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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분단시대에서 통일시대로

 

발제: 남북통일은 전쟁위협 제거로부터

 

 

김경원

고려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사상』 편집인

 

 

지금 한반도의 분단상황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극단적인 대결체제로 굳어져 있었던 남북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 6월의 남북정상회담이 바로 그 증거이다.

한반도의 분단상황은 냉전체제의 산물로서, 그 출발에서부터 양극체제의 전략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반도는 세계적 양극체제의 하부체제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80년대말 냉전이 종식되고 세계적 양극체제가 무너지면서 한반도 분단상황에 대해서도 변화의 가능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유럽지역과는 달리 한반도에서는 현상(status quo)이 타파되지 않았고 냉전시대의 양극적 대결체제는 지속되었다. 그런데 한반도 분단상황의 변화는 21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그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냉전은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유럽에서 끝이 났다. 동아시아지역에서는 미국이 중국을 소련이 지배하는 세계 공산진영에 예속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50년대에는 양극체제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점차 중소분규가 명백하게 되면서 오히려 중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일본 등과 사실상 동맹체제를 구성하여 아시아의 질서는 엄격한 의미의 양극체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은 중소분규를 교묘하게 이용해 자신의 전략적 가치를 높일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한반도에 관한한 양극체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조성한 것이다.

냉전의 종식은 구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정권들이 붕괴되면서 불가피해진 것이다. 서방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공산정권의 몰락을 보고 자본주의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와같은 단순한 승리주의(triumphalism)가 역겨워 그 반대의 논리, 즉 공산주의는 공산정권의 몰락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 틀림없는 사실은 구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정권들은 본질적으로 ‘내부 모순’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중국 공산주의정권은 ‘개혁·개방’, 즉 시장경제를 채택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고, 두번째는 동독은 원래부터 소련에 의존해 있던 정권이었으므로 소련이 동독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순간 그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서독의 흡수통일정책이 동독의 붕괴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가 서독에 의한 동독주민의 흡수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서 지적한 중국의 생존전략과 독일의 통일과정은 한반도의 탈냉전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선 북한정권은 동독정권과는 대조적으로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주체성이 강한 정권이다. 북한정권은 불가피한 사정을 기회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중소분규는 공산진영의 내부결속을 파괴함으로써 북한을 딜레머에 빠트릴 수도 있었지만, 북한은 오히려 중소분규를 이용함으로써 자신의 독자성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80년대말 소련의 쇠퇴와 몰락의 진동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북한은 동유럽, 특히 동독 공산주의정권의 몰락 원인이 개혁을 시도한 데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개혁과 개방’을 철저하게 배격함으로써 그동안 체제를 유지해올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북한의 고민은, 한편으로는 동유럽에서 본 것처럼 ‘개혁과 개방’이 위험요소를 내포하면서도 또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서 본 것처럼 ‘개혁과 개방’만이 경제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오히려 정권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데 있다. 바로 이러한 고민에서 북한은 ‘개혁과 개방’은 거부하면서도 남한의 기업 등 자본주의 세력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북한은 6월의 정상회담이 있기까지 일관되게 한국정부를 인정하는 모든 행위를 거부하고 중국의 ‘개혁과 개방’ 정책을 비난하면서, 서방세계와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제한해왔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부터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금년 4월에는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했으며, 중국의 ‘개혁·개방’정책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6·15 남북공동합의문을 통해 북한의 ‘낮은 수준의 연방제’와 남한의 ‘국가연합안’ 사이에 공통성이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한다.

그러면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남북관계와 주변강대국들의 반응을 동시에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선 적어도 남북관계의 분위기는 개선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관여한만큼 북한 인민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도 가시적인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북한측이 기대하는 것은 남한측의 경제협력일 텐데, 문제는 남한측이 북한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자칫 잘못하면 남한내 저소득층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그리고 통일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일비용’부터 지불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한가지 방법은 한국이 국제자본시장 및 국제기구에서 북한에 투자할 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방법도 어려움이 많고, 특히 북한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북한이 핵무기·미사일 문제 등을 스스로 풀어나가며 사회를 실제로 개방하고 경제를 어느정도 투명하게 하지 않는 한 국제자본시장에서의 자본유입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본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은 지금 혁명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한과의 경제협력 정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체제의 근본적인 구조조정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 자신이 사회주의의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만일 이런 가정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앞으로 엄청난 모험을 하게 될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고민은 바로 구조조정을 시도해도 위험하고 구조조정을 거부해도 위험하다는 데 있다.

그런데 남한은 북한체제가 곧 붕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즉 현상황에서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북한 지도자가 6월 정상회담에서 서로 확인한 것은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한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진실이라는 점을 확인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도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통일은 어렵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으로 확인하고 돌아온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주변강대국들도 크게 불안할 것이 없다. 특히 중국은 북한이 생존하는 분단체제의 존속이 절대 필요하다고 믿는 것 같다. 그리고 일본도 현상유지를 환영한다고 본다. 한편 미국은 한반도의 통일에 반대할 이유가 가장 없다고 할 수 있는데, 다만 남북한 관계의 개선에 따라 주한미군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점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주한미군은 북한에 대한 억지력 기능 이외에도 동북아지역 세력균형이라는 전략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북한 자신도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다소 모호한 입장을 나타내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남북한의 군사력은 현재의 균형상태에서 남한의 우위 상태로 바뀔 전망임을 감안하면 북한은 주한미군의 역할 문제를 다시 생각할 수도 있다고 본다.

앞으로의 전망은 긍정적 가능성과 부정적 가능성이 동시에 혼재하는 희망적이면서도 위험스러운 시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복합적인 상황에서 우리들은 우선 지나치게 단순한 개념 또는 슬로건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통일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또 그렇다고 통일을 포기해서도 안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남북이 모두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사회로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전쟁위협부터 제거해야 한다. 6월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단 한번의 정상회담이 반세기에 걸친 군사적 대결상태를 한꺼번에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진심으로 군사적 대결구조를 완전히 해체하기로 결심했다고 하더라도 군비축소는 일정한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과정은 자연히 어느정도의 위험부담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만일 김정일 위원장 또는 김대중 대통령이 군비축소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군비축소와 같은 양적 접근 대신에 군비통제 같은 질적 접근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군비통제도 당사자들의 어느정도의 상호신뢰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우선은 신뢰구축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남북관계에서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노력해나가야 할 분야가 바로 상호 신뢰구축과 군비통제 분야라고 생각한다. 전쟁을 방지하겠다는 도덕적 정열과 풍부한 상상력 그리고 예리한 기술적 지식이 모두 필요한 분야다.

평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다보면 통일은 안해도 된다는 그릇된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통일만이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분단상태에서의 평화는 항상 긴장된 평화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남북간에 정통성을 독점하기 위한 경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통일을 지향하는 것도 문제다.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통일논의는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기만일 수 있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보면 남북 인민들이 서로 왕래도 못하는 상태에서 연방제니 국가연합이니 하는 개념들은 실현가능성이 없는 공론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이 실천적인 개념이 되려면 우선 남과 북 사이에 굳게 닫힌 문이 열려야 한다. 물론 북한정권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해주면 북한 통치자가 안심하고 문을 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실제로는 북한이 자체의 필요에 의해서 북한사회를 조금씩이라도 개방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경우에도 그 개방의 폭과 정도는 지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통일이 평화적인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면, 우선 필요한 것은 북한사회의 창문을 여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과 북의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통일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통일로 가는 길은 길고도 험난할 줄 안다. 무력통일을 배격하는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은 남한과 북한 사회가 서로 통합(integration)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통합이 가능할는지 또는 통합이 통일을 가져올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통합의 과정이 진행된 다음 어느 단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독자적인 두 개의 주권국가가 용해되어 통일된 단일국가로 탄생되는지 아무도 경험적 지식을 가진 사람은 없다. (정치학에서 논의되는 통합이론은 암시하는 바는 많지만 통일과정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평화통일을 선택한 순간부터 우리는 통합에 의한 통일을 지향한 것이다. 독일도 생각해보면 통합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동독의 급작스런 붕괴로 통일이 먼저 오고 통일 후에 오랜 통합의 과정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도 독일과 같은 예기치 않았던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만일 그와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는 우리의 통일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통일의 기회를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많지도 않고 그러한 상황을 원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고 본다.

이제 통일로 가는 길은 열린 셈이다. 남북간의 군비통제와 신뢰구축, 경제협력과 북한사회의 개방, 남북간의 통합, 그리고 주변강대국들의 설득과 협조. 불가능한 이상주의자의 아젠다(agenda)가 아니다.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물론 보장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