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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분단시대에서 통일시대로
교류·협력 시대에 되돌아본 남북한 도시화
장세훈 張世薰
국회도서관 입법정보연구관.
1. 남북한의 도시화, 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 6월의 남북정상회담은 그동안 가려졌던 북한의 또다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북한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바로잡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따라서 이번 회담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남북한간의 동질성과 차별성을 구명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반쪽짜리 사고’ ‘외눈박이 인식’에서 벗어나 좀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남북한 도시화과정을 비교함으로써, 분단 이후 우리의 도시생활이 얼마나 달라졌고, 또 함께 공유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그런데 남북한의 도시화에 관한 기존 연구는 이념적 장벽과 자료의 제약에 부딪혀 아직도 걸음마 수준인데다가, 포괄적인 단순비교 방법에 기초해 남북한의 이질성만을 부각시킴으로써, 극심한 경쟁 속에서 ‘욕하면서 서로 닮는’ 동질화 과정에 눈감아왔다. 따라서 남북한의 도시화과정을 시기별로 비교하는 역사적 비교분석 방법에 입각해서 양자의 차별성과 동질성을 균형있게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과도한 체제경쟁으로 남북한 사회가 공히 주민을 배제하는 기형적인 도시화과정을 겪었다는 점에 주목해서, 주민의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도시화과정을 평가하고 향후 도시화의 방향을 제시할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남북한 도시화의 전반적인 추이를 점검하고, 시기별로 도시화의 특성을 비교한 후, 최근의 화해분위기 속에서 남북한이 함께 추진해야 할 바람직한 도시화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2. 남북한 도시화의 추이
도시의 인구집중
도시화가 산업화와 긴밀히 연계되었다는 점에서, 도시의 인구집중은 산업화 추이와 관련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남한은 1950년대까지 외국의 원조로 전재(戰災) 복구에 주력할 뿐,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하기에 역부족이었고, 도시화도 해방·전쟁 등과 같은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발생한 난민들이 도시로 몰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1960년대부터 일자리를 찾는 농촌 유휴인력의 도시 유입이 도시화의 주류를 형성하는 등 도시화 추세가 바뀌었다. 물론 당시는 초기산업화 단계였기 때문에, 이농민이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고 자리를 잡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산업화를 통해 새로운 취업기회가 쉴새없이 만들어지면서, 이들은 희망을 갖고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특히 국가에서 경공업을 먼저 발전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기 때문에, 농촌 출신 미숙련노동자도 어렵지 않게 도시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이농을 부추김에 따라, 1960년대 전반기까지는 연평균 20만명 안팎이던 이농민이 1960년대 후반부터 연평균 50〜70만명 규모로 크게 늘어났고,1 1967년부터는 농가의 절대 수가 줄어드는 양상마저 나타났다. 그 결과 도시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해서, 1949년 17.2%였던 도시인구의 비중이 1980년 57.3%로 늘어났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이농의 규모나 비중이 감소하면서 도시화 속도가 상대적으로 둔화되었지만, 도시화 추세는 꾸준히 이어져 1995년 현재 도시화율은 78.5%로 선진국 수준에 육박했다.
이에 비해 북한의 산업화와 도시화는 중앙정부의 철저한 계획에 입각해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정치·군사적 요구가 강하게 작용함으로써 산업화의 방향이 생활필수품을 생산하는 경공업보다도 군수산업의 기초가 되는 중공업을 육성하는 쪽으로 정해졌다. 이에 따라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휴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기존의 공업도시 및 북부 내륙지역을 중심으로 중공업화가 추진되면서, 국가에 의한 노동인력의 공급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53년 17.7%로 남한과 비슷했던 도시인구의 비중이 급상승해서 1960년 40.6%, 1970년 54.2%로, 남한의 그것과 10%포인트 이상의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경제성장의 동력이 떨어지면서, 도시화 속도가 늦춰졌다. 이에 더해 도시인구의 급증에 따른 정치적 혼란을 우려한 나머지, 사회안전부가 나서서 도시로의 인구집중을 철저히 통제해나갔다. 심지어 평양인구 100만명 감축계획이나, 도시주민 200만명을 농촌으로 이주시키는 주민재배치계획과 같이 도시인구를 소개시키는 강력한 정책수단을 강구하기도 했다.2 그 결과 1970년대 이후 20여년 동안 도시화율이 5% 가량 증가하는 데 그쳐, 1993년 현재 북한의 도시화율은 60%를 갓 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처럼 분단 이후 도시화는 가파르게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1950〜60년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던 북한의 도시화가 1970년대 이후 정체된 반면, 남한은 1960년대 이후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힘입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그 결과 초기에는 북한에 뒤처졌던 남한의 도시화율이 1980년 북한을 앞질렀고, 1995년에는 20%포인트 가까운 커다란 격차를 보여주었다.
도시화와 도시의 위상 변화
도시화는 단순히 인구증가와 공간확장이라는 차원뿐만 아니라, 도시가 전체 국토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라는 차원에서도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특히 남북한을 비롯한 개발도상국가에서 도시와 농촌 간, 또 대도시와 중소도시 간 격차가 벌어지는 지역간 불균등발전이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와 관련해 볼 때, 남한은 광범위한 이농으로 도시화가 급진전됨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인 정책대안을 마련하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네 차례의 국토(개발)종합계획에서 지역간 균형개발은 주요 정책과제로 제기되었지만, 경제성장이라는 상위 정책목표에 짓눌려 ‘구두선(口頭禪)’에 지나지 않았다. 1980년대에 서울을 위시한 수도권의 과밀 문제가 심각해지자 수도권 집중을 억제하기 위한 각종 대책이 폭넓게 실험되었지만, 이 역시 대도시 집중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인 미봉책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1949년 총인구의 7.2%에 지나지 않던 서울의 인구는 1970년에 이미 17.6%에 달했고, 1990년에 24.4%로 그 정점에 이르렀다가, 1995년에야 비로소 22.9%로 다소 완화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서울의 인구가 수도권으로 분산되면서, 수도권 인구의 증가추세는 여전히 지속되어 1995년 현재 전체 인구의 45.3%가 수도권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또한 서울특별시와 6대 광역시의 인구가 총인구의 절반에 달해, 전체 도시인구의 2/3가 대도시지역에 집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대도시의 과밀화, 농촌의 과소화라는 지역 양극화 현상이 극심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에 비해 북한은 도·농간 및 지역간 균형개발을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추진해왔다.3 이미 1952년에 군 단위로 지방공업을 육성해 직·주근접(職住近接)적·자족적 생활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주의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농촌개발방식을 채택한 바 있다. 또한 주요도시가 해안지역에 집중된 왜곡된 공간배치를 바꾸기 위해 불모지나 다름없는 내륙지역에 신도시들을 대거 건설했다. 아울러 북부 내륙지역의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대공장노동자들의 공동생활공간으로 노동자구(勞動者區)를 건설해서 지역의 균형개발을 꾀했는데, 1982년에 이미 197곳이 설치되었고, 1995년에는 256곳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낙후지역 개발과 아울러 대도시 인근에 소규모의 자족적인 위성도시를 대거 건설해서, 대도시 인구와 시설의 분산을 꾀하기도 했다.
이처럼 적극적인 지역개발정책은 대도시 과밀 문제와 농촌지역 저개발 문제를 해소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예컨대 평양의 경우, 주변의 농촌지역을 포괄해서 도·농 통합시의 형태를 취해 행정구역 면적은 서울의 네 배에 달하지만, 총면적의 5%만 시가지로 조성되어 인구는 서울의 1/3 수준이고, 인구집중도도 서울의 22.9%에 비해 크게 낮은 13.4%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평양의 1km2 당 인구밀도는 1178명으로, 1954명인 남한의 대전광역시보다 낮으며, 서울의 1만 7532명의 1/15에 불과하다.4 이는 남한의 40% 수준인 북한의 인구밀도에 비추어보더라도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또한 대도시인구의 비중이 남한의 절반 수준에 지나지 않는 등 대도시의 인구집중이 그리 심각하지 않다.
그러나 철도·도로·에너지원 등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가 부족한데다가 낙후지역이 자족경제를 꾸려갈 만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까닭에, 가내수공업 수준의 낙후된 지방 공업시설의 절반 가량이 가동되지 못하는 등5 ‘지역개발의 하향평준화’ 현상을 가져왔다. 또한 도시로의 인구집중은 어느정도 억제했지만, 평양·청진·안주 지역에 전체 공장의 45% 이상이 몰려 있고, 평양─남포간 및 평양─사리원간 지역이 대도시권화되는 등6 대도시 과밀 문제가 해소되지 않고 있다. 특히 전시행정의 일환으로 평양 등 일부 도시를 집중적으로 개발함에 따라 주민들의 생활상의 격차가 심화되었다. 단적인 예로 평양의 경우는 공공임대주택인 ‘영구주택’의 비중이 85%에 달하는데, 직할시는 그 비율이 20〜40%이고, 일반 시는 10%, 그리고 농촌지역은 전혀 없는 등7 대도시와 중소도시간, 또 도·농간의 삶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남한의 도시화는 지역간 격차를 방임함으로써 지역간 불균등발전을 확대재생산한 반면, 북한의 도시화는 적극적인 대책으로 어느정도 지역간 균형성장을 달성했지만, 도·농간 균형 및 대도시 분산에는 성공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남북한의 도시화는 도시와 농촌, 그리고 대도시와 중소도시의 주민 모두에게 과밀·과소의 사회적 비용을 안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
3. 남북한 도시화과정의 비교
자본주의적 도시화와 사회주의적 도시화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에서 보듯이, 도시는 해당 사회가 지닌 문명의 총화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는 도시공간에 표현되는 자본주의 문명과 사회주의 문명을 통해 서로 우위를 점하려는 남북한간의 대결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자유경쟁의 시장원리에 입각해서 도시공간을 구축하는 자본주의적 도시화의 길을 채택한 남한에서는 서구 자본주의 도시가 보여준 갖가지 양상이 재현되었다. 우선 효율성과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도시공간의 개발 및 이용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접근성이 뛰어난 도심지역에는 엄청난 지대를 부담하는 사무·업무시설과 유통·써비스시설이 들어선 초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이처럼 번화한 중심업무지역의 모습은 서울의 남대문로, 종로, 여의도 증권가나 테헤란로 등지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도심지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서울의 경우 북악산 기슭이나 신시가지로 개발된 강남지역, 또는 일산·분당 등의 신도시지역처럼 전망이 좋고 쾌적한 주거환경을 갖춘 지역을 중심으로 상류층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이들 지역에 선진국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던, 분양면적이 100평을 넘고 분양가가 20억원을 웃도는 ‘펜트하우스’(penthouse) 형태의 초호화판 아파트가 지어져 부유층의 새로운 주거공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리고 대도시에서 중산층 주거지가 시 외곽으로 옮겨가는 교외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전개되면서, 직·주분리(職住分離)에 따른 교통량의 폭증으로 출퇴근 시간의 교통혼잡이 심화되었다. 나아가 개인주의 이데올로기가 팽배하고 핵가족을 중심으로 한 생활양식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면서, 가족 단위의 사생활을 중시하는 아파트가 도시민의 주된 주거양식으로 자리잡았고, 자가용 승용차가 교통수단의 대종을 이루었다.
이처럼 남한의 대도시는 자본주의 도시의 화려한 외관과 활기찬 분위기를 한껏 뽐내며 자본주의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직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시외곽 미개발지역이나 재개발을 기다리는 시내 저개발지역에서 생존의 터전을 마련해야만 하는 노동자나 도시빈민층의 생활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토막(土幕)’의 형태로 존재하던 도시빈민층의 집단거주지는 ‘판자촌’ ‘달동네’ 등으로 이름만 바뀐 채 재생산되었고, 재개발정책으로 쫓겨난 철거민들은 시외곽 비닐하우스촌이나 도심 노후지역의 ‘쪽방’에 스며들어 자본주의적 도시화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장의 자율에 맡겨진 도시공간은 마구잡이로 개발되었다. 따라서 삭막한 도시에서 그나마 주민생활에 활력을 줄 수 있는 공지(空地, open space)나 각종 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해, 대다수 도시는 녹지율이 형편없이 낮은 실정이다. 또 최근 풍납토성이나 한옥보존지구의 무분별한 훼손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도시의 역사유물들도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다. 결국 남한의 도시화는 자본주의적 방식에 따라 물량 위주의 대단위 개발이 이루어져 도시의 겉모습은 화려해졌지만, 주민의 생활환경을 잠식하며 삶의 질을 위협하는 부작용을 초래한 것이다.
이와 달리 북한에서는 사회주의적 도시화의 원칙에 입각해서 도시공간 구조를 전면적으로 새롭게 건설해갔다. 이는 한국전쟁으로 전체 건물의 70〜80%가 파괴되어 기존의 도시공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전후 복구에 임할 수 있었던데다가, 강력한 국가가 도시공간의 개발 및 이용을 계획하고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에 더해 전후 복구과정에 적극 참여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평양·함흥·순천·원산·덕천 등의 도시를 하나씩 맡아 도시재건사업을 전담했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건축양식과 도시계획이 그대로 유입될 수 있었다.8 또한 외국의 지원이 어느정도 완료된 이후에도 북한정부는 한정된 재원을 도시개발에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계의 표준화·규격화, 건축자재 생산의 공업화, 건설의 기계화를 적극 추진하면서, 사회주의적인 도시화 노선을 견지했다.
그 결과 북한은 남한과는 전혀 다른 도시공간을 만들어냈다. 우선 도심지에는 사회주의 이념을 상징하는 거대한 선전용 기념물과 주민의 교양·문화생활을 위한 광장·공원·미술관·박물관 등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었고, 이 시설들과 나란히 주거지도 조성되었다. 평양에서는 김일성광장과 주체사상탑을 잇는 승리거리를 중심으로 만수대의사당 등과 같은 행정관청과 인민대학습당·평양학생소년궁전 등이 배치되었으며, 다른 중소도시에서도 역전광장이나 김일성동상 등을 중심으로 행정기관 및 공공·문화시설이 도심지에 들어섰다.9 따라서 도심지의 건물밀도가 주거지의 그것보다 오히려 낮은가 하면, 주·야간에 인구밀도가 달라지는 ‘도심 공동화(空洞化)’ 현상도 북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주거지는 단순한 거주공간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공동체생활의 중심지로 꾸며졌다. 이는 소련이나 동구에서 건설된 자족적 생활공동체인 ‘도시 소구역’(mikrorayon)을 본떠 만든 ‘살림집 소구역 제도’에서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10 살림집 소구역은 도시 주거지를 5〜10만평 규모로 나누고 여기에 인구 1〜2천명이 거주할 수 있는 주거공간을 조성하되 공동주택과 주거생활에 필수적인 도시 기반시설과 소규모 경공업공장 등을 배치함으로써 주민들의 생산활동 및 주거생활이 함께 이루어지도록 한 자족적 도시공간을 가리킨다. 육아·취사 등 가사활동이 주거단지내 집단써비스시설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함으로써 사회주의적 공동체생활이 가능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주택단지 인근에 경공업공장들을 세우거나 고층아파트의 1층을 상가로 활용해서 생산·써비스 활동이 함께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처럼 직·주근접의 원칙에 충실함으로써 도시내 인구이동이 적고, 또 지하철·무궤도전차 등 대중교통수단이 시내교통의 주종을 이루어 북한의 도시는 상대적으로 한적한 인상을 풍긴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계획적 공간배치로 과밀 문제와 거대도시화에 따른 사회적 손실 문제를 어느정도 비켜갈 수 있었다. 그러나 조립식건축이 횡행해서 대도시에는 고층아파트가, 중소도시에는 이른바 ‘하모니카주택’ ‘땅집’ 등으로 불리는 연립주택이 건설되어, 도시경관이 단조로워졌을 뿐 아니라, 주민이 배제된 채 획일적으로 주거공간이 조성됐다. 또한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전시용 건축물을 도시 곳곳에 조성함으로써 도시공간을 낭비하는 폐단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도시계획의 이상도 구현되지 못했다. 즉 살림집 소구역 건설을 통한 사회주의 공동체 조성방안이 수립되었지만, 평양의 경우에도 80% 이상의 주거지가 이 계획에 따르지 않은 채 대로변 좌우 양쪽에 둘러막기 방식으로 주택단지를 조성하고 그 내부에 단층의 하모니카주택을 건설하는 형태를 취했으며, 지방의 중·소도시에서는 이러한 계획이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11
결국 남한이 자본주의 이념을 쫓아 개인주의적 생활이 이루어지는 수많은 ‘밀실’로 구성된 ‘시장의 도시’를 건설했다면, 북한은 사회주의 이념에 기초해서 공동체생활이 이루어지는 ‘광장’으로 구성된 ‘계획의 도시’를 조성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도시주민들의 사회적 합의에 근거해 이들의 삶의 질을 총체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으로 도시화를 진행하지는 못한 것이다.
권위주의적 도시화
1970년대초 남한의 군부정권이 삼선개헌과 유신을 거쳐 권위주의체제를 공고히했듯이, 북한도 중소분쟁 등을 거치면서 사회주의 이념을 독자적으로 재해석한 ‘주체사상’을 체계화해서 권위주의체제를 한층 다져갔다. 따라서 그 이전까지 서로 다른 도시화의 길을 걷던 남북한은 권위주의적 도시화라는 공통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대형건축물을 경쟁적으로 도시 곳곳에 건설해서 정치권력의 강고함을 과시한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사회주의 이념을 담아 평양 한복판에 건설된 김일성광장에 자극을 받아 모스끄바의 끄레믈린(Kremlin)광장이나 뻬이징의 톈안먼(天安門)광장에 버금가는 대규모 광장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남한의 군부정권 내에서 제기되었고, 그 결과 이미 수립된 여의도종합개발계획을 수정하면서까지 정권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5·16광장을 1971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85년 완공 당시 ‘동아시아 최고층빌딩’으로 일컬어진 63빌딩에 대응하기 위해 북한에서는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105층 규모의 유경호텔 건설에 착수했다. 그러나 정치적 동기에서 무리하게 건설되던 유경호텔은 극심한 경기침체로 1990년 공사가 중단되어 평양의 흉물이 되고 말았다. 또 1978년 건립된 서울의 세종문화회관을 염두에 두면서 북한에서는 그 3배의 규모를 자랑하는 인민대학습당을 1980년 설립한 바 있다.
이러한 대형건축물 건립경쟁은 남북한간 체제경쟁의 한 단면이지만, 권력의 정치적 정당성을 대내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도시공간을 활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시형 건축물을 주축으로 한 당시의 도시공간 구조는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의 연장(延長)에 다름아니었다.
권위주의적 도시화의 또다른 모습은 극소수 권력엘리뜨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도시의 공간배치가 결정된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1971년부터 서울을 비롯한 남한의 주요대도시 외곽지역에 설정된 개발제한구역, 이른바 ‘그린벨트’가 대표적이다. 자연환경 보전 및 대도시 확장 방지라는 목적 이외에 국가방위상의 목적이 컸기 때문이지만,12 개발제한구역 제도는 기획 및 지정 단계부터 대통령이 직접 관장했다. 또 30여년간 단 한 평의 토지도 해제하지 않으면서 구역내 토지이용에 대해 대통령이 일일이 간섭함으로써, 개발제한구역에 관한 한 ‘대통령은 건설부 6급 주사’라는 비아냥 섞인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중화학공업화 과정에서 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산골 오지였던 경북 구미를 통치권자의 의중을 내세워 전자단지로 지정하고 신흥 산업도시로 개발한 것도 또하나의 사례이다.
이러한 관행은 북한에서도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즉 북한의 모든 정책이 그러하듯이, 도시정책도 성문화된 법률과 합리적 준칙에 의거하기보다는 최고지도자의 현지교시에 의해 추진되었다. 특히 1970년대부터 김일성(金日成)은 전국의 주요도시를 직접 시찰하면서 그 발전방향에 관해 현지교시를 내린 바 있고, 이에 근거해서 이들 도시에서 시가지 정비 및 현대화, 문화도시 육성과 혁명도시 건설 등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도시화로 인해 개성있는 도시공간을 자유롭게 조성하는 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고, 도시공간이 일정한 틀에 따라 규격화되었다. 예컨대 남한의 군부정권은 1970년대 후반 아파트 공급과 관련해서 강력한 분양가 규제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주택투기를 억제하고 무주택 서민층이 집을 마련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으며, 아파트 사전분양 제도와 결합해서 주택공급을 활성화한 장점도 없지 않지만, 모든 주택건설업체가 ‘붕어빵 찍어내듯이’ 동일한 주거구조의 아파트단지를 건설하도록 강요했다. 그 결과 아파트는 생활의 편의성과 근대적 주거양식에 대한 대중의 호감 탓에 도시의 대표적 생활공간으로 자리잡아갔지만, 아무런 개성이 없는 똑같은 형태의 아파트들이 도시를 뒤덮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양상이 더욱 확연했다. ‘건설의 공업화’라는 구호 아래 주택의 대량생산 및 주택건설의 경제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설계의 표준화와 규격화, 건축자재 생산의 기계화, 조립식 공법에 의한 공동주택 건설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동일한 설계도면에 따라 공장에서 생산된 똑같은 건축자재로 조립식으로 지어진 대도시 고층아파트나 중소도시 연립주택은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띨 수밖에 없었다. 특히 주민의 사회적 동원 및 통제가 용이하다는 이유로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선호되면서, 주거공간의 규격화 및 획일화 추세는 더욱 가속되었다.
마지막으로 남북한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군사적 대치정국의 상황에서 도시를 ‘병영형 도시’로 변모시켰다. 먼저 남한에서는 북한의 탱크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던 한국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 북부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대전차 방어용 시설물들을 잇따라 설치했다. 서울 은평구 유진상가, 도봉구 도봉시민아파트 등의 일반 상가나 주거지가 이러한 목적으로 지어졌고, 일산 아파트단지처럼 도시 자체가 유사시 남침을 저지할 보루로 설계되기도 했다. 또한 1968년 1·21사태로 수도 서울의 허술한 방위가 문제됨에 따라 수도권 방어 차원에서 1971년 서둘러 개발제한구역을 설정한 것도 ‘병영형 도시’ 건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양태는 북한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전쟁에서 제공권을 빼앗겨 미군의 폭격에 무력하게 당한 경험에 비추어, 평양의 지하철은 지하 100m에 건설되고 곳곳에 기밀문이 설치되는 등 공습대피 목적으로 설계된 흔적이 역력하다. 또 도시내 토지이용을 보더라도 평양 등 5대 도시에서 상업지 비율은 2.3%에 지나지 않는데 군용지는 4.9%를 차지하는 등, 군사시설이 도시의 주요 시설물로 자리잡았다.13
이러한 권위주의적 도시화는 극심한 체제경쟁 상황에서 도시공간의 근대화를 앞당긴 측면도 있지만, ‘밑으로부터의’ 요구에 무감각했던 까닭에 도시주민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 남한에서 ‘도시 미화’나 ‘토지의 효율적 활용’이라는 미명 아래 아무런 대책도 없이 도시빈민층의 생활 터전을 빼앗는 무차별적인 철거·재개발 정책이나, 공권력을 앞세워 30여년 동안 개인의 재산권 행사를 억누른 개발제한구역 제도는 그 폐단을 웅변해준다. 또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을 상징하는 대형 기념물이나 건축물을 모든 도시에 세우고, ‘혁명의 도시’ ‘공원 속의 도시’ 등의 구호를 내세워 평양에 ‘호화판’ 아파트단지 등을 잇따라 조성했는데, 이는 그나마도 부족한 투자 재원과 건축자재 분배가 편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중앙난방식 급탕시설까지 갖춘 고급 살림집에 거주하는 당·정의 고급간부들과 달리 노후한 소형아파트나 하모니카주택, 땅집에 거주하는 대다수 주민들은 무연탄이나 장작으로 난방과 취사를 해결했고, 상수도 및 화장실을 공동으로 이용해야만 했으며, 그나마 주택이 제대로 배급되지 않아 결혼 후 몇년씩 친·인척이나 동료의 집에서 방 한 칸을 빌려사는 ‘겹방살이’ 혹은 부부가 직장별로 따로 거주하는 별거생활을 하는 경우가 흔했다. 이처럼 주거생활에서 계층간·지역간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평양에서조차 계층별 주거지 분화현상이 일어나는 등,14 사회주의 도시화의 기본원칙이 훼손되었다.
결과적으로 권위주의적 도시화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경로를 밟아온 남북한 도시화의 차별성을 희석시켰지만, 도시주민의 관점에서는 도시화를 더욱 파행적인 방향으로 몰아가기에 이른 것이다.
탈권위주의적 도시화로의 전환?
1990년대부터 권위주의적 도시화에서 벗어나려는 조짐들이 서서히 나타났는데, 남한에서는 1987년 이후의 정치적 민주화가 계기가 되었다. 먼저 군부 권위주의정권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5·16광장은 여의도광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광장의 시커먼 아스팔트를 걷어낸 자리에 나무와 인공언덕으로 꾸민 ‘녹색공간’으로 조성되어 1998년 여의도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또 일반 시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권위를 지키려던 정치권력이 청와대 앞길과 국회의사당을 개방해서 시민들에게 성큼 다가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초고층빌딩을 국가의 권위와 번영의 상징으로 여기던 권위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 도심의 초고층빌딩과 주상복합건물의 건축을 무분별하게 허용하고 조장하기보다는 교통영향평가 등을 통해 좀더 신중하게 검토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행정적 합리성의 틀을 벗어난 비공식적인 정치적 개입이 줄어들고, 도시공간을 획일화하던 각종 행정규제들이 완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국민의 정부’가 단행한 개발제한구역 해제조치를 들 수 있다. 규제완화의 절차가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전개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도시 녹지의 훼손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이 조치는 환경정책의 후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막강한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한 군부정권의 잘못을 남북간의 해빙 분위기와 민주화 추세에 발맞춰 시정했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적 도시화로부터의 탈피를 뜻한다. 또한 도시주택 공급과 관련해서 1990년대 중반 이후 분양가 규제가 완화되면서, 주택건설업자들이 시장원리에 따라 분양가를 설정하고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아파트의 외관이나 공간배치가 다양해졌다. 이는 무주택 서민층의 내집 마련을 어렵게 하는 부작용도 있지만, 과거의 획일적인 아파트 공간을 좀더 다채롭게 하여 도시공간의 개성을 살려줄 것이다.
그러나 남한사회가 여전히 형식적 민주화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과도기에 있듯이, 도시공간이란 면에서도 권위주의적 도시화의 길에서 다소 벗어났을 뿐, 민주적인 도시화의 틀은 아직도 미완성 상태에 있다. 오히려 민주화의 와중에서 공익 차원의 국가개입마저 마비시켜 도시공간에 대한 모든 형태의 규제를 해제하려는 ‘자유화’의 움직임이 강화되었다. 최근 대도시 외곽 준농림지역의 난개발(亂開發) 사례나 수도권 집중에 대한 각종 규제의 완화 요구 등은 ‘민주화의 탈을 쓴 방종’으로서의 도시의 자유화 추세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도시공간을 둘러싼 사회세력들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으며, 도시빈민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층이 배제되고 도시공간에서의 사회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남한과 달리 북한은 정치적 민주화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시화의 방향 전환이 그리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도시화에서 탈피하려는 조짐은 엿볼 수 있다. 그 초기 조짐은 역설적이게도 주체사상이 등장한 1970년대에 나타났다. 즉 주체사상이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건축 분야에서도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건축양식이 새롭게 자리잡았다. 이에 따라 기념비적인 건축물에 기와지붕을 얹는 등 전통적인 건축양식의 실험이 이루어졌고, 서구형 공원의 틀에서 벗어나 북한의 자연·지리적 특성을 감안한 조선식 공원, 동방식 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15 이는 북한 도시의 경관을 또다른 방식으로 획일화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단조로운 사회주의 건축양식 일색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도시공간의 다양성을 모색하는 실험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더욱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정적 계기는 건축 및 도시공간에 대한 김정일(金正日)의 적극적인 관심에서 찾을 수 있다. 김정일은 건축을 하나의 예술로 봐서 ‘건축에서 반복은 죽음’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창조적 형식을 역설했다. 새로운 건축양식의 실험은 특히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대비해서 평양을 국제도시·문화도시로 재편하려는 시도와 맞물려 더욱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평양의 고층아파트단지에는 오각형·원형·S자형·Y자형·바람개비형·계단형 등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기묘한 형태의 건물들이 들어서고, ‘공원도시’ 조성 목적에 따라 공원 등 녹지 비중이 대폭 늘어나는 등 도시경관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16
그러나 도시경관의 다채로움이 ‘위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일률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양성의 허울을 쓴 획일성’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지나치게 형식미를 추구한 나머지 부정형적인 공간이 조성되어 자투리 공간이 낭비되는 비효율성을 낳았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실험은 지속적인 연구·개발 및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성공할 수 있는데, 여전히 구식의 빈약한 조립식 건축방식을 취하는 북한의 현실에서, 아파트의 경우 멋진 외관과 달리 내부에서는 벽체가 벌어지고 누수가 심해지는 등 누더기 집으로 전락하고 있다.17 이들 실험이 이처럼 밑으로부터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고 도시주민의 삶과 괴리된 채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적 도시화 추세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남북한에서 권위주의적 도시화의 틀을 벗으려는 움직임이 싹트고 있긴 하지만, 민주적인 도시화로 나아갈지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4. 남북교류와 도시화의 전망
남북협력을 통한 도시 건설 움직임
권위주의적 도시화에서 벗어날 새로운 도시화의 방향을 모색하는 최근 싯점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계기로 남북간 교류와 협력이 활발해지면서, 쌍방이 힘을 모아 새로운 도시를 조성하려는 시도가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남북간 경제협력의 움직임이 활기를 띠면서, 북한지역에 남한기업이 진출해서 새로운 산업도시나 관광도시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작년부터 시작된 금강산관광을 기반으로 금강산 주변지역을 ‘특별경제지구’로 지정해 관광단지 및 무역·금융·문화의 중심지로 육성하려는 계획이 구체화되고 있다. 즉 북한의 기술인력을 활용해서 가칭 ‘금강산밸리’로 불리는 첨단기술 연구·개발단지를 조성하고, 관광기념품 및 농수산가공품 등을 생산하는 경공업단지와 골프장·호텔·콘도·스키장 등이 들어서는 관광특구를 건설하는 방안이다. 또다른 한편에서는 해주 또는 남포·개성·신의주 등지를 대상으로 ‘서해안공단’으로 불리는 대규모 산업단지를 건설하고, 그 주변에 이를 지원할 산업도시를 조성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산업도시·관광도시 조성방안은 남북한이 공동으로 도시개발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그 의의가 적지 않다. 또 쌍방이 그간의 도시화과정에서 겪은 경험에 비추어 새로운 도시 건설의 모범을 선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자칫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진출하는 과정에서 경제성을 앞세워 환경파괴적이고 주민배제적인 도시화의 길로 빠져드는 오류를 되풀이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신중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남북 각 2km씩 동서로 약 250km나 뻗어 있어 총 3억평에 달하는 비무장지대를 평화시로 조성하려는 방안이 제기되고 있다. 비무장지대라는 명칭과 달리 이 지역은, 남북한이 중무장한 채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치한 까닭에 미개발지역으로 방치되어왔다. 따라서 비무장지대를 남북한이 평화적으로 공동개발하는 방안은 1970년대 초반부터 남북한 당국에 의해 경쟁적으로 제기되어왔다.18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 이산가족의 만남을 주선하고, 경제협력 및 학술·문화교류를 활성화하며, 민족통일을 위한 공동기구를 설치할 수 있는 장소로서 비무장지대 내에 평화시를 건설하는 방안이 수차례 제기되었다.
그간의 평화시 조성방안은 남북한 당국이 정치적 공세의 수단으로 제기하는 데 그쳐 누가 관리주체가 되고, 어디에 어떠한 형태로 건설할 것인지 등의 구체적인 실천계획이 마련된 바 없다. 특히 평화시는 국가간, 또는 국가와 국제기구 간의 협약에 의해 인정된 독자적인 정치적 실체로 기능해야 하는데, 남북한 대치상황에서 이러한 형태의 평화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최근의 남북화해 분위기가 지속되어 쌍방간의 군사적 신뢰관계가 구축된다면, 이를 기반으로 평화시 건설의 구체적인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6·15 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남북한이 공통의 통일방안을 모색하는 데 합의함으로써, 남북한 공동의 행정수도를 건설하는 문제가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서울과 평양은 남북 양측의 정치적 반발이나 인구집중 및 과밀의 심화 등의 문제로 인해 대상지역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따라서 비무장지대나 접경지역으로 묶여 그동안 제대로 개발되지 못한 휴전선 인근지역에 새로운 행정수도를 조성하는 방안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역사성과 상징성, 발전가능성 등을 기준 삼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후삼국시대 태봉의 도읍이었던 철원 등이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된다.19
특히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집중의 폐해가 심각하고, 정치·문화적 집중이 경제적 집중을 가속화하는 남한의 경우에는 새로운 행정·문화 중심지를 조성하려는 시도가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새로운 행정수도 건설은 정치·군사적으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남북한간의 긴밀한 협조와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남북한은 한 뿌리에서 출발했고 체제경쟁 과정에서 동질성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서로 이질성을 키워왔다는 점에서, 상호협력을 통한 새로운 도시 조성 시도를 서두르다가는 ‘게도 구럭도 모두 잃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잘못을 저질러서도 안될 것이기 때문에, 현재 논의되는 사업의 경우도 우선순위를 정해 점진적으로 공감대를 높여가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산업도시·관광도시의 조성은 민간의 참여를 통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지만 섣불리 추진할 경우 기존의 도시화 경로를 되밟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뒤로 미루고, 우선은 양측의 공공부문이 주도하는 평화시 조성에 주력해서 새로운 도시 조성의 모델을 만든 후에, 산업도시·관광도시 조성을 추진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행정수도 조성에 나서야 할 것으로 본다.
새로운 도시화의 방향: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도시 건설
최근의 화해분위기에 편승해 남북이 협력해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이처럼 다각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도시화의 방향과 관련해서는 체계적인 논의나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자칫 그간의 남북한 도시화과정에서 나타났던 파행적인 모습이 반복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남북한이 함께 추구할 도시화의 바람직한 방향을 새롭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남북한이 과도한 체제경쟁을 벌이면서 주민들을 배제하고 이들의 삶에는 무관심한 채 도시공간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함으로써, 그동안의 도시화는 굴절되고 왜곡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도시화는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도시를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는 지역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지역주민의 민주적인 참여를 통해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공간으로 바꿔나가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때 민주적인 도시화란, 주민이 제도적 장치를 통해, 지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풀어가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는 ‘위로부터의 강압’이 아니라 ‘밑으로부터의 요구’에 근거한 도시화라는 점에서, 기존의 권위주의적 도시화로부터의 탈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의 민주화는 최근 남한의 경험에서 보듯이 자칫 자율적인 조절장치를 갖추지 못해 방종과 혼란을 초래하는 쪽으로 흘러갈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주민참여를 활성화하면서도 이들이 공동의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갈등을 제도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다음으로 인간적인 도시화란 주민들이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생활환경을 가꿔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직·주근접의 원칙에 입각해서 생활공간과 생산의 장을 결합시킴으로써 주민들의 모든 생활이 가능한 한 지역공동체 단위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또한 지역간·계층간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도록 주민들의 삶의 질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각종 생활편익시설과 도시 기반시설을 체계적으로 정비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환경친화적인 지역개발방식을 채택해서 도시의 지역공동체가 지속 가능한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도시의 민주화는 새로운 도시화의 형식이고, 도시의 인간화는 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과 내용을 굳건히 결합시켜야만 남북한은 향후 파행적인 도시화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칫 서로의 이질성을 부각시켜 상대방의 도시화 경험을 도외시하는 우를 범하기보다는 서로의 역사적 경험을 지양하고 새로운 도시화 모형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권위주의적 도시화에서 탈피하여 시민사회의 성장을 바탕으로 새롭게 민주적인 도시화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남한의 경험을 본받는 한편, 사회주의적 도시화과정에서 주민 위주의 도시공동체 생활공간을 건설하려 한 북한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도시화 노선은 도시 내부에서 발생하는 기존 도시화의 문제점을 해소하는 데 그칠 뿐이다. 이것만으로는 지역간 격차에 따른 과밀·과소 문제, 지역이기주의 문제 등과 같이 도시간에 또는 전국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지역문제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도시구성의 원리를 사회구성의 원리로 확장시켜야만 비로소 도시의 민주화와 인간화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5.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남북한에서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대단히 빠른 속도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남북교류 시대를 맞이하여 남북한이 함께 추진하는 새로운 도시 조성 방안 역시 동일한 잘못을 범할 우려가 적지 않다. 특히 평화시 조성이나 새로운 행정수도 건설, 또는 북한 도시의 재건 프로그램에 관한 최근의 여러 논의가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을 전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만약 남북공조에 기초한 새로운 도시화의 경로가 남북한 관계의 변화 양상에 따라 수십 갈래로 갈릴 수 있다는 현실에 대해 이처럼 눈감아버린다면, 통독 과정에서 독일이 보여준 혼란과 갈등을 또다시 되풀이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이후로는 무지와 편견에 뿌리를 둔 섣부른 예단(豫斷)보다는 남북한 도시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을 거울삼아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도시화의 길을 모색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남북한 관계의 다양한 유형에 입각해서 수많은 도시화 씨나리오를 설정하고, 이들 각각에 대한 대처방안을 다각적으로 마련하는 유연한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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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여덕 외 『농촌인구 이동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3, 10〜11면; 장상환 「80년대 한국자본주의와 농업문제」, 『한국의 사회구성(1)』, 도서출판 화다 1985, 325면.↩
- 따라서 평균 20%를 웃도는 남한의 인구이동률에 비해 북한의 그것은 평균 5.3%에 지나지 않았다(박양호 외 『통일에 대비한 국토 개발과 관리 기본구상 연구』, 국토개발연구원 1996, 24면).↩
- 김현수 「북한의 도시계획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김현수 「개방 개혁에 따른 북한도시의 공간구조 변화」,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편 『화해와 협력의 시대에 대비한 한반도 국토개발 방향』 2000.↩
- 김원 『사회주의 도시계획』, 보성각 1998, 228면.↩
- 박양호 외, 앞의 책 78〜79면.↩
-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편 『통일시대 한반도 국토개발 구상 국제세미나 자료집』 1997; 윤혜정·장성수 『통일시대 국토개발의 방향: 북한의 어제와 오늘, 통일한국의 내일』, 태림문화사 1997, 87〜96면; 김문조·조대엽 「북한의 도시화와 도시문제」, 김문조 편 『북한사회론』, 나남출판사 1994, 38면.↩
- 서우석 「통일한국의 북한지역 주택정책에 관한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67〜68면.↩
- 서동훈 「북한의 도시개발 및 주택건설 현황」, 『건설』 183호, 1991, 43〜44면.↩
- 송경록 『북한 향토사학자가 쓴 개성 이야기』, 푸른숲 2000, 127〜56면.↩
- 이왕기 『북한 건축: 또하나의 우리 모습』, (주)서울포럼 2000, 101〜102, 142면; 김현수 「개혁 개방에 따른 북한도시의 공간구조 변화」; 주종원·김현수 「북한의 주거지계획에 관한 연구」, 『국토계획』 28권 3호, 1993, 23〜28면.↩
- 서우석, 앞의 글 79면.↩
- 장세훈 「도시화, 국가 그리고 그린벨트: 한국·영국·일본의 그린벨트를 중심으로」, 한국도시연구소 편 『도시연구』 제4호, 1998 참조.↩
- 박양호 외, 앞의 책 27면.↩
- 평양의 경우, 창광거리에는 중앙당 및 정무원 간부들이, 승리거리에는 예술·문화인 및 체육 부문 종사자들이, 안상택거리에는 국가에 거금을 헌납한 재일동포 가족들이, 그리고 대동강구역 낙원거리에는 중간층 일반 노동자들이, 서성구역 비파거리의 노후가옥지대에는 일반 서민층들이 주로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서동익, 『인민이 사는 모습』, 자료원 1995, 255면).↩
- 이왕기, 앞의 책 56〜62면; 김신원 「북한의 국토 및 지역개발에 의한 조경공간 형성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50〜55면; 삼우설계 북한건축연구회 「북한의 현대건축」(http://www.archforum.com/practice/north-k/north-k.html, 1999).↩
- 이왕기, 앞의 책 140〜56면.↩
- 서우석, 앞의 글 78면.↩
- 제성호 『한반도 비무장지대론: DMZ(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서울프레스 1997, 88_96면.↩
- 윤혜정·장성수, 앞의 책 143~59면; 김충렬 「휴전선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Front DMZ 조직위원회 편 『비무장지대의 생태환경 보존을 위한 국제토론마당』 1995,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