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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잡무와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아이들
방용호 方用昊
원곡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1. 15년간 학교현장에서 담임업무를 주로 하다가 처음으로 행정업무의 일선에서 일한 지 한 학기가 지났다. 그전까지는 학교행정이 뭐 그리 대단하랴 하는 항간의 말에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막상 일이 닥치고 보니, 전근 이임사(離任辭)에서 교무부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그냥 책을 읽어나가는 식으로밖에 수업을 하지 못해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던 어느 선생님의 말이 생생한 육성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3〜7월 사이에 내게 쏟아진 공문을 정리해보니 보고공문이 80건, 알림공문이 96건이었다. 보고공문 가운데 34건을 처리했는데, 그중 20건은 3월 한달 새에 이루어진 것이다. 3월에 두둑이(?) 받은 시간외수당이 말해주듯 대체로 밤 열시까지 일을 하고 교재연구를 위한 자료는 집으로 싸들고 갔다. 학교 내의 일들도 만만찮게 쌓이는데 어느 틈에 날아와 얹히는 외부공문들은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공문 중에서 ‘현원(現員) 명부’ 같은 것은 며칠씩 걸려 조사, 작성해야 했다.
매시간 교재준비를 해야 하는 3학년 수업, 작년의 재탕이어서 좀 쉬우려니 했으나 그러다 큰코다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만 하던 1학년 수업, 3월 한달 이래저래 나는 수업중에 거의 기가 죽어지냈다. 아이들도 다소 긴장되어 있던 탓에 되도록 말을 아끼고 웃음을 감추며 권위있는 척하는 내 수법은 그런대로 먹혀들어갔다. 초·중등학교 수업의 질은 교사의 지식보다도 수업기술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재탕의 밍밍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더욱 심도있게 교수방법을 연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과의 안면 익히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러나 지난 봄, 나는 교과서나 아이들보다는 묵은 공문철과 교원 인사기록카드를 뒤지기에 바빴다. 다소 낯선 기안서를 들고 행정실로 교장실로 층계가 닳도록 쫓아다니다가 수업자료는커녕 어젯밤 대강 훑어본 교과서 하나만 달랑 들고 교실에 들어가기가 일쑤였다. 어느날은 수업을 하려고 막 책을 펴들고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아이들의 얼굴이 기안용지처럼 보이고, 그 위에 공문의 보고 기한과 문구들이 시름없이 겹쳐지는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죽하면 ‘잡무’라고 할까 싶을 정도로 내가 하는 업무 중에서 아이들 지도와 관련된 일은 거의 없었다. ‘병역미필 교사 명단 제출’ ‘충무계획 작성자료 제출’ ‘순회교사 명단 제출’ ‘국외유학생 현황 조사’ ‘학급편성 현황 보고’ ‘관리직 명부 제출’ ‘투·개표 사무원 추천 협조’ ‘현원 명부 제출’…… 만약 교육행정실이라는 것이 정말 따로 존재한다면 이런 것들은 교사가 아니라도 기존 입력자료를 활용해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에 빠지게 되었고, 이것이야말로 교사로서의 나의 정체감을 훼손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내 앞자리의 협장업무 담당 선생님을 보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내 일은 그래도 매듭과 쉼터가 있지만, 그분은 그 자리를 거쳐간 선생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행정족보에도 없는 이상한 사무원이었고, 일은 끊임없는 물의 흐름과도 같았다. 관내 모든 고등학교에 상급기관의 지시를 전달하고, 취합하여 통계 내고, 빠진 학교 독촉하는 그야말로 작은 교육청이었다. 내 뒤의 연구부 선생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교육계획서를 비롯한 각종 문서를 만들어내면서 쉴새없이 내려오는 연수관련 공문을 처리하느라고 쉬는 시간 짬짬이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어이 그 과묵한 분의 입에서도 교재 연구할 시간이 없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수업을 해가면서 이런 업무를 담당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느 한쪽은 적당히 버리라는 말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문서뿐이면 오죽 좋으랴. ‘내부 결재철’을 보면, ‘기간제 교사 임명’ ‘학교교육 안내’ ‘학교운영위원회 교사위원 및 인사위원회 구성’ ‘학부모 학교만족도 설문조사 및 분석’ ‘학교 홍보자료 제작’ 등등의 업무가 공문서와 씨줄 날줄로 얽혀 있다. 결국 돈에 관한 것을 제외한 모든 행정업무를 교사들이 맡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교사의 전문성을 발휘해야 할 업무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흔히들 청소시키는 것도 교육이요 납부금을 빨리 내게 하는 것도 교육이라고 한다. 이렇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교육적인 활동에 교사들은 많은 시간과 정열을 빼앗기고 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자기가 맡은 교과의 전문성을 살리는 데 투자하는 시간은 줄어들게 되고 비본질적인 업무가 본질적인 것을 앞지름으로써 본말이 전도되는 결과를 낳는다.
실제로 내 경우는 국어 교과의 특성상 교수·학습과 평가를 해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벅찼다. 8시에 출근하여 단 한 시간도 한눈팔지 않고 밀려오는 일들을 해결해도 아이들이 제출한 수행평가 자료는 결국 집으로 가져와야 했다. 자정이 넘도록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점수를 매기면서 한 사람씩 불러다 교정지도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정작 학교에 가면 그런 일들은 그야말로 어젯밤 꿈에 불과했다. 외부에서는 그럴 것이다. 그걸 왜 못하느냐고. 하지만 많은 교사들이 수행평가를 가로막는 첫번째 장애로 잡무를 지적하고 있듯이(이선희 「수행평가를 가로막는 7가지」, 『중등 우리교육』 1999년 7월호), 교사가 아이들 개개인을 정확히 평가할 수 없는 이면에는, 그 개인의 나태보다도 교사로 하여금 아이들과 관련된 본질적인 업무를 할 수 없게 만드는 어떤 기제가 분명히 존재한다. 뭐라고 꼭 집어말할 수는 없으나 교사를 탈진하게 하는, 더이상 아이들 곁으로 갈 수 없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 교사의 본질적 업무를 형식화의 길로 내모는 정신적·물리적인 그것을 잡무라고 부르고 싶다.
학교에서의 시간 중 가장 중요한 3월에 이땅의 많은 교사들이 아이들의 얼굴보다는 잡무와 만나고 있다는 것, 여기에서 이미 공교육의 질을 높일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2. 언제부터인지 서무실이 ‘교육행정실’로 이름을 바꾸었다. 행정업무의 일선에 있는 교사로서 새롭게 태어날 행정실이 그리운 것은 교사 본연의 모습을 찾고 싶은 간절한 욕구 때문이지 결코 개인적인 편의에서가 아니다. 이 기회에 간판만 바꿔다는 외형적 변화보다는 개명(改名)의 밑바탕에 깔린 의도를 인식전환의 계기로 삼아 명실상부한 교육행정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공문이 온다. 교사나 학생에 관련된 공문이면 학내 전산망이나 일일공지를 통해 전 교사와 학생에게 홍보하여 조사나 참여를 이루어낸다. 교내 행사담당 요원은 각종 행사를 기획, 공지하고 교사들의 의견을 모아 행사를 진행해간다. 고입시험이나 수능시험 업무도 교육행정실 주관하에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행정공문서가 교무실로 올라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행복한 상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교사에게는 수업만 맡기자는 인식이 확대되어야 하며, 지금까지 교사가 맡아 하던 업무를 대신할 행정인원이 대폭 보강되어야 한다. 이것만큼은 어설픈 행정적 권위주의나 부서이기주의에 끌려다녀서는 안되며 그야말로 우리 아이들이 받는 교육의 질을 높인다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냥 서무실이면 족하다. 그리고 교사들을 충원하여 한 1년씩 돌아가면서 행정업무만 보게 하거나 자원봉사제를 활용하는 씨스템도 충분히 고려해볼 만하다. 행정업무를 맡아보는 기간을 학교교육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다음해에 더욱 알찬 수업을 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되도록 할 수도 있다. 수업을 안하는 교사를 생각할 수 없다는 식의 원론적인 틀에만 얽매이지 말고 단호히 그 원론에 충실할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교육부나 지역 교육청에도 교원업무 경감을 담당하는 부서가 생겼고 실제로 잡무를 줄이자는 인식의 공감대가 넓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3월, A4 용지 186면 분량으로 다운로드한 ‘통합공문서’를 본 우리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교사들이 이를 업무경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또하나의 잡무로 인식한다는 데서 보듯이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현장에서의 체감 잡무를 해결하기는 요원하다.
3. 잡무는 단순히 업무경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전면적으로 없어져야 한다. 교육선진국에서처럼 교사는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 되도록 행정중심의 교무조직을 교육중심으로 개편하고, 공문서와 각종 학사행정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인력을 확보하는 등의 적극적인 제도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마디로 비본질적인 일의 중심에 서 있는 교사를 구해 교사 본연의 자리로 귀환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난 여름호 『창작과비평』의 현장통신에서 “국가 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형편없는 써비스” “철저한 불신과 절망” 등으로 평가된 공교육의 위기를 해결해나가는 실질적 방안이 될 것이다.
다만 잡무에 대한 논의를 전 학교현장으로 확대할 때, 교사들이 교사 본연의 일마저 잡무로 인식하고 있으며 본래의 임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잡무가 많은 건 아니라는 지적(박선규 「교사들에게 보내는 쓴소리」, 『중등 우리교육』, 1999년 8월호)도 어느정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잡무로부터 해방된 교사의 시간이 교사 본연의 업무인 수업과 평가의 질, 학생과의 만남의 질을 높이는 데 투자되어야 한다는 교사들의 자성적 인식을 반드시 전제하고 싶다.
작년에 이어 곳곳에서 학교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드높지만 21세기를 살아갈 아이들을 위해 19세기 교실이 당연히 해체되어야 하듯, 해체되어야 할 것들이 해체되고 있다고 본다면, 기존의 학교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학교 자체가 붕괴되는 것처럼 오인하는 일 없이 좀더 신중하고 깊이있는 시선으로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잠깐만이라도 인터넷을 열어보라. 현 정부가 교육의 기치로 내건, ‘새 학교문화 창조’의 요체인 ‘특기·적성 교육’이라는 이름까지 보충수업으로 둔갑시키는 이 가공할 만한 전국적인 언어도단을 보면 구태로의 회귀본능이 학교 안에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는가를 절감할 수 있다. 국가에서 시행하고자 하는 제도적 가치를 어디까지 전도시킬지 두고 볼 일이지만, 성급히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던 20세기의 강압적·권위주의적 패러다임으로는 21세기의 다원적 세계에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교육의 기반이 약한 것도 마른 콩깍지 타오르듯 하는 저 유명한 조급증과 교육의 본질에 대한 소신과 철학 부재에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면, 과도기를 이기는 지혜를 발휘해 좀더 진득한 황소 걸음으로 천년을 나아가려는 자세가 필요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