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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오늘의 한국, 변모하는 사회운동
환경관리주의와 생태주의의 긴장
이필렬 李必烈
방송통신대 교양과정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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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환경운동이 싹튼 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1982년 군사독재 치하에서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설립으로 어렵사리 첫발을 내디딘 환경운동은 그동안 양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질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수많은 환경단체가 전국 각지에서 생겨났고, 가장 큰 환경단체인 환경운동연합1은 회원수가 7만을 헤아리게 되었으며, 생태주의운동을 선도한다고 할 수 있는 『녹색평론』의 독자수도 8천에 이르게 되었다. 운동단체들의 이념도 환경관리주의에서 생태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환경운동의 급속한 성장과 더불어 운동이 풀어가야 할 내적·외적인 과제도 한층 더 어렵고 복합적인 것이 되었다. 내적으로는 이념의 검토와 조직의 정비, 외적으로는 자본의 세계장악과 과학기술의 질주에 대응할 수 있는 적절한 운동의 모색이 주요과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환경운동의 현황을 분석하는 것은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한국 환경운동의 이념적 지형을 독일의 예에 비추어 분류하고 몇몇 구체적인 운동사례를 운동단체의 이념적 성향과 연관지어 분석하면서 앞으로의 환경운동의 방향에 대해 약간의 전망을 덧붙이고자 한다.
19세기 중엽 독일에서는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됨에 따라 환경분쟁이라 부를 만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쟁들은 오염을 유발하는 산업체에 대항하여 종종 주민운동의 형태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이때 주민들과 산업체 사이의 중심 이슈가 된 것은 대체로 오염에 대한 보상 및 오염물질 배출의 감소였다. 이들 주민운동은 독일 환경운동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독일에서 환경운동이라 부를 만한 움직임이 주민운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민운동이 오염 자체를 둘러싸고 일어난 데 비해 국지적인 오염보다는 산업문명 자체에 비판적이던, 현재의 생태주의에 가까운 입장을 보인 환경운동이 있었다. 이 운동의 중심이념은 ‘낭만적 자연주의’(Naturromantik)라 할 수 있는데, 19세기말 20세기초에 독일 전역에 퍼진 자연·고향보호운동(Natur- und Heimatschutzbewegung)을 통해 널리 발현되었다.
여기서 주민운동과 낭만적 자연주의운동을 ‘진보’—산업기술문명에 기초한 근대성을 지향한다는 의미의—와 ‘보수’—기술문명과 근대성을 거부한다는 의미의—라는 범주로 나누어보면, 주민운동은 딱히 ‘진보’나 ‘보수’ 어느 쪽에 넣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기술발전을 부정하지는 않고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오염측정의 신뢰성을 인정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진보 쪽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낭만적인 자연주의운동은 오래 전부터 인간에게 심미적인 위안을 준, 문화의 일부로서의 자연이 산업화로 인해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고 산업문명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에서 대체로 ‘보수’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범주화가 반드시 옳다고만은 할 수 없다. 자연·고향보호운동을 기술진보와 사회변화를 거스르려는 보수적 성향을 가진 운동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겠지만, 노동운동에 참여하던 산업노동자들까지 ‘자연의 친구들’(Naturfreunde)이라는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어 일종의 자연회귀운동을 벌인 것을 고려하면 낭만적 자연주의운동의 지형이 완전히 ‘보수’로 규정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도시 시민 중심의 낭만적 자연주의운동도 초기에는 독일 민속운동(völkische Bewegung)의 반근대주의적인 문명비판의 영향으로 산업화에 크게 비판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산업화와 기술발전에 대해 점차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도 이 운동을 ‘보수’로 뚜렷하게 범주화하기 어렵게 만든다.
독일에는 현재 큰 환경운동단체로 환경·자연보호연합(Bund für Umwelt- und Naturschutz in Deutschland, BUND)과 자연보호연합(Naturschutzbund, NABU)이 있는데, 이들 중 BUND는 자연·고향보호운동의 참여단체였던 바이에른 자연보호연합(Bund Naturschutz)을 중심으로 지역의 주민단체들이 연합하여 만든 것이고, NABU는 자연·고향보호운동의 주요 참여단체였던 조류보호연합이 발전한 것이다. 두 단체의 전신인 바이에른 자연보호연합과 조류보호연합은 1960년대까지도 순수 자연보호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70년대에 환경위기가 심각해짐에 따라 성격과 활동방식이 크게 바뀔 수밖에 없었다. 지역 또는 전국 차원의 환경분쟁에 개입하게 되었고, 핵에너지 포기를 주장하고 생태적 세제개혁을 통해 환경문제를 해결해가자는 제안을 적극 지지하는 등 상당한 탈바꿈을 겪었다. 또한 활동을 점차 전문가에 의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른바 ‘녹색기업’과도 협력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이는 이들 단체가 산업문명 자체를 거부하는 생태주의자들과 달리 과학기술을 인정하고 산업체제 속에서 산업구조의 녹색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독일에서 환경운동은 좌파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독일의 가장 큰 환경단체인 BUND와 NABU가 그 원류를 독일 민속이념의 영향을 받은 보수적 자연·고향보호운동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환경운동을 고찰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의 자연·고향보호운동은 처음부터 근대성, 민주적 정치체제에 부정적이었고 점차 반유태주의로 흘렀다. 1933년 나찌가 정권을 잡자, 새로운 정권이 바이마르공화국과 달리 서구적인 방향이 아니라 독일적인 자연과, 고향을 지키는 쪽으로 나아가리라는 기대로 나찌를 환영했다. 따라서 노동자로 구성된 ‘자연의 친구들’은 해체당했지만 자연·고향보호운동은 금지되지 않았고, 곧 나찌의 자연보호 프로그램 속에 편입되었다. 반산업주의적·문명비판적 성향의 자연보호운동이 파시즘의 대두와 강화에 기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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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독일 환경운동단체의 뿌리와 성향을 규정해보았는데, 한국의 환경운동에 대해서도 이러한 분류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여기서 분류의 기준선은 명확한 단일 직선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군데군데 끊어진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부분에서 선의 좌우가 서로 섞여들어가는 형태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분류의 기준선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앞으로의 한국 환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려 할 때 이러한 분류가 어느정도 도구적 유용성을 제공하므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분류를 해볼 필요는 있다. 구체적으로 한국의 환경운동단체들을 이러한 두 진영에 넣어보면, 환경운동연합·녹색연합 같은 두 개의 큰 운동단체는 대체로 주(시)민운동, 기술을 통한 관리주의, 대항투쟁을 지향하는 운동단체로 볼 수 있을 것이고, 『녹색평론』,2 생명민회, 한살림, 생태공동체운동 등은 ‘낭만적 자연주의’(생태주의)의 색채를 띠고 있다 할 수 있다.
큰 운동단체인 환경운동연합과 녹색연합도 핵발전 문제나 쓰레기 문제 등 커다란 환경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비슷한 형태의 싸움을 벌이는 등 밖으로 드러나는 활동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탄생 과정이나 암묵적인 지향성 등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환경운동연합은 좌파적 민중운동 진영에 속하는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에 뿌리를 두고 있고, 더 거슬러올라가면 1982년에 설립된 공해문제연구소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다.3 또한 전국조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지역의 자생적인 환경단체들과 연합함에 따라 주민운동도 일정 부분 흡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념적으로도 공추련 시기의 민중운동, 좌파 환경주의로부터 점차 우경화하여 환경관리주의를 조금씩 받아들였고 생태주의까지도 일정 부분 수용하는 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녹색연합은 90년대초 배달환경연구소가 배달환경클럽으로 확대되고 그후 90년대 중엽에 녹색당 창당준비위원회와 ‘푸른 한반도 되찾기 시민모임’이라는 작은 단체와 통합하면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념적으로는 민중운동이나 좌파 환경주의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뿌리를 찾자면 배달환경연구소의 환경관리주의라 할 수 있지만,4 녹색연합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생태주의 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져갔다.
녹색연합의 생태주의적 성향은, 유명한 생태사상가 슈마허(E.F. Schumacher)의 책 제목을 그대로 차용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기관지 성격의 잡지 제목에서 잘 드러난다. 이 잡지는 재생지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대부분 생태주의적인 것으로 채워져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나오기 전에 녹색연합에서는 환경관리주의 색채가 강한 『배달환경』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했는데, 두 기관지의 차이는 녹색연합의 내적인 변신 정도를 보여준다.5 녹색연합은 환경운동연합의 다수 지역조직이 수돗물 불소화를 촉구하는 움직임에 동조하는 것과 달리 불소화반대국민연대에 참여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녹색연합의 생태주의적 성향이 드러난다.
환경운동연합과 녹색연합의 또 한가지 차이는 환경운동연합이 공추련 당시의 ‘좌파’ 민족주의 성향을 거의 벗어버린 데 비해 녹색연합은 ‘낭만적인’(우파) 민족주의 색채를 지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배달환경연구소가 전국적인 연합으로 발전했음에도 몇년 전까지 여전히 고조선을 연상시키는 배달이라는 말을 떼어버리지 않은 것,6 남한 생태계 조사를 위해 백두대간 종주사업을 벌인 것, 대만 핵폐기물 북한수송계획에 대항해 가장 전투적으로 싸운 것 등이 민족주의적이라는 혐의를 갖게 만든다.7
환경운동연합이나 녹색연합도 생태주의 성향을 지닌다는 것은 환경운동단체의 이념적 지형에 따른 분류가 명확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핵발전반대운동이나 불소화반대운동 같은 구체적인 운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핵발전반대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 중 상당수는 핵발전이 단지 기술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보지만, 일부는 그것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반자연적·반생명적 기술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본다. 불소화반대운동의 경우에도 불소화합물이라는 과학지식의 산물을 모든 시민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기술중심주의이고 반생명적이라고 생각해서 반대하는 사람들과, 불소가 위험한 유해물질이므로 수돗물에 투입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핵발전반대운동(또는 불소화반대운동)에 참여했든 운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결과는 비슷하고, 참여자들 모두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씨스템 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과학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알게모르게 과학기술의 사고체계에 물들어 있음을 고려하면, 순수한 생태주의와 기술발달을 인정하는 환경관리주의와의 뚜렷한 구분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어 환경운동연합 반핵특별위원회 구성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그중에는 기술주의에 상당히 경도된 사람들도 있고, 반대로 기술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 구성원은 물론 모두 핵발전에 반대하지만, 기술주의적 성향의 사람들은 생활방식의 변화보다는 새로운 기술개발을 통한 에너지문제 해결을 강조하는 반면, 생태주의적 성향의 사람들은 현재와 같은 산업문명체제를 유지해서는 에너지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에너지를 덜 쓰는 방향으로 생활양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핵발전에 대항해서 내놓는 논리가 주로 과학기술 지식에 근거한 것이고, 핵발전의 대안으로 풍력발전과 태양광발전 같은 기술을 제시한다는 것은 생태주의자라 하더라도 현실을 고려할 경우에는 기술개발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환경단체들의 이념적 성향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수돗물불소화반대운동의 참여 여부를 가지고도 구분해볼 수 있다. 수돗물 불소화는 한국의 시민단체들을 찬성과 반대 진영으로 ‘분열’시키는 작용을 했는데, 이들 단체가 불소화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는 그 이념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불소화반대운동을 분석하면 흥미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반대운동에 참여하는 주요 단체는 『녹색평론』, 한살림, 생명민회, 한국불교환경교육원, 목포 ‘환경과 건강 연구소’, 녹색연합 등이며, 이들 단체의 이념적 성향은 목포 ‘환경과 건강 연구소’와 녹색연합을 빼고는 대부분 생태주의이거나 생태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다른 환경단체 중 환경운동연합에서는 상당수의 지역 조직이 수돗물 불소화를 지지하고 있고, 환경관리주의 입장이 뚜렷한 ‘환경과 공해 연구회’와 환경정의시민연대에서는 중립적이거나 암묵적인 지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수돗물 불소화를 놓고 생태주의 성향의 단체와 비생태주의 성향의 단체가 반대와 찬성으로 갈라지는 이유는 과학기술을 보는 시각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과 전문가집단의 지식독점에 대해 회의적이고 개인의 자발적 변화와 이들의 공생적 연대를 중시하는 생태주의 쪽에서는, 수돗물 불소화를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적용하는 것이 전문가들의 기술맹신으로부터 나온 횡포라고 보기 때문에 이를 반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에 과학기술의 발달과 전문가씨스템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환경관리주의 쪽에서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와 같은 진보적 전문가집단이 충치예방을 위해 수돗물 불소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8 생태주의측의 기술전문가에 대한 불신은 근본적인 것이어서 시민단체의 ‘분열’을 염려해 중재를 시도한 전문가들의 노력도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불소화를 둘러싼 싸움은 기본적으로 전문가집단과 풀뿌리 생태주의자들 사이의 싸움이기 때문에, ‘중립’을 자처하는 전문가들의 중재 노력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여기서 불소화반대운동과 핵발전반대운동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생태주의 단체들도 기본적으로는 핵발전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들은 전국반핵운동본부에는 참여하지 않고 핵발전소 건설이나 핵폐기물처분장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투쟁이 일어나도 이와 연대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반면에 환경운동연합은 적극적으로 핵발전반대투쟁에 나서고, 환경관리주의 성향의 단체들은 대체로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조정자역을 맡으려고 한다. 녹색연합은 반핵운동본부에 참여하고 있고 핵발전반대투쟁에도 나서지만 중재자 역할을 맡으려 할 때가 종종 있다. 핵발전은 주민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는 것이기 때문에 좌파 환경주의와 주민운동의 성격을 지닌 환경운동연합에서 적극적인 반대투쟁을 벌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돗물 불소화는 반대투쟁의 대상이 되기가 어렵고, 따라서 언론의 조명을 거의 받지 못하며, 어떤 특정 지역주민들에게 눈에 띄는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환경운동연합에서 반대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수돗물 불소화가 충치예방에 효과적이라고 한다면 환경관리주의의 관점에서는 불소화를 찬성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있다. 생태주의운동에서 핵발전반대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핵발전이 아무리 반생명적이라 하더라도 주민들이 중심이 된 격렬한 반대투쟁이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에서일 것이다. 생태주의 쪽에서는 반핵운동을 포함한 한국의 사회운동이 대부분 강자의 ‘폭력’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대결적·투쟁적인 것이므로, 핵발전의 반생명을 생명으로 전환시키려는 행동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9
『녹색평론』 등 생태주의운동 쪽에서 내세우는 불소화 반대의 중심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에 반하는 ‘강제적 의료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내놓는 책자나 소식지에 나오는 반대 논거는 대부분 불소가 인체에 해롭다는 과학적 연구결과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생태주의운동이 산업문명을 비판하고 과학기술의 발달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구체적인 행동으로 들어갔을 때는 과학기술 연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녹색평론』에서 처음에는 기술문명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컴퓨터를 멀리하면서 주로 우편이나 팩스를 통신수단으로 이용했고 컴퓨터에 비판적인 글을 자주 소개했지만, 수년 전부터 전자우편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인터넷을 통해서 많은 자료들을 얻는다는 것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현실은 ‘순수한’ 생태주의운동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순수한’ 생태주의운동의 어려움은 현대 과학기술의 특성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데, 울리히 벡의 주장과 같이 현대 과학기술의 특징은 위험(risk)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울리히 벡은 현대기술의 중요한 특징으로 그 위험을 우리의 벌거벗은 오관으로 감지할 수 없다는 점을 든다. 예를 들어 방사능의 위험, 불소 음용(飮用)의 위험, 염화불화탄소의 위험, 자동차 배기가스의 위험, 환경호르몬이나 발암성 화학물질의 위험 등이 모두 과학기술의 도움 없이 우리의 맨눈이나 맨몸으로는 감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10 이러한 위험은 모두 과학기술의 결과인 측정장치의 도움을 받아야만 감지 가능하고, 과학기술적인 논의를 통해서만 위험의 정도를 규정하고 규제할 수 있기 때문에, 기술문명의 전환을 도모하는 경우에도 과학기술을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것이고, 따라서 과학기술의 거부라는 ‘낭만적’ 생태주의운동은 외부세계로부터 격리된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하지 않는 한 비현실적인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생태주의운동에서 현실을 고려하여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들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구체적인 싸움에서는 환경관리주의 성향의 운동단체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 지식을 이용하는 일이 불가피할 것이다.
생태주의운동에서 볼 때 대결적·투쟁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운동으로 대표적인 것은 노동운동일 것이다. 생태주의운동에서는 또한 노동운동이 산업주의나 기술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에, 생태주의운동이 노동운동과 연대적인 관계를 맺기는 근본적으로 어려운 면을 지닌다. 그런데 다른 환경단체와 노동운동의 관계도 협력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종종 심각한 갈등 양상을 보이곤 하는데, 이는 두 운동 사이에 이념이나 지향성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기술주의를 어느정도 인정하는 환경관리주의 성향의 환경연합과 녹색연합도 1998년초 김포 동아매립지 용도변경을 둘러싼 갈등11이나 한국전력 민영화를 둘러싼 공방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운동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환경운동(환경운동연합과 녹색연합 중심의)과 노동운동은 한전 민영화 관련 토론회에서 여러 차례 근본적인 입장 차이와 더불어 미묘한 심리적 갈등 양상을 드러냈다. 환경운동연합과 녹색연합 등의 환경운동단체들은 한전 민영화나 해외매각을 에너지씨스템 재편이라는 시각에서 수용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보인 반면, 노동운동 쪽에서는 신자유주의 논리에 따라 진행되는 민영화는 한전 노동자의 권익을 해칠 뿐만 아니라 해외매각의 경우 국부유출과 함께 공공재에 대한 자주성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이유로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한 토론회에서 노동운동측 발표자는 문명의 근본적인 전환을 꾀하는 환경단체들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고, 한전에 대한 피해의식이나 대결의식 때문에 한전이 해외에 팔려나가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홧김에 서방질하는 것이나 같다’고 발언함으로써 환경단체들을 자극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동운동 쪽의 발언은 노동운동이 운동의 중심이어야 하고 노동자의 ‘해방’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므로 환경운동도 이에 협조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환경운동 쪽에서도 노동운동의 그러한 ‘오만’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총선시민연대 활동을 평가하는 몇몇 자리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 필요성이 심심찮게 거론되긴 하지만, 환경운동이 노동운동과 연대하여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포지티브 운동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12 환경운동연합과 녹색연합은 이번 총선연대의 ‘성공적인’ 낙선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고, 낙선운동이 네거티브 운동에 치중함으로써 정치외면을 부채질한 측면도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만큼 앞으로 정치개혁 활동으로부터 발을 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환경운동의 정치개혁운동이 노동운동 세력이 중심이 된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에 동참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정당명부식 1인 2표제’가 도입되는 등 포지티브 운동을 위한 여건이 조성되면 독자적인 환경세력을 창출하고 이를 통해 환경친화적인 정치를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진보진영과 연대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진보진영에 환경운동이 흡수되는 방식이 아니라 독자적 세력으로서의 대등한 연대를 추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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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환경단체들이 환경운동을 넘어 정치개혁운동에까지 참여하게 된 것이나 생태주의운동에서 불소화반대운동을 벌이고 『녹색평론』 독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 등은 한국의 환경운동이 성숙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운동이 성숙해갈수록 그 앞에 놓이게 될 과제는 더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것일 터인데, 이러한 과제를 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운동, 또는 새로운 시각에서의 운동이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나는 핵발전반대운동에 약간이나마 관여해왔는데, 그러는 가운데 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종종 고민하게 되었다. 90년대초까지만 해도 핵발전반대운동은 ‘저항’운동이 주조를 이루었다. 지역주민들의 핵발전소 건설 반대투쟁, 핵폐기물처분장 건설 반대운동, 보상운동 등이 거의 전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핵발전소나 폐기물처분장 건설은 지역주민들의 생존과 직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원전이 위험하다는 것만 잘 알리면 운동은 순식간에 불같이 일어났고 싸움이 승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당장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는 싸움이 끝난 다음에 운동을 어떻게 전개해갈 것인가인데, 싸움에서 승리하거나 지면 운동은 대체로 그냥 사그라들고 말았다.
핵발전반대운동이 성숙단계로 접어들 때 자연스럽게 전개되어야 할 운동은 에너지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십차례나 일어난 핵발전반대운동이 에너지대안운동으로 이어진 경우는 한번도 없었던 것이 우리 현실이다. 사실 핵발전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포기했을 때의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재생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 에너지 절약, 에너지효율 향상 등을 목표로 하는 ‘에너지운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에너지와 자원을 적게 쓰는 방향으로 생활양식을 전환하도록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핵발전반대운동은 본격적인 운동이 시작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싸움이 계속 반복되는 형국이고, 발전적인 형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일시적인 싸움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눈앞의 승리에 집착하여,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대안 모색을 꾀하지 않은 까닭이다.
위에서 분류한 두 가지 운동집단 중에서 큰 환경단체들의 운동방식은 대체로 핵발전반대운동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환경이슈가 나타나면 싸움은 대단히 격렬하고 크게 벌어지지만 그 싸움이 끝나면 후속 운동,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싸움이 끝났다고 해서 그 이슈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문제가 덮인 것으로 보이면 관심은 다른 싸움으로 옮겨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환경이슈를 둘러싼 싸움에서 순간의 승리가 아니라 궁극의 해결을 모색한다면 꾸준한 관심, 끊임없는 대안모색이 대단히 중요할 터인데, 큰 단체에서는 지금까지 대체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러한 성과가 있으면 만족하고 물러서는 형태의 운동을 전개해왔다. 장기적 관점에서 운동을 해왔다기보다는 단기적으로 조급하게 성과를 좇았다는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생태주의운동은 문명의 전환이라는 대안찾기를 애초부터 내포하고 있고, 『녹색평론』에서 종종 읽을 수 있듯이 시간적으로 대단히 긴 전망을 가지고 접근하기는 하지만, 문명의 전환이라는 목표가 처음부터 너무 크게 다가오기 때문에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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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에서는 2000년을 맞이하여 『20세기 딛고 뛰어넘기』라는 책을 내놓았다. 여러 분야 학자들의 1년에 걸친 공동연구의 결과물로서, 그 주된 목표는 생태주의적 입장에서 다음 세기의 환경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한 대안적 틀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지금까지 사건중심·투쟁중심의 운동에 치중해온 환경운동연합이 연구보고서 속에서이긴 하지만 “21세기의 가치선택은 생태주의 이외에는 없다”고 선언하고 이에 기초한 대안을 모색하려는 노력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말하는 생태주의는 『녹색평론』의 생태주의와는 내용상 상당한 차이가 있겠지만,13 환경운동연합에서 생태주의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은 앞으로 환경관리주의에 가까운 환경단체들의 이념이나 운동방식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을 예고해준다. 물론 이를 위해 가장 먼저 뛰어넘어야 할 문제들은 바로 환경단체 조직내부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생태주의적 대안 모색을 위해 환경단체에서 넘어야 할 것은 조직을 꾸려가기 위해 생태주의와는 거리가 먼 기업으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후원금을 받는 일, 지나치게 언론을 의식하는 운동방식,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 부족 등일 터인데, 모두 쉽사리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녹색평론』에서 불소화반대운동이라는 직접적인 운동에 뛰어들었고, 전국 각지에서 『녹색평론』 독자모임이 형성되어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생태주의운동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생태주의운동의 확산이라는 점에서는 바람직한 것이겠지만, 그 결과까지도 반드시 바람직한 것일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환경운동연합에서 생태주의 쪽으로 나아가려 할 때 넘어야 할 커다란 난관이 있듯이, 생태주의운동에서도 전국적인 연계를 형성하고 구체적인 이슈에 대한 행동을 펼칠 때 풀어야 할 또는 경계해야 할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기술을 어떻게 보고 얼마만큼 받아들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 산업문명에 비판적인 입장이 ‘문화비관주의’로 흘러가거나 ‘생명사상’ 속의 ‘신인간으로서의 한민족 이념’14과 연결되어 퇴행적이 될 가능성 등은 생태주의운동이 활발해질수록 해결 또는 극복해야 할 과제로 절실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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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부터 환경연합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이 글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환경운동연합이란 이름을 썼다.↩
- 『녹색평론』은 생태주의 운동단체의 성격이 강한데, 현재 수돗물불소화반대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최근 전국 각지에서 독자모임이 결성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녹색평론』이 한국 생태주의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예측된다.↩
- 환경운동연합의 사무총장 최열은 한국 최초의 환경운동단체라 할 수 있는 공해문제연구소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 지난 3월까지 녹색연합의 사무총장을 지냈던 장원은 환경공학자이다.↩
- 환경운동연합에서도 1997년부터 기관지 성격의 『월간 환경운동』을 제목·내용·인쇄용지에서 생태주의적인 색채를 보이는 『함께 사는 길』로 바꾸어 발행하고 있다.↩
- 녹색연합은 1997년경 배달녹색연합에서 녹색연합으로 명칭을 변경했는데,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주의적 색채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 배달녹색연합은 창립취지문에서도 한국형 환경운동을 모색한다는 기치를 내거는 등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 여기서 사용한 전문가씨스템이란 개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조효제 「시민사회의 변화와 주권의 급진적 재편」,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참조.↩
- 이에 대해서는 김종철 『간디의 물레』, 녹색평론사 1999 참조.↩
- Ulrich Beck, Risikogesellschaft, Frankfurt a.M.: Suhrkamp 1986 참조.↩
- 외환위기로 인한 구제금융 사태로 부도위기에 처한 동아그룹에서는 동아매립지를 농업용에서 일반주거용으로 변경하여 위기에서 탈출하려 했다. 환경단체에서는 이를 적극 반대했지만, 동아건설 노조와 민주노총의 건설노조는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 민주노동당에는 작지만 환경팀이 있는데 그 구성원은 대부분 환경단체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정치개혁과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이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환경단체 내부에서 이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 『20세기 딛고 뛰어넘기』에는 생태주의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다루는 내용도 있지만 환경관리주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용도 많다.↩
- 김지하 『사상기행』 1·2, 실천문학사 199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