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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분단시대에서 통일시대로

 

발제: 6·15선언 이후의 분단체제 극복작업

 

 

백낙청

서울대 영문과 교수·『창작과비평』 편집인

 

 

통일시대와 분단시대

이번 남북정상회담과 6·15 평양선언으로 분단시대가 끝났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는 물론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최소한 국가연합의 형태라도 성립하기까지는 분단시대가 지속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통일국가 선포라는 일회성 사건보다 분단체제를 좀더 나은 체제로 만들어가는 ‘지속적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중시할 경우, 그러한 통일작업은 정상회담 전에 이미 진행중이었고 회담 이후에는 ‘통일시대’라는 표현이 더욱이나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위에 ‘분단시대’를 말했을 때와는 다른 기준을 적용한 말이므로 앞서의 명제와 상충되지 않는다.

혼란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시기를 이렇게 ‘통일시대’ 겸 ‘분단시대’로 특징짓는 것은,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과제가 그만큼 특이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작년말에 쓴 글에서 나는, “한반도의 대다수 주민이 지금의 분단체제보다 나은 체제 아래 살게 되는 과정이 통일작업의 핵심이고, 그 과정이 어느정도 지속된다면 단일형 국민국가의 선포 여부는 하나의 부수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새 발상」, 『통일시론』 1999년 겨울호 107면)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실은 단일형이 아닌 복합형(예컨대 연방제나 국가연합)의 선포일지라도 그것이 어떤 과정의 일부로 실현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정상회담의 결과로 통일작업이 본격화하는 시기일수록 우리는 촛점을 분단체제를 실질적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에 두고, 분단시대 속에 무르익어가는 통일시대, 통일시대 속에 잔존하는 분단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민중이 참여하는 통일작업과 국가연합 단계

분단체제극복이라는 목표에서 베트남식 통일과 독일식 통일을 모두 배제되는 것은, 그 어느 경우든 한반도 주민에게 지금보다도 오히려 못한 삶을 안겨줄 확률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즉 무력통일이나 흡수통일 시도는 첫째 전쟁의 재발로 민족의 파멸마저 초래할 위험이 지대하고, 만의 하나 전면전을 피하고 ‘독일식 통일’이 이뤄진다 해도 통일독일과는 달리 수습불능의 경제파탄과 사회혼란으로 귀결하기 십상인 것이다. 민중이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창의력과 주도성을 발휘할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의 최고권력자들이 만나 협상과 협력으로 통일을 이룩하기로 합의한 것은 민중의 통일작업참여를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마련한 셈이다. 여기에 6·15선언은 제1항에서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나가기로 했다”고 명시함으로써 외세보다 남북 당사자의 주도력을 최대한 행사하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당국자들간의 ‘자주적 협상’이 곧 민중이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통일작업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베트남과 독일에 이어 또하나의 통일 사례로 남북 예멘의 경우가 있다. 저들의 협상통일은 당국자간의 ‘담합통일’이었는바,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담합이 깨지면서 일시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어쨌든 통일의 성공사례로 남은 것이 사실이다.

남북한의 경우 그런 식의 담합 자체가 쉽지 않겠지만, 담합했다가 깨질 때 일어나는 충돌도 전혀 다른 규모일 것이다. ‘협상통일’이라도 관·민이 함께하는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형성된 현실을 당국자들이 추인하는 모양의 협상통일이라야 할 까닭이 여기 있다. 그 점에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한 선언문 제2항을 나 역시 높이 평가한다. 남북 정상이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찾아냈다는 사실도 획기적이지만, 너무 성급히 완전 합의를 이루지 않음으로써 민중들 스스로 앞일을 검토하고 준비할 공간을 남겨놓았다는 사실이 진정 값진 성과인 것이다.

이 공간을 제대로 활용할 때 남북은 김대중 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 중 첫 단계에 해당하는 ‘남북연합’을 공식적으로 거치든 안 거치든, 조만간 ‘국가연합’ 단계로 나아가리라고 추측해본다. 그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나의 종전 주장을 되풀이하건대, “구체적으로는 남북 현정권의 일정한 안정성을 보장하고 남북간 주민이동의 적당한 통제를 인정하는 국가연합 형태말고는 다른 합의의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물론 이 정도의 변화에 대해서도 남북한 기득권세력들의 엄청난 저항을 각오해야 한다.(…)그러나 분단체제의 영구화 시도나 그 급격한 붕괴가 모두 위험천만이라는 현실인식이 확산될수록 이런 국가연합이야말로 남북한의 다수 민중과 기득권층내 합리적 분자들이 두루 수긍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 떠오르리라 본다. 그것은 통일사업에 대한 민중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인 동시에, 흡수통일 저지를 일차 목표로 삼는 북의 기득권층이나 흡수통일의 비용을 염려하는 남의 기득권층에도 차선의 방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같은 글 109면)

 

세계경제와 ‘민족경제’

공동선언문 중 해석하기에 따라 2항 못지않게 의미심장한 것이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킨다는 제4항이다.

아마도 북쪽 당국은 북의 현체제를 기본적으로 유지한 채 남북경협 및 미·일과의 교류확대를 통해 남북간의 경제력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그리하여 남한과 대등하거나 가능하면 남한을 능가하는 경제를 건설하는 데─주안점을 둘 것이다. 반면에 남의 대기업이나 정부측에서는 주된 기준을 남한 자본의 국제경쟁력에 두고, 이를 위해 북의 우수한 노동력과 저렴한 공장시설 등을 활용함으로써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균형적인’ 상태를 만들어주는 정도로 해석하려 할 듯하다.

어느 경우건 ‘민족경제’라는 낱말을 가령 고 박현채(朴玄埰) 교수를 비롯한 일군의 논자들이 70〜80년대에 주장하던 ‘민족경제론’과 일치하는 뜻으로 쓰고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경제의 현실을 볼 때 ‘내포적 민족경제’ 개념은 세계화의 폐단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편은 될지언정 그 자체로 현실성있는 목표가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그 점을 인정한다 해도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조항은 이론과 실천 면에서 모두 중요한 도전을 함축하고 있다. 가령 남북 당국의 서로 다른 속셈만 하더라도, 각자의 취지는 비교적 간명하지만 그것이 ‘협력’으로 나타날 경우, 더구나 통일정부가 없는 상태에서의 ‘협력’으로 나타나야 하는 경우, 어떤 결실이 가능할까? 세계시장의 대세를 생각할 때 북측 통제경제체제의 엄격한 고수는 불가능하리라 보아야 옳다. 하지만 북쪽 정권의 일정한 안정을 전제한 ‘협력’을 추진하는 한, 남한(및 외국) 자본의 일방적인 주도 또한 어렵게 마련이다.

바로 이러한 길항상태에서─국가구조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남북의 민중이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에 관해 개입하고 창의력을 발휘할 틈새가 생긴다. ‘국민경제’도 실질적으로 없어지고 전일화된 세계시장만 남았다는 것이 주류이론을 이룬 현싯점에서, ‘민족경제’에 어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두 개의 국가지만 하나의 민족이 거주하는 한반도지역의 경제를 통칭하는 데 편리한 단어가 ‘민족경제’일 뿐이라고 간단히 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북의 경제협력이 원활하게 진행되는 ‘한반도지역의 경제’란 그리 간단한 물건이 아니다. 남북 어느 쪽의 주민도 아닌 수많은 한인들도 참여하는 영역이 될 것이 분명할뿐더러, 미·일·중·러와의 경제협력, 동아시아 내지 동북아시아의 지역협력 또한 획기적으로 진전되는 현장의 일부가 되게 마련인 것이다. 이는 실천면에서도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이미 택한 홍콩과 중국 간의 경제협력이라든가 일국양제 채택 여부와 관계없이 진행중인 대만과 본토의 ‘양안(兩岸)교류’하고는 또다른 모형을 창안할 것을 요구한다. 동시에 세계화의 대세 속에서 ‘민족경제’ 및 ‘국민경제’ ‘지역경제’ 들이 갖는 의미를 이론적으로 새로 정리할 필요성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체제극복은 진작에 끝장난 냉전체제의 잔재를 뒤늦게 청산하고 근대국가의 체통을 갖추는 ‘남의 뒤 따라가기’만이 아니고, 현단계 세계사에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를 개척하는 일임을 여기서도 실감할 수 있다.

 

‘도둑같이’ 찾아올 통일

정상회담 직전의 어느 간담회에서 나는 기독교 복음서의 표현을 원용하여 통일은 도둑같이 오리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8·15가 대다수 우리 민족에게 하나의 ‘깜짝쇼’처럼 찾아왔듯이 통일도 그런 뜻밖의 사건으로 오리라는 말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때는 정녕코 우리가 잠든 사이에 ‘해방’이 도둑같이 왔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해방을 놓치고 통일국가건설을 놓쳤으며 뒤이어 평화적 생존마저 도둑맞고 말았던 것이다.

통일이 도둑같이 온다는 것은, 통일이 일제의 항복과 같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분단체제극복의 과정임을 전제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들의 만남을 포함한 여러가지 작업을 통해, 남북기본합의서에 이미 명시된 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한 관계”로서의 남북관계가 꾸준히 확대되어가다가, ‘자 이만하면 국가연합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겠나, 그렇게 불러버리자’라고 쌍방이 합의하는 날, 통일과정에서의 결정적인 단계가 이미 성취되었음을 문득 깨닫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취가 우리 국민, 우리 민족이 잠깨어 있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분단체제극복으로서의 통일은 원래, 남북 각각의 사회가 분단된 상태에서도 가능한 일상적인 삶의 개선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는 ‘단기 목표’와, 세계체제 전체를 좀더 나은 체제로 바꾸는 ‘장기 목표’ 사이에 놓인 ‘중간 목표’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남한사회 내에서 통일운동과 직접적인 연관 없이 진행되어온 갖가지 개혁작업─군사독재정권의 타도에서부터 지역주의 타파, 인권신장, 부패추방, 언론개혁, 환경보호, 성차별 철폐, 빈부격차 축소 등등을 위한 수많은 싸움들─이 모두 ‘제대로 된 통일’의 필수적 요건이다. 동시에 이런 문제들이 분단체제가 남한사회에서 작동하는 구체적인 양상이면서 더 크게는 세계체제의 모순이 분단체제를 매개로 남한에서 구현되는 양상이기도 함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이들 개혁작업이 거둘 수 있는 성과는 극히 한정되기 마련이다. 새로운 인류문명 건설이라는 원대한 기획과 한반도에서 분단체제보다 나은 체제를 건설한다는 조금 더 근접한 과제를 남한땅에 사는 개개인의 그날그날의 싸움과 동시에 수행하는 일이야말로 세계사적 위업을 수행하는 국민이자 민족으로서 우리가 잠깨어 있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