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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대안적 이념 모색을 향한 내적 고투

『오래된 정원』론

 

 

이명원 李明元

문학평론가. 서울시립대 국문과 박사과정.

 

 

작가 황석영(黃晳暎)을 떠올릴 때면, 나는 언제나 『장길산』을 읽던 대학 초년시절로 되돌아간다. 문학을 한답시고 국문과에 들어갔으나, 정체 모를 적의와 분노만이 늘어가던 스무살, 내 젊음의 ‘독서노트’에는 황석영의 『장길산』과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과 같은 소설에 대한 독후감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그때 나는 종로와 광화문 거리에서 처음으로 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공포를 느꼈다. 다만 추상으로 존재했던 정치권력의 폭력을 경험의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읽으면서, 나는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던 내 선배들의 아픈 삶을 들춰보는 듯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 내 문학의 선배들이 이야기한 ‘불의 시대’의 고통스러움을 나는 마음깊이 느끼지는 못했다. 억압적인 정치권력에 맞서 인간다운 삶의 위엄을 회복하고자 한 그들의 실천은 정당한 것이었지만, 그 정당성의 이면에서 강화된 이념의 급진성과 이로부터 파생된 거의 금욕주의에 가까운 정치 중심의 일원론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념의 투명성이란 그것을 산출해낸 개체의 일상적인 삶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을 때라야 그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광주에서의 무자비한 양민학살을 보고 들었고 그것이 불의 시대였던 팔십년대의 시작이었다. 이전처럼 어중간한 생각이나 행태로는 막강한 폭력을 이겨낼 수가 없고 민중에 의한 권력의 장악은 한 세대가 지나도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모두들 혁명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노동대중의 힘에 대하여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혁명의 전위를 키워가기 위한 사상학습으로 치달았다. 급진적인 경향은 절망과 치욕감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상권 104면)

 

이념의 ‘급진성’을 통해 치욕과 절망을 ‘대리충족’할 수 있다는 이러한 진술의 의미를 나는 ‘사적 개인’의 차원에서만 공감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소비에트 및 동구의 격변 이후 우리 지식사회에 광범위하게 불어닥친 환멸감을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거기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당대의 세계사적 변화를 환멸로 인식할 만한 체험의 구체성이 내게는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정원』에서 전개되는 80년대의 다양한 운동 주체들의 실천적인 행위에 대한 나의 공감은, 이러한 과정이 ‘인간다움’의 품위와 존엄성을 보존하기 위한 열망의 형태로 분출된 것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오래된 정원』이 나에게 촉발하는 감동의 체험은, 당대적 문맥에서의 급진적 이념의 건설과 그것의 해체과정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기보다는, ‘한계상황’ 속에서 인간다움을 향한 투쟁이 어떻게 눈물겨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가령 다음의 인용문이 그러한 경우다.

 

뒤로 비스듬히 누운 채로 못을 손톱 끝으로 잡고 힘을 주어 빼내려고 기를 쓴다. 어떤 경우에는 쉽게 뽑히기도 하고 아니면 하루 종일 걸리기도 한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게 마련이고 마루 판자의 못 하나를 뽑는 일이 역사를 바꾸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사업이 되어버린다. 아, 드디어 못이 뽑혔다! 이 작은 쇠붙이야말로 짐승으로부터 사고하고 일하는 인간으로 나를 바꿔줄 열쇠인 것이다. (하권 67면)

 

한계상황에서는 하나의 못을 빼는 일도 인간다움의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라는 것─그것이 바로 내가 공감할 수 있는 ‘해방의 파토스’였다. 그러나 이 해방의 파토스는 작품 속에서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전위적 이론가인 현우, 노학연대를 통해 일하는 자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 미경, 학생운동의 조직화와 실천에 진력한 영태, 한 개인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운동에 동참하게 된 윤희, 인간중심의 주체론에 반기를 들고 생명사상에 몰입하는 희수와 같은 인물들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형태의 해방의 파토스는, 바꿔 말하면 작가 황석영의 현실에 대한 열린 시각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오래된 정원』이 종래의 후일담 소설이 보여준 한계를 탈피하여 유효한 문학적 방향성을 제시해준 데에는, 이처럼 해방의 파토스를 다양한 차원에서 모색하는 인물들에 대한 황석영의 개방적인 서술태도에서 비롯된다. 이와함께, 이 소설은 종래의 후일담 소설이 보여준 이분법─아름다운 과거와 환멸로 가득한 현재─의 단순화된 시각을 지양하고, 그것을 관계성 속에서 성찰하는 유연한 시각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 소설에서 ‘의미있는 상징’으로 기능하는, 갈뫼의 옛집에 놓여 있는 한 점의 그림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 두 사람의 얼굴을 크고 작게 거의 간격이 없이 그려놓았다. 왼편에 있는 얼굴은 나였다. 내가 그림에서 입고 있는 셔츠는 흰 바탕에 푸른 바둑무늬가 찍힌 반소매 남방이었다. 바깥 세상에서의 마지막 여름이었지. 그때에는 모두가 긴 머리를 하고 있어서 그림 속의 나도 길게 자란 뒷머리가 셔츠의 깃 뒤로 빠져나와 있었다. 눈에는 짙은 음영이 칠해져 있고 움푹 팬 볼은 당시의 고뇌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처음에는 내 얼굴 옆으로 창호지를 바른 격자창문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위에 회색이 덧칠해지고 윤희는 편지에 쓴 것처럼 자기 얼굴을 그려넣었다.(…)뺨에는 여러 겹의 서로 조금씩 다른 물감이 덧칠해져서 그네의 쇠락한 젊음과 인상의 깊이를 동시에 느끼도록 해주었다. (…) 서른두살의 젊은이와 사십대 중반의 여인은 서로 다른 색깔의 배경을 등지고 나란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권 68〜69면, 강조는 인용자)

 

2. 다른 색깔과 분위기로 묘사된 서른두살의 젊은이와 사십대의 여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이쪽 현실계를 내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네는 바로 내 등뒤에서 가까운 곳이 아니라 나의 어깨 너머 먼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시에 내가 애타는 마음으로 불안하게 바라보았던 곳과 훨씬 뒤에 그네가 자기 시대의 눈으로 나의 등뒤에서 넘겨다본 곳은 세계의 어느 방향으로 가는 길이었을까. (상권 254〜55면, 강조는 인용자)

 

추억은 자신의 운명을 유보적으로 보여준다. 그림 속에 응결된 형태로 남아 있는 시간의 ‘편차’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현우와 윤희 사이에 놓여 있던 공유되지 못한 시간의 ‘냉혹함’이며, 여집합의 형태로만 존재했던, 그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봉합하려는 윤희의 안타까운 ‘욕망’이다. 덧칠된 시간은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이며, 남아 있는 것은 흘러간 시간 속에서의 안타까운 기다림, 기약 없는 만남에 대한 윤희의 욕망의 흔적일 뿐이다. 흔적에 대한 흔적, 욕망에 대한 욕망으로서의 한장의 그림은, 다시 시간이 흘러, 그것을 바라보는 현우의 내면에 깊은 통증을 불러일으킨다. 아파라, “서른두살의 젊은이”로 멈춰 있는 고립된 생과 “사십대의 여인”이 되어 죽어갈 운명에 처한 또다른 생이 한몸으로, 나란히, 뒤늦게 돌아온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니!

『오래된 정원』에서 피어나는 문학적 향기는 이처럼 각기 다른 시간의 간극들이 교차편집으로 구성된 데서 연유한다. 지나간 과거는 현재 시점에서 되비쳐지고, 오늘날의 현실은 축적된 시간과의 연관 속에서 그 의미를 재정립한다. ‘역사성과 일상성의 깍지끼기’로 표현할 수 있을 이러한 서술기법을 통해, 황석영은 일상성 속에 내재한 역사성의 의미와 가치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서술의 주도권이 옥중에 갇힌 현우의 시선에 의해서보다는 윤희의 시선에 의해 더 적극적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오래된 정원』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현우를 중심축으로 전개되는 ‘혁명의 담론’이기보다는 윤희를 중심축으로 전개되는 ‘사랑의 담론’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혁명은 개인적 사랑의 사회적 확장방식을 의미한다. 『오래된 정원』에서 이러한 의미를 체현하는 인물은 윤희이다. 평범한 미술교사에 불과했던 윤희가 이후 진보적 운동에 깊이 개입하게 되는 것은 현우와의 개인적 사랑으로부터 출발한다. 황석영은 윤희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개인적 사랑의 점진적인 확대와 심화과정에 대한 서술을 통해, 이념의 투명성과 전위성을 기반으로 당대적 모순을 지양하고자 한 운동의 결여 부분을 환기하면서, 동시에 이후 기획하고 모색해야 할 대안적 이념의 방향성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윤희의 아버지를 좌파지식인으로 설정한 후, 이를 현우와의 정서적 교감의 매개로 삼고, 여기에 잔가지로 영태와의 운동과정을 덧칠하고, 급기야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희수와 함께 목도하게 한다는 플롯의 설정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의도를 유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에서 해방 이후의 한국현대사의 비극적 전개과정을,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면적인 관철과정을, 주관을 배제한 채 객관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로 여겨진다. 이를 통해 작가는 몰락해버린 ‘혁명의 시대’를 추모하고, 이를 대체할 대안적 이념의 모색을 꾀하려 한 것은 아닐까. ‘윤희의 노트’에 적힌 다음과 같은 일절은 그것을 매우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근대는 수컷들의 삭막하고 쓸쓸한 갈등과 번민의 시대였어요. 어느 밀폐된 방에서 숨어 지내는 비밀경찰 출신의 늙은 고문자처럼 그것은 황폐하고 외로워요.”(하권 304면)

그렇다면 “쓸쓸한 갈등과 번민의 시대” 이후 우리는 어떤 역사를 기획할 수 있을까? 황석영은 현우와 윤희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1. 나는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나서 그것이 무엇이었던가를 독방에서 아프게 이해하는 데 몇년이 걸렸다.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여러가지 시도는 낡아버렸거나 불필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지난 세기에 자본과 물질의 체제 속에서 반체제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던 생각은 그것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왜곡되었다. 오히려 이제는 무너진 건물 사이로 솟아나온 철골처럼 남아버린 몇가지 명제가 소중해졌는지도 모른다. 어느 집단에나 민주적 원칙의 관철과 대중에 의한 주권의 회복은 수백년 이래로 가장 생명력있는 유산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불탄 자리에서 골라낸 살림도구 같은 것이리라. 국가권력에 대하여 변화와 개혁을 들이대고 이름없는 사람들의 집단이 서로 연대하며, 아이들의 땅뺏기 놀이처럼 그침없이 한뼘 두뼘 자본이 남겨먹은 것들을 되찾아 실질적인 평등의 단계로 영역을 넓혀나가야만 한다. (하권 309면)

 

2. 남자들이 같은 남자들을 죽인 전쟁의 세기를 보내면서 내면적으로는 그와 함께 살해한 모성을 생각해요. 나도 스스로 내 안에서 그것을 죽였어요. 당신을 앗아간 것들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어요. 나는 이 위대한 자연을 회복하고야 말 것입니다. (하권 306〜307면)

 

1에서처럼 현우의 대안은 급진적인 혁명의식이 지양된 자리에 일상의 구체성에 기반한 “변화와 개혁” “실질적인 평등”을 정착시키자는 명제로 귀착된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이른바 ‘급진성’의 포기선언인 셈이다. 한 시대를 자가 발전시켰던 이 급진적인 ‘혁명테제’가 변화된 현실 속에서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상주의’의 한 형태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아마도 일이 남아 있다면 그건 바로 일상과의 씨름이다”(하권 310면)라는 현우의 고백은 그것이 곧바로 작가 황석영의 고백으로 이해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의 세계는 이른바 ‘불모’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급진성’으로 무장된 성난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부유하고 곱게 자란 ‘연약한 세대’들에 의해 충원되고 있다. 때문에 변화와 개혁, 실질적인 평등을 향한 계몽적 기획은, 이전 연대의 급진적 혁명테제만큼이나 지난한 과제로 흔히 제기된다. 정치영역에 대한 혐오와 사적 영역의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확장 속에서 강화되는 것은 현실에 대한 냉소와 맹목이다.

이때 더 현실적인 대안적 이념으로 떠오르는 것이 관용과 공감의 태도로서의 ‘모성’─위대한 ‘자연의 회복’이라는 명제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남는다. 가령 오랜 영어생활을 마치고 현장으로 복귀한 김지하와 박노해의 문학적 변신은 얼마나 돌연하며 또 역설적이게도 급진적(?)인가. ‘위대한 자연의 회복’이란 미명 아래 전개되는 『천부경』류의 고토 회복 명제라든가, 지는 싸움은 하지 않겠다는 자기고백을 토대로 전개되는 선정주의적 운동관이 세련되고 댄디하게 변화된 현실 속에서의 대안으로 제기되기도 하는 터이니! 그러나 윤희의 위대한 자연으로의 복귀 혹은 ‘사랑의 담론’은, 그것이 세련된 표면의 삶을 포괄하는, 더 넓은 차원에서의 ‘심층적’ 근대성에의 열망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래두 나는 여기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겠어요. 요만큼이라두 이루어낸 사람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니까요. 이 초라하고 남루한 누더기 더미 속에서 보석 같은 알갱이들을 골라내어 다시 빛나는 옷으로 지어낼 테니까요.

(하권 303면)

 

위대한 자연은 그 안에 초라하고 남루한 누더기 더미가 있다는 것을, 바로 그 속에 보석 같은 알갱이들이 묻혀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것이 다시 빛나는 옷으로 변용될 수 있다는 것을 포용하는 ‘성속일여(聖俗一如)’의 삶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것은 지나간 역사를 급진적인 단절과 도약으로 쉽게 괄호치는 단순함을 의미하기보다는, 시간의 ‘계기성’ 속에서 확장되고 심화되는 ‘자아 인식의 기획’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고뇌’가 내장된 동시대인의 통증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그것을 더욱 고양된 인간조건과 연동시키는 과제가 어찌 보면, 『오래된 정원』 속에 피력되고 있는 대안적 이념 모색을 향한 고투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적 이념 모색의 고투는 아직 미정형의 그것이다. 작품 속에서 현우와 윤희의 어긋나고 빗나가는 사랑을 완성하는 존재는 그들의 딸 은결이지만, 은결과 현우와의 만남이 완전한 일체감을 보이지 않고 상호탐색의 시도에서 그쳐버리고 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윤희와 현우가 꿈꾸었던 ‘오래된 정원’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그곳을 찾았나요?

윤희가 내게 묻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오,라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 인가를 찾아서 산을 넘고 언덕을 내려오는 중이라고. 멀리 마을의 불빛이며 연기나는 굴뚝이 보인다고. 당신이 살고 겪어온 길을 따라서 나는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고. 나는 젊은 내 얼굴 뒤편에 떠오른 그네의 눈길 이쪽에 서서 중얼거렸다. (하권 312면)

 

잃어버린 유토피아로서의 ‘오래된 정원’은, 미래 선취(先取)를 통해 성급하게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오는” 즉 성찰과 회귀의 자리에서 비로소 만들어가야 할 그것이 아닐까? 다시 그것은 지나간 역사를 추억으로 남겨 손쉽게 폐기해버리는 버려진 그림이 아니라, 축적된 시간의 계기성 속에서 관조하고 성찰하는 ‘지금─여기’를 보여주는 한장의 그림이 아닐까? 윤희가 현우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고자 했던 그것은 결국 그 그림 앞에 서서 지나간 추억을 회억하는 현실계의 현우가 앞으로 찾아내야 할 그것은 아닐까?

그것은 과거로부터 발굴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로부터 탐색해야 할 수수께끼로 소설 속에 제시된다. 황석영의 문단 복귀는 이러한 탐색을 향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오래된 정원』은 황석영 문학의 중간결산이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는 매우 의미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떠한 과거도 ‘청산’의 대상이 아닌 ‘성찰’의 대상이라는 정당한 인식을 보여주며, 어떠한 좌절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운 삶의 품위와 존엄을 위한 투쟁은 그칠 수 없다는 아름다운 생의 욕망을 보여준다. 주어진 것이 운명이라면, 우리는 이 운명과 적극적으로 싸울 의무가 있다. 황석영의 소설이 감동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