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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오늘의 한국, 변모하는 사회운동
n세대와 사회운동
박영선 朴映宣
참여연대 기획실장.
1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을 보았다. 영화 보는 내내 눈에 힘을 주고 호흡을 고르면서 터져나오는 울음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영화가 끝나고서도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한참 걸은 후에 같이 본 사람에게 겨우 한마디 할 수 있었다. 너무 슬픈 영화라고. 내 말을 듣고 그 사람은 영화보다 더 슬픈 게 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 사람은 「박하사탕」의 감동을 젊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는 것이 더 가슴아프다고 했다.
「박하사탕」이 세간에는 첫사랑의 실패가 낳은 비극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알려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광주’에 관한 영화이고, ‘광주’는 내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기호이다. 여기서 그들은 서태지로부터 시작된 신세대의 계보를 잇고 있는 X세대, n세대, i세대를 지칭한다. 우리들은 ‘광주’를 마음에 담고 있지 않은, 그래서 「박하사탕」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를 뜨는 그들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때론 분노한다. 연령의 차이보다 훨씬 더 먼 거리를 두고 언제나 계몽주의자들처럼 교훈적인 잔소리를 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우리는 그들과 기본적으로 불신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그들에게 화해를 청하는 글이다.
2
마침내 총선이 끝났다.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으로 ‘바꿔’의 열풍이 강했지만 젊은 세대들의 정치적 무관심까지는 바꾸지 못했다. 57.2%라는 역대 어떤 선거보다 낮은 투표율에 대한 책임은 n세대에 돌아갔다. 총선개표방송 20대 시청률이 50대의 1/3 수준인 8.7%에 불과했다는 조사결과까지 나와 낡은 정치를 개혁할 주체인 젊은 사람들이 정작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 우리나라 정치발전의 미래가 어둡다는 사회적 통념이 더욱 굳어졌다. 2000년도 총학생회장선거 때 학생들의 투표율이 낮아 15개 대학이나 재선거를 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n세대가 이번 총선을 통해 R(revolution)세대가 되기를 바란 일각의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가 되새기게 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갖가지 구호를 내걸고 젊은 층의 기권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총선시민연대도 샤크라·이지훈·구피 등 n세대에 인기있는 연예인들을 동원하여 투표참가 캠페인을 열성적으로 벌였지만, 그들은 ‘꼭 투표하세요’라는 연예인들의 말에 마지못해 대답할 뿐이었다. 또한 차 없는 대학로 거리에서 난장을 벌여 선거에 대한 중요성을 얘기하고 선거참여를 유도했지만, 정작 마로니에 거리에서 활개를 친 것은 투표권이 없는 중·고등학생들이었다.
그렇다면 n세대는 왜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투표 기권을 정치적 무관심과 바로 등치시킬 수 있는 것일까? 먼저 투표에 참가하지 않은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자.
방송에서는 날마다 투표에 참가하라고 성화다. 그런데 누구를 찍어야 하나. 심한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쓸 만한 사람이 하나 없다. 개중 나은 사람을 찍으라고,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고 그렇게 말씀하는 분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뽑은 사람들이 함량 미달의 국회의원 노릇을 했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가. 배신당했다고 전화 한 통이라도 했는가. 국회의원을 차선으로 뽑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국회의원이 잘못하면 본전은커녕 우리를 해코지까지 하기 때문이다. 나도 늘 투표권을 행사하고 싶다. 그러니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하나 더 만들자는 것이다. 일정 비율을 얻지 못하면 최고 득표를 했더라도 당선자가 없는 것으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만들어 당당하게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1
며칠을 생각해봤지만 지역구 출마자 중 밀어줄 인물과 정당을 찾을 수 없었다. 당리당략을 위해 이리저리 옮겨다니거나 개인의 이권을 위해 치부한 사람을 찍느니 기권하는 게 참다운 참정권의 행사라고 본다.2
그들은 어찌됐든 투표하는 것이 최선의 참정권 행사는 아니라고 판단하며, 투표기권을 조직적으로 주장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정책적으로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신설하고, 일정 투표율을 넘지 못하면 재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기권도 참정권의 한 형태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다수 언론과 국민은 “그들의 위선에 침을 뱉고 싶다. 그렇게 말 많고 목소리 높이던 그들은 선거날 어디로 갔는가. 앉아서 욕만 한다고 정치가 바뀌지 않는다”3며 n세대들의 무책임성에 목청을 드높였지만, “투표 안한 사람을 ‘의무를 안했다, 민주시민의식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4거나 “다수 유권자의 투표 불참은 어떤 문화적 현상으로서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의 결과라기보다는, 현재와 같은 정치현실에서는 투표행위에 참여해야 할 의미가 크지 않다는 유권자의 평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무관심은 강요된 것이라 할 수 있다”5며 그들의 의견에 귀기울이는 시각도 존재한다.
사실 투표에 참가하지 않는 행위를 모두 정치적 무관심 탓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좌파의 선거전술에서 보이는 체제부정형 외에도 항의형 등 기권의 이유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16대 총선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1인 2투표제) 도입이 무산됨에 따라 유권자들의 합리적인 정치열망이 사전 봉쇄된 측면이 있었다. 또한 정치적 연대감이나 소속감을 확인하는 절차6로서의 선거 경험—386세대는 여소야대 국회나 수평적 권력교체의 경험을 통해 차악을 선택하는 정치적 현실감각을 갖고 있고 그런 판단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주는 공동체적 원체험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이 없는 n세대는 총선시민연대의 공천부적격자 명단에 오른 이들 중 상당수가 공천을 받는 후진적인 정당현실을 보며 선거참여의 의미를 더욱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총선시민연대 박원순(朴元淳) 상임집행위원장이 n세대의 투표 불참에 대해 “이미 죽어 있는 사람에게 주사 한 방을 놓는다고 살아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미 정치권은 선거시작 이전에 국민들에게 부활의 메씨지를 주기에는 절망이 너무 깊었다. 정치권이 선거기간중에 좀더 다른 행태를 보여주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것들의 종합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활동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7라고 말한 것처럼, n세대에게 ‘새천년의 희망은 내 한 표에’라는 투표참가 슬로건은 그야말로 구호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n세대를 비롯한 유권자에게 많은 희망을 주었던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이 낙천·낙선운동에 한정됨으로써 발생한 대안 부재의 딜레머도 n세대의 투표참가 의지를 꺾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만약 총선시민연대에서 네거티브 전술을 뛰어넘어 대안까지 제시하거나 무효표 조직 전술을 적극적으로 택했다면, n세대의 정치적 실천이 이처럼 기권이란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16대 선거에서 나타난 낮은 투표율은 낡고 부패한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의 집단적 경고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그들은 이런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흔히 ‘정치를 따시켰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따’란 ‘왕따’의 준말로, 다시 말해 꼴보기 싫은 정치를 20대가 집단따돌림이란 형태로 내쳤다는 설명이다—특히 n세대의 경우 ‘대안 부재’의 딜레머가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사립학교법 개악에 앞장선 죄과(?)로 진작부터 ‘교육 7적’으로 규정되고 총선시민연대의 집중낙선대상자로 선정된 함종한(咸鍾漢) 의원과 마지막 재야라고 불리던 전국연합 이창복(李昌馥) 의장이 경합한 원주지역에서 상지대 학생들이 벌인 낙선캠페인 동참활동이나, 총선시기 동안 대학공간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다고 평가받는 ‘반민중적 보수정치 혁파와 민중정치 실현을 위한 대학생총선투쟁본부’(총투본)의 청년진보당 지지활동을 본다면 이런 평가가 그리 무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현재의 정치지형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사회운동은 정치적 무관심, 탈정치 등으로 매도되는 n세대의 투표기권행위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적극 수용하여 정치개혁에 나서야 하며, 투표율 제고라는 기능적 방법보다는 정치개혁과 정치참여라는 본질적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과연 n세대가 정치적 의사를 담은 기권행위가 초래한 결과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여기서 잠깐 20대가 정치를 따하고 있는 현실과 정반대의 현실을 살펴보자. “20대는 말만 요란하고(…) 실제 표가 안되는 집단이니까 노동자·여성·노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공약과 정책은 있어도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정책과 공약이 없다”8는 대학생유권자운동본부 집행위원장의 지적은, 우리로 하여금 과연 그들을 정치의 주체나 정치발전의 주역으로 사고했는가 하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하고, 그들의 투표기권을 일방적으로 탓할 수만은 없게 만든다.
정치적 사회운동의 주체로서 대학생의 지위가 상실9된 것이 아무리 객관적 사실이라고 해도 우리 사회에서 대학생─학생운동의 지위가 하락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은 지나치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 공익을 위해서든 사익을 위해서든 모든 사회집단은 선거라는 정치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한다. 노동계는 ‘자동차 해외매각 저지’라는 이슈를 내걸고 파업을 벌였으며, 의사들도 사전 합의된 의약분업에 대해 새삼스럽게 꼬리를 달며 집단휴진이라는 강수를 두었다. 이에 당연히 정치권과 언론, 사회운동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화답을 했다. 하지만 선거기간 내내 캠퍼스를 달구었던 등록금 인상 반대투쟁이나 교육재정 6% 확보라는 이슈에 대해서는 모두들 강 건너 불 구경이었다. 아마도 한총련이 네 가지 요구사항을 내걸고 후보자들에게 보낸 질의에 답변을 보내온 후보는 없었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대학사회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가’에 대해, 비록 제한적 시각이지만 당당하게 아니라고 답하는 글을 소개하면서 대학생들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우리가 취할 태도를 시사받고자 한다.
결국 우리가 도달하는 부분은 대학사회의 정치적 무관심을 읽는 우리의 태도나 가치 자체가, 80년대가 시대적인 과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정치적 행위의 과도함과 형식성이 남긴 나쁜 유물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정치적 행위를 마음만 먹으면 이끌어낼 수 있는 다양화된 채널은 이미 존재하는데, 한정된 시각으로 인하여 그 연결점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90년대의 대학사회는 어찌됐든 80년대 대학사회의 과잉되었던 정치적 행위의 역할을 이미 민주노총이나 각종 시민단체에게 넘겨주었다. 그로 인해 생긴 빈자리─80년대의 ‘광장’ 있었던 자리─를 채울 일종의 부문 사회운동(환경·인권·여성 등등)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때문에 대학사회가 정치사회에 대해 직접적인 개입을 통한 정치개혁이 아니라 지지·관찰세력으로서 뒤늦게 참여하는 듯한 인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대학사회에는 여전히 자신만의 정치적 색깔을 가지고 청년진보당이나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와 적극적인 선거운동도 하고 있는 대학생들이 존재하고, 나아가 90년대의 특수성을 잘 살리는 여러 부문운동에 대한 활동도 더디게나마 만들어지는 사회적 호의 속에 진행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90년대 대학사회는 다만 정치적 ‘광장’을 대체할 다른 수단을 적절한 시기에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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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n세대를 바라보는 수준은 1970년대에도 못 미치는 듯하다.11 기껏해야 다음과 같은 정도가 아닐까?
이들은 이른바 인터넷 세대로서, 그들이 바꾸자고 부르짖는 지상의 현실 외에도 컴퓨터 속에 또 하나의 가상현실을 가지고 있는 디지털 세대이다. 이념의 대립으로 갈려졌던 두 개의 냉전세계 대신, 그들은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마우스를 클릭하여 간단히 세계의 국경을 넘나들고 현실과 가상의 두 영역을 수시로 오고가며 무한한 상상과 창조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이 n세대는 그러나 광속의 정보통신망 속에서 익명의 존재로 가상의 현실을 누리려 할 뿐,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을 직접 바꾸려 들지는 않는 것 같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율이 60%를 밑돌았다는 사실도 어쩌면 이러한 세태의 간접적 반영일지 모른다.12
하지만 n세대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마우스 안에 모든 정보가 있고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총선을 앞두고 구성된 M-tizen의 선언문13을 보면 “우리에겐 마우스가 있다. 국회의원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나라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인터넷은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지금까지 국민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고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었던 정치인을 다시 한번 콕 찍어 말해줄 사람들이 M-tizen인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얼마 전의 안티닉스(anti-NIX) 캠페인이나 중앙선관위·총선시민연대의 총선후보자 병역·납세정보 공개 싸이트에 대한 접속수를 보면 선언문이 마냥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앞머리에서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n세대를 기본적으로 불신한다. 그래서 n세대가 네트워크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정보습득에 매우 빠르고, 이런 점이 n세대의 또다른 특질인 새로움(new)을 도출해낸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의 전략에 놀아나는 거대 소비집단으로 폄하하기 일쑤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전통적인 운동권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롯해서 눈에 띄는 학생운동의 쇠퇴나, 젊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사회운동의 풍경이 n세대에 대한 불신을 부추긴다.
그렇다면 n세대는 우리를 신뢰하고 있는가? 필자는 식품위생법으로 라이브클럽을 규제하는 명분없는 행위나, 저질문화추방·청소년보호 운운하며 음란만화·비디오를 규제하는 명분은 있되,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행위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기성질서가 획일적으로 만들어놓은 규범에 대해 반발하며 때론 기성의 가치체계를 부정한다. 예컨대 우리가 그들에게 저속하고 가벼운 문화에 탐닉한다고 한마디하면, 그들은 하위문화나 비주류문화의 전복성으로 도전장을 내밀고, 우리가 그들의 탈정치 성향에 대해 비난을 보내면 그들은 정치가 꼭 의사당 안에서만 이루어지는가 하는 의문으로 화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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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도 기성질서 중 하나이다. 조직 내의 위계질서, 수량적 평가에 의존하는 모습 등 기성가치를 신봉하는 일면을 보여준다. 시위문화만 보더라도 사회운동의 보수성을 눈치챌 수 있다. 가만 따져보니 85학번인 필자는 팔을 흔든다거나 구호를 복창하고 유인물을 나눠주는 식의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주장을 되풀이하는 집회에 15년 넘게 참가하고 있다. 사회를 향해서는 개혁과 혁신을 요구하는데, 그 방식은 어쩌면 몇십년째 답보하고 있는지 모른다. 예전처럼 정보의 독점성이 강하고 발언권이 제한되었던 사회에서는 사회운동의 메씨지가 무척 중요했으므로 일방성이 문제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 써핑인구가 1천만명이 넘는 시대이다. n세대는 공부와 놀이는 물론 인간관계까지도 네트(net)에서 맺는다. M-tizen 선언처럼 네트에는 모든 정보가 있으며, 정보의 가공과 전달 속도도 엄청나다. 또한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으며, 주장의 옳고 그름에 대해 공개적으로 갑론을박할 수 있다. 요컨대 쌍방향의 소통방식을 취할 때가 왔으나, 시민운동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젊은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행사를 준비했던 총선시민연대의 한 활동가는 행사를 끝내고 난 후 n세대와 코드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평가를 했다. 꼭 투표하겠으며 낙선후보에게는 투표하지 않겠다는 서명이 얼마나 무력한가는 물론이고, 집회나 강연, 기껏해야 문화공연인 운동방식도 문제였다는 고백이다.
n세대와 코드를 맞춘다는 것은 n세대의 특질에 맞는 운동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1997년 노동법날치기통과 정국 때가 마지막 대중동원이었다며 대중들의 대규모 시위참가가 불가능해진 상황을 개탄(?)하고 아직도 참가자 수로만 사업을 평가하는 우리들로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개개인의 망으로 이루어진 연대 운운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n세대의 운동방식에 많은 회의가 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n세대와의 의사소통을 원하고 권력거리(power distance)를 좁히려면, 문제 해결의 과제를 그들만의 몫으로만 돌려서는 안될 것이며 그들의 새로운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위한 제일의 덕목은 자유로움과 거기서 비롯되는 창의력과 다양함에 대한 너그러움이다. 일전에 어떤 ‘영페미니스트’그룹의 운영방식이 회자된 적이 있다. 그 모임에서는 선입관을 심어줄 수 있는 일체의 소개를 배제함으로써 누구를 막론하고 토론주제에 대한 각자의 견해로만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모임을 시작할 때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어떤 활동을 했다는 등의 소개를 빠뜨리지 않고 각자 그 배경으로만 다른 사람을 기억하는 우리에 비해 그들은 얼마나 경험적 권위에서 자유로운가.
얼마 전 언론에 대서특필된 대니 서(Danny Seo)의 사례도 충격이었다. 어린 나이에 미국사회에서 성공했다는 천박한 박찬호식 열광은 물론 아니다. 한국에서 사회운동을 했던 세대의 입장에서 볼 때, 과거의 틀에 구애받지 않는 창조적 열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의 운동방식은 사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차이는 사회운동의 방식으로 그것을 자유롭게 도입했다는 점이다. 과거의 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은 n세대가 사회운동에 접근할 때 장애가 되기보다는 장점이 될 것이다. 자기로부터, 주변의 일상으로부터의 운동에 좀더 적합한 세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인터넷을 일상적인 삶의 도구로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그들의 특성을 사회운동에서 적극 살려야 한다. n세대는 정보접근·정보취합능력이 뛰어나 더이상 기성의 가치관과 규범을 일방적으로 주입받지 않으며 스스로 판단한다. 그들은 정확한 정보만 제공되면 스스로 움직인다. 같은 오프라인 공간에서 대면관계를 갖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물론 이러한 사회변화를 감지하고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이 새천년을 맞이하여 한결같이 싸이버 시민운동을 주창하고 나섰지만, 아직 n세대와의 소통에 익숙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의 문화주의도 다시 보아야 한다. 우리는 n세대가 이데올로기에서 탈각했다는 일면적 비판에만 익숙하며, 일상에서 억압을 느끼고 자유를 갈망하며 고군분투하는 n세대의 아우성에는 귀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삶의 심미화는 주체의 능동적인 변화라기보다는 경제의 문화화 경향 속에서 점점 더 소비권력화되어가는 자본의 메커니즘에 의해 객체화되어가는 측면이 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심미화는 일상생활 영역을 부각시키고 생활정치를 주목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14는 지적을 심각하게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아울러 사회운동은 n세대에게 진정한 세대의식을 능동적으로 부여하는 과제를 중요하게 인식해야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n세대는 공유된 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는 세대적 사건(generation event)을 갖고 있지 않다. 이는 세대의식의 부재, 세대적 의무의 부재로 이어진다. 대중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한계는 있지만, 386세대의 경우 광주민중항쟁을 큰 역사적 채무로 갖고 있고 6월항쟁의 주체라는 점에서 세대적 사건, 세대적 의식, 세대적 의무를 모두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대의식의 존재 유무는 16대 총선에서처럼 판이한 정치실천을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세대적 사건을 갖고 있지 않은 n세대의 진정한 세대의식을 우리 사회와 사회운동이 목적의식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기성의 가치를 훈육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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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회운동에는 n세대가 와서 놀고 움직이고 발언할 만한 공간이 없다. 정치가 20대를 ‘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운동도 그들을 품에 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본디 사회운동은 권위주의적 측면을 내포한다. 리더십의 권위, 주장의 권위, 대안의 권위가 있어야만 광범위한 설득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본질에 내재된 이런 권위주의적 측면이 n세대와의 만남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볼 때이다. 과거의 정치적 사회운동이 퇴장하고 새로운 이념과 가치를 지닌 사회운동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이 시점에, 사회운동이 n세대와의 소통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아직 사회운동과 n세대 간에 어떤 가교가 놓여질지는 미지수이지만 그 절박성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존재한다. 첫째는 n세대라는 개념이 본격적인 세대의식이 규명되기 전에 자본의 소비전략에 의해서 촉진되었기 때문에 n세대가 생물학적 연령과 관계없이 기성세대화할 가능성이 높고 그 속도도 매우 빠를 것이라는 우려이다. 둘째는 젊은 세대가 점차 사회운동의 지지기반에서 이탈하고 있는 발등에 떨어진 현실이다. 참여연대의 경우만 해도 20대 회원가입률이 18.8%로 30대의 50%에 훨씬 못 미치며, 97년부터 지속적으로 감소추세에 있다.15 운동의 재생산 문제를 고려하면 아주 심각한 것이다. 셋째는 세대차이 문제가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는 세대단절의 수준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세대단절을 극복하고 그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것도 어차피 사회운동의 몫이어야 한다고 했을 때, 세대문제의 해결 역시 우리 사회의 화급한 과제가 아닐까 싶다.
n세대와의 화해를 청하고자 했지만, 정작 그들이 귀담아듣지 않을 거라는 예상 때문에 무거운 마음이다.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정치적 무관심을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무관심이 가져올 효과에 대해 무력함을 고백하는 것”16이라는 경고를 가벼이 듣고 있지 않다는 위안조차 갖기 어렵다.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가 되어버린 n세대 문제에 대해 뾰족한 대안이 없이 과제만을 앞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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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선 「따져봅시다」, 『한겨레』 2000.4.12.↩
- 박효인, 같은 곳↩
- ‘OhmyNews’(www.ohmynews.co.kr) 2000.4.17.↩
- 「박원순 변호사 열린 인터뷰 1」, ‘OhmyNews’ 2000.4.15.↩
- 최장집 「낮은 투표율과 정치위기」, 『한겨레』 2000.4.28↩
- 유시민 「투표하지 않을 권리」, 『WHY NOT?』, 개마고원 2000 참조.↩
- 「박원순 변호사 열린 인터뷰 1」, ‘OhmyNews’ 2000.4.15.↩
- 강훈식 「따져봅시다」, 『한겨레』 2000. 4. 12.↩
- 김동춘 「한국사회운동 100년」, 『경제와사회』 1999년 겨울호 참조.↩
- 최윤정 「정치개혁과 대학사회의 역할」, 『학술단체협의회, 총선시민연대 정책자문교수단 공동주최 자료집』, 2000, 8면.↩
- 1970년대 청년문화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병익(金炳翼)은 열심히 공부하고 모범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기성세대가 젊은이에게 요구한 덕목이지 새로운 것은 아니며, 가장 비난받는 젊은이들의 생태를 이해하고 나아가 그 미덕을 밝혀낼 때만이 그들의 정치·사회적 역동성을 승인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허수 「1970년대 청년문화론」,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 역사비평사 2000 참조).↩
- 김광규 「n세대에도 혁명의 유전자 살아 있으리……」, 『조선일보』 2000. 4. 19.↩
- M-tizen의 M은 mobile의 약자이다. M-tizen은 ‘행동하는, 실천하는, 참여하는 네티즌’을 모토로 내걸고 ‘소중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골라뽑는 재미를 아는, 좋은 일은 혼자서 못하는 네티즌’들의 공동실천을 위해 총선정보통신연대·진보네트워크 등 시민단체와 ‘디지털 딴지일보’ ‘OhmyNews’ ‘벼룩통신’ 등과 개인들이 구성한 단체이다(www.ngokorea.org).↩
- 박형준 「전환기 시민운동의 성격과 방향」, 『비평』 2000년 봄호 665면.↩
- 조희연 「참여연대 5년의 성찰과 전망」, 『참여연대 창립 5주년 기념 씸포지엄 자료집』, 1999, 33면 표4 참조.↩
- 최윤정, 앞의 글 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