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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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문학상

 

제2회 백석문학상 발표

 

 

백석(白石) 선생의 뛰어난 시적 업적을 기리고 그 순정한 문학정신을 오늘에 이어받기 위해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가 출연한 2억원의 기금으로 1997년 10월에 제정된 백석문학상의 제2회 수상자가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음을 알립니다. 시상식은 만해문학상·신동엽창작기금·창비신인소설상·창비신인평론상과 함께 11월 17일(장소 미정)에 있을 예정입니다.

 

 

 제2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최영철 시집 『일광욕하는 가구』

 

심사위원

본심 고은 백낙청 황동규

예심  고형렬 남진우

 

2000년 7월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

 

 ■ 수상자 약력

1956년 경남 창녕 출생.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가족 사진』 『홀로 가는 맹인 악사』 『야성은 빛나다』 등이 있음.

 

 

심사 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2000년 6월 7일 모임에서 ① 올해부터 백석문학상 시상식을 창작과비평사가 주관하는 여타 문학상들과 함께 11월중에 갖고, ② 제2회 심사위원으로는 고은·황동규·백낙청 3인을 우선 위촉하면서, ③ 본심위원을 한 사람 더 추가하거나 예심과정을 둘지 여부를 운영위원 중 문단인사들에게 위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본심위원은 3인으로 한정하되 예심을 갖기로 하여, 시인이자 편집자인 (그리고 수상대상 기간 내의 저서가 없는) 고형렬·남진우 씨에게 각자 5권 이내의 후보작을 추천토록 의뢰하였다. 결과는 일부 중복된 추천도 있어 다음 7권이 본심에 오르게 되었다. 김기택 『사무원』, 김명인 『길의 침묵』, 김영석 『나는 거기에 있었다』, 김진경 『슬픔의 힘』,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 최승호 『그로테스크』, 최영철 『일광욕하는 가구』(가나다순).

7월 14일 창작과비평사 회의실에서 열린 본심에서 위원들은 일곱 권 모두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밝혔고, 이어서 대상을 좁혀가며 토론을 진행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권은 『사무원』과 『일광욕하는 가구』였는데, 이번에는 공동수상을 않기로 처음부터 원칙을 세웠던 터라 결국 최영철 시집으로 전원이 합의하였다.

 

 

심사평

 

高銀 시인

새삼 여러 시집을 한꺼번에 읽은 일이 예스러워집니다. 나는 일곱 권의 시집을 그렇게 읽었습니다. 백석상 심사대상에 오른 것이지만 그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읽었습니다. 1945년생부터 1961년생의 시인까지였는데 동시대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선후를 따질 일이 아니어서 그들이 쓴 시의 보석 자체에만 내 읽기의 한계를 두었습니다. 한계란 때로 장벽이나 때로 예술 전반에 있어야 할 질량의 경계이기도 하겠습니다.

김영석 시집 『나는 거기에 있었다』를 읽으며 나에게 작위가 많은 것을 뉘우쳤습니다. 그의 시에 잠겨 있는 무위(無爲)가 여간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람의 뼈’라니 참 놀랐습니다. 또 「이슬 속에는」 역시 어른거리고 얼비치고 반짝이었습니다. 제2부 네 편 장시는 대승경전 솜씨의 본문에 게송 더하는 맛이 났습니다. 시들이 청소를 잘한 방과후의 교실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꽃도 사슬이었을까요.

김명인 시집 『길의 침묵』을 읽었습니다. 시인의 마음속에는 청동기시대의 무거운 주물(鑄物)이 들어 있습니다. 혹시 길동무였다면 헤어진 곳에 다시 갔을 때 그 자리에 영락없이 서 있는 초상이 그인지 모릅니다. 뭔가 근원적인 신뢰로서의 무기교가 내내 함께였습니다. 아마도 그의 넋은 하늘 속의 푸른 허무가 아니라 안개까지도 힘껏 끌어당겨야 할 물상(物象)이 됩니다. 그리하여 서러움보다 서러움의 정치를 터득할 만합니다.

그대가 있는 곳이면 세 사람의 동지보다 더 마음 든든해질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안경알이 두툼한지 모르겠습니다.

김진경 시집 『슬픔의 힘』을 읽었습니다. 새벽 먼동 뒤 꺼칠꺼칠한 그의 밤샘 얼굴을 만나 그의 피로와 밤의 음기(陰氣)에 젖는 눈의 창기슭에 다가가면 그의 염통 박동소리가 귀환장병 군화발자국 소리의 대열로 들려옵니다. 그런 시절을 지나 슬픔, 목련, 가을, 봉천동, 어린시절과 지금이 한데 뒤섞이는 향수의 객관화와 더불어 그의 씰크로드 사막체험 이후에도 여러 지방과 고장의 비탈진 풍경에서 절반의 공세와 절반의 회상을 그는 이끌어냅니다. 저 70년대에 나도 자못 슬픔이 힘이라고 역설한 적이 있었습니다.

최승호 시집 『그로테스크』를 읽었습니다. 그는 한국 서정시의 주류에서 생득적으로 이탈해 있습니다. 그의 단골은 늘 재앙으로서의 문명이고 그 재앙을 고대 동양의 어떤 섬광으로 무마하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재래적인 것도 근대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못내 재래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풍자적 특구(特區)의 언어를 만들어냅니다. 개미의 반신과 위장을 견주는 생태비유나 선적(禪的)인 수면(水面)들은 ‘뿌리내린 곳에서의 슬픔’으로서의 사물과 화자의 느린 만남을 이룹니다. 무기수 같은 시인이되 한번 더 쇄신될 시의 결구(結句)를 저만치 물러나서 기대합니다.

김기택 시집 『사무원』을 읽었습니다. 기체나 액체가 아닌 고체의 언설이 풍부합니다. 절대시(絶對詩)가 아닌 표제시(標題詩)에서 이같은 언설은 하나의 조건이겠습니다. 말과 말 사이의 골짜기에 뼛속의 살처럼 과거의 가치들이 이끌려나와 오늘의 의미가 되고 있습니다. 아니 오늘의 참담한 일상들이 미래의 어떤 축제를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이만한 시의 조숙한 수준이라면 그것이 조로의 허망을 넘어서는 시력 30년을 달려갈 만합니다.

안도현 시집 『바닷가 우체국』을 읽었습니다. 심성 고운 시입니다. 시의 마음이 인간 본연의 따뜻한 정겨움의 다른 이름이라면 그는 애초부터 시인으로 자라난 것입니다. 그의 시는 수틀의 수로 놓여집니다. 좀더 아픈 데, 좀더 암담한 데, 좀더 쓰디쓴 역정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따금 어여쁜 얼굴은 분노의 얼굴이 될 때도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시인이 처녀로 있기보다 삼거리 주막의 주모가 정체불명의 술꾼들을 하나하나 겪어내는 그 갈보의 뒷모습과도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시인이 때때로 신라 원화(源花) 같은 얼굴이 아닌 험상궂은 언어의 폭력배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속모를 내일의 야생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최영철 시집 『일광욕하는 가구』를 읽었습니다. 비단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양심이 아닙니다. 짐승에게도 사물 하나하나의 측면에도 그것이 있습니다. 그 양심의 해설자가 바로 이 시인입니다.

어느날은 이 세상의 질기고 질긴 모순에 대한 격렬한 반성보다 거의 무능한 연민이 더 가슴을 울릴 때도 있습니다. 그는 바로 이런 일을 물속에 넣어서 굴절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는 언어로 해내고 있습니다. 그는 거리의 남루하고 고단한 행색에 몸을 섞어버리고도 엉엉 울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서 있습니다. 마치 영화의 마지막 화면처럼.

그러기까지 시인은 많이 괴로워한 것 같습니다. 지금 젊은 시인들 일부가 ‘만들어진 괴로움’ 또는 싸이버 화면에 ‘그려진 괴로움’으로 대치하고 있는 현상으로부터도 그는 외딴 괴로움의 유배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최영철 시집 『일광욕하는 가구』에 백석의 이름이 얹혀졌습니다. 나로서는 어느정도 이견도 있었으나 다른 이견들과 상쇄될 만한 시적 성취가 여간 아니었습니다. 한 5백년쯤 시인 노릇을 할 작정으로 한 50년의 시인이 되기 바랍니다. 백석처럼 번다한 시단(詩壇) 그런 곳이 아니라 변방 뜨내기에게 밤 소쩍새 소리나 한낮의 벙어리 산길 뻐꾸기 소리가 진언(眞言)일 것입니다. 축하합니다.

 

白樂晴  문학평론가

본심에 오른 일곱 권 모두가 취할 바가 있어 심사를 준비하는 일이 즐거웠다. 『그로테스크』는 작위적인 시들이 적지 않으나 특유의 기상(奇想)이 살아난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고, 『나는 거기에 있었다』는 도(道)의 경지를 노래하는 데 비해 도에 관한 사변에 머문 시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실제로 달관을 얻은 작품들도 만날 수 있었으며, 『바닷가 우체국』은 안이한 감동에 호소하는 일이 잦다 싶다가도 아름다운 서정이 가슴에 와닿곤 했다.

인상적인 작품이 더 많기로는 김진경과 김명인의 시집을 꼽을 만했다. 『슬픔의 힘』은 1부의 산문시들이 대체로 너무 산문적이어서 실망스러웠는데, 2부로 들어가며 「백제와당연화무늬」 「미소」 「협곡」 등 빼어난 작품이 잇따르고 있어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이런 보람은 3·4·5부에서도 대체로 지속되었지만 시인의 꾸준한 전진을 좀더 지켜보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길의 침묵』은 불필요하게 난해한 작품이 많은 것이 흠이었는데 「咸白山」 「사십 일」 등에 이르면서 그런 결함이 만만찮은 시적 성취의 부산물임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저 등나무꽃 그늘 아래」나 「달과 과학」에서 실직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시집의 전체적 흐름과 자연스럽게 결합되는 모습도 감명깊었다.

그러나 이번 심사에서 끝까지 힘들었던 것은 김기택과 최영철의 시집 중에서 고르는 일이었다. 『사무원』은 태작이 거의 없는 밀도높은 시집일뿐더러, 삶의 물질성 내지 육체성에 대한 이 시인의 끈질긴 탐구가 새 경지에 이른 면모가 보인다. 예컨대 「발자국1」에서 신체성의 제약에 대한 인식이 공(空)의 깨달음과 절묘하게 일치하는데, 「발자국2」에서는 눈 덮인 아름다운 겨울산을 배경으로 몸뚱이를 지닌 생명의 고달픔과 위태로움이 부각된다. 동시에 실질적으로 ‘발가락’ 연작에 해당할 「우주인」에서는 물질이 중력의 제약을 받는 이 진토가 곧 낙토일 수 있음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비린내」 「포장마차에서」 「어항 유리벽에 붙어 있는 낙지들아」 등도 따로따로 잘 읽히는 시들이면서, 함께 읽을 때 시인의 복합적 인식이 더욱 빛을 발한다. ‘신생아’ 연작이나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같은 시에서는 새로운 경험의 영역이 열림도 보이는데, 앞으로 한층 다양한 작품세계가 개진되기를 기대한다.

최영철 시집은 더러 허술한 데도 있다. 그러나 「20세기 공로패」에서 “길 없는 길/가락 없는 청맹과니의 고개 넘어오며/나 비로소 득음했으니/너에게 상을 준다 20세기여/이렇게 만신창이로 허덕거린 사이/나는 다 망가져 처음으로 돌아왔다”라고 자괴하며 자부했듯이, 이번 시집에는 오랜 방황과 피폐 끝에 새로이 얻은 통찰과 싱싱한 힘이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이어지는 「21세기 임명장」의 멋진 결말─“잠시 떠맡은 해 별 풀 달/그냥 그 자리 둥실 떠 있기를”─에서도 그의 득음을 실감할 수 있으며, 표제작 「일광욕하는 가구」 또한 일상의 “풀죽고 곰팡이 슨 허섭스레기”가 평범한 햇살을 쬘 때 기적처럼 찾아오는 갱생을 증언해준다. 그밖에도 이 시집의 내용은 다양하며 풍부하다. ‘푸조나무 아래’ 연작 중의 서정적 절창들이나 「박새」 「失語」 등등이 각기 다른 미덕을 지녔다. 마지막 남은 두 시집 중 나는 결국 『일광욕하는 가구』 쪽으로 기울었다.

 

黃東奎  시인

백석문학상 심사를 위해 보내온 7권의 시집을 찬찬히 읽으며 우리 시의 수준이 참 높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심사하는 도중에도 말이 나왔지만, 그 어느 시집이 뽑혀도 무난할 듯싶었다. 그중 세 시집에 대한 얘기를 함으로써 심사평을 대신하기로 하자.

안도현은 평소 내가 아껴 읽는 시인이다. 이번의 『바닷가 우체국』도 다른 시집들과 비교할 때 떨어지기는커녕 돋보이는 시집이다. 그는 세상을 따뜻한 눈을 가지고 보고 있고 세상은 그의 눈에 들어와 따뜻한 시가 되곤 한다. 아포리즘을 좀 과도하게 쓰지만 그의 아포리즘은 대체적으로 살아있다. 그러나 글만 쓰며 사는 전업시인으로서의 고됨이 시를 여하튼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그를 몰고 가는 흔적이 눈에 띈다. 제일 앞에 실린 「바닷가 우체국」도 그렇지만 세번째로 실린 짧은 시를 읽어보자.

 

네가 떠난 뒤에 바다는 눈이 퉁퉁 부어올랐다

해변의 나리꽃도 덩달아 눈자위가 붉어졌다

너를 잊으려고 나는 너의 사진을 자꾸 들여다보았다

─「연락선」 전문

 

마지막 행의 ‘멋진’ 반어법만 보고도 추측할 수 있지만, 이 시의 제목이 ‘연락선’임을 보면 그가 얼마나 시를 그럴듯하게 만들려고 하는가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뛰어난 시인이다. 독자를 찾아나서는 일은 시인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틈에 잃는 것도 큼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김기택은 지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들은 재미있게 읽힌다. 그리고 지난번 시집까지 꽉 채우고 있던 ‘머리로 쓰는 시’를 벗어나려고 한 흔적도 여러 군데 보인다. 그러나 「겨울을 기다림」 「우주인」 들을 읽으면 금시 알 수 있지만, 아직도 그의 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논리이며, 체험에서 나왔다기보다는 머리로 만든 재미가 많다. 시의 무게중심을 머리에서 척추 쪽으로 조금 더 옮기면 정말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두 흐름은 현재 우리 시에 유행하고 있는 좋지 않는 흐름들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들자면 도통(道通)한 자의 시가 있다. 나르씨시즘 혹은 유아주의(唯我主義, solipsism)로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위 두 시인이 흐름에 빠진 정도는 치명적은 아니다. 삶을 녹이는 따뜻함(안도현), 꼿꼿이 선 정신(김기택) 등의 장처(長處)들이 약점을 누르고 남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 둘 가운데 하나가 수상자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최영철의 『일광욕하는 가구』는 위 두 사람의 시보다 스마트하지 않다. 멋지게 빠진 시를 한 편 고르자면 힘들 지경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도처에 삶에서 나온 끈적거림과 전율이 있다. 일부러 눈을 감고 무작위로 책을 펼치니 「失語」가 나온다.

 

집 나간 부모 찾으러 티브이에 나와

정작 말 한마디 못하고 있는

아이의 무심한 눈빛이 두려워 고개를 돌렸다

(…)

열반을 앞둔 노스님의 얼굴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어떤 체념이

내 양 뺨을 휘갈기고 갔다

─「失語」 부분

 

좀 앞으로 펼치니 「선미OB」가 펼쳐진다.

 

버스 내리면 보이는 선미OB

아무 장식 없이 작은 간판 하나 달랑 걸린 집

이상해라 안이 보이지 않게 닫힌 문 위로

꼬마 전구 아슬하게 불 밝히고 있는 집

지날 때마다 바라본다

꽃들은 피어 있을까

사내들 목마른 가슴에 물을 길어주는 양지꽃

환하게 지저귀고 있을까

노래하느라 부리만 길어진 입술

날지 못해 가려운 겨드랑이 다듬고 있을까

─「선미OB」 부분

 

몸 전체로 파악하려는 삶, 그 삶의 슬픔과 그것을 보듬는 따스한 눈길이 있다. 그리고 구체적이다. 최영철은 앞에서 말한 세 유행을 따르지 않는 소극적 강점과 구체적인 언술로 체험을 시로 만든, 그 시가 깊이와 따뜻함을 획득한, 적극적인 강점을 가지고 있다. 머물지 말고 대성하기 바란다.

 

 

수상 소감

 

다시 세상 속으로

최영철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 중학시절의 어느 가을날 아침이 생각났습니다. 게으른 열등생이었던 저는 그날 지각을 해서 교문 입구에서 벌을 서고 있었는데 마침 전체 조례를 하고 있던 운동장의 스피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훈육선생님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달려가서 상장을 받아들었는데 그제야 ‘아 참, 나는 지금 벌을 서는 중이었지’ 하는 생각에 다시 종전의 자리로 가 섰던 적이 있습니다.

시의 자리가 썰렁해지고 시인으로서의 자존을 지키기가 무척 힘들어졌습니다. 변방에서, 변방의 장르가 되어가는 시를 붙잡고 사는 저는 그 가을날의 백일장 시상식을 가끔 생각합니다. 그 상은 지각한 저의 죄를 면죄해주지도 못했으며 다시는 지각을 하는 일이 없도록 저를 깨우쳐주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간밤의 잡다한 독서와 상념으로 지각하는 횟수만 더 늘어날 뿐이었지요.

저는 이 상이 가진 광영 때문에 자칫 벌서던 저의 본분을 잃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 광영에 빠져 희희낙락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다만 이것이 저를 시로부터 인간으로부터 영영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었으면 합니다.

엊그제 강진 가는 길에 창원 고성 삼천포 통영 등의 나들목을 지나며 65년 전쯤에 이 길을 지나갔을 백석을 생각했습니다. 식민지 조국에 태어났고 식민지 조국에서 교육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석이 붙잡고 있었던 것은 우리의 민족정신이었습니다. 백석의 시가, 제국주의의 발길에 짓밟혀 훼손되고 있는 중앙을 벗어나 ‘南行詩抄’ ‘咸州詩抄’ ‘西行詩抄’ 등의 연작시에서 보듯이 한민족의 원형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변방을 향해 있다는 것은 오늘 우리 문학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중심부의 문학은 대체로 가볍고 얇아져서 진지한 질문이 조롱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백석은 식민지의 비탄과 울분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변방이 보유하고 있는 구체적 삶의 진정성에서 세상의 희망을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중심부가 안고 있는 문제를 상쇄하고 치유할 대안으로서의 변방을 걸어간 백석의 뒤를 저는 지금 따라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 길은 백석이 오래 전에 노래한 대로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統營─南行詩抄2」) 곳이고 “괴나리봇짐 벗고 땃불 놓고 앉어/담배 한대 피우고 싶은”(「昌原道─南行詩抄1」) 아주 진하고도 여유로운 곳입니다.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三千浦─南行詩抄4」)라는 감탄에서 보듯이 그 가난과 무명이 오히려 힘이 되기도 합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어제 저녁 이 시의 한 부분을 중얼거리며 방 하나 부엌 하나로 올망졸망 살고 있는 골목길을 지나왔습니다. 이 작은 길에는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 훈훈한 내음이 가득합니다. 죽겠다고 악쓰는 소리와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다시 자리 털고 일어서는 인생들이 즐비합니다.

60년 전쯤에 백석이 포착한 풍경이 60년 후의 저의 집 골목에도 있다는 사실이 눈물겹고 고마웠습니다. 그것은 구질구질하고 권태로운 일상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는 끈질긴 생의 애착과 내일에 대한 믿음이 피워올린 훈기 넘치는 풍경입니다.

어떤 지향점이든 열망이 지워지고 탄력을 잃은 삶과 시는 퍼석퍼석한 가루로 흩날려버리고 말 것입니다. 축축하고 진득해져서 다시 세상 속으로 스며들고 싶습니다. 벌서는 자리의 그 부끄럽고 황량한 위기감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아름답게 생을 마감한 자야 여사와 창작과비평사와 심사위원들과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해준 부산에 감사드립니다.