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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평

 

로마자 표기법의 식민성과 탈식민성

 

서반석 徐盤石

미국명 Peter Mauro Schroepfer. 연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현재 네덜란드 라이덴대학 박사과정.

 

 

2000년 7월 7일 정부의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관보에 고시되면서 또다시 바뀌게 되었다. 1948년, 1959년, 1984년에 이어 이번이 네번째이다. 그동안 한글 맞춤법도 여러번 개정되기는 했지만, 이는 대체로 ‘있읍니다’가 ‘있습니다’로 바뀐 것과 같이 몇가지 맥락에서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로마자 표기법의 경우는 ‘Doglibmun’(독립문)이었던 것이 ‘Tongnimmun’이 되었다가 ‘Dongnimmun’으로 완전히 뒤바뀌는, 가히 어지럽다고 할 만한 변화를 겪어왔다. 국가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가면서 이토록 갈팡질팡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마자 표기법 자체도 어문정책의 여느 영역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것인만큼, 혼란스러웠던 한국정치사, 그리고 문화식민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바뀐 로마자 표기법의 내용에 대해서 일반 대중은 대체로 납득하는 것 같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도로표지판에 씌어져 있는, 이른바 ‘반달표’(brève)가 붙은 로마자를 매일같이 보면서도 이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랐던 일반 언중(言衆)으로서는 그 부호가 다시 없어진다니 일단 반가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정된 로마자 표기법에 관심을 보인 신문의 사설들도 이 또한 ‘사회적 약속’임을 강조하면서, 새 표기법에 어색한 점이 없지 않으나 일단 지켜봐야 한다는 논조였다. 신문 사설에서 이런 주제를 다룬 것은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에 대해 그저 한국어의 ‘영자 처리’로만 생각해오던 일반인에게 그 중요성을 널리 인식시켜주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주한 외국인(주로 서양인) 사회와 해외 한국학계는 비록 그 이유가 다양하긴 하지만 거의 모두가 반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자 표기법 개정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1997년부터 개정이 이루어진 지금에도 국내 영어신문(결론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영자신문’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과 특히 싸이버공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개정작업에 참여한 몇몇 학자를 제외하면 개정에 찬성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외국인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 글에서는 로마자 표기법에 대하여 이토록 상반된 시각이 나오게 된 배경을 몇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는 크게 두 계통이 있을 수 있다. ‘옷’을 ‘os’으로 하는, 글자를 일대일로 옮겨적는 전자법(轉字法), 소리를 우선시하여 ‘옷’을 ‘ot’으로 쓰는 전사법(轉辭法)이 그것인데, 이 두 가지도 어떤 방향으로 세분화하느냐에 따라 그 표기양상이 상당히 달라진다. 그 대표적인 것들을 ‘종로’의 표기사례를 들어 소개하면, 한국어에 대한 전자식 표기법으로 외국의 언어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예일(Yale)표기법’으로는 ‘Conglo’이고, 1959년부터 1984년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로마자 표기법이었던 전자법 계통의 일명 ‘59년 문교부 표기법’으로는 ‘Jongro’가 된다. 또 1939년에 처음 소개되어 지금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어온 전사식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는 ‘Chongno’가 되고, 새로 고시된 정부의 전사식 표기법으로는 ‘Jongno’라고 써야 맞다.1

한데 이렇게 다양한 로마자 표기법 중 어느 것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언뜻 보면 간단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선 전자식 표기법은 쓰기가 편하고 전사식 표기법은 읽기가 편하다. 한글맞춤법에 따라 글자 하나하나 그대로 옮겨쓰는 전자법의 경우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에게는 쉬운 표기법인 반면,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원음에 가깝게 발음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게 된다. 전사식 표기법의 경우는 한국어 글자체계와 맞춤법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어 언중이 소리변화가 심한 문맥에서는 따르기 힘든 대신,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은 자신의 모국어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어도 그런 대로 발음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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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로마자 표기에 대한 시도는 아마도 『하멜표류기』에 보이는 ‘stock’(ᄯᅥᆨ) ‘Sior’(서울) ‘oranckay’(오랑캐)와 같은 낯선 것들이 아닐까 싶다. 하멜의 것은 누가 봐도 표기‘법’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고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그리고 한국어보다는 네덜란드어의 원리를 주로 고려하여 쓴 것이다. 18,19세기 조선에 온 서양인들 역시 국적에 따라 자신들의 모국어에 맞춰 만든 표기법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개화기 서울에서는 프랑스 선교사, 독일 상인, 그리고 미국과 영국의 상인·외교관·선교사 들이 각기 자기 집단의 표기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에서 한국어를 연구하던 매큔(G.M. McCune)이 최현배(崔鉉培)·정인섭(鄭寅燮), 그리고 미국의 일본학 학자 라이샤워(E.O. Reischauer)와 함께 만든 표기법2이 1939년에 국내의 한 영문학술지3에 소개되면서 통일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표기법은 바로 이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이다.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은 이제 무려 40여개나 된다는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 중에서 가장 성공한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그 특징으로 알려진 반달표(˘)와 어깨점(’)이 완전히 생략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세계 언론과 대부분의 출판물의 표기는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목적으로든 전사식 표기법을 새로 만들 때는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서 출발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의식하면서 개발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의 특징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초성의 ‘ㄱ, ㄷ, ㅂ, ㅈ’은 ‘k, t, p, ch’로 표기하고, ‘ㅋ, ㅌ, ㅍ, ㅊ’은 ‘k’, t’, p’, ch’’로, ‘ㅓ’와 ‘ㅡ’는 각각 ‘ǒ’와 ‘ǔ’로 표기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소리를 비교적 세밀하게 반영하려 하였기 때문에, ‘ㄱ, ㄷ, ㅂ, ㅈ’은 위치에 따라 ‘g, d, b, j’로 표기되기도 한다. 예컨대 ‘가격’이라는 단어의 경우, 무성으로 발음되는 ‘가’의 ‘ㄱ’은 로마자를 사용하는 모든 서구 언어에서 무성으로 발음되는 ‘k’로 표기하고, 유성으로 발음되는 ‘격’의 초성 위치에 있는 ‘ㄱ’은 서구어의 거의 모든 상황에서 유성으로 발음되는 ‘g’로, 마지막 ‘ㄱ’은 맨 처음의 것과는 똑같지 않으나 일단 무성이므로 역시 ‘k’로 표기함으로써 ‘kagyǒk’이 된다.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이 복잡한 것은 이뿐만 아니다. 예를 들어 ‘울진’을 웬만한 한국인은 ‘Uljin’이라고 쓰고 싶어하지만 ‘ㄹ’에 이어지는 ‘ㅈ’은 모음이나 ‘ㄴ, ㅁ, ㅇ’에 이어지는 ‘ㅈ’과는 발음이 다르므로(‘시정’과 ‘실정’을 발음해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Ulchin’이라고 써야 한다.

필자는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사용하는 데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배우기가 쉬웠다는 말은 아니다. 따로 시간을 내어 학습하고, 자음의 소리변화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일람표 같은 것을 수첩에 넣고 다니며, 외국어로 글을 쓰다가 표기의 원칙들이 생각나지 않을 때 꺼내서 참고하면서 쓰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이 표기법을 따르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 일반 한국어 언중이 의식하지 못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소리변화를 너무 ‘철저하게’ 반영한 나머지, 혹은 유·무성의 차이에 예민한 서구인의 귀만 과잉 대접한 나머지, 실제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헷갈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나마 국내에서 로마자 표기법이 그런대로 지켜지는 도로표지판에도 ‘Ǔljiro’(을지로)로 잘못 씌어져 ‘방치’되기도 하고, 이 표기법의 옹호론자 중에서도 역시 잘못 적는 사람이 가끔 있다.

그러나 ‘치명적’이랄 수 있는 문제는, 국가에서 아무리 거센소리를 표기할 때 어깨점을 생략하지 않고, ‘ㅓ’와 ‘ㅗ’, ‘ㅡ’와 ‘ㅜ’를 각각 구별해내는 데 쓰이는 반달표를 예외없이 지킨다 해도, 한국어 언중은 이렇게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널리 알려진 지명은 따로 배우고 쓸 수는 있어도, 인명, 회사명, 국학관련 용어,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 표기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지명의 경우 웬만한 사람은 단어 첫머리의 ‘ㄷ, ㅂ, ㅈ’을 ‘d, b, j’로 표기하려 한다. ‘Changjak과 Bipyong’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공교롭게도 이번 개정으로 대한민국의 시·도 등 비교적 알려진 지명은 대다수가 바뀌는 대신, 인명·회사명 등은 표기법이 실제 생활에서 쓰이는 것과 더 가까워졌기 때문에 바뀌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필자는 한국에서 살다 보면 자주 부딪히는 ‘우리 정서’라는, 때로는 극히 획일주의적인 발상에 반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국인 언중이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혹은 그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 근거로 여러가지를 들 수 있지만, 특히 대한민국의 로마자 표기법의 변천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세계에서 한국만큼 그토록 외진 곳의 지명까지도 자국어와 함께 이를 외국인이 알아볼 수 있는 로마자로도 표기해놓은 나라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은 물론 미군정에서 시작되었고, 미군정은 당연히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기본으로 하는 표기법을 사용했다. 때문에 자세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1948년에 채택된 대한민국 정부의 첫번째 로마자 표기법이 미군정의 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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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에 로마자 표기법이 개정된 계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지만, 한국인 언어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59년 문교부 표기법’은 문제의 자음 ‘ㄱ, ㄷ, ㅂ, ㅈ’을 ‘g, d, b, j’로 표기하고 있다. 물론 완전 전자법으로 외국인이 발음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시행 기간 내내 외국인과 외국인을 상대하는 사람들로부터 개정 요구가 잇따랐다. 한국과 인연이 있는 외국인들은 이 동안 대한민국의 공식 로마자 표기법을 완전히 무시했고, 당시의 주둔군지위협정(SOFA, 한미행정협정)에서 미국이 미군정 때부터 쓰던 표기법을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그랬는지 70년대 후반부터 학술원에서 새로운 개정안 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니나다를까, 80년대 초 학술원에서 나온 개정안은 전자식에서 전사식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초성 위치의 ‘ㄱ, ㄷ, ㅂ, ㅈ’은 ‘g, d, b, j’로, ‘ㅋ, ㅌ, ㅍ, ㅊ’은 ‘k, t, p, ch’로 표기했다. 위에서 외국인들이 싫어하니까 개정하라고 해도 단어 첫머리 ‘ㄱ, ㄷ, ㅂ, ㅈ’을 ‘g, d, b, j’로 하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인데, 이때 학술원의 개정안이 채택되지 않은 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우선 국제적으로 정통성 문제에 시달리던 정권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준비하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보신탕을 비롯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외압’이 많았다. 특히 1982년 1년 내내 언론을 통해 외국인들이 당시의 ‘59년 문교부 표기법’이 ‘국수주의적’이라면서 올림픽을 위해서라도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다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1982년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가 돌아온 청와대 고위관리가 개정작업에 참여한 학자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해서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 다시 갈 것이니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 협조의 결과였는지 논쟁이 잠잠해졌다가,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이른바 ‘84년 문교부 표기법’이 1984년 1월 13일 갑자기 고시되었다.

한편 80년대에 남북한의 국어학자들이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대한 ISO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처음 만났으나 합의를 보지 못했고, 90년대에도 한두 차례 더 만나다가 역시 합의를 보지 못하여 1999년에는 3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북한은 반달표와 어깨점을 생략하긴 했지만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표기법을 제정하여 한번 개정한 후에 사용하고 있다. 필자는 남측 대표로 참석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이와 관련된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정년퇴임한 미 중앙정보국 요원’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내용인즉, 북한 대표들은 ‘ㄱ, ㄷ, ㅂ, ㅈ’을 ‘g, d, b, j’로 하는 데 어느정도 수긍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를 끝내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아마도 ‘Kim’이라는 성을 가진 북한의 두 지도자에 대한 표기를 바꿀 엄두를 내지 못해서인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ㅈ’을 ‘j’로 쓰는 경우가 많다. ‘주체’의 ‘ㅈ’은 원래 ‘ch’이라고 써야 하는데 대문자 ‘J’, 즉 ‘Juche’로 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있었던 장관급회담 때 북한측 대표로 서울에 온 전금철도 ‘ㅈ’을 ‘j’로, ‘ㅊ’을 ‘ch’로 썼다고 한다. 이 ISO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회담에서 모음 ‘ㅓ, ㅡ’를 ‘eo, eu’로 표기하는 데 합의를 볼 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다시 남한에서는 1995년에 행정쇄신위원회(현 규제개혁위원회)가 ‘84년 문교부 표기법’을 개정할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리하여 그 사이에 어문정책에 대한 관할권을 이양받은 문화관광부 산하 국립국어연구원에서 새로운 표기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이 시안 역시 ‘ㄱ, ㄷ, ㅂ, ㅈ’을 ‘g, d, b, j’로 했다. 그러나 철저한 전자법으로 박(朴)씨가 ‘Bag’이 되고 ‘꽃’이 ‘kkoch’이 되는, 특히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들에게 거슬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대가 극심했다. 그리하여 다시 수정해서 7월 7일에 고시된 표기법은 역시 단어 첫머리 ‘ㄱ, ㄷ, ㅂ, ㅈ’을 ‘g, d, b, j’로, 모음 ‘ㅓ, ㅡ’를 ‘eo, eu’로 하되 글자를 고려하지 않고 소리를 반영(박→Bak, 옷→ot, 꽃→kkot)하는 전사법이다. 설문조사와 스무번의 공청회를 거친 결과인 것으로 안다.

이러한 과정은 참으로 많은 것을 시사하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몇가지만 지적하겠다. 첫째, 전자법이든 전사법이든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학자들이 모여서 로마자 표기법을 만들면 예외가 쉽게 발견되지 않을 정도로 단어 첫머리 ‘ㄱ, ㄷ, ㅂ, ㅈ’을 ‘k, t, p, ch’로 표기하는 것을 지양하고, 모음 ‘ㅓ, ㅡ’를 ‘eo, eu’로 표기하는 원칙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글학회가 1984년 2월 21일에 발표한 표기법과 다른 단체에서 만든 표기법을 봐도 그렇다. 둘째, ‘Chun Doo Hwan’이라는 무원칙하게 표기된 로마자 이름을 가진 올림픽 주최국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80년대초부터 이번에 고시된 표기법과 비슷한 것이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러잖아도 외국인들이 발음 가능한 표기법이어야 모두가 만족하게 된다는 인식이 70년대말부터 있어왔기 때문에, 학술원의 개정시안에서 보듯, 전자법에서 전사법으로 가되 ‘g, d, b, j’와 ‘eo, eu’를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분명했다. 셋째,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굳게 닫혀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보충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주한 외국인 사회에는 거의 ‘집단적 모순’이라고까지 해야 할 현상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된다. 국내에 사는 상당수 외국인들은 이번 개정의 과정이 ‘극비리에 추진되었다’고 항의한다. 특히 ‘84년 문교부 표기법’이 하늘에서 떨어질 때 그토록 반기던 사람들 중에도 무려 스무번의 공청회를 거쳐 개정·고시된 이번 표기안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설문지를 한국어로만 돌렸다고 해서 이를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한국어로 된 질문을 읽지 못하는, 검/곰, 공/콩, 달/딸/탈을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이 개정작업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궁금하다.

또한 국내의 두 영어신문에 이번 개정을 반대하는 내용의 글을 보낸 이들에게 그동안 이 신문들로 하여금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제대로 따르도록 어떤 노력을 했는가 묻고 싶다. 이번 로마자 표기법이 고시된 다음날, 이 신문들은 종전의 표기법과 개정된 표기법을 비교하기 위해 대조표 같은 것을 실었다. 신기하게도 이날 따라 반달표가 보였다. 종전의 표기법을 보여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반달표가 가능한 서체를 개발한 모양인데, 그동안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지키지 않은 것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였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이 신문들은 ‘종전의 표기법을 고수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이를테면 ‘광주’를 ‘Kwangju’라고 쓰지 않고 ‘Gwangju’라고 쓰면 ‘국수주의’라고 항의하면서도 급할 때는 ‘인천’을 ‘Inch’ǒn’이 아니라 ‘Inchon’이라고 써도 상관없다는 태도이다. 서양 언어에서는 자음은 일정하게 발음되는 반면, 같은 모음 글자라도 다르게 발음되는 일이 허다하다. 한국어는 이와 반대로 모음을 표기하는 글자를 가리키는 이름이 따로 필요없을 만큼(자음의 경우, ‘ㄱ’을 ‘기역’으로 부르는 것과 달리) 모음의 발음이 일정한 반면에 자음의 소리변화는 심하다. 따라서 대부분 외국인들의 주장대로 ‘ㄱ, ㄷ, ㅂ, ㅈ’은 반드시 ‘k, t, p, ch’로 써야 하지만 때로는 반달표를 생략할 수도 있다는 그러한 생각이야말로 바로 서양 언어를 중심으로 한국어를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가지 더 지적해두고 싶다. ‘한국인은 그토록 과학적이라고 자랑하는 한글이 있는데 왜 우리가 쓰는 로마자 표기법에 관여하는지 모르겠다’는 투의 발언이 적지 않았다. 해외에 있는 외국인 한국학자보다는 주한 외국인 사회 ‘원로’들 사이에 이러한 논리가 특히 만연해 있는 것 같다. 대표적인 예로 2000년 7월 11일자 『코리아 타임즈』(Korea Times)에 실린 브린(Michael Breen)의 칼럼을 들 수 있다. 그는 「영어 맞춤법 고치기, 한국 언어학자들의 다음 과제가 될 것인가?」4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국립국어연구원의 언어학자들이 우리가 한국어 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법을 간소화했으니 이제는 그들만의 전문성을 발휘하여 영어맞춤법을 정리하는 것을 그들의 다음 목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썼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마치 국립국어연구원에 대고 ‘아예 영어맞춤법도 고쳐 보시지 그래!’ 하는 식이다. 마치 로마자 표기법이 외국인들의 전유물이나 되는 것처럼 외국인들이 알아서 해주면 그만이다, 한국인은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에 간여할 필요가 없다는 심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한국인이 로마자 표기법을 사용하는 일이 많은 것은 자명하다. 예컨대 세계적으로 한국어에 대한 로마자 표기법을 사용하는 외국인은 극히 소수지만, 한국인 대부분은 최소한 자기 이름 정도쯤은 로마자로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오늘의 한국은 서울 정동의 ‘외교관 거리’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손에 의해 우물 밖에 소개되던 개화기가 아니다. 이제 한국인이 자신이나 자신의 나라를 바깥 세계에 직접 소개하는 일이 많아졌고,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아직도 로마자 표기법이 한국인에게 편해야 한다는 당연한 상식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얼마 전 인도의 ‘Bombay’(봄베이)가 ‘Mumbai’(뭄바이)로 바뀌었다. 인도에서는 여러 주에서 식민지 종주국이던 영국이 지은 스펠링으로 도시 이름을 표기하던 것을, 해당 지방의 언어에 의거하여 표기하는 추세로 가고 있다. 이미 굳어진 ‘Bombay’를 ‘Mumbai’로 바꾼 것은 아마도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켰을 것이 틀림없고, 적지 않은 예산이 들었고 또 들게 될 결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인도에 사는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물론 이를 잘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도 서구인들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 만든 로마자 표기법을 버리고 중국인들이 필요한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서 한때 ‘Peking’이었던 ‘北京’을 이제 ‘Beijing’으로 쓴다. 이렇게 같은 지명을 두고 표기를 바꾸는 나라들이 알고 보면 한때 식민지였거나 최소한 제3세계로서 자신들이 스스로 표기법을 선택하지 못한 나라들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Peking’이 ‘Beijing’이 되고 ‘Bombay’가 ‘Mumbai’가 된 것은 두 나라가 지구촌의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제정한 표기법을 쓰도록 노력한 결과일 터이다. ‘Pusan’이 ‘Busan’로, ‘Kwangju’가 ‘Gwangju’로, ‘Taegu’가 ‘Daegu’로 정착되려면 국내에서 로마자 표기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코리아 타임즈』의 칼럼니스트 홍순일(洪淳一)은 「로마자 새 표기법 ‘후퇴’」(『한국일보』 2000.7.13)라는 기고문에서 종전의 로마자 표기법은 “언젠가는 더 합리적인 방안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김포·부산 등 출입항의 로마자 표기 변경에 세계의 항공·관광업계가 과연 순응할 것인지 의문스럽다며, “과거의 예로 미루어볼 때 미국측이 수많은 지도와 군사계획을 뜯어고칠 것 같지 않다”는 이유 등을 들어 새 표기법을 비판하고 있다. 『코리아 타임즈』와 『코리아 헤럴드』(Korea Herald)에서 끝까지 새 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계속적으로 종전의 로마자 표기법을 변용해서 잘못 쓴다면, 외국에서는 새 표기법도 ‘59년 문교부 표기법’처럼 완전히 무시될 것이 틀림없다.

예측 가능한 로마자 표기는 특히 정보화사회에서 더욱 중요하다. 한글맞춤법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함께 써야 예측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로마자 표기가 일관되게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은 종전의 표기법이 지나치게 어려웠던 부분도 있고, 또 ‘로마자 표기’를 곧 ‘영자화’라고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였다. ‘영’을 ‘young’이라고 쓰고 ‘선’을 ‘sun’이라고 쓰고 ‘순’을 ‘soon’이라고 쓰는 ‘폐단’을 하루 빨리 버려야 체계적인 표기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글자와 언어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국내의 두 ‘영자신문’은 라틴의 글자를 기록문자로 사용하는 ‘영어’라는 언어로 된 신문들이고, 다른 국내 신문들은 ‘한글신문’이 아니라 ‘국어’ 혹은 ‘국문’ 신문이다. 로마자로 표기된 한국어가 ‘영어로 쓴’ 한국어가 아니라 로마자로 표기된 한국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로마자 표기에서도 ‘한글맞춤법 통일안’ 이전과 같은 혼란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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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번 고시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제8항에도 “학술연구 논문 등 특수 분야에서 한글 복원을 전제로” 표기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 대비하여 전자식 표기법도 따로 마련하였다.
  2. 라이샤워는 이 작업이 완성되기 전에 한국을 떠났다고 한다.
  3. G.M. McCune & E.O. Reischauer, “The Romanization of the Korean Language Based Upon Its Phonetic Structure, Transactions,”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1939. 지금도 연간(年刊)으로 발행되고 있는 이 학술지는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사회과학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
  4. 브린은 글의 원제 “English Spelling─The Next Mission for Gorea’s Linguists?”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성 ‘ㄱ’이 ‘g’가 되므로 Korea가 Gorea로 바뀌게 되었다고 비꼬아서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