고 시들어버린 장미꽃…… 그해 오월 장미는 하나의 강력한 정치적 은유였다. 더이상 오월의 여왕, 어린 왕자의 연인일 수 없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 장미를 뽑는 사람과 장미를 심는 사람, 그리고 장미를 심지도 뽑지도 못하면서 장미의 운명을 슬퍼하는 사람. 하지만 개중에는 그 슬픔을 부끄러움이 아니라 힘으로 전화시키는 몇몇 사람도 있었으리라. 힘이 되는 슬픔,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싸움에 나서는 사람. 그것은 다분히 미학적인 결단이다.
장미가시에 찢긴 팔뚝의 상처에서 점점이 스며나오던 핏방울을 바라보며 나는 일기장에 쓴다. 천한 피의 어여쁨, 시를 쓰는 부끄러움. 얼마 후에는 키만큼 쌓인 습작 시들을 전부 태워버린다. 피를 갈고 싶어! 자기부정을 향한 자학에 가까운 열정에 사로잡힌다. 그 가파른 전환 이면에는 광주백서의 충격이 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 사이에/피눈물을 흘리는/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라는 시로 시작되는 그 문건은 실존주의와 탐미주의로 쌓아올린 관념의 성채를 허무는 치명타이다. 이제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자만 대충 꿰어맞춰 읽어가던 일어판 로자 룩셈부르크 전기. 감성과 이성으로 양끝이 파랗게 타오르는 촛불 같은 여성. 그 여성은 스파르타쿠스 봉기의 실패 이후 파시스트에 의해서 학살당해 운하에 던져진다. 혁명은 이제 맑스나 로자를 넘어서 내 안에서 깊이 혁명이 된다. 어떤 관념의 끝도 혁명으로 연결된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고민하다 좌절한 지점에서, 신동엽의 ‘금강’이 흐르다 말라버린 곳에서, 김수영의 고독한 자유에의 비상이 끝나는 곳에서, 혁명은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나를 향해 열려 있었다.
해가 얼음에 갇힌 꽃처럼 차갑게 사위어가고 있었다. 여윈 강물 위로 비껴드는 석양빛. 나는 천천히 장미나무집을 벗어나 국도로 나온다. 다시 구름다리 옆을 지날 즈음에는 드ᄃᆞᆯ메 물그림자가 강물보다 더 검게 풀어지고 있었다. 노을의 보랏빛 잔영을 머리에 이고. 긴 잠에서 깨어난 듯 검고 고혹적인 자태를 강물 위에 드리운 구름다리. 이승과 저승, 차안과 피안의 경계에 걸린 가파른 외길…… 바람도 없는데 다리가 미미한 소리를 내며 출렁거린다. 이상하다. 그 다리는 바라보면 볼수록 가슴이 서늘해진다.
독서하는 소녀상
“워째 소설은 잘 써지냐?”
아침에 가든을 나서려는데 주차장 앞에서 마주친 오빠가 내게 묻는다. 순간 화끈해지는 얼굴. 아버지의 전화 때문에 이 며칠 나는 곤혹스러움에 처하게 되었다. 무슨 소설을 쓴디야? 늘 대화에 굶주려 있는 올케는 다음날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 난감함이란. 소설가라지만 내 본명으로 소설을 발표한 적도 없고, 내용도 그들에게 보여주기엔 앙상한 뼈다귀일 뿐이다. 그것조차도 너무나 오래 전 일. 이제 내가 다시 소설을 쓰는 것은 관 뚜껑을 밀고 나오는 것만큼 힘든 일인데……
“날도 푹헌디 우산리 한번 가볼라냐?”
마당 한가운데로 차를 몰고 나온 오빠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묻는다.
“나중에……”
우물우물 말끝을 흐리는 내게 오빠는 한번 더 권유한다.
“델다주라고 작은아버지가 나한티 신신당부하시등만.”
“혼자, 찾아갈 수 있어요.”
“허긴 몇년 전에 한번 가봤지야?”
차창을 올리면서 오빠는 쯧! 혀를 차듯 덧붙인다. 너 알아서 해라.
들머리 쪽으로 사라지는 지프차를 바라보다가 나는 마을 안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마을회관 앞 고샅길로 접어들자 기와지붕을 인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아 있었다. 낮은 담장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일자식 서너 칸 농가들, 몇몇 집들은 보일러공사를 하는지 마당에 파이프와 연장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을 집들의 모습이 좀 이상하긴 했다. 정젯방에 잇대어 부엌을 높이고 보일러를 놓는 바람에 예전처럼 정제 뒷문을 통해서 뒤란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고, 집 양옆으로 방이나 헛간을 들이는 바람에 아예 뒤란이 막혀버린 집들도 있었다. 사촌오빠네 집을 포함해서 새로 지은 양옥집들도 대여섯 채가 넘는 것 같다. 치솟은 땅값으로 졸부가 된 노인들이 게이트볼을 치러 운전사가 딸린 자가용을 타고 광주로 나간다는 말이 아주 허풍만은 아닌지, 주변 풍광과 어울리지 않는 새집들이 있는 반면에 잡풀이 우북한 빈집도 여러 채 있었다.
우산리도 이렇게 변해 있을까. 산자락에 기대어 시냇물과 너른 들판을 바라보고 들어앉은 마을. 집집마다 살구가 노랗게 익어가고, 엄지손가락 만한 감들이 영글고 있었지. 주홍빛 석류꽃이 핀 미례의 고향집. 울 아부지가 딸 많다고 석류나무를 심궜디야. 열매 껍질을 대려묵으믄 여자들 병에 좋담서. 꽃빛깔이 너무 현란해서 꽃잎에 손을 댄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 그 두껍고 딱딱한 꽃잎이라니! 꽃받침은 그대로 석류 껍질이었어. 대숲이 울창한 뒤란, 손톱만한 땡감들이 열려 있던 감나무 그늘. 이 감나무 밑에서 달짝구리를 했어야. 손바닥이 시꺼멓게 빤질빤질해질 때꺼정 공깃돌을 줍다보믄, 팽개쳐논 애기들은 흙 파서 입으로 집어넣고 흙 속에 버러지도 먹고, 해거름 참에 콩밭 매다 돌아온 엄니가 찰싹 내 등짝을 때림서 그러제. 징헌 년! 장광 옆에 철 이른 접시꽃이 피어 있던 꽃밭. 우리 집 꽃밭이 얼매나 오졌다고. 해마다 작약, 접시꽃, 달리아, 분꽃, 백일홍, 봉숭아, 채송화…… 꽃들이 참말 흐드러지게 폈어. 딸부잣집이라 꽃밭 하나는 잘 된다고 온 동네 삼이웃이 다 샘을 냈단께. 매몰된 기억의 퇴적층 속에서 사금파리처럼 솟구치는 목소리. 차가운 바람이 그 목소리를 지우며 고샅길을 휩쓸어간다.
작은 초등학교를 발견한 것은 지향없는 내 발길이 고색창연한 제각을 지나고 비석거리를 돌아섰을 때였다. 산자락에 기대어 자리잡은 작은 분교. 노란색 교문에 하늘색 쇠울타리를 두른 학교는 양지바른 곳에서 자울고 있는 병아리처럼 밝고 고즈넉했다. 담장을 따라서 심어진 히말라야삼나무가 푸른 기운을 흩뿌리는 교정, 운동장 너머로 기역자로 들어앉은 건물 한 동과 놀이터. 나도 몰래 교문 안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회양목이 심어진 작은 화단이 나를 맞았다. 둥근 화단에 세워진 두 개의 비석. 교장 송덕비?! 아무리 시골학교라지만…… 게다가 그중에 하나는 우리 종씨, 아버지와 같은 항렬이다. 교장선생님 했던 큰아버지가 계셨던가? 아버지 위로 계셨다는 여섯 분의 큰아버지들. 정미소를 하고, 면장을 하고,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이었고, 수재였지만 요절을 했고, 해방후에 군수를 지냈는가 하면, 국회의원을 네 번이나 하셨다는 옛이야기 속의 주인공들. 할아버지가 금싸라기 같은 전답을 내놓아 쌓았다는 제방이며, 무상으로 지어서 군에 기증했다는 읍내 중학교…… 자라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집안의 옛 영화는, 하지만 내게는 아버지의 영락을 더욱 비참하게 보이게 했을 뿐이다. 또한 대학에 들어와서는 누린 것도 없이 계급적 원죄의식에 사로잡히는 한 근거가 되기조차 했다.
60년대 보릿고개에 승마를 하고 일제 오토바이를 타고 사냥과 낚시를 즐기며 코로나 자가용을 굴리던 아버지. 큰아버지와 동업으로 연탄공장을 경영하고 화순에 탄광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아버지는 큰어머니 쪽 친척들과 의견충돌을 빚은 뒤 독립해서 택시사업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망했다. 그후로도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지만, 일곱살 때까지 젖을 먹었다는 막내둥이 귀공자는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했다. 체면과 허례허식, 귀가 얇은가 하면 턱없이 오만하기도 했던 아버지는 애초에 사업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한 사업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명함과 회사 이름이 찍힌 메모지와 편지봉투를 몇천부씩 찍는 사람이었다. 그 종이를 다 쓰기도 전에 사업은 끝장났고, 우리는 남은 종이를 연습장으로 쓰곤 했다.
놀이터 쪽으로 걸어가자 시소 앞으로 알록달록하게 색칠된 고무타이어들이 땅에 반쯤 묻혀 있었다. 나는 노란 타이어 위에 걸터앉아 가냘픈 겨울 햇살이 내려앉은 운동장을 바라본다. 거기 한 아이가 떠오른다. 늘 운동장 그늘에 혼자 서 있던 아이. 너무 수줍어서 말을 더듬던 아이. 미술시간이면 도화지 가득 보라색을 칠해놓던 아이. 해질녘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늘 고역이던 아이.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서울로 이사왔을 때, 나는 아홉살이었다. 시흥군에서 막 서울시로 편입된 변두리 동네. 판자촌들이 동네 이름도 없이 이천세대, 삼천세대로 불리던 곳. 땅값 오르기를 기다리며 버려둔 논밭과 공사장에서 불어오는 흙모래가 종아리를 때리고, 쓰레기매립장의 파리·모기떼가 기승을 부리던 곳. 우리 가족은 삼천세대와 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막 들어서기 시작한 신흥 주택가를 전세로 전전했다. 끼니를 굶을 만큼 절대적 빈곤에 허덕인 적은 없지만, 아버지와 엄마 스스로가 가난에 적응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몸에 붙은 한량기를 벗어버릴 수 없었고, 선병질적이던 엄마는 식모도 없이 다섯아이의 치다꺼리하는 걸 몹시도 버거워했다. 한 사업을 끝장내고 몇달씩 집에 들어앉은 아버지의 울화증과, 생활고에 지친 나머지 발작적으로 터져버리던 엄마의 히스테리. 좌절된 욕망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서로를 할퀴는 것으로 곧잘 표출되곤 했다. 남편은 아내를 발로 차고, 아내는 큰애를, 큰애는 둘째를, 둘째는 셋째를, 막내는 강아지를 발로 차는 폭력의 하향씨스템. 나는 그 씨스템의 밑바닥에 있었다.
고즈넉한 슬픔이 가슴에 차오른다. 나는 운동장을 천천히 가로질러 본관 쪽으로 다가간다. 백엽상과 등나무 시렁이 있는 중앙 화단에 하얀 대리석 소녀상이 있었다. 독서하는 소녀상. 르누아르풍의 소녀는 탐스럽게 굽슬거리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무릎 위에 놓인 책에 갸웃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나는 가만히 소녀를 바라본다. 대리석의 차가움을 따스하게 만들 만큼 봉긋한 뺨과 거기에 어린 미소, 책을 펼쳐든 손가락의 섬세함…… 문득 가슴이 애잔해진다. 서글픈 울림과 종달새 같은 지저귐, 오후의 교실에 비껴들던 한 줄기 햇살과 그 빛띠 속에 날아오르는 먼지 같은 미립자들. 반짝반짝 빛나는 책의 요정들.
나는 물기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아이였다. 가끔씩 한밤중에 눈을 뜨면 나는 훌쩍훌쩍 소리 죽여 울곤 했다. 우리 가족이 너무 불쌍해서. 그런 밤이면 이불 속에 엎드려 유서를 썼다. 가족의 화목을 바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는 어느 여중생, 신문에 난 그 이야기를 나는 어디서 들었던 걸까. 그래, 나도 이렇게 하는 거야. 아홉살인 나는 생각한다. 어느새 내 눈앞에는 내 죽음을 슬퍼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엄마는 우시겠지. 작은언니는 후회할 거야. 동생은 누가 돌봐주지? 불쌍해. 오빠는 가슴아파하겠지. 모두들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내 무덤 앞에 하얀 꽃을 놓을 거야…… 그 상상은 너무나 서럽고, 서러워서 더욱 매혹적이다. 식구들이 읽고 모두 눈물을 흘리고 참회하려면 우선 나는 멋진 유서를 써야 해. 유서를 써서 베갯잇 속에 넣어두고 밤마다 꺼내서 문장을 고친다. ‘엄마, 아빠. 저는 저 세상으로 가요.’ 쓰다가 지우고 ‘저 세상’을 ‘하늘나라’로 고친다. 어떤 날은 내가 쓴 글에 내가 감동해서 지레 서럽게 운다. 유서를 쓰고 다듬는 동안 실제의 죽음의 방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오로지 내 관심은 온 식구를 울릴 만한 감동적인 유서를 쓰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유서의 행방을 모른다. 식구들 중 누군가 보고 없애버린 것인지, 베갯잇 빨면서 물에 젖어 녹아버린 것인지. 하지만 유서가 없어졌다는 걸 알고도 나는 별로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즈음 이미 나는 시인이 되겠다는 다부진 결심을 하고 있었으니까. 책 읽기의 행복이 시작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오후의 햇살이 비껴들던 방과후의 교실. 학급문고를 펼치면 책갈피에 잠자고 있던 먼지들이 빛띠 속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그것이 반짝반짝 빛나는 책의 요정들이라고 상상했다. 『빨간 머리 앤』 『집 없는 천사』 『플란더스의 개』, 한국전래동화집과 소년소녀세계명작동화집, 계몽사판 위인전집. 가난한 초등학교의 학급문고는 광화문에 새로 생긴 큰 서점으로 이어진다. 한겨울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 새문안길로 꺾어들면 쨍하게 몰아치던 찬바람, 레코드가게에서 울려퍼지는 존 바에즈의 노랫소리. 높푸른 겨울하늘처럼 서늘한 그 음성을 따라가면, 거기 새로 생긴 교보문고가 있었다. 그곳에는 샤갈의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 있고, 윤동주의 ‘순이의 얼굴’이 있고, 매 맞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신의 존재를 회의하는 이반의 고뇌와 연민이 있고, 디오니소스적인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니진스끼의 비상과, ‘낙타가 되고 사자가 되고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 니체도 있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노오랗게 흰 빵처럼 부풀어올라 어느 것이나 따스한 빛을 발하는 그 별들을 나는 현실보다 더 생생한 현실로 느꼈다.
독서하는 소녀상은 내 영혼의 그릇을 형성한 그 모든 것들을 아프게 일깨운다. 빛띠 속으로 날아오르던 요정들과 어스름녘 막 불빛이 켜지기 시작하는 광화문 네거리와 그 불빛 속에 넘실거리는 생의 바다, 그 바다를 향한 충일한 열망…… 그 모든 것을 사무치게 일깨워준다. 나는 독서하는 소녀상이 드리운 그늘 아래 오래도록 서 있다. 그리고 마음깊이 자문한다. 어쩌면 내게 혁명이란 책 읽기의 연장선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혁명이란 생을 향한 열망,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하고. 학살자에 대한 분노, 민중에 대한 부채의식, 자유, 민주, 평등……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스무살의 나를 추동한 가장 강력한 힘은 생의 총체성을 향한 열망이었다. 레닌이나 마오보다도 체 게바라에게 더 매혹당했던 것은 그의 전생애가 사랑하고 고뇌하고 결단하고 투신하는 섬광의 연속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해가 흠칫 오그라드는 것 같다. 해와 구름의 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는 하늘, 바람결이 거칠어진다. 운동장 가득 모래바람이 일고, 단상에 게양된 깃발들이 마구 펄럭거린다. 나는 학교를 한바퀴 돌아볼 양으로 건물 뒤쪽으로 돌아간다. 농가를 개조한 양호실과 숙직실, 펌프가 있는 수돗가와 변소, 한 모퉁이에 쓰레기를 태우는 화덕이 있었다. 검은 잿더미 위에 피어오르는 뽀얀 실오라기, 그 옆을 지나치려는데 문득 따스한 기운이 내 발목을 잡아당긴다. 잿더미 옆에 반쯤 탄 연탄재, 빨간 불구멍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발목이 아릿해진다. 아슴아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따스한 기운. 아련한 온기가 가슴 밑바닥을 헤집어 작은 불씨를 건져올린다. 섬광처럼 깜박이는 기억의 편린들.
우여곡절 끝에 손에 넣은 주민등록증. 냉동실에 하루 동안 넣어뒀다가 코팅된 앞면을 뜯어낸 후에 조심스레 사진을 뜯어내고 무궁화 스탬프 자국이 뭉개지지 않도록 교묘하게 내 사진을 붙인다. 그 ‘증’의 주인은 주소를 옮겨놓지 않아서 나는 충청도의 후미진 산골로 등본을 떼러 가야 한다. 그 여행에는 설레듯 눈발이 흩날렸던가.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시에 내려서 또 시외버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을 들어가야 했던 산골마을. 읍사무소 옆 다방에서 마셨던 유자차, 빨갛게 불구멍을 드러내 보이던 연탄난로, 시린 발목에 아슴하게 젖어오던 그 따스함…… 나보다 세살이나 어린 이종옥. 3남 4녀의 둘째딸이던 스물한살의 그녀. 부모님과 여든살이 넘은 할머니와 올망졸망한 네명의 동생들. 앞으로 내가 되어야 할 그녀의 삶을 가늠해보는 마음은 얼마나 착잡했던가.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한 무리의 여중생들을 만났지. 옆자리에 앉았던 유난히 뺨이 붉은 경아라는 이름의 아이. 졸업하면 도시로 갈 거라는, 통속소설 주인공 같은 이름의 경아. 그애의 희망에 문득 구로공단이나 가리봉역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얼굴들이 겹쳐지면서 나, 얼마나 애잔한 마음이 되었던지. 차창 밖으로 고된 생산을 끝내고 휴식에 들어간 들판과 순하디순한 산 능선이 흘러가고 있었다. 산자락마다 안긴 농가들, 굴뚝에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를 바라보면서 나, 혁명을 생각했던가. 혁명이란 단순히 국가권력의 전복, 물적 토대만의 변혁이 아닌, 실오라기처럼 연기가 피어오르는 농가의 조촐한 밥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가슴마다에 생명의 물꼬를 트고 강물처럼 살아 흐르는 역사를 심는 일이라고……
짧은 겨울 해가 곧 스러질 엷은 햇살을 흩뿌리며 산너머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 이상한 화단을 발견한 것은 쓰레기소각장을 지나 다시 운동장 쪽으로 나오면서였다. ‘면 지정 보호수’라는 팻말이 붙은 아름드리 동백나무, 그 아래 동상 세 개가 옹기종기 몰려 있었다. 큰 칼을 찬 등신대의 이순신 장군 동상. 횃불을 치켜든 유관순 누나의 작달막한 동상. 그리고 한쪽 팔에 책을 끼고 선 어린이 동상.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지 않아도 나는 그 밑에 뭐라고 씌어 있는지 안다. 내가 다닌 관악산 밑의 가난한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이 폐품을 수거해서 모은 돈으로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웠다. 이승복 어린이는 반공글짓기대회의 단골메뉴였다. 여고 시절에는 유관순의 후배라서 3·1절 행사에 불려나가느라 한번도 쉬어본 적이 없었다.
폐기처분된 지난 시절의 표징들. 한 시절을 풍미하며 운동장 한가운데 당당히 서 있었을 그들이 뒤란 한켠에 몰려 있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그들의 모습에 불현듯 겹쳐지는 한 장의 사진. 헝가리 부다페스트 외곽의 동상공원에는 관광객의 볼거리로 전락한 옛 체제의 각종 상징 조형물들이 모여 있단다. 신문에서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잠시 눈길을 주었을 뿐이다. 더는 비애도 열패감도 없이. 그런데…… 역광을 받고 선 동상들의 추연한 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발치에 뒹구는 핏빛 동백꽃 때문일까. 나는 지금 새삼스럽게 가슴을 베인다. 한때 나를 격동시키고 내 운명을 바꾸어놓았던 표상들. 맑스도, 로자도, 어쩌면 ‘그해 오월’까지도 이승복이나 이순신 동상처럼 지난 시절의 한 표징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는…… 그 느낌은 어찌나 스산한지 뼈가 시리다.
온몸에 맥이 빠져서 터벅터벅 학교를 벗어난 나는 다시 고샅길로 나온다. 비석거리를 지나자 정미소가 나온다. 해거름녘 사위어가는 긴 햇살 속에서 퇴락한 정미소는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녹슨 양철지붕, 서까래에 걸쳐진 삭아버린 컨베이어벨트, 기둥에 매달린 전표뭉치, 먹글씨로 “5되─8kg. 1말─16kg. 1.5말─24kg. 2말─32kg. 2.5말─40kg”이라고 씌어진 나무 팻말, 우묵하게 팬 흙바닥에는 도정 후의 쌀겨가 아직도 썩지 않고 흩어져 있었다. 정미소 옆으로 난 살림집 역시 황폐하기는 마찬가지다. 누런 잡풀이 자란 지붕, 덧문에 뚫린 옹이구멍, 찢어진 문풍지, 먼지가 켜로 앉은 툇마루. 방문을 슬쩍 밀자 찌그덕, 문짝의 쇠장석이 떨어져내린다. 방안에 고인 퀴퀴한 어둠이 확 끼쳐온다. 내려앉은 방고래, 부스러져내리는 벽, 들이치는 바람에 푸석푸석 날아오르는 흙먼지.
사람살이의 숨결을 잃은 집은 더 빨리 퇴락하는 것일까. 짐을 다 빼고 났을 때 폭격 맞은 것처럼 황폐하게 느껴지던 내 집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장롱이 놓였던 벽의 곰팡이, 주방 싱크대에 눌어붙은 때들, 침대를 들어올렸을 때 나온 아이의 레고블록이며 일회용 라이터, 십원짜리 동전들, 무엇보다도 시커먼 솜뭉치처럼 부풀어오르던 그 많은 먼지들. 그토록 많은 먼지들과 함께 살았다니! 지난 5년 세월이 결국 먼지를 일으키며 먼지와 더불어 살다가 먼지만 남기고 스러지는 일상일 뿐이었는지…… 허방을 딛는 것 같은 무력감이 엄습해서 나는 급히 돌아선다. 나는 그 먼지 집을 뒤로 하고 달리기 시작한다. 미례야. 넌 내가 너랑 다르다고 말했지. 가진 게 많다고. 하지만 내 삶도 만만치는 않았단다.
들머리를 지나 지석교 앞까지 와서야 나는 달리기를 멈추었다. 헉헉거리며 다리 위에 서자 세찬 바람이 몸을 날릴 듯이 덮쳐왔다. 다리 난간을 붙잡자 알루미늄의 차가움이 손에 쩍, 들러붙는다. 나는 난간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발밑의 구멍을 들여다본다. 검은 구멍 속으로 굽이치는 시퍼런 물살…… 내가 그 구멍을 발견한 것은 온종일 다리 위에만 서 있던 첫날이었다. 다리 위를 걷다가 문득 발밑을 내려다본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발밑에 어른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살펴보니 구멍은 10미터쯤 일정 간격으로 계속해서 뚫려 있었다. 다리에 구멍을 뚫고 홈통을 박아 빗물이 빠져나가도록 설계된 것이라는 걸 짐작한 후에도 허방을 딛는 듯한 어지러움은 멎지 않았다. 발밑에 시커멓게 입을 벌린 아가리…… 하루에 서너 번씩 다리를 오가는 지금도 나는 그 구멍을 마주칠 때마다 놀란다. 매번 그 검은 구멍에 발목잡힌다. 얕은 도랑물로 여기고 슬쩍 건너뛰려고 했던 것이 사실은 깊은 수렁이었다. 인연이 그렇고, 일상이 그렇다. 이제, 그 밑바닥을 보고 싶다.
286 노트북 컴퓨터
새하얀 잠. 검은 꿈. 천근의 가위눌림…… 입안에 깔깔한 모래알이 느껴진다. 모래 알갱이는 이내 팥알만해지더니 점점 커져서 검은 덩어리가 된다. 검은 덩어리는 내 혀다. 내 혀는 돌처럼 굳어간다. 검게 굳은 혀가 입안을 꽉 채운다. 숨을 쉴 수 없다. 입술이 굳고, 얼굴이 굳어간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목이, 가슴까지 굳어간다. 파드득 몸부림칠수록 더 무섭게 옥죄어든다. 팔과 다리가 굳고, 온몸이 굳어간다. 내 몸은 송두리째 검은 돌덩어리다. 내 몸 크기의 석관. 천만근의 무게로 가라앉는다. 구들장을 뚫고 대지의 갈라진 틈을 지나 까마득한 나락. 나는 내 몸 크기의 화석이다…… 지층 깊숙이 숨쉬는 수억년의 암반. 아득히 물소리가 들린다. 똑. 똑. 똑. 시린 물방울을 떨구는 잔빙. 이마를 스치는 서늘한 기운…… 금매, 추운디 무담시 밖으로만 나댕기니 탈이 안 나겄어? 어린 물방울이 내 몸을 쓰다듬는다. 실핏줄처럼 스며드는 물줄기…… 호박죽 잠 끓였는디 먹어볼란가.
올케언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일어날 수 있겄어?”
나는 벽을 짚고 일어나 앉아 동치미를 마신다. 살얼음이 설컹거리는 동치미는 머리끝까지 시리다.
“얼굴이 반쪽이여. 눈도 대꾼허고……”
하얀 새알과 팥알을 넣은 호박죽은 노오랗고 따스하다. 한입 떠넣지만 입안에 모래알이 든 것처럼 깔깔하다. 편도선이 붓고 헐어서 침 삼키기도 힘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내가 숟가락질하는 것을 본 올케언니는 덧창문을 열어젖힌다.
“아따! 햇빛 징허게 좋네. 날씨할라 푹허고.”
내가 앓아누운 동안 눈이 오지게 내렸다고, 가뭄 해갈을 톡톡히 했다고, 눈 소식을 전하는 올케의 말을 들으며 나는 호박죽 한 그릇을 꾸역꾸역 다 비운다.
몸을 추스르고 강가로 나가자 순백의 처녀지가 펼쳐져 있었다. 숫눈을 밟으며 들어선 솔숲에는 소나무들이 반짝이는 눈 옷을 입고 있다. 바람도 없는데 눈덩이들이 나뭇가지에서 후르르 떨어진다. 가지를 바직바직 밀어내는 눈의 무게로 생살이 찢어진 나무들. 발이 붉은 작은 새가 단풍잎 같은 눈 도장을 찍으며 날아오른다. 강기슭에는 발목까지 살얼음에 잠긴 갈대들이 하얀 눈꽃을 피우고 있다. 쏟아지는 햇빛, 결합이 느슨해진 눈의 결정들이 미세한 빙정들로 부서지며 토해내는 눈부신 무늬들…… 대설로 몸이 불은 강물은 더 깊고 중후해졌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방죽 너머 강 건너편 마을로 가본다. 저만치 눈 덮인 산자락에 안긴 마을, 흰 눈을 인 농가들은 한밤에 아스라이 뜬 불빛처럼 은성하지는 않아도 한결 웅숭깊다. 나지막한 지붕들 위로 보일 듯 말 듯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연기. 마음 밑자리가 따스하게 지펴지는 기분이다.
마을 어귀 고색창연한 비각을 지나 고샅길 모퉁이를 돌아서자 작은 교회가 있었다. 오래된 건물 벽으로 헐벗은 담쟁이덩굴이 실핏줄처럼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파릇파릇 살아오르던 아기손들의 추억…… 교회 지붕에서 눈 녹은 물이 투덕투덕 떨어진다. 처마 끝에 투명한 발을 드리운 고드름, 낙숫물에 팬 자리가 흉터처럼 깊다. 담장 한켠에 교회 건물보다 더 퇴락한 종각이 있었다. 지붕이 뾰족한 굴뚝같이 생긴 종각 안에는 쇠종이 매달려 있다. 검버섯 같은 녹이 여기저기 피어오른 종은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제 스스로도 종이라는 걸 잊어버린 듯한 모습이다. 흔들면 소리가 날까. 다시 한번 쩡쩡 울고 싶은 종은, 그러나 묵연하다.
커다란 불덩이 같은 해가 산 능선에 걸려 있었다. 석양빛이 흰 자작나무 군락지가 있는 산마루와 마을 전체를 새빨갛게 달구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구름다리에 걸린 노을을 보았다. 하늘도 강물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노을빛에 비친 대숲의 완만한 굽이침, 일렁이는 갈대밭의 눈부심, 눈 옷을 입은 구름다리는 노을빛을 담뿍 빨아들여서 금방이라도 활활 타오를 것 같았다. 아름답다! 죽고 싶을 만큼…… 문득 분홍빛 강물 위로 작은 점이 떠올랐다. 점은 가물가물 흔들리며 가랑잎이 되더니 점점 커져서 조각배가 된다. 물살에 쓸려 빛바랜 몸체, 바람에 삐걱대는 뼈마디…… 조각배는 노을강을 헤치고 천천히 강기슭을 향해 다가온다. 부서진 몸을 끌고, 내게로 온다! 나는 조각배에 시선을 붙들린 채 숨조차 쉴 수 없다.
나는 오늘 비로소 컴퓨터를 켠다. 오랫동안 냉동시켜놓은 파일들, 해빙 명령을 내리자 컴퓨터의 하드가 드드득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한다. ‘작가의 말’이라는 파일을 부르자 메씨지가 뜬다. 옛판 파일입니다. 읽을까요? ‘yes’를 치자 하드가 또 드드드득 신음소리를 낸다. 이미 단종된 지 오래인 내 286 노트북 컴퓨터는 한글 2.1판이 버겁기만 하다.
한 시대가 끝났다.
역사와 혁명, 열정과 투신, 희망과 연대가 존재하던, 혹은 그것을 믿었던 시대. 인간됨을 위한 분노, 사랑을 위한 투쟁, 연대를 위한 외로움, 겸손을 위한 욕망…… 그런 명제들을 믿었던 시대가 있었다.
열정의 순도만큼 깊은 환멸도 있었다. 우리는 패배했고 상처를 입었으며, 자신이 받은 상처만큼 또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리하여 매혹과 환멸로 교직된 한 시대가 끝났다.
“패배한 전쟁은 사람들을 단결시키지만 실패한 혁명은 서로를 증오하게 한다.”
90년대는 때로 살아 있음을 욕스럽게 한다. 오만한 권력과 방자한 대중문화의 공격. 패기도 없고 그렇다고 부끄러움도 없는 지식인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투항. 인간의 진정성이 현실 속에서 늘 승리하는 것은 아니며, 현실이란 한 집단이 지닌 꿈과 희망을 배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우리가 맛보아야 했던 그 쓰디쓴 댓가들. 뗏목 하나를 타고 일찌감치 청산주의와 역사허무주의의 섬에 표착해버린 자들이 부르는 시대의 진혼곡, 혹은 확인사살……
그 파괴적인 조롱과 야유를 견디며 나는 고통스럽게 질문한다. 아직도 역사의 진보를 신뢰하는가? 아니, 역사란 무엇인가? 나는 또 되묻는다. 80년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달려온 길, 그 길의 출발점에서 우리가 바라고 꿈꾼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이었는지.
이 소설은 내가 ‘80년대’를 헤쳐나오는 작은 조각배이다. 돛은 찢어지고 노는 부러졌다. 깊은 피로와 상실감이 나를 새하얀 잠으로 밀어넣고 허무의 검은 아가리가 도처에서 내 발목을 핥는다. 나는 온몸으로 밀고 왔다. 물살에 쓸려 뒤틀린 몸체와 빛바랜 이물, 뼈마디에 스미는 바람소리는 지나온 항해의 곤고함을 쓰라린 자부심으로 말해준다.
상처만이 옛사랑의 흔적으로 각인된 배. 그러나 이 조각배는 내 영혼을 구원하는 방주이다. 또한 내 청춘의 기표, 내가 사랑했던 이들과 한몸이다. 젊음 고유의 열병과 함께 시대의 모순을 통과의례로 앓아야 했던 이들. 전도된 역사 속에서 부모세대를 부정해야만 자기를 정립할 수 있었던 이들. 파충류 같은 허물을 벗고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결단하고 투신했으나, 승리보다는 패배가, 적과의 싸움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에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던 젊은 영혼들.
고백하건대 이 조각배를 끌고 온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내가 사랑했던, 그래서 운명을 함께하고자 했던 이들. 나의 이십대는 그들을 떠나서는 한 줄도 씌어질 수 없었다. 나는 때때로 그들이 버거웠다.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무력감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배의 키를 잡고 방향을 잡아간 것은 그들의 더듬이였다. 그들의 생명력이었다. 풍랑에 부딪혀 좌초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부축하며 속삭이곤 했다. 이 환멸이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패배의 씨앗은 이미 우리 속에 잉태되어 있었다고. 패배의 씨앗이 이미 우리 속에 있었다면 극복의 싹도 분명 우리 속에 있을 거라고……
도대체 우리는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든 것일까. 환멸이 첫 실뿌리를 내리고 패배의 싹이 처음 씨눈을 틔우는 순간, 그것을 되짚어내는 일은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린 지난 시절로 거슬러올라가는 고통스런 시간여행이 필요하리라.
송미례. 그녀는 내 공장 친구이고 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내게 책 속에만 존재하던 ‘Labour’나 ‘PT’(프롤레타리아트)를 ‘크고 검은 눈에 약간 납작한 코, 볼우물이 고운 스물두살의 아가씨’로 구체화시켜주었다. 중졸. 경력 5년의 땜순이. 서럽게 큰 눈망울, 실핏줄이 터져서 유난히 빨간 볼, 억눌린 전라도 사투리. 미례를 통해서 노동자에 대한 내 관념적인 사랑은 살아있는 육체를 얻었다.
“국민학교 마치고 광주로 식모살이를 갔는디, 졸업식도 못허고 갔어. 주인집에서 설쇠기 전에 오라고 하도 재촉을 해싸서. 졸업식날 스승의 노래도 부르고 빛나는 꽃다발도 받고 싶었는디…… 일 잘하믄 중학교 공부시켜준다고 해서 갔는디, 다 거짓부렁이드라고. 한 1년 살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서 중학교를 포도시 마쳤제. 글고 나서 친척 아짐 소개로 여그 온 거여.”
미례는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왼손잡이라서 손놀림이 지독하게 어설펐던 나, 렌즈 낀 눈으로 작은 칩들을 납땜하느라 컨베이어벨트에서 고개 들 짬도 없던 나, 열일곱살 먹은 어린애한테까지 핀잔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던 나. 스물한살 이종옥 옆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첨엔 다 그래야. 좀 지나믄 나아질겨. 미례는 점심시간이면 내가 발밑에 숨겨놓은 불량뭉치를 꺼내서 수걱수걱 수리해주곤 했다. 착하고 일 잘하는 고참 노동자인 미례. 그녀와 친해진 것은 내겐 얼마나 고마운 행운이었던지.
하지만 그 행운이 부담스러움으로 변해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봉례 언니라고, 전에 해남으로 시집간 우리 사촌언니가 있는디 너랑 목소리가 비슷했어야. 미례는 팔짱 끼기를 좋아하고 가끔씩은 정에 주린 듯 내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기도 했는데, 내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라도 하면 금세 샘이 나서 시무룩해지곤 했다. 손이 빠르고 일을 너무 잘해서 같은 라인의 노동자들에게 욕을 먹을 정도인 그녀의 근면성실도 내게는 낙담이었다. 아까 마지막 박스를 트럭에 싣는디, 큰일 치르고 난 것맨치로 오지더라. 그것이 밤새 부산으로 달려가서 배 타고 일본까지 간디야. 철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길에 뿌듯한 한숨을 포르르 내쉬곤 하던 그녀. 나는 그때마다 잘못 계산된 철야수당에 대해서, 100원짜리 단팥빵과 요구르트 한 병으로 때우는 야식에 대해서, 자본가의 착취와 소외된 노동에 대해서 봇물처럼 쏟아지는 비판을 다 들이댈 수 없어서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주눅든 듯 어릿어릿한 표정, 당황할 때면 목청이 갈라지며 더듬거리는 버릇. 암만 봐도 미례는 활동가로 성장할 만한 싹이 보이지 않는 노동자였다. 나는 이제 미례와 양지바른 담장에 기대어 유행가를 부르는 대신에, 저만치 공장 마당 한가운데서 공놀이를 하느라 풀썩거리는 선머슴 같은 노동자들에게 다가가야 했다. 그런데도 나는 미례를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조그맣게 움츠러들어서 정에 주린 듯 나를 바라보는 안쓰러운 눈빛…… 나의 대책없는 연민, 청산되지 못한 온정주의!
하지만 놀랍게도 내 온정주의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오기는 왔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덕분이었다. 애초에 내가 미례의 수준에 맞춰서 사려깊게 골라준 노동자 수기집을 읽고 난 반응이 워낙 시큰둥해서, 나는 좀 과격하다 싶은 ‘전태일’을 약간 망설이며 별 기대 없이 빌려주었던 것인데……
“세상에, 사람이 저도 배가 고픈디, 어쩌믄 자기 차비를 털어서 남한테 풀빵을 사다줄 수 있디야? 글고 나서 자기는 집까지 몇시간을 걸어가고…… 나 실은 이 책 읽고 너무 챙피해서 울었어야. 나는 이때껏 내가 원체 많이 배우덜 못허고 가진 것이 없은께, 당연히 남한테 뭘 베풀 건덕지도 없다고 생각함서 살았거든. 다람쥐 쳇바퀴 돌데끼, 월급 타믄 적금 붓고 고향집에 돈 부치고, 어쩌다 기분나믄 시장 가서 떡볶이나 사먹고, 고작 텔레비 연속극이나 봄서 조바심치고…… 그게 내 인생이었어. 그래, 내 인생.”
내 인생, 이라고 발음하다가 그녀는 살폿 얼굴을 붉혔다. 제 입에서 흘러나온 ‘인생’이란 단어가 스스로도 낯설고 어색한 것 같았다.
“실은 저번에 읽은 수기집은 별로더라. 그냥 우리 같은 인생도 글쓸 거리가 되는구나, 좀 놀라긴 했제. 그치만 그건 너무 뻔한 것 같더라고. 난 그것보다 더 지독한 일도 당하고 살았은께. 근디다 첨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비참한 내용만 적어논께 괜히 마음만 우울해지고…… 근디 이 책은 다르더라. 어려움을 이겨내고 딛고 일어서는 이야기잖아. 가슴이 막 뛰고 울렁울렁하데. 전태일이 바보회 만든 것도 그렇고…… 그래, 바보회 그 이름도 마음에 꼭 들었어야. 모다 실패로 돌아가고 마지막에 분신헐 땐 눈물이 막 나더라.”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깊은 우물 같은 그녀의 눈망울에 작은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얜 너무 순둥이라서 안되겠어. 그녀를 내려다보며 저울질을 일삼던 내 예단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종옥아, 참말 고마워.”
미례는 말로 끝내지 않고 내 손을 잡아끌더니 시장으로 가서 양말 세 켤레를 사주었다. 고린 동전 한푼에도 벌벌 떨던 애가 선물이라니. 그녀는 무언가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것으로 자신의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노동자 친구에게 선물을 받는다는 것, 게다가 양말처럼 실용적인 선물을 받는 것이 당시의 내게는 얼마나 새롭고도 낯설었던지.
그날 이후 미례는 조금씩, 어느 순간에는 놀랄 만큼 비약적으로 달라져갔다. 물론 그녀의 변모에는 1987년 그해 여름의 뜨거웠던 공단 분위기도 단단히 한몫을 했으리라. 6월에 처음으로 시위대를 구경한 미례는 한여름에 지역의 노동자문화행사에 갔다가 풍물놀이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오메! 우리 고향에서 보던 거랑 똑같어야. 단오랑 대보름에 마을 어른들이 고깔 쓰고 꽹과리랑 장구 침서 길놀이 하고 집집이 돌아다녔제. 꽹과리 소리만 나믄 얼매나 신바람이 나는지, 강아지맨치로 온 마을을 누볐단께.”
그날 미례는 대번에 장구를 잡고 기본장단을 익혔다. 내 소개로 풍물강습반에 들어간 얼마 후에는 보얗게 피어오른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난생 첨으로 내가 사람으로 대접받는 기분이어야. 사람들이 다 나한테 꼬박꼬박 존댓말 써준께 기분 되게 좋더라. 그 사람들하고 같이 있으믄 나도 몰래 마음이 뽀땃해져서 가슴속에 꽁꽁 뭉쳐 있던 응어리가 살살 풀어지는 느낌이여. 꼭 아지랭이 피어오르데끼. 사람들한테도 세상한테도 자꾸 너그러워지는 것 같어야.”
미례가 자신의 식모살이 경험을 이야기한 것도 그즈음이었으리라. 이때껏 아무한테도 말 안했어야. 빨간 볼을 더욱 빨갛게 물들이며 그녀는 비밀을 고백하듯 말문을 열었다.
“그 집 사람들 나를 사람 취급 안했어야. 버러지만도 못하게 봤제. 밤에 부엌 쪽 방에 누우믄 얼마나 서럽고 분허던지…… 근디 한참 지내다본께 이상하게 분한 마음은 점점 없어지고 나중에는 내가 버러지인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더라.”
눈물을 글썽하더니 문득 검은 눈을 반짝 치뜨며 입술을 뽀드득 물었다.
“나도 옛날에는 성격이 지금 같덜 안했어야! 시시나고 옹통지다는 소리 들었다고. 5학년 때는 급장도 하고, 달리기도 젤로 잘해서 군내 달리기대회에서 1등도 했단께. 상장까정은 못 탔어도 웅변대회 나간 적도 있었어야.”
미례 속에 억눌린 촌가시나의 오기와 신명이 하루하루 껍질을 깨고 빛을 발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가슴 뿌듯한 기쁨이었던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장구를 멘 채 물오른 나무처럼 땅을 박차고 풀썩 뛰어오르던 모습, 수상은 못했지만 노동자 웅변대회에 나가서 눈을 질끈 감고 구호를 외치던 모습…… 어느날 밤에는 야식시간에 단팥빵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오년 동안 이걸 먹었어! 우리 송장은 썩지도 않을겨! 그러자 학생라인의 나이 어린 노동자들까지 우우! 야호! 야호! 소리치며 빵을 천장에 집어던졌다.
그 미례의 고향이 우산리다. 내가 우산리에 갔던 것은 미례 오빠의 결혼식 때였다. 인천에서 공장에 다니던 미례의 노총각 오빠는 기나긴 고투 끝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무르익은 6월, 미례와 나는 봉고차를 빌려서 결혼식장에 가는 오빠의 친구들 일행에 끼였다. 여자는 미례와 나 둘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오빠의 노총각 친구들이었다. 나주까지 가는 봉고차 안에서 신랑은 연신 헤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고, 부러움과 시샘에 겨운 노총각들은 짓궂은 농담과 목청이 터져라 부르는 유행가로 분풀이를 했다. ‘그대 외로운 집시여인 끝이 없는 방랑을 하네 낮에는 꽃 따라 밤에는 별 따라……’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집시! 집시! 집시! 액쎌을 콱콱 밟아댈 때마다 미례와 나는 키야악! 과장된 비명을 질러댔고, 총각들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해거름녘 우리가 미례의 고향집 대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집안에는 온통 돼지머리 삶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온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는지 마당이며 대청마루, 정제깐이 들썩들썩했다. 엄니! 나 왔어라우!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미례는 참았던 사투리를 마구 쏟아놓았고, 다섯이나 되는 그녀의 동생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부모님께 경황없는 인사를 한 뒤, 나는 미례와 그녀의 동생들, 사촌들인지 동네 친구들인지 모를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정젯방으로 들어갔다. 여동생들이 쓰는 그 방에는 변진섭의 브로마이드와 수십 마리 학을 매달아놓은 커튼 장식이 있었다. 색색깔의 종이로 학 알을 접어서 넣어놓은 예쁜 유리병, 헝겊으로 접은 도라지꽃 바구니, 밤색 곰 인형도 한 마리 있었다. 그 방은 내 상상보다 훨씬 밝고 아기자기했고, 그녀의 동생들은 내 상상보다 훨씬 생기에 넘치고 발랄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미례가 의기양양한 웃음을 띠며 가방에서 신발주머니만한 봉지 하나를 꺼냈다. 그 봉지에서는 로션이며 스킨, 매니큐어와 립스틱 같은 화장품 쌤플들이 가득 쏟아져나왔다. 오메! 이쁜 그! 여자애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다음 순간 열 개도 넘는 손들이 뒤엉키면서 화장품 쌤플들은 금방 동이 나버렸다. 신기해서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를 의식한 미례가 미안했던지, 종옥이 넌 화장도 안헌께…… 했다. 화장품회사로 옮긴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그녀는 한번도 내게 그런 선물을 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내가 잠들어버린 그 정젯방은 얼마나 따뜻했던지. 유월 초순이면 한여름 날씨인데, 군불을 땐 방안이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나주까지 봉고차 여행이 피곤했던 탓일까. 앞뒷마당이 아직도 부산한데, 잘 익어서 반질반질해진 콩기름장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려니 스르르 몰려오는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눈을 떴을 때는 창문에 햇살이 하얗게 얼비치는 아침이었다. 내 옆에는 미례와 동생들이 옷을 입은 채로 가로세로 쓰러져 자고 있었다. 새벽에 쇠죽을 쑤느라 군불을 지폈는지 방바닥은 설설 끓고 있었고, 나는 뜨거운 데 닿아서 빨갛게 달아오른 살갗이 간지러워서 득득 긁다가 눈을 뜬 것이었다. 잠결에 어렴풋이 뒤란 대숲이 우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내가 우산리 마을을 찬찬히 둘러본 것은 그날 아침이었다. 마당 우물에서 차가운 샘물을 길어서 세수를 한 뒤, 나는 집안 식구들이 바쁜 틈을 타서 슬쩍 빠져나왔다.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이었고 시냇물이 바라다보이는 마을 한가운데는 원두막 비슷한 정자가 있었다. 정자 위로 그늘을 드리운 나무에는 먹구슬 같은 버찌가 송알송알 익어가고 있었다. 땅에 떨어진 버찌들이 터져서 풍기는 달큰한 향내. 시냇물에는 빨간 쇠파이프 난간이 나지막한 다리가 걸려 있었고,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개구리들이 풍덩풍덩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을의 집들은 하나같이 낮은 토담 위로 대추나무며 감나무, 살구나무 같은 유실수를 드리우고 있었고, 뒤란에는 울창한 대숲과 장독대, 푸성귀가 파릇한 텃밭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화사한 집은 주홍빛 석류꽃이 만발한 딸부잣집 미례네 집이었다.
내가 고작 하룻밤과 하루낮을 묵었을 뿐인 우산리에 대한 기억이 이토록 선명한 것은, 그곳이 대학교 때의 농촌활동을 빼고는 처음으로 가본 시골마을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큰 이유는 그즈음 내가 미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마을과 집은 미례의 전사(前史)였고, 그녀를 형성한 피와 살이었다.
국도를 달리는 차 소리가 들린다. 물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진다. 밤하늘이 어둡고 깊다.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구름장을 뚫고 나온 달빛이 검은 산의 이마를 번쩍 들춘다. 찬 달빛에 번개처럼 드러나는 네 얼굴…… 나 감히 너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졸업식도 못하고 식모살이 가야 했던 네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울었던 것, 주임기사가 던진 박스에 맞아서 찢어졌다는 이마의 흉터, 손을 잡을 때마다 만져지는 굵은 손마디며 잔금 많은 네 손바닥이 마음에 아렸던 것,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한방에 같이 살 때, 동네 공터에 핀 봉숭아꽃을 따와서 으깬 꽃잎을 손톱에 콩알만큼 올려놓고 서로 무명실로 칭칭 동여매줬지. 어느날인가는 홧김에 시장골목의 액쎄서리 파는 손수레 앞에서 같이 귀를 뚫고, 추절추절 비오는 밤에는 묵은 김치 숭숭 썰어서 김치전을 부쳐 먹었어. 그 시절 나는 너를 얼마나 살갑게 느꼈던지. 그때 나는 생각했어. 너를 통해서 민중에 대한 육친적인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고. 너를 통해서 노동자의 계급성과 그 미래를 확신할 수 있었다고. 너를 통해서 이땅에서 여성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슬픔과 희망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읽었어야. 혼자 있는디도 왠지 막 부끄럽고, 자꼬 눈물이 나오드라.”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내 소설이 처음 노동자 잡지에 연재되었을 때 미례는 그렇게 말했다. 몇달째 화장품공장에서의 활동이 지지부진한데다가, 새로 소속된 노동자 조직에 적응하지 못해서 몹시도 풀이 죽어 있던 그녀. 수줍고 내성적인 한 여성노동자가 자기 인생을 발견하고 노동운동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내 소설을 읽고 그녀는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도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근디 나, 참말 그렇게 잘할 수 있을란가 몰라?”
미례의 공장 파업 소식을 들은 것은 내 소설이 세번째 연재되던 봄이었다. 파업 닷새째 되던 날 그녀는 공단 네거리로 가두행진 나왔다가 내게 공중전화를 했다. 야! 터졌어! 우리가 터트렸다구! 끝내줘! 수화기 너머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케케묵은 낡은 틀 싹둑 잘라버리고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이땅의 노동자로 태어나 자랑스런 딸로 태어나……’ 파업농성 내내 투쟁의 선봉에 섰던 미례는 노조 부위원장으로 뽑혔다. 그리고 두 달 후엔가는 내 손에 『열일곱날』이라는 노동조합 회보를 쥐어주었다. 17일간의 파업농성을 기념해서 노보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던가. 노보에 쓴 미례의 부위원장 취임사는 이랬다. ‘더이상 삶에 투정부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니까요. 나는 내가 소중합니다. 내가 소중한 것처럼, 우리 한양화장품 친구들 모두가 소중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울었다. 문학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행복한 경험이었다.
밤은 빠른 속도로 어둠의 심부를 향해 미끄러지고 있다. 국도를 달리는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꽃송이처럼 강물에 떨어진다. 꽃송이가 질 때마다 구름다리의 검은 씰루엣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스러진다. 나는 다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본다. 해빙된 파일들의 숫자를 조회해보니 정확히 167개다. 복잡한 파일 이름들. 보석글에 출발해서 한글 1.0 시대를 거쳐 2.1에 와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더덕더덕 기워붙인 누더기옷 같다.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내 구상은 재미있고 교훈적인, 한 여성노동자의 성장소설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 옹이진 슬픔과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세상 속에서 한 당당한 인간으로 바로 서는 과정을 그려내고 싶었다. 뼈만 앙상한 것이 아니라 생활의 구체성을, 구호가 아니라 내면의 명암과 굴곡을 생동감있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소설은 주인공이 껍데기를 깨고 나와서 첫 시련을 겪는 지점에서 중단된 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내가 더이상 소설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례가 내 앞에서 홀연 사라져버린 것이다.
“공장에 안 나온 지 한달도 넘었어요. 찾아볼 만한 곳은 다 찾아봤어요.고향집에도 전화해보고. 처음엔 구사대에 납치됐나, 인신매매단에 잡혀갔나, 별 걱정이 다 들더라구요. 근데 자취방에 찾아가보니 방을 빼서 돈을 챙겨 나갔더라구요.”
미례의 실종 소식을 전해준 것은 그녀의 공장 노조위원장이었다. 내가 석달간의 울산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 설날 무렵이었다.
“아무래도 자진실종이랄 수밖에……”
말끝을 흐린 그는 아직도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혹시 뭐 짚이는 거 없어요?”
송미례라면 당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느냐고 묻는 그 눈빛. 그래,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송미례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한때 같이 살았고, 나는 그녀를 주인공으로 소설까지 쓰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짚이는 것이 없다니! 이미 연락해본 고향집이나 인천의 오빠 집말고, 나는 그녀가 달리 어디 갈 데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게다가 그녀가 왜 그런 식으로 사라져야 했는지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캄캄했다. 이 황당함! 이 당혹스러움!
내가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지난해 겨울의 초입이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미례가 내 방에 찾아왔다. 시장 안쪽 골목에 사는 미례는 공장 일이나 노조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는 내 방에 종종 들르곤 했다. 늦은 밤 골목으로 난 내 방의 쪽창문을 누군가 두드려서 나가보면, 미례는 호떡이나 군고구마가 든 봉지를 들고 언 손을 호호 불며 들어서곤 했다. 그날 미례는 유난히 추워 보였다. 늘 입고 다니는 겨자색 반코트, 보풀이 일고 소매끝이 닳아서 허술해 보이는 반코트를 입은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빈손이었다. 그즈음 한 문예운동조직에 몸담고 있던 나는 창원 쪽의 르뽀기사를 쓰느라고 그날 따라 마감에 쫓기고 있었다. 미례는 벽에 등을 대고 앉아서 가만가만 고향이야기를 했던가. 마음이 심란할 때도 기분이 좋을 때도 그녀는 곧잘 고향이야기를 해서 나는 심상하게 받아들였다. 기억에 남는 것은 미례가 얘기를 하는 동안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말라빠진 귤 서너 알을 게눈 감추듯 뚝딱 먹어치웠다는 정도. 아니, 그녀가 평소와 다른 말을 하기는 했다.
“종옥이 넌 똑똑해서 좋겄다.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허고……”
그리고 입안엣소리로 ‘나는 꼭 버러지 같아야’ 웅얼거렸던가.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녀의 자학적인 말투. 그때 무언가 알아차렸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요즘 너희 노조가 힘들다는 거 알아. 하지만 봄 되면 달라질 거야. 전국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나는 한참 동안 전국적인 투쟁사례들을 늘어놓았다. 단위사업장에서 겪는 구체적인 어려움을 전국적인 분위기로 무마하려는 회피적인 경향. 사실은 다른 지역이라고 별로 나은 것도 없었다. 민자당 합당 이후 ‘신공안정국’과 ‘범죄와의 전쟁’ 선포로 노동운동은 어디서나 깨지고 잘리고 감방에 갇히는 벼랑에 몰리고 있었다. 다가오는 파국에의 예감! 그럴수록 나는 더욱 열심히 정세평가를 하고 낙관적 전망을 늘어놓았다.
“종옥이 넌, 공자님 말씀만 해!”
문득 미례의 음성이 격앙된 듯 떨려 나왔다. 그녀의 눈망울에 파란 불꽃이 돋았다가 까무룩 스러졌던 것도 같다. 잠시 후에 미례는 허깨비처럼 푸르르 일어섰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재워 보내지 못하는 것이 미안해진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거만 끝내고 나면 내가 놀러 갈게. 하지만 나는 원고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울산으로 달려가야 했다.
바람이 창문을 격렬하게 흔들어서 방 전체가 난파선처럼 흔들린다. 뒤란 대숲이 성난 파도처럼 운다. 상처입은 거대한 짐승처럼 검은 덩어리로 뒤척이는 산. 어둠속에 검은 옷을 입은 미례의 모습이 떠올라 있다. 검은 블라우스에 검은 스커트, 검은 단화에 검은 가방을 든 그녀. 깊은 우물 같은 그 눈망울은 내게 뭐라고 말하는 것인지……
나주호
나는 국도변 물레방앗집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한 시간 간격으로 있다는 군내버스는 여간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정류장 커피자판기 앞에 서서 나는 버스가 나타날 국도의 저쪽 끝을 바라본다. 바람이 국도변의 나무들을 세차게 때리며 윙윙 울어댄다. 근데 이제 와서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목구멍으로 불쑥 치받쳐오는 목소리. 미례 부모님을 만나서 연락처를 알아내고, 전화통화를 하고, 그래서 만나면? 미례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확인하고 싶어서? 무슨 면죄부라도 받고 싶은 거니? 강 건너편 들판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솔직해봐! 넌 몇년 전에 이미 미례의 연락처를 알아낼 수도 있었잖아! 목구멍을 꽉 잠기게 하는 주먹만한 응어리…… 응어리는 담홍빛이다. 단단한 껍질이 벌어지면서 반짝이는 알갱이들이 파편처럼 아프게 흩어진다. 담홍빛 석류, 그 눈이 시리도록 투명한 보석들.
그해 가을 내가 우산리에 들른 것은 아버지와 함께였다. 잠 산에 뫼를 썼던갑다. 결혼 날짜 받아놓고 너같이 잠만 자는 가시나가 어딨다냐? 불안스레 혀를 차는 엄마 얼굴 보기가 민망하던 나날들. 작년 봄에 할머니 묘를 이장했어야. 시집가기 전에 한번 가봐야 안 쓰겄냐? 날씨도 화창허고 맑은 공기 쐬고 오믄 기분도 좋아질 것이다,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동의했던 건 아니지만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 길이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전답과 선산이 있는 그 마을은 드ᄃᆞᆯ강에서 훨씬 안쪽으로 들어간 평야지대에 있었다. 너른 들판과 마을 앞을 흐르는 시냇물, 대나무 지붕을 인 정자와 빨간 쇠파이프 난간이 있는 다리…… 성묘를 하고 내려오면서 나는 왠지 낯익은 느낌에 선득해졌다. 송씨라는 선산지기 영감. 혹시 송미례가 이 동네 사냐고 물었을 때 그는, 미례? 창규 딸 말이여? 되물었다. 저그 깔끄막진 끄트머리 집이여. 가슴이 철렁했다.
얼마나 당혹스러운 우연인지. 내 본적이 나주이고 미례의 고향 역시 나주라는 건 알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둘을 연관시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광주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20년 넘게 서울내기로 살아온 내게 본적이란 단지 서류상의 문제일 뿐이었다. 또 미례의 고향이 나주라는 것이 별로 특별할 것도 없었던 것이, 당시 공단에는 워낙 전라도 애들이 많았다. 그런데…… 시대와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감케 하는 인연이었다.
‘송창규’라는 작은 플라스틱 문패가 붙은 초록색 양철대문 집. 담장 위로 석류가 투명한 보석들을 반짝이며 한껏 벌어져 있었다. 나는 당혹스러움과 난감함으로 망연히 서 있었다. 정제문이 열리더니 참깻단을 든 미례의 어머니가 토방으로 걸어나왔다. 나는 그날 그 초록색 양철대문을 밀고 들어가서 미례의 안부와 연락처를 물어볼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아버지와 두 고모님, 사촌형제들과 함께 승용차 석 대에 나눠 타고 떠들썩하게 마을에 들어섰던 일이 떠오르자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시라요? 미례의 어머니가 담장을 기웃거리는 낯선 처녀에게 의구심의 시선을 던지며 다가왔다. 순간 나는 뒷걸음질쳤고, 휙 몸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그 순간의 내 행동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미례의 어머니에게 내 존재를 구구하게 설명해야 하는 일의 면구스러움? 내 계급적 뿌리에 대한 새삼스런 자괴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정말 회피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두려움이었다. 혹시나 미례가 불행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가 더는 그녀를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빈 들판을 달려온 바람이 부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여기저기 쓰러진다. 간간이 대형 콘테이너 트럭과 레미콘 들이 무섭게 국도를 질주할 뿐, 버스는 여간해서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앞차를 코앞에서 놓친 것은 아닌지. 다시금 스멀스멀 목구멍으로 쓴 물이 넘어온다. 미례네 집이 그대로 있기는 할까? 봉산리처럼 개발 바람에 휘둘려 새집을 지었거나 아예 고향을 떠나버렸을지도 몰라. 빈집이 헐리지 않고 남아 있기나 할지…… 요행 연락이 된다 해도 그앤 나를 만나고 싶어할까?
국도의 저쪽 끝에서 버스가 올라온 것은 무성해진 회의의 싹들이 칡덩굴처럼 내 발목을 잡아채려는 순간이었다. 버스가 나를 보고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나는 내몰리듯 버스에 올라탔다. 아침나절이라서인지 버스 안에는 손님이 나밖에 없었다.
“우산리에 내려주세요.”
운전석 바로 뒤에 앉으면서 나는 운전사에게 부탁을 했다. 버스가 서너 정거장쯤 지났을 때 운전사가 말했다.
“여기서부터 우산리요.”
여기서부터 우산리라고? 그냥 ‘우산리’라는 정류장이 있어서 그곳에 내리면 되는 게 아니었나? 우산리는 상당히 큰 마을인지 정류장이 세 곳이나 된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당산나무하고 마을 이름이 새겨진 입석이 있었어요.”
“여그 처음인게라우?”
늙수그레한 운전사는 백미러로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한번 찾아봅시다, 한다. 하지만 이미 지나쳐온 주유소 앞은 물론, 학교 앞에도, 다리 앞 정류장에도 당산나무나 입석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마을 앞에 내리기만 한다면, 고샅길이며 집집의 정경은 눈에 선한데……
“누굴 찾아왔는디 그러요?”
“친구요. 몇년 전에 연락이 끊겨서……”
내가 차창 밖을 불안스럽게 두리번거리는 동안에도 버스는 계속해서 달린다. 국도는 강보다 더 휘어돌기도 하고 때로는 덜 굽어돌기도 해서, 차창 밖으로 강물이 오른쪽으로도 보이고 왼쪽으로도 보였다. 버스는 들판을 가로지르고 크고작은 다리를 몇개씩 건넜다. 국도가 오르막길이 되면서 휘어도는 굴곡이 점점 심해지더니, 발 아래로 골짜기가 펼쳐졌다. 버스는 종점인 다도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나온다고 했다. 버스가 산모롱이 오르막길을 돌아서자 갑자기 호수가 보였다. 버스는 까마득히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좁은 공터에서 멈추었다. 여그서 15분간 쉬었다가 출발허요.
버스 밖으로 나오자 세찬 바람이 몸을 날릴 듯이 들이쳤다.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 호수는 까무룩 깊이 모를 어둠으로 고여 있었다. 골짜기 아래서 바람이 회오리 기둥을 세우며 솟구칠 때마다 척박한 비탈에 뿌리내린 나무들이 얼어붙은 흙을 물어뜯으며 윙윙 울어댔다. 모질게 몸을 비비는 키작은 억새풀들.
내가 미례의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황사바람이 뿌옇게 불어오는 4월의 어느날이었다. 그 두 달 동안 내 가슴속은 당혹스럽고 불안하고 무언가 얹힌 것처럼 먹먹한가 하면 슬며시 차오르는 배반감으로 뒤죽박죽이었다. 바쁘게 돌아치다가도 문득 허방을 딛는 것처럼 멍해지던 순간들.
“서울 나갔다가 종로 네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못 알아볼 뻔했어. 글쎄, 검은 옷에 검은 구두, 검은 가방을 들고 서서 전단을 돌리고 있더라구.”
내게 그 말을 전해준 사람은 노동상담소에서 일하는 한 선배였다.
“다방에 들어가서 얘기를 했는데, 참, 내! 나한테 전도를 하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라나? 왜 몇년 전에 텔레비전에도 나왔잖아. 대승교라고. 재산형성 과정이 음침해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종교 말이야. 신도들이 집단 가출하고, 여자들은 아마 결혼도 안한다지?”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건 내가 상상했던 모든 경우의 수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최소한 미례의 안전은 확인했지만 나는 더 큰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녀가 갑자기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정에 주린 순둥이. 하지만 귀가 얇지는 않았는데…… 좀더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미례에게 영향을 주었던 운동조직의 풍토가 그녀를 종교적 심성에 익숙하게 만들었던 측면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미례가 내게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질 이유는 뭐란 말인가?
“내가 조목조목 반박을 해도 전혀 안 먹혀. 연락처라도 알려달라는데 끝내 안 가르쳐주더구만.”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던 것은 미례가 헤어지기 직전 선배에게 차비 좀 빌려달라며 손을 내밀더라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생활이 허물어지다니. 누구보다도 내실있고 규모있게 생활을 꾸려나가던 애가 오죽하면…… 그러나 아직 결정적인 일격이 남아 있었다.
“사이비 종교라고 막말하지 마세요. 나는 여기서 사랑과 자주성을 발견했어요.”
교리를 반박하는 선배에게 미례가 바르르 떨면서 했다는 말이었다.
사랑과 자주성이라니! 내가 말끝마다 입에 달고 다녔던 그 두 마디. 운동이란 자기 속의 슬픔과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자기 굴레와 어둠으로부터 해방되어가는 과정이라고, 그래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그리도 자주 말했던 나. 운동은 인간해방이고 그래서 아름다운 거야. 하지만 미례의 그 한마디는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렸다. 나는 여기서 사랑과 자주성을 발견했어요! 그 격앙된 목소리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운동을 돌아보고, 내 문학을 돌아보게 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나는 갑자기 멈칫거렸고 비로소 내 질주의 궤적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건너뛴 가파른 벼랑들과 발자국마다 팬 깊은 골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잡혔던 우리는 자기자신도 타인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명분에, 이념에, 조직에 자신을 일치시키려는 고투 속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허깨비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운동과 문학의 행복한 만남이었던 내 ‘노동문학’은 과연 무엇이었나? 내가 미례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미례는 나로부터, 내 소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처음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소설을 쓰면서 또다시 미례를 내 관념의 잣대로 재단하고 내 이상형을 그녀에게 강요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또 나는? 자학에 가까운 금욕과 자기강제로 스스로를 밀어붙여온 지난 10년, 옆구리가 터지고 실밥이 너덜너덜해진 내 자아. 나는 더이상 이런 식으로는 스스로를 밀어갈 수 없을 정도로 한계에 와 있는 것은 아닌가. 바깥의 큰 것만 보다가 문득 내 안을 보니 심연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밖에서는 현실사회주의가 굉음을 울리며 무너져내리고 있었고, 안에서는 내가 미친듯이 날뛰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 내 마른 등짝을 후려친다. 바람이 일 때마다 비탈의 언 흙이 버석버석 부서져내린다. 발 아래 캄캄하도록 시퍼런 깊이. 무섭다. 뒷걸음질치며 나는 깊이 모를 어둠에서 시선을 돌린다. 앙상하게 강골을 드러낸 산, 능선 위로 검은 새떼가 하늘을 빗질하며 날고 있다. 너풀대는 검은 만장, 오월의 대기를 떠도는 죽음의 냄새.
발목이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에 몸서리치면서 내가 종로 주변의 포교원들을 헤집고 다니던 바로 그 무렵,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한 대학생이 맞아죽었다. 오월이었다. 우리들은 다시 거리로 달려나갔다. 거리는 스크럼으로 물결쳤고 광장에는 깃발이 나부꼈다. 다시 87년이 재현되는 걸까? 그러나 돌멩이가 날고 최루탄이 작렬하는 시가지의 다른 한쪽에는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햇살 아래 팝콘 같은 웃음을 날리는 또다른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과 우리는 서로에게 외계인일 뿐이었다.
오월 내내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다. 전남대에서 한 여학생이 분신을 한 데 이어 남학생들의 분신이 잇따랐고, 학생들만이 아니라 노동자, 빈민, 실업자, 알 수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 분신행렬에 가세했다. 보수언론들이 연일 ‘최근 잇따른 분신은 동구의 몰락을 계기로 사회주의 이념이 쇠퇴하면서 대중적 설득력을 잃어가는 운동권의 위기감과 좌절감의 반영’이라고 떠들어대는 가운데, 광주항쟁 11돌인 18일에는 전남 보성에서 고교생이, 광주에서 버스운전사가, 서울 신촌에서 30대 여인이 분신했다.
그날 나는 신촌에 있었다. 강경대의 운구행렬이 연세대 정문 앞을 막 지나갈 참이었다. 굴다리 위 철길에서 화염에 휩싸인 몸뚱어리가 떨어져내렸다. 우르르 쏠리는 사람들, 지글지글 진동하는 누린내…… 사람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젊은이 몇명이 점퍼를 휘둘러 불을 끈 뒤 여인을 병원으로 옮겨갔다. 내 발 옆에 시커멓게 타버린 운동화 한짝, 여인의 운동화가 뒹굴고 있었다. 턱이 덜덜 떨렸다.
그날 밤 나는 자취방에 기어들어와서 불 꺼진 방의 어둠속에서 울었다. 검은 죽음의 그림자, 죽음의 냄새가 내 몸을 떠돌고 있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오월 내내 나는 가두투쟁에 나가면서 방 열쇠를 미례가 아는 문설주 틈새에 두고 다녔다. 전도하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찾아올 거야. 하지만 이제 나는 두려워졌다. 미례를 만나는 것이. 종로 네거리나 지하철 역사에서 혹시나 검은 옷을 입은 미례를 마주칠까봐 가슴이 내려앉았다.
한 시인이 있었다. 나는 스무살의 어느 봄날 그의 시를 일기장에 옮겨 적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미소를 배웠고/나는 그때 처음으로 역사를 알았네/스물세살 나던 해 뜨거운 여름/퍽도 어리숙한 시절이었네.’ 공장에 들어오던 해 겨울 신도림역에서 나는 그의 시를 적은 엽서를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부쳤다. ‘미련의 베를/끊어/알 수 없는 거리로, 먼 벌판으로/아픈 저 허공으로 오늘은 떠나리라/칼아 모진 그 옛 스승아.’ 그런데 바로 그 시인이 가장 극우적인 신문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글을 발표했다.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 환상을 갖고 누굴 선동하려 하나.’ 그의 글은 분명히 균형을 상실하고 있었다. 글이 실린 신문의 성향과 발표 싯점, 지나치게 선정적인 표현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우리 속의 어떤 부분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다. ‘지금 당신들 주변에는 검은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열사 호칭과 대규모의 장례식으로 연약한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 삶의 행진이 아니라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고 있다.’ 분노보다는 허탈감, 아니 절망감이었으리라. 아니라고, 당신 잘못 보고 있는 거라고, 강하게 도리질칠 수 없어서, 너무 뼈아파서, 나는 울었다.
열명이 넘는 분신 사망자를 낸 50여일의 투쟁이 밀가루와 달걀을 뒤집어쓴 교수 출신 총리의 등장으로 막을 내릴 무렵, 시와 혁명의 가파른 줄타기에서 경계를 건너버린 또다른 시인은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사형을 구형받았다. ‘노동자국가가 세워진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인민들은 검은 빵 한덩이를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데, 당 관료들의 식탁에는 캐비아가 넘쳐난다. 이는 공산주의의 실행이 영원히 실패로 끝났음을 증명한다. 피고인은 이러한 옐찐의 충고를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피고인은 개전의 정이 전혀 없고 법정을 사회주의의 선전장으로 이용했으며, 안기부의 고문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기 위해 짜여진 각본에 따라 자살을 시도했으며, 법정에서는 기존의 무장폭력혁명 노선을 부정하고 앞뒤 없는 주장으로 변명을 일삼았다. 보급투쟁 과정에서는 비도덕의 극치를 보여주었으며, 도피생활중의 호화판 사생활은 사회주의의 필연적 병폐인 관료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마끼아벨리적 음모성과 맹신도를 거느린 사이비 교주처럼 행세한 자이다…… 따라서 본 검사는 피고인을 교정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영구히 격리함으로써 국가사회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사형을 구형한다.’
바람이 벼랑 아래로 수직으로 내리꽂혔다가 회오리 기둥을 세우며 솟구치곤 한다. 그때마다 비탈에 선 나무들이 뿌리라도 뽑혀나갈 듯 휘청거린다. 휘청대는 내 몸, 내 몸 끝이 벼랑이다. 그 여름 내내 나는 검은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었다. 검은 만장과 운구행렬, 검은 옷을 입은 미례, 내 안에 거칠게 입을 벌린 검은 심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즈음 내가 관계하던 잡지가 폐간되었다. 한쪽에서는 발빠른 반성과 고백들이 터져나오고, 또다른 쪽에서는 완고하게 버티기로 일관하면서 무리수를 강행하던 그때, 우리는 자신의 피곤과 동요를 감추기 위해서 서로에게 더 날카로워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세인식의 차이와 돈 문제가 뒤엉켜서 벌어진 편가르기와 인신공격, 비겁한 묵인과 방조. 그 문예운동조직이 깨지는 과정은 인간에 대해서, 지식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내 믿음의 뿌리를 흔들 만큼 참담한 것이었다.
그즈음 나의 이십대가 갑자기 끝나버렸다는 것도 좌절감을 깊게 하는 이유였으리라. 나는 여러 해 동안 스물두살이나 스물세살, 혹은 스물한살로 살아왔다. 조숙한 사람들이 종종 그렇듯이 나는 나이가 들수록 동안이 되어가서 내 생물학적 연령보다 대여섯살 어린 나이가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여러 개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었고, 주민등록증 수보다 더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인실, 종옥, 진자, 한백, 인혜, 희명…… 나는 단거리 경주 선수처럼 달려왔고 스스로의 가속도에 멀미가 났다. 달리기를 멈추었을 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스물아홉살의 생일을 막 지난 여자가 서 있을 뿐이었다. 겨우 스물아홉살에 육십년을 산 것 같은 깊은 피로감. 돌이켜보면 그 해는 세계사적으로도 한 세기가 끝나는 해였고, 내 인생에서도 한 시대가 끝나는 해였다.
“다도면이 이 밑에 수몰되야서 보통 다도댐이라고 부르는디, 저 아래 있던 대초장터를 기념해서 대초댐이라고도 부르지라. 생긴 지 이십년도 넘었소.”
어느 결에 내 옆으로 다가온 운전사가 담배를 꺼내 물며 말한다.
“왜 댐은 안 보이죠?”
“댐은 저 산너머에 있지라. 수문이 네 개요.”
바람이 라이터 불꽃을 자꾸만 꺼트리자 운전사는 갈급하게 손으로 불꽃을 감싼다.
“이 물의 수원지는 어디예요?”
“저어기, 화순 어디 골짜기라고 합디다. 작은 물줄기가 화순, 능주, 도곡을 지남서 이 골 물 저 골 물 보태서 큰 내를 이루고 흐르다가 여그 나주 호에 갇히지라. 지금은 겨울이라 물이 바닥이요.”
물 마른 겨울 호수. 흐름이 끊긴 강물이 고여 있는 곳. 불현듯 가슴이 먹먹해진다. 고여 있는 시간, 내 시간도 얼어붙어 있다.
“여그가 시방 영산강 상류요…… 이 물이 흘러 나가서…… 남평에서 드ᄃᆞᆯ강이 된디…… 드ᄃᆞᆯ강은 저 산포 들녘을 지나서…… 너뱅이 여울에서…… 황룡강, 극락강하고 합치지라…… 거그서부터가 영산강이요.”
세찬 바람에 목소리가 토막토막 끊기며 스쳐 지나간다. 얼굴이 얼얼해지는 추위. 문득 가라앉아가던 편도선이 다시 부어오르는 느낌이다. 입안을 틀어막은 검은 덩어리. 굳어버린 내 혀.
미례가 사라진 후 나는 더이상 소설을 쓸 수가 없었다. 미례는 나의 운동이었고 나의 문학이었다. 현실에서 미례를 일으켜세울 수 없었던 나는 소설 속에서도 그녀를 일으켜세울 수 없었다. 관념과 언어에 대한 끔찍한 혐오감이 엄습했다. 나는 활자매체로 이루어진 모든 것, 신문기사조차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이제껏 내가 발설했던 확신에 찬 언사들, 날카로운 단어들에 짓눌려 나는 말을 잃었다. 정신적 실어증.
그후로 오랫동안 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 나는 너무 깊은 골짜기까지 내려갔던 것일까. 어쩌면 내가 보아버린 심연을 직시하고 드러낼 용기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내가 전혀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어증이 한 고비를 넘긴 무렵부터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끼적이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차라리 병상일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창 후일담류의 소설이 장안의 지가를 올릴 때 전직 민중문학 평론가인 한 선배가 내게 이런 충고를 했다.
“너도 니 얘길 써. 그런 사소설류가 많이 쌓인 뒤에야 본격적인 것이 나올 수 있는 거야.”
그 말이 원론적으로는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전체 속에서 나 개인만을 뚝 떨어뜨려놓고 나 자신만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는 건 ‘본의 아니게’ 청산주의나 허무주의를 유포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한때나마 ‘모든 문학은 정치적’이라는 명제를 미학적 신조로 삼았던 내게 ‘본의 아니게’라니! 후일담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90년대의 사회심리구조. 그것이 어떻게 80년대를 매장하고 싶어하는 보수 이데올로기에 이용되고, 자본주의의 후안무치한 상업주의와 야합하는가를 낱낱이 목도하게 되던 그즈음, 나는 ‘모든 문학은 정치적’이라는 명제를 더더욱 실감하고 있던 터였다.
얼마 전 그 선배를 우연히 지하철 환승역에서 마주쳤는데 그가 내게 말했다.
“널 보니까 동독에 두고 온 여동생이 생각난다.”
바람이 한풀 잦아드는가 싶다.
“실은 저 아래가 내 태 묻은 땅이요. 월남 갔다가 돌아와본께 살던 집이 물에 잠겼습디다.”
한숨처럼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운전사가 다시 말문을 연다.
“제법 벌쭉한 마을이었제라. 장도 서고, 땅도 좋았는디. 저그 들판 한가운데 거북등만한 솔숲이 있었지라. 거그서 낮잠도 자고 하모니카도 불고……”
그 솔숲에 묻어둔 오랜 전 사랑이라도 있는 걸까. 운전사의 목소리가 아련해진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골짜기 아래 우묵하게 담긴 호수를 바라본다. 이십여년의 시간 속에 침전된 것들. 수몰된 마을, 수몰된 들판과 길, 수몰된 삶들…… 불현듯 어떤 간절함이 가슴을 저며온다. 순장당한 기억, 역사의 지각변동에 매몰된 기억의 퇴적층 속에서 복원되기를 열망하는 것들. 아직 태어나지 못하고 어둠속에 잠겨 있는 말들과 꽃이 되지 못한 이야기들……
“마을 앞으로 큰 내가 흘렀지라. 그냥 고여 있는 것 같어도, 시방도 호수 밑으로 그 물길이 흐르고 있을 것이요. 물 흐르는 것이 사람 사는 이치요.잠잠허게 흐르다가도 곤두박질치고 휘돌고 쏟아지데끼 흐르고, 어떤 때는 막히고 부서져도 항시 지 갈 길을 가지라.”
마음 밑자락에 와닿는 것 같은 음성. 고여 있는 호수 밑으로 물줄기가 흐르고 있단다. 수면 아래 숨긴 물길의 우회와 굴곡들. 강물은 또 몇겹의 물굽이를 숨기고 있을지……
한풀 잦아들었던 바람이 다시 거세어지자 운전사는 으쓱 진저리를 친다.
“아따! 겁나게 춥소.”
버스 안으로 들어간 운전사가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린다. 버스에 오른 내가 다시 차비를 내려고 하자 사람 좋은 그는 그만두라고 손사래를 친다. 버스는 강을 좌우로 끼고 달리며 크고작은 다리들을 건너서 다시 우산리를 지난다. 나는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들을 망연히 바라본다. 버스가 구름다리를 지나고 물레방앗집 앞을 지날 때도 나는 내리지 않는다.
푸른 멍의 기억
남평읍에 나를 내려놓은 버스는 잠시 후 새로운 손님들을 태우고 광주로 떠났다. 나는 터미널에 우두커니 서서 내 앞에 펼쳐진 낯선 풍경에 눈을 주고 있었다. 서라아파트 분양 현수막, 전남고시학원 대형 선전판, ‘제1회 청소년 그룹댄싱 경연대회.’ 현수막, 그 너머로 을씨년스러운 공터가 보였다. 거기서 장이 서는지 빈 가게터와 앙상한 기둥으로 얼기설기 지어진 점포의 흔적들이 보인다. 사람들의 발길에 더럽혀진 눈과 눈이 녹으면서 만들어진 질척한 웅덩이들, 비닐봉지와 구겨진 신문지 조각들이 휘날리는 공터를 지나자 제법 번화한 읍내 거리가 펼쳐진다. 홍익한의원, 101동물병원, 아세아회관, 모모양복점, 영미제과, 세브란스약국, 탤런트미용실, 칠칠칠무도학원, 미키랑미니랑…… 도시의 서구 취향과 시골 읍의 촌스러움이 혼재한 상호들. 하릴없이 상가의 간판을 눈여겨보며 걷는 데도 지쳐서, 나는 들어가 쉴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성공시대’. 붉은 유리창에 ‘맥주 양주. 성공을 위한 재충전을 이곳에서’라고 썬팅되어 있다. ‘카페 마카레나호프’. 카페와 호프집을 겸한 곳? 크리스마스 장식이 요란한 출입문을 바라보면서 나는 잠시 망설인다. 문득 호프집 옆 예식장 건물에 눈이 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청실홍실예식장’. 따뜻한 로비에 커피자판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다. 비수기여서인지 예식장 안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다. 물론 따뜻하지도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자판기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웨딩샵을 겸한 포토샵이 눈에 들어온다. 포토샵에 전시된 대형 브로마이드. 나풀나풀 흩날리는 벚꽃을 배경으로 신혼부부가 입맞춤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5초 이상 버티기는 어려울 성싶은 불편한 자세와 어색한 표정…… 웨딩샵의 쇼윈도에는 마네킹이 풍성한 레이스를 단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나는 팔등신의 마네킹과 그녀의 날개옷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문득 마네킹에 겹쳐지는 내 얼굴. 여자로서의 내 인생의 첫 장면, 하얀 웨딩드레스가 민망하기만 했던 그날.
오랜 가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누워서도, 앉아 있을 때도, 밥을 먹거나, 세수를 할 때조차도 잠이 쏟아졌다.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가수면 상태였다. 어디에 혁명이 있었단 말인가? 내가 침침한 골방에서 레닌의 팜플렛과 주체사상파의 문건을 놓고 혁명을 고민하는 동안, 샐러리맨이던 오빠는 증권시장의 호황으로 강남에 아파트를 두 채나 소유한 중산층이 되어 있었다. 한창땐 하루에 3백만원씩 벌었다니까. 소형차의 오너드라이버가 된 언니는 아이들을 학원에 실어 나르느라 눈코 뜰 새 없었고, 나보다 먼저 시집간 여동생은 둘이 알뜰하게 벌어서 32평 아파트를 장만했다. 너 변변한 직장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고, 영어나 잘해? 그렇다고 미모가 있어? 든든한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쩔래? 애인이나 있어? 다그치는 시선들…… 어디에 혁명이 있었단 말인가?
옛것이 무너지고 새로운 것이 오지 않은 공백을 ‘일상’이라는 담론이 가득 채웠다. 어디서나 일상에 대해서, 육체에 대해서, 혹은 욕망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마치 전혀 없던 것을 새롭게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하긴 낡은 청바지에 운동화 꺾어 신고 아스팔트를 달리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 우리에게는 일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 일상과 삶의 미세한 결을 꼽았다. 싸움에 나서기 전 제 둥지를 부수는 장수매의 신화는 이제 필요치 않다고, 일상 속에 진지를 만들겠다고…… 앞자락이 자꾸만 밟히는 웨딩드레스를 끌면서 나는 일상 속으로, 소시민적인 질서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도피가 아니었던가. 미례가 검은 옷을 입고 길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도시의 아파트로 걸어들어갔던 나. 웨딩드레스는 하얀 잠으로의 도피가 아니었던가.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안에 거칠게 입을 벌린 검은 심연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나는 온기 한점 없는 예식장을 빠져나온다. 큰길에서 샛길로 접어들자 나타나는 ‘호반 다실’. 너무 춥고 지친 나머지 나는 살필 여유도 없이 문을 밀고 들어선다.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로 뿌옇게 보이는 실내.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수족관 뒤 구석자리로 가서 앉자 주방 쪽문을 밀고 나온 여자가 엽차를 날라놓으며 묻는다.
“춥지라?”
30대 중반쯤. 금방 목욕을 했는지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칼이 젖어 있다.
“오메, 입술이 시푸렇네에.”
내 얼굴을 본 마담은 금세 카운터 쪽으로 달려가서 가스 팬히터를 밀고 온다.
“따끈한 유자차 마셔요. 몸이 좀 풀릴 것인게.”
나와 비슷한 나이일 것 같은데도 마담은 나를 동생 대하듯 한다. 내 짧은 머리칼이 나를 실제보다 어려 보이게 하는 걸까. 나는 마담이 권하는 대로 유자차를 주문한 뒤 소파 깊숙이 몸을 부린다. 따뜻한 엽차만으로도 몸이 혼곤해진다.
내가 앉은 벽 쪽에 동양화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산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눈석임물. 바위에 부딪쳐 튀어오르는 물방울들. 화폭에 번진 먹물의 번짐과 농담의 여백이 이루어낸 이른 봄의 정취. 산은 강골을 드러내고 있지만 온몸으로 뿌옇게 훈김을 피워올리고 있다. 저 산 어느 품엔가 암반을 뚫고 솟구치는 싱싱한 물줄기가 있으리라. 하늘빛을 머금은 어린 옹달샘…… 문득 그림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싶다.
인기척에 퍼뜩 고개를 들자 마담이 유자차가 가득 담긴 커다란 머그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고개를 수그린 마담의 목덜미가 푸르스름하다. 내 시선이 목덜미에 닿는 것을 느낀 마담이 배시시 웃는다.
“첨 본 사람들은 멍인 줄 알고 모다 한번씩 물어보지라.”
나는 마담의 목덜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푸른 반점. 푸른 멍…… 문득 가슴 한 귀퉁이가 잘게 저며지는 것 같다.
미례의 손등에 난 두 개의 푸른 멍을 발견한 것은 미례가 나를 찾아온 날 밤, 내가 암호를 풀듯이 몇십 번이고 되짚어본 바로 그날 밤이었다. 말라빠진 귤 서너 알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미례가 습관처럼 귤껍질로 손등을 문지르는 순간이었다.
“너 손등이 왜 그래?”
내 물음에 미례는 약간 당혹한 표정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으응, 얻다 찧었는갑제.”
손을 이불 속으로 밀어넣으며 그녀는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대꾸했다. 조심하지 않고! 쯧, 혀를 차면서 나는 다시 울산 이야기로 돌아갔던가.
내가 그 푸른 멍을 다시 떠올린 것은 결혼을 하고 첫 애를 낳고도 두 해가 더 지났을 때였다. 수술대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아아! 여자는 전생에 죄 많은 동물임에 틀림없어…… 이 아줌마 혈관 찾기 되게 힘드네! 나이 어린 간호사는 내 팔을 뒤집어보더니 손등에 주삿바늘을 찔러넣었다. 마취에서 깨어나자 영양주사도 손등에 찔러넣었다. 내 손등에는 두 개의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었다. 푸른 멍은 쉬이 사위지 않았다. 푸르죽죽, 보랏빛으로 죽어들다가 열흘이 넘어서야 희미하게 사위어갔다.
푸른 멍 속에서 다시 떠올린 미례의 얼굴. 그녀를 삼켜버린 것이 푸른 멍에 얽힌 모종의 사건이었을까. 미례는 연애를 했던 걸까.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푸른 멍과 관련된 어떤 경험이 미례를 버러지로 내몰았고, 운동 전체에 대해서 환멸감을 맛보게 했으리라고 짐작하는 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사랑이나 연애 문제에 대해서 나는 미례에게 뭐라고 말해왔던가? 연애는 좀 있다가 나중에 하렴. 네가 좀더 견고해진 다음에. 어느날 밤인가, 서로 제대로 서지 못해서 치대고 정신적으로 고문만 하던 내 쓰라린 연애담 끝에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기는 했다. 넌 내가 소개해주는 사람하고 연애해야 해! 했던 것은 언니다운 배려에서였다. 그래서 미례는 내게 제 연애를 숨겼던 걸까? 설사 미례가 내게 푸른 멍의 사연을 고백했다 해도 내가 그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도울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었다. 실연의 아픔은 운동을 통해서 풀어야 해. 금욕적인 내 사랑법, 공자님 말씀이나 강의하지 않았을지……
미례와 내가 한방에 살았을 때 우리는 서로를 닮고 싶어했다. 실제로 미례는 생머리를 한 갈래로 묶고 다니는 내 머리 스타일이며 꽉 다문 입매, 상대방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나쁜 버릇까지도 닮아갔다. 나 역시 미례에게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다. 책 속에서 세상을 배웠던 나, 일상에는 너무나 서투른 나에 비하면 차라리 미례가 언니 같았다. 김치 담그는 솜씨며, 쌀 이는 솜씨, 빨래 개는 솜씨, 전 부치는 일까지 미례는 일이라면 못하는 것이 없었다. 하다못해 설거지며 걸레 빨아서 짜는 것까지 그녀가 해야 반짝반짝 윤이 나고 고슬고슬했다. 내가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칭찬이라도 하면 미례는 신바람이 나서 콧김을 불곤 했다. 이 몸은 복성 덕성 맏며느릿감이여! 둘이서 시장에라도 가면 노점 아줌마들이 묻곤 했다. 형제가 나란히 왔네. 누가 언니여? 그때마다 우리는 좋아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우리의 공동생활이 늘 우애에 넘치고 화기애애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잘한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얼굴을 내미는 생활 감정과 감수성의 차이. 아침잠이 많은 나와 새벽잠이 없는 미례. 그래야 돈이 굳는다며 30분씩 걸어서 출퇴근하는 미례와 약속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거리낌없이 택시를 타는 나. 한달 월급 중 생리대값만 빼고 전부 적금을 드는 미례와 돈 관념이 희박한 나.
어느날 크리넥스통에서 티슈를 뽑아드는 내게 미례가 소리를 팩 지른 적이 있었다.
“야, 종옥이 너, 니 휴지 사다 써!”
퍽이나 오래 참다가 터트린 말투 같았다.
“? ……”
“그렇게 뭉텅뭉텅 뽑아 쓰믄 일주일도 못 가겄다.”
무안해서 말문이 닫힌 나를 보고 미안했던지 미례가 잠시 후에 말했다.
“그건, 그냥 이뻐서 사다 논 거여.”
분홍색 향기 나는 크리넥스. 품위 유지용으로 선반에 올려놓은 것을 내가 실제 용도로 사용하고, 그것도 너무 많이 빼 쓰는 것이 미례는 무척이나 속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거라곤 탁자 위에 크리넥스 티슈밖에 없었으니…… 대문 옆 재래식 변소에 쪼그리고 앉아서야 나는 신문지나 헌 공책조차 흔치 않았을 시골의 화장실, 아니 측간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미례는 언제부터 두루마리 화장지를 쓰기 시작했을까. 길어야 최근 몇년일 거야. 그뒤로는 치약을 짜서 쓰는 것까지 은근히 신경이 쓰이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미례가 시집갈 자금으로 3년간 부은 적금 탄 돈을 부모님이 오빠의 결혼비용으로 다 써버렸다고 했다. 다른 친구가 우연히 내 앞에서 그 얘기를 꺼냈을 때 미례는 얼굴을 붉히며 마구 화를 냈다. 미례는 그 일로 울고불고 한바탕 난리를 쳤던 모양인데, 내가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알게 된 것을 내심 창피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미례가 내게 마음의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처럼, 사실은 나 역시 미례에게 온전히 솔직하지는 못했다. 노조 결성을 앞두고 내가 대학 졸업자임을 고백해야 했을 때, 나는 미례에게 우리 집의 불화와 가난의 상처를 조금 과장해서 얘기했다. 부모가 싸울 때마다 느끼던 어린아이의 무력한 분노와 막막한 서러움, 부자인 사촌형제들에게 느끼던 열등감이며 납부금을 늦게 내서 당해야 했던 모욕감 따위…… 그녀의 삶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으리라. 그런데도 나는 너무나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서 널 이해할 수 있다고, 동병상련이라고, 그것이 전태일의 마음이고 예수의 마음이고 석가의 마음이 아니겠냐고, 자못 비장해져서 말했던 것 같다. 내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런 상처들이 나를 더 큰 인간의 고통에 눈뜨게 하고, 연민하게 하고, 그 연민이 나를 운동으로 이끈 한 동인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진실의 한 측면일 뿐이었다. 나는 20년 넘게 내가 받아온 풍부한 문화적, 교육적 혜택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몰락한 집안에 꼬장꼬장 살아있는 자존심과 공부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받았던 선생님들의 편애. 집안에는 오빠 언니들이 읽던 책들이 늘 손닿는 곳에 놓여 있었고, 음대에 다니는 사촌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내가 좋은 고등학교에 배정받도록 시내 중심부로 주소를 옮겨주셨고, 정동에 있는 그 여학교는 등나무 시렁과 담쟁이덩굴이 어우러진 고풍스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비치한 도서관, 수시로 연극을 공연하는 교내 극장, 오월의 축제, 인문주의자였던 선생님을 향한 사랑과 삼백 통이 넘는 편지 쓰기, 시와의 첫 입맞춤. 대학에서 받았던 장학금이나 고액과외 아르바이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한번도 내 육체와 시간을 저당잡혀본 적이 없었다. 제 머리나 겨우 빗질할 수 있는 나이에 업어 길러야 할 어린 동생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열세살에 식모살이를 가야 했던 것도 아니고, 납땜을 해서 다달이 돈을 부쳐야 할 부양가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나는 ‘인간적 한계’라는 말을 즐겨 썼지만, ‘여성적 한계’라는 말은 별로 써본 적이 없다. 나는 집안에서는 흔한 딸이었지만 집 밖에 나가면 늘 여자가 귀한 집단에서 홍일점의 유리함을 누리고 살았다. 나는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개념 안에서 사실은 남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혁명도 남성의 눈으로 바라봤던 것은 아닐까. 내가 좋아하던 생의 총체성, 전인적 인간, 실존적 결단…… 그런 단어들 속에 과연 ‘여성의 자리’가 있었던가? 여자의 자리가 벌레의 자리이며, 여자라는 것만으로 세상의 밑바닥일 수도 있음을 나는 짐작이나 할 수 있었던가? 나는 진정 몰랐다. 훗날 내 안에 숨어 있던 ‘작은 여자애’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유자차의 마지막 한 모금은 너무 달아서 사레 들린 기침이 터진다. 기침소리에 수족관의 열대어들이 화들짝 놀란 기색이다. 노란색 긴 지느러미를 하느작거리며 수초 사이에 머리를 박는다. 인공조명과 공기펌프에서 피어오르는 산소방울에 목숨을 얹어놓고 플라스틱 수초 사이에서 무심하게 노니는 열대어들. 그 가녀린 목숨 어디에 열대의 바다, 심해의 기억이 숨쉬고 있을까. 눈꺼풀이 없이 말갛게 튀어나온 눈동자, 열대어의 눈은 볼록렌즈다. 볼록렌즈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지……
총천연색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낡은 흑백화면을 보는 것처럼, 세상이 무미건조하고 둔감하게 느껴진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나는 일종의 ‘거대담론 증후군’을 앓고 있지 않았나 싶다.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발상. 혁명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아등바등하며 살아야 하나. 물론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것, 일상이 운동보다 더 어렵다는 걸, 수면에 우아하게 뜬 백조가 사실은 물밑으로 치열한 발놀림을 쉬지 않듯이, 일상이 혁명보다 더 치열해야 한다는 것을 머릿속으로 알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나 소진되어 있었다. 생명력은 고갈되고 더는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80년대, 이십대의 어느 순간에 고착되어버린 내 자아는 90년대를 사는 것을 거부했다. 삶에 대한 의욕상실, 나 자신을 포함한 주변에 대한 무관심, 단절과 침잠. 나는 환경이 내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것만을 하면서 수동적으로 떠밀려갈 뿐이었다.
어린 열대어들이 수초 사이에서 숨바꼭질한다. 꼬리를 파드득거리며 바닥의 잔모래에 주둥이를 씻기도 한다. 작고 여리고 뼛속이 환히 비치는 투명한 것들…… 바라보고 있자니 눈이 아리다.
소진된 내 생명력이 되살아난 것은 내가 한 생명의 어미가 되면서였다. 고사목 같은 내 몸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싹튼 새로운 생명. 부드럽고 따스하고 온통 다 싱싱한 3천6백 그램의 소우주. 아기는 막혀 있던 내 생명력의 물꼬를 열어주었다. 세상을 향해 새롭게 열리는 눈, 삶에 대한 애정이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생을 열망하기 시작했다. 소생된 생명력은 내게 표현에 대한 열망도 함께 가져왔다. 말더듬이의 굳었던 혀가 풀리듯 더듬더듬, 나는 말하고 싶었다. 다시 쓰고 싶었다. 그 순간 내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아마도 나 자신의 이야기였으리라. 하지만 이내 미례를 떼어놓고는 단 한줄도 나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나는 결국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시간을 거슬러오르는 고통스런 여행을 결의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작가의 말」을 쓴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기를 낳은 후에 글을 쓰기 위한 내 노동조건은 형편없이 열악해졌다. 남편이 그러고 있으면 너라도 나서서 애 우유값이라도 벌어야지 않겠니? 둘 다 정규적인 수입도 없이 연명하는 것이 불안했던지 시어머니는 아파트 지하상가에 점포를 얻어주시며 말씀하셨다. 너흰 책이 많으니까 책대여점을 하려무나. 에미 넌 예전에 글을 썼다니까, 비슷한 일 아니냐? 비슷한 일이라고?! 하지만 간난신고 끝에 제왕절개로 낳은 아기는 고무 젖꽂지를 어미 것으로 알고 모유도 먹지 않는 터에, ‘아기 우유값’이라는 말은 얼마나 절실하게 들리던지.
책대여점 자리는 야채가게와 옷수선집 사이에 문도 벽도 없이 열린 두 평 반의 공간이다. 나는 책장에 20년 가까이 내 손때가 묻은 소설책과 시집들을 가져다가 꽂아놓는다. 집이 좁아서 풀지도 못하고 베란다에 쌓아두었던 박스들, 아기의 기저귀 빨래로 베란다 자리마저 위협받는 사회과학 책들도 가져다 놓는다. 자본주의의 도전자들, 강좌철학, 식민지반자본주의론, 팜플렛 조직노선…… 차마 버릴 수는 없었던 그 책들을 나는 가장 후미진 자리에 제목이 안 보이도록 거꾸로 뒤집어서 꽂아놓는다. 백일 된 아기를 안고 날마다 지하상가로 나가면서, 나는 이게 삶이라고, 세상에 만만한 삶이 어디 있겠냐고 입술을 문다. 이거야말로 내 뿌리깊은 관념성이 ‘구체로의 상승’을 경험하고 있는 거야. 나는 장사를 하면서 아기를 돌보고 남편과 교대하는 틈틈이 소설을 쓰겠다는 당찬 결심까지 한다.
하지만 책을 쓰는 일과 책을 대여하는 일은 전혀 비슷한 일이 아니다. 상가 1층에 또다른 대여점이 있기 때문에 장사는 하루 오천원 벌이도 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장사수완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여긴 순수문학만 있나봐요. 어! 시집도 있네! 아줌마, 무협지는 없어요? 일본만화 비디오걸이라고, 그것 좀 갖다놔줘요…… 나는 그제서야 마지못해 무협지와 추리 에로물과 만화책을 사다놓을 생각을 한다. 하지만 책 반납이 며칠 늦었다고 벌금을 물리는 일은 끝내 못한다. 심심풀이로 만화책을 훔치는 애녀석들을 잡아서 족치지도 못한다.
게다가 둘이서 쉬엄쉬엄 교대하자던 남편은 나름대로 늘 바쁘고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딸 가진 아빠가 되었으니 난 이제부터 전투적 페미니스트가 될 거야!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일주일 내내 친구들과 술잔치를 벌였던 그는 황당하게도 내 모성애를 볼모로 점점 의기양양해져갔다. 마치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기라도 한 것처럼. 난생 처음 누군가를 부양해야 한다는 현실에 초조해진 그는 점점 신경질적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가장이라는 권위로 더욱 자기중심적이 되어갔다.
지하상가의 탁한 먼지와 혼잡한 소음 속에서 아기를 돌보고 책 도둑을 경계하느라, 나는 소설을 쓰기는커녕 책 한장 읽을 수가 없다. 고물상에 나앉은 고철더미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컴퓨터…… 그나마 가게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일은 요행을 바라며 여성지의 경품잔치 퍼즐을 푸는 일이다. 꼭 그 정도의 시간, 그 정도의 집중력밖에는 허락되지 않는다.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다. 하루는 종종 마주치는 아파트의 경비 아저씨가 가게 안을 기웃대다가 어색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저어, 서른 잔치…… 라는 거 있어요? 의외라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 시선을 박았다. 신문말고는 평생 활자와 친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쉰 몇살의 중늙은이. 내 시선에 그는 무슨 포르노물을 찾다가 들킨 소년처럼 쭈뼛거렸다. 나는 말없이 책꽂이에서 ‘서른, 잔치’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내 손바닥 위에 떨어지는 500원짜리 동전 한 개. 그 순간 나는 차라리 고무 함지박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톱이 문드러지도록 홍합을 까고 쪽파를 다듬고 싶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다섯달 동안 나는 생활비는커녕 가게 월세조차 벌어들이지 못했다. 가게를 헐값에 내놓았지만 대여점은 이미 한물간 장사라서 팔릴 기미는 감감 무소식이다.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추절추절 내리는 가을비. 비가 그치면 추운 겨울이 닥치겠지…… 나는 컴퓨터를 켜고 내 소설의 복잡한 파일 목록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활자들이 하얗게 증발하고 무한천공을 넘나드는 별들이 블랙홀로 사그라들 때까지. 그리고 한순간 나는 소설의 디렉토리 전체를 그대로 ‘freeze’시켜버린다. 소설을 냉동감옥에 유폐시킨 후, 나는 아파트 게시판에 논술 과외지도 전단을 붙이고 다닌다. 아기는 동네 아줌마에게 맡기고, 가게는 시간제 아르바이트 학생을 고용하고, 나는 일주일 내내 아기 보육비와 가게 월세와 아르바이트 학생의 주급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남의 집을 들락거린다. 일류대 병에 걸린 엄마들과 그 고삐에 매인 불쌍한 당나귀들을 위해서 나는 족집게 강사가 되어 대입 논술에 대비한 글쓰기 요령을 가르친다.
입구 쪽이 시끌벅적해지면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다방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어머나! 카운터에서 달려나온 마담이 반갑게 그들을 홀 한가운데로 이끈다. 마담은 그새 새뜻한 화장에 화사한 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손님들 앞에 선 마담의 몸놀림은 물 만난 고기처럼 매끄럽다. 눈웃음을 흘리면서 쌍화차를 권하는 모습은 중늙은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 충분히 교태스럽다. 더는 사투리도 쓰지 않는다. 멍처럼 보이는 푸른 반점에 그새 친근감을 느꼈던 것일까. 갑자기 딴사람 같아 보이는 마담의 모습이 나는 왠지 서운한 느낌이다. 정을 준 친구에게 갑자기 떠밀린 작은 여자애처럼.
2년 만에 가게가 팔렸을 때 내가 손에 쥔 돈은 천만원이었다. 그 2년 동안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은 지극히 작고 소박한 희망이었다. 나를 지상에 확고하게 발붙이게 하는 14킬로그램의 중력, 나날이 튼실해지는 아이의 초롱한 눈망울. 가게가 빨리 팔려서 조금이라도 내 시간을 갖게 되고, 18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해서 작은 거실이 생기면 아기 놀이공간으로 쓰고 문간방에는 내 책상을 놓겠다는 것. 난 토요일에 두 팀만 가르쳐서 딱 생활비만 벌 거야. 일요일엔 아이와 함께 지내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닷새 동안 낮 시간엔 글을 써야지.
하지만 사람들의 소망은 어찌 그리도 동상이몽인지. 에미야. 은행 대출을 받아서 학원을 차려보면 어떠니?…… 나 원작 계약해야 돼. 이번에 놓치면 기회가 없다구…… 안돼! 그 돈은 내가 2년 동안 가게에 적금 붓다시피 해서 만든 돈이야!…… 애야, 남편이 잘 돼야 가정이 화목하고 여자 인생도 풀리는 거다.
“방! 제목 죽이지? 90년대의 화두는 방이라구. 노래방, 비디오방, 소주방, 포르노방, 인터넷방, PC방, 숨어 있기 좋은 방…… 이 시대의 탈주와 가벼움을 이 정도로 잘 묘파한 소설은 없을 거야. 배우는 심은하라구!”
그는 목적도 이유도 없는 탈주와 ]스에 탐닉하는 여주인공에게 매혹당해 있었다. 그녀는 포스트모던하고 프리모던하단다. 찢어지게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가난의 구체성은 간단히 소거되고 자유만이 초록빛 배낭으로 남는다. 통쾌하게도, 그녀는 모성마저 가볍게 팽개친다. 그것이 새로움이랄 수는 있겠지. 80년대의 반작용으로서. 90년대의 한 특질을 나름대로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왜 내 남편이 그런 영화를 만들어야 해? 게다가 내 자존심과 피땀을 팔아서 만든 돈을 갖다 바치겠다니! 나는 절망한다.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남자에 대해서. 그리고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그를 질주하게 만드는 이 부박한 시대에 대해서. 차라리 다큐멘터리나 독립영화를 찍어. 그러면 그 돈 쓰는 거 참아줄게!…… 내 말 못 알아듣겠어? 이건 대박이라니까!
남편이 원작 계약을 하던 날 밤 나는 잠든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허해서 명주실 같은 아이의 머리칼과 희고 반듯한 이마를 쓰다듬어보고, 앙증맞은 손과 분홍빛 귓불을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지난 4년 동안의 내 삶.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 며느리, 딸, 책대여점 주인에 논술 선생까지, 나를 가둔 일상은 얼마나 두텁고도 완강했던지. 가게와 아르바이트로 내 삶의 시간은 토막토막 끊겨나갔다. 그나마 남은 자투리마저도 가족의 생일이며, 시댁의 제사며, 친인척의 결혼식이며, 누군가의 외국 나들이며, 나와 연관된, 그러나 결코 내가 아닌 온갖 일상사로 바다에 던져진 소금처럼 삼켜져버렸다. 하루는 고단하고 긴데, 한달은 빠르고, 어느새 달력을 보면 몇달이 지나 있고, 한 계절이 가고 일년이 가고, 또 몇년이 가버렸다.
이 헛똑똑이야! 남자는 애초에 길을 잘 들여야 해. 생활비도 분담하고 가사노동도 분담한다고 할 때부터 내 가당찮더라. 결국은 니가 다 떠안게 됐지! 귓가에 짜랑하게 울리는 언니의 핀잔.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실이었다. 그가 마음껏 독서하고 비디오 보고 술 마시며 현학적인 말의 성찬을 벌이는 동안, 나는 턱밑까지 차오른 일상의 격류에 토악질을 해대며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가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예술을 논하고 애(愛)술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서 나는 내 시간과 열망들을 저당잡히고 있었다. 아니 흘려보내고 있었다. 생활비 한푼 내놓지 않으면서도 그는 어쩌다가 돈이 생기면 휴대폰을 산다,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한다 하면서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은 기어코 사들이고야 말았다. 누군 약사 마누라를 둬서 좋겠더라. 들끓는 욕망과 자기 달란트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영혼. 콤플렉스로 단련되고 스트레스로 강화된 독설가. 나는 그 영혼의 부박함을 경멸하면서 동시에 연민했다.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당연하기만 한 남자 앞에서 나는 전투적이지도 집요하지도 못했다. 한 시절 내가 사력을 다해서 보였던 전투성은 다 소진되어버렸고, 나는 어느새 내성적이고 순한 여자애로 돌아와 있었다. 나 자신만을 위해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얻어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 80년대 내내 나는 작은 이기심도 자책하게 만드는 풍토에 길들여졌다. 게다가 내 속에는 자신을 악조건에 몰아넣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으로 스스로를 가치매김하는 순교자적인 성향까지 있었다. 나는 한없이 만만한 여자였다. 나의 연민과 부족한 이기심이, 나의 모성애와 책임감이 가정이라는 틀에 붙박인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 속에서는 모조리 약점이었다. 앞날은 불을 보듯 선연했다. 내가 많이 참으면 참을수록, 그리고 강하면 강할수록 나는 더욱더 벼랑 끝으로 몰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도 나는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했다. 일종의 심리적 퇴행이었을까. 남편과 싸우는 대신 나는 달팽이처럼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 달팽이 껍데기 속에서 나는 오래 전에 벗어버렸다고,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작은 여자애’를 만났다. 말이 없고 조르지도 않고 싸우기 싫어서 양보해버리고 혼자 속으로만 삭이는 여자애. 부모가 싸울 때마다 아주아주 작아져서 모습을 감추고만 싶던 그애. 가족이 너무 불쌍해서 한밤중에 쿨쩍이며 유서를 쓰던 그애……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상처와 슬픔과 마음의 굴곡들이 되살아나 나를 삼킬 듯이 넘실거렸다. 그 슬픔의 바다에 익사해버릴 것 같았다.
내가 미례를 떠올린 것은 그 슬픔의 밑바닥에서였다. 한없이 밑바닥까지 가라앉으면서, 나는 가슴을 휘젓는 누군가의 서글픈 웅얼거림을 들었다. 나는 내가 꼭 버러지 같어야…… 나는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미례를 삼켜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벗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버러지의 기억이 어느 순간 또다시 그녀의 발목을 낚아챘으리라는 걸. 그리고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미례는 쿨쩍이고 있는 조그만 내 옆에 쪼그린, 내 어린 시절의 친구였다는 걸.
한때 내게는 삶도 역사도 일직선으로 보인 적이 있다. 훌쩍 건너뛰고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고. 인간도 밑이 훤히 보이는 물웅덩이쯤으로 생각했다. 스무살의 내 이마를 서늘하고 명징하게 내리쳤던 사회의 ‘구조적 모순’ 은 공룡의 뼈다귀 같은 것이었다. 자본과 노동, 신식민지, 분단사회…… 나는 그것을 감싼 만만찮은 외피와 오묘한 실핏줄들을 보지 못했다. 내가 파충류같이 허물을 벗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고 생각했던 자리마다 사실은 가파른 벼랑이 숨어 있었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벼랑의 가파름만큼이나 깊은 골짜기에는 완강하게 똬리틀고 결코 변치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 시절 나는 하늘을 나는 새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던 것은 아닌지…… 하지만 이제, 나는 버러지처럼 배로 밑바닥을 밀면서 세상을 느낀다.
뒷좌석에서 누군가 짓궂은 농담을 했는지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오양아, 저그 언니한테 따끈한 엽차 한잔 갖다드리렴. 마담은 잠자리 날개 같은 한복을 사그락거리며 분주하게 홀을 누빈다. 배달 다녀온 아가씨가 내 앞에 뜨거운 엽차를 가져다놓는다. 복고풍으로 말아서 어깨에 늘어트린 탐스러운 머릿결…… 탁자 유리에 얼비친 내 얼굴은 짧은 머리칼 때문에 더 핼쑥하고 강퍅해 보인다.
“너 자해공갈단이야?”
지난 가을 삭발해버린 내 머리를 보고 남편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래. 어쩌면 나는 머리칼을 잘라버리는 방식으로 내게 강요되는 ‘여성’을 깨부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그런 방식으로 생을 향해 다시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는지도……
원작 계약을 하고 일년이 지난 후에도 남편은 몇십억짜리 환상을 좇아 헤맸고, 나는 여전히 생활고에 허덕이며 남의 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가 길거리에서도 집안에서도 자주 망연자실 맥을 놓곤 한다는 점이었다. 틈만 나면 잠이 쏟아졌다. 둔중하고 흐릿한 잠의 늪…… 나를 울려버린, 나로 하여금 삭발을 감행하게 한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좀더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 동안 그 늪속으로 서서히 침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를 만난 곳은 내가 잠살을 빼려고 등록한 에어로빅 쎈터였다. 어설픈 몸짓으로 율동을 따라하다가 숨이 가빠진 나는 한구석에 앉아 음악에 맞춰서 몸을 흔드는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바로 앞에서 그 여자가 몸을 흔들고 있었다. 슈퍼나 주차장에서 가끔 마주친 뚱뚱하고 약간 둔해 보이는 아줌마. 하지만 빠른 디스코 음악에 맞춰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대는 그녀는 아마조네스의 전사 같았다. 출렁거리는 허벅지와 뱃살, 그런데도 그녀의 율동은 얼마나 유연하고 볼륨 있고 리드미컬한지. 몇년이나 해야 저 정도 할 수 있을까, 처음엔 그저 경탄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두터운 살집 속에서 폭발하듯 분출하는 힘과 충동과 열정. 그녀에게서 나 자신을 보았던 걸까. 내 속에 갇힌 것들, 꺾이고 고사해버린 열망들! 울음이 복받쳤다. 눈물은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음악이 끝났을 때 헐렁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아마조네스의 전사는 다시 평범하고 무기력해 보이는 아줌마로 돌아가 있었다. 온몸에 물기가 다 빠져나가버린 듯 망연한 표정으로 나는 여자가 사라진 아파트 주차장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건너편 야산의 나무들이 우수수 잎새를 떨구고 있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몸 안의 수분이란 수분은 전부 다 내보내고 바싹 마른 뼈다귀로 서 있는 나무들…… 많은 생각이 스쳤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것도 같았다. 나는 천천히 상가의 미장원으로 걸어들어갔다. 삭발해주세요! 미용사는 좀 황당한 표정이었지만 두말없이 의자를 권했다. 삭발은 가령 영화에서 강수연이나 김지미가 하는 것처럼, 긴 머리를 먼저 단발로 자르고 다시 커트를 하는 몇번의 공들인 절차 끝에 바리캉을 대는 것이 아니었다. 양털을 깎듯이, 미용사는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바리캉을 갖다댔다. 대번에 머리카락이 후드득 떨어져나갔고, 작은 바리캉으로 두번째 밀자 이내 새파란 민둥머리가 되었다. 눈곱만큼의 비장미도 서정성도 없었다. 5천원만 내세요. 집에 와서 샤워를 하는데 문득 손톱 밑에 두피의 기름때가 끼여 나왔다. 30년도 더 묵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3밀리미터는 될 것 같은 두피의 때를 나는 이태리 타월로 박박 문질렀다.
삭발은 내가 더이상 일상의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일상이란 그것을 지배하고 자기 것으로 조직해내지 못하면 한도 끝도 없이 빠져드는 수렁일 뿐이었다. 소리없이 나를 침윤시키고 부식시키고 끝내 포말로 스러지게 하는 흐린 잠의 늪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온몸을 난타하며 항복을 요구하는 삼각파도였다. 목줄기까지 차오르는 격류에 휩쓸려가느니, 나는 차라리 섬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혼해!”
그 한마디만으로도 남편은 모멸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상처받은 자존심에 눈이 뒤집혀서 내 컴퓨터를 내동댕이쳤다.
“너란 년은 삶을 불구화시켜야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개좆같은 문학관을 갖고 있어!”
그 순간 내 몸은 탄환처럼 그의 가슴팍에 박혔다. 죽여버릴 거야!
나는 입술을 꾹 문다. 눈을 감고 가만히 숨을 가다듬는다. 호흡이 평정을 되찾을 때까지. 미지근한 엽차를 입안에서 굴리듯 천천히 마신다. 또 한 무리의 손님들이 문을 밀고 들어서자 나는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거스름돈을 건네주는 마담의 눈빛에 설핏 미소가 어렸다. 짙은 화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덜미에는 푸른 반점이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황시리젓과 김치전
버스터미널로 나오자 버스 한 대가 막 떠나려는 참이다. 유리창에 붙은 행선지에는 ‘영산포. 동신대학’이라고 씌어 있다. 불현듯 전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엄마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영산포 우리 학교에도 가봐야 쓴디……
노망든 뒤로 엄마가 종종 얘기하는 ‘우리 학교’가 엄마의 모교인 영산포여중이나 광주사범학교가 아니라, 단 6개월간 교편을 잡았다는 동신의 초등학교라는 걸 짐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살리고 싶으믄 빨리 시집 보내쇼. 안 그러믄 요절할 상인께. 결혼하믄 호남의 갑부로 살 것이요.’ 신기 들린 조리장수 할멈의 말을 듣고 혼비백산한 외할머니는 이제 갓 스무살인 여선생의 등을 떠밀어 부랴부랴 혼사를 서둘렀다고 했다. 만석지기 집안의 막내둥이 귀공자에게 시집을 간 여선생은 사업에 실패한 남편이 재산을 거의 탕진했을 무렵 잠시 복직을 꿈꾼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올망졸망한 자식들을 앉혀놓고 추억의 한 자락을 아련한 표정으로 들추어냈다. 엄마의 어린 시절 꿈은 선생님이었다고, 사범학교 졸업반 때 처음 나간 교생실습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한 학기만 가르치고 아이들과 헤어질 때는 얼마나 서운했는지…… 그 당시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 또래였으리라. 하지만 엄마에게는 이미 고등학생 아들에서 다섯살 코흘리개까지 다섯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딸려 있었다. 복직이 좌절된 후 엄마는 실패를 거듭하는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한평생 무기력과 가난 속에 허덕였다. 그리고 환갑도 안된 나이에 뇌출혈로 쓰러져서 이제는 노망기마저 여실하다.
“선창가에 하얀 등대가 서 있었어야. 방학 때 집에 돌아오믄 젤로 먼저 그 등대를 바라봤다. 하얗고 반듯한 것이 꼭 백마 탄 기사같이, 얼마나 멋졌는지 아냐. 밤에 등대를 켜믄 불빛은 또 얼마나 크고 환했던지…… 지금도 눈앞에 똑똑허니 보여야.”
어린애 같아진 엄마는 나이든 딸들에게 종종 말하곤 한다. 노망든 엄마의 암전 속으로 깜박깜박 떠오르는 등대의 불빛. 지금도 그 등대가 있을지. 길 잃은 배를 이끌어 포구에 닻을 내리게 하는 불빛.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환하고 따스한 불빛…… 나는 배들이 은성하게 불을 밝히고 정박해 있는 포구의 밤 풍경을 그려본다. 강바람에 비린내와 땀내를 씻고 검푸른 물 위에 아 출렁이는 밤배들. 어깨를 건 배들의 따스한 출렁임…… 그 출렁이는 물결에 내 몸을 싣고 싶어!
하지만 얼어붙은 내 발은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머뭇거리는 동안 영산포행 버스는 사람들을 태우고 떠나버린다. 나는 대합실과 매표소를 겸한 터미널 슈퍼 안으로 들어온다. 슈퍼 입구에 놓인 작은 철제 책상에 앉아 있는 늙수그레한 남자에게 물으니 드ᄃᆞᆯ강 들어가는 버스는 30분쯤 후에 들어온단다. 먼지를 뒤집어쓴 과자봉지와 음료수 따위가 쌓인 진열대, 대합실 한가운데 놓인 석유난로 주변에 대여섯 사람이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 곁을 지나 구석에 놓인 긴 의자에 몸을 부리고 앉았다. 갑자기 몸이 노그라지는 느낌. 눈알이 쑤시고 아팠다. 지난밤부터 혹사시킨 내 정신력은 거의 소진상태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고개를 외투깃에 박은 채 눈을 감는다.
날씨가 해맑으믄 맑어서 서글프고 함박눈 내리믄 눈온다고 서러운 것이 노총각 심사여…… 아따! 겉보리 서 말이믄 데릴사위 안 해간다는 말 못 들어봤소?…… 짚새기도 다 짝이 있는 벱인디 홀아비로 늙기야 할랑갑디여?…… 자울고 있는 내 귓가에 툭툭 날아드는 대화의 파편들. 고개를 들자 난로를 가운데 끼고 둘러선 사람들이 너스레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감색 파카를 입은 콧구멍이 약간 들린 너부데데한 남자가 화제의 주인공인 노총각인가 보다.
“마음 푸소. 내가 관상을 보아 허니 올 봄에는 좋은 처자 만날텐께.”
누런 털모자를 쓴 나토롬한 남자가 노총각에게 덕담을 하자, 너도나도 한마디씩 맞장구를 친다.
“장태 양반 음덕을 많이 쌓았은께 대가 끊기든 않을 거구만.”
“그려. 천생배필에 한 모 젓가락으로 궁합이 딱 들어맞는 처녀가 나올 것이요.”
“이왕이믄 속궁합까정 꽉 들어맞았으믄 좋겄구만이라우.”
한결 기분이 나아진 노총각의 넉살에 사람들이 우하하하, 웃음을 터트린다. 불면으로 창백하게 찌든 내 머릿속을 둥둥 울리는 웃음소리. 나는 그제서야 사람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핀다. 자주색 파카를 입은 오종종한 아줌마, 누런 털모자를 쓴 중늙은이 남자, 작은 스티로폼 박스를 안은 입이 합죽한 할머니, 거무튀튀한 얼굴에 구레나룻이 텁수룩한 사내…… 그들은 모두 잘 아는 사이인 듯 너나들이한다.
오메! 저 여편네 쥐 잡아묵은 입술 잠 보소…… 그러구 살라믄 얼른 숟가락 놓는 게 국민의 정부에도 이로워유…… 아따! 석수쟁이 눈깜짝이부터 배운다드니 인자 갱갱굴서 도의원 한자리 나겄소…… 누에고치 실 풀리듯 술술 이어지는 그네들의 말은 얼마나 절묘한 비유와 풍부한 묘사로 퍼덕거리는지. 맨숭맨숭 앉아서도 내 귓바퀴는 그 사투리의 생생한 억양과 질감을 포착하기 위해 꿈틀거린다.
버스가 도착했는지 대합실에 있던 사람들이 주섬주섬 짐을 추스른다. 버스에 올랐을 때 나는 차 뒤편으로 걸어들어갔다. 멀미를 하는 나는 버스를 타면 늘 운전사 바로 뒤, 맨 앞좌석에 앉곤 했는데……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야, 나는 평소와 다른 내 행동이 사람들을 좀더 잘 보기 위해서였다는 걸 깨닫는다.
공공도서관 앞에서 몸피가 보동된 아줌마가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버스는 그 앞에 멈출 듯하더니, 부릉부릉 5미터쯤 더 앞으로 나아갔다. 뒤웅스럽게 뜀박질하는 아줌마의 몸피에서 유난히 큰 가슴이 출렁출렁했다. 아줌마가 버스 가까이 다가오자 운전기사는 다시 차를 앞으로 조금씩 빼기 시작했다. 아줌마가 허덕허덕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버스에 올라탄 것은 버스가 20여 미터쯤 더 앞으로 나아간 지점이었다.
“워째 그렇게 사람을 골탕 먹인다요?”
젖가슴을 추스르며 아줌마가 불퉁거리자 운전기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뭔 났다고 진흙구덩이에 서 있소? 달려야 흙이 털어지제.”
기사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사람들 사이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라믄 흙 털라고 달리기 시킨 것이요, 시방?
아줌마가 썰다 만 묵모 얼굴을 했다.
“아따메! 동상은 땅띔 잠 해도 쓰겄구만. 젖소부인맨치로 출렁출렁 달고 다니믄 뭐 헐 것이여?”
자주색 파카 입은 아줌마의 말에 버스 안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당사자인 가슴 큰 아줌마의 입가에도 물렁한 웃음기가 번져드는데, 이번에는 노총각이 한술 더 뜬다.
“아짐씨, 한번만 매달리게 해줘유.”
“아따! 허천 들린데끼 껄떡거린다고 누가 한 코 주간디?”
텁석부리 사내가 말둥치를 자르자 노총각은 들창코를 벌름거리며 두 손을 모아쥐고 더욱 애단 목소리를 낸다.
“아짐씨, 내 평생 소원이어유.”
“음마! 우리 애기 아부지 눈 번히 뜨고 있어라우.”
“그려, 찬물에도 우아래가 있고 똥물에도 파도가 있는 벱인께, 한 20년만 기다리믄 쓰겄네.”
“하이구메! 그땐 환갑 진갑 다 지나서 젖이 쭈글쭈글해지잖어유.”
이번에는 사람들이 아예 박장대소한다. 검정 누비두루마기를 입은 조쌀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큼큼 헛기침을 해대는데, 입이 합죽한 할머니는 눈시울까지 찔끔거리며 강그라지게 웃어댄다.
기억할 수 있을까. 나는 나도 몰래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린다. 녹음기가 있다면 슬쩍 누르고 싶고, 필기도구가 있다면 받아 적기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런 나 자신이 문득 한심해진다. 모두들 박장대소하는데 나는 왜 함께 웃지 못하는가? 고작 그네들의 대사를 옮겨 적을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고백하건대 ‘노동문학’에서 내가 문학과 운동의 행복한 일치를 맛보았다는 것도 진실만은 아니다. 유서에서 편지 쓰기로, 탐미적인 시 쓰기에서 문학의 부정으로, 다시 노동문학으로 이행하는 각각의 과정에는 쉽사리 건너뛸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패 있었다. 떠도는 혼령들과 미친개들의 시절, 한 편의 시보다는 당장 돌멩이 한 개가 더 절실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운동권 주변을 기웃거리는 학내 문사들에게 근친혐오의 감정을 느끼곤 했다. 차라리 떠나라, 아니면 함께 빠져주든가. 그 근친혐오가 나를 ‘문화청산주의’로 내몰았는지도 모르겠다. 노동현장으로 들어갈 때 나는 아끼던 시집을 한 권도 남김 없이 친한 벗들에게 나눠줘버렸다.
내게 글쓰기의 충동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은 미례였다. 야식 개선을 요구하다가 둘 다 공장에서 해고된 뒤 한방에 살던 몇달간이었다. 한방에서 희희낙락 아옹다옹 사는 동안 내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한 여성노동자의 형상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점점 생생해지는 그 형상은 점차 이야기가 되고, 마침내 문자로 정착되고 싶어서 꿈틀꿈틀거렸다. 어느날 나는 미례에게는 알리지 않고 며칠 밤낮에 걸쳐서 그 꿈틀거리는 것을 공책에 끄집어올렸다. 철야노동을 뿌듯해하던 한 여성노동자가 야식으로 나온 단팥빵을 집어던지게 되는 작은 일상투쟁을 그린 것이다. 그것을 잡지에 투고한 것은 사소한 보안실수로 방 보증금을 날린 내가 자취방 얻을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87년 격동의 여진이 아직도 뜨겁게 감돌고 있던 시절이었다. 내 글은 잡지에 실리자마자 ‘노동소설’이 되었고 나는 ‘노동소설 작가’가 되었다…… 얼마 후 나는 미례의 이야기를 장편으로 구상했고 한 노동자 잡지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공장활동을 하던 시절 나는 ‘궁핍한 민중주의’적 편향에 물들어 있었던 것 같다. 민중에 대한 환상과 더불어, 한명의 노동자로서 민중 속으로 나를 해소하고 싶은 충동에 자주 휘말리곤 했다. 노동소설을 쓰면서부터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심리의 배면에는 내 존재에 대한 일종의 자기최면이나 기만이 숨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를 대변해서 쓴다는 부담감, 내 신원에 대한 자의식이 가시처럼 돋아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부정하면서, 또한 그들을 철저하게 대상화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결국 미례도 놓치고, 나 자신도 놓쳐버린 것은 아닌지……
“아따! 뭔 젓냄새라요?”
영산포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할머니의 스티로폼 박스가 기우뚱하면서 젓갈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젓냄새’라는 말에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자 할머니가 지레 수리목을 지른다.
“음마! 젖이 아니고 젓갈이여, 젓갈!”
“아따! 긍게 누가 뭐락 허요?”
텁석부리 사내가 의뭉스럽게 눙치자 사람들은 또 박장대소한다. 할머니가 배시시 웃음을 내비치며 박스 뚜껑을 단단히 여민 다음에도 젓갈 냄새는 버스 안에 진동을 한다.
황시리젓. 평소에 젓갈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갑자기 몰려오는 공복감으로 입안에 신물이 돈다. 몇달 만에 처음으로 느끼는 식욕이다. 문득 미례와 함께 부쳐 먹던 김치전 맛이 생각난다. 김치만으로 전을 부쳐 먹을 수 있다는 걸 미례에게 처음 배웠다. 밀가루 반죽에 신 김치를 넣고 뻘건 국물까지 주르륵 같이 부어서 멍울이 없게 잘 저은 다음, 기름을 적당히 두른 프라이팬에 한 국자 떠서 얇게 부친다. 가장자리가 노릇노릇해지면 뒤집고, 가장자리가 바삭바삭해질 때쯤 또 한번 뒤집는다. 미례도 그때만은 식용유를 듬뿍듬뿍 아끼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나 비오는 날 밤에, 와아! 살찌는 소리 들린다! 하면서도 대여섯 장씩 먹어대던 그 맛이란. 하긴 그때도 나는 가장자리 바삭바삭한 부분만 골라 먹는 바람에 미례한테 젓가락으로 손등을 꼭 찍혔던가.
차창 밖으로 비닐하우스들이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들녘이 스쳐 지나간다. 속살이 흰 통배추와 시금치, 검은 부직포를 씌운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빨갛고 노란 꽃송이들, 들녘에 피어오르는 논둑 태우는 연기. 얼어버린 작은 호박들이 밭둔덕에 뒹굴고 있다. 비료부대를 내린 농부가 둔덕에 앉아 담배를 피워문다. 먼 들녘을 바라보는 허랑한 어깨……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처음인 듯 새롭고 유정해 보인다.
90년대 내내 세상이 무성영화의 슬로비디오처럼 무미건조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인 것은 내 존재가 닫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던지. 생생한 80년대와 사막 같은 90년대. 그 둘 사이의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를 열어야 한다는 걸, 소스라치듯 깨닫는 순간들이 있기는 했다. 내 존재를 열지 않고는 그 단절을 극복할 수 없으리라는 걸. 삶이 터널을 가는 것처럼 막막할 때 나는 문득문득 미례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고향집에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한순간 미친년처럼 나부끼던 충동은, 하지만 나를 옥죄는 일상의 틀을 깰 만큼 강하고 지속적이지는 못했다. 품안에 깃들인 젖먹이가 핑계일 수는 없으리라. 나를 열기 위한 결단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90년대의 나의 침묵, 최소한 전향하지 않았다는 내 자긍심은 사실 그리 내세울 만한 것도 아니다.
금탑가든에 돌아온 것은 땅거미가 어둑어둑 밀릴 무렵이었다. 불을 환하게 밝힌 가든에서 노랫소리가 마당까지 울려퍼지고 있었다. 주방 옆 큰방에서 올케언니가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이 우리 곗날이여. 달마다 계 모아서 노래방 한번씩 간디, 내가 이 맛에 산단께."
꽃자주색 홈드레스를 차려입은 올케언니는 곱게 화장을 하고 입술도 진하게 칠하고 있었다. 기미가 자글자글한 얼굴에 늘 푸념을 달고 다니던 평소의 모습이 아니다.
“명곡이여 명곡! 요즘 이 노래가 뜬다등만. 내가 잘난 사람도 지가 못난 사람도 어차피 쿵짝이라네.”
쿵짝 쿵짝 쿵짜작 쿵짝…… 스텝을 밟으며 올케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다.
“내가 명색이 가든떡인디, 춤도 못 추믄 쓰가니?”
몇년 전 유행했던 신신애춤이던가. 검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스텝을 밟으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춤동작, 눈동자 굴리는 것까지 흉내내는 바람에 웃음이 나올 것만 같다. 작달막한 키에 살이 올라서 투덕투덕 늘어진 몸매 어디에 저런 흥겨움이 숨겨져 있었는지……
“울고 웃는 인생사아 소설 같은 세상사아.”
늘 내 자의식에 갇혀서 한번도 올케의 말벗이 되어주지 못했던 나. 나슬나슬 닳아서 올케의 수다가 버겁기만 했던 내 신경…… 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올케가 타주는 달디단 커피를 함께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술판에 신사 없고 춤판에 요조숙녀 없는겨.”
어깨를 흔들며 다가온 올케가 내 팔을 잡아올리더니 한바퀴 빙그르 돌린다.
“아, 서울떡은 춤을 워찌케 추는가 구경 잠 하세!”
‘서울떡’이라는 말에 나는 그만 훅!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구름다리
이른 새벽 강가에는 아무도 없다. 나와 강 사이에는 아무도 없다. 다만 아득한 허공에 구름다리 하나가 가까스로 걸쳐 있을 뿐이다. 구름다리는 초승달을 머리에 이고 물안개 속에 신비스럽게 잠들어 있다. 나는 이끌리듯 구름다리로 다가간다. 철조망을 넘어서 구름다리에 한발을 내딛자 다리 상판의 떨림이 전해져온다. 오랫동안 사람을 실어보지 못한 다리가 내는 신음소리. 흥분으로 몸을 떠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로프를 잡고 조심스레 발을 딛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강바닥에서 시작된 안개가 한겨울의 싸늘한 수분을 품고서 무성하게 나를 감싸고 돈다. 온통 시린 물소리.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나를 감싼 안개가 출렁거린다. 다리 한가운데까지 와서야 나는 멈추었다. 다리의 중간 지점을 받친 기둥 아래는 물살이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소용돌이친다. 현기증. 금방이라도 빨려들 것 같다. 허리를 로프 쪽으로 조금 기울였을 때 발밑에서 나무 판자 하나가 떨어져나갔다. 순간 나는 로프를 꽉 거머쥐었다. 내 몸이 로프 쪽으로 쏠리는 바람에 다리 전체가 출렁거렸다. 아찔함. 그러나 눈을 감지는 않았다. 발밑에서 두 개의 판자가 또 떨어져내렸다. 한순간 내 발은 허공에 떠 있다. 전류처럼 온몸을 꿰뚫는 힘, 로프를 쥔 손아귀에 힘줄이 선다. 무섭게 뛰는 심장의 박동, 아우성치며 올올이 일어서는 피톨들……
철조망을 넘어설 때만 해도 내 머릿속의 이미지는 다리 한가운데서 강물 위로 몸을 반쯤 드리우고 두 팔을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잎사귀를 바람에 다 맡겨버리는 나무처럼.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 몸을 꿰뚫는 것은 온몸을 꽉 채우는 긴장감, 싱싱한 생명의 파동이다. 파동치듯 깨어나는 오래 잊었던 감각들. 처음 시를 쓰던 순간과 처음 받은 꽃다발과, 처음 밀실이 찢기던 아픔과 처음으로 광장을 점령했을 때의 감동과, 첫 입맞춤과 첫 출산과, 내 어머니의 자궁을 빠져나올 때 질렀던 고고성…… 내 몸에 각인된 그 모든 처음의 감각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여러 날을 두고 구름다리가 내게 속삭인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절망이 아니라, 초탈이 아니라, 이 충일한 생명력이었다. 절망의 상투화, 환멸의 포즈, 그런 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혐오하고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것들이 아닌가.
물살이 빠르게 소용돌이치는 한가운데를 나는 뚫어져라 직시한다. 나는 언제 어떻게 커다란 입을 열고 나를 삼켜버릴지 모를 심연 위에 서 있다. 삼키어지지 않겠다. 이 심연 위에서야말로 나는 생에 대한 생생한 실감과 전투적 본능을 느낀다. 검은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모든 것을 삼키고, 또 토해내는 검은 배꼽…… 나는 그 배꼽을 내 안에 느낀다.
내 안의 불빛
어느날 아침 나는 ‘장미나무집’ 근처 강기슭에서 등이 연둣빛인 물새를 보았다. 쪽빛 부리와 꼬리가 아주 긴, 제비만큼 작은 새. 날렵하면서도 우아한 날갯짓으로 물을 차고 비상할 때마다 연둣빛 파문이 잇따라 퍼져나갔다. 새는 여러번 낙하와 비상을 반복하며 강의 수원지 쪽으로 날아간다. 새가 사라진 허공은 수많은 햇빛의 미립자들로 메워지고…… 나는 물새가 날아간 곳으로 새의 길을 따라 물길을 거슬러올라간다.
문득 눈앞에 녹슨 수문이 나타난다. 수문 밑으로 넘실거리는 깊은 소. 언젠가 한 처녀가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빠져 죽었다는 곳이 여기일까. 나는 수문을 건너뛰듯 훌쩍 지나친다. 이번에는 이랑이 잘 일궈진 밭이 막아선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잘 들여다보면 파란 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보리밭. 나는 보리싹을 밟지 않으려고 방죽으로 올라선다. 인적이 드문 방죽길은 마른 잡풀이 우북하다. 검누르게 덩어리진 갈대들이 귀기스럽게 휘청댄다. 점점 무성해지는 잡풀들이 풀매듭이 되어 발목을 잡아챈다. 앞을 가로막는 풀덤불. 가시떨기에 작고 빨간 열매가 바람을 타고 있다. 나는 떨기나무와 풀덤불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덤불숲 사이로 언듯언듯 비쳐들던 강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강물이 한줄기 은빛 띠로 멀어져갈 즈음 덤불길은 다시 소슬한 오솔길이 된다. 강은 저 멀리 제 갈길로 흘러가고, 강과 헤어진 오솔길은 마을로 이어지고 있다. 길이 마을로 통해 있을 줄은 몰랐다.
저만치 마을 고샅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까까머리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소년은 푸른 배낭을 등에 매달고 가슴 가득 강바람을 안으며 내가 거슬러온 방죽길을 생생 달려간다. 강은 강을 거슬러오르지 않는다. 강이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시간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여울이라고, 강바람이 강하게 나를 민다. 그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난 돌아가 미례 널 만나야 해.
마을을 에둘러서 국도로 나오자 산모롱이 돌아간 저 끝에서 버스가 떠올랐다. 버스에 오르자, 전에 만났던 그 운전사가 나를 보고 묻는다.
“인자 어서 내릴지 아요?”
“예, 우산리 다리 앞이에요.”
선산 있는 마을의 정류장 이름을 묻는 내게 오빠는 말했다. 새 다리가 놓임서 인자는 버스가 마을 앞을 안 지나다녀야. 다리 앞에 내려서 오른쪽 길로 쭉 내려가야 쓴다.
다리 앞에 내리자 오른쪽으로 저만치 산자락에 안긴 마을이 보였다. 멀리서도 보이는 마을 앞 아름드리 당산나무. 잎새 하나 없는 앙상한 자태지만 나는 그것이 250년 수령의 느티나무라는 걸 알고 있다. 그 당산나무 아래 ‘우진 마을’이라고 씌어진 입석이 여전히 있었다. 들머리 정미소 앞에서 고샅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 갈래는 마을을 에둘러서 뒷산으로 나 있고, 한 갈래는 실개천을 낀 들녘으로 난 길이다. 두 길이 팔을 벌린 오목한 곳에 옹기종기 들어앉은 낮은 토담집들. 나는 더듬더듬 비탈진 모퉁이, 초록색 양철대문 집을 찾아 골목을 기웃댄다. 문득 한 집이 눈에 들어온다. 토담 위에 드리운 품이 넓은 나무는 분명 석류나무다. 오랜 세월 내 가슴속에 박제되어 있던 그 집이 기지개를 켠다.
석류나무집은 놀랄 만큼 옛 모습 그대로이다. 툇마루가 있는 세 칸 기와집. 멍석 두어 닢 될 만한 토방의 오른쪽에는 슬레이트 지붕을 인 헛간과 우사가 있고, 토방 왼쪽은 정제를 끼고 뒤란으로 돌아간다. 뒤란에는 감나무 아래 장광이 있다. 장광 옆에는 꺼멓게 마른 참깻단과 말린 고추가 든 비닐포대, 쇠죽 끓이는 가마솥과 돌확, 재생고무 함지박…… 그리고 빈 꽃밭이 있다. 꽃밭 뒤로는 산자락을 울타리 삼아 빽빽한 대숲이 일렁이고 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을까. 다시 앞마당으로 돌아나오자 그제서야 대청과 큰방 문에 채워진 자물통이 보인다. 나는 조바심이 나서 사람살이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두리번거린다. 정제문이 빠끔히 열려 있었다. 살강에 정갈하게 놓인 그릇들, 크고 작은 국솥과 밥솥이 나란히 걸린 부뚜막, 찬장에는 양념통이며 말라붙은 누룽지까지 그대로 있었다.
다시 앞마당으로 나온 나는 툇마루에 걸터앉는다. 사람이 아주 살지 않는 집은 아니다. 어디 먼데 외출한 걸까. 문득 사위가 침침해지는 것 같아서 올려다보니 하늘이 회색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하늘 저쪽 끝에서 검은 구름이 덩어리져 몰려온다. 을씨년스러운 기운. 춥다. 자물통이 채워져 있지 않은 정젯방 문을 슬쩍 밀어보자, 문이 풀썩 열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툇돌에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선다.
그 방에는 이제 변진섭의 브로마이드나 천 마리 학을 담은 유리병, 꽃바구니는 없다. 이 집안의 딸들은 모두 성장해서 민들레 꽃씨처럼 훌훌 흩어져갔으리라. 하지만 자잘한 꽃송이가 무늬진 포플린 커튼과 나무책상은 좀더 낡아진 채로 여전히 있다. 이불을 올려놓은 서랍장과 오래된 반닫이도. 오래 불을 때지 않았는지 방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온다. 나는 웅숭그리며 책상 앞 의자에 앉는다. 책꽂이에 꽂힌 전기기사 자격증 시험문제집, 막내둥이 남동생의 것이겠지. 바람이 몹시 부는지 뒤란 대숲이 물결소리를 낸다. 쏴아쏴아…… 잠결에 대숲이 일렁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지. 군불을 때서 살갗이 빨개지도록 설설 끓던 정젯방, 간지러워서 온몸을 긁다보니 아침이었어…… 몸이 나라지는 느낌. 나는 책상에 팔을 괸 채 물결처럼 넘실대는 대숲 소리에 빠져든다.
눈을 뜨자 침침한 어둠이었다. 한순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벽을 더듬으며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스위치를 만졌다고 생각한 순간 사위가 환해졌다. 백열등 불빛에 방안의 사물들이 돋을새김되어 보인다. 낡은 책상, 빛바랜 꽃무늬 커튼, 오래된 반닫이와 5단 서랍장. 그래. 난 미례한테 와 있는 거야. 방문의 창호지에 얼비치는 바깥은 어둡다. 몇시나 되었을까. 시골에 온 뒤로 나는 시계를 풀어놓고 지냈다. 내 수면 싸이클은 내내 엉망이다. 그리 오래 잔 것 같진 않은데…… 문득 시렁에 매달린 석류가 눈에 들어온다. 아까 방에 들어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인데. 석류가 말라가는 은은한 향내. 향기가 가뭇없이 다가와 나를 가라앉혀준다.
문득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동상 왔는가?”
방문을 밀치자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다가왔다. 파파할머니였다. 방 쪽으로 성큼 다가선 할머니는 서슴거리는 내게 묻는다.
“누구라요?”
“저…… 전, 송미례를 찾아왔는데요.”
말을 잇지 못하고 서슴대는 나를 훑어보더니, 할머니는 경계심을 풀고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으응, 미례 친군감만. 워쩌끄나, 미례는 이번 설에는 여그 안 왔는디. 자슥들 내려오기 심들다고 이 참엔 두 양주가 서울로 올라갔구만. 금매, 설도 지났은께 인자 올 때가 되?는디…… 나는 불이 훤허게 켜졌길래 왔는가 했제.”
툇마루로 나오자 토방이 빈틈없이 희다. 내가 잠든 사이 기척도 없이 하늘 가득 눈이 내리고 있었다.
“미례 그미가 한 몇년 집에 연락도 끊고 명절에도 안 내려와서 해남떡이 애간장을 끓이더만. 그래도 그미가 신랑 복은 있었든갑서. 아! 황소같이 튼실하고 너름새있는 신랑을 만났단께.”
“결혼을 했다구요!”
울컥 고마운 느낌이다.
“저 웃말 이장어른 맏아들인디, 지 오래비 친구여. 뭣이냐, 쇠 깎는 일을 헌디 월급도 솔찬하다등만. 아들 낳고 시방 의정부에서 산다제.”
오빠 친구! 문득 눈앞에 저 유월의 봉고차 여행이 떠오른다. 그 시절의 유행가들. 휘파람을 불러젖히던 노총각들 중에 미례의 신랑이 끼여 있었을까. 신랑이 금형 일을 한다면 프레스보다는 일당이 높겠지.
“금매, 다 인연이고 복인갑서. 옛날 같으믄야 서른살 묵어갔고 어디 재취자리로나 가제, 시집갈 데나 있가니? 근디 신랑이 미례랑 결혼허고 아서 씨암탉 고아 믹이고 갖은 좋다는 약초 다 데려 믹이고, 비단금침으로 싸안고 데려갔단께.”
서른살에 결혼했다면 최소한 오년간의 공백은…… 하지만 지금은 그 공백은 접어두기로 하자. 미례를 다시 살아나게 하고 피어오르게 했을 어떤 사랑, 그 사랑의 힘에 대해서만 상상하자. 또한 나는 알고 있다. 미례 속에 얼마나 강인한 생명력이 숨쉬고 있는지도.
“신랑이 여그 사람이라서 명절마다 내려오제. 친정에도 매번 들르고. 저번 추석 때도 아들 보듬고 왔더란께……”
하다가 할머니는 갑자기 말끝을 흐린다. 마침 소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할머니는 에구구,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선다.
“에그! 짠헌 거. 너도 산 목심인디 배를 골아서 어쩔끄나.”
컴컴한 우사에 백열등을 켜면서 할머니는 틀니 없는 합죽한 입으로 혀를 쯧쯧 찬다. 내가 다가가자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사료값이 올라서 제대로 못 믹인께, 저러고 피골이 상접했제. 창규 아재가 서울 감서 잡아묵든지 내빌든지 알아서 허라고 혔제만, 짠해서 그럴 수도 없고……”
소는 기운이 없는지 음메에 구슬픈 울음만 한번 울고는 그대로 누워 있다. 퀭한 눈. 늑골 수를 셀 수 있을 만큼 말라비틀어진 몸뚱이. 봉산리에서도 종종 마주치는 소들이 너무 날씬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어떤 소는 먼발치로 말인 줄 착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이 동네 소는 일소라서 전부 근육질인가보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것이 아사 직전의 굶주림 때문이었다니! 할머니가 여물통에 짚단을 넣어주자 소가 비칠비칠 일어나 짚단에 고개를 박는다.
“이것으로 뱃속 소지나 될란가 모르겄네. 니 신세나 내 신세나 흙 파묵고 사는 것은 똑같다마는……”
혀를 차는 할머니의 오물오물 합죽한 입이 되새김질하는 비쩍 마른 소하고 닮았다. 나는 그제서야 쭈뼛거리며 할머니에게 묻는다. 요즘 농사짓는 일은 좀 어떠시냐고. 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의 푸념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재작년 그러께부터 우리 아들이 하우스 농사를 시작혔는디, 아이엠에픈가 뭣인가로 기름값이 올라서 농사를 다 망쳤네. 하우스 세 동에 호박을 심었는디, 난방을 헐하게 한 참에 날씨가 영하로 뚝 떨어진께, 가상자리 쪽 호박이 다 얼어부렀어. 빚만 옴팡 졌제.
할머니는 한숨 끝에, 에구! 이놈에 아이엠에픈가 뭣인가는 언제나 끝날란가? 덧붙인다.
시골의 파파할머니의 입에서 발음되는 ‘아이엠에프’는 얼마나 격세지감인지. 십년도 훨씬 더 전에 침침한 레스토랑에서 일어판 『세계경제론』을 강독할 때, ‘IMF’ ‘WTO’ 같은 용어들을 처음 배웠다. 90년대 들어와서 유행처럼 80년대의 사회과학을 폐기처분할 때 무덤 속에 묻힌 줄 알았더니, 2천년대를 바라보는 지금 그것들이 강시처럼 되살아났다.
“쌀농사도 안되고 하우스도 안되고, 인자 농사도 해묵고 살 것이 없는디, 근다고 농사꾼이 땅을 놀리겄는가? 빚을 내서라도 또 심어야제. 근디 올해는 태풍에 하우스가 다 날아가 부렀네. 아조 징혀! 빚은 줄레줄레 새끼를 치는디 이자도 못 물고…… 시방 우리 아들은 방구들 지고 한숨만 푹푹 쉬고 있어.”
할머니는 짓무른 눈가를 훔치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근디다 이녁 빚만 있가니? 우아래 집으로 어깨보증을 섰는디, 그놈의 것이 통지서 날아들고 빨간 딱지 붙고 사람 피를 말린단께. 인자 다덜 한꾼에 자빠지고 넘어질 일만 남었네. 죽도 살도 못허고…… 워째, 일을 허믄 헐수록 더 빚이 느는가 모르겄어.”
할머니의 하소연은 소 울음소리처럼 구슬프게 내 안으로 흘러든다. 무언가 내 속에 얼어붙어 있던 것이 꿈틀꿈틀 풀어지는 느낌이다.
눈을 털고 다시 툇마루에 돌아왔을 때 할머니가 내게 다가앉으며 묻는다.
“미례 친구믄 서른서인가, 너인가? 가만 있자 우리 효례가 서른셋인께, 거그도 셋인갑만.”
딸 생각을 해서인지 할머니의 말투가 스스럼없어진다.
“결혼은 했는가?”
내가 머뭇거리자 할머니는, 오메! 당아 안했어? 내 무릎을 탁 친다.
“그라믄 뭐 묵고 산가?”
“………”
“자고로 여자는 시집가서 자석들 낳고 사는 것이 젤로 복이여. 남편이 하늘이여. 보리멍석에 둥구미 삼태기로 옴살 붙어 살아도 서방이 있어야 써.”
“………”
“글고 아들을 낳아야 써. 다 내 살아온 경험에서 나온 말인께 잘 듣소. 시상에 믿을 것은 아들밖에 없어. 우리가 송씨 종갓집이여. 여그가 송씨가 모다 모여 사는 동넨디, 내가 종갓집 맏며느리여. 딸만 셋을 줄줄이 낳고 얼매나 설움을 당했는지…… 네번째 아들을 낳고서야 사람대접 해주드만. 긍께 딸은 다 소용없어.”
나는 가만 한숨을 내쉰다. 종손이라도 남동생이 둘이나 있으니까 아무나 아들 하나 낳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언젠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던 말을 듣는다면 이 파파할머니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딸 키워봐야 천상 넘의 집 식구제 내 집 식구가니? 우리 친정이 쩌그 화순 도암면인디, 어메가 보고 아도 일년에 딱 한번밖에 못 갔제. 광에 그 많은 쌀이 넘쳐나도 친정 갈 때 떡 한번 안 해줬어. 오메! 떡 한 말만 해주믄 온 동리 사람들이 노나 묵고 좋을 것인디, 얼매나 마음이 짠하던지…… 근디, 떡두께비 같은 아들 하나 떡허니 나논께, 그때서야 인절미해서 친정 보내주등만. 긍께 아들 낳아야 써잉!”
내 손을 잡고 눈까지 끔벅, 하는 할머니가 나는 점점 거북해진다.
“아들이든 딸이든 건강하기만 하면 되죠.”
내 목소리가 절로 거칠어진다. 말길을 딴 데로 돌리려고 쉽게 내민 말이었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찔끔 말문을 닫는다. 그려 그 말이 맞네, 한숨을 내쉰다.
“내 인자사 말인디, 미례 그미 아들이 성치가 못 허드란께. 네살 묵었단디 워째 앉도 서도 못허고 어버버 허드란 마시. 배냇병신인가……”
배냇병신?! 가슴이 턱 막힌다.
“그미가 지 탓이라고 눈물바람 해쌓는디…… 원체 그미가 시집가기 전에 몸이 다 망가졌었어. 죽을둥살둥 했제. 에미 몸이 부실해서 그랬는가아……”
코앞으로 날리는 눈발이 뿌옇게 흔들려 보인다. 나는 입술을 꾹 문다.
굵은 눈발이 검은 허공을 빡빡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아따! 먼디서 왔는디 서운해서 워쩌까아잉?”
일어서는 내 손을 부여잡고 할머니는 묻는다.
“금매, 이름이 뭣이단가?”
“……종옥이, 이종옥이요.”
나는 오래 발음해보지 않았던 이름을 댄다. 미례 넌, 내가 너보다 세살이나 많은 학출이라는 걸 알고도 나를 계속 종옥이라고 부르며 해라를 했지.
“아이고! 질이 험해서 잘 가잔 말도 못허겄네. 욕보소잉.”
돌아서는 내 어깨를 잡고 할머니는 마지막 다짐을 놓는다.
“얼른 시집가서 아들 낳아야 써잉. 떡두께비같이 튼실한 놈으로!”
어둠속으로 걸음을 떼어놓으며 나는 양육권 소송중인 내 딸을 생각한다. 결손의 상처를 각인해버린 무구한 눈망울. 불현듯 그 위에 얼굴을 보지 못한 한 사내아이의 모습이 겹쳐진다. 건강치 못한, 미례 너의 아들……
소진된 내 생명력이 되살아난 것은 내가 한 생명의 어미가 되면서였다. 고사목 같은 내 몸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싹튼 새로운 생명. 부드럽고 따스하고 온통 다 싱싱한 3천6백 그램의 소우주. 아기는 막혀 있던 내 생명력의 물꼬를 열어주었다. 세상을 향해 새롭게 열리는 눈, 삶에 대한 애정이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생을 열망하기 시작했다. 소생된 생명력은 내게 표현에 대한 열망도 함께 가져왔다. 말더듬이의 굳었던 혀가 풀리듯 더듬더듬, 나는 말하고 싶었다. 다시 쓰고 싶었다. 그 순간 내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아마도 나 자신의 이야기였으리라. 하지만 이내 미례를 떼어놓고는 단 한줄도 나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나는 결국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시간을 거슬러오르는 고통스런 여행을 결의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작가의 말」을 쓴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기를 낳은 후에 글을 쓰기 위한 내 노동조건은 형편없이 열악해졌다. 남편이 그러고 있으면 너라도 나서서 애 우유값이라도 벌어야지 않겠니? 둘 다 정규적인 수입도 없이 연명하는 것이 불안했던지 시어머니는 아파트 지하상가에 점포를 얻어주시며 말씀하셨다. 너흰 책이 많으니까 책대여점을 하려무나. 에미 넌 예전에 글을 썼다니까, 비슷한 일 아니냐? 비슷한 일이라고?! 하지만 간난신고 끝에 제왕절개로 낳은 아기는 고무 젖꽂지를 어미 것으로 알고 모유도 먹지 않는 터에, ‘아기 우유값’이라는 말은 얼마나 절실하게 들리던지.
책대여점 자리는 야채가게와 옷수선집 사이에 문도 벽도 없이 열린 두 평 반의 공간이다. 나는 책장에 20년 가까이 내 손때가 묻은 소설책과 시집들을 가져다가 꽂아놓는다. 집이 좁아서 풀지도 못하고 베란다에 쌓아두었던 박스들, 아기의 기저귀 빨래로 베란다 자리마저 위협받는 사회과학 책들도 가져다 놓는다. 자본주의의 도전자들, 강좌철학, 식민지반자본주의론, 팜플렛 조직노선…… 차마 버릴 수는 없었던 그 책들을 나는 가장 후미진 자리에 제목이 안 보이도록 거꾸로 뒤집어서 꽂아놓는다. 백일 된 아기를 안고 날마다 지하상가로 나가면서, 나는 이게 삶이라고, 세상에 만만한 삶이 어디 있겠냐고 입술을 문다. 이거야말로 내 뿌리깊은 관념성이 ‘구체로의 상승’을 경험하고 있는 거야. 나는 장사를 하면서 아기를 돌보고 남편과 교대하는 틈틈이 소설을 쓰겠다는 당찬 결심까지 한다.
하지만 책을 쓰는 일과 책을 대여하는 일은 전혀 비슷한 일이 아니다. 상가 1층에 또다른 대여점이 있기 때문에 장사는 하루 오천원 벌이도 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장사수완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여긴 순수문학만 있나봐요. 어! 시집도 있네! 아줌마, 무협지는 없어요? 일본만화 비디오걸이라고, 그것 좀 갖다놔줘요…… 나는 그제서야 마지못해 무협지와 추리 에로물과 만화책을 사다놓을 생각을 한다. 하지만 책 반납이 며칠 늦었다고 벌금을 물리는 일은 끝내 못한다. 심심풀이로 만화책을 훔치는 애녀석들을 잡아서 족치지도 못한다.
게다가 둘이서 쉬엄쉬엄 교대하자던 남편은 나름대로 늘 바쁘고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딸 가진 아빠가 되었으니 난 이제부터 전투적 페미니스트가 될 거야!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일주일 내내 친구들과 술잔치를 벌였던 그는 황당하게도 내 모성애를 볼모로 점점 의기양양해져갔다. 마치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기라도 한 것처럼. 난생 처음 누군가를 부양해야 한다는 현실에 초조해진 그는 점점 신경질적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가장이라는 권위로 더욱 자기중심적이 되어갔다.
지하상가의 탁한 먼지와 혼잡한 소음 속에서 아기를 돌보고 책 도둑을 경계하느라, 나는 소설을 쓰기는커녕 책 한장 읽을 수가 없다. 고물상에 나앉은 고철더미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컴퓨터…… 그나마 가게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일은 요행을 바라며 여성지의 경품잔치 퍼즐을 푸는 일이다. 꼭 그 정도의 시간, 그 정도의 집중력밖에는 허락되지 않는다.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다. 하루는 종종 마주치는 아파트의 경비 아저씨가 가게 안을 기웃대다가 어색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저어, 서른 잔치…… 라는 거 있어요? 의외라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 시선을 박았다. 신문말고는 평생 활자와 친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쉰 몇살의 중늙은이. 내 시선에 그는 무슨 포르노물을 찾다가 들킨 소년처럼 쭈뼛거렸다. 나는 말없이 책꽂이에서 ‘서른, 잔치’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내 손바닥 위에 떨어지는 500원짜리 동전 한 개. 그 순간 나는 차라리 고무 함지박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톱이 문드러지도록 홍합을 까고 쪽파를 다듬고 싶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다섯달 동안 나는 생활비는커녕 가게 월세조차 벌어들이지 못했다. 가게를 헐값에 내놓았지만 대여점은 이미 한물간 장사라서 팔릴 기미는 감감 무소식이다.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추절추절 내리는 가을비. 비가 그치면 추운 겨울이 닥치겠지…… 나는 컴퓨터를 켜고 내 소설의 복잡한 파일 목록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활자들이 하얗게 증발하고 무한천공을 넘나드는 별들이 블랙홀로 사그라들 때까지. 그리고 한순간 나는 소설의 디렉토리 전체를 그대로 ‘freeze’시켜버린다. 소설을 냉동감옥에 유폐시킨 후, 나는 아파트 게시판에 논술 과외지도 전단을 붙이고 다닌다. 아기는 동네 아줌마에게 맡기고, 가게는 시간제 아르바이트 학생을 고용하고, 나는 일주일 내내 아기 보육비와 가게 월세와 아르바이트 학생의 주급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남의 집을 들락거린다. 일류대 병에 걸린 엄마들과 그 고삐에 매인 불쌍한 당나귀들을 위해서 나는 족집게 강사가 되어 대입 논술에 대비한 글쓰기 요령을 가르친다.
입구 쪽이 시끌벅적해지면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다방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어머나! 카운터에서 달려나온 마담이 반갑게 그들을 홀 한가운데로 이끈다. 마담은 그새 새뜻한 화장에 화사한 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손님들 앞에 선 마담의 몸놀림은 물 만난 고기처럼 매끄럽다. 눈웃음을 흘리면서 쌍화차를 권하는 모습은 중늙은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 충분히 교태스럽다. 더는 사투리도 쓰지 않는다. 멍처럼 보이는 푸른 반점에 그새 친근감을 느꼈던 것일까. 갑자기 딴사람 같아 보이는 마담의 모습이 나는 왠지 서운한 느낌이다. 정을 준 친구에게 갑자기 떠밀린 작은 여자애처럼.
2년 만에 가게가 팔렸을 때 내가 손에 쥔 돈은 천만원이었다. 그 2년 동안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은 지극히 작고 소박한 희망이었다. 나를 지상에 확고하게 발붙이게 하는 14킬로그램의 중력, 나날이 튼실해지는 아이의 초롱한 눈망울. 가게가 빨리 팔려서 조금이라도 내 시간을 갖게 되고, 18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해서 작은 거실이 생기면 아기 놀이공간으로 쓰고 문간방에는 내 책상을 놓겠다는 것. 난 토요일에 두 팀만 가르쳐서 딱 생활비만 벌 거야. 일요일엔 아이와 함께 지내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닷새 동안 낮 시간엔 글을 써야지.
하지만 사람들의 소망은 어찌 그리도 동상이몽인지. 에미야. 은행 대출을 받아서 학원을 차려보면 어떠니?…… 나 원작 계약해야 돼. 이번에 놓치면 기회가 없다구…… 안돼! 그 돈은 내가 2년 동안 가게에 적금 붓다시피 해서 만든 돈이야!…… 애야, 남편이 잘 돼야 가정이 화목하고 여자 인생도 풀리는 거다.
“방! 제목 죽이지? 90년대의 화두는 방이라구. 노래방, 비디오방, 소주방, 포르노방, 인터넷방, PC방, 숨어 있기 좋은 방…… 이 시대의 탈주와 가벼움을 이 정도로 잘 묘파한 소설은 없을 거야. 배우는 심은하라구!”
그는 목적도 이유도 없는 탈주와 ]스에 탐닉하는 여주인공에게 매혹당해 있었다. 그녀는 포스트모던하고 프리모던하단다. 찢어지게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가난의 구체성은 간단히 소거되고 자유만이 초록빛 배낭으로 남는다. 통쾌하게도, 그녀는 모성마저 가볍게 팽개친다. 그것이 새로움이랄 수는 있겠지. 80년대의 반작용으로서. 90년대의 한 특질을 나름대로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왜 내 남편이 그런 영화를 만들어야 해? 게다가 내 자존심과 피땀을 팔아서 만든 돈을 갖다 바치겠다니! 나는 절망한다.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남자에 대해서. 그리고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그를 질주하게 만드는 이 부박한 시대에 대해서. 차라리 다큐멘터리나 독립영화를 찍어. 그러면 그 돈 쓰는 거 참아줄게!…… 내 말 못 알아듣겠어? 이건 대박이라니까!
남편이 원작 계약을 하던 날 밤 나는 잠든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허해서 명주실 같은 아이의 머리칼과 희고 반듯한 이마를 쓰다듬어보고, 앙증맞은 손과 분홍빛 귓불을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지난 4년 동안의 내 삶.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 며느리, 딸, 책대여점 주인에 논술 선생까지, 나를 가둔 일상은 얼마나 두텁고도 완강했던지. 가게와 아르바이트로 내 삶의 시간은 토막토막 끊겨나갔다. 그나마 남은 자투리마저도 가족의 생일이며, 시댁의 제사며, 친인척의 결혼식이며, 누군가의 외국 나들이며, 나와 연관된, 그러나 결코 내가 아닌 온갖 일상사로 바다에 던져진 소금처럼 삼켜져버렸다. 하루는 고단하고 긴데, 한달은 빠르고, 어느새 달력을 보면 몇달이 지나 있고, 한 계절이 가고 일년이 가고, 또 몇년이 가버렸다.
이 헛똑똑이야! 남자는 애초에 길을 잘 들여야 해. 생활비도 분담하고 가사노동도 분담한다고 할 때부터 내 가당찮더라. 결국은 니가 다 떠안게 됐지! 귓가에 짜랑하게 울리는 언니의 핀잔.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실이었다. 그가 마음껏 독서하고 비디오 보고 술 마시며 현학적인 말의 성찬을 벌이는 동안, 나는 턱밑까지 차오른 일상의 격류에 토악질을 해대며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가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예술을 논하고 애(愛)술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서 나는 내 시간과 열망들을 저당잡히고 있었다. 아니 흘려보내고 있었다. 생활비 한푼 내놓지 않으면서도 그는 어쩌다가 돈이 생기면 휴대폰을 산다,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한다 하면서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은 기어코 사들이고야 말았다. 누군 약사 마누라를 둬서 좋겠더라. 들끓는 욕망과 자기 달란트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영혼. 콤플렉스로 단련되고 스트레스로 강화된 독설가. 나는 그 영혼의 부박함을 경멸하면서 동시에 연민했다.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당연하기만 한 남자 앞에서 나는 전투적이지도 집요하지도 못했다. 한 시절 내가 사력을 다해서 보였던 전투성은 다 소진되어버렸고, 나는 어느새 내성적이고 순한 여자애로 돌아와 있었다. 나 자신만을 위해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얻어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 80년대 내내 나는 작은 이기심도 자책하게 만드는 풍토에 길들여졌다. 게다가 내 속에는 자신을 악조건에 몰아넣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으로 스스로를 가치매김하는 순교자적인 성향까지 있었다. 나는 한없이 만만한 여자였다. 나의 연민과 부족한 이기심이, 나의 모성애와 책임감이 가정이라는 틀에 붙박인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 속에서는 모조리 약점이었다. 앞날은 불을 보듯 선연했다. 내가 많이 참으면 참을수록, 그리고 강하면 강할수록 나는 더욱더 벼랑 끝으로 몰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도 나는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했다. 일종의 심리적 퇴행이었을까. 남편과 싸우는 대신 나는 달팽이처럼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 달팽이 껍데기 속에서 나는 오래 전에 벗어버렸다고,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작은 여자애’를 만났다. 말이 없고 조르지도 않고 싸우기 싫어서 양보해버리고 혼자 속으로만 삭이는 여자애. 부모가 싸울 때마다 아주아주 작아져서 모습을 감추고만 싶던 그애. 가족이 너무 불쌍해서 한밤중에 쿨쩍이며 유서를 쓰던 그애……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상처와 슬픔과 마음의 굴곡들이 되살아나 나를 삼킬 듯이 넘실거렸다. 그 슬픔의 바다에 익사해버릴 것 같았다.
내가 미례를 떠올린 것은 그 슬픔의 밑바닥에서였다. 한없이 밑바닥까지 가라앉으면서, 나는 가슴을 휘젓는 누군가의 서글픈 웅얼거림을 들었다. 나는 내가 꼭 버러지 같어야…… 나는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미례를 삼켜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벗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버러지의 기억이 어느 순간 또다시 그녀의 발목을 낚아챘으리라는 걸. 그리고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미례는 쿨쩍이고 있는 조그만 내 옆에 쪼그린, 내 어린 시절의 친구였다는 걸.
한때 내게는 삶도 역사도 일직선으로 보인 적이 있다. 훌쩍 건너뛰고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고. 인간도 밑이 훤히 보이는 물웅덩이쯤으로 생각했다. 스무살의 내 이마를 서늘하고 명징하게 내리쳤던 사회의 ‘구조적 모순’ 은 공룡의 뼈다귀 같은 것이었다. 자본과 노동, 신식민지, 분단사회…… 나는 그것을 감싼 만만찮은 외피와 오묘한 실핏줄들을 보지 못했다. 내가 파충류같이 허물을 벗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고 생각했던 자리마다 사실은 가파른 벼랑이 숨어 있었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벼랑의 가파름만큼이나 깊은 골짜기에는 완강하게 똬리틀고 결코 변치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 시절 나는 하늘을 나는 새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던 것은 아닌지…… 하지만 이제, 나는 버러지처럼 배로 밑바닥을 밀면서 세상을 느낀다.
뒷좌석에서 누군가 짓궂은 농담을 했는지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오양아, 저그 언니한테 따끈한 엽차 한잔 갖다드리렴. 마담은 잠자리 날개 같은 한복을 사그락거리며 분주하게 홀을 누빈다. 배달 다녀온 아가씨가 내 앞에 뜨거운 엽차를 가져다놓는다. 복고풍으로 말아서 어깨에 늘어트린 탐스러운 머릿결…… 탁자 유리에 얼비친 내 얼굴은 짧은 머리칼 때문에 더 핼쑥하고 강퍅해 보인다.
“너 자해공갈단이야?”
지난 가을 삭발해버린 내 머리를 보고 남편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래. 어쩌면 나는 머리칼을 잘라버리는 방식으로 내게 강요되는 ‘여성’을 깨부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그런 방식으로 생을 향해 다시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는지도……
원작 계약을 하고 일년이 지난 후에도 남편은 몇십억짜리 환상을 좇아 헤맸고, 나는 여전히 생활고에 허덕이며 남의 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가 길거리에서도 집안에서도 자주 망연자실 맥을 놓곤 한다는 점이었다. 틈만 나면 잠이 쏟아졌다. 둔중하고 흐릿한 잠의 늪…… 나를 울려버린, 나로 하여금 삭발을 감행하게 한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좀더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 동안 그 늪속으로 서서히 침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를 만난 곳은 내가 잠살을 빼려고 등록한 에어로빅 쎈터였다. 어설픈 몸짓으로 율동을 따라하다가 숨이 가빠진 나는 한구석에 앉아 음악에 맞춰서 몸을 흔드는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바로 앞에서 그 여자가 몸을 흔들고 있었다. 슈퍼나 주차장에서 가끔 마주친 뚱뚱하고 약간 둔해 보이는 아줌마. 하지만 빠른 디스코 음악에 맞춰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대는 그녀는 아마조네스의 전사 같았다. 출렁거리는 허벅지와 뱃살, 그런데도 그녀의 율동은 얼마나 유연하고 볼륨 있고 리드미컬한지. 몇년이나 해야 저 정도 할 수 있을까, 처음엔 그저 경탄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두터운 살집 속에서 폭발하듯 분출하는 힘과 충동과 열정. 그녀에게서 나 자신을 보았던 걸까. 내 속에 갇힌 것들, 꺾이고 고사해버린 열망들! 울음이 복받쳤다. 눈물은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음악이 끝났을 때 헐렁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아마조네스의 전사는 다시 평범하고 무기력해 보이는 아줌마로 돌아가 있었다. 온몸에 물기가 다 빠져나가버린 듯 망연한 표정으로 나는 여자가 사라진 아파트 주차장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건너편 야산의 나무들이 우수수 잎새를 떨구고 있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몸 안의 수분이란 수분은 전부 다 내보내고 바싹 마른 뼈다귀로 서 있는 나무들…… 많은 생각이 스쳤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것도 같았다. 나는 천천히 상가의 미장원으로 걸어들어갔다. 삭발해주세요! 미용사는 좀 황당한 표정이었지만 두말없이 의자를 권했다. 삭발은 가령 영화에서 강수연이나 김지미가 하는 것처럼, 긴 머리를 먼저 단발로 자르고 다시 커트를 하는 몇번의 공들인 절차 끝에 바리캉을 대는 것이 아니었다. 양털을 깎듯이, 미용사는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바리캉을 갖다댔다. 대번에 머리카락이 후드득 떨어져나갔고, 작은 바리캉으로 두번째 밀자 이내 새파란 민둥머리가 되었다. 눈곱만큼의 비장미도 서정성도 없었다. 5천원만 내세요. 집에 와서 샤워를 하는데 문득 손톱 밑에 두피의 기름때가 끼여 나왔다. 30년도 더 묵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3밀리미터는 될 것 같은 두피의 때를 나는 이태리 타월로 박박 문질렀다.
삭발은 내가 더이상 일상의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일상이란 그것을 지배하고 자기 것으로 조직해내지 못하면 한도 끝도 없이 빠져드는 수렁일 뿐이었다. 소리없이 나를 침윤시키고 부식시키고 끝내 포말로 스러지게 하는 흐린 잠의 늪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온몸을 난타하며 항복을 요구하는 삼각파도였다. 목줄기까지 차오르는 격류에 휩쓸려가느니, 나는 차라리 섬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혼해!”
그 한마디만으로도 남편은 모멸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상처받은 자존심에 눈이 뒤집혀서 내 컴퓨터를 내동댕이쳤다.
“너란 년은 삶을 불구화시켜야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개좆같은 문학관을 갖고 있어!”
그 순간 내 몸은 탄환처럼 그의 가슴팍에 박혔다. 죽여버릴 거야!
나는 입술을 꾹 문다. 눈을 감고 가만히 숨을 가다듬는다. 호흡이 평정을 되찾을 때까지. 미지근한 엽차를 입안에서 굴리듯 천천히 마신다. 또 한 무리의 손님들이 문을 밀고 들어서자 나는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거스름돈을 건네주는 마담의 눈빛에 설핏 미소가 어렸다. 짙은 화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덜미에는 푸른 반점이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황시리젓과 김치전
버스터미널로 나오자 버스 한 대가 막 떠나려는 참이다. 유리창에 붙은 행선지에는 ‘영산포. 동신대학’이라고 씌어 있다. 불현듯 전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엄마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영산포 우리 학교에도 가봐야 쓴디……
노망든 뒤로 엄마가 종종 얘기하는 ‘우리 학교’가 엄마의 모교인 영산포여중이나 광주사범학교가 아니라, 단 6개월간 교편을 잡았다는 동신의 초등학교라는 걸 짐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살리고 싶으믄 빨리 시집 보내쇼. 안 그러믄 요절할 상인께. 결혼하믄 호남의 갑부로 살 것이요.’ 신기 들린 조리장수 할멈의 말을 듣고 혼비백산한 외할머니는 이제 갓 스무살인 여선생의 등을 떠밀어 부랴부랴 혼사를 서둘렀다고 했다. 만석지기 집안의 막내둥이 귀공자에게 시집을 간 여선생은 사업에 실패한 남편이 재산을 거의 탕진했을 무렵 잠시 복직을 꿈꾼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올망졸망한 자식들을 앉혀놓고 추억의 한 자락을 아련한 표정으로 들추어냈다. 엄마의 어린 시절 꿈은 선생님이었다고, 사범학교 졸업반 때 처음 나간 교생실습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한 학기만 가르치고 아이들과 헤어질 때는 얼마나 서운했는지…… 그 당시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 또래였으리라. 하지만 엄마에게는 이미 고등학생 아들에서 다섯살 코흘리개까지 다섯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딸려 있었다. 복직이 좌절된 후 엄마는 실패를 거듭하는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한평생 무기력과 가난 속에 허덕였다. 그리고 환갑도 안된 나이에 뇌출혈로 쓰러져서 이제는 노망기마저 여실하다.
“선창가에 하얀 등대가 서 있었어야. 방학 때 집에 돌아오믄 젤로 먼저 그 등대를 바라봤다. 하얗고 반듯한 것이 꼭 백마 탄 기사같이, 얼마나 멋졌는지 아냐. 밤에 등대를 켜믄 불빛은 또 얼마나 크고 환했던지…… 지금도 눈앞에 똑똑허니 보여야.”
어린애 같아진 엄마는 나이든 딸들에게 종종 말하곤 한다. 노망든 엄마의 암전 속으로 깜박깜박 떠오르는 등대의 불빛. 지금도 그 등대가 있을지. 길 잃은 배를 이끌어 포구에 닻을 내리게 하는 불빛.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환하고 따스한 불빛…… 나는 배들이 은성하게 불을 밝히고 정박해 있는 포구의 밤 풍경을 그려본다. 강바람에 비린내와 땀내를 씻고 검푸른 물 위에 아 출렁이는 밤배들. 어깨를 건 배들의 따스한 출렁임…… 그 출렁이는 물결에 내 몸을 싣고 싶어!
하지만 얼어붙은 내 발은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머뭇거리는 동안 영산포행 버스는 사람들을 태우고 떠나버린다. 나는 대합실과 매표소를 겸한 터미널 슈퍼 안으로 들어온다. 슈퍼 입구에 놓인 작은 철제 책상에 앉아 있는 늙수그레한 남자에게 물으니 드ᄃᆞᆯ강 들어가는 버스는 30분쯤 후에 들어온단다. 먼지를 뒤집어쓴 과자봉지와 음료수 따위가 쌓인 진열대, 대합실 한가운데 놓인 석유난로 주변에 대여섯 사람이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 곁을 지나 구석에 놓인 긴 의자에 몸을 부리고 앉았다. 갑자기 몸이 노그라지는 느낌. 눈알이 쑤시고 아팠다. 지난밤부터 혹사시킨 내 정신력은 거의 소진상태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고개를 외투깃에 박은 채 눈을 감는다.
날씨가 해맑으믄 맑어서 서글프고 함박눈 내리믄 눈온다고 서러운 것이 노총각 심사여…… 아따! 겉보리 서 말이믄 데릴사위 안 해간다는 말 못 들어봤소?…… 짚새기도 다 짝이 있는 벱인디 홀아비로 늙기야 할랑갑디여?…… 자울고 있는 내 귓가에 툭툭 날아드는 대화의 파편들. 고개를 들자 난로를 가운데 끼고 둘러선 사람들이 너스레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감색 파카를 입은 콧구멍이 약간 들린 너부데데한 남자가 화제의 주인공인 노총각인가 보다.
“마음 푸소. 내가 관상을 보아 허니 올 봄에는 좋은 처자 만날텐께.”
누런 털모자를 쓴 나토롬한 남자가 노총각에게 덕담을 하자, 너도나도 한마디씩 맞장구를 친다.
“장태 양반 음덕을 많이 쌓았은께 대가 끊기든 않을 거구만.”
“그려. 천생배필에 한 모 젓가락으로 궁합이 딱 들어맞는 처녀가 나올 것이요.”
“이왕이믄 속궁합까정 꽉 들어맞았으믄 좋겄구만이라우.”
한결 기분이 나아진 노총각의 넉살에 사람들이 우하하하, 웃음을 터트린다. 불면으로 창백하게 찌든 내 머릿속을 둥둥 울리는 웃음소리. 나는 그제서야 사람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핀다. 자주색 파카를 입은 오종종한 아줌마, 누런 털모자를 쓴 중늙은이 남자, 작은 스티로폼 박스를 안은 입이 합죽한 할머니, 거무튀튀한 얼굴에 구레나룻이 텁수룩한 사내…… 그들은 모두 잘 아는 사이인 듯 너나들이한다.
오메! 저 여편네 쥐 잡아묵은 입술 잠 보소…… 그러구 살라믄 얼른 숟가락 놓는 게 국민의 정부에도 이로워유…… 아따! 석수쟁이 눈깜짝이부터 배운다드니 인자 갱갱굴서 도의원 한자리 나겄소…… 누에고치 실 풀리듯 술술 이어지는 그네들의 말은 얼마나 절묘한 비유와 풍부한 묘사로 퍼덕거리는지. 맨숭맨숭 앉아서도 내 귓바퀴는 그 사투리의 생생한 억양과 질감을 포착하기 위해 꿈틀거린다.
버스가 도착했는지 대합실에 있던 사람들이 주섬주섬 짐을 추스른다. 버스에 올랐을 때 나는 차 뒤편으로 걸어들어갔다. 멀미를 하는 나는 버스를 타면 늘 운전사 바로 뒤, 맨 앞좌석에 앉곤 했는데……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야, 나는 평소와 다른 내 행동이 사람들을 좀더 잘 보기 위해서였다는 걸 깨닫는다.
공공도서관 앞에서 몸피가 보동된 아줌마가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버스는 그 앞에 멈출 듯하더니, 부릉부릉 5미터쯤 더 앞으로 나아갔다. 뒤웅스럽게 뜀박질하는 아줌마의 몸피에서 유난히 큰 가슴이 출렁출렁했다. 아줌마가 버스 가까이 다가오자 운전기사는 다시 차를 앞으로 조금씩 빼기 시작했다. 아줌마가 허덕허덕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버스에 올라탄 것은 버스가 20여 미터쯤 더 앞으로 나아간 지점이었다.
“워째 그렇게 사람을 골탕 먹인다요?”
젖가슴을 추스르며 아줌마가 불퉁거리자 운전기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뭔 났다고 진흙구덩이에 서 있소? 달려야 흙이 털어지제.”
기사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사람들 사이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라믄 흙 털라고 달리기 시킨 것이요, 시방?
아줌마가 썰다 만 묵모 얼굴을 했다.
“아따메! 동상은 땅띔 잠 해도 쓰겄구만. 젖소부인맨치로 출렁출렁 달고 다니믄 뭐 헐 것이여?”
자주색 파카 입은 아줌마의 말에 버스 안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당사자인 가슴 큰 아줌마의 입가에도 물렁한 웃음기가 번져드는데, 이번에는 노총각이 한술 더 뜬다.
“아짐씨, 한번만 매달리게 해줘유.”
“아따! 허천 들린데끼 껄떡거린다고 누가 한 코 주간디?”
텁석부리 사내가 말둥치를 자르자 노총각은 들창코를 벌름거리며 두 손을 모아쥐고 더욱 애단 목소리를 낸다.
“아짐씨, 내 평생 소원이어유.”
“음마! 우리 애기 아부지 눈 번히 뜨고 있어라우.”
“그려, 찬물에도 우아래가 있고 똥물에도 파도가 있는 벱인께, 한 20년만 기다리믄 쓰겄네.”
“하이구메! 그땐 환갑 진갑 다 지나서 젖이 쭈글쭈글해지잖어유.”
이번에는 사람들이 아예 박장대소한다. 검정 누비두루마기를 입은 조쌀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큼큼 헛기침을 해대는데, 입이 합죽한 할머니는 눈시울까지 찔끔거리며 강그라지게 웃어댄다.
기억할 수 있을까. 나는 나도 몰래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린다. 녹음기가 있다면 슬쩍 누르고 싶고, 필기도구가 있다면 받아 적기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런 나 자신이 문득 한심해진다. 모두들 박장대소하는데 나는 왜 함께 웃지 못하는가? 고작 그네들의 대사를 옮겨 적을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고백하건대 ‘노동문학’에서 내가 문학과 운동의 행복한 일치를 맛보았다는 것도 진실만은 아니다. 유서에서 편지 쓰기로, 탐미적인 시 쓰기에서 문학의 부정으로, 다시 노동문학으로 이행하는 각각의 과정에는 쉽사리 건너뛸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패 있었다. 떠도는 혼령들과 미친개들의 시절, 한 편의 시보다는 당장 돌멩이 한 개가 더 절실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운동권 주변을 기웃거리는 학내 문사들에게 근친혐오의 감정을 느끼곤 했다. 차라리 떠나라, 아니면 함께 빠져주든가. 그 근친혐오가 나를 ‘문화청산주의’로 내몰았는지도 모르겠다. 노동현장으로 들어갈 때 나는 아끼던 시집을 한 권도 남김 없이 친한 벗들에게 나눠줘버렸다.
내게 글쓰기의 충동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은 미례였다. 야식 개선을 요구하다가 둘 다 공장에서 해고된 뒤 한방에 살던 몇달간이었다. 한방에서 희희낙락 아옹다옹 사는 동안 내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한 여성노동자의 형상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점점 생생해지는 그 형상은 점차 이야기가 되고, 마침내 문자로 정착되고 싶어서 꿈틀꿈틀거렸다. 어느날 나는 미례에게는 알리지 않고 며칠 밤낮에 걸쳐서 그 꿈틀거리는 것을 공책에 끄집어올렸다. 철야노동을 뿌듯해하던 한 여성노동자가 야식으로 나온 단팥빵을 집어던지게 되는 작은 일상투쟁을 그린 것이다. 그것을 잡지에 투고한 것은 사소한 보안실수로 방 보증금을 날린 내가 자취방 얻을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87년 격동의 여진이 아직도 뜨겁게 감돌고 있던 시절이었다. 내 글은 잡지에 실리자마자 ‘노동소설’이 되었고 나는 ‘노동소설 작가’가 되었다…… 얼마 후 나는 미례의 이야기를 장편으로 구상했고 한 노동자 잡지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공장활동을 하던 시절 나는 ‘궁핍한 민중주의’적 편향에 물들어 있었던 것 같다. 민중에 대한 환상과 더불어, 한명의 노동자로서 민중 속으로 나를 해소하고 싶은 충동에 자주 휘말리곤 했다. 노동소설을 쓰면서부터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심리의 배면에는 내 존재에 대한 일종의 자기최면이나 기만이 숨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를 대변해서 쓴다는 부담감, 내 신원에 대한 자의식이 가시처럼 돋아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부정하면서, 또한 그들을 철저하게 대상화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결국 미례도 놓치고, 나 자신도 놓쳐버린 것은 아닌지……
“아따! 뭔 젓냄새라요?”
영산포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할머니의 스티로폼 박스가 기우뚱하면서 젓갈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젓냄새’라는 말에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자 할머니가 지레 수리목을 지른다.
“음마! 젖이 아니고 젓갈이여, 젓갈!”
“아따! 긍게 누가 뭐락 허요?”
텁석부리 사내가 의뭉스럽게 눙치자 사람들은 또 박장대소한다. 할머니가 배시시 웃음을 내비치며 박스 뚜껑을 단단히 여민 다음에도 젓갈 냄새는 버스 안에 진동을 한다.
황시리젓. 평소에 젓갈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갑자기 몰려오는 공복감으로 입안에 신물이 돈다. 몇달 만에 처음으로 느끼는 식욕이다. 문득 미례와 함께 부쳐 먹던 김치전 맛이 생각난다. 김치만으로 전을 부쳐 먹을 수 있다는 걸 미례에게 처음 배웠다. 밀가루 반죽에 신 김치를 넣고 뻘건 국물까지 주르륵 같이 부어서 멍울이 없게 잘 저은 다음, 기름을 적당히 두른 프라이팬에 한 국자 떠서 얇게 부친다. 가장자리가 노릇노릇해지면 뒤집고, 가장자리가 바삭바삭해질 때쯤 또 한번 뒤집는다. 미례도 그때만은 식용유를 듬뿍듬뿍 아끼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나 비오는 날 밤에, 와아! 살찌는 소리 들린다! 하면서도 대여섯 장씩 먹어대던 그 맛이란. 하긴 그때도 나는 가장자리 바삭바삭한 부분만 골라 먹는 바람에 미례한테 젓가락으로 손등을 꼭 찍혔던가.
차창 밖으로 비닐하우스들이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들녘이 스쳐 지나간다. 속살이 흰 통배추와 시금치, 검은 부직포를 씌운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빨갛고 노란 꽃송이들, 들녘에 피어오르는 논둑 태우는 연기. 얼어버린 작은 호박들이 밭둔덕에 뒹굴고 있다. 비료부대를 내린 농부가 둔덕에 앉아 담배를 피워문다. 먼 들녘을 바라보는 허랑한 어깨……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처음인 듯 새롭고 유정해 보인다.
90년대 내내 세상이 무성영화의 슬로비디오처럼 무미건조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인 것은 내 존재가 닫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던지. 생생한 80년대와 사막 같은 90년대. 그 둘 사이의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를 열어야 한다는 걸, 소스라치듯 깨닫는 순간들이 있기는 했다. 내 존재를 열지 않고는 그 단절을 극복할 수 없으리라는 걸. 삶이 터널을 가는 것처럼 막막할 때 나는 문득문득 미례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고향집에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한순간 미친년처럼 나부끼던 충동은, 하지만 나를 옥죄는 일상의 틀을 깰 만큼 강하고 지속적이지는 못했다. 품안에 깃들인 젖먹이가 핑계일 수는 없으리라. 나를 열기 위한 결단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90년대의 나의 침묵, 최소한 전향하지 않았다는 내 자긍심은 사실 그리 내세울 만한 것도 아니다.
금탑가든에 돌아온 것은 땅거미가 어둑어둑 밀릴 무렵이었다. 불을 환하게 밝힌 가든에서 노랫소리가 마당까지 울려퍼지고 있었다. 주방 옆 큰방에서 올케언니가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이 우리 곗날이여. 달마다 계 모아서 노래방 한번씩 간디, 내가 이 맛에 산단께. “
꽃자주색 홈드레스를 차려입은 올케언니는 곱게 화장을 하고 입술도 진하게 칠하고 있었다. 기미가 자글자글한 얼굴에 늘 푸념을 달고 다니던 평소의 모습이 아니다.
“명곡이여 명곡! 요즘 이 노래가 뜬다등만. 내가 잘난 사람도 지가 못난 사람도 어차피 쿵짝이라네.”
쿵짝 쿵짝 쿵짜작 쿵짝…… 스텝을 밟으며 올케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다.
“내가 명색이 가든떡인디, 춤도 못 추믄 쓰가니?”
몇년 전 유행했던 신신애춤이던가. 검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스텝을 밟으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춤동작, 눈동자 굴리는 것까지 흉내내는 바람에 웃음이 나올 것만 같다. 작달막한 키에 살이 올라서 투덕투덕 늘어진 몸매 어디에 저런 흥겨움이 숨겨져 있었는지……
“울고 웃는 인생사아 소설 같은 세상사아.”
늘 내 자의식에 갇혀서 한번도 올케의 말벗이 되어주지 못했던 나. 나슬나슬 닳아서 올케의 수다가 버겁기만 했던 내 신경…… 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올케가 타주는 달디단 커피를 함께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술판에 신사 없고 춤판에 요조숙녀 없는겨.”
어깨를 흔들며 다가온 올케가 내 팔을 잡아올리더니 한바퀴 빙그르 돌린다.
“아, 서울떡은 춤을 워찌케 추는가 구경 잠 하세!”
‘서울떡’이라는 말에 나는 그만 훅!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구름다리
이른 새벽 강가에는 아무도 없다. 나와 강 사이에는 아무도 없다. 다만 아득한 허공에 구름다리 하나가 가까스로 걸쳐 있을 뿐이다. 구름다리는 초승달을 머리에 이고 물안개 속에 신비스럽게 잠들어 있다. 나는 이끌리듯 구름다리로 다가간다. 철조망을 넘어서 구름다리에 한발을 내딛자 다리 상판의 떨림이 전해져온다. 오랫동안 사람을 실어보지 못한 다리가 내는 신음소리. 흥분으로 몸을 떠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로프를 잡고 조심스레 발을 딛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강바닥에서 시작된 안개가 한겨울의 싸늘한 수분을 품고서 무성하게 나를 감싸고 돈다. 온통 시린 물소리.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나를 감싼 안개가 출렁거린다. 다리 한가운데까지 와서야 나는 멈추었다. 다리의 중간 지점을 받친 기둥 아래는 물살이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소용돌이친다. 현기증. 금방이라도 빨려들 것 같다. 허리를 로프 쪽으로 조금 기울였을 때 발밑에서 나무 판자 하나가 떨어져나갔다. 순간 나는 로프를 꽉 거머쥐었다. 내 몸이 로프 쪽으로 쏠리는 바람에 다리 전체가 출렁거렸다. 아찔함. 그러나 눈을 감지는 않았다. 발밑에서 두 개의 판자가 또 떨어져내렸다. 한순간 내 발은 허공에 떠 있다. 전류처럼 온몸을 꿰뚫는 힘, 로프를 쥔 손아귀에 힘줄이 선다. 무섭게 뛰는 심장의 박동, 아우성치며 올올이 일어서는 피톨들……
철조망을 넘어설 때만 해도 내 머릿속의 이미지는 다리 한가운데서 강물 위로 몸을 반쯤 드리우고 두 팔을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잎사귀를 바람에 다 맡겨버리는 나무처럼.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 몸을 꿰뚫는 것은 온몸을 꽉 채우는 긴장감, 싱싱한 생명의 파동이다. 파동치듯 깨어나는 오래 잊었던 감각들. 처음 시를 쓰던 순간과 처음 받은 꽃다발과, 처음 밀실이 찢기던 아픔과 처음으로 광장을 점령했을 때의 감동과, 첫 입맞춤과 첫 출산과, 내 어머니의 자궁을 빠져나올 때 질렀던 고고성…… 내 몸에 각인된 그 모든 처음의 감각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여러 날을 두고 구름다리가 내게 속삭인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절망이 아니라, 초탈이 아니라, 이 충일한 생명력이었다. 절망의 상투화, 환멸의 포즈, 그런 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혐오하고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것들이 아닌가.
물살이 빠르게 소용돌이치는 한가운데를 나는 뚫어져라 직시한다. 나는 언제 어떻게 커다란 입을 열고 나를 삼켜버릴지 모를 심연 위에 서 있다. 삼키어지지 않겠다. 이 심연 위에서야말로 나는 생에 대한 생생한 실감과 전투적 본능을 느낀다. 검은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모든 것을 삼키고, 또 토해내는 검은 배꼽…… 나는 그 배꼽을 내 안에 느낀다.
내 안의 불빛
어느날 아침 나는 ‘장미나무집’ 근처 강기슭에서 등이 연둣빛인 물새를 보았다. 쪽빛 부리와 꼬리가 아주 긴, 제비만큼 작은 새. 날렵하면서도 우아한 날갯짓으로 물을 차고 비상할 때마다 연둣빛 파문이 잇따라 퍼져나갔다. 새는 여러번 낙하와 비상을 반복하며 강의 수원지 쪽으로 날아간다. 새가 사라진 허공은 수많은 햇빛의 미립자들로 메워지고…… 나는 물새가 날아간 곳으로 새의 길을 따라 물길을 거슬러올라간다.
문득 눈앞에 녹슨 수문이 나타난다. 수문 밑으로 넘실거리는 깊은 소. 언젠가 한 처녀가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빠져 죽었다는 곳이 여기일까. 나는 수문을 건너뛰듯 훌쩍 지나친다. 이번에는 이랑이 잘 일궈진 밭이 막아선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잘 들여다보면 파란 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보리밭. 나는 보리싹을 밟지 않으려고 방죽으로 올라선다. 인적이 드문 방죽길은 마른 잡풀이 우북하다. 검누르게 덩어리진 갈대들이 귀기스럽게 휘청댄다. 점점 무성해지는 잡풀들이 풀매듭이 되어 발목을 잡아챈다. 앞을 가로막는 풀덤불. 가시떨기에 작고 빨간 열매가 바람을 타고 있다. 나는 떨기나무와 풀덤불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덤불숲 사이로 언듯언듯 비쳐들던 강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강물이 한줄기 은빛 띠로 멀어져갈 즈음 덤불길은 다시 소슬한 오솔길이 된다. 강은 저 멀리 제 갈길로 흘러가고, 강과 헤어진 오솔길은 마을로 이어지고 있다. 길이 마을로 통해 있을 줄은 몰랐다.
저만치 마을 고샅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까까머리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소년은 푸른 배낭을 등에 매달고 가슴 가득 강바람을 안으며 내가 거슬러온 방죽길을 생생 달려간다. 강은 강을 거슬러오르지 않는다. 강이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시간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여울이라고, 강바람이 강하게 나를 민다. 그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난 돌아가 미례 널 만나야 해.
마을을 에둘러서 국도로 나오자 산모롱이 돌아간 저 끝에서 버스가 떠올랐다. 버스에 오르자, 전에 만났던 그 운전사가 나를 보고 묻는다.
“인자 어서 내릴지 아요?”
“예, 우산리 다리 앞이에요.”
선산 있는 마을의 정류장 이름을 묻는 내게 오빠는 말했다. 새 다리가 놓임서 인자는 버스가 마을 앞을 안 지나다녀야. 다리 앞에 내려서 오른쪽 길로 쭉 내려가야 쓴다.
다리 앞에 내리자 오른쪽으로 저만치 산자락에 안긴 마을이 보였다. 멀리서도 보이는 마을 앞 아름드리 당산나무. 잎새 하나 없는 앙상한 자태지만 나는 그것이 250년 수령의 느티나무라는 걸 알고 있다. 그 당산나무 아래 ‘우진 마을’이라고 씌어진 입석이 여전히 있었다. 들머리 정미소 앞에서 고샅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 갈래는 마을을 에둘러서 뒷산으로 나 있고, 한 갈래는 실개천을 낀 들녘으로 난 길이다. 두 길이 팔을 벌린 오목한 곳에 옹기종기 들어앉은 낮은 토담집들. 나는 더듬더듬 비탈진 모퉁이, 초록색 양철대문 집을 찾아 골목을 기웃댄다. 문득 한 집이 눈에 들어온다. 토담 위에 드리운 품이 넓은 나무는 분명 석류나무다. 오랜 세월 내 가슴속에 박제되어 있던 그 집이 기지개를 켠다.
석류나무집은 놀랄 만큼 옛 모습 그대로이다. 툇마루가 있는 세 칸 기와집. 멍석 두어 닢 될 만한 토방의 오른쪽에는 슬레이트 지붕을 인 헛간과 우사가 있고, 토방 왼쪽은 정제를 끼고 뒤란으로 돌아간다. 뒤란에는 감나무 아래 장광이 있다. 장광 옆에는 꺼멓게 마른 참깻단과 말린 고추가 든 비닐포대, 쇠죽 끓이는 가마솥과 돌확, 재생고무 함지박…… 그리고 빈 꽃밭이 있다. 꽃밭 뒤로는 산자락을 울타리 삼아 빽빽한 대숲이 일렁이고 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을까. 다시 앞마당으로 돌아나오자 그제서야 대청과 큰방 문에 채워진 자물통이 보인다. 나는 조바심이 나서 사람살이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두리번거린다. 정제문이 빠끔히 열려 있었다. 살강에 정갈하게 놓인 그릇들, 크고 작은 국솥과 밥솥이 나란히 걸린 부뚜막, 찬장에는 양념통이며 말라붙은 누룽지까지 그대로 있었다.
다시 앞마당으로 나온 나는 툇마루에 걸터앉는다. 사람이 아주 살지 않는 집은 아니다. 어디 먼데 외출한 걸까. 문득 사위가 침침해지는 것 같아서 올려다보니 하늘이 회색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하늘 저쪽 끝에서 검은 구름이 덩어리져 몰려온다. 을씨년스러운 기운. 춥다. 자물통이 채워져 있지 않은 정젯방 문을 슬쩍 밀어보자, 문이 풀썩 열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툇돌에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선다.
그 방에는 이제 변진섭의 브로마이드나 천 마리 학을 담은 유리병, 꽃바구니는 없다. 이 집안의 딸들은 모두 성장해서 민들레 꽃씨처럼 훌훌 흩어져갔으리라. 하지만 자잘한 꽃송이가 무늬진 포플린 커튼과 나무책상은 좀더 낡아진 채로 여전히 있다. 이불을 올려놓은 서랍장과 오래된 반닫이도. 오래 불을 때지 않았는지 방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온다. 나는 웅숭그리며 책상 앞 의자에 앉는다. 책꽂이에 꽂힌 전기기사 자격증 시험문제집, 막내둥이 남동생의 것이겠지. 바람이 몹시 부는지 뒤란 대숲이 물결소리를 낸다. 쏴아쏴아…… 잠결에 대숲이 일렁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지. 군불을 때서 살갗이 빨개지도록 설설 끓던 정젯방, 간지러워서 온몸을 긁다보니 아침이었어…… 몸이 나라지는 느낌. 나는 책상에 팔을 괸 채 물결처럼 넘실대는 대숲 소리에 빠져든다.
눈을 뜨자 침침한 어둠이었다. 한순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벽을 더듬으며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스위치를 만졌다고 생각한 순간 사위가 환해졌다. 백열등 불빛에 방안의 사물들이 돋을새김되어 보인다. 낡은 책상, 빛바랜 꽃무늬 커튼, 오래된 반닫이와 5단 서랍장. 그래. 난 미례한테 와 있는 거야. 방문의 창호지에 얼비치는 바깥은 어둡다. 몇시나 되었을까. 시골에 온 뒤로 나는 시계를 풀어놓고 지냈다. 내 수면 싸이클은 내내 엉망이다. 그리 오래 잔 것 같진 않은데…… 문득 시렁에 매달린 석류가 눈에 들어온다. 아까 방에 들어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인데. 석류가 말라가는 은은한 향내. 향기가 가뭇없이 다가와 나를 가라앉혀준다.
문득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동상 왔는가?”
방문을 밀치자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다가왔다. 파파할머니였다. 방 쪽으로 성큼 다가선 할머니는 서슴거리는 내게 묻는다.
“누구라요?”
“저…… 전, 송미례를 찾아왔는데요.”
말을 잇지 못하고 서슴대는 나를 훑어보더니, 할머니는 경계심을 풀고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으응, 미례 친군감만. 워쩌끄나, 미례는 이번 설에는 여그 안 왔는디. 자슥들 내려오기 심들다고 이 참엔 두 양주가 서울로 올라갔구만. 금매, 설도 지났은께 인자 올 때가 되?는디…… 나는 불이 훤허게 켜졌길래 왔는가 했제.”
툇마루로 나오자 토방이 빈틈없이 희다. 내가 잠든 사이 기척도 없이 하늘 가득 눈이 내리고 있었다.
“미례 그미가 한 몇년 집에 연락도 끊고 명절에도 안 내려와서 해남떡이 애간장을 끓이더만. 그래도 그미가 신랑 복은 있었든갑서. 아! 황소같이 튼실하고 너름새있는 신랑을 만났단께.”
“결혼을 했다구요!”
울컥 고마운 느낌이다.
“저 웃말 이장어른 맏아들인디, 지 오래비 친구여. 뭣이냐, 쇠 깎는 일을 헌디 월급도 솔찬하다등만. 아들 낳고 시방 의정부에서 산다제.”
오빠 친구! 문득 눈앞에 저 유월의 봉고차 여행이 떠오른다. 그 시절의 유행가들. 휘파람을 불러젖히던 노총각들 중에 미례의 신랑이 끼여 있었을까. 신랑이 금형 일을 한다면 프레스보다는 일당이 높겠지.
“금매, 다 인연이고 복인갑서. 옛날 같으믄야 서른살 묵어갔고 어디 재취자리로나 가제, 시집갈 데나 있가니? 근디 신랑이 미례랑 결혼허고 아서 씨암탉 고아 믹이고 갖은 좋다는 약초 다 데려 믹이고, 비단금침으로 싸안고 데려갔단께.”
서른살에 결혼했다면 최소한 오년간의 공백은…… 하지만 지금은 그 공백은 접어두기로 하자. 미례를 다시 살아나게 하고 피어오르게 했을 어떤 사랑, 그 사랑의 힘에 대해서만 상상하자. 또한 나는 알고 있다. 미례 속에 얼마나 강인한 생명력이 숨쉬고 있는지도.
“신랑이 여그 사람이라서 명절마다 내려오제. 친정에도 매번 들르고. 저번 추석 때도 아들 보듬고 왔더란께……”
하다가 할머니는 갑자기 말끝을 흐린다. 마침 소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할머니는 에구구,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선다.
“에그! 짠헌 거. 너도 산 목심인디 배를 골아서 어쩔끄나.”
컴컴한 우사에 백열등을 켜면서 할머니는 틀니 없는 합죽한 입으로 혀를 쯧쯧 찬다. 내가 다가가자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사료값이 올라서 제대로 못 믹인께, 저러고 피골이 상접했제. 창규 아재가 서울 감서 잡아묵든지 내빌든지 알아서 허라고 혔제만, 짠해서 그럴 수도 없고……”
소는 기운이 없는지 음메에 구슬픈 울음만 한번 울고는 그대로 누워 있다. 퀭한 눈. 늑골 수를 셀 수 있을 만큼 말라비틀어진 몸뚱이. 봉산리에서도 종종 마주치는 소들이 너무 날씬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어떤 소는 먼발치로 말인 줄 착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이 동네 소는 일소라서 전부 근육질인가보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것이 아사 직전의 굶주림 때문이었다니! 할머니가 여물통에 짚단을 넣어주자 소가 비칠비칠 일어나 짚단에 고개를 박는다.
“이것으로 뱃속 소지나 될란가 모르겄네. 니 신세나 내 신세나 흙 파묵고 사는 것은 똑같다마는……”
혀를 차는 할머니의 오물오물 합죽한 입이 되새김질하는 비쩍 마른 소하고 닮았다. 나는 그제서야 쭈뼛거리며 할머니에게 묻는다. 요즘 농사짓는 일은 좀 어떠시냐고. 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의 푸념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재작년 그러께부터 우리 아들이 하우스 농사를 시작혔는디, 아이엠에픈가 뭣인가로 기름값이 올라서 농사를 다 망쳤네. 하우스 세 동에 호박을 심었는디, 난방을 헐하게 한 참에 날씨가 영하로 뚝 떨어진께, 가상자리 쪽 호박이 다 얼어부렀어. 빚만 옴팡 졌제.
할머니는 한숨 끝에, 에구! 이놈에 아이엠에픈가 뭣인가는 언제나 끝날란가? 덧붙인다.
시골의 파파할머니의 입에서 발음되는 ‘아이엠에프’는 얼마나 격세지감인지. 십년도 훨씬 더 전에 침침한 레스토랑에서 일어판 『세계경제론』을 강독할 때, ‘IMF’ ‘WTO’ 같은 용어들을 처음 배웠다. 90년대 들어와서 유행처럼 80년대의 사회과학을 폐기처분할 때 무덤 속에 묻힌 줄 알았더니, 2천년대를 바라보는 지금 그것들이 강시처럼 되살아났다.
“쌀농사도 안되고 하우스도 안되고, 인자 농사도 해묵고 살 것이 없는디, 근다고 농사꾼이 땅을 놀리겄는가? 빚을 내서라도 또 심어야제. 근디 올해는 태풍에 하우스가 다 날아가 부렀네. 아조 징혀! 빚은 줄레줄레 새끼를 치는디 이자도 못 물고…… 시방 우리 아들은 방구들 지고 한숨만 푹푹 쉬고 있어.”
할머니는 짓무른 눈가를 훔치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근디다 이녁 빚만 있가니? 우아래 집으로 어깨보증을 섰는디, 그놈의 것이 통지서 날아들고 빨간 딱지 붙고 사람 피를 말린단께. 인자 다덜 한꾼에 자빠지고 넘어질 일만 남었네. 죽도 살도 못허고…… 워째, 일을 허믄 헐수록 더 빚이 느는가 모르겄어.”
할머니의 하소연은 소 울음소리처럼 구슬프게 내 안으로 흘러든다. 무언가 내 속에 얼어붙어 있던 것이 꿈틀꿈틀 풀어지는 느낌이다.
눈을 털고 다시 툇마루에 돌아왔을 때 할머니가 내게 다가앉으며 묻는다.
“미례 친구믄 서른서인가, 너인가? 가만 있자 우리 효례가 서른셋인께, 거그도 셋인갑만.”
딸 생각을 해서인지 할머니의 말투가 스스럼없어진다.
“결혼은 했는가?”
내가 머뭇거리자 할머니는, 오메! 당아 안했어? 내 무릎을 탁 친다.
“그라믄 뭐 묵고 산가?”
“………”
“자고로 여자는 시집가서 자석들 낳고 사는 것이 젤로 복이여. 남편이 하늘이여. 보리멍석에 둥구미 삼태기로 옴살 붙어 살아도 서방이 있어야 써.”
“………”
“글고 아들을 낳아야 써. 다 내 살아온 경험에서 나온 말인께 잘 듣소. 시상에 믿을 것은 아들밖에 없어. 우리가 송씨 종갓집이여. 여그가 송씨가 모다 모여 사는 동넨디, 내가 종갓집 맏며느리여. 딸만 셋을 줄줄이 낳고 얼매나 설움을 당했는지…… 네번째 아들을 낳고서야 사람대접 해주드만. 긍께 딸은 다 소용없어.”
나는 가만 한숨을 내쉰다. 종손이라도 남동생이 둘이나 있으니까 아무나 아들 하나 낳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언젠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던 말을 듣는다면 이 파파할머니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딸 키워봐야 천상 넘의 집 식구제 내 집 식구가니? 우리 친정이 쩌그 화순 도암면인디, 어메가 보고 아도 일년에 딱 한번밖에 못 갔제. 광에 그 많은 쌀이 넘쳐나도 친정 갈 때 떡 한번 안 해줬어. 오메! 떡 한 말만 해주믄 온 동리 사람들이 노나 묵고 좋을 것인디, 얼매나 마음이 짠하던지…… 근디, 떡두께비 같은 아들 하나 떡허니 나논께, 그때서야 인절미해서 친정 보내주등만. 긍께 아들 낳아야 써잉!”
내 손을 잡고 눈까지 끔벅, 하는 할머니가 나는 점점 거북해진다.
“아들이든 딸이든 건강하기만 하면 되죠.”
내 목소리가 절로 거칠어진다. 말길을 딴 데로 돌리려고 쉽게 내민 말이었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찔끔 말문을 닫는다. 그려 그 말이 맞네, 한숨을 내쉰다.
“내 인자사 말인디, 미례 그미 아들이 성치가 못 허드란께. 네살 묵었단디 워째 앉도 서도 못허고 어버버 허드란 마시. 배냇병신인가……”
배냇병신?! 가슴이 턱 막힌다.
“그미가 지 탓이라고 눈물바람 해쌓는디…… 원체 그미가 시집가기 전에 몸이 다 망가졌었어. 죽을둥살둥 했제. 에미 몸이 부실해서 그랬는가아……”
코앞으로 날리는 눈발이 뿌옇게 흔들려 보인다. 나는 입술을 꾹 문다.
굵은 눈발이 검은 허공을 빡빡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아따! 먼디서 왔는디 서운해서 워쩌까아잉?”
일어서는 내 손을 부여잡고 할머니는 묻는다.
“금매, 이름이 뭣이단가?”
“……종옥이, 이종옥이요.”
나는 오래 발음해보지 않았던 이름을 댄다. 미례 넌, 내가 너보다 세살이나 많은 학출이라는 걸 알고도 나를 계속 종옥이라고 부르며 해라를 했지.
“아이고! 질이 험해서 잘 가잔 말도 못허겄네. 욕보소잉.”
돌아서는 내 어깨를 잡고 할머니는 마지막 다짐을 놓는다.
“얼른 시집가서 아들 낳아야 써잉. 떡두께비같이 튼실한 놈으로!”
어둠속으로 걸음을 떼어놓으며 나는 양육권 소송중인 내 딸을 생각한다. 결손의 상처를 각인해버린 무구한 눈망울. 불현듯 그 위에 얼굴을 보지 못한 한 사내아이의 모습이 겹쳐진다. 건강치 못한, 미례 너의 아들……
눈발은 점점 거세어지더니 눈보라가 되어 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버스정류장 바람벽 안에 서서 버스가 나타날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눈이 와서 연착되는 걸까. 저만치 내가 빠져나온 마을의 불빛이 깜박인다. 몇낱 되지 않는 불빛들. 내가 여기 서 있는 동안에도 서너 채의 집이 불빛을 거두었다. 군내버스는 여덟시면 끊긴다는데…… 얼굴이 시리고 위아래 잇바디가 따그락거리며 부딪힌다.
눈보라 속에 마냥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바람이 조금 잦아들었을 때 나는 버스가 가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다가 버스가 오면 손을 들어 잡아타야지. 운이 좋으면 지나가는 승용차나 트럭을 얻어탈 수 있을지도 몰라. 눈빛 때문에 다행히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내가 걷는 국도의 왼쪽은 검은 숲이 흰 눈을 내비치는 구릉이고, 오른쪽은 바람이 휘달리는 빈 벌판이다. 나는 금세 눈투성이가 된다.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고 전신주가 윙윙 소리내어 운다. 세찬 바람에 잘게 부서진 눈조각들이 얼굴을 때린다. 한 정거장쯤 걸었을 때 다시 마을의 불빛이 보였다. 개 짖는 소리. 으헝 으으헝…… 무서움이 확 끼친다. 지나가는 차량은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검은 산과 눈보라 속에서 아득히 불빛이 가물거리는 빈 벌판 사이를 걷고 있다. 길은 점점 미끄러워지고 젖은 앵글부츠는 딱딱하게 얼어서 발을 조여온다. 눈보라가 가로수를 격렬하게 흔들어댄다. 두번째의 정류장을 지나칠 때 트럭이 한 대 내 옆을 스쳐갔다. 손을 들기엔 이미 늦었다. 손을 들기는커녕 트럭을 피하느라 길 가장자리 논두렁으로 미끄러질 뻔했다. 벌판 끝으로 까마득히 가물거리던 인가의 불빛조차 끊어져버렸다. 뒤를 돌아보면 눈 속에 내 발자국만이 줄기차게 따라오고 있었다. 부츠에 박힌 얼음은 점점 더 발목을 조이고 살을 파고든다. 허기가 맹렬하게 위장을 쥐어뜯었다. 세번째 정류장을 지날 때 마을에는 불켜진 집이 하나도 없었다. 교회의 십자가 불빛만 아물아물거린다. 주유소 앞 정류장을 지나자 ‘화순─나주간 822번 국도’ 표지판이 나타났다.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쳐서 나를 허우적거리게 했다. 가로수와 전선이 온몸을 비틀며 신음소리를 냈다. 승용차 한 대가 내 옆을 스쳐갔지만 나는 헛손질만 했다. 눈보라 속을 걸으면서 뒤에서 달려오는 차를 보고 세우기란 잠자리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사람이 더 무섭다. 나는 이제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겠다는 희망은 버린다. 대신 갓길 가장자리에 바싹 붙어 서서 외투깃에 얼굴을 더 깊게 박는다. 밭둔덕에 쓰러진 오토바이의 잔해, 눈 속에 묻힌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질 뻔한다. 거친 눈보라에 눈조차 뜰 수가 없다. 가차없이 엄습하는 추위와 배고픔. 벌판 끝에서 가물거리던 불빛마저 더는 보이지 않는다.
미례야. 난 지금 터널을 가고 있어. 어둡고 긴 막장 속, 대안의 불빛을 바라보며 막장 속을 기었지만 막막한 어둠이었어. 가끔씩 생의 가치나 의미를 섬광처럼 선취하는 순간들이 있기는 했었지. 찰나로 영원을 살 만큼 강렬한 빛. 하지만 터널의 끝에는 늘 또다른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어…… 날선 눈조각들이 달려들어 나를 온통 아프게 한다. 내 몸은 점점 오그라든다. 외투깃 속에 고개를 깊이 박고 나는 한 마리 버러지처럼 온몸을 옹송그리고 엉금엉금 기어간다…… 미례야. 난 너를 향해 가고 있어. 버러지처럼, 배로 세상의 밑바닥을 밀면서, 온몸으로, 너를 만나러 간다.
천지가 밑이 빠진 것 같다. 몇개의 정류장을 더 지났는지 모르겠다. 네번째부터는 헤아리지도 않았다. 눈 덮인 산 능선이 헐리고 깎아지른 바위들과 토사채취장이 나타났다. 벌판에는 여전히 불빛 한 점 떠오르지 않는다. 내 마음 밑자리도 빠져버린 것일까. 내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있다. 추위도 배고픔도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나는 눈발이 조금씩 약해지는 것도 모르고 있다. 갑자기 바람이 확 끼쳐왔다. 옷깃을 잡아챌 듯 스쳐가는 트럭,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비켜서기도 전에 다시 탱크로리 트럭이 달려온다. 귀청을 찢는 경적소리. 나는 논두렁에 미끄러져 나동그라진다. 경적소리가 긴 꼬리를 끌며 멀어져간다.
천지간에 흰 벌판. 나는 그대로 누워 있다. 눈발이 그친 것을 그제서야 깨닫는다. 희디흰 눈빛이 사위를 환하게 하고 있다. 나는 가슴에 고인 차가운 공기를 뱉어낸다. 깊이 모를 밑바닥에까지 가라앉아버린 느낌. 내 몸이 부서진 조각배 같다…… 물소리, 먼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차츰 가까워져오는 물소리.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물이 차 오른다. 내 몸의 구멍들이 모두 열리고, 가슴 한 귀퉁이가 아릿아릿 저려온다. 결빙된 단풍잎이 빨갛게 살아오른다. 단풍잎은 나의 상처이고 나의 추억이다. 나는 문득, 내 안이 환해짐을 느낀다. 단풍잎처럼 환하게 켜지는 내 안의 불빛…… 그 불빛을 따라 더듬어가면, 언젠가 소담스런 꽃밭 같은 저 건너편 언덕의 불빛을 발견할 수 있을까. 불빛들이 오불오불 꽃동네를 이룬 사람의 마을…… 이윽고, 나는 떠오른다.
멀리 흰 벌판 너머로 반짝이는 검은 띠가 보였다. 검은 강물은 사위의 빛을 빨아들여서 눈부시게 토해내고 있었다. 얼어붙은 강물이 풀어지면서 살아서 출렁이기 시작한다. 미끄러지면서,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